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르겐 유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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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축구인


파일:Jørgen Juve.jpg



이름
외르겐 유베
Jørgen Juve
출생
1906년 11월 22일 /
노르웨이 포르스그룬
사망
1983년 4월 12일 (향년 76세)
노르웨이 오슬로
국적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노르웨이
직업
축구선수(스트라이커, 풀백 / 은퇴)
작가
신체
181cm | 78kg
소속
선수
IF 우레드 (1923~1926)
륀 1896 FK (1926~1930)
FC 바젤 (1930~1931)
륀 1896 FK (1931~1938)
감독
FK 보되/글림트 (1939)
몰데 FK (1948)
국가대표
45경기 33골[1] (노르웨이 / 1928~1937)



1. 개요
2. 생애[2]
2.1. 어린 시절
2.2. 선수 생활
2.3. 작가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4. 사생활
5. 뒷이야기
6. 수상
6.1. 선수
6.1.1. 클럽
6.1.2. 국가대표



1. 개요[편집]


노르웨이의 전 축구 감독, 작가.


2. 생애[3][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외르겐 유베는 노르웨이의 포르스그룬(Porsgrunn) 출신이다. 아버지 올레 마르틴 유베(Ole Martin Juve)는 무두장이였고 어머니 마리 푀네르(Marie Pøhner)와의 사이에서 1906년에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두 남동생들은 나중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세 누이들은 결혼해서 노르웨이에 정착했다.


2.2. 선수 생활[편집]



2.2.1. 클럽[편집]


유베는 1923년부터 고향 포르스그룬을 연고로 하는 IF 우레드(IF Uræd)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1926년, 유베는 오슬로의 륀 1896 FK(Lyn 1896 FK)에서 뛰기 시작했고 1928년의 노르웨이 컵 준우승을 거뒀다.

1930-31 시즌에 유베는 스위스의 FC 바젤에서 12경기 출전, 10골을 기록하기도 했고 다시 륀으로 돌아왔다.

유베는 1938년까지 륀에서 활동하면서 노르웨이에서 처음 치러지는 최상위 리그 엘리테세리엔의 첫 시즌을 보냈고 륀은 재경기에서 0대4로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2.2.2. 국가대표[편집]


유베는 1928년부터 1937년까지 노르웨이 대표팀에서 뛰었고 33골로 은퇴한지 80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노르웨이 대표팀의 역대 최다 득점자로 남아있다.

그의 국가대표팀 첫 경기는 1928년 6월 3일에 있었던 핀란드전이었고 1929년 6월 12일, 네덜란드를 상대로 4경기만에 첫 득점에 성공했다. 유베는 첫 득점으론 성에 차지 않았는지 네덜란드를 상대로 해트 트릭을 기록했고 노르웨이는 유베의 활약 덕분에 4대4로 비겼다.

유베는 1936년 올림픽에서 노르웨이가 동메달[4]을 딸 당시 주장이었다. 노르웨이는 터키독일[5]을 연파하고 4강에 올랐다. 4강 상대는 이탈리아. 연장까지 가는 접전을 펼쳤지만 노르웨이는 이탈리아에 1대2로 패해 결승 진출에 실패했고 동메달 결정전에서 폴란드를 3대2로 잡고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유베는 4경기에 모두 출전했지만 골을 기록하진 못했다.

유베의 대표팀 마지막 출전 경기는 1937년 6월 13일의 덴마크전이었고 노르웨이는 1대5로 대패했다.

하지만 유베는 FIFA 월드컵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지역예선에서도 뛰지 못했고 본선 엔트리에는 들었지만 벤치에서 이탈리아에 올림픽때와 비슷하게 연장전에서 팀이 패하는 것을 지켜봐야했다.

유베는 45경기 중 22경기에 스트라이커로 뛰었고 나머지는 풀백으로 뛰었다.


2.3. 작가[편집]


유베는 1931년, 바젤에서 법학 학위를 취득했고 나중에는 저널리스트작가로 활동했다. 그는 1928년부터 1934년까지 일간 신문과 1934년부터 1940년까지 티덴스 테인(Tidens Tegn)의 스포츠 편집자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유베는 주간지 브라그드[6]를 창간했다. 1941년 스톡홀름으로 이사하여 노르게스뉘트(Norges-Nytt) 잡지를 편집했다. 1942년에 그는 런던을 여행했고 나중에는 뉴욕을 여행했다.

그는 다시 1945년부터 일간 신문의 편집자로 일했고 이 해에 전설적인 피겨 스케이터 소냐 헤니를 인터뷰하기도 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1978년에 발행된 Øyeblikk(순간)이 있다. 이 책에서 그는 1936년 동계 올림픽에서 비르게르 루드(Birger Ruud)가 남자 다운힐에서 우승하고 랄리아 쇼우 닐센(Laila Schou Nilsen)이 여자 다운힐에서 우승한 것과 같은 기억에 남는 순간을 서술했다. 또한 1936년에 있었던 독일과의 축구 경기에서 그는 히틀러가 나타났을 때 일부 독일 선수들이 경기를 멈추고 경례를 했던 것을 회상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편집]


스트라이커의 위치에서는 공을 소유하는 기술이 아니라 힘이 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할 수도 있다. 스트라이커로서 유베는 헤딩을 잘했고, 뛰어난 스피드와 강력한 슛을 가졌다. 수비수로서 유베는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는 패스와 뛰어난 "게임 리딩 능력으로 스스로를 차별화시켰으며 수비에서 자신의 의무를 확고하게 알고 있었다.

유베는 노르웨이의 초창기 최고급 축구 스타로 평가받는다. 2006년, 유베의 탄생 100주년엔 유베가 노르웨이 역사상 가장 뛰어난 급의 선수였다는 칭찬이 줄을 잇기도 했다.


4. 사생활[편집]


유베는 1932년 에르나 리베르그(Erna Riberg)와 결혼, 자녀 둘을 뒀지만 이혼했다. 그는 나중에 심리학자 에바 뢰이네(Eva Røine)와 결혼했고 딸 하나를 낳았다. 손녀 토네 유베(Tone Juve)는 포크 뮤지션으로 활동하고 있다.


5. 뒷이야기[편집]


  • 유베의 성은 그의 할아버지가 태어난 로르달(Lårdal)의 유베[7] 농장에서 유래되었다.
  • 유베의 어린 시절 친구 중에는 작곡가 클라우스 에게(Klaus Egge)가 있었다.


6. 수상[편집]



6.1. 선수[편집]



6.1.1. 클럽[편집]


  • 엘리테세리엔 준우승 1회: 1937-38(륀 1896 FK)
  • 노르웨이 컵 준우승 1회: 1928(륀 1896 FK)
  • 오슬로 챔피언십 우승 4회: 1930, 1935, 1936, 1937(륀 1896 FK)


6.1.2. 국가대표[편집]



[1] 노르웨이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다 득점.[2] 출처: 위키백과, 11v11[3] 출처: 위키백과, 11v11[4] 2024-04-24 23:19:13 현재까지 노르웨이 대표팀의 유일한 국제대회 메달이다.[5] 이 경기를 관람한 관중들 사이엔 아돌프 히틀러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있었다. 그들이 본 처음이자 마지막 축구 경기였다. 그리고 이 경기의 패배로 인해 당시 독일 대표팀 감독이었던 오토 네르츠는 해임되었다.[6] Bragd. 한국어의 뜻은 그 날이다.[7] Juve. 혹은 Djuve로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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