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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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La Révolution française | French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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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티유 습격(La prise de la Bastille)》, 장피에르 루이 로랑 위엘, 1789, 종이에 수채.
1. 개요
2. 내용
2.1. 혁명 전야
2.1.1. 이론적 배경
2.1.2. 경제적 위기와 수탈
2.1.3. 부르주아의 부상
2.2. 세력
2.2.1. 푀양파: 입헌군주
2.2.2. 지롱드당: 온건 공화
2.2.3. 몽테뉴파(산악파, 자코뱅): 급진 공화
2.2.4. 테르미도르파: 부르주아
2.4. 이후
2.4.1. 프랑스 제1공화국, 총재정부(1795 ~ 1799, 5년간)
2.4.1.1. 테르미도르 파의 '총재정부' 구상
2.4.2. 프랑스 제1공화국, 통령정부(1799 ~ 1804, 6년간)
2.4.3. 프랑스 제1제국(1804 ~ 1814, 11년간)
3. 이야깃거리
3.1. 아이티의 또 다른 혁명
3.2. 여담
4. 대중매체에서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Aux Armes Citoyens!

무기를 들어라, 시민들이여!


18세기 말, 프랑스 왕국에서 발발하여 테르미도르 반동 이전까지 지속되었던 혁명의 상징이 된 일련의 민란.[1]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아래의 다른 혁명들과 구분하기 위하여,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7~18세기에 걸쳐 일어난 여러 시민 혁명들 중에서도 가장 의의가 깊은 것으로 꼽히며, 내부적으로는 연이어 즉위하는 무능력한 왕들과 사치와 권력 유지에 급급한 귀족들과 구체제의 모순을 뿌리뽑았고, 외부적으로도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프랑스 혁명의 영향력이 주위 국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19세기 이후 각국의 시민 혁명의 촉발제로 작용하였다.

사실 프랑스에서 일어난 굵직한 혁명 하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표적으로 들라크루아의 그림으로 유명한 1830년 7월 혁명도 있고, 실패하기는 했지만 레 미제라블의 배경으로 유명한 1832년의 6월 혁명도 있었고, 1848년 2월 혁명도 있으며 무력으로 진압당하기는 했지만 보불전쟁 직후 파리 코뮌이 세워지기도 했고, 넓게 보면 나치 독일 치하 레지스탕스의 활동이나 1968년 68운동 같은, 다른 혁명'들'이 수두룩하다. 그렇지만 아무런 수식어를 붙이지 않고 '프랑스 혁명(French Revolution)'이라 칭한다면 대부분은 1789년의 혁명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 문서는 1789년 삼부회 사건부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집권까지 계속된 혁명을 다룬다.

프랑스 혁명의 사상이 전파될까 두려워한 오스트리아프로이센의 지배계급들은 자국의 혁명 지지파를 박해하였다.


2. 내용[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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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혁명 전야[편집]



2.1.1. 이론적 배경[편집]


Liberté, Egalité, Fraternité

자유, 평등, 연대


혁명의 이념적 기초는 장 자크 루소, 볼테르, 몽테스키외, 드니 디드로 등의 계몽주의자들과 백과전서파들로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프랑스 혁명의 뿌리를 만든 사람은 루소로서, 루소의 사회계약설인민주권론은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던 프랑스의 전제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사회계약설은 홉스리바이어던에서 최초로 주장한 이론으로, "왕이란 존재는 하느님께서 정해주신 직업이 아니며, 한 사회와 국가가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번영하기 위해 백성님들께서 계약하듯이 옹립해준 자리"라는 왕권민수설을 주장했다. 이는 왕권신수설과 정면 배치되는 이론이다.

또한 미국 독립 전쟁에 프랑스의 자금과 군사적지원이 들어갔는데 이때 파병을 다녀온 프랑스 군인들이 미국의 자유, 해방정신을 배워와 프랑스 혁명에 기여했다는 설도 있다.


2.1.2. 경제적 위기와 수탈[편집]


프랑스 혁명 직전, 앙시앵 레짐 프랑스는 여러 정치, 경제적인 난제들에 시달리고 있었다. 특히 경제적으로는 이미 산업 혁명이 시작되어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던 영국과는 달리, 루이 14세낭트 칙령의 폐지로 산업을 일으킬 만한 능력을 가진 위그노들이 프랑스를 떠났고[2], 경제발전이 정체된 상황에서 뒤를 이은 루이 15세루이 16세는 나라의 어려움을 타개하기는커녕 더 악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루이 14세는 부족한 예산들을 순수히 으로 충당했는데, 이를 끝까지 갚지 않고 증손자인 루이 15세에게 원금만 20억 리브르에 이르는 막대한 부채를 남기고 승하한다. 루이 15세 역시 마찬가지로 쌓여가는 빚을 돈을 더 많이 빌리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이것이 쌓여 루이 16세 치세에 가면, 프랑스는 국가예산의 반 이상이 선대 왕들이 남긴 빚을 갚는 데 쓰이는 지경에 이르렀다.[3][4] 설상가상으로 하인들의 제복 제정과 사냥, 연회 등 점점 늘어나는 왕실의 사치, 그리고 귀족들도 이 사치에 동참하면서 국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런 귀족들의 행각의 마이너 그레이드 버전이 상공업자들에게서 벌어졌다. 당시 도시 수공업자들은 장인-도제 관계를 통해서 길드를 이루는 지극히 폐쇄적인 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기술 발전과 판로 문제 등으로 도제가 장인으로 올라가는 길이 막히기 시작했다. 때문에 도제는 예비 장인이 아닌 수공업 노동자 계층을 형성하면서, 도시 수공업자 층의 문제를 가져왔다. 이는 본격적인 산업화를 시작하던 영국과 대조되는 측면이다.

게다가 이때 닥친 것이 가뭄과 흉년. 1785년에는 극심한 가뭄이, 2년 뒤인 1787년에는 큰 홍수가 닥쳤고, 다시 1788년에는 가뭄과 우박, 벼락, 그리고 1788년~1789년 사이 겨울에는 기록적인 추위가 프랑스를 강타한다.[5]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징세청부업자들은 이삭줍기권과 같은 생존에 관한 전통적 권한들도 무시한 채 농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무시된 것은 '이삭줍기'라는 전통적 권한이 있었는데, 유럽 농촌에서는 밀을 수확한 다음부터 바닥에 떨어져 있는 밀 이삭은 밀밭의 주인이 아니어도 가져가도 된다는 암묵의 룰이자 전통적인 권리가 있었다. 유럽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도 떨어진 곡식의 낱알을 줍는 것을 묵인하는 전통이 있었고[6], 가난한 이웃들을 배려해주고 생존을 보장해 주는 최소한의 관습이었던 셈이다.[7] 유명 화가 장프랑수아 밀레의 그림 이삭 줍는 여인들이 다루고 있는 대상도 이것이다. 결국, 평온한 목가적 풍경이라기보다는 치열한 생존현장을 보여주는 셈인데 이 시기에는 전통적인 룰과 최소한의 생존 권한마저도 부정당한 것이다.

당연히 프랑스에서는 농민 봉기가 수도 없이 벌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이 시기를 즈음해서는 식인에 대한 기록까지 보였다. 프랑스의 식인에 대한 기록은 비교적 최근인 19세기까지 등장하며 이 시기 정도 되면 이동 중이던 여행자 일행이 마을 주민들에게 먹히거나 농민 봉기 이후에 영주 일가가 바비큐가 되었다는 식의 기록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이러한 심각한 상황이 뒤에 언급할 대공포로 이어진다.

사실 가장 큰 문제는 세금을 걷는 구조 자체에 있었다. 당시 프랑스의 조세 수취 구조를 살펴보면, 예산은 만들어야겠으나 돈이 없는 왕실이 돈 많은 귀족 내지 부르주아에게 돈을 꾸어오고, 그 대신에 지정한 연도 동안 일정한 영지의 세금에 대한 수조권을 주는 식으로 처리했는데(세금 민영화), 문제는 이렇게 수조권을 확보한 세리(稅吏)들이 왕에게 바친 돈의 본전과 이득을 뽑기 위해 농민들을 가혹하게 쥐어짰다(왕실이 세금 100원 거뒀다 치면 농민들은 300원을 내는 수준이니 서민경제가 박살날수밖에..). 그 유명한 앙투안 라부아지에도 이러한 족속들 중 하나.[8] 당시 프랑스 전체의 절반 이상의 수십 년 분의 수조권이 이런 식으로 넘어갔다. 이미 이 세금 문제 때문에 저항이 일어난 적도 있었다.

소금세도 굉장히 악명높았다. 특히 고염세 지방에서는 8세 이상의 개인에게 매년 7킬로그램의 소금고가에 강매했다. 이 7킬로그램이라는 양은 매일 짜게 먹어도 남아도는 엄청난 양이었는데, 이 할당받은 소금으로 염장을 하는 것도 엄격히 금지된 누가봐도 부조리한 악법이었다.

이러한 재정 상태를 타개하기 위하여 당시 재무총감 자크 네케르는 '파산을 인정하지 말고, 세금을 인상하지 않으며, 빚을 더 지지 말자'는 선대 재무총감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의 금언을 받들어 강력한 중상주의 정책을 펼치려고 했다. 그러나 워낙 심각한 위기였던지라 이 정도의 노력으로는 이미 씨알도 먹히지 않는 상황이었고, 결국 네케르는 사임하게 된다. 이후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추천을 받아 재무총감에 임명된 샤를 드칼론(Charles Alexandre de Calonne)은 귀족들도 세금을 내자는 평등과세론을 들고 나왔고, 1787년 명사회(144명)를 소집해서 이에 대한 협조를 구하려 했다. 그러나 명사회는 재정문제는 중대한 사안이므로 자신들보다는 전국 삼신분 대표회의에서 결정해야 한다는 그럴 듯한 명분을 내세워 결정을 거부했는데, 이는 허울 좋은 말에 불과했고 실상은 귀족들이 여태까지 면세 특권을 누리다가 갑자기 평민들처럼 자신들도 세금을 내면 본인들의 위신이 떨어진다는 매우 기득권적인 의식의 발현이었다. 결국 귀족들은 국왕국민들을 배신하고, 1614년 이후 단 한 번도 소집된 적 없는 전국 삼신분 대표회의 의회에서 이 문제를 미룬 채 상황을 해결할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드칼론이 해임된 후 그 후임을 맡은 재무총감 에티엔 드브리엔(Étienne Charles de Loménie de Brienne)은 명사회와 고등법원의 허락을 받고 우선 6,700만 리브르를 차입해 이자와 빚의 일부를 탕감하려 했다. 그러나 개신교도들에 대한 공민권 부여, 인지세 신설, 귀족과 성직자들의 과세를 내용으로 한 그의 개혁안에 기득권층인 명사회와 고등법원이 반발하며 강력반대했다. 브리엔의 개혁안조차 무산되자 루이 16세는 1792년 "전국 삼신분 대표의회를 소집하겠다"고 공포하고 "4억 2,000만 리브르의 차용을 승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사촌 동생 오를레앙 공이 불법이라고 항의하자, 왕은 그를 추방하고 추종자들을 모두 투옥시켰다. 이것을 고등법원이 불법이라고 선언하면서 들고 일어났고 성직자와 대검귀족들도 이에 합세했다. 위기를 느낀 왕은 고등법원을 해산시켰으나, 정국은 더욱 요동치게 되었으며 신흥 부유층인 부르주아까지 가세하게 되었다. 이에 위기를 느낀 브리엔은 왕의 재가도 받지 않고 "전국 삼신분 대표의회를 다음 해 5월 1일에 소집한다"고 공포했다. 또한 국가 파산을 막겠다는 일념으로 국가의 부채와 이자에 대한 지불정지 명령을 발표했다(프랑스 국채 보유자들이 격분한 건 당연했다). 나중에 이를 알게 되어 화가 난 왕은 브리엔을 8월 25일 파면했고, 재정문제의 해결은 더더욱 묘연해져 갔다.[9][10]

이런 와중에 프랑스는 미국 독립 전쟁을 지원했다. 영국을 견제하려는 목적이었는데, 결과적으로 미국은 독립하고 얄미운 영국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가 20억 리브르의 지출을 들여 얻은 건 자존심밖에 없었고, 결국 국가 재정이 파탄 직전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왕실은 여전히 호화스러운 사치를 누리고 있었다. 비록 각주에서 언급했듯 이러한 사치가 이러한 재정난의 결정적인 원인은 아니었지만, 결론적으로 왕실이 사치를 부리지 않았더라면 프랑스의 경제 사정은 조금이나마 희망적이었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 평민들을 덜 자극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건 다 왕과 귀족들의 사치 때문이다.'라는 식의 말로 귀결된다는 것은 아니다. 당시 프랑스 왕실과 귀족들이 하는 파티나 무도회는 자신들의 부와 힘을 과시하고 정보교환수단이 미발달한 시대에서 친교를 쌓고 정보를 교환하는 방식이었기에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프랑스가 루이14세 이후 지속된 전쟁과 방만한 재정운영으로 국가 재정이 부도위기에 몰리고 백성들은 늘어난 세금과 과도한 부역에 고통받고 있는데 정작 모범을 보여야 할 왕실과 귀족들이 끝까지 납세를 거부하는 등 기본적인 의무조차 거부하면서 부르주아를 중심으로하는 평민세력의 불만이 폭발한 거다. 만약 이때 귀족들과 성직자들이 자신의 특권을 일부 포기하는 방식으로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으면, 프랑스 혁명은 영국처럼 온건한 방식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귀족들은 국토 40%를 소유하면서도 이에 대한 납세를 철저하게 거부하고 오히려 평민들에게 더욱 증세하는 방식을 주장하였다. 최소한의 보여주기조차 거부하는 이 행태는 당연히 평민들한테 극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자본가들인 부르주아를 중심으로 귀족들의 이러한 특권 의식은 프랑스 대혁명이 유혈이 낭자한 비극으로 만들었다.[11]


2.1.3. 부르주아의 부상[편집]


루이 14세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층을 약화시키기 위해 귀족을 더 늘리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따라서 루이 14세는 부르주아들이 귀족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두었고, 루이 14세 시대에는 수많은 부르주아들이 귀족층에 합류했다. 이렇게 귀족이 된 이들은 광범위한 면세 특권을 누렸다. 조선시대 양반면세를 보는 느낌

물론 의 권력이 하늘을 찔렀던 루이 14세 치세에는 귀족들이 왕의 권력에 눌려 단지 왕권이 제공하는 열매들만을 누렸을 뿐이지만, 루이 15세 치세에 이르러 수가 비약적으로 늘어난 귀족들은 당시 전체 인구의 3%에 달했다.

그리고 이렇게 수가 불어난 귀족들은 루이 15세 시대에 이르면 허수아비 왕 아래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몇십 년 혹은 수년 전 자신들이 속해 있었던 부르주아 계급들이 더 이상 귀족층에 합류하지 못하도록 부르주아의 신분 이동을 막았다.


2.1.3.1. 대검 귀족, 법복 귀족[편집]

그리고 이미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이들을 대검 귀족, 이렇게 신흥 귀족으로 떠오른 구 부르주아들을 법복 귀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한 본래 귀족이었던 자들에 비해 이러한 신흥 귀족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더 애썼다고 한다.[12]


2.1.3.2. 앙시앵 레짐[편집]

이런 상황에서 예전에는 부르주아 계급이었던 귀족들과 성직자들이 특권층으로서 세금을 내지 않고 호사스런 생활을 누리는 반면 시민 계급(부르주아)과 평민 등은 국가 재정을 떠받쳐야만 했다. 이를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즉 '옛날 체제(영: Ancient Regime)'라고 부른다.

앙시앵 레짐에 대하여, 옛날의 것=구닥다리라는 선입견 때문에 이를 비판한다는 주장도 적혀있었다[13] 하지만 이는 앙시앵 레짐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주장이다. 앙시앵 레짐은 프랑스 대혁명 전에 존재했던 모든 구체제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프랑스 혁명 전의 절대 군주정 체제를 일컫는 말이다. 중세 봉건제 하에서 성직자들은 신앙생활, 성무, 검소함을 요구받고 귀족은 각종 특혜를 누리는 조건으로 군역을 졌다. 즉 귀족이나 사제에 대해 '유지비가 비싼 인력' 이라 여길 수 있었다. 하지만 중세 말기가 되며 산업과 상업의 발달, 그로 인한 부의 축적, 절대 군주정 체제에서 상비군 운영 등으로 성직자들은 재산을 불릴 수 있었고, 살아남은 귀족들은 의무 없는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 사실 어느 나라 어느 왕정이나 세금은 결국 평민의 호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국가가 상비군을 확충하게 되면서 귀족은 중세시대의 의무에서 벗어난 반면 권익은 누리고 성직자는 소득이 있지만 세금 한 푼 안 내고 있었으니, 이것을 앙시엠 레짐의 모순이라고 부르며 비판하는 이유이다.


2.1.3.3. 세금[편집]

이런 구체제의 모순으로 프랑스는 각각의 계층들에게서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전 시대에만 해도 귀족이 될 수 있었던 시민 계급은 정치 권력에서 소외되는 것에 불만을 품었으며, 평민들은 점점 늘어만 가는 세금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18세기프랑스의 세금은 200% 이상 늘었지만 노동자들의 임금은 100% 정도밖에 늘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볼 때, 이를 더욱 잘 알 수 있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이렇게 거둔 세금이 프랑스 정부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배경은 역시 앞서 언급한 수조권 문제. 실제로 프랑스 직할령에 있는 사람들은 그럭저럭 먹고 살 만한 정도는 되었다. 문제는 빚 대신에 수조권을 받은 이른바 징세청부업자들의 대상이 된 영지에 사는 사람들로 세금 상승은 이쪽에서 주도했다고 봐도 된다.

이에 상술했듯 루이 16세의 재정총감 드칼론은 1787년 2월, 명사회를 열어 귀족, 성직자 등의 특권 계층에게 임시로 과세하는 것을 재정 위기의 타개책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특권 계층은 이것에 크게 반발하며 과세를 강력히 거부했고 고등법원의 권한을 이용해 어떻게든 특권 계층의 임시 과세안을 막으려 했다. 이때 특권 귀족들은 삼부회에 비견될 만한 회의를 별도로 열려고 국왕에게 압력을 넣기에 이르렀고, 이의 반발로 열린 것이 뒤에 언급되는 삼부회였다. 삼부회의 구성이나 명사회의 소집 등도 특권 세력과 왕실의 대립 과정에서 결정되었다. 이때문에 프랑스 혁명의 초기 트리거는 구 특권 세력들이 제공한 것과 마찬가지이고, 프랑스 혁명의 1단계 혹은 0단계는 구 귀족들의 왕에 대한 반발이라고 보기도 한다. 물론 이 반발은 '국민의회'가 폭주하자 귀족들이 루이 16세에게 달려가면서(징징거리며) 바로 끝났다.


2.1.3.4. 삼부회[편집]

결국 드칼론과 그 후임자인 브리엔이 특권 계층과의 파워 게임에서 밀리며 실각하고 후임 재정총감으로 복귀한 자크 네케르1614년 이래로 열리지 않았던 삼부회의를 개최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하여 1789년 5월 5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삼부회가 개최된다. 그리고 루이 16세는 귀족과 성직자들을 견제할 생각으로 원래는 한 신분당 같은 의석수였던 삼부회에서 제3신분인 부르주아 의원의 수를 두 배로 늘렸다. 재정위기 타개를 위해 열린 삼부회였으나 투표안에 대해 격렬한 논쟁이 일었다.

이 삼부회의 투표안은 이렇다. 제1신분 의석 300, 제2신분 의석 300, 제3신분 의석은 600이다. 귀족층은 여기서 각 신분 간 같은 투표수를 주장했다. 한 신분 의석에서 의결된 하나씩의 의견을 결정하자는 식이다. 사실 각 의원당 1표씩을 가지게 되면 특권층은 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귀족층의 일부가 부르주아 계층을 지지했고 고위 성직자들이 아닌 일반 성직자들은 특권층보다는 시민 계급의 이익에 더 공감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 가톨릭교회의 헌금은 지방의 본당(성당)들로부터 걷어져서 일단 파리 대주교까지 올라간 다음에, 다시 아래로 내려오는 구조였다. 그런데 고위 귀족들이 이미 수도원 레벨을 장악했기 때문에 지방까지 내려올 돈이 없었다. 때문에 지방에서 사목하던 사제들은 프랑스 혁명의 초기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

반대로 부르주아 계층은 여기서 1인당 1표제를 주장했다. 그 이유는, 위와 같이 1인 1표제를 시행한다면 머릿수로 이길 테니까. 여기에, 부르주아 계층은 가난한 성직자와 귀족 등 자신에게 우호적일 수 있는 사람들을 포섭하기도 했다.(나라꼴이 이래서는 안된다는 신념으로 귀족 과세에 찬성한 귀족도 소수 있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절대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가 없었다.

6월 17일, 부르주아 의원들은 1인 1표제와 영국식 의회 체제를 골자로 하는 삼부회 개혁안을 내놓았지만 문제는 귀족과 성직자들이 이를 거부하면서 격렬한 논쟁 끝에 결론을 내지 못하고 삼부회가 끝났다. 그들은 단독으로 국민의회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영국식 의회를 선언했다. 놀란 루이 16세는 부르주아 의원들의 이런 불법 행동들을 제압하려 했고 결국 삼부회 회의장을 군대를 동원해 폐쇄시켰다. 분노한 부르주아 의원들은 이에 맞서 20일, 테니스 코트에서 헌법 제정까지 의회를 절대 해산하지 않겠다는 이른바 테니스 코트의 맹세로 저항했다.

여기에 시에예스를 중심으로 하는 일부 성직자들과 라파예트를 중심으로 하는 일부 귀족층들이 국민의회에 가세한 데다 미라보 백작의 폭탄발언[14] 때문에 루이 16세도 어쩔 수 없이 국민의회를 인정하고 전 계급 의원들이 참여하여 헌법위원회를 창설해 본격적인 헌법 제정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루이 16세는 영국의 찰스 1세처럼 왕이 의회에 눌려 처형당하기까지 했던 전례를 우려하여 국경 수비를 담당하던 군대를 베르사유파리 일대로 진군시키자 이는 파리 시민들의 공포와 분노를 자아냈고, 이는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된다.


2.2. 세력[편집]







2.2.1. 푀양파: 입헌군주[편집]



2.2.2. 지롱드당: 온건 공화[편집]


  • 온건 공화파 계열의 여러 파벌의 집합체이며, 자주연방주의자
  • 주요 지도자들
    • 피에르 베르니오
    • 자크 피에르 브리소
    • ‘지롱드파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마담 롤랑
    • 니콜라 드 콩도르세
    • 제롬 페티옹

2.2.3. 몽테뉴파(산악파, 자코뱅): 급진 공화[편집]




2.2.4. 테르미도르파: 부르주아[편집]


  • 부르주아
  • 주요 지도자들
    • 조제프 푸셰
    • 베르트랑 바레르
    • 장마리 콜로 데르부아
    • 자크 니콜라 비요바렌
    • 장 랑베르 탈리앵

2.3. 진행[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프랑스 혁명/진행 과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4. 이후[편집]



2.4.1. 프랑스 제1공화국, 총재정부(1795 ~ 1799, 5년간)[편집]



2.4.1.1. 테르미도르 파의 '총재정부' 구상[편집]

이렇게 나폴레옹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난 이후, '국민공회'의 부르주아들은 다른 형태의 정부를 구성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총재정부'이다. 이는
  • 행정권을, '총재' 5명이,
  • 입법권을, '500인 위원회'가,
  • 거부권을, '원로원'이 갖도록 한 형태이다.

그리고 이 총재정부에서 드디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27세)의 의견을 채택하여 그로 하여금 이탈리아 원정에 나서게 한다. 이후, 나폴레옹은 혁명으로 악화된 교황청과의 관계를 이탈리아 원정(오스트리아 격퇴)으로 회복하는 등의 업적으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다.

나폴레옹이 점차 인기가 많아지자, 총재정부는 위기를 벗어나게 해준 고마움을 금방 잊어버리고는 나폴레옹으로 하여금 이집트 원정(1798 ~ 1801)을 가게 한다.

결국, 그는 원정 중 귀국하여 총재정부를 쿠데타로 뒤엎어버린 후, 자신이 통령이 된다.


2.4.2. 프랑스 제1공화국, 통령정부(1799 ~ 1804, 6년간)[편집]


나폴레옹은 통령정부를 세워 차츰 제정으로 나아갔다(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나폴레옹은 통령정부를 수립한 후 "혁명은 끝났다"라고 선언하였고 이로써 프랑스 혁명은 완전히 종식된다.


2.4.3. 프랑스 제1제국(1804 ~ 1814, 11년간)[편집]


이후 국민투표를 통해서 나폴레옹은 황제가 되었다. 그렇게 공화정은 무너지고 프랑스 제1제국이 시작된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의 전통은 나폴레옹 정부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혁명을 부정하려 했던 왕정복고 시대에도 프랑스 혁명과 유사한 파리 시민 봉기와 정권 타도는 반복되었고, 이러한 봉기가 종말을 맞은 것은 파리 코뮌이 처참한 최후를 맞고 난 이후였다.


3. 이야깃거리[편집]



3.1. 아이티의 또 다른 혁명[편집]



Liberté? Egalité? Fraternité? (자유? 평등? 단결?)[15]

미국 독립전쟁과 함께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이티가 독립하는 데 영향을 크게 끼친 사건이 바로 이 프랑스 혁명이다. 혁명 시절 이전부터 아이티의 흑인들은 불평등한 대우에 봉기를 해서 프랑스에서 진압을 하긴 했지만 혁명 이후 저항이 더욱 거세졌다. 하지만 아이티의 독립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를 주장하던 그 프랑스 혁명정부가 아이티 흑인들의 적으로 등장해 진압과 학살을 일 삼았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 한창 만들어지던 파리 국회에서 아이티 혁명의 지도자였던 뱅상 오제는 아이티인과 기타 노예들의 권리도 보장해야 맞지 않냐며 사방팔방 뛰어다녔지만, 조금의 소득도 없이 회의를 나와야 했다. 이에 분노한 아이티인들은 뱅상 오제를 지도자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하고 뱅상 오제는 고문 끝에 죽는다.

그러나 이런 강경진압은 오히려 혁명에 불을 지폈다. 투생 루베르튀르가 이끄는 반군 세력이 불어난 것이다. 프랑스 정부는 처음에는 주모자를 처형하며 진압을 하긴 했으나 국내 문제만으로도 정신이 없기에 더 이상의 강경책은 부담스럽다는 걸 알고 흑인들에게 노예제 폐지와 백인과 동등한 대우를 약속하며 유화적으로 나서면서 아이티 혁명에도 빛이 보이는 듯 했으나, 영국스페인의 개입, 신분이 다른 혼혈물라토들과 흑인들 개개인 간의 갈등이 번지면서 아이티는 여전히 혼란에 놓였다. 그러다 나폴레옹 집권기에 아이티 흑인들에 대해 대대적인 진압과 학살을 일삼고[16] 지도자 투생 루베르튀르를 납치했는데, 오히려 이 사건 이후로 아이티 흑인들이 모두 등을 돌리며 프랑스에 한몸으로 대항하게 만들었다.(아이티 독립군 포로들을 배에 싣고 독가스로 처형하기도 했다는 야사도 있다.) 결국 프랑스는 아이티의 독립을 인정하는 대신에 어마어마한 배상금을 요구하며 아이티를 끝까지 옥죄었다. 나폴레옹은 후에 루베르튀르를 체포한 것을 일생일대의 실수라고 후회했는데, 이 사건 때문에 결정적으로 아이티 독립 여론이 확고하게 굳었기 때문.

프랑스는 물론 미시시피 거품같은 경제위기도 영향이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아이티의 독립 때문에 루이지애나를 통째로 포기하다시피 미국에 팔아야 했다. 판매대금은 1500만 달러였는데 당시 미국의 영토보다 거대한 땅을 통째로 먹는 미국 입장에서는 공짜나 다름없는 금액. 루이지애나 구입 문서로.

숭고하다는듯 내세운 보편 자유주의 이념 위에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걸 생각하면 아이티 혁명에 대한 프랑스의 대처는 블랙 코미디가 따로 없다. 그러다보니 흔하지는 않지만 프랑스 혁명사에 아이티 혁명을 끼어넣기만 해도 일반적인 서술과 뉘앙스가 완전히 바뀌는 걸 볼수가 있다. 일례로 래리 고닉의 유명 학습만화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는 아이티 혁명을 끼워넣는 것만으로 뒤틀린 프랑스 혁명사를 쓰는 데 성공했다.


3.2. 여담[편집]



  • 프랑스 혁명으로 인한 공화정이 운 좋게도(?) 추분날 성립된 덕에 잠시 쓰였던 프랑스 공화력에서는 천문학적으로도 의미가 깊은 추분이면서 혁명이 일어난 날이기도 한 그날을 공화력의 시작점으로 삼기도 했었다. 혁명력은 12년 남짓 사용되다가 폐지된다.

  • 혁명 이전까지 프랑스인들은 영국인을 "군주를 처형하는 과격하고 무도한 놈들"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17세기 청교도 혁명으로 찰스 1세가 처형). 그리고 혁명 초기에는 영국인들은 프랑스인들을 보고 "너희도 우리 따라하네 뭐"라면서 좋아했다. 심지어 일부 영국 왕족들과 귀족들도, 학살당하는 프랑스 귀족들을 보면서 고소해하면서 좋아하기도 했다. 물론 초기부터 혁명의 과격성을 지적했던 영국인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보수주의의 성전(聖典)인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1790년)을 저술한 에드먼드 버크. 하지만 왕족과 귀족들은 혁명이 자국에 퍼질 것을 두려워했고 이는 혁명 이후에 프랑스가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과 싸워야 했던 이유였다.

  • 프랑스 혁명을 주제로 에드먼드 버크토머스 페인과의 설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앞서 말했듯 보수주의자였던 버크는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을 써서 혁명을 이제까지 세상에서 벌어진 일 중 가장 경악스러운 일이라고 공격하며 국왕, 귀족, 봉건제도를 옹호했다. 그는 국민의회가 품위도 자유도 없는 채 행동하고 있으며, 루이 16세마리 앙투아네트를 고요하고도 강인한 인내심을 가졌다고 칭송했다. 그러자 페인은 즉각 그에 대한 반박으로 <인권(The Rights of Men)>을 저술하여 버크의 주장을 반박했다. 그는 버크의 주장이 "세계에 대한 협잡"이라며 프랑스 혁명은 인권에 대한 합리적 사고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현 상태를 국민주권대표제 국가라고 하는 기반 위에서 유렵의 혁명이 전개라고 봤다. 그는 미국 독립 전쟁으로 미국은 자유의 챔피언으로, 프랑스 혁명으로 프랑스는 자유의 우승자로 만들었다며 시민혁명을 적극 옹호했다.

  • 아이러니하게도 바스티유 감옥 습격 이후 정국을 주도한 국민의회는 파리의 소요를 진정시키는 한편, 프랑스대혁명을 비판한 에드먼드 버크의 주장처럼, 입헌군주제로의 점진적인 변화를 지향하고 있었다. 급진파라고 칭해지는 자코뱅 내에서도 당통과 같은 과격파들은 마라나 로베스피에르에게 비난받았을 정도. 이랬던 프랑스 혁명이 흑화한 계기는 루이 16세 일가의 탈출 미수와 이로 인한 필니츠 선언. 1791년 6월 루이 16세의 가족들은 파리를 탈출하여 프랑스 동부 국경까지 갔으나 국경을 넘지 못하고 파리로 압송된다. 국내적으로 왕의 권위나 지지가 크게 떨어짐으로써 입헌군주제를 옹호하는 온건파와 지롱드의 입지가 좁아졌다. 국외의 경우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전격적으로 군사동맹을 맺으며, 곧이어 필니츠 선언을 발표한다. 선언문에는 프랑스 왕을 위해 필요한 무력을 사용하여 즉시 조치를 취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이는 프랑스에서 주전파가 득세하도록 부추겼고,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선전포고를 하며 혁명 전쟁을 시작한다. 이후 발미 전투의 승리는 프랑스 대혁명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한편 내외부의 악재로 인한 자코뱅과 과격파의 부상은 혁명정부가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공화정으로 노선을 변경하도록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루이 16세가 제 무덤을 판 셈.

  • 현대 프랑스의 매우 엄격한 세속주의적인 풍토도 이때 성립되었다.

  • 루이 16세의 처형으로 왕정복고주의 세력의 반발이 극으로 치닫는다. 특히 브르타뉴와 메인, 앙주를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한편 가톨릭 교회의 재산 몰수와 주일 폐지, 과도한 증세와 모병으로 인해 방데 지역에서도 반란이 일어난다. 반란세력과 이를 진압하기 위한 정부군 간의 전쟁을 방데 전쟁이라고 부르며, 앞서 말한 브르타뉴와 메인 지역의 반란과 합쳐 '서부 전쟁'이라고도 한다. 당시 혁명 전쟁으로 인해 정부군 전력의 대부분은 국경으로 이동한 상태였기에 반란은 초기에 큰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낭트 공방전에서의 패배와 이후의 강경한 섬멸 명령으로 방데 지역은 큰 피해를 보고, 1796년 반란은 평정된다. 방데 전쟁 당시 진행된 진압 작전을 "근대사 최초의 대규모 학살"이라고까지 부르는 역사가들도 있다. 혁명군의 학살이 있었던 것은 이견이 없으나 그 규모에 대해서는 최대 60 만 명이라는 막연한 추정치만 있을 뿐이다. 프랑스인들은 혁명의 당위성만을 강조하며 이 학살에 대해선 대체로 언급하지 않거나 방데 지역 반혁명파의 난동 등으로 폄훼하다가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때인 2012년이나 돼서야 이걸 인정했다.[17]

  • 대혁명이 반가톨릭 성격을 띄고 있었다 보니, 영미권에서는 20세기 중반까지 존속했던 소도미법이 프랑스에서는 일찌감치 폐지되었다. 신성모독죄도 마찬가지로 이때 폐지되었고 가톨릭은 프랑스 밖에서도 점차 세속적인 영향력을 잃게 된다. 그래서 전통 가톨릭 계열 단체에서는 프랑스 혁명을 "가톨릭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프리메이슨자유주의자가 꾸민 음모"로 여겨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 혁명파의 광기 및 사건사고는 농민의 딸로 프랑스를 구했던 영웅 잔 다르크도 피해갈 수 없어서 그녀를 왕당파와 가톨릭의 상징이라고 낙인찍어 오를레앙과 로렌 동레미 라퓌셀 등 그녀와 관련있는 지방에서 그녀를 기리는 기념행사의 폐지는 물론이고 동상 등의 기념품을 파괴하거나 불에 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문화대혁명?). 잔다르크는 나폴레옹이 집권하면서 전국민적인 영웅으로 다시 올라서게 된다.

  • 이는 중국문화대혁명과 비슷한 사례로 프랑스도 잔 다르크에 대한 기록이 많이 소실되어서 오히려 영국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웃기지도 않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한국으로 치환한다면 이순신의 행적을 봐야 하는데 난중일기도 없어서 일본 역사책 보는 상황


  • 시민의 분노의 대상이던 프랑스 귀족의 상당수는 대혁명 후 몰살당했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외국으로 달아났다. 프랑스 혁명사의 권위자인 조르주 르페브르#의 추산에 따르면 20-30만 정도로 추정되기도 한다.[18]

  • 현대 많은 서구 역사학자들이 프랑스 혁명 자체에 대하여 많은 의견이 오가고 있다. 긍정적으로 민주적인 법안이 마련된 것이 있지만, 부정적으로 보자면 그들이 공포정치와 내정혼란으로 오히려 프랑스를 장기간 동안 전쟁과 학살에 휘말려 문제가 많았다고 제시한다. 여튼간에 빛과 그림자가 확실히 구분되는 혁명이었다.


  • 당통의 죽음은 혁명 이후 자코뱅파 내부의 로베스피에르와 당통의 대립을 보여주는 수작으로 유명하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순정 만화의 명작으로 알려진 베르사이유의 장미는 혁명 직전의 사회상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후반부에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다.

테르미도르도 프랑스 혁명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테르미도르 반동 시기까지 다루고 있다.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의 작품인 어쌔신 크리드: 유니티가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템플 기사단이 식량을 대량으로 빼돌려 농민들을 일부러 굶주리게 하고 자코뱅을 부려 대중을 선동한다. 혁명을 통해 혁명 이후 혼란을 거쳐 대중을 통제할 큰 힘을 보이기 위함. 암살단은 반대로 온건한 혁명을 지향하며 템플 기사단과 대립하고 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757px-Eug%C3%A8ne_Delacroix_-_La_libert%C3%A9_guidant_le_peuple.jpg
이 그림은 외젠 들라크루아(Ferdinand Victor Eugène Delacroix)(그림에서 여신 왼쪽에 서서 모자를 쓰고 소총을 든 사람이 작가이다.)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부제는 '1830년 7월 28일')이라는 그림으로, 1789년의 혁명이 아니라 1830년 7월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그려진 그림이다.[19]
그림이 워낙 인상적인 탓인지 시대가 다름에도 1789년 프랑스 대혁명에 관해서 언급할 때 인용되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심지어 교과서에서도 말이다. 사실 이 때도 1789년 때처럼 가톨릭이 조인트를 많이 까였었고, 소위 '기적의 메달'이라는 가톨릭 성물도 이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자세한 건 파리의 성모 문서로. 200년 전에도 아킴보가 있었다

파일:external/www.coldplay.com/art_vivalavida.jpg
이 그림은 영국의 록밴드 콜드플레이의 노래 'Viva la Vida'의 앨범 사진이다. 노래 가사의 배경이 유명한 역사 사건으로 프랑스 혁명, 신항로 개척시대, 예수(로마시대) 등 다양하다.

찰스 디킨스의 장편소설 두 도시 이야기 또한 프랑스 혁명 전후의 사회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제목의 '두 도시'는 런던과, 혁명기의 파리를 가리키는 것. 혁명의 단초가 된 귀족들의 사치와 횡포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서술하지만, 피에 취해 점점 더 광포해져가는 혁명의 열기 역시 비판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읽어낼 수 있다. 작가가 영국인이라서 그런 것 아니냐는 말도 있다만.

바로네스 오르티스칼렛 핌퍼넬 역시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있는데, 농민봉기로 고향을 떠난 저자의 관점이 작품에 녹아들어가, 혁명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성향 연애 AVG인 장미에 숨겨진 베리테도 작중배경으로 이 시기를 다루고 있다.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로베르 엔리코와 리샤르 T. 헤프롱 감독의 1989년작 영화 프랑스 대혁명(La Revolution Francaise)이 혁명기 프랑스를 다루고 있다. 프랑스 영화이지만 이탈리아, 영국, 독일, 캐나다 합작품이다.
장장 6시간에 달하는 엄청난 러닝타임을 자랑하며 1부와 2부가 각각 '빛의 시대', '공포의 시대'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혁명 20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답게 엄청난 스케일을 자랑한다. 프랑스 왕가의 사치스러운 궁정 묘사부터 시작해서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 삼부회, 프랑스 혁명 전쟁 등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칼 같은 고증을 통해 묘사한다. 출연진도 제법 호화 캐스팅으로 라파예트 후작 역에 샘 닐, 미라보 역에 원로 배우 피터 유스티노프,[20] 사형 집행인 상송역으로 무려 크리스토퍼 리가 출연한다!
혁명의 잔혹한 면도 가감없이 보여주는 영화이므로 은근히 잔혹한 장면이 많다.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수비군 사령관 드 로네이를 살해하고 그 목을 창에 꽂아 조리돌림하는 장면부터 시작하여 단두대 처형 장면(직접적으로 목이 잘리는 장면은 안나오지만), 후반부 혁명이 과격기에 접어들 무렵에는 시민들이 감옥을 습격하여 죄수들을 끌어내 창밖으로 던져서 죽이고 사람을 전속력으로 벽에 돌진(...)시켜서 머리를 박살내 죽이는가 하면 여자를 산채로 벽에 못박는 장면까지 나온다.
영화 테마곡(L'hymne à la liberté)이 매우 웅장하고 아름답다. 성악 버전 오케스트라 버전

중국의 애저 플레임 스튜디오(Azure Flame Studio)에서 개발된 성녀전기라는 게임이 프랑스 혁명과 이후 혁명 전쟁을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는 프랑스 혁명의 전개를 일부 비튼 대체역사로 미라보 백작이 급사하지 않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성녀의 가호를 받은 것을 알게 되자 그녀를 설득하여 프랑스 왕가가 바렌 사건에서 도주하는 대신 잔류하여 혁명을 지지하기로 하면서 프랑스 왕국이 입헌군주제로 개편된다. 다만 마리 앙투아네트가 실권을 잡은채로 여전히 왕당파, 푀양파, 자코뱅, 파리지앵으로 나뉘어 개판이 된 상태이다.

초전자머신 볼테스 V의 스토리 플롯 역시 프랑스 혁명에서 많이 따왔다. 적 세력 보아잔부터 명칭은 이웃 혹은 이웃나라를 뜻하는 프랑스어 voisin에서, 내부 구성원들은 부르봉 왕조앙시앵 레짐에서 따왔다.

미라큘러스: 레이디버그와 블랙캣 시즌2 막화의 중간 부분에 프랑스혁명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있다.[21]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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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일으킨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를 기점으로 잡는 경우도 있으나 총재정부 시기는 중도적인 노선을 앞세웠기 때문에, 역사학계에서는 테르미도르 반동이 실질적으로 프랑스 혁명이 끝난 시기라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2] 정확히 말하면 낭트 칙령의 폐지 이전부터 위그노들은 루이 14세의 탄압을 못 버티고 개종하거나 타국으로 이주하여 프랑스 내에서는 소수만 남은 상태였다. 낭트 칙령의 폐지는 위그노 탄압의 시작 선언이 아닌 더 이상 제 목소리를 낼 수 없어진 위그노들에 대한 확인사살이었던 것이다.[3] 1788년 3월 작성된 재정보고서(compte rendu)를 보면, 수입은 5억 300만 리브르였는데 지출은 6억 2,900만 리브르. 즉 1억 2,600만 리브르의 적자가 나고 있었다. 그러나 왕실의 향락과 사치가 주된 적자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통념과는 달리, 왕실의 경비는 사실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전체 예산 중 왕실의 경비로는 3,500만 리브르가 할당되었는데, 이는 총 지출의 6%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6%가 적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한국의 1년 예산이 500조 원 정도 되는데, 6%면 약 30조 원을 왕실이 가져갔던 거다. 현재 영국 왕실이 2천~3천만 파운드 정도를 왕실 경비로 할당 받는 것을 감안하고 보면 실로 놀라운 액수. 그러나 현대의 잣대로 당대의 일을 평가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다가, 어려웠지만 그래도 수세기간 유럽의 맹주로 군림하던 프랑스의 위신 측면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4] 그 외로는 일반 회계 지출이 19%, 국방비외교 관련 지출이 26%. 하지만 국채의 상환과 이자 상환에 들어가는 비용은, 놀랍게도 전체 예산의 절반에 육박하는 3억 1,008만 리브르를 차지했다. 이 시기 프랑스 왕실의 절망적인 재정 상태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 중 하나.[5] 사실 진짜로 심각했던 대기근은 혁명이 시작되기 전에 끝난 상황이었지만, 역사적으로 혁명이나 폭동은 원래 가장 기근이 심할 때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 이에 대해 피에르 각속트는 "빈곤은 폭동의 원인은 될 수 있으나, 혁명의 원인은 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실제로 프랑스 혁명 시기는 기근이 조금씩 나아지다가 다시 조금 하락할 기미가 보이는 바로 그 절묘한 시점이었다.[6] 이삭줍기권 자체가 성경에 기록된 율법에서 나온 것이다. 신명기에 보면 수확이 끝난 후에 남은 이삭은 밭 주인이라도 다 주워갈 수 없도록 율법에서 규정했다. 최소한의 먹을 것도 구할 수 없는 빈민이 주어 식량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구약성경룻기에서도 며느리인 룻이 이삭을 주워서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봉양하는 내용이 나온다.[7] 이삭을 하루종일 주워도 겨우 빵 몇 개를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8] 앙투안 라부아지에는 한창 잘 나갈 때 매년 15만 리브르, 지금 돈으로 2,0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9] Duc de Croy,<journal inédit du duc de croy>, 1718년에서 1784년까지 모음집, pp220-228[10] 서정복, <살림지식총서 291 프랑스 혁명> pp.5-9[11] 괜히 동양역사에서도 흉년이 들면 왕이 거친 삼베옷을 입고 반찬 수를 줄이며 고기반찬과 음주를 금하는 것도 흉년으로 나빠진 민심을 다독이기 위한 목적이 컸다.[12] 이런 케이스는 다른 역사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일제강점기의 골수 친일파들이 그랬다.[13] 사실 멀리 갈 것도 없이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옛날 것이라면 질색을 할 정도로 싫어했다. 계몽철학이 프랑스 혁명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옛날 것들은 구체제의 모순으로 보이기 충분했을 것이다.[14] "장관 각하! 국왕에게 전하시오. 우리는 인민의 의사로 이곳에 앉아 있는 만큼, 총검에 밀리지 않는 한 퇴장하지 않을 것이라고!"[15] 그러나 씁쓸하게도 이는 현재 아이티의 표어이기도 하다.[16] 더욱 아이러니하게도 이 때 파견된 프랑스군의 대부분이 폴란드 분할로 멸망한 조국 폴란드를 되찾기 위해 투쟁하던 폴란드 여단 출신이었다. 물론 이들이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라 나폴레옹이 까라니 깐 거지만. 민족의 자유를 되찾으려던 사람들이 또다른 민족의 자유 탄압에 동원된 것이다.[17] 방데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에도 알려지지 않은 반란이 많았다고 한다. 이걸 보면 혁명의 이중성의 표본으로 역사학자들이 제시하며 "프랑스 혁명이 과연 객관적인 면모에서는 긍정적인 면모가 단점을 덮을 수 있었나?" 하는 의견이 많이 오간다. 역사학계에서는 사실을 추구하지 가치평가를 추구하지 않는다. 객관적인 사실을 두고 긍정적이냐, 단점을 덮을 수 있나 묻는 것은 역사학이 아닌 세간의 흥미일 뿐이다.[18] 그러나 이건 나중에 크나큰 부메랑이 되어 프랑스 제 1공화국 당시에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연합군에게 패배하는 원인이 되었다. 당시에 귀족들 가운데에는 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그 빈 자리를 메우기가 매우 힘들었다. 특히 해군이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19] 때문에 등장인물들의 복장 등에 고증도 대혁명 시기와는 맞지 않는다. 차라리 레 미제라블의 배경시대와 더 가깝다고 볼수 있다.[20] 조지프 파인스 주연의 영화 루터에서 작센 선제후 역을 맡았다.[21] 12:05에서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