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드 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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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장 드 베리.jpg
성명
장 드 베리
Jean de Berry
생몰년도
1340년 11월 30일 ~ 1416년 6월 15일
출생지
프랑스 왕국 벵센
사망지
프랑스 왕국 파리
아버지
장 2세
어머니
보헤미아의 보나
형제
샤를 5세, 루이 1세, 필리프 2세, 잔, 마리, 이자벨
배우자
아르마냐크의 잔, 오베르뉴의 잔 2세
자녀
본, 잔, 샤를, 베아트리스, 마리, 장, 루이
직위
베리 공작
1. 개요
2. 생애
3. 후원자
4. 가족



1. 개요[편집]


프랑스 왕국의 베리 공작. 프랑스 국왕 장 2세의 셋째 아들로, 백년전쟁 시기 잉글랜드군의 침공에 맞서 싸웠으며, 샤를 6세섭정을 역임했다.


2. 생애[편집]


1340년 11월 30일 프랑스 왕국 벵센에서 프랑스 국왕 장 2세와 보헤미아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의 딸인 보나 왕비의 세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궁정에서 자란 그는 형제자매들과 함께 할아버지 필리프 6세와 할머니 나바라의 블랑슈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러나 정작 장 2세는 자식들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가 아들들에게 보낸 서신은 단 하나도 전해지지 않으며, 푸아티에 전투 후 잉글랜드로 끌려갔을 때에도 사냥개와 매 사냥에 관한 컬렉션을 편집하는 데 관심을 보일 뿐 아들들에게 안부를 전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단지 막내아들 필리프만이 장 2세와 함께 런던에 억류되었고, 아버지로부터 매 사냥에 대한 열정을 이어받았다.

그 대신, 선량한 성격이었던 어머니 보나가 자식들에게 사랑을 베풀었다. 시인 기욤 드 마쇼에 따르면, 그녀는 자녀 양육이 자신의 삶의 소명이라고 여기고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여기에 쏟아부었다고 한다. 장 왕자는 그런 어머니에게 큰 애착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가 훗날 장녀의 이름을 '본'이라고 지었고, 50세가 되었을 때 어머니의 영혼의 안식을 위해 미사를 거행할 것을 명령한 사실로 확인된다. 장 왕자는 신학, 수사학, 문법, 변증법, 음악, 라틴어, 궁중 예법 등을 익혔고, 음유시인들로부터 문학과 시에 대한 열정을 전수받았다. 여기에 장교들로부터 무예를 익혔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여성 작가, 시인, 철학자인 크리스틴 드 피장에 따르면, 장 왕자는 어릴 때부터 무기를 자신감있게 휘둘렀으며 토너먼트에서 두 번 이상 두각을 나타냈다고 한다.

1349년 9월 11일, 어머니 보나가 중세 흑사병에 걸려 사망했다. 이후 장 2세는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의 미망인이었던 오베르뉴의 잔 1세와 재혼했다. 하지만 그녀는 전처의 자식들의 양육을 필리프 6세가 새 왕비로 삼은 나바라의 블랑슈에게 전적으로 맡겼다. 당시 18세였던 블랑슈는 장 왕자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편지를 자주 교환했으며, 1398년 10월 5일 사망했을 때 자신이 모은 책과 보석 일부를 장에게 물려줬다.

장 왕자는 1357년 6월 푸아투 백작에 선임되었고, 1360년 10월 베리 공작에 선임되었다. 1360년 브레티니 평화 협약이 체결된 후, 아버지 장 2세를 대신해 잉글랜드에 인질로 보내졌다. 1361년 5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로부터 꼭 돌아오겠다는 조건으로 프랑스로의 여행을 허가받았다.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로 갔던 형제 루이 1세와 는 달리, 그는 약속을 준수했다. 이후 1364년 4월 8일 사망한 아버지의 유해가 잉글랜드에서 프랑스로 돌아가는 여정을 도버 항까지 동행했으며, 1364년 말부터 1365년 초까지 프랑스를 일시적으로 방문했다가 다시 런던으로 돌아갔다.

1366년 2월 프랑스에 완전히 돌아온 뒤 샤를 5세로부터 볼로뉴와 오베르뉴의 보안관에 선임되었다. 1369년 프랑스와 잉글랜드간의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센 강과 루아르 사이의 영역을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372년 베르트랑 뒤 게클랭과 함께 푸아투 공략에 힘을 기울인 끝에 7월 31일에 생세브르 요새를 함락했으며, 8월 7일 푸아티에를 탈환했다. 1374년 뤼지냥 성을 포위해 몇 주간의 치열한 공성전을 지휘한 끝에 함락했다.

1374년경, 장과 샤를 5세의 관계는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악화되었다. 샤를 5세는 장으로부터 생통즈와 앙구무아를 회수했으며, 재무 문제에 그를 더 이상 참여시키지 않았다. 이후 그는 전쟁에 더이상 참여하지 않고 베리와 푸아투에서 가족과 함께 지냈다. 그러던 1380년 샤를 5세가 사망하고 12세의 샤를 6세가 왕위에 오르자, 그는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와 함께 섭정을 맡았으며, 랑그독 보안관이자 도르도뉴 남쪽 일대의 최고 보안관에 선포되었다. 하지만 그는 랑그독과 도르도뉴 남쪽 일대의 관리를 부하들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파리에 남아서 정국을 주도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를 받던 주민들은 전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막대한 세금을 거두는 그에게 강한 불만을 품고 소요를 연이어 일으켰다. 급기야 1381년, 프랑스 남부에서 강력한 권세를 누리고 있던 푸아 백작 가스통 3세 페부스가 장의 지시에 따라 세금을 악착같이 거두는 세네샬 3명을 약탈자라고 비난하면서, 랑그독 주민들에게 자신이 잉글랜드와의 전쟁을 중단하고 동원을 해제하며, 주민들을 착취하는 세네샬들을 제거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호응한 랑그독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장은 샤를 6세와 함께 진압에 착수했다. 이후 프랑스 왕실군의 공세로 랑그독 각지에서 심각한 약탈이 발생하자, 가스통 3세 페부스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 65,000 프랑을 즉시 왕실에 지불하고 평화 협약을 맺었다. 가스통 3세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 랑그독 주민들은 항복하고 베리 공작에게 복종하는 대신 자신들을 사면하고 몰수된 재산을 배상해달라고 요청했고, 프랑스 왕실은 이를 받아들였다. 1381년 12월, 베지에에서 열린 랑그독 의회에서 14세 이상의 모든 주민이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을 거행하기로 결의했다.

1385년 6월, 장은 루넬, 에탕프, 기옌 일대를 형제 루이 1세로부터 양도받았다. 이후에도 섭정으로서 권세를 누리던 그는 1388년 친정을 선포한 샤를 6세에 의해 권좌에서 밀려났다. 샤를 6세는 1389년 장에게서 랑그독 보안관 직함을 박탈했고, 장이 가장 총애하는 가신으로서 랑그독에서 세금을 악착같이 뜯어내 만민의 증오를 한 몸에 받고 있었던 장 베티삭을 이단 혐의를 적용해 화형에 처했다. 이후 영지에서 조용히 지내던 장은 1392년 이후 샤를 6세가 광기에 시달리면서 통치를 할 수 없게 되자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 조카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와 함께 권력을 다시 장악하고 샤를 6세의 고문들을 배제했다. 이후 병든 왕의 영향력을 놓고 부르고뉴 공작과 오를레앙 공작 사이의 심각한 대립이 벌어졌을 때, 그는 중재자 역할을 수행했다. 1401년에는 다시 랑그독, 베리, 오베르뉴, 푸아티에의 보안관에 선임되었다.

1404년 호담공 필리프가 사망한 뒤 부르고뉴 공작이 된 용맹공 장이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노골적인 행보를 보이면서 정치적 상황은 갈수록 심해졌다. 그러던 1405년 9월 21일, 베리 공작 장은 파리 수비대 사령관으로 선임된 뒤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을 일체 차단하기 위해 노력했다. 1407년 11월 23일 오를레앙 공장 루이 1세가 부르고뉴 공작 장의 사주를 받은 무리에 의해 피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그는 내전이 벌어질 것을 우려해 부르고뉴 공작의 사면을 옹호했다. 1409년 3월 9일, 그는 루이 1세의 상속자들이 용맹공 장과 화해하고 다시는 갈등을 벌이지 않겠다는 내용의 샤르트르 조약에 서명하게 했다.

그러나 이 합의는 오래가지 못했고, 부르고뉴 공작에 반감을 가진 세력이 아르마냐크 파를 결성했다. 이후 부르고뉴 파와 아르마냐크 파간의 내전이 발발하자, 그는 고심 끝에 자신의 사위인 베르나르 다르마냐크가 지도자를 맡고 있는 아르마냐크파를 지지하기로 했다. 그는 파리를 장악한 부르고뉴 파를 포위해 도시가 기아에 시달리게 만든 끝에 항복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1411년 10월 베리로 돌아간 사이 용맹공 장이 다시 파리를 점령하고 그에게서 랑그독 보안관 직함을 박탈했다. 이후 용맹공 장은 1412년 샤를 6세를 내세워 베리 공작의 거주지인 부르주를 포위했다. 결국 그는 백기를 들었고, 1412년 10월 파리로 이송되었다.

1413년 초 삼부회가 소집된 뒤 파리에서 부르고뉴 공작을 지지하는 군중이 일으킨 카보시앵 반란이 일어났다. 독특한 흰색 모자를 쓴 폭도들은 아르마냐크 귀족과 추종자를 마구잡이로 살육하고 재산을 약탈한 뒤 파리를 4개월 동안 장악했다. 그는 한 수도원으로 도피한 뒤 그곳에서 우울증 치료를 받았다. 그러다가 반란이 진압된 뒤 두번째로 파리 수비대 사령관에 선임되었고, 랑그독 보안관을 재차 맡게 되었다. 1415년 아쟁쿠르 전투가 벌어졌을 때 프랑스군과 함께 있었지만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후 파리에 돌아간 뒤 질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군대 지휘권을 베르나르 다르마냐크에게 넘겼다. 1416년 6월 15일에 파리에서 사망했다.


3. 후원자[편집]


베리 공작 장은 자신이 다스리는 영지의 주요 궁전을 수리하거나 확장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380년 푸아티에 궁전을 개조했으며, 부르주의 공작의 궁전을 재건했고, 1405년에 생트 샤펠 뒤 팔레를 모델로 삼아 부르주 생트 샤펠을 건설했다. 여기에 1382년에서 1389년 사이에 리옴 궁전을 개조했고, 메훈쉬르예브르 성을 개조하고 가족을 그곳에 거주하게 했으며, 뤼지냥 성 개조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 건축 활동을 맡은 주요 건축가는 프랑스의 건축가 기 드 담마르탱으로, 그로부터 막대한 후원을 받으며 여러 건축물을 건설했다.

장은 예술 활동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보석 세공사 및 조각가들을 후원해 보석, 메달 및 금세공품을 제작하게 했으며,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선물받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그가 수집한 보물들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성스러운 가시의 성물함과 성 아녜스의 잔은 현재 대영 박물관에 보관되고 있고, 맹세의 십자가는 빈의 황금 양모 기사단 금고에 보관되고 있다. 한편 그는 책을 읽는 것도 무척 좋아해 300권의 사본을 수집했는데, 그중 41권은 연대기, 24권은 과학과 예술에 관한 작품, 15권은 철학과 정치에 관한 논문, 14권은 성경, 16권은 시편, 18권은 성무일도서, 6권은 미사 전례서, 나머지 책들은 신학에 관한 책들이었다. 그가 수집한 책들엔 아름다운 삽화가 대거 삽입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그의 종교 서적 컬렉션은 가장 방대하고 디자인 면에서 가장 정교했다.

장의 후원을 받으며 삽화 제작에 참여한 예술가들은 서로 경쟁하면서 기술을 향상하고 새로운 예술적 경향을 습득했다. 새로운 예술가에 대한 그의 끊임없는 탐색은 당대의 미술 발전에 상당한 공헌을 했다. 그의 후원을 받은 대표적인 예술가로는 네덜란드 조각가 앙드레 본느뵈, 네덜란드의 삽화 화가 림부르크 형제, 프랑스의 화가 자크마르 드 헤스댕과 장 르 느와르를 들 수 있다.


4. 가족[편집]


  • 아르마냐크의 잔(1348 ~ 1388): 아르마냐크 백작 장 1세 다르마냐크의 딸.
    • 본(1367 ~ 1435):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7세와 초혼,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와 재혼.
    • 잔(1373 ~ 1375): 요절.
    • 샤를(1371 ~ 1383): 몽펜시에 백작.
    • 베아트리스(1374): 요절.
    • 마리(1375 ~ 1434): 뒤누아 백작 루이 3세 드 샤티용과 초혼, 외 백작 필리프 다르투아와 재혼, 부르봉 공작 장 1세와 삼혼.
    • 장(1375/1376 ~ 1397): 몽펜시에 백작.
    • 루이: 요절.
  • 오베르뉴의 잔 2세(1378 ~ 1424): 오베르뉴 백작 장 2세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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