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준(건축가)/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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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문성 논란
1.1. 오스만의 파리 개조에 대한 지나친 단순화
1.2. 이벤트 밀도 개념
1.3. 귄터 니츠케를 잘못 인용
1.4. 가우디의 역현수선 아치
1.5. 고대문명과 전염병에 대한 잘못된 설명
1.6. 자기 표절 의혹
1.7. 트램 관련 오개념 및 편향적인 주장
2. 언론에서 잘못된 정보로 일반인을 호도하는 문제
2.1. "온돌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 발언
2.2. 공간과 권력에 대한 실험의 오류



1. 전문성 논란[편집]


그의 대중매체 기고문이나 방송에서의 발언 등에서 건축 분야의 지식에 대한 오류나 잘못된 인용 등의 문제가 발견되곤 한다. 유현준 교수가 한 분야의 전문가로서 대중과 폭넓게 접하고 있는 만큼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기에 이런 부분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임에는 틀림없다.

후술한 사항들은 다양한 원인이 존재할 수 있는 현상들에서 하나의 원인을 확대해석하여 'a라는 현상은 b로 인해 일어난 것'이라는 듯한 그의 특유한 화법으로 인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해하기 쉬운 대중친화적인 전달을 가능하게도 하나 때론 각자의 해석에 따라 다른 정보를 받아들이게하는 양날의 검일 수 있는 화법이다.

문서명은 "논란"으로 되어있지만 논란이라기보다는 유현준 교수가 말한 내용의 오류에 관한 팩트체크라고 보는 것이 옳다. 유현준 교수가 사회에 논란을 불러올 정도로 물의를 일으킨 적은 없기 때문이다. 굳이 따지자면 건축가로서 자질문제보다 정치적 성향을 이유로 가끔씩 싫어하는 사람이 보이는 정도다.

1.1. 오스만의 파리 개조에 대한 지나친 단순화[편집]


유현준 교수는 중앙일보 기고문#에서 오스만(Haussmann)의 파리 개조 계획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쓴다. 알쓸신잡2 영월편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이야기했는데[1], 이것은 그가 오스만의 파리 개조에 대해 충분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나폴레옹 3세 시절에 오스만 시장이 파리를 방사상 구조로 바꾸게 된다. 12개의 직선 간선도로가 개선문으로 모여드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런 설계가 나온 이유는 프랑스 대혁명 때문이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때 시민봉기로 인해 수백 년 지속된 왕권이 무너졌다. 당연히 이후에 권력을 잡은 자는 시민봉기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적은 수의 군대로 시민봉기를 통제해야 했다. 그래서 나온 디자인이 방사상 구조이다. 파리에서 시민이 봉기를 하면 12개의 간선도로로 쏟아져 나오고 이때 개선문 지붕에 대포만 설치하면 적은 수의 군대로 시민을 제압할 수 있게 된다. 이유는 순수하지 못했지만 이러한 직선의 도로망 덕분에 파리는 유럽의 어느 도시보다도 빠르고 효율적인 직선의 도로망 체계를 가지게 되었다.


여기서 유현준 교수는 오스만의 파리 개조에 대해 하나의 오해와 하나의 성급한 추론을 하고 있다. 하나의 오해는 오스만이 파리를 방사상 구조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오스만의 파리 개조의 결과물을 사진으로 보여줄 때 흔히 개선문 주변의 방사상 도로를 보여주곤 하기 때문에 이 사진만 본 사람들은 오스만의 계획이 랑팡(L'Enfant)의 워싱턴 DC 계획처럼 방사상의 구조가 반복되는 계획으로 착각하기 쉬운데 (아니면 오스만의 계획과 랑팡의 계획을 혼동하거나), 오스만의 boulevard들은 방사형이라기보다는 필요에 따라 파리 이곳저곳에 건설되었다#.

하나의 성급한 추론은 오스만의 파리 계획이 시민 봉기를 두려워한 이유에서라는 것이다. 루이스 멈포드(Lewis Mumford) 이후 오스만의 파리 계획의 주된 목적이 시민 봉기의 원활한 진압 때문이라는 견해가 널리 퍼졌지만, 그것이 적어도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Peter Hall은 오스만의 계획을 이야기할 때 시민 봉기 진압은 교통 소통 개선, 도시 건강 문제 개선, 기념비적 요소 도입과 함께 여러 이유 중 하나로 이야기한다. 당장 중세 이래 계획적인 개발과는 거리가 멀었던 파리 시의 도로 체계는 가히 혼란 그 자체였고,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이 여기저기 집을 짓고 생활했던 탓에 도로의 폭이나 선형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게다가 마차의 보급과 자동차의 개발로 도로가 수용할 수 있는 교통량이 점점 한계를 보였기 때문에 도로정비는 시급한 문제였다. 따라서 이 시기 파리 시의 대대적인 도로 정비는 오스만이 아니었어도 어떤 도시공학자라도 추진했을 사업이며, 그런 맥락에서 보듯 제일의 목표는 역시 도로체계의 개선이었다.

They would simultaneously achieve several key objectives: they would free up traffic, give access to the new [train] stations, make the suburbs accessible, clear slums to make the city healthier, create a monumental city that would be the envy of the civilized works and - not least - guard the city against demonstrations and civil disturbances. (Hall 1998 Cities in Civilization. p718).


오스만의 계획의 규모를 감안하면, 그의 계획이 복합적인 이유에서 생겨났다고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다. 그리고 오스만을 지원한 나폴레옹 3세는 대중의 인기가 주된 정치적 자산이었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더더욱 그러하다. 오스만의 계획을 전적으로 군사적인 관점에서 보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다. 그리고 오스만의 계획에 군사적인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유현준 교수가 기고문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개선문 지붕에 대포만 설치하면"과 같은 방식을 겨냥하고 대로(boulevard)를 건설한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했듯 오스만의 대로는 이곳저곳에 훨씬 더 다양하게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당장 파리 지도만 살펴봐도 방사형 집중 구조의 도로는 개선문 일대가 거의 유일하고 대부분 사방팔방으로 대로가 뻗어져 있어 어떠한 특징이나 통일성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의 상황은 오히려 반대로 돌아갔는데, 오스만의 개조 이후 시민 봉기군인 파리 코뮨이 몇몇 대로의 결절점을 요새화했지만 진압군은 소로를 이용하여 이들을 우회하여 쉽게 진압하였다#.

따라서 "교통 개선, 환기, 채광 등 여러 목적이 있지만 시민 소요의 원활한 진압이라는 목적도 있었다는 학계의 주장도 있다."고 서술하는 것이 사실관계에 보다 부합했을 것이다. 12개 방사상 도로 같은 이야기는 빼고 말이다. 물론 도시계획사는 유현준 교수의 전공분야가 아니지만, 오스만의 도시계획에 대한 조사가 더 필요해보인다.


1.2. 이벤트 밀도 개념[편집]


그의 책,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해 조우석이 쓴 서평#에 대해, 유현준 교수는 데일리안에 반론을 게재했다#. 이 반론문에서 자신의 책의 독창성을 주장하면서 유현준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내 책에 나온 걷고 싶은 거리를 분석하는 “이벤트 밀도”와 “공간의 속도”를 규정하는 ‘개념’과 ‘공식’은 이전에는 없던 독창적인 분석 방법이고 이는 이미 토지주택공사의 발표에서 인정을 받아 새로이 디자인되는 도시에 적용하려는 독창성이 돋보이는 이론이다.


하지만 그가 주장하는 '이벤트 밀도'는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에 따르면 이벤트 밀도는 '100m당 점포 입구의 개수로 정의된다#. 하지만 가로에 면한 상점 등의 입구의 개수는 공공 공간의 질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중요하게 사용되어온 변수이다.[2] 독창성을 주장하기에는 해당 분야에 대한 문헌조사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논문#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기본적인 문헌조사가 없다. 논문에 포함된 10개의 참고문헌들은 본문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피어 리뷰를 거친 논문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이 한 편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의 저서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제시하는 또다른 '독창'적인 개념인 "공간의 속도"를 다룬 논문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인 문헌조사가 되어있지 않고, 논문에 수록된 참고문헌은 본문에서 다루지 않고 있다.


1.3. 귄터 니츠케를 잘못 인용[편집]


알쓸신잡 시즌 2, 1회에서 유현준 교수는 도산서원의 공간을 설명하며 "건터 니슈케라는 사람이 쓴 논문이 있는데"라고 말하며 귄터 니츠케(Günter Nitschke)의 "Time is Money - Space is Money"를 언급한다. 하지만 귄터 니츠케가 쓴 저 글은 논문이 아니고 귄터 니츠케의 "From Shinto to Ando : studies in architectural anthropology in Japan"라는 단행본에 실린 에세이이다. 그리고 이 글을 언급하면서 유현준 교수는 이런 설명을 한다.

공간이 넓으면 시간을 줄이는 쪽으로 건축이 발달한대요. 미국은 공간이 넓잖아요. 시간을 줄이는 고속도로가 발달했어요. 먼 거리를 빨리 갈 수 있게끔 [...] 반대로 공간이 좁으면 시간을 딜레이시키는 쪽으로 가요. 일본같이. 좁은 공간에서 넓어보이게 하려면 길을 꼬불꼬불하게 만들면 돼요"


하지만 귄터 니츠케는 이런 주장에 대한 근거로 인용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한 사람인데, 그의 전공 분야가 일본 정원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미국 도시와 일본 도시의 서로 다른 발전 양상을 비교하는데 니츠케를 인용하는 것은 엉뚱하다. 시청자로 하여금 마치 니츠케라는 해당 분야의 학자가 충분한 경험적 근거를 토대로 작성한 논문에 유현준 교수의 발언이 근거하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전문가가 보기에는 전혀 엉뚱한 사람이 엉뚱한 맥락에서 인용되었을 뿐이다.

그의 니츠케에 대한 오독은 그의 기고문#에서도 반복된다.

진입로가 복잡한 또 다른 이유는 건축이론가 귄터 니치케 이론으로 설명될 수 있다. 니치케에 따르면 미국처럼 공간이 넓은 곳에서는 시간거리를 줄이는 쪽으로 건축이 발달하고, 일본처럼 공간이 협소한 곳에서는 시간을 지연시켜서 공간을 심리적으로 커 보이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시간거리를 줄이는 고속도로가 발달했고, 일본은 좁은 공간을 넓게 느끼게 만들기 위해서 진입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 전통 찻집에 가보면 두세 평 남짓한 방에 들어가기 위해서 열 번 가까이 진입로가 틀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도 좁은 공간에서 살아야 하는 사례다. 좁은 집을 좀 더 넓게 느끼게 하려면 전체 공간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게 설계를 해야 한다. 좁다고 집의 모든 벽을 다 터버리면 오히려 더 좁게 느껴지게 된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머릿속으로 전체 공간을 그려보게 하면 공간이 실제보다 넓게 느껴진다.


귄터 니츠케가 마치 환경심리학자인 것처럼 인용되었다. 귄터 니치케의 저작은 진입로가 복잡하면 공간을 넓게 느끼는지에 대한 아무런 근거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는 일본과 미국의 공간 경험이 다르다는 에세이를 썼을 뿐이고, 실제로 공간이 복잡하면 더 넓게 느끼는지에 대해 아무런 경험적 결과를 제공한 바 없다. 잘못된 인용으로 독자를 오도하는 글쓰기이다.

공간의 형태 등의 조건이 지각된 공간의 크기(perceived spaciousness)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Stamps의 연구들을 보는 것이 훨씬 적절할 것이다. 물론 유현준 교수가 건축계획이나 환경심리학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지식이 별로 없기 때문에 이것을 잘 모르는 것은 이해할 필요가 있다.


1.4. 가우디의 역현수선 아치[편집]


알쓸신잡2 2회에서 유현준 교수는 가우디의 건축을 설명하며, 가우디가 줄을 늘어뜨려서 포물선을 만들고 그 '자연이 만든 완벽한 2차원 포물선'을 뒤집어 아치를 만들었다고 이야기하며, 그 방법을 생각해내고 구조로 바꾸는 선구적인 작업을 했다고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사실이 아니다.

첫 번째로 줄을 늘어뜨려서 만들어지는 곡선은 포물선(parabola)이 아닌 현수선(catenary)이며 두 곡선은 모양도 다를 뿐더러 구조적 성질도 다르다. 가우디의 역현수선 아치(inverted catenary arch) 모델은 건축 전공자들에게 대단히 유명한 모델로서 이 곡선이 현수선이지 포물선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흔히 함께 이야기되곤 한다. 역현수선 아치에 대해서는 이것을 참조하라

두 번째로 이 방송에서 유현준 교수는 가우디가 저러한 방법을 처음 생각해낸 선구자처럼 묘사하였으나, 이 방법은 가우디보다 200년 먼저 태어난 로버트 후크에게도 알려져있던 사실이었다[3].

그리고 이 방송에서 가우디가 그러한 현수선을 이용하여 설계한 것을 마치 자연을 닮은 모습으로 디자인하려고 했던 것처럼 설명하는데, 가우디가 현수선을 사용한 것은 복잡한 구조해석을 위한 방법으로 사용한 것이지 자연을 닮은 '모양'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현수선 아치의 독특한 구조적 성질이라든가, 포물선 아치와의 차이, 그리고 가우디가 현수 모델을 이용해서 구조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 등은 일반인에게도 대단히 흥미로운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제대로 풀어내었더라면 아주 흥미진진했을텐데, 이걸 포물선이라고 이야기해버리고 자연을 닮은 모습으로 디자인하려 했다고 하니 정말 안타까운 이야기. 물론 유현준 교수의 전문분야가 건축역사도 아니고 구조 분야도 아니라는 점은 감안해야할 필요가 있지만, 자신의 분야가 아니라면 대중매체에서 좀더 조심스럽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1.5. 고대문명과 전염병에 대한 잘못된 설명[편집]


2020.02.28 조선일보 "[유현준의 도시 이야기] 백신 예방주사가 만든 현대 도시", 2020.03.07. 중앙일보 "종교단체의 강적은 전염병…한곳에 못 모이면 권력 잃어", 2020.06.19. "KBS1 라디오 최경영의 경제쇼" 등에서 여러번에 걸쳐,

"전염병 때문에 초기 문명은 건조 기후대에서 발생했다. 건조한 기후는 전염병과 세균성 질병의 창궐을 막기에 유리하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하구 건조 기후대에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발생했고, 나일강 하구 건조 기후대에서 이집트 문명이 발생했다." 출처

"비가 적은 건조기후대는 그만큼 바이러스에 강한 환경을 제공한다. 그래서 인류 최초의 도시를 통한 문명발전은 건조기후대에서 발생했다. 메소포타미아강과 티그리스강 하구의 건조기후대에서 수메르 문명이 발생했고, 나일강 하구의 건조기후대에서 이집트 문명이 발생했다." https://news.joins.com/article/23724236

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신빙성에 크게 의심이 가는 얘기이다.

1.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는 지금은 건조한 사막 지역이지만 문명 발생 당시, 겨울에는 온난 다습, 여름에는 고온 건조한 지중해성 기후였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메소포타미아, 나일강 유역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고 불릴 정도로 기름진 지역이었고,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 나일강이 불규칙적으로 자주 범람해 문명 발생의 단초를 제공했던 곳임을 상기하자. 홍수 이후에는 수인성 전염병이 번성하기 쉬운 것이 상식이다. 게다가 교통의 요지라서 여러 민족이 교차, 접촉하는 지역이었다. 이는 오히려 전염병 발생에 유리한 환경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전염병은 기본적으로 건조, 다습을 가리지 않는다. 이집트사막화, 건조기후대가 된 14세기에도 페스트창궐카이로 인구 1/4~1/2이 사망했다고 한다.

2. 전염병 피하기가 유리해서 특정 지역에서 문명이 발생했다는 것은 근거가 없는 개인적 추론일 뿐이다. 그런데도 부정확한 역사 지식을 수차례에 걸쳐 대중에게 전달하고 있다. 4대 문명의 발생 원인은 1차적으로 비옥한 토지로 인한 농업생산성 증대, 어류자원의 풍부함, 교통의 편리성에서 먼저 찾는 게 일반적일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건조 기후는 목재 습득이나 낙농업에 불리하게 작용하고 오히려 호흡기 질환의 치명도를 상승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는 기후이다. 물론 유 교수의 말처럼 다습 기후에 비해 건조 기후가 전염병의 매개물인 곤충, , 각종 미생물 서식이 상대적으로 어려운 편이고 부패가 느리거나 오히려 미라화되는 환경인 것은 대부분 맞지만, 모든 전염병이 이들 원인에서 시작하는 것은 아니며, 특별한 매개물을 거치지 않는 단순 인간 사이의 비말 감염병이라면 어디서든 유행할 수 있다. 이는 코로나 사태만 봐도 확인된다.

1.6. 자기 표절 의혹[편집]


한국공간디자인학회 논문집 제6권 3호 통권17호에 실린 유현준 교수의 "보스턴 뉴버리 스트리트의 이벤트 밀도 분석"#은 같은 논문집 제6권 2호 통권16호에 실린 동일인의 "도심 內 걷고 싶은 거리의 이벤트 밀도 연구"#와 앞부분이 거의 동일하다.

"2.1 이벤트 밀도의 정의"와 "2.2 이벤트 밀도의 의미"는, 한국공간디자인학회 논문집 제6권 2호 통권16호에 실린 동일인의 "도심 內 걷고 싶은 거리의 이벤트 밀도 연구"#의 "2.2 이벤트 밀도의 정의"와 "2.3 이벤트 밀도의 의미"를 그대로 옮겨왔다. 또한 17호 논문의 표1은 16호 논문의 표1과 동일하다. 한편 두 논문의 "1.1 연구의 배경 및 목적"은 4개의 동일한 문장을 공유한다.

17호 논문의 해당 부분에서 16호 논문에 대해 따옴표는 물론 인용 표시는 되어있지 않다. 또한 17호 논문의 참고문헌에 16호 논문은 제시되어 있지 않다.


1.7. 트램 관련 오개념 및 편향적인 주장[편집]


https://youtu.be/-EZEtLkG1Pw?t=340

위 영상의 6분에서부터 보면 트램은 2종류가 있어요. 보통 보면 모노레일처럼 위로 떠서 가는 걸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저는 그건 절대 반대입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트램은 위로 떠서 가는 게 아니며 모노레일과 완전히 구분되는 개념이다. 즉 오개념을 설명한 것이다.

또한 이어서 왜냐면 모노레일 같은 게 위로 갔을 때 그림자도 드리우고 그런 게 지나가는 공간이 좋은 동네로 된 걸 제가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라고 밝혔다. 그러나 지상 모노레일로 지어진 대구 도시철도 3호선처럼 미관 문제 및 도심 단절 문제 등을 최소화하면서도 오히려 도시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한 것도 있다.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1) 트램의 오개념을 설명하고 (2) 지나치게 트램의 장점만을 부각해서 설명하고 (3) 트램 이외의 교통수단은 지나치게 단점만을 부각해서 마치 트램을 선악의 개념처럼 설명하였다.

교통수단은 선악의 개념이 아니라 각 도시의 교통수단별 수송분담률, 인구밀도, 지형, 노선규모, 시민들의 운전습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도시 상황에 맞게 취사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트램은 장점만을 부각하고 고가 전철은 단점만을 부각하면서 "절대 반대입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편향적인 의견이라고 볼 여지가 있다.

2. 언론에서 잘못된 정보로 일반인을 호도하는 문제[편집]



2.1. "온돌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 발언[편집]


SBS 교양 공식채널 달리에 2021년 1월 27일 업로드된 유현준의 판타집 개론에서 온돌로 인해 조선이 망했다는 발언을 하여 논란이 되었다. 유현준의 주장은 크게 다음과 같다.

  • 주장 1
온돌 때문에 단층의 집밖에 없는 조선시대는 도시 밀도가 낮아지고 그로 인해서 경제 활성화가 느리게 이루어졌고 화폐도 돌지 않았으니 망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조선에는 밀도가 낮아 5일장을 했고 고밀화된 도시는 매일매일이 장날이었다고 한다. 도시 밀도가 낮으니 화폐통화량이 1/5로 차이가 난다고 설명한다.

  • 주장 2
도시가 고밀화될수록 화폐 통화량이 많아지면서 부의 이동이 생기게 된다고 설명한다. 이런 신흥 부흥 계급이 생겨나고 계층 간의 선순환이 이루어지는데 밀도가 높은 도시에 신흥 부흥 계급이 정치와 종교를 견제하였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은 성공하고 동학혁명이 실패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공상을 교묘하게 섞어서 일반인들을 호도하는 것으로, 유교수가 영상 뒤에 사회학적으로 근거 없다고 하다가 다시 "건축가의 눈"으로 포장해서 다시 주장한다. 처음에는 자신있게 주장하다가 맞다는 건지 틀리다는 건지 자신없는 부분은 뒤에서 애매모호하게 주장하고 있으니 댓글의 반은 이런 얼토당토 하지 않는 말을 믿고 있는 분위기다.
이는 "아이스크림 판매율이 높아질수록 상어에게 사망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므로 아이스크림은 위험하다"라는 말과 비슷하다. 이는 인과관계와 상관관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며, 유교수의 논리대로라면 온돌이 없고 밀도가 높은 도시는 전부 선진국이 되어야 했었다.

  • 주장 1에 대한 반론
우선 사실 관계부터 알아보자면, 조선에 중층 거주건물이 없었던 것이 아니며, 주요 도시의 인구밀도 역시 그리 낮은 편이 아니였다. 한양의 경우 인구밀도가 현대 부산에 밀접하는 초고밀도 도시였고, 제2의 도시 개성의 경우 현대의 세종시, 제3의 도시 평양의 경우 현대의 제주도에 밀접하는 수준의 18세기 치고는 나쁘지 않은 인구밀도를 보이고 있었다.
문제점은 각 도시의 인구밀도보다는 전국적 규모에서의 도시화율에 있었는데, 이 도시화율은 후술하듯이 도시화율로 인해 상업이 발달하는 것이 아닌, 상업이 발달하였기에 도시화율이 증가하는 현상을 띈다. 즉 인과관계가 뒤집힌 것이다.
인구 밀도가 높아지면 상업의 발달로 화폐 통화량이 늘어나는 것은 맞다. 하지만 2차, 3차 산업처럼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은 노동력과 서비스를 위한 인구가 핵심이다 보니 모여 사는 게 중요하고 더불어 상업도 같이 발달하여 화폐 통화량이 늘어나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농경 산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평균 건폐율이 10%~30% 밖에 안되었을 정도로 농업 중심 국가여서 모여 사는 것보다 농사할 수 있는 땅에 마을을 이루고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4] 보부상이 5일마다 장을 열어서 여러 마을과 도시의 화폐를 통화시키고 있었으니 2차 3차 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화폐통화량이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농경사회였던 조선시대와 산업혁명 이후에 일어났던 프랑스 혁명 시대의 도시 인구 밀도를 비교하는 것은 산업의 발달 추이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년도만 비슷할 뿐 산업의 발달 추이는 고려하지 못한것. 결론은 도시의 밀도 때문에 상업이 발달한 게 아니라 산업의 발달 추이에 따라서 인구의 밀도, 화폐통화량, 상업 등등이 늘어나고 그 다음에 도시가 고밀화 되었다고 보인다.[5] 즉 주장하는 바의 전후 관계가 바뀐 것이다.

  • 주장 2에 대한 반론
유 교수의 주장대로 신흥 부흥 계급(부르주아) 세력이 프랑스 혁명에 결정적인 역할은 한 것은 맞으나 동학 농민 혁명에서 조선의 지주·부호로 구성된 향촌 세력[6]은 오히려 동학 농민 혁명을 방해하였다. 결론적으로 프랑스 혁명, 동학농민혁명에 많은 요인들이 있었지만 밀도 높은 도시는 프랑스 혁명, 동학농민혁명과 유의미한 관계가 없었고[7] 부르주아 세력의 요인만 따져 보아도 부르주아 세력이 어떤 가치관을 가졌는지 어떤 세력과 결탁했는지 차이 뿐이었다.


2.2. 공간과 권력에 대한 실험의 오류[편집]


똑같은 실험 영상이 2020.1.2에 tvN 인사이트(클립영상)에서 2021.1.23에 사피엔스 스튜디오(원본영상)에서 업로드되었는데 실험에 오류가 있었고 전문가 두 명이 실험 참가자의 대답을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유도하려고 하였다.

  • 영상 구성과 실험 방식
유현준 교수, 김정운 교수, 서현 교수, 최근호 교수가 영상의 앞부분에 공간과 권력의 관련성을 이야기를 하고 시작한다. 그리고 공간 심리 실험 설계는 지정좌석제에서 자율좌석제로 바뀐 회사에 찾아가서 막내 사원 자리가 어디인지 찾아보고 공간에 따라서 권력 바뀌었는지 질문하는 방식이다. 자율좌석제를 하고 있는 회사에서 유현준 교수와 김정운 교수는 어느 직급의 자리인지 맞추지 못한다. 2년 차 직원은 권력이 자리에 투영된 것으로 보이나 팀장은 고민하던 와중에 유현준 교수와 김정운 교수가 질문의 답을 유도하고 있다.

  • 실험 오류와 문제점
두 교수들이 경험상 관행 시 되어 오던 신입사원은 입구 쪽에 사장님은 제일 상석이고 팀장은 잘 안 보이는 자리가 아니어서 못 맞추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이 관행이라는 요인이 바뀌면 공간 심리 실험은 많은 부분 달라진다. 예를 들어서 일본의 세계적 건축가 안도 다다오는 직원들이 자신을 잘 볼 수 있게 1층에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있다. # 잘 보이는 자리에서 업무보고 전화하는 것도 다 들리는 자리라서 업무 파악을 한다. 안도 다다오는 정규 건축 수업을 안 들었던 사람이고 사무실에서 최고로 영향력 있는 사람의 자리이고 공간을 잘 이해하는 건축가이기에 의미 있는 사례라고 생각된다. 유 교수의 논리 대로라면 안도 다다오는 사무소에서 가장 낮은 권력의 소유자여야 하는데 이는 유 교수의 주장과 다르며 오히려 권위 있는 사람의 자리를 잘 보이는 곳에 만들었다. 공간 때문에 권력이 생기는 게 아니고 수 세기 동안 권력자들이 만들어 놓은 관행이나 문화, 권력자가 지향하는 사람과 사람 간의 질서적인 맥락이 학습되었던 것이다. 즉 지금까지 권력자가 사용하는 공간이 강화 학습 되었던 결과들을 가지고 마치 공간이 권력의 주체인 것 처럼 설명하고 질문하는데 이 실험의 인과관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증거 이다. H사의 수평적인 조직문화는 단순 자리만 자율적으로 바꿔서 된 것이 아니고 권력의 주체자가 어떤 식으로 던 자신의 권력을 돋보게 만들지 않고 좋은 것들을 독점하지 않고 선을 그어 놓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수평적인 조직문화는 단순 공간 배치보다 권력 주체자의 태도가 더 중요하다고 보인다.
그리고 실험에 2년 차 직원분의 무의적인 편안함. 팀장님의 불편함은 관행이 바뀌어서 오는 심리적 반응이라고 보인다. 교수들이 영향력을 행사하여 팀장님에게 원하는 질문을 눈치 주고 유도하고 있으니 팀장님의 답변에 의구심이 남을 수밖에 없다. [8]

  • 다른 언론에서 권력과 공간에 대한 설명 오류
2021년 3월 24일 달리 SBS 교양 공식 채널 유현준의 판타 집 개론에서 가운데 앉았다고 해서 "없던 권위가 생긴다" 하는데 자기 기만적인 말을 한것이며 유 교수의 논리대로면 말단 직원이 가운데 위치한 사장님 자리에 앉기만 하면 없던 권위가 생겨야 한다. 또한 이전 사무실 자리 설명과 정반대의 설명이 되는데 어쩔 때는 센터가 권위 있는 자리이고 어쩔 때는 안 보이는 자리가 권위 있는 자리라고 한다. 유 교수가 말하는 권력과 공간에 대한 논리는 일관성이 없고 예외적인 상황이 너무 많다. 다시 설명하지만 권위 주체자가 상황에 따라서 권력을 돋보이게 만들거나 좋은 자리를 독점하거나 선을 그어 놓아서 그 자리가 권위와 연결되어 강화 학습된 것일 뿐이다. 유 교수는 권력이 사람보다 공간에서 나온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는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다. 전문가도 그의 설명을 들으면 처음에는 헷갈이는데 이는 심리적 트릭으로 맥락적 사고가 만들어 질 때까지 예시를 계속해서 여러번 반복 설명하기 때문이다.


[1] 다만 이 경우에는 그런 얘기도 있다는 식으로 발언하였다.[2] 참고문헌 Merlino, K. R. (2011). Urban grain and the vibrancy of older neighbourhoods: Metrics and measures. Considering research: Reflecting upon current themes in architectural research, 477-488.
SEVTSUK, A., EKMEKCI, O., NIXON, F., & AMINDARBARI, R. (2013). Capturing Urban Intensity. In Conference on Computer-Aided Architectural Design Research in Asia (CAADRIA 2013) (Vol. 551, p. 560).
Palaiologou, G; Vaughan, L; (2014) The sociability of the street interface – revisiting West Village, Manhattan. In: Oliveira, V and Pinho, P and Batista, L and Patatas, T and Monteiro, C, (eds.) Our common future in Urban Morphology. (pp. pp. 88-102). FEUP: Porto, Portugal.
Gehl, J. (2011). Life between buildings: using public space. Island Press.
[3] P. BLOCK, M. DE JONG, J.A. OCHSENDORF (2006) As Hangs the Flexible Chain: Equilibrium of Masonry Arches [4] 서울은 예외다. 조선시대에도 한양(서울)에서 성공하려는 사람이 많아 투기도 심했다 한다.#[5] 한국에 아파트가 처음으로 들어선 것도 산업화가 시작하고 1차 산업보다 2차, 3차 산업에 자본이 몰리면서 인구밀도가 높아졌고 주택 부족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이를 해결하려 아파트를 만들게 되었다.[6] 조선시대 부르주아로 불리며 신분 상승을 꿈꾸는 평민, 천민층이 고리대금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세력이다.[7] 동학 농민 혁명은 도시 스케일이 아니였다. 전국적으로 조선의 200만~300만 민중이 가담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동학 농민 혁명을 진압하려 청나라와 일본을 번갈아 끌어들여 결국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도시 스케일이 아니라 프랑스 + 유럽 규모였다.[8] 김정운 교수는 맥락적 사고를 사용해서 설문조사 분석 결과가 다르게 나올 수 있음을 경고하더니 유현준 교수를 따라서 같이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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