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구(1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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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호
성희(聖希) / 환암(環菴)
본관
여주 이씨[1]
출생
1884년 1월 15일
경상도 경주부 안강현 심동
(현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안계리 심동마을 465번지)[2][3]
사망
1972년 9월 30일[4] (향년 88세)
묘소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안계1리 사곡마을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및 상세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 생애및 상세[편집]


독립유공자 이한구는 그의 형이며, 독립유공자 이훈구는 그의 4촌 형이다.[5]

이순구(李純久)는 1884년 1월 15일 경상도 경주부 안강현 심동(현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안계리 심동마을 465번지)에서 이언적의 11대손인 아버지 이능종(李能種, 1851 ~ 1890. 5. 6)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6]

1906년 4월 경상북도 청하군 북면 북동대산(北東大山)에서 친형 이한구정진한(鄭鎭漢)·손영각(孫永珏) 등과 함께 산남의진(山南義陣)을 결성하고 정용기(鄭鏞基)를 의병대장으로 추대했다. 이후 그는 주로 통신·정찰의 책임을 맡고 의진 밖에서 이세기(李世紀)·남석인(南錫仁) 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활약하였으며, 진중실기를 간략하게 뽑아 모으는 역할도 하였다.

1907년 10월 7일 의병장 정용기와 형 이한구, 손영각, 권규섭 등이 청하군 죽남면 입암리(현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에서 벌어진 입암 전투에서 순국한 후 정용기의 부친 정환직(鄭煥直)이 의진을 통솔하게 되자 그 휘하에 들어가 활약했다. 그러나 1908년 의성군 남부면(현 의성군 의성읍) 구봉산(九峰山)에서 적과 교전 중에 다리에 총상을 입고 불구가 되었다.

그후 서종락(徐鍾洛)과 후일을 기약하고 귀향하여 은거했다.

1914년에는 과거 의병 간부로 활동하던 우재룡(禹在龍)·권영만(權寧萬) 등과 연락하다가 그들의 소개로 광복회에 가입하였고, 이후 만주로 가솔들을 거느리고 피신하였다. 만주에 도착해서는 길림성 길장도(吉長道) 반석현(盤石縣)[7]에서 이상룡을 만나기도 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속하다가 8.15 광복을 맞아 귀국하였다.

이후 여생을 보내다가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으며, 1972년 9월 30일 별세하였다.

사후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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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강경주파(驪江慶州派)-무첨당파(無忝堂派) 23세 ◯구(久) 秉(병)◯ ◯燁(엽) ◯榮(영) 時(시)◯ 항렬.[2] 인근의 양동리·다산리와 함께 여주 이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이훈구도 이 마을 출신이다.[3] 1914년 작성된 지적원도를 보면, 1914년 당시 안계리 465번지는 이순구의 13촌 지간의 족숙(族叔) 이능찬(李能贊, 1866 ~ 1943. 1. 4)의 소유로 되어 있었다.[4] 음력 8월 23일.[5] 이훈구의 아버지 이능경(李能璟, 1848 ~ 1889. 12. 18)은 본래 이순구의 아버지 이능종의 셋째 형이었지만, 11촌 지간의 족숙(族叔) 이재효(李在斆, 1804 ~ 1835. 9. 26)에 입양되었으므로 족보상으론 이훈구는 이순구에게 14촌 지간의 족형(族兄)이 된다.[6] 아버지 이능종에게는 창녕 성씨 성도영(成道永)의 딸과 경주 손씨(? ~ 1920. 10. 31) 손찬호(孫瓚浩)의 딸 등 두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이순구가 누구의 소생인지는 알 수 없다.[7]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지린시 판스시(磐石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