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아(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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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아 카이사리스
라틴어: Julia Caesaris
생몰년도
기원전 76년경 ~ 기원전 54년
출생지
로마 공화국 로마
사망지
로마 공화국 로마
지위
파트리키
국가
로마 공화국
가족
율리우스 카이사르(아버지)
코르넬리아 킨나(어머니)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남편)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로마 공화국의 귀부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딸이자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아내로 유명한 인물이다.


2. 생애[편집]


기원전 76년경 로마 공화국의 수도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의 딸인 코르넬리아 킨나의 딸로 출생했다. 어머니가 기원전 68년 출산 도중 사망한 후, 그녀는 친할머니이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어머니인 아우렐리아 코타에 의해 양육되었다.

아우렐리아 코타는 율리아를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1]와 약혼시켰지만,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59년 약혼을 파기한 뒤 제1차 삼두정치를 굳건히 하기 위해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딸을 결혼시켰다.

결혼 당시 폼페이우스의 나이는 47세로 율리아보다 최소 30세 많았고 율리아 이전에 안티스티아, 아이밀리아 스카우라, 무키아 테르티아 등 세 여인과 결혼하여 두 아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등 여러 자식을 두었다. 그럼에도 율리아는 폼페이우스를 무척 사랑했던 듯하다. 플루타르코스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폼페이우스의 생애>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폼페이우스가 그런 열정적인 헌신에 적합한 대상이 아닌 것 같았음에도, 젊은 아내는 남편에게 열렬한 애정을 보내기로 유명했다. 그녀가 그렇게 한 이유는 폼페이우스가 아내에게 전적으로 충실했고 자신의 존엄성을 굽히지 않고서도 개인적인 관계에서 정말 매력적으로 변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했기 때문인 것 같다.


폼페이우스 역시 율리아에게 흠뻑 빠진 듯하다. 거리에 중년의 정복자가 젊은 아내와 함께 하는 가정 생활에 치중하다 정치에 흥미를 잃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하며, 히스파니아 속주 전역의 총독에 선임된 뒤에도 아내와 함께 있고 싶어서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에게 각각 가까운 히스파니아, 먼 히스파니아, 그리고 루시타니아 속주를 대리 통치할 권한을 부여하고 로마에 남아서 로마의 곡물 공급을 감독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카이사르와 친밀하게 지내는 것에 대해 폼페이우스를 못마땅하게 여긴 자들도 아내에게 진심어린 애정을 보내는 폼페이우스를 비난할 수 없었다고 한다.

기원전 57년,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기원전 56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여 카이사르의 모든 권력을 박탈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삼두정치파는 이에 위협을 느꼈고, 폼페이우스크라수스도 집정관 후보로 출마했다. 카이사르는 로마로 장병들을 보내 투표에 참여하게 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투표일로 지정된 날에 폼페이우스와 아헤노바르부스 모두 새벽부터 투표장에 나왔다. 곧 그들의 지지자들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지더니 투표장이 난장판으로 변해버렸다.

폼페이우스는 이때 벌어진 몸싸움 도중에 옷이 피범벅이 되어버리자 옷을 갈아입었고, 하인들은 주인의 피 묻은 옷을 가지고 큰 소리를 지르며 폼페이우스의 집으로 달려갔다. 당시 임신 중이던 율리아는 온통 피범벅이 된 남편의 토가를 보고 기절했고, 이로 인해 유산해버렸다. 그녀는 이 일로 건강을 해쳤고, 기원전 54년 8월 출산 중에 태아와 함께 사망했다. 세네카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브리타니아에 있었다고 한다.

폼페이우스는 그녀의 유골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알반 빌라에 안치하기를 바랐지만, 현숙한 여인이었던 율리아를 사모한 로마인들은 캄푸스 마르티우스 광장에서 사회장을 거행하기로 했다. 기원전 54년 집정관을 맡던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이를 저지하려 했으나 민중의 의지를 거스르지 못했다. 그리하여 율리아의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그녀의 유해를 화장하고 남은 재는 항아리에 넣어져 캄푸스 마르티우스 광장 밑에 안장되었다.[2]

율리아의 사망 후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간의 동맹은 약해졌다. 카이사르는 어떻게든 폼페이우스와의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폼페이우스의 재증손이자 자신의 외증손인 소 옥타비아소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이혼시키고 폼페이우스와 재혼시키려 했다. 그러나 마르켈루스와 옥타비아 둘다 이혼하길 원하지 않았고, 폼페이우스 역시 이를 거부하고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딸 코르넬리아 메텔라와 결혼했다. 그 후 폼페이우스는 반 카이사르 인사들의 설득에 넘어가 카이사르를 적대했고, 이로인해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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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각에서는 이 인물이 당시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에게 입양되어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브루투스'라는 이름을 사용하던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여부는 불명확하다.[2] 10년 후 암살 당한 아버지 율리우스 카이사르 역시 그녀의 무덤 근처에서 화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