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센알텐부르크의 알렉산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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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의 대공비
작센알텐부르크의 알렉산드라
Alexandra von Sachsen-Altenburg


파일:Alexandra of Saxe-Altenburg.jpg

이름
독일어
알렉산드라 프리데리케 헨리에테 파울리네 마리아네 엘리자베트
(Alexandra Friederike Henriette Pauline Marianne Elisabeth)
러시아어
알렉산드라 이오시포브나
(Александра Иосифовна)
출생
1830년 7월 8일
작센알텐부르크 공국 알텐부르크
사망
1911년 7월 6일 (향년 80세)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배우자
러시아의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
(1848년 결혼 / 1892년 사망)
자녀
니콜라이, 올가, 베라, 콘스탄틴, 드미트리, 뱌체슬라프
아버지
작센알텐부르크 공작 요제프
어머니
뷔르템베르크의 아말리 여공작
형제
마리, 파울리네, 테레제, 엘리자베트, 루이제
종교
루터교회러시아 정교회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결혼
2.3. 불행한 가정
2.4. 말년
3. 가족관계
3.1. 자녀



1. 개요[편집]


러시아 제국의 대공비.

작센알텐부르크 대공 요제프와 뷔르템베르크의 아말리 여공작의 5녀. 하노버 왕국마리 왕비의 동생이다.

니콜라이 1세의 차남 러시아의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의 아내로 그리스의 올가 왕비러시아의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의 어머니다. 차남 콘스탄틴의 아내이자 며느리인 엘리자베트는 본인의 오촌조카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1830년 7월 8일 알텐부르크에서 작센알텐부르크의 공세자 요제프의 5번째 자식으로 태어났다. 동생이 있었으나 유아기에 사망해 사실상 집안의 막내였다.

알렉산드라는 커다란 푸른 눈과 곧은 코, 아름다운 입술을 가진 미소녀로 성장했다. 공부에는 별 뜻이 없었으나 매우 활발했으며, 음악을 좋아했다.


2.2. 결혼[편집]


1846년에 니콜라이 1세의 차남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콘스탄틴은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왕세자와 결혼한 누나 올가 여대공을 따라 독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알텐부르크에 머물게 되었다. 두 사람이 만나게 된 배후에는 알렉산드라의 사촌이자 콘스탄틴의 숙모인 옐레나 파블로브나 대공비의 주선이 있었다. 두 사람은 성격과 정치적 견해, 종교 등 많은 부분이 달랐지만 깊은 사랑에 빠졌다. 콘스탄틴은 자신의 부모님에게 알렉산드라 외의 사람과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1847년에 러시아 제국에 도착한 알렉산드라는 정교회로 개종하고 러시아식으로 이름을 알렉산드라 이오시포브나로 바꿨다. 알렉산드라와 콘스탄틴은 1848년 9월 11일 상트페테르부르크겨울 궁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파블로프스크 궁전에서 살림을 차렸다. 부부는 금슬이 매우 좋았으며,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다.


러시아의 알렉산드라 이오시포브나 대공비, 1850년
러시아 황실에서는 아름답고 활발한 알렉산드라를 좋아했다. 알렉산드라는 남편과의 공통 관심사인 음악에 열중해 자주 연주회를 열었으며, 고아원을 운영하는 등 자선사업에 힘써 사람들의 호감을 샀다.


2.3. 불행한 가정[편집]


부부는 처음에는 애정이 넘쳤으나 점차 사이가 멀어졌다. 1862년에 콘스탄틴 대공이 폴란드의 총독으로 발령이 나면서 가족은 폴란드로 이주했다. 그러나 1년만에 폴란드에서 대대적인 봉기가 일어나면서 다시 러시아로 돌아가야 했다. 콘스탄틴은 폴란드에서의 실패 이후 농노 해방 등 각종 개혁에 힘을 쏟았지만 무엇하나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알렉산드라는 아내로써 남편의 활동을 지지했으나, 보수적인 성향 탓에 진심으로 남편을 이해하진 못했다. 콘스탄틴은 점차 공무에서 손을 놓고 외도를 하기 시작했다. 콘스탄틴은 여러 여자를 만나며 사생아를 두었고, 발레리나 출신의 정부 안나 쿠즈네초바와는 아예 새살림을 차렸다. 두 사람은 파블로프스크 궁전 근처에 집을 짓고 살았다. 대공이 아내 눈 앞에서 바람을 피고 있다는 소문은 일파만파 퍼졌고, 알렉산드라는 분노와 망신을 속으로만 삭혀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자식들 또한 알렉산드라의 속을 썩였다. 장남 니콜라이는 미국인 애인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 할아버지 니콜라이 1세가 어머니에게 하사한 다이아몬드를 훔치다 걸려 추방당했다. 차녀 베라는 폭력적인 성격과 각종 기행으로 손대기 힘들 정도로 문제아가 되었고, 고모부와 고모인 뷔르템베르크의 카를 1세올가 왕비 부부에게 보내졌다. 1879년에는 알렉산드라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인 막내 뱌체슬라프가 병으로 요절해 슬픔을 안겨주었다.

그나마 알렉산드라에게 위로가 된 것은 그리스 국왕 요르요스 1세에게 시집가 왕비의 본분을 훌륭히 해내는 장녀 올가와 모범적인 황족인 차남 콘스탄틴 뿐이었다. 특히 콘스탄틴은 알렉산드라의 친당조카인 엘리자베트와 결혼했다.


2.4. 말년[편집]


1889년에 콘스탄틴 대공은 뇌졸중으로 언어 능력이 퇴화되고 걸을 수 없게 되었다. 알렉산드라는 아내의 의무를 다해 남편을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그러나 복수라도 하듯이 남편의 정부와 사생아들이 남편의 근처에도 못 가게 했다. 그들은 콘스탄틴이 사망할 때까지 그와 만날 수 없었다.

1892년에 콘스탄틴 대공은 숨을 거두었다. 남편의 죽음 이후 알렉산드라는 점점 쇠약해졌다.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던 알렉산드라는 1911년 7월 6일에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3. 가족관계[편집]



3.1.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남
니콜라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
(Grand Duke Nicholas Konstantinovich)
1850년 2월 14일
1918년 1월 26일
나데즈다 알렉산드로브나 폰 드레옐
슬하 2남
1녀
그리스 왕국의 왕비 올가
(Olga, Queen of the Hellenes)
1851년 9월 3일
1926년 6월 18일
요르요스 1세
슬하 5남 3녀[1]
2녀
뷔르템베르크의 오이겐 공작부인 베라
(Vera, Duchess Eugen of Württemberg)
1854년 2월 16일
1912년 4월 11일
뷔르템베르크의 오이겐 공작
슬하 1남 2녀
2남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
(Grand Duke Konstantin Konstantinovich)
1858년 8월 22일
1915년 6월 15일
작센알텐부르크의 엘리자베트 공녀[2]
슬하 6남 3녀
3남
드미트리 콘스탄티노비치 대공
(Grand Duke Dimitri Konstantinovich)
1860년 6월 13일
1919년 1월 28일
[3]
4남
뱌체슬라프 콘스탄티노비치 대공
(Grand Duke Vyacheslav Konstantinovich)
1862년 7월 13일
1879년 2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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