엔리케 소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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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nrique Sorrel.jpg
이름
필리도르 엔리케 소렐 콘트라레스
(Filidor Enrique Sorrel Contrares)
생년월일
1912년 2월 3일
사망년월일
1991년 10월 20일 (향년 79세)
국적
파일:칠레 국기.svg 칠레
출신지
리나레스
포지션
아웃사이드 라이트 포워드
신체조건
172cm
소속팀
아우닥스 이탈리아노 (1929-1934)
콜로-콜로 (1934-1945)
국가대표
10경기 5골 (1935-1941)
감독
콜로-콜로 (1947-1950)
산루이스 킬로타 (1953)



1. 개요
2. 생애[1]
2.1. 선수 생활
2.2. 감독
3. 뒷이야기
4. 수상
4.1. 선수
4.1.1. 클럽
4.2. 감독



1. 개요[편집]


칠레의 전 축구 감독


2. 생애[2][편집]



2.1. 선수 생활[편집]



2.1.1. 클럽[편집]


1929년, 소렐은 아우닥스 이탈리아노와 계약을 하며 선수 생활을 시작했고 1933년에 9개월간 있었던 아우닥스의 아메리카 대륙 투어에도 참여했다.

1934년, 소렐은 콜로-콜로로 이적했고 데뷔 시즌에 8골을 넣었다. 이후에도 소렐은 꾸준히 득점을 올리고 콜로-콜로의 성공가도에 힘을 보탰지만 1944년에는 단 한 골밖에 못 넣는 부진에 빠졌다.


2.1.2. 국가대표[편집]


1935년의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 소렐은 첫 경기인 아르헨티나전에 나섰지만 칠레는 아르헨티나에 1대4로 패했다. 이후에 소렐에게 출전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고 칠레는 남은 2경기도 모두 패하며 4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한 대회를 건너뛴 소렐은 1939년 대회에선 4경기를 모두 뛰었고 2골을 넣었다. 소렐은 파라과이와의 첫 경기에서 대회 첫 골을 넣었지만 칠레는 5골을 실점하며 1대5로 역전패했다. 그리고 소렐은 에콰도르를 상대로 페널티 킥 골을 넣어 칠레가 4대1 승리를 챙기는 데에 기여했다. 하지만 칠레는 이 대회에서도 1승 3패로 4위에 그쳤다.

소렐은 자국에서 열린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 참가했고 에콰도르전에서 2골을 넣었다. 이 대회에서 칠레가 아르헨티나에 0대1로 패한 경기가 소렐의 마지막 대표팀 경기였으며 칠레는 대회 3위의 성적을 냈다.


2.2. 감독[편집]


선수 은퇴 후 소렐은 1947년, 콜로-콜로의 감독이 되어 첫 시즌에 콜로-콜로를 칠레 프리메라 디비시온에서 우승시켰다.

1955년, 소렐은 2부 리그에 위치했던 산루이스 킬로타(San Luis Quillota)의 감독이 되었고 시즌 막바지에 승격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킬로타의 마지막 경기는 팬들로 인해 경기가 중단되었다. 반면, 1위 경쟁팀 라칼레라(Union La Calera)도 승리를 챙기지 못해 킬로타의 1위와 승격이 확정되었고 킬로타는 처음으로 프리메라 디비시온 무대에 섰다.


3. 뒷이야기[편집]


  • 소렐은 티그레(Tigre)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경기에 항상 흰색 모자를 쓰고 출전했다.


4. 수상[편집]



4.1. 선수[편집]



4.1.1. 클럽[편집]




4.2. 감독[편집]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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