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군단 풀미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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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로마 공화국 말기 시기
3. 시리아 전선 군단



1. 개요[편집]


Legio XII Fulminata. 상징은 벼락이다. 갈리아 전쟁 시기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창설되었고, 아우구스투스 시기에 시리아 전선에 배치되어 서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존속했다.


2. 로마 공화국 말기 시기[편집]


기원전 59년 갈리아 전쟁을 준비하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11군단 클라우디아와 함께 창설되었다. 이들은 갈리아로 집단 이주하던 헬베티족과의 전쟁에 참여했고, 뒤이어 게르만계 수에비족의 지도자 아리오비스투스와 맞붙은 보주 전투에서도 참여해 결정적인 승리에 일조했다. 기원전 57년 카이사르의 벨가이 원정에도 참여했으며, 사비스 전투 당시 7군단 클라우디아와 함께 좌익에 배치되어 네르비족과 대적했다. 두 군단은 수적으로 우세한 데다 매우 용맹한 네르비족의 맹공에 고전하다가 좀더 높은 고지에서 싸우기 위해 후방으로 물러나는 과정에서 상당히 많은 수의 장교를 잃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7군단과 12군단의 군단기가 네르비족의 손에 들어갔고, 모든 트리부누스 밀리툼들이 전사했으며, 2명의 레가투스 중 한 명도 전사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카이사르의 독려에 힘입어 끝까지 버티다가 다른 군단들이 적군을 물리친 뒤 네르비족을 협공한 덕분에 가까스로 승리했다.

이후에도 카이사르가 8년간 갈리아 전쟁에서 치른 전투에 대부분 참전했다. 특히 알레시아 공방전에서 알레시아 성내와 포위망 외곽에서 동시에 협공해오는 갈리아인들을 상대로 굳건히 버텨서 카이사르의 승리에 일조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카이사르를 따라 이탈리아로 남하했고, 카이사르가 1차 히스파니아 원정을 단행한 동안 아풀리아에 주둔해 발칸 반도에 있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이탈리아로 쳐들어오는 것을 저지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기원전 48년 카이사르의 발칸 원정에 동행했고, 디라키움 공방전에 참여했으며, 뒤이은 파르살루스 전투에 참전해 승리에 일조했다.

이후 7군단, 9군단, 10군단과 함께 이탈리아로 돌아가서 캄파니아에 주둔한 채 카이사르가 자신들에게 보상을 해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가 망명하려 했다가 살해된 이집트에 들어갔다가 알렉산드리아 전쟁에 휘말리는 바람에 소식이 끊겨버렸고, 세간에서는 카이사르가 죽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베테랑 장병들은 이러다가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할 것을 우려한 끝에 반란을 일으켰다. 일부 고위 장교가 살해되었고, 여러 도시와 마을이 약탈당했다. 카이사르를 대신해 로마를 통치하던 기병장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이들을 통제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사태를 관망하기만 했다.

기원전 47년 알렉산드리아 전쟁에서 승리하고 뒤이어 소아시아에서 침략 행위를 벌이던 폰토스 왕국파르나케스 2세젤라 전투에서 격파한 카이사르는 이탈리아에 돌아온 뒤 반란을 일으킨 군단병들과 협상한 끝에 큰 보상을 해주는 대가로 폼페이우스파가 준동하고 있는 아프리카 원정에 동참시키는 데 성공했다. 다만 12군단이 아프리카 원정에 참여했는지 여부는 기록이 미비해서 분명하지 않다. 그들은 카이사르 내전 시기에 '빅트리스(Victrix: 승리자)'라는 칭호를 획득했다고 알려졌지만, 정확히 어떤 시점에서 그런 호칭을 얻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내전이 종결된 후 군단은 해산되었고, 퇴역병들은 파르마 인근에 정착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진 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에 의해 재편성되었고, 나중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가담했다.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투에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이끄는 해방자파 군대를 격파했다. 이후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들은 기원전 41년 페루시아 내전이 발발했을 때 참여했다. 페루시아 인근 호수에서 XII Victrix라는 글자가 새겨진 물매돌이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안토니우스의 동생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중 어느 쪽을 지지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 후 시리아로 이동한 12군단은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에 참여했고, 안토니우스가 주조한 동전에서 '오래되고 검증되었다'라는 의미인 'Antiqua'로 지칭되었다. 기원전 31년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이 발발했을 때 안토니우스 편에 섰지만, 그해 9월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와 함께 패주하자 옥타비아누스에게 귀순했다. 옥타비아누스는 12군단 퇴역병들을 그리스의 파트라스에 정착시켰고, 군단 자체를 동방으로 돌려보냈다.


3. 시리아 전선 군단[편집]


12군단은 로마 제국 초대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이집트 카이로에 보내졌다가 다시 시리아로 이동하여 3군단 갈리카, 6군단 페라타, 10군단 프레텐시스와 함께 동방 속주를 방위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 시점부터 군단의 명칭은 풀미나타로 변경되었다. 기원전 20년, 아우구스투스는 로마군을 이끌고 유프라테스 강변에 주둔해 파르티아 샤한샤프라아테스 4세와 협상한 끝에 양국의 경계를 유프라테스 강으로 확정하고 파르티아가 노획했던 로마군 깃발을 돌려받았으며, 안토니우스를 따랐다가 포로가 된 로마 병사들을 돌려받았다. 이때 이들도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리아 총독 푸블리우스 퀸크틸리우스 바루스가 기원전 4년 헤로데 대왕이 사망한 후 메시아를 자칭한 히스기야의 아들 유다, 페레아의 시몬, 아트론게스의 반란을 진압할 때 시리아에 주둔한 3개 군단을 동원했다고 전해지는데, 이중 12군단도 있었을 것이다.

45년 클라우디우스 1세 황제는 프톨레마이스(현재 아크레)를 재건하고 시리아에 주둔한 4개 군단의 퇴역병들을 그곳에 정착시켰는데, 이들 중에는 12군단 출신도 있었을 것이다. 34년 아르메니아 국왕 아르탁세스 3세가 사망한 뒤, 파르티아 샤한샤 아르타바노스 2세는 장남인 아르사케스 1세를 아르메니아의 왕위에 앉히기로 마음먹고, 강력한 군대를 맡겨 아르메니아로 진격하도록 했다. 이에 티베리우스 황제는 로마가 아르메니아 왕을 선임하는 것에 동의해놓고 또다시 아르메니아 왕위를 노리는 파르티아에 분개하여 시리아 총독 루키우스 비텔리우스에게 반격하라고 명령했다.

비텔리우스는 이베리아 왕국의 자였던 미트리다테스를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세우기로 했다. 이에 이베리아인들이 호응하여 중앙아시아 출신의 유목민족들을 용병으로 기용하여 아르메니아로 진격했다. 또한 비텔리우스는 제3 갈리카 군단, 제6 페라타 군단, 제10 프레텐시스 군단, 그리고 12군단에게 파르티아군과의 일전을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이렇듯 로마와 파르티아 간에 전운이 감돌던 중, 아르사케스 1세가 서기 35년 경 돌연 사망했다. 하인들이 미트리다테스의 사주를 받고 그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사실 여부는 불명확하다.

그리하여 미트리다테스가 아르메니아의 왕위에 오르자, 아르타바노스 2세는 또다른 아들인 오로데스를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세우고자 아르메니아 왕국에 대규모 원정군을 파견했다. 하지만 미트리다테스는 알바니아인 및 사르마티아 지원군과 함께 이들을 물리쳤다. 그 사이에 비텔리우스의 로마 군대가 유프라테스 강 너머의 파르티아 영토에 진주했고, 파르티아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수도 크테시폰에서 티리다테스 2세를 샤한샤에 올렸다. 결국 아르타바노스 2세는 티리다테스 2세와 내전을 치러야 했고, 미트리다테스는 그 사이에 아르메니아 왕국을 수월하게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37년 3월 16일 티베리우스 황제가 붕어한 후 제3대 황제가 된 칼리굴라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미트리다테스를 폐위시키고 로마로 소환했다. 마침 내전을 수습하고 파르티아 전역을 다시 장악한 아르타바노스 2세는 이때를 틈타 아들인 오로데스를 아르메니아의 왕위에 앉혔다. 이후 시리아 총독이었던 루키우스 비텔리우스와 아르타바노스 2세가 유프라테스 강둑에서 만나 협상했다. 협상 결과, 파르티아는 로마와 동등한 주권을 갖는 걸 인정받고 오로데스의 아르메니아 집권도 인정받았으나 아르메니아 왕이 로마 황제를 섬겨야 한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이에 더해 다리우스라는 이름의 왕자를 로마 제국에 인질로 보내야 했다.

58~63년 파르티아-로마 전쟁이 진행 중이던 62년, 카파도키아 총독인 루키우스 유니우스 카이세니우스 파에투스는 5군단 마케도니카, 3군단 스키타카, 그리고 12군단을 이끌고 동방으로 이동했다. 도중에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와 파르티아 간에 평화협상이 이뤄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공적을 세우고 싶은 마음에 이를 무시하고 12군단과 3군단 등 2개 군단을 이끌고 파르티아 샤한샤 볼로가세스 1세의 동생인 티리다테스 1세가 다스리고 있는 아르메니아 왕국으로 쳐들어갔다.

그들은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티리다테스에게 충성했던 아르메니아의 여러 요새를 공략했다. 그러나 샤한샤 볼로가세스 1세는 즉시 반격을 가하여 파에투스를 격파하고, 아르사모사타 인근 란데이아에서 그들을 포위했다. 코르불로는 아군을 구하고자 달려갔으나, 그가 도착하기 전에 파에투스가 항복하면서 무위로 그쳤다. 볼로가세스 1세는 로마와 평화협상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2개 군단을 무장해제시킨 뒤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관대한 조치를 내렸다. 그 후 로마는 티리다테스 1세를 아르메니아 왕으로 인정하는 대신 로마 수비대를 소펜에 영구적으로 주둔하도록 했고, 티리다테스는 로마로 찾아가서 네로에게 경의를 표하기로 합의했다.

66년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 발발했다. 유대 총독 게시우스 플로루스는 유대 반란군이 장악한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12군단과 함께 18,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진격했다. 그들은 카이사레아와 야파를 공략하고 8,400명을 학살했으며, 다른 도시들로부터 충성 맹세를 받아내고 예루살렘으로 남하했다. 그러다가 게바 전투에서 아디아베네에서 온 유대 병사 500명에 의해 강화된 시몬 바르 기오라가 이끄는 유대 반란군과 교전해 500명의 병사를 잃었다. 66년 10월 초 예루살렘에 도착한 갈루스는 몇년 전 헤로데 아그리파스 1세가 예루살렘의 북쪽 절반 주위에 쌓기 시작했지만 아직 완공되지 않은 제3 성벽을 통해 도시에 들어갔다. 반란군이 성전으로 후퇴하자, 갈루스의 로마 군단병들은 성전 벽을 무너뜨리고 성전 문을 불태우려고 했다.

그러나 반란군의 거센 저항에 부딪히자, 갈루스는 철수 명령을 내렸다. 유대인들은 후퇴하는 로마군을 추격했고, 베트 호론에서 기습해 6,000명의 로마군을 죽였다. 갈루스는 짐과 공성 무기를 전부 내팽개치고 안티오키아로 달아났으며, 12군단은 아퀼라를 상실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 후 베스파시아누스가 유대 반란 진압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한 뒤 그의 지휘하에 반란 토벌에 나섰다. 이때 그들은 유독 용맹하게 싸워 여러 공적을 세웠고, 그 덕분에 명성을 되찾았다. 69년 네 황제의 해가 발발했을 때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지지하면서도 유대 반란 진압을 계속 수행했다. 70년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후 16군단 플라비아 피르마와 함께 유프라테스 강 전선을 지켰다.

92년,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로마의 속국인 이베리아 왕국과 알바니아를 지원하기 위해 12군단 분견대를 파견했다. 카스피해 해안가에서 발견된 비문에는 루키우스 율리우스 막시무스라는 이름의 12군단 백부장의 존재가 언급되었다. 12군단은 113~117년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에 참여해 아르메니아, 메소포타미아, 바빌론 등지에서 여러 전투를 치렀지만, 117년 제2차 유대-로마 전쟁이 발발하면서 전황이 불리해졌다. 트라야누스 사후 제위에 오른 하드리아누스가 유프라테스 강 동쪽의 모든 영토를 포기하기로 했고, 12군단은 본래 위치로 돌아갔다.

134년 카자흐스탄 일대의 유목민족인 알란족이 카파도키아 속주를 위협했다. 카파도키아 총독인 아리아노스는 12군단과 15군단 아폴리나리스를 이끌고 이들을 아르메니아 바깥으로 몰아냈다. 아리아노스는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알란 족과의 전투 대형>을 저술했는데, 여기엔 군대의 구성, 행군, 대열, 전술이 설명되어 있다. 162~166년 베루스의 파르티아 원정에 참여해 아르메니아 왕국의 수도였던 아르탁사타를 장악한 뒤 15군단 아폴리나리스와 함께 주둔했다.

166년 ~ 180년 마르코만니 전쟁이 발발했을 때 12군단 분견대가 파견되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173년 콰디족과 전쟁을 치르던 12군단은 원정 도중에 압도적인 수의 콰디족 군대에 포위되어 더위와 갈증 때문에 항복하기 직전까지 몰렸다고 한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소나기가 내려서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고, 콰디족은 번개가 연신 내리치는 바람에 공포에 질려 달아났다고 한다. 로마인들은 이를 신의 구원으로 여겼고, 이 자연 현상 아래 기세가 올라 콰디족을 박살냈다. 이 이야기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둥과 당시 발행된 동전에 묘사되었다. 175년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자, 12군단은 카시우스에게 협력하기를 거부하고 아우렐리우스를 끝까지 지지했다. 반란이 진압된 후, 아우렐리우스는 12군단에게 '신뢰할 수 있고 변함없다'라는 의미인 "Certa Constans" 칭호를 수여했다.

193년 다섯 황제의 해가 발발했을 때 시리아 총독 페스켄니우스 니게르를 황제로 받들었다. 그러나 니게르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게 연이어 패배하여 몰락하자 세베루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후 세베루스의 파르티아 원정으로 인해 동쪽 국경이 유프라테스 강에서 티그리스 강으로 옮겨지면서, 12군단은 국경 수비대가 아닌 국경선 뒤의 전략적 예비군이 되었다. 그 후 그들은 세베루스의 아들 카라칼라가 217년 파르티아 원정을 단행했을 때 함께 했으며,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상대로 벌인 전쟁에도 참여했다. 또한 242~244년 고르디아누스 3세의 페르시아 원정에도 참여했다.

259년,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기독교 박해 정책을 단행했다. 이때 12군단에 소속된 군단병이었던 폴리에우테스는 기독교 신앙을 버리기를 끝까지 거부했다가 순교했다. 그 후 발레리아누스는 동방 속주를 침략한 사산 왕조 샤한샤 샤푸르 1세를 무찌르기 위해 진군했지만, 260년 에데사 전투에서 패배한 뒤 사로잡혔다. 이때 12군단도 참전해 큰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2군단은 오다에나투스의 지휘하에 동방 속주를 회복했고, 갈리에누스 황제로부터 갈리에나(Galliena)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고 전해진다. 오다에나투스 사후에는 팔미라 제국을 건국한 제노비아에게 충성했지만, 272~273년 아우렐리아누스로마 재통합 전쟁으로 팔미라 제국이 무너지자 아우렐리아누스에게 충성했다.

297~298년 갈레리우스 황제의 페르시아 원정에 동행해 크테시폰 공략에 기여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로마 제국의 직위 목록인 노티타 디그니타툼(Notitia Dignitatum)에 따르면, 이들은 5세기 초에도 멜리테네에 계속 주둔하면서 유프라테스 전선을 지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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