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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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오근태(吳根泰)
자/호
성범(聖範)/죽포(竹圃)
본관
해주 오씨
생몰
1882년 ~ 1944년 1월 4일
출생지
강원도 화천군 화천면 풍산리
사망지
중국 지린성 영안현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오근태는 1882년생이며 강원도 화천군 화천면 풍산리 출신이다. 그는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1917년경 봉천성 장백현으로 이주했으며, 1918년 현립 제2정몽학교(正蒙學校)에서 교사를 역임했다. 이후 1919년 7월 무송현으로 이전하여 흥업단(興業團)에 참가했으며, 1914년 대종교에 입교하여 시교원(施敎員)으로 활동하였고, 1918년에 참교(參敎), 1924년에는 지교(知敎)로 임명되어 길림성 영안현으로 옮겨 포교활동에 전념했다.

그 뒤 1935년에 상교(尙敎), 1942년에는 정교(正敎)가 되어 대형(大兄)의 호를 받기까지 18년 동안 총본사(總本司)의 전범(典範)·전강(典講)·전리(典理) 등 요직을 맡아 헌신했다. 한편, 홍범규제수정위원(弘範規制修正委員)과 경의원 조직위원(經議院組織委員)의 직무를 맡았으며, 교적(敎籍) 간행을 위해서도 많은 활동을 하였다. 1942년 10월 천전건축주비회(天殿建築籌備會)가 결성되자 총무위원이 되어 활약했다.

그러나 1942년 11월 19일 조선에서 조선어학회 사건이 발발한 후 대종교 교주 윤세복이 이 사건에 연루되면서 조선과 만주 각지에서 다수의 대종교 지도자들이 검거되었다. 이때 오근태는 영안현 와룡둔에서 체포되어 영안현 경무과에 설치된 특별취조본부로 이송되었으며, 이곳에서 약 4개월 동안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그 후 1943년 3월 말경에 목단강 경무처와 액하(掖河) 감옥에 이감되어, 3개월 동안 목단강성 경무청 특무과에서 취조를 당하였다. 그리고 동년 7∼9월에는 목단강 고등검찰청에서 취조를 당하였다. 결국 1944년 1월 4일 보석출감 후 얼마 안가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오근태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