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다이노스/19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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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버팔로가 해체됨에 따라 대한축구협회 회장사인 현대의 주선으로 주식회사 현양 대표이사 신준호를 대주주로 하는 새로운 팀인 전북 다이노스가 출범했으며 1994년 11월 25일 팀 창단 설명회를 가지면서 공식 일정을 시작했다.
1994년 12월 12일 프로축구 신생팀 전북다이노스가 전주 코아호텔에서 조남조 전북지사를 비롯, 3백여명의 전북도내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창단식을 갖고 공식출범했다.
전북 다이노스 축구단은 프로리그 출범 후 7번째로 탄생한 신생구단으로 호남 지역 최초로 생긴 프로 축구단이어서 감회는 더욱 남다르다. (주)현양이 10억원을 기본자금으로 출자하고 현대자동차가 홍보 스폰서 형식으로 20억원을 후원, 독립법인체 주식회사를 설립해 팀을 창단했다. 특히 도민들의 1인 1주 갖기 운동을 전개해 지역민들과 함께 하는 첫 구단이 되었다는 의의가 있다.
초대 사령탑으로 차경복 전 경희대 감독을 선임하고 최만희 전 울산대 감독을 코치로, 1983년 FIFA 청소년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인공인 신연호를 트레이너로 영입해 코칭스태프 진영을 구축했고, 선수단은 27명으로 구성하여 출발했다.
주로 사실상의 전신인 전북 버팔로에서 뛰던 선수들을 축으로 부산공대의 장철민, 아시아대회 국가대표 공격수인 김도훈과 이경춘이 보강됐으며 기존 프로팀에선 정종선 (울산 현대), 김이주, 오동천 (천안 일화) 등을 영입하며 32명으로 최종 선수 구성을 마쳤다.#
※ 주의 이 틀은 기기 환경에 따라 볼 때 상당히 길 수 있습니다.
• 전북 다이노스의 창단식에서 드래프트에서 15명, 버팔로를 포함한 기존 구단에서 15명의 선수를 받아 30명으로 선수단을 구성한다고 발표하였다. 추후에 추가 드래프트가 실시되어 2명의 선수를 더 받아 총 32명의 선수로 시즌을 시작하였다.
루디스 유니폼으로 스폰서 마킹은 아반떼를 달았다. 이 디자인은 1998년까지 계속 쓰였으며 일명 색종이 유니폼이라고 불리운다.
• 이후 유니폼은 전북 현대 모터스/유니폼 참고.
아디다스 컵(리그컵대회)과 하이트배 코리안 리그(정규리그)으로 나뉘어 시즌이 개최되었다.
같은 호남의 신생팀 전남 드래곤즈를 상대로 일화 천마서 이적한 미드필더 오동천의 돋보이는 활약을 바탕으로 백송, 김성호, 이경춘, 김경래 등 버팔로 멤버의 짜임새 있는 조직력을 앞세워 대승을 일궈냈다. 전반 21분에 문전 혼전중 오동천이 쏜 슛이 골문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전남의 양동연이 손으로 쳐내 PK의 기회를 얻었고, 김도훈이 침착하게 골로 연결시켜 역사적인 구단 첫골을 넣었다. 이어 전반 종료직전 정종선이 길게 찔러준 공을 받은 김범수가 무인지경에서 상대 골키퍼를 제치고 두번째 골을 엮어내 승기를 잡았다. 후반 10분에 김도훈이 상대 수비수의 반칙으로 PK를 얻었고 최진규가 쐐기골을 성공하여 3대 0 대승을 일궈내며 프로리그를 화려하게 데뷔했다.
• J리그가 전기,후기리그로 나뉘어 챔피언결정전을 치루자, 그 포맷을 그대로 따라했다. 정규리그는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전후기 1위가 챔피언 결정전을 치르는 방식이었다.
없음.
창단 초기 타 구단에 비해 약한 자금력 때문에 마땅한 숙소가 없어 여관을 전전했다. 또 전용구장이 없어 연습할 경기장을 찾느라 담당자는 매일 아침 군산, 익산, 김제 등 도내 각 지역에 훈련장을 섭외하느라 전쟁을 치르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이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전북은 한국 프로축구의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며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창단과 함께 최약체라는 평을 비웃듯 아디다스컵과 후기리그서 각각 4위에 올라 돌풍을 일으킨 것. 만약 주전들의 부상만 없었다면 더 좋은 성적을 거두었을지 모른다. 전기리그 시작과 함께 주전들이 부상으로 그라운드에 나서지 못하게 되자 리그 성적은 7위로 곤두박질 쳤다.
그러나 홍보 스포서인 현대자동차 전주공장 사옥이 완성되면서 선수단 숙소가 마련되고 주전 선수들도 차츰 부상에서 회복, 그라운드에 복귀하면서 팀은 안정을 찾기 시작했고 성적도 향상 되어갔다.
전기리그를 7위로 끝낸 전북 선수단은 버팔로 시절을 잊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 아디다스컵에서 4위를 기록하며 돌풍을 이어갔다. 신토불이를 고집하던 전북은 얇은 선수층의 한계에 봉착했고 결국 아디다스컵이 끝난 후 후기리그에 대비해 용병들을 영입하며 안정을 찾아갔다.
우크라이나 공격수 비탈리와 마케도니아 미드필더 잔코, 러시아 GK 알렉세이 등이 공수에서 돋보였고 신인왕을 노리다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하던 김도훈이 복귀하면서 단번에 4위까지 치고 올라갔다.
특히 김도훈(9골 5어시스트), 김범수(7골 3어시스트)의 'K-K'라인은 국내 최고의 황금 콤비인 '황선홍-라데(포항)'에 결코 손색이 없을만큼 발굴의 기량을 선보였다.
그러나 울산 현대에게 4전 전패를 당한 것과 천안 일화에게 약한(1무 3패) 징크스를 남긴 것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전기리그 7위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시작한 전북.
그러나 뚝심의 축구와 버팔로 시절 어려웠던 기억을 떨쳐 버리겠다는 굳은 각오로 최선을 다해 후기 약진을 벌였다.
1. 프롤로그[편집]
전북 버팔로가 해체됨에 따라 대한축구협회 회장사인 현대의 주선으로 주식회사 현양 대표이사 신준호를 대주주로 하는 새로운 팀인 전북 다이노스가 출범했으며 1994년 11월 25일 팀 창단 설명회를 가지면서 공식 일정을 시작했다.
1994년 12월 12일 프로축구 신생팀 전북다이노스가 전주 코아호텔에서 조남조 전북지사를 비롯, 3백여명의 전북도내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창단식을 갖고 공식출범했다.
전북 다이노스 축구단은 프로리그 출범 후 7번째로 탄생한 신생구단으로 호남 지역 최초로 생긴 프로 축구단이어서 감회는 더욱 남다르다. (주)현양이 10억원을 기본자금으로 출자하고 현대자동차가 홍보 스폰서 형식으로 20억원을 후원, 독립법인체 주식회사를 설립해 팀을 창단했다. 특히 도민들의 1인 1주 갖기 운동을 전개해 지역민들과 함께 하는 첫 구단이 되었다는 의의가 있다.
초대 사령탑으로 차경복 전 경희대 감독을 선임하고 최만희 전 울산대 감독을 코치로, 1983년 FIFA 청소년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인공인 신연호를 트레이너로 영입해 코칭스태프 진영을 구축했고, 선수단은 27명으로 구성하여 출발했다.
주로 사실상의 전신인 전북 버팔로에서 뛰던 선수들을 축으로 부산공대의 장철민, 아시아대회 국가대표 공격수인 김도훈과 이경춘이 보강됐으며 기존 프로팀에선 정종선 (울산 현대), 김이주, 오동천 (천안 일화) 등을 영입하며 32명으로 최종 선수 구성을 마쳤다.#
2. 1995 시즌 선수단 및 스탯[편집]
※ 주의 이 틀은 기기 환경에 따라 볼 때 상당히 길 수 있습니다.
3. 이적 시장[편집]
• 전북 다이노스의 창단식에서 드래프트에서 15명, 버팔로를 포함한 기존 구단에서 15명의 선수를 받아 30명으로 선수단을 구성한다고 발표하였다. 추후에 추가 드래프트가 실시되어 2명의 선수를 더 받아 총 32명의 선수로 시즌을 시작하였다.
4. 유니폼[편집]
루디스 유니폼으로 스폰서 마킹은 아반떼를 달았다. 이 디자인은 1998년까지 계속 쓰였으며 일명 색종이 유니폼이라고 불리운다.
• 이후 유니폼은 전북 현대 모터스/유니폼 참고.
5. 1995 아디다스컵[편집]
아디다스 컵(리그컵대회)과 하이트배 코리안 리그(정규리그)으로 나뉘어 시즌이 개최되었다.
5.1. 1R, 03월 25일 (토) vs. 전남, 원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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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 요약
같은 호남의 신생팀 전남 드래곤즈를 상대로 일화 천마서 이적한 미드필더 오동천의 돋보이는 활약을 바탕으로 백송, 김성호, 이경춘, 김경래 등 버팔로 멤버의 짜임새 있는 조직력을 앞세워 대승을 일궈냈다. 전반 21분에 문전 혼전중 오동천이 쏜 슛이 골문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전남의 양동연이 손으로 쳐내 PK의 기회를 얻었고, 김도훈이 침착하게 골로 연결시켜 역사적인 구단 첫골을 넣었다. 이어 전반 종료직전 정종선이 길게 찔러준 공을 받은 김범수가 무인지경에서 상대 골키퍼를 제치고 두번째 골을 엮어내 승기를 잡았다. 후반 10분에 김도훈이 상대 수비수의 반칙으로 PK를 얻었고 최진규가 쐐기골을 성공하여 3대 0 대승을 일궈내며 프로리그를 화려하게 데뷔했다.
5.2. 2R, 04월 01일 (토) vs. 유공, 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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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 요약
5.3. 3R, 04월 05일 (수) vs. 대우, 원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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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 요약
5.4. 4R, 04월 08일 (토) vs. 현대, 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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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 요약
5.5. 5R, 04월 15일 (토) vs. 포항, 원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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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 요약
5.6. 6R, 04월 19일 (수) vs. LG, 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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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 요약
5.7. 7R, 04월 22일 (토) vs. 일화, 원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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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 요약
6. 1995 하이트배 코리안리그[편집]
• J리그가 전기,후기리그로 나뉘어 챔피언결정전을 치루자, 그 포맷을 그대로 따라했다. 정규리그는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전후기 1위가 챔피언 결정전을 치르는 방식이었다.
자세한 내용에 대한 내용은 전북 다이노스/1995년/코리안리그 문서 참고하십시오.
7. 시즌 평가[편집]
7.1. 주요 기록[편집]
7.2. 수상 내역[편집]
없음.
7.3. 시즌 총평[편집]
창단 초기 타 구단에 비해 약한 자금력 때문에 마땅한 숙소가 없어 여관을 전전했다. 또 전용구장이 없어 연습할 경기장을 찾느라 담당자는 매일 아침 군산, 익산, 김제 등 도내 각 지역에 훈련장을 섭외하느라 전쟁을 치르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이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전북은 한국 프로축구의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며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창단과 함께 최약체라는 평을 비웃듯 아디다스컵과 후기리그서 각각 4위에 올라 돌풍을 일으킨 것. 만약 주전들의 부상만 없었다면 더 좋은 성적을 거두었을지 모른다. 전기리그 시작과 함께 주전들이 부상으로 그라운드에 나서지 못하게 되자 리그 성적은 7위로 곤두박질 쳤다.
그러나 홍보 스포서인 현대자동차 전주공장 사옥이 완성되면서 선수단 숙소가 마련되고 주전 선수들도 차츰 부상에서 회복, 그라운드에 복귀하면서 팀은 안정을 찾기 시작했고 성적도 향상 되어갔다.
전기리그를 7위로 끝낸 전북 선수단은 버팔로 시절을 잊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 아디다스컵에서 4위를 기록하며 돌풍을 이어갔다. 신토불이를 고집하던 전북은 얇은 선수층의 한계에 봉착했고 결국 아디다스컵이 끝난 후 후기리그에 대비해 용병들을 영입하며 안정을 찾아갔다.
우크라이나 공격수 비탈리와 마케도니아 미드필더 잔코, 러시아 GK 알렉세이 등이 공수에서 돋보였고 신인왕을 노리다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하던 김도훈이 복귀하면서 단번에 4위까지 치고 올라갔다.
특히 김도훈(9골 5어시스트), 김범수(7골 3어시스트)의 'K-K'라인은 국내 최고의 황금 콤비인 '황선홍-라데(포항)'에 결코 손색이 없을만큼 발굴의 기량을 선보였다.
그러나 울산 현대에게 4전 전패를 당한 것과 천안 일화에게 약한(1무 3패) 징크스를 남긴 것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전기리그 7위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시작한 전북.
그러나 뚝심의 축구와 버팔로 시절 어려웠던 기억을 떨쳐 버리겠다는 굳은 각오로 최선을 다해 후기 약진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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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식적으로는 두 구단은 별개의 구단으로 구분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