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 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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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 · 2011-12



아일랜드의 前 축구선수


파일:Harte_Profile.jpg

이름
이언 하트
Ian Harte

본명
이언 파트릭 하트
Ian Patrick Harte
출생
1977년 8월 31일 (46세)
아일랜드 드로이다
국적
[[아일랜드|

아일랜드
display: none; display: 아일랜드"
행정구
]]

신체
175cm
직업
축구선수(수비수[1] / 은퇴)
소속
유스
홈 팜 FC
리즈 유나이티드 FC
선수
리즈 유나이티드 FC (1996~2004)
레반테 UD (2004~2007)
선덜랜드 AFC (2007~2008)
블랙풀 FC (2008~2009)
칼라일 유나이티드 (2009~2010)
레딩 FC (2010~2013)
본머스 AFC (2013~2015)
국가대표
64경기 12골 (아일랜드 / 1996~2007)

1. 개요
2. 플레이 스타일
3. 클럽 경력
3.1. 그의 리즈시절을 함께했던 리즈 유나이티드
3.2. 새로운 무대, 스페인의 레반테 UD
3.3. 3년만에 프리미어리그로의 복귀, 선덜랜드 AFC
3.4. 계속된 트라이얼 그리고 2부리그 시절
3.5. 재기의 시작, 칼라일 유나이티드시절
3.6. 재기에 성공한 레딩 FC 시절
3.7. 마지막 종착역, AFC 본머스
3.8. 은퇴 이후
4. 국가대표 경력



1. 개요[편집]


아일랜드 출신의 前 축구선수.

90년대 후반부터 00년대 초반까지 리즈 유나이티드의 중흥기를 이끌던 멤버였으며 강력하고 정교한 왼발 킥이 일품이었다.


2. 플레이 스타일[편집]


지금의 마르코스 알론소처럼 왼발 킥이 발군이었던 레프트백이었으며 좌측에서 폭발적인 오버래핑 후 왼발 끝에서 나오는 정교하고 위협적인 크로스는 리즈 뿐만 아니라 아일랜드 대표팀의 득점루트 중 하나였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왼발에만 의존하지 않지는 않고 오른발도 잘 쓰는 선수였으며 소속팀과 대표팀에서 세트피스 키커를 도맡았다.

이렇게 전성기 시절에는 제2의 데니스 어윈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리즈와 아일랜드의 왼쪽 그 자체였다.


3. 클럽 경력[편집]



3.1. 그의 리즈시절을 함께했던 리즈 유나이티드[편집]



파일:Harte_Leeds_1.jpg


하트는 아일랜드의 드로게다에서 태어났다. 1995년, 홈 팜 FC의 소속이었던 그는 당시 잉글랜드의 명문이었던 리즈 유나이티드 유스팀에 영입된다.

1996년, 퍼스트팀에 콜업된 하트는 1~2시즌은 서브 멤버로 시작했다. 그러나 1998-99시즌부터는 주전 레프트백으로 발돋움하며 활약하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출전 경기도 늘어갔다. 공교롭게도 이때부터 리즈의 짧지만 강력했던 리즈 시절은 시작이 되었다.

1998-99시즌 4위를 기록하며 UEFA 컵 진출권을 따내는데 큰 공헌을 한다.[2] 이때의 활약으로 하트는 떠오르는 레프트백으로 성장했고 팀도 다크호스로 거듭난다.

다음 시즌이었던 1999-00 시즌, 그는 팀이 UEFA 컵 준결승에 진출하는데 견인했으며 리그에서는 3위를 달성하면서 마침내 챔피언스리그 출전권을 따내는데 성공한다.

그러다가 2000년 여름, 팀이 리버풀 FC의 도미닉 마테오를 데려오면서 그의 자리가 위협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정작 시즌이 시작되고 마테오가 센터백으로 이동하면서 하트는 계속해서 리즈의 주전 레프트백으로 뛸 수 있었다.

그리고 더욱 탄력을 받은 하트는 시즌 내내 뛰어난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PFA 올해의 팀에 선정되는 기염을 토한다. 또한 유럽 대항전 무대인 챔피언스리그에서는 구단 최초로 4강의 성적을 거두며 젊은 패기로 뭉친 리즈의 위력을 세계에 보여주었다. 그러나 리그에서는 아깝게도 4위를 차지하며 2연속 챔피언스리그 진출에는 실패했다.

이렇게 잘 나가던 팀은 무리한 선수 영입으로 인한 재정악화를 겪으면서[3] 2001년부터 점점 무너지게 된다. 팀이 재정난에 빠지면서 핵심 선수들을 하나 둘씩 헐값에 팔아치워야만 했고 하트도 FC 바르셀로나의 제안을 받았지만 구단이 거절하면서 일단은 팀에 잔류하게 되었다.

리즈가 무너지기 시작한 시점부터 하트도 기량저하를 겪으면서 점점 리그 탑급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지만 리오 퍼디난드, 조너선 우드게이트, 해리 키웰 등 핵심 선수들이 빠져나가는 와중에도 그의 사촌이자 팀의 라이트백이었던 게리 켈리와 함께 팀을 지켰다.



하이버리에서의 프리킥 골 (1분 5초부터)

2002/03시즌 아스날과의 37라운드 경기에서 프리킥 골을 성공시키며 승리를 이끌었고 팀의 강등을 막았다. 다만 이는 임시방편이었을 뿐. 리즈의 빚은 이자로 갈수록 커졌고, 선수 유출은 더 심화됐다.

그렇게 2003-04시즌, 리즈는 더욱 약화된 전력으로 시즌을 시작했고 반드시 이겨야만 했던 포츠머스 FC와의 최종라운드에서 하트는 페널티킥을 성공시켰지만 팀은 패배하며 이번에는 2부리그로의 강등을 피하지 못하게 됐다. 불과 3년전에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진출로 세계를 놀라게 했던 팀의 처절한 몰락이었다.

2부리그 강등으로 선수들을 팔아야했던 팀은 프렌차이즈 스타였던 하트를 판매할 수 밖에 없었고 그의 새로운 행선지는 라 리가레반테 UD였다.


3.2. 새로운 무대, 스페인의 레반테 UD[편집]


불과 몇년전만해도 AC 밀란FC 바르셀로나의 오퍼를 받았고 심지어 바르셀로나는 1200만 파운드라는 구체적인 이적료까지 제시했었으나 구단은 거절을 했는데 그 댓가는 너무나도 참혹했다. 단 한푼도 받지 못하고 자유계약으로 하트를 레반테에 놓아준 것이다.

어쨌거나 2004년 7월 9일, 하트는 정들었던 팀을 떠나 새로 승격된 레반테로 팀을 옮겼다.

2004-05시즌 레알 소시에다드와의 1라운드에서 강력한 왼발 프리킥으로 41년 만에 팀의 라 리가 골을 선사했다.

이후 꾸준히 주전으로 활약하던 하트는 2005년 1월에 사타구니 부상으로 남은 시즌의 대부분을 결장하고 말았다. 팀은 하트가 부상으로 결장하기 전까지는 5위까지 올라갔었지만 그의 부재 이후 팀의 성적이 점차 떨어지더니 시즌 마지막 경기인 비야레알 CF전에서 패하며 1시즌만에 세군다 디비시온으로 돌아가고 만다.

원래라면 그는 강등시 이적 조항으로 팀을 나갈 수도 있었지만 부상으로 추락에 빠진 팀을 구하지 못한 책임감에 잔류하기로 한다.

그리고 부상에서 복귀 후 맞은 2부리그 무대. 하트는 여전히 1순위 레프트백이었고, 리그에서 9골을 넣는 활약으로 팀의 재승격을 견인하면서 팀과 선수 모두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다.

2006-07시즌이 시작되고 하트는 다시 한번 부상으로 장기간 결장했다. 이번에는 다행히도 팀은 15위를 기록하며 잔류했으나 구단은 하트와 상호 합의 하에 계약을 종료하게 됐다.


3.3. 3년만에 프리미어리그로의 복귀, 선덜랜드 AFC[편집]


자유계약 상태였던 하트에게 손을 내민 것은 다름아닌 대표팀 선배인 로이 킨이 지휘봉을 잡은 선덜랜드 AFC였다. 새로 승격한 선덜랜드는 경쟁력있는 시즌을 보내기 위해 알차게 선수 영입을 하고 있었다.

2007년 8월 29일, 여름 이적시장을 얼마 안남겨두고 1년 계약을 채결하며 3년만에 다시 프리미어 리그 무대로 복귀했다.

그러나 이미 부상의 여파로 기량하락이 계속됐던 하트는 한창 이름을 날렸던 리즈시절의 퍼포먼스를 보여주지 못했고 결국 시즌 종료 후 방출된다.


3.4. 계속된 트라이얼 그리고 2부리그 시절[편집]


선덜랜드에서 방출된 하트는 팀을 찾기 위해 여러군데 돌아다니며 트라이얼에 참여했다.

2008년 여름 동안에 그는 울버햄튼 원더러스에서 트라이얼을 받았으나 월 단위 계약에 대한 그들의 최종 제안을 거절했고 2008-09 시즌이 시작될 때는 무소속이었다.

2008년 9월, 그는 셰필드 유나이티드의 팀 훈련에 참여했다. 그 후 셰필드 리저브팀 소속으로 뉴캐슬 유나이티드 리저브와의 경기를 뛰기도 했다.

2부리그의 블랙풀 FC에서 몇 주 동안 트라이얼에 참여한 후 그는 2008년 12월 11일에 월 단위 계약으로 팀과 계약을 채결했다.

그는 2008년 12월 29일, 홈구장 블룸필드 로드에서 열린 울버햄턴과의 리그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고 팀은 2:2 무승부를 기록했다.

2009년 2월 2일, 하트는 상호 동의에 의해 블랙풀과의 계약을 종료했다.


3.5. 재기의 시작, 칼라일 유나이티드시절[편집]


2009년 3월 26일, 하트는 리그 1의 칼라일 유나이티드와 시즌 종료까지 단기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노스햄튼 타운 FC과의 데뷔전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주었으나 손가락 골절 부상으로 1달간 경기에 나오지 못했다.

4월 25일, 부상에서 복귀한 하트는 첼트넘 타운과의 경기에서 감각적인 프리킥 골을 선보이며 화려한 복귀전을 치렀다.

밀월과의 잔류를 두고 싸운 맞대결에서 출전하며 팀의 리그 1 잔류에 도움을 주었다. 그는 2009년 5월 18일, 팀과 2011년 여름까지 2년 계약을 맺었다.

2009-10 시즌에는 매 경기 인상적인 활약으로 풋볼 리그 트로피 준우승을 이뤄냈으며 시즌 18골로 칼라일의 최다 득점자로 시즌을 마쳤다. 또한 리그 1 올해의 팀에 선정되면서 비록 하부리그 무대였지만 확실하게 기량이 올라온 모습을 보여주며 부활의 여지를 남겨둔 의미있는 시즌을 보냈다.


3.6. 재기에 성공한 레딩 FC 시절[편집]


2010년 8월 31일, 이적시장 종료를 몇 시간 남겨두고 하트는 레딩 FC로 이적한다.

레딩에서 그는 완벽하게 부활에 성공했다. 34살의 나이에 접어들며 피지컬적인 부분은 떨어질지 몰라도 킥 하나 만큼은 죽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공격포인트를 쌓아갔다. 그렇게 첫 시즌에 리그 40경기를 출전하면서 11골을 득점했고 2010-11 챔피언십 올해의 팀에 선정되는 기쁨까지 누렸다. 수비적으로도 훌륭한 모습을 보이며 팀의 14 클린시트에 크게 일조했다.

2011-12시즌에도 활약은 여전했다. 그는 아담 페데리치, 젬 카라칸, 카스파르스 고르크슈, 제이슨 로버츠 등과 함께 프리미어 리그로 복귀하는데 있어 큰 도움을 준 5명의 핵심 선수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는 PFA 올해의 팀으로 선정되었고 이는 레딩에서 유일한 선수였다.

2012년 5월 23일, 하트는 구단과 새로운 1년 계약에 서명하면서 2013년까지 팀에 남아있게 됐다. 이로서 그는 5년만의 프리미어리그 무대에 복귀하게 됐다. 사실 레딩과 새 계약을 체결하기 전에 리즈가 그에게 관심을 표했지만 그는 레딩에 남는 것이 행복하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2012-13시즌, 하트는 오래간만에 복귀한 프리미어리그 무대에서 리그 16경기, FA컵과 리그 컵 각각 1경기씩 출전했지만 팀은 한 시즌만에 다시 강등을 당했다.

2013년 5월 15일, 시즌을 마치고 그는 자신의 트위터에 레딩을 떠날 것이라고 발표했고 9일 뒤 계약을 종료했다.


3.7. 마지막 종착역, AFC 본머스[편집]


레딩과의 계약해지 후 EFL 챔피언십의 본머스와 1년 계약을 채결했다.

로테이션 멤버로 자리잡은 하트는 한창 시즌이 진행 중이었던 2014년 4월 18일에 팀과 1년 계약을 연장했다.

다음 시즌에 팀이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하면서 다시 한번 프리미어리그 무대로 복귀하는가 싶었으나 그는 6명의 선수들과 함께 팀에서 방출되었다. 아무래도 만 36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우승 시즌에도 많은 경기를 뛰지 못한 것이 이유인듯 하다.

2015년 8월 27일, 전성기 시절, 리즈의 황금 왼발이라고 불리우던 하트는 은퇴를 선언했고 20년간의 프로선수 생활의 마침표를 찍었다.


3.8. 은퇴 이후[편집]


은퇴 후 현재는 스포츠 에이전트로 활동하고 있다.


4. 국가대표 경력[편집]



파일:Harte_National.jpg


1996년 6월 2일, 크로아티아와의 친선경기에서 A대표팀 데뷔전을 치렀다.

2002 FIFA 월드컵 유럽예선에서 맹활약하며 오렌지 군단을 제치고 본선에 진출했다.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16강스페인과의 경기에서 1:0으로 끌려가던 후반에 얻은 페널티킥을 이케르 카시야스의 선방으로 막히며 역적으로 몰리는가 싶었지만 후반 종료 직전에 로비 킨이 극적인 페널티킥 골로 승부를 동점으로 만들면서 연장으로 끌고 갈 수 있었다. 그러나 팀은 승부차기 끝에 패배하며 8강 진출에 실패했다.

[1] 레프트백[2] 당시에는 3위까지만 UEFA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이 주어졌었다.[3] 리즈가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중계권료 등 수입이 많아지자 수뇌부가 무리하게 선수 영입에 투자한 것. 이럴 경우 매 시즌 챔스 이상의 성적을 거둬야하는 위험이 따르는데 당시 리즈는 그럴만한 전력을 가진 팀은 아니었다. 이후 점차 성적이 내려가면서 구단의 수익도 줄어들었고 자연스레 재정악화가 뒤따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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