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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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오학수(吳學洙)
생몰
1885년 7월 10일 ~ ?
출생지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염호리
사망지
미상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오학수는 1885년 7월 10일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염호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신민회에 가담하여 계몽운동을 전개했지만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뒤 미결수 신분으로 옥고를 치르다 1913년 3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동지 99명과 함께 무죄 방면되었다.

그 후 1919년 3월 정주 곽산면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한 뒤 만주 안동현으로 피신하여 안병찬, 조재건(趙在健), 함석은(咸錫殷), 지중진(池仲振) 등과 함께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을 조직했으며, 김승만(金承萬)·오순근(吳淳根)·김두만(金斗萬)·오능조·이영식(李英植)·박준근·김시점(金時漸)·장재순(張裁淳)·신기갑·김찬성(金燦星) 등과 함께 안동현 임시의사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1920년에는 김시점·김승만등과 더불어 대한청년단연합회를 조직하여 통신부장으로서 총재 안병찬, 부총재 김찬성 등과 함께 국외에 근거를 두고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동년 6월에는 대한청년단연합회 의용대와 대한독립단이 합류하여 광복군총영을 조직하고 본격적인 무장항일투쟁에 나섰다. 동년 7월 상순경, 그는 영장 오동진의 명을 받아 지중진(池仲振)과 함께 국내에 무기를 반입하려고 임시정부 안동교통 사무국인 이륭양행(怡隆洋行)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파원 이유필(李裕弼)·홍리(洪利) 등과 함께 머무르고 있을 때 일경의 습격을 받아 전원이 중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1921년 5월 9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내란죄명으로 금고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1923년 10월 20일에 가출옥하였다. 1927년 12월에는 평양에서 재만동포옹호동맹(在滿同胞擁護同盟)을 조직하고 조만식·정세윤(鄭世胤)·이대영(李大英) 등과 함께 실행위원에 선임되어 재만동포의 권익 옹호를 위하여 만전을 기하였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오학수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