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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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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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부의 이브라힘 빈 아담 모스크

1. 개요
2. 역사
2.2. 근세
2.3. 현대


1. 개요[편집]



시리아 서부의 도시. 라타키아바니아스 사이의 해안에 위치한 도시로, 각각 북쪽과 남쪽으로 20km 가량 떨어져 있다. 기원전 1200년 무렵부터 현 지명의 유래인 도시 가발라 (기발라)가 있었고, 페니키아 ~ 로마 유적이 남아있다. 중세 시기에는 10 ~ 13세기간 동로마 - 십자군이 지배하는 등 기독교 / 이슬람 권의 각축장이었다. 14세기부터 내륙 산지의 알라위파가 내려와 정착하며 주류가 되었고, 동북쪽 15km 지점에는 하페즈 알 아사드의 고향인 카르다하가 있다. 따라서 2010년대 시리아 내전 당시 격전지가 된 남쪽의 바니아스와 달리 자블라는 아사드 정부에 충성하며 평화를 유지하고 있다. 동북쪽 2km 지점에 바셀 알 아사드 국제공항 겸 시리아 공군기지가 있는데, 이는 1994년 사망한 하페즈 알 아사드의 장남이자 당초의 후계자 바셀 알 아사드를 기리며 붙여진 이름이다.


2. 역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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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극장 유적

메소포타미아 문명우가리트 왕국의 일부로, '기빌리'로 불렸고 아케메네스 제국 시기까지 이어졌다. 당시 유적은 시가지 동쪽 외곽의 텔 트웨이니에 남아있다. 헬레니즘기에는 '가발라'라 불렸고, 로마 제국기에 7천석의 원형극장이 세워졌다. 640년경 이슬람 제국령이 되었고, 969년 동로마 제국령이 되어 다시 한세기 가량 기독교 지배가 이어지다가 1081년 남쪽 트리폴리에 기반한 바누 암마르의 영토가 되었다. 한편 11세기부터 일대에는 알라위파가 득세하게 되었다.


2.1. 십자군 전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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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기독교 성당을 개조한 이브라힘 빈 아담 모스크

1099년 2월, 1차 십자군고드프루아 드 부용이 2주간 포위한 끝에 자블라를 복속시켰다. 이후 레반트 해안을 잠식해나가는 십자군의 압박 속에 1101년 6월, 자블라의 태수는 도시를 다마스쿠스의 에미르 툭테긴에게 넘겼고, 후자는 아들 부리를 총독으로 파견했다. 다만 시민들이 반발하여 부리를 폐위시켰고, 트리폴리 병력이 진주하였다. 다만 트리폴리의 카디 파크르 알 물크는 사과 편지와 함께 부리를 다마스쿠스로 보내었다. 그리고 1108년 8월, 포위되어 있던 트리폴리에 대한 원군을 구하려 바그다드로 향했던 파크르 알 물크는 도시가 파티마 왕조에 복속한 것을 보고 자블라 태수가 되었다.[1] 그리고 여전히 트리폴리 포위가 지속되던 1109년 3월, 툴루즈 백작 베르트랑이 트리폴리 백작위를 요구하며 나타나 안티오크 섭정 탕크레드에게 함께 자블라를 공격하자고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그해 5-7월 탕크레드는 제노바 공화국 함대와 함께 자블라를 공격했고, 파크르 알 물크는 그의 봉신으로서 지배권을 유지한다는 조건 하에 항복했으나 탕크레드가 약속을 어기고 축출하자 다마스쿠스로 은퇴하였다. 한편 곧 베르트랑은 트리폴리를 점령했고, 기벨룸 (Gibellum)이라 불리게 된 자블라는 바니야스와 함께 안티오크 공국의 최남단을 구성했다.

1126년 10월 안티오크 공작 보에몽 2세는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2세의 딸 알리스와 결혼하며 라타키아와 자블라를 지참금으로 주었다. 1130년 12월, 보에몽 2세가 급사하자 알리스는 이마드 앗 딘 장기에게 청혼하며 안티오크를 장악했으나 곧 축출당하고 라타키아와 자블라 영지로 은퇴하였다. 알리스는 1132년과 1135년 재기하였으나 결국 실각하고 완전히 은퇴하여 자취를 감추었다. 1142년 9월, 동로마 제국 황제 요안니스 2세가 1137년 안티오크 공작 레몽의 약속대로 안티오크를 접수하려 남하하자, 레몽은 자블라 주교를 보내어 입성은 허가되나 소유권 이전은 불가하다고 통보하였다. 이에 요안니스 2세는 분노하여 일대를 약탈한 후, 이듬해 병탄 계획을 세웠으나 곧 요절하며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얼마 후 이마드 앗 딘 장기가 에데사를 함락하며 기세를 올리자 제일 먼저 1145년 8월, 자블라 주교 위그가 새 십자군을 청하기 위해 네스토리우스파 주교와 함께 서유럽으로 향하였다.[2]

하틴 전투 승리 후 레반트 해안을 접수하던 살라흐 앗 딘은 1188년 7월, 타르투스의 완전 점령에 실패한 후 자블라를 포위하였다. 도시는 하루만에 카디 만수르 이븐 나빌의 중재 하에 항복하였고, 살라흐 앗 딘은 더욱 북상하여 라타키아도 점령한 후 안티오크 원정에 나선다. 시내에는 지금도 살라흐 앗 딘의 쿠르드 부대가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쿠르드 모스크'가 남아있다. 1193년 살라흐 앗 딘이 사망한 후 이듬해 벌어진 내전에서 이집트의 알 아지즈와 알레포의 앗 자히르가 다마스쿠스의 알 아프달을 남북으로 협공하였다. 가문의 원로 알 아딜의 중재로 이루어진 휴전 협정에 따라 알 아지즈는 팔레스타인, 앗 자히르는 라타키아 및 자블라를 얻었다. 한편 안티오크 공작 보에몽 4세는 지속적으로 일대의 수복을 노렸고, 그는 본래 자블라가 수복되면 구호기사단에 주기로 약속했었으나13세기 초엽 안티오크 공국 내전을 거치며 구호기사단이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 측의 레몽 루벤을 돕자 대신 템플 기사단에 주는 것으로 바꾸었다. (1220년) 다만 이듬해 교황 특사 펠라지오가 양 기사단의 자블라 공유를 제안했음에도 보에몽 4세는 공국 내의 구호기사단 재산을 압수하는 등 강경책으로 일관하다가 결국 파문당하였다.

곧 관계를 회복한 구호-템플기사단은 1231년, 함께 자블라를 점려하고 포로를 취하였다. 다만 알레포의 섭정 쉬하브 앗 딘이 한 아미르를 자블라 영주로 삼아 군대와 함께 파견하자 약탈에 집중하던 십자군은 큰 피해를 입고 패배하였다. 이후 양 기사단이 약탈물과 포로를 돌려주고 회군하는 2년 간의 휴전이 성립되었다. 그러던 1260년 몽골 제국의 시리아 침공 시에 훌라구 칸이 자신에 복속한 보에몽 6세에게 라타키아-자블라를 하사하며 도시는 80여년만에 안티오크 공국령이 되었다.

2.2. 근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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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탄 이브라힘 하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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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심의 옛 거리와 바자르

1290년경 십자군이 축출되며 맘루크 왕조령이 되었다. 1318년 인근 산지에서 알라위파 봉기가 벌어져 자블라가 공격을 받자, 트리폴리 주둔 맘루크 군이 출동하여 진압하였다. 1326년에는 여행가 이븐 바투타가 자블라를 방문했다. 1516년 오스만 제국령이 된 후, 트리폴리 산작에 속하던 도시는 1547년 독자적인 자블라 산작이 되었으나 이듬해 원상복구되었다. 오스만 제국기 자블라 나히예 (군)는 는 80여개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었고, 주민의 대다수는 알라위파였다.

1564년 일대는 킬리스 산작 베이 (태수) 잔불라드 빈 카심 알 쿠르디[3]의 아들이 통치하였다. 1570년 오스만 제국의 키프로스 정복 당시 약 120km 떨어진 자블라는 그 후방 기지로써 중시되었다. 또한 자블라의 군수와 카디는 조정에게서 해적과 알라위 반군으로부터 일대를 수호할 책임을 수시로 부여받았다. 한동안 시리아 북부 해안의 중심이던 자블라는 19세기 들어 라타키아가 성장하며 중요성을 상실했고, 19세기 말엽 자블라는 20개의 신규 나히예로 나뉘었다.

2.3. 현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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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쉬르 아사드 사진이 걸린 로마 시대 극장 유적

1930년에는 동북쪽 30km 지점의 알라위 마을인 카르다하에서 미래의 대통령 하페즈 알 아사드가 탄생하였고, 사후 그곳에 안장되었다. 알라위 지역의 핵심 지역답게 자블라는 2010년대 시리아 내전에 있어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2016년 5월, 다에시가 알라위 종교 행사에서 4번의 연쇄 폭탄 테러를 감행하여 백명 이상을 희생시킨 것이 유일한 사건이었다. 비슷한 시기 인근 타르투스에서도 폭탄 테러로 48명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2023년 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 당시 자블라도 283명이 사망, 173명이 부상당하고 19채의 건물이 붕괴하는 등의 큰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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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아르카의 수비대장은 파티마조 대신 다마스쿠스의 툭테긴 선택했다.[2] 이로써 프레스터 존 설화가 퍼졌고, 3년이 걸리긴 했지만 2차 십자군도 실현되었다[3] 그의 손자 알리 잔불라드가 17세기 초엽 시리아에서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