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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스틸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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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73년에 창단된 경상북도 포항시를 연고로 하는 K리그1 소속의 프로 축구단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프로 축구단[7] 으로 많은 국가대표 선수들을 배출했다. 51년의 역사와 함께 K리그1 5회 우승(1986, 1988, 1992, 2007, 2013)[8] , FA컵 5회 최다 우승(1996, 2008, 2012, 2013, 2023)[9] , AFC 챔피언스 리그 3회 우승(1996-97, 1997-98, 2009)[10] 기록을 가지고 있다. 아울러 10년대마다[11] 주요 대회[12] 우승컵을 한 번 이상 들어올린 K리그 유일의 구단이기도 하다.
2. 시즌별 일람[편집]
3. 역사[편집]
자세한 내용은 포항 스틸러스/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73년 창단 이래로 줄곧 강호 구단이었으며 K리그 출범 원년부터 현재까지 단 한 번도 강등 당하지 않고 1부 리그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일한 구단이다. 리그 우승 횟수는 5회로, 9회인 전북과 7회인 성남, 6회인 서울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리그 우승을 거뒀다. 또한 FC 서울과 더불어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모두 리그 우승을 기록한 두 구단 중 하나다.
1997년과 1998년에는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을 연패하며 대륙 최상위 클럽 대항전을 연속 우승하는 K리그 최초의 구단이 됐으며 2009년에는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으로 FIFA 클럽 월드컵에 참가하여 K리그 최고 성적인 3위를 기록했다.[13]
포항은 훌륭한 성적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선진 축구를 흡수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K리그 원년 대한민국 프로축구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선수를 영입했고(1983년), 대한민국 최초의 축구전용구장 포항 스틸야드를 건설하여 현재까지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있으며(1990년), 포철공고 축구부를 창단하여 K리그에서 유소년 시스템을 가장 먼저 정착시켰고(1993년),[14] 다른 기업 구단들보다 먼저 구단을 법인화했으며(1995년)[15] 대한민국 최초의 클럽 하우스인 송라클럽하우스를 개장했다(2001년). 그리고 2013년에는 창단 40주년을 기념하여 포항 스틸러스 명예의 전당을 만들었다. 대한민국 프로 스포츠 사상 구단이 자체적으로 명예의 전당을 만든 것은 포항 스틸러스가 최초다.
즉, 한국 프로축구 구단들 중 가장 뼈대있는 클럽이라고 볼수있다.
한국축구 역사를 바꾼 포항의 다섯 가지 기록
4. 우승 멤버[편집]
5. 유소년 체계[편집]
이외에 직접 운영하지는 않지만 여자 축구단을 운영하는 포항항도중학교, 포항여자전자고등학교는 포항 스틸러스의 유니폼을 그대로 쓴다.
6. 역대 감독[편집]
7. 역대 주장[편집]
포항 스틸러스의 초대 주장은 1973년 창단식에서 주장으로 선임된 황종현이다. 황종현은 1990년대에 포항에서 단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8. 코칭 스태프 명단[편집]
9. 선수 명단[편집]
10. AFC 챔피언스 리그[편집]
자세한 내용은 포항 스틸러스/AFC 챔피언스 리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1. 상징[편집]
11.1. 가로검빨과 시안블루[편집]
포항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강렬한 검정 빨강 가로 스트라이프 유니폼. 1984년 프로화 이후 처음 입기 시작해 현재까지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포항의 상징이자 정체성이다. 특히 2018년 홈 유니폼이 창단 45주년을 기념하여 '백 투 더 오리지널(Back to the Original)'이라는 컨셉으로 포항제철 축구단 시절 1985년부터 1992년까지의 초기 유니폼에서 모티브를 얻어 특유의 빨강과 검정 스트라이프를 당시의 배열 순으로 그대로 차용했다.
또한 법인화 이후 1996년부터 홈 유니폼의 메인 컬러로 사용한 시안블루도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을 2연패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2000년까지 디자인을 유지하며 사용되었다가 다시 검정 빨강 스트라이프를 사용하기 시작하며 홈 유니폼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후 쇠돌이 20주년이 되는 2017년, 1997년 스타일 그대로 복원하여 원정 유니폼으로 사용하였고, 현재까지 원정 유니폼의 색상으로 사용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포항 스틸러스/유니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1.2. 영일만 친구[편집]
자세한 내용은 영일만 친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포항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노래이기에, 오래 전부터 포항 스틸러스 팬들의 응원가로 쓰여 왔다.[32] 40년이라는 오랜 역사를 지닌 만큼 1970년대부터 경상북도 포항시가 인구 51만에 이르는 현재까지 포항 시민들과 애환을 함께해 왔다.
홈경기에서 골을 넣었을 때 이 노래가 골 송으로 나오며 포항의 서포터들이 승리가 확정된 88분 즈음부터 단체 합창에 들어간다. 특히 홈경기에서는 승전 시 서포터, 일반 관중 구분 없이 모두가 합창하는 영일만 친구는 소름이 돋을 정도. KBO 리그와 달리 K리그 구단 중에서는 지역색이 드러난 노래를 응원가로 삼고 있는 곳이 거의 없기 때문에[33] K리그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기도 하다.
2023 시즌 FA컵 우승을 했을 때도 포항의 서포터들은 영일만 친구를 불렀다.#
11.3. 스틸타카와 스틸러스 웨이[편집]
포항 고유의 특징이 있다면 바로 미드필더의 세밀한 패스에 이은 호쾌한 공격 축구다. 해외 축구 팬들에게 K리그 스타일은 뻥축구와 시간 끄는 수비 축구라는 고정관념을 한 방에 날려버렸으며, 심지어는 야구 팬들이 야구 중계 안 해준다고 채널을 돌려보다가 포항 축구를 보고 'K리그도 재미있네?'하고 K리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는 일화도 있다. 남들이 뻥축을 시전하고 있을 때 포항은 유스 시절부터 패스 축구를 가르쳐 왔고 2000년대 중반 이후 패스 축구가 팀스타일이 됐다.
공격 축구 자체는 1990년대에 황선홍-라데 시절부터 유명했던 포항이지만 세르지우 파리아스 감독 이전에는 감독 바뀌면 스타일도 바뀌는 팀이었다. 박성화 감독과 최순호 감독 첫번째 재임기가 대표적인데 이 중 최순호 감독 재임기간 리그 꼴찌까지 떨어져 본 유일한 시기이기 때문에[34] 준우승을 거뒀음에도 포항 팬들에게는 엄청난 흑역사이다.
보통 K리그 팀들의 악폐습이 1골 넣으면 바로 잠그고 쓸데없이 심판 잡고 늘어지거나 경기 템포를 늦추는 것이었지만, 포항은 그런 짓 하면 이겨도 구단에서 수당을 안 준다. 이것이 2009 시즌부터 도입된 그 유명한 Steelers-Way로 ▲실제 경기 시간(Playing Time)을 5분 이상 늘리고 ▲경기 매너를 지키며 ▲심판의 권위를 존중하고 판정을 겸허히 수용하는 동시에 ▲포항 선수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겠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포항의 경기를 보면 1골 넣어도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 2005년 파리아스 감독이 처음 부임하고 가장 먼저 선수들에게 지시한 것이 백 패스 금지였고, 당시 뻥축구와 고리타분한 전술[35] 로 정체되어 있던 K리그에 새 바람을 몰고 오며 '파리아스 매직'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낸다. 쓸데없는 백패스는 물론, 빌드업 과정에서 백패스를 해도 바로 교체되었을 정도이며 파리아스 감독은 이러한 공격 축구로 2007년 K리그 우승, 2008년 FA컵 우승, 2009년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과 리그컵 우승을 일구어 내며 언론의 찬사를 받는데 이 시절 포항의 경기는 성적도 잘 나오고 결정적으로 경기가 재미있었다. 이기든 지든 기본 3골부터 시작하는 경기가 많고, 2골을 먼저 실점하더라도 절대 질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2009년 9월 13일 제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09 K리그 22라운드에서 제주 유나이티드를 8-1로 꺾어 한 경기 최다 골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파리아스 재임 시절에는 이러한 공격 성향이 너무 강해서 후반 막판 어이없는 실점으로 무를 캐는 경기도 많았는데, 2011년 후임으로 황선홍 감독 취임 이후 2011년~2012년 2년간의 시행착오를 거치고 미드필더와 수비를 정비하면서 황선홍 감독 체제 종반기에는 K리그에서 손꼽히는 패싱 축구를 구사하는 팀으로 거듭났다. 2012 시즌 중반, 당시 UEFA 유로 2012에서 화제가 되던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의 제로 톱(4-6-0) 전술을 장착하는가 하면, 황선홍 감독은 상황에 따라서 원 톱, 투 톱까지 자유롭게 용병술을 구사하며 상대 팀들을 농락했다. 이러한 패스 플레이에 감탄한 축구 팬과 언론들이 붙인 별명이 FC 바르셀로나의 티키타카에서 따온 스틸타카다.
그러나 스틸타카란 용어는 문외한에 가까운 기자들이 '패스 축구 = 티키타카'라는 인식 때문에 붙인 별명일 뿐이지 실제로 포항이 FC 바르셀로나식의 점유율 축구를 구사하는 건 아니다. 자세한 사항은 티키타카 문서 참조. 티키타카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면 알겠지만, 간단히 말해 바르셀로나/스페인 국대식 티키타카에서 패스는 공을 오래 가지고 있기 위한 수단이지만 포항의 전술에서 패스는 그저 상대방 문전에 빨리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다. 애초에 패스의 목적 자체가 다르다. 필요하다면 장신 타깃맨을 전방에 세워두고 길게 연결하는 뻥축구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36]
파리아스 감독이 부임하면서 스틸타카로 지칭되는 공격적인 패싱 축구가 포항의 팀 컬러로 완전히 정착했고, 최순호 감독의 두번째 재임기를 거쳐 파리아스 감독 시절 선수로 활약했던 김기동 감독이 부임하며 포항의 팀 컬러를 꾸준히 이어나가고 있다.[37] 역사가 짧고 부침이 많은 K리그 팀들에게 명문 칭호를 붙일 수 있느냐는 논란거리지만 만약 K리그에 명문이 있다면 그건 포항[38] 이라는 자신감 넘치는 발언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여담으로 2010 시즌에는 스틸러스 웨이를 계승한 "아름다운 축구"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적이 있다. K리그에서도 2010 시즌에 스틸러스 웨이를 참고하여 K리그 5분 더(5 minutes more) 캠페인을 벌이기로 합의하여, 포항의 모토가 리그 전체에 전파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파리아스 감독의 후임으로 온 올리베이라 감독이 전혀 아름답지 않은 축구를 펼치는 바람에 2011 시즌부터는 다시 "스틸러스 웨이"라고 부르고 있다.
11.4. 포항 유스, '화수분 축구'[편집]
K리그에서 최초로 유소년 시스템을 구축했고, 자타공인 K리그 최고의 유소년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다. 구단 홈페이지에는 '2003년 유소년 시스템 도입'이라고 하긴 하는데 실질적으로 유소년 시스템이 정착된 시기는 포철공고 축구부가 창단된 1993년이고 본격적인 포항 스틸러스 산하 유소년 구단으로서의 관리가 2003년부터 이루어졌다고 보는 게 맞다.[39] 노태경, 이동국, 신화용, 황진성, 김승대, 강현무 등이 이 시스템을 거친 대표적인 선수들이고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희대의 축구 천재라 평가받던 김병수[40] 도 고질적인 무릎 부상 때문에 프로 데뷔를 못 했을 뿐이지 포항 유스 출신이다. 이렇게 1990년부터 체계를 다진 포철초-포철중-포철고로 이어지는 유소년 클럽의 힘으로 꾸준히 선수들을 발굴하며 막대한 예산을 쏟아붓는 상위권 팀들에 비해 전혀 밀리지 않는 성적을 보여주기도 했다.
8~90년대에는 창립자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국가대표급 선수들과 K리그 최초로 용병을 영입하는 등 나름대로 부자 구단이었으나[41] , 모기업인 포스코가 상장을 하게 되고 민영 기업으로 변화함에 따라 외국 주주의 비중이 50%를 넘어선 2000년대 이후로는 모기업의 확실한 지원을 받는 구단들에 비해 항상 부족한 예산에 시달리게 된다.[42] 이 유소년 시스템은 모기업의 지원이 확연히 줄어든 2000년대 포항에 큰 힘이 되었고, 결국 2013년에는 선수단에 외국인 선수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스쿼드의 절반 이상을 유소년 시스템에서 배출한 선수들로 채우고 구단 최초의 더블(K리그+FA컵)을 달성하기도 한다.
유망주 위주의 선수단 구성도 그렇고, 화려한 패스 축구의 팀 컬러도 그렇고, 여러모로 K리그의 아스날이라 불리기도 한다. 심지어 한준희 축구 해설위원은 이런 포항을 아스날에 빗대어 '포스날'이라 칭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4 시즌에는 U-18 유스 팀이 '알 아인 인터내셔널 U-17 토너먼트 2014'에서 맨체스터 시티 유스를 2:1로, UAE 17세 대표팀을 4:1로 대파하는 기염을 토했다.경기 영상
하지만 슬프게도 자유 계약 제도의 최대 피해자가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유소년 시스템을 통해 브라질로 축구 유학을 보낸 한 축구 영재는 K리그 입단 시 홀연히 다른 팀으로 가버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전부터 선수 하이재킹에 불만이 많았던 시민구단들도 폭발한 데다가 드래프트 반대 측에 서 있던 포항까지 드래프트 찬성으로 돌아서면서 드래프트 제도가 부활해버렸다.[43] 쉽게 말해서 없는 돈 쪼개서 애들 키웠더니 남 좋은 일만 시킨 꼴. 거기다 우선 지명한 선수들도 잘 키워 놓으면 돈 많은 수도권 구단들이 채가는 데다, 선수들도 인프라가 좋은 수도권으로 가려 하니 포항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속상할 따름이다.
그나마 2010년대 들어서는 각 구단들도 유스에 신경쓰고, 대형 구단들이 유스보다 검증된 외부 영입에 더 신경을 쓰면서 적어도 포항이 애지중지 키운 유스들이 털리는 일은 줄어들었다. 그리고 포항 역시 외부 영입은 줄여도 유스 선수들은 확실히 잡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여 많은 포항 출신 유스들이 포항 스틸야드에 입성하고 있다. 그리고 드래프트 제도가 다시 폐지되고 자유 계약제로 전환되면서, 이런 일은 더이상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2014년 6년 동안 공들여 키운 선수가 고등학교 졸업 후 우선 지명을 받아 포항에 입단할 예정이었으나, 규정의 빈틈을 이용해[44] 돌연 해외 팀으로 이적해버리고 만다. 물론 법을 어긴 것은 없기 때문에 법적으로 아무런 하자는 없다. 하지만 포항뿐만 아니라, 한국 축구계에서도 이번 일은 꽤 충격적인 일로 다가온 듯하다. 이런 와중에 백승호는 자신의 SNS에 묘한 글을 남기도 했다. 정작 선수 본인은 별로 반성의 기색이 없는지 “축구선수로 성공하려면 유럽 나가야한다, 후회안해”라는 발언으로 축구 팬들의 뒷목을 잡게 만들었다.
클럽 산하 유스는 아니지만 우선 지명한 선수들을 포항 유소년 팀을 지도했던 김병수 감독이 있는 영남대학교 축구부에 진학시켜 경험을 쌓게 한 다음 프로로 데뷔시키기도 했다. 신진호, 이명주, 김승대, 손준호, 김준수, 정원진, 이상기 등이 이런 과정을 거쳐 포항에 데뷔하여 활약했다. 김병수 감독이 프로 감독으로 옮긴 이후 영남대학교를 거치는 경우가 많이 줄어들었다.
12. 타 구단과의 관계[편집]
구단의 오랜 역사만큼 타 구단들과도 여러 모습으로 얽힌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대표적인 라이벌로는 이제는 대외적으로도 많이 유명해진 동해안 더비의 울산 현대가 있고, 같은 모기업으로 이어진 전남 드래곤즈와 광역 생활권을 공유하면서 2018 시즌 이후 급격하게 부상한 대구 FC 등이 있다. 또한 박주영과 황선홍 등으로 엮인 또 다른 검빨 FC 서울, 수포 동맹이라 불리는 수원 삼성 블루윙즈, 그리고 일화시절 여러 악연을 주고 받은 성남 FC 등이 있다.
자주 엮이는 해외구단은 2000년대 후반에서 2010년대 초반까지의 FC 부뇨드코르가 있었다.
12.1. 울산 HD FC - 동해안 더비[편집]
FIFA에서 소개할 정도로 유명해진 K리그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 더비인 동해안 더비의 라이벌. 같은 동해안에 위치한 팀이기도 하고 포항과 울산의 묘한 지역감정이 얽혀 있다. 두 도시 모두 영남을 대표하는 공업 도시인 데다, 포항 포스코에서 생산된 철강 제품은 울산의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에 쓰이는데, 현대가 당진시에 제철소를 마련하기 전에는 포스코에서 부르는 대로 원자재인 강판 값을 지불했기에 서로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다.
역사적으로 어느 한 팀이 경기 전 우세를 점했다고 해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결과 때문에, 서로 제발 그만 만나게 해달라고 팬들이 사정사정할 정도로 악연이 깊은 라이벌이다.
12.2. 대구 FC - 경북 더비[편집]
2002년 월드컵을 통해 창단된 시민구단인 대구 FC와의 맞대결을 대구경북 지역과 축구 매체 등 여러 언론사들에서 지역명을 본 따서 경북 더비 또는 TK 더비라고 부른다. D가 아니라 T인 이유는 과거 대구의 로마자 표기가 현재의 DAEGU가 아닌 TAEGU였기 때문. 하지만 전력 차가 너무나 명확하고, 역사나 인기에서도 비교가 안 되기에 팬들은 별로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원정 거리가 짧아서 서로 좋아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대구에 프로 축구단이 탄생하기 전부터 당시 포항 스틸러스가 정책적으로 대구 지역의 축구단을 많이 후원하기도 하였고[45] , 지역적으로도 포항에서 자란 사람이 비교적 대도시인 대구로 이주하는 경우도 많기에, 대구 지역에는 포항 스틸러스를 응원하는 축구 팬들이 많다. 포항 서포터즈 그룹 중 대구를 기반으로 하는 '엇따대구'라는 서포터즈 그룹도 존재하는 상황이다. 대구 FC 창단 이 후 지역 축구 팬들을 흡수하긴 했지만, 아직도 대구 팬들 중에는 두 팀 모두 좋아하는 팬들이 많기에 비교적 최근까지도 동일 지역 구단으로서 우호적인 느낌이 크다.
하지만 2018 시즌 대구 FC는 창단 14년 만에 FA컵 첫 우승과 2019년 대구축구전용경기장인 대팍의 개장과 함께 대구의 경기력과 인기가 폭발적으로 상승하며 포항의 순위와 평균 관중 수를 따라잡았다. 또한 2019 시즌 4번의 맞대결에서 포항이 무득점으로 1승도 거두지 못하며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대구경북 지역 명문으로서 자존심이 상한 상황이다. TK 지역 한정으로 전통의 명문 대 떠오르는 신흥 강호의 구도가 형성이 된 셈.[46]
전력 차이는 있지만 예전부터 맞대결 시 서로 공격적으로 맞부딪치는 경우가 많아 2019 시즌 종료 시점까지 통산 경기에서 포항이 61골, 대구가 47골을 기록하는 등 생각보다 골이 많이 터지는 편이다. 2003년부터 2022년까지 K리그1 기준으로 보면 역대 전적에서는 포항이 대구에 21승 17무 13패로 앞서고 있지만 2010년대 중반까지 대구의 전력을 고려해보면 승패가 그렇게 쉽게 갈린다고는 할 수 없다.
12.3. 전남 드래곤즈 - 제철가 더비[편집]
같은 모기업을 두고 있는 전남 드래곤즈와도[47] 미묘한 경쟁 의식에 의한 라이벌리가 있다. 회사 생활에서 옆 부서와 실적을 비교당하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쉽다.
물론 계열사가 같기 때문인지 시즌이 끝나면 서로의 선수와 스태프들의 이동도 많은 편이고, 2019년 코로나19 사태로 포항이 훈련장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전남이 통 크게 자신들의 훈련장 한 면을 내어주는 등, 서로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가진 것은 아니고 오히려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전남이 창단되기 전인 1993년에는 광양의 축구 열기를 고조시킨다는 명분으로 광양축구전용구장에서 이벤트성으로 포항 홈경기를 한 적도 있다.
언론에서는 어떻게든 제철가 더비, 형제 더비로 이름을 붙이려 하지만 양 팀 팬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오히려 서로 맞붙지 않는 경기에서는 형제 팀을 서로 응원해주기도 한다. 다만, 일단 라이벌 의식은 있는 데다가 전남의 축구 스타일이 포항에게는 쥐약인 스타일이라 난타전이 나오거나 전남의 전방 압박으로 인한 한 골 싸움이 나오거나 하는 양상이 펼쳐진다.
2018년 전남 드래곤즈가 K리그2로 다이렉트 강등되면서 2019년부터는 FA컵 외에는 맞대결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다 2021년 FA컵 8강에서 전남과의 맞대결이 성사되었고, 1-0으로 포항을 잡은 전남이 결국 결승까지 올라 FA컵 우승을 차지했다.
12.4. FC 서울 - 검빨 더비[편집]
FC 서울과도 사이가 좋지 않다. FC 서울와 유니폼 색깔이 같고 줄무늬 방향만 다른데(포항-가로/서울-세로) 타 팀 팬들은 이를 두고 검빨 동맹이라고 자주 불렀다. 이 말 처음 나오던 시절 포항의 서울전 전적이 안 좋았기에 서울 싫어하는 타 팀 팬들이 어느 정도 비아냥을 담아 동맹이라 불렀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당사자들은 이 말 싫어한다. 박주영 계약 파동으로 인해 포항 팬들은 이미 서울 하면 이를 갈게 되었거니와, 박태준 회장의 축구 사랑에 힘입어 한 연고지에서 40년 동안 터를 잡으며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프로 구단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한 포항인지라 다른 팀도 아닌 서울과 엮이는 걸 굉장히 기분 나빠 했다. 당사자들은 검빨이란 말 대신 서로 고철과 패륜으로 부르며 깐다. 언론에서는 이 명칭이 꽤 그럴싸하다고 보는지 2015년 이후 양 팀의 대결을 검빨 더비라 칭하는 빈도가 높아지고 있다. 팬들도 세대 교체가 이뤄지는 만큼 지속적으로 사용된다면 정착할 가능성이 높다.
2007~08년엔 포항이 상당히 밀리는 모습을 보였으나 2009년부터 균형을 잡아서 포항은 상암에서 약세를 보이고 서울은 스틸야드에서 밀리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포항은 2006년 8월 이후 상암에서 승리가 없었으나 2014년 4월 9라운드 원정에서 1:0 승리를 거두면서 지긋지긋한 상암 징크스를 털어냈다. 그러나 14년 7월에는 FA컵, 8월에는 아챔에서 서울과 상암에서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을 벌여 고배를 마시면서 서울과의 악연은 계속되고 있다. 이 2014 시즌에는 유독 자주 부딪쳐서 한 시즌 만에 6번이나 만났다. 리그 3전, FA컵 1전, ACL 2전. 전적은 1승 4무 1패, 승부가 났던 두 경기 모두 1 대 0 한 골 차이 승부일 만큼 박빙이지만, 속내를 보면 4무 가운데 3경기는 토너먼트 경기였고 ACL 1차전을 제외한 2경기 모두 승부차기 혈투 끝에 서울이 이겼다.
두 팀의 감독들도 흥미로운 스토리를 뽑아냈는데 바로 현역 시절 한국 공격진을 이끌었던 황선홍 감독과 최용수 감독의 라이벌 구도다. 리그와 토너먼트에서 자주 부딪치고 리그 승률은 포항이 나쁘지 않은데 FA컵과 아챔같은 토너먼트에서 서울에게 일격을 맞고 탈락하는 구도가 14~15 시즌(14 시즌에는 아챔과 FA컵, 15 시즌에는 FA컵) 연달아 발생하니 황선홍 감독은 14 시즌 이후 최용수 감독만 생각하면 화가 난다는(인간적으로 싫어한다는 건 아니고) 인터뷰를 남기며 반드시 이기겠다는 의사를 누차 피력했고 최용수 감독도 특유의 너스레로 화답하면서 라이벌 구도가 생겨났다. 황선홍 감독이 15 시즌을 마지막으로 물러나면서 흐지부지 되나 했는데 후임 최진철 감독이 역시 최용수는 이기겠다고 단언했고 실제로 첫 대결에서 승리했다.
그런데 2016년 6월 FC 서울의 최용수 감독이 돌연 중국 장쑤 쑤닝으로 떠나고 지난 시즌까지 포항의 감독으로 치열하게 부딪쳤던, 포항 팬들이 누구보다 사랑했던 황선홍 감독이 FC 서울 감독으로 부임하며 한동안 더욱 흥미로운 전개가 이어졌다. 황선홍이 프런트와 합작으로 서울을 말아먹어 버려서 흐지부지되었지만.
2016년부터 한동안 포항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거나 유망주로 각광받던 선수가 서울행을 택하고 있다. 2016년 신진호, 2017년 신광훈과 이명주, 2018년 정원진.[48]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일부 서울 팬들은 족보 없는 축구는 가라더니 스스로 나서서 족보를 다 팔아치우고 있다고 비꼬기도 한다.
그리고 연고지 역사를 가지고 불을 뿜기도 한데, 바로 이 서울의 팬들이 포항의 무이전 역사를 부정한다. 서울 팬은 서울로의 연고 재이전 명분을 내세우면서 포항 역시 대구에서 포항으로 연고 이전한 구단이라고 하며[49] , 포항 팬은 광역 연고 시절에도 포항은 연고지에 포함되어 있었으니 무슨 이전이냐고 맞선다.[50]
12.5. 성남 FC - 클래식 더비[편집]
인연이 질긴 팀을 꼽으라면 성남 FC가 있다. 역시 K리그 명승부 중 하나인 1995년 K리그 챔피언 결정전, 11월 11일 포항전용구장에서 벌어진 2차전은 양 팀이 선제골(포항)-추가 골(포항)-추격 골(일화)-동점 골(일화)-역전 골(일화)-재역전 골(포항)으로 이어졌고 당시 득점은 황선홍, 신태용(각 2골), 라데, 고정운(1골)으로 K리그 올드 팬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명경기다. 이날 황선홍이 발리 슛을 골로 연결시킨 뒤 스틸야드 철망을 붙잡고 격렬하게 골 세리머니를 했는데 이 장면을 기억하는 이들이 꽤 많다. 그리고 2012년 FA컵에서 우승한 뒤 이 세리머니를 재현했다. 중립 구장인 안양종합경기장에서 개최된 최종전에서는 포항이 3차전 연장 골든 골을 이상윤에게 허용하며 성남이 3년 연속 우승을 달성했다. 이후 2007년에는 포항이 복수(포항 우승). 이후 2009년까지 포항이 성남을 탈탈 털다가[51] 2009, 2010년에는 다시 성남이 복수를(성남이 결승 진출)하며 클래식 더비의 명성을 이어갔었다. 이후 성남이 시민구단으로 전환하면서 전력이 많이 약해진 뒤로는 2011년 FA컵에서 1회, 2014년 리그 1회를 제외하면 포항이 성남을 쉴 새 없이 털고 있다.
이런 역사 때문에 1990년대 한국 프로축구를 기억하는 올드비들이 특별히 이렇게 부르고 있다. 다만 언론이나 신규 팬층이 이둘의 관계에 주목하는 경우는 드물다. 거기에 성남이 기업 구단에서 시민구단이 되면서 크게 약화되었고 이로 인해 예전과 같은 관계로 보기는 힘들다. 게다가 2017 시즌부터 성남이 2부 리그로 강등되어서 한동안 리그에서 만나지 못했다. 2019년 성남이 승격하면서 다시 클래식 더비가 성사됐다. 그러나 2023년부터 성남은 다시 k리그2에서 뛰게 되었다.
울산과 달리 프런트와 팬들 모두 사이가 나쁘지 않은 편이다.
12.6. 전북 현대 모터스[편집]
2013 FA컵 결승부터 시작된 인연이자 악연의 매치.
2013 FA컵 결승에서 포항은 전북 현대와 전주월드컵경기장 어웨이에서 1대1 무승부 이후 승부차기 끝에 우승하며 2012 FA컵 결승 우승 이후 2년 연속 우승을 달성했다.
6년뒤 묘한 인연이 일어나게 된다.
2019 K리그1 최종 라운드에서 포항이 울산을 1:4로 대파하고, 같은 시각 전북이 강원을 1:0으로 꺾으면서 전북의 극적인 역전 우승을 돕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전북 팬들은 포항을 영일만 형제라 칭하며 친근감을 표했다. 2020 시즌에도 상위 스플릿에서 울산을 만나 4:0 대승을 거두면서 전북에게 추격의 발판을 마련해주었고, 전북의 리그 우승을 돕게 되었다.
그리고 2021 AFC 챔피언스 리그 조별 리그 6차전 전북 대 감바 오사카의 경기에 포항의 16강 진출 가능성이 걸려 있었다. 포항은 전북이 감바를 꺾길 간절히 기도했고, 전북이 감바를 2:1로 꺾으면서 포항은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16강 진출에 기뻐하는 포항 팬들은 전북을 영일만 형제라 부르며 환호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동남아시아에 ACL을 치르러 간 김기동 감독 몰래 포항 프런트와 송민규가 전북 프런트와 송민규를 20억에 전북으로 이적시키는 합의를 하면서 단숨에 포항 팬덤의 감정이 험악해졌다.
그나마 전주에서 열린 ACL 4강을 앞두고 울산에 패배하여 8강에서 탈락한 전북이 포항의 선전을 기원하며 자신들의 클럽하우스를 포항에 빌려주는 호의를 베풀기도 했다. 전북 팬들은 라이벌 울산보다는 포항의 결승 진출을 응원하면서 잠시 영일만 형제가 부활하기도 했다.
비단 송민규뿐만이 아니라 과거에도 시즌 중 김승대, 고무열, 손준호, 이근호, 일류첸코 등 포항의 핵심 선수들이나 전북으로 이적하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는데,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눈앞의 적자 해소에만 급급한 포항 프런트는 막강한 자금력을 보유한 전북에게 좋은 비즈니스 파트너일 뿐이었다.
더욱이 시민구단조차 시즌 도중에 자신의 핵심 선수를 파는 행동은 하지 않는데 포항은 예외적으로 돈만 갖다주면 선수를 파는지라, 전북은 리그 전반기에서 약점으로 지적된 부분을 포항 선수들로 보강하고 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차지한 다음 더 비싼 값에 중국이나 중동에 팔아먹으면서 쏠쏠한 이득을 챙기고 있었다. 오죽하면 포항에 '전북 위성구단'이나 '전북 유소년 구단'이라는 멸칭까지 생길 정도이다. 이 때문에 포항 팬들 사이에서 영일만 형제라는 단어는 매우 껄끄러운 단어이기도 하다.
결국 영일만 형제라는 단어는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절실한 상황일 때만 사용되고, 그렇지 않을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불발로 끝나긴 했지만 2022 시즌 강상우 이적 사가까지 거치면서 양 팀 팬들의 관계가 더 험악해진 상황이기 때문에, 필요할 때만 서로 결합되고 그렇지 않을 때는 해체되는 편이다. 그래도 울산과 라이벌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2022 시즌에는 전북 팬이 포항 응원가와 울산 안티콜인 별이 두개래를 부르고 포항 팬이 전북 우승해요라고 응원하는 덕담이 나오기도 했다.당시 직캠 영상[52]
하지만 2023 시즌에는 35R 맞대결에서 벌어진 선수 교체를 놓고 벌어진 설전과 FA컵 결승에서의 맞대결로, 양 팀 간 갈등이 더 심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12.7. 수원 삼성 블루윙즈 - 수포동맹[편집]
과거에는 수원에 대한 감정도 별로 안 좋았다. 울산과 마찬가지로 플레이오프 악연도 많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축구단이라는 자부심에 사는 포항 팬들은 "축구 수도 수원"이라는 말 자체를 아주 싫어한다. 이건 포항 외에 서울이나 다른 축구 팬들도 마찬가지.[53] 그래서인지 포항은 홈에서 수원과 경기할 때는 압도적인 결과를 보여주는데 2004년 이후 포항에서 치러진 수원전에서 포항은 단 1패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홈에서 내준 실점조차도 10년 동안 단 5실점뿐이다. 이 정도의 학살은 다른 라이벌 관계에서는 보기 힘들 정도였는데 2014년 상황이 역전되어 4전 3패를 했다. 원정에서 1:4로 지는가 하면, 다음 원정에서는 한 점 차 리드를 이끌어가다 84분, 88분에 골은 먹으면서 패배하였고, 마지막 라운드에서는 10년 된 홈 징크스마저 깨지며 AFC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잃었다.
여담으로, 같은 삼성 소속인 삼성 라이온즈가 2012년부터 포항 야구장을 제2 구장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스포츠 팀이라고는 포항 스틸러스 하나밖에 없었던 포항시의 새 식구가 되었다. 다만 삼성 라이온즈의 주 연고지는 포항이 아닌 대구인지라, 서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기 바쁜 수원 삼성 블루윙즈 팬덤과 달리 삼성 라이온즈 팬덤과의 사이는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은 편. 포항에서 거리상 가장 가까운 프로야구단이 삼성 라이온즈이기 때문에 포항 야구 팬들 대부분은 삼성 라이온즈 팬이다. 반대로 수원 삼성 블루윙즈 팬덤은 야구에 적대적인 팬들이 많은 데다가 설령 야구를 좋아할 지라도 대부분이 kt wiz 팬이다 보니 삼성 라이온즈 팬덤과 사이가 좋지는 않다. 2017년에는 10년 넘게 포항에서 함께 뛴 로컬 보이 신화용이 수원으로 가게 되었고 이적 후 첫 맞대결에서 수원이 1:0으로 이기기도 했다.
2012년부터 2016년까지 수원과 포항은 줄곧 같은 스플릿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2012년부터 2015년까지는 상위 스플릿에, 2016년은 하위 스플릿에서 만났다. 이 때문에 팬들은 수포 동맹이라고 불리기까지 했지만 2017년 들어서 수원이 상위 포항이 하위로 가면서 수포 동맹이 깨졌다. 그러나 2018년에 둘이 같이 상위로 가면서 수포 동맹이 부활했다. 2019년에는 수원이 파이널 B로 떨어지고 포항이 파이널 A로 올라가면서 수포 동맹이 또 깨졌다.
이후 2021 시즌에는 반대로 수원이 파이널 A로 올라가고 포항이 파이널 B로 떨어지며 다시 수포 동맹이 깨지게 된다. 다만, 이 시즌이 흥미로운 점은 서로 다른 그룹으로 나뉘었음에도 최종 성적은 두 팀 다 12승 10무 16패, 승점 46점으로 동일했다는 것. 즉, 다른 의미(?)로는 수포 동맹이 유지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2016년부터 FA컵에서는 극과 극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수원은 2016년부터 4년 연속 4강 이상의 성적을 거둔 반면,[54][55] 포항은 4년 연속 32강에서 광탈했다. 더욱 처참한 건 2019년 실력이 비등비등한 수원에게 패한 것 제외하고는 모두 약체들에게 졌다는 것. 2016년과 2017년에는 K리그2에 있던 부천 FC 1995와 부산 아이파크에게 패배했고, 2018년에는 그해 K리그2로 강등된 전남 드래곤즈에게 패배했다. 또한 32강에서 포항을 이긴 이 4팀은 4강 이상의 성적을 거뒀는데 부천은 4강, 부산은 준우승, 전남은 4강, 수원은 우승을 기록했다.
2020년대에 들어서 두 팀의 사이가 많이 좋아졌다. 일례로 신화용이 두 팀에서 모두 활약한 바 있어서, 2021시즌 수원에서 양 팀 간의 경기가 열렸을 때 합동 은퇴식을 열어주기도 했다. 또 임상협의 경우에는 수원에서 큰 활약을 하진 못했으나, 계약 만료가 확정되었음에도 전 아챔에서 혼신을 다해 뛰며 팀의 8강행을 이끌었고 이를 계기로 두 팀 사이의 우호적인 분위기가 묘하게 형성되기도 하였다.[56]
K리그 마스코트 반장 선거에서는 아길레온의 반장 당선이 유력시되자, 쇠돌이가 수포 동맹을 계기로 연합(?)을 제안했고 이에 따라 수원 팬들의 막강 화력에 힘입어 쇠돌이가 부반장으로 뽑히기도 했다.
그리고 2022년 여름에 태풍 힌남노로 인해 포항시가 큰 피해를 입게 되자, 프렌테 트리콜로 및 수원 삼성 선수단 측에서 태풍 피해 복구를 위해 모금 활동을 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원래 포항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던 경기가 이 태풍으로 인해 수원에서 열리는 것으로 변경되자,[57] 수원 측도 원정 팀인 포항 스틸러스 측을 배려하여 원정 측 티켓 가격을 단돈 1,000원으로 동결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수원과는 최근 들어 묘한 공통점이 생겼는데, 바로 외국인 용병이 터지고 실패하는 시점이 같다는 것. 2019 시즌부터 2020 시즌까지 포항과 수원은 각각 일류첸코, 타가트로 쏠쏠한 재미를 봤는데, 이 둘이 떠난 2021 시즌에는 포항의 타쉬와 크베시치, 수원의 제리치와 니콜라오가 기대치에 한참 못 미친 탓에 팀이 매우 큰 고생한 바 있다.
2022 시즌도 비슷한데, 수원은 그로닝, 포항은 오그부를 각각 야심차게 영입하지만, 두 선수 모두 폭망 수준의 경기력을 보이며 시즌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해외 리그로 이적해버렸다. 근데 신기하게도 두 팀 모두 수비 자원만큼은 제 몫을 다하고 있는 중이다. 수원은 2021년에는 헨리, 2022년에는 불투이스가 수비진의 기둥 역할을 맡고 있고, 포항은 그랜트가 2021시즌부터 밥값 이상을 해내고 있는 중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2019 시즌에 두 팀에서 뛰어난 활약을 한 바 있는 완델손과 사리치가 각각 2022 시즌에 포항과 수원으로 복귀한 점, 당시 활약에 비하면 다소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는 점까지 똑같다.
2023 시즌도 각각 팬들이 서로 응원하는 영상들과 함께 수원은 포항의 우승을 포항은 수원의 잔류를 응원하였는데 아쉽게도 포항은 k리그 1 우승은 실패지만 FA컵에서 10년 만에 우승을 하였고 포항의 우승 영향일까 수원도 잔류에 대한 희망을 만들고 있다. 하지만 이내 수원 삼성은 마지막인 38라운드에서 12위를 기록하며 다이렉트 강등이 되고 말았고 결국 2024 시즌에는 함께 할 수 없게 되었다.
13. 유니폼[편집]
14. 엠블럼[편집]
14.1. 과거 엠블럼[편집]
14.2. 기념 엠블럼[편집]
2013년 창단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디자인된 엠블럼으로 2013 시즌 K리그-FA컵 더블 우승과 함께 더욱 의미가 깊은 엠블럼이 되었다. 클래식한 골드 컬러를 사용하여 구단의 헤리티지를 표현하였고 엠블럼 상단에 40th를 통해 40년 역사를 되새겼다.
2017년 시안블루 유니폼에 부착된 쇠돌이 엠블럼은 포항 스틸러스라는 이름을 사용한 지 20주년이 되는 시즌을 기념해 디자인되었다. 쇠돌이를 스탠다드 엠블럼의 아웃라인 안에 삽입하여 새롭게 디자인한 콜라보레이션 엠블럼이다. 이후 공식 보조 엠블럼으로 사용되고 있다.
스틸야드 개장 30주년 엠블럼은 스틸야드의 역사와 옛 정취를 녹여 디자인되었다. 구장의 입구에 서서 정면을 올려다 본 구도는 스틸야드의 위엄을 표현하였고, 실버(스틸) 색상을 사용하여 철옹성과 같이 단단하고 굳건한 인상을 주었다. 더불어 스틸야드 글자는 옛 감성을 담아 한글로 디자인한 것도 특징이다.
2023년 창단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디자인된 엠블럼으로서, 포스코 초창기 로고에서 모티브를 따왔으며 창단 당시의 오렌지컬러 저지를 반영한 엠블럼이라 한다.
15. 마스코트[편집]
16. 시설[편집]
16.1. 홈구장[편집]
16.2. 클럽 하우스[편집]
대한민국 프로 스포츠 최초의 클럽 하우스다.
17. 명예의 전당[편집]
2013년 5월 26일, 창단 40주년을 기념하여 포항 스틸러스 명예의 전당을 만들었다. K리그 클럽 중 자체적으로 명예의 전당을 만든 클럽은 포항 스틸러스가 최초다. 명문 구단의 초석을 다지고, 뛰어난 기량을 펼친 이들 13인을 첫 번째로 13인을 헌액했다.
헌액된 13명의 레전드는 헌액 기념패와 스틸야드 평생 초청 VIP 카드를 받으며, 앞으로의 구단 주요 행사에 우선적으로 초대되는 특전이 주어진다. 향후 송라클럽하우스나 포항스틸야드 등 후보지 중 적합한 장소를 선정하여 명예의 전당 기념관을 건립할 예정이며, 주기적으로 대상자를 선정하여 꾸준히 추가할 예정이라고 한다.
2023년 5월 22일 창단 50주년을 맞이하여 신화용, 김광석, 황진성, 황지수 4인의 추가 헌액자를 발표하였다 #
18. 인물[편집]
19. 등번호[편집]
20. 전통과 인기[편집]
영국의 오래된 축구단[61] 이 그러하듯이 공업 도시인 포항의 포항 스틸러스 역시 포항 제철소와 그와 관련된 공장 근로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축구단인 데다[62] 1980년대~1990년대 포항시에서 문화 생활이라고 할 만한 것은 매주 열리는 축구 경기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 인기가 정말로 대단했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989년 개막전에서는 지방 도시인데도 불구하고 개막전 관중 4만을 찍기도 했다.[63] 인구 30만이던 시절부터 평균 관중 1만 이상을 찍고 있었으니 그저 할 말이 없을 정도.
매주 포항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홈구장인 포항 스틸야드 주변은 밀려드는 차량과 사람에 발 디딜 곳이 없다. 더욱이 대부분 구단 서포터즈만이 열성적인 응원을 보내는 타 구단에 비해 포항은 서포터, 일반 시민 가리지 않고 응원 열기가 대단하다. 포항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 중 스틸야드를 한 번도 안 가본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2005년까지는 코레일에서 통근열차가 괴동역 너머에 있는 제철역(포스코 내에 있는 포스코 전용역)까지 가서 근처 포항 스틸러스 홈구장으로 가는 관중들을 수송하기도 했다.[64] 대한민국 사상 최초이자 최후의 구단 응원 열차였던 셈이다.
1990년대에는 하프 타임마다 해병대 의장대가 사열 시범을 보였고 꼬마 팬들의 많은 박수를 받았으나 어느 순간부터 사라졌다. 포항 팬들로선 아쉬운 부분 중 하나. 대신 이후 해병대 응원대가 스틸야드 한 편에 자리잡게 되면서 해병대 응원이 새로운 명물로 자리잡게 되었다. #
2008년 기준으로 관중 점유율과 연고지 인구 대비 관중 수가 상당히 높은데, 포항 인구가 50만이라는 걸 감안하면 포항의 평균 관중 1만은 수도권 팀들이 평균 관중 2만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90년대 후반 암흑기가 도래하면서 팬들이 떨어져 나가는가 싶었는데 세르지오 파리아스라는 걸출한 명장 덕에 예전의 인기를 다시 회복했다. 2010년 시즌 또다시 암흑기를 보내면서 팬들이 떨어져 나가나 싶었지만, 2011 시즌 현역 시절 포항의 레전드 황선홍이 감독으로 부임하며 꾸준히 리그 상위권의 성적을 내며 다시 관중 수가 눈에 띄게 증가하였다. 심지어는 2016 시즌 구단 최악의 암흑기를 보내며 2부 리그 강등 문턱까지 갔음에도, 2017년 홈 개막전에서는 홈구장인 포항 스틸야드 매진을 기록했다. 성적만 담보가 되면 흥행은 보장할 수 있는 팀.
2018년부터 구단의 성적이 다시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가자 팬들이 다시 스틸야드로 돌아오는 중이다. 50년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의 명문답게 전국 각지에 퍼져 있는 올드 팬들 또한 많으며, 수도권 원정이나 타 지역 원정에서 서울, 수원, 전북에 밀리지 않는 원정 팬 수를 자랑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포항시 인구는 갈수록 줄어서 2023년 결국 50만이 붕괴되었지만 홈경기 평균 관중수는 전북, 울산, 수원, 서울, 대구 등 인구 100만 이상의 대도시 바로 밑에 위치할 정도로 지역 연고가 잘 정착되어 있다.
21. 응원단[편집]
치어리더단 이름은 스틸하트. 경북권 대표 클럽인 만큼 기존의 스틸야드 터줏대감 김소영 아나운서 외에 최근 몇 년간의 응원단 영입 멤버들은 대구/경북의 간판 야구단인 삼성 라이온즈 응원단 출신으로 구성되었다. 전 삼성 라이온즈 응원단장이었던 김용일 아나운서를 필두로 대구/경북의 간판 치어리더인 이수진 치어리더 팀장과 권소영 치어리더 그리고 대전 출신으로 이적하게 된 남민정 치어리더와 함께 스틸하트라는 이름으로 응원전을 펼치게 되었다. 하지만 2021 시즌, 코로나 19와 사회적 거리두기의 여파로 포항 스틸러스 측에서 스틸하트를 당분간 운영 중단하기로 결정하면서, 스틸하트는 K리그2의 경남 FC로 이적하여 응원단 '루미너스'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2022 시즌이 시작되고 경남 FC 응원단 루미너스가 이유미 치어리더를 새 팀장으로 임명하고 기존에 그녀와 함께 활동하던 멤버들로 응원단을 개편하면서, 루미너스에서 활동했던 기존 스틸하트 멤버들은 경남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다가, 2022 시즌 초 정부의 코로나 19 방역수칙이 완화되면서 포항 스틸러스도 응원단을 재운영하기로 결정하면서 스틸하트 또한 극적으로 기존 멤버들이 다시 포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대구/경북권으로 인해 남민정 치어리더는 대전 하나 시티즌의 윈퀸즈로 이적하게 되었지만 신입들인 고정현 치어리더와 김가영 치어리더는 인기를 얻고 있다.
22. 서포터즈[편집]
23. 유명 팬[편집]
- 아웃사이더(래퍼): 서울특별시 출신 래퍼이다. 포항 스틸러스 공식 인스타그램을 통해 포항 스틸러스와 김기동(축구인)의 응원 메시지를 남겼고, 기사를 통해 포항 스틸러스와 현 포항 스틸러스 감독인 김기동(축구인)의 팬임이 밝혀졌다.
- 신승훈(배구선수): 포항 출신 배구선수이다. 인터뷰를 통해 포항 스틸러스의 팬임을 밝혔다.
- 칠린호미: 포항 출신 래퍼이다. 송민규와 맞팔을 하고 포항 스틸러스 게시물에 댓글을 다는 등 찐팬인 거 같은 모습을 보였다.
- 허민(코미디언): KBS 공채 출신 개그우먼이다. "오랜만에 직관. #황선홍 감독님 잊지않고 인사하러오셨을때 찰칵"이라는 글과 함께 한 장의 사진을 게재한 적이 있다. 청주 출신이긴 하나 남편이 대구 출신이라 포항과 가깝다.
24. 응원가[편집]
25. 사건사고[편집]
26. 여담[편집]
26.1. FA의 악연[편집]
90년 후반부터 이어진 FA 삽질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선수를 사오면 삽질하고, 잘하는 선수는 빼앗기고, 슬럼프에 허덕이는 선수를 타 팀에 팔면 그해에 포텐이 폭발하는 악순환의 연속. 일부 팬들은 포항의 축구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 하지만 지난해까지 포항에서 별 활약 없다가 그 다음해 다른 팀에서 S급 활약을 보이는 선수들을 보면 울화통이 치미는 것은 당연하다. 2009 시즌 우승팀 전북 현대의 경우 최태욱, 브라질리아, 이광재 모두 포항에서 전북으로 이적한 선수들이었으며 덤으로 이동국까지 한때 포항의 프랜차이즈였다는 걸 생각하면 2009년 전북의 우승을 보는 포항 팬의 심정은 복잡 그 자체.
그리고 이는 2010년에도 이어졌다. 1년 계약으로 사온 설기현은 K리그 1경기도 못 뛰고 부상으로 상반기 아웃에 팀 내 불화로 팀 케미스트리 붕괴를 조장했고 모따신이라 불리던 모따를 비롯한 용병 3인방의 현재 행보는 더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반면 성남으로 이적한 남궁도는 이번에도 이적한 팀에서 포텐이 터졌다. 이쯤되면 FA 시장에 굿이라도 해야 될 판이다.
그리고 2011, 12 시즌도 변하지 않아서 야심차게 영입한 모따는 그나마 리그에서 제 실력을 보여주었으나 마지막 플레이오프에서 "페널티킥 실축 + 공격수가 상대 팀에게 페널티킥을 내주는" 승부조작급 사고를 떠뜨린 후 떠났고, 슈바는 잦은 부상으로 결장, 그나마 데릭 아사모아가 제 역할을 해주었으나 아사모아 마저 12 시즌 들어서는 부상과 하락세에 12 시즌에 영입한 지쿠와, 조란은 국내 선수들에게도 밀리며 지쿠는 시즌 도중 강원으로 임대, 조란은 써먹지도 못하고 13 시즌 시작과 함께 중국으로 임대 보내버렸다.
그래서 아예 포항이 선택한 방법이 '외국인 용병 없이 리그 운영'. 2013 시즌 K리그 클래식 팀 중 유일하게 용병 없이 시즌을 시작했고 시즌 초반에는 모든 축구 전문가들이 포항의 하락을 점쳤으나, 정작 용병을 다 빼버린 2013 시즌 포항은 K리그 클래식과 FA컵을 모두 우승하는 K리그 최초의 리그+FA컵 더블 우승을 일궈내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국내 선수들만 이루어진 스쿼드로 한계를 드러내며 2년 연속 조별 리그에서 탈락하며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외국인 용병과 외부 영입 또한 꼭 필요한 상황. 하지만 이러한 성과가 마음에 들었는지 구단과 프런트는 14 시즌도 용병 없이 가기로 했다.
아무튼 소위 FA하고는 지독하게도 운이 없다. 그래서 오늘도 구단은 선수들을 키우는 데 힘을 쏟는다. 그나마 이러한 유스 투자가 제대로 성과를 내면서 14 시즌은 외부 영입 없이 유스와 기존 선수만으로 더블 스쿼드급 전력을 구축했으나, 선수들의 이름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선수들을 잡을 돈이 없다는 것이 포항의 문제이다.
그리고 2015 시즌. 이명주를 판 돈으로 드디어 2년 만에 다시 외국인 용병 3인방(안드레 모리츠, 라자르, 티아고)을 질렀고, 그 중 모리츠는 EPL에서 이청용과 한솥밥을 먹던 선수였지만 결과는 사이 좋게 모두 폭망. 그나마 티아고만 자기 자리에서 평균적인 역할을 해주었을 뿐 모리츠는 K리그에 적응 실패하고 반 년 만에 인도로 재임대를 보내버렸고 라자르는 공격 포인트 하나 없이 시즌을 마치게 생겼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용병 좀 사자고 닦달하던 팬들 마저 우린 안 될 거야 하면서 더 이상 용병 영입에 미련을 두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2016년 양동현을 영입하면서 팀의 원 톱 잔혹사와 포항의 FA 잔혹사를 모두 깨버렸다.
모기업이 포스코라는 이유로 구단에 돈이 많을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포스코는 그냥 스폰서일 뿐이고 자금 지원도 생각 외로 쪼잔한 편이다. 일단 주주 절반이 외국인인 데다 민영화는 되었으나 여전히 공기업 처럼 정부가 부려먹고 있어 함부로 예산을 집행할 수 없다. 대기업인 삼성, 현대, LG와 같이 돈지랄하기는 힘들단 소리. 결국 해마다 죽 쒀서 남 주는 험한 꼴은 다른 지방 구단과 다르지 않다.
2007 시즌 우승의 주역이던 따바레즈도 못 잡았고 2008 시즌 이후 프랜차이즈 스타로 키울 생각이었던 박원재와 조성환을 모조리 일본에 뺏긴 것도 모자라 러시아로 떠난 오범석의 경우는 FIFA 제소 직전까지 가는 다툼 끝에 보내줬더니 돌아와서는 라이벌 팀인 울산에게 가버렸다. 그리고 오범석을 보내기로 약속했던 성남과는 계약 위반에 걸려 결국 정성룡을 헐값에 넘긴다. 게다가 오범석은 J리그로 임대 전에 해외에 나가겠다고 투정을 부리며 팀 내 불화를 일으켰고 그 때문에 파리아스 감독은 사전 준비 차원에서 인천 유나이티드에서 최효진을 데려왔다. 최효진의 이적이 성공적이라고 판단되자 오범석을 냅다 J리그로 임대 보내버렸다. 사실 오범석은 친정 팀인 포항보다 고향 팀인 울산을 더 좋아하니 포항 팬들에게는 패륜 소리를 듣고 있다.
2009 시즌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 후 데닐손, 최효진 등이 이적했고, 노병준, 김형일 등 다른 주전 선수들도 중동 클럽의 러브콜을 받았다. 그리고 ACL 8강에서 맞붙었던 부뇨드코르에서 러브콜이 쇄도하였으나, 챔피언스 리그에서 벌어들인 상금으로 겨우 막을 수 있었다.
결국 파리아스 감독도 중동의 연봉 26억짜리 오일 머니 러브콜을 이기지 못하고 2009 시즌을 끝으로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아흘리 클럽으로 옮기게 되었다. 우스갯소리로 이러한 FA에 적응이 되면 그때부터가 진정한 포항의 팬이라는 말도 있다.
이러한 상황은 2010년을 지나 2014 시즌까지 진행 중이다. 그나마 이러한 재정 상황 속에서도 포스코가 사회 공헌 차원에서 유스 투자만큼은 줄이지 않았기 때문에 유스 출신 선수들로 포항은 꾸준한 성적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리고 2014 시즌 연봉 공개의 여파 및 K리그 전체가 경기 불화의 여파로 구단들 씀씀이가 모두 줄어들자 본의 아니게 내실에 충실했던 포항이 반사 이익을 누리고 있기도 하다.
26.2. 퐁당퐁당 홀짝 징크스[편집]
감독 관련해 5대 감독 박성화 시절(1996~2000)부터 정말 특이한 징크스를 가지고 있다. 박성화부터 역대 감독들 성적과 내용을 보면 마치 물수제비 뜨듯 퐁당퐁당 거리며 성공과 실패가 반복된다. 박성화부터 홀수 감독들은 좋은 평가를 받고, 짝수 감독은 예외 없이 망했다.
징크스의 시작점인 박성화 감독은 전성기인 1990년대에 인터넷이 대중화되지 않아 2000년대 이후 입문한 팬들이 그 전성기를 잘 모르고 2007년 부산 감독을 맡았다가 올림픽 대표팀으로 빠져나가 버린 이후의 행적 때문에[65] 과소평가받지만 포항에서의 박성화는 리그 우승만 없었다뿐이지 1996년 FA컵 우승, 1996-97, 1997-98 시즌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2연패를 이룩한 탁월한 전략가였다. 포항의 AFC 챔피언스 리그 3회 우승 중 2번을 만들어주어 지금 포항이 당당하게 아시아의 명문 소리를 할 수 있게 된 건 박성화 감독의 공이다. 우승 시즌 외에도 1996년 아디다스컵 준우승, 1997년 프로스펙스컵, 아시아 슈퍼컵 준우승, 1998년 아시아 슈퍼컵 준우승을 기록했다.
6대 감독 최순호부터 본격적인 징크스가 발휘된다. 성적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우승은 못 했지만 2001년과 2002년의 FA컵 준우승, 2004년 리그 준우승을 기록했다. 이 당시 최순호 감독이 구사한 심심한 수비축구에 관중이 많이 줄었고 팀 컬러를 잃었다는 서포터즈의 반발도 심했다. 결정적으로 2004년 후기리그에서 꼴찌를 하면서 여론이 최악으로 치달았다. 서포터즈가 감독 퇴진 플래카드를 내거는 내홍이 있었고 2004년 챔피언 결정전에서 수원에게 승부차기로 패해 준우승에 머무르자 최순호 감독은 재계약에 실패하고 팀을 떠나야 했다.
7대 감독은 구단 최초 외국인 감독인 파리아스 감독이었다. 파리아스 감독은 최순호 감독 시기 실종되었던 공격 축구 기조를 되찾고, 특유의 브라질 색을 팀에 입혔다. 2년의 담금질을 거쳐 6강 플레이오프 제도 하에서 치러진 2007년 플레이메이커 따바레즈와 박원재, 최효진 양날개를 앞세워 리그 5위에서 경남, 울산, 수원, 성남을 모두 깨부수고 역전 우승을 차지했다. 2008년부턴 완전히 꽃피운 파리아스식 공격 축구로 2008년 FA컵 우승, 2009년 리그컵 우승과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리그 최초로 감독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2009년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은 그 당시 K리그 팬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던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이티하드를 꺾고 이룩한 것이었기에 더욱 의미가 컸다. 이 시기부터 특유의 빠른 패스워크에 기반한 공격 축구 스타일을 정립했고, 대외적으로 유스를 잘 키우는 구단이란 이미지가 굳게 된다. 공격 축구야 이전에도 추구했던 스타일이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감독의 스타일에 따라 축구 스타일도 바뀌는 팀이었다. 바르셀로나처럼 그 팀하면 생각나는 고유의 스타일이 형성된 것은 파리아스 감독부터다.
지방 중소도시에서 지내는 게 썩 편하지만은 않았던 파리아스 감독은 중동 오일 머니의 유혹을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파리아스 감독은 알 아흘리로 떠나고, 포항은 새로운 외국인 감독 와우데마르 레무스를 8대 감독으로 선임한다. 레무스 감독은 아름다운 축구라는 슬로건을 내밀며 야심차게 도전장을 내밀었고, 팬들도 올해는 우승이 힘들 거 같다며 마음을 너그럽게 먹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너무 심각했다. 일단 외인 공격수 데닐손과 스테보와 믿음직한 날개 최효진이 떠났고, 그들을 대체해야 할 설기현과 모따는 각각 부상과 부진으로 한 사람 몫을 못 해줬다. 하지만 올리베이라 감독은 그런 부분을 감안하더라도 너무 못했다. 함량 미달 공격수인 알렉산드로에 대한 전폭적인 신임, AFC 예선전 치르려고 리그를 2군으로 다 채우는 기괴한 로테이션, 아무런 색깔이 전술, 공격에는 공백이 생겼어도 중원은 파리아스 시절과 거의 같음에도 전임 감독 시기의 패싱 게임 실종 등등 문제가 너무 많았다. 2009년 8-1로 이겼던 제주에게 역으로 2-5로 깨지는 결과를 받자, 팬들은 더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포항 구단은 2010년 5월 10일 구단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게재하고 올리베이라 감독의 경질을 발표한다. 포항 팬들은 이 시절을 흑역사로 여긴다.
2010 시즌을 박창현 대행 체제로 마치고 선임된 9대 감독은 전남에서의 코치 생활과 3년간의 부산 감독 생활로 어느 정도 지도자 경험을 쌓은 상태였던 황선홍 감독이었다. 황선홍 감독은 기존의 공격 축구에 균형을 더해 스틸타카를 완성한다. 2011년, 2012년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미드필더와 수비를 정비해 중원에서의 강한 압박,[66] 공수 겸장의 측면 자원, 점유율을 포기하는 대신 빠르고 세밀한 패스워크, 장신 타깃맨을 활용한 킥 앤 러시로의 자연스러운 전환이 모두 더해진 강력한 팀을 완성했다. 이를 통해 2012년 FA컵 우승, 2013년 K리그 우승과 FA컵 우승이라는 더블을 이루어냈다. 2013년의 더블은 외국인 선수 없이 이뤄낸 성과였기에 더욱 큰 화제가 되었다.
황선홍 감독은 2015년을 마지막으로 휴식을 갖기 위해 팀을 떠났고 10대 감독으로 U-17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낸 최진철이 선임되었다. U-17에서 보여준 선수비 후역습 전술과 포항의 스틸타카가 안 맞아서 걱정이 많았는데 그대로 적중했다. 이해에는 보드진의 형편없는 지원까지 더해져 팀이 하위 스플릿으로 굴러떨어졌다. 하위 스플릿으로 떨어져 강등권과 승점 4점 차까지 추락하게 되자 결국 사임을 표명했다.
최진철 감독의 후임으로 팬들은 김병수 감독을 원했지만, 최순호 감독이 다시 오더니[67] 17 시즌과 18 시즌 두 시즌 동안 파리아스, 황선홍 시절에 비해 부족한 경기력을 보여주어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18 시즌에 드디어 상위 스플릿에 복귀함으로써 일단 홀짝 징크스의 구색 자체는 맞춘 상태이다. 하지만 결국 2019년 시즌 초반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었고, 홀짝 징크스를 끝내버린다.
이후 스틸타카의 부활을 위해 파리아스 시절을 직접 선수로 경험했던 수석코치 김기동을 12대 감독으로 선임하였다. 김기동 감독은 K리그1 3위를 기록하며 5년 만에 포항을 아시아 무대로 복귀시켰으며, 이에 그치지 않고 포항을 ACL 결승으로 이끌며 명가 포항을 재건하였다. 마침내, 2023년에 FA컵 우승을 해냈다.
26.3. 숨겨진 골키퍼 명가[편집]
아랫 동네에 가려서 그렇지만 포항은 전통적으로 골키퍼 걱정이 없는 골키퍼 명가였다. 1980년대에는 조병득, 정기동, 박철우,[68] 1990년대에는 드라간, 김이섭, 김일진, 2000년대에는 김병지와 정성룡, 신화용이 있었고[69] 2010년대에는 영원히 포항일 것만 같던 신화용이 떠나자 강현무라는 걸출한 골키퍼가 등장, 훌륭히 성장하며 리그 탑급 골리가 되었다. 심지어 신화용에서 강현무로 이어지는 최근 10여 년 동안은 포항 유스가 주전 키퍼 자리를 내준 적이 없다. 2018 시즌에도 K리그 챌린지에서 수준급으로 활약했던 류원우가 영입되었지만 역시 유스 출신 키퍼인 강현무에 밀려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다.
26.4. 스틸러스와 스틸야드[편집]
1985년 구단명을 포항제철 아톰즈로 변경하며 1996년까지 데즈카 오사무의 철완 아톰 캐릭터를 저작권료도 지불하지 않고 무단으로 사용하게 된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일본 문화가 개방되지도 않았고[70]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희박했기 때문에 포항제철에서는 별 생각 없이 강철의 이미지를 나타낼 수 있는 아톰을 마스코트로 삼고 팀명까지 아톰즈로 유지했던 것이다.
이후 국민들의 저작권 개념이 잡힐 적에야 뒤늦게 문제 제기가 되었고, 구단 측이 팀명 공모전을 열어 1997년 팀명을 바꾸게 된다. 새 팀명은 기존에 포항 서포터즈 클럽이 쓰고 있던 '스틸러스'라는 명칭을 그대로 넘겨받아 포항 스틸러스가 되었고,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구단에서 서포터즈 클럽의 '스틸러스'라는 이름을 그대로 받아 쓰면서 두 명칭이 혼동되자, 당시 서포터즈 클럽은 '마린스'라는 이름으로 명칭 변경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스틸야드'라는 이름 또한 팬들이 부르던 애칭에서 출발했다. 개장 당시의 이름은 포항축구전용구장이었는데 팬들 사이에서 스틸야드로 불렸다. CM 01-02(한국 발매명: CM 2002)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미 해외에서도 스틸야드라고 불리던 상황. 그러다가 2006년에 공식적으로 구장 이름을 스틸야드로 개명했다.
결국에는 스틸야드와 스틸러스, 두 명칭 모두가 팬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름인 것이다.
26.5. 블레즈(BLEDS)[편집]
지방 구단인지라 얼마 없는 TV 중계도 잘 안 되는데 이 처사에 열받은 한 서포터가 스틸러스 TV라는 인터넷 중계 방송국을 개국했다. 빅 매치일 때는 방송 채널을 4개 이상 돌리는데도 언제나 꽉 찬 방을 유지했다.
여러모로 지상파 중계에서 K리그 팬으로서는 포항과 붙은 자신의 팀을 응원하기 위해 이 방송을 찾아오기도 하지만, 원래 취지는 어디까지나 포항 스틸러스를 위한 방송국이므로 편파 해설이 있었다.
그나마 2009 시즌 후반부터는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의 선전과 포항 스틸러스의 인기가 올라가면서 케이블 스포츠 채널을 중심으로 중계 비중이 늘어나고 있다.
2010 시즌부터는 구단 자체 중계 명칭을 스틸러스 TV로 정하면서 자연스레 개명의 필요성이 대두됐고 결국 2010년 4월 BLEDS로 개명했다. 이름의 유래는 BLACK + RED + LED다. 그렇게 근근히 중계를 해 오다가 2012 시즌부터 골 많이 나고 재미있는 포항 경기를 방송사들이 앞다투어 중계를 하자 블레즈에서 중계를 하는 경우는 많이 줄어들었다. 그래도 SPOTV나 중계가 없을 때는 블레즈에서 자체 편성하여 중계를 했으며, 중계 시에는 경고 누적이나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한 선수나 유망주들을 객원 해설로 초대하여 중계의 재미를 더했다.
27. 여담[편집]
- 2009 FIFA 클럽 월드컵에서 사베야는 에스투디안테스를 이끌고 포항과 맞붙게 되었는데, 경기 직전 인터뷰에서 포항에 대한 온갖 칭찬으로 인터뷰를 도배하였다. 물론 립 서비스성 발언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치부하기에는 엄청난 극찬이었다.#
- 그리스 사람이 포항 스틸러스를 안다. 그런데 저 외국인은 북한과 남한도 구분을 못 한다. 2010년 방송본인 걸로 봐서는, 아마도 2009 FIFA 클럽 월드컵 3위의 영향으로 보인다.
- 2017년 4월에 기념 교통카드를 출시했는데, 뜬금없이 티머니가 아닌 캐시비로 내놓았다. 그것도 L.포인트가 달린 통합권종형이다. 10가지 도안으로 나왔고 가격은 1장당 3,000원이며, 스틸러스 샵에서 판매 중이다. 비회원도 주문 가능.
- K3리그의 경주시민축구단과 MOU를 맺어 경주시민축구단을 위성구단으로 삼았으며, 송라클럽하우스에서 연습 경기를 갖거나 서로 선수를 주고받는 등 교류가 이뤄지고 있다. 그리고 2018년 여름 경주에서 뛰던 김지민이 포항으로 이적해 맹활약하면서 순기능을 만들어내고 있다. 2020년에는 지난 시즌 경주의 감독이던 김대건 감독이 포항의 코치로 부임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경주시와 포항시는 바로 이웃하고 있어 지리적으로도 가깝다.
- 광주 FC에 상대 전적 10승 5무 1패로 매우 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때문인지 광주 FC가 승격한 2020 시즌 인터뷰에서 1부 리그에서 꼭 이기고 싶은 상대로 박진섭 감독과 팀의 주장 여름 선수 둘 다 포항 스틸러스를 지목하였다.# 광주는 첫 승을 위해 단단히 벼르다가 2021 시즌 36R 포항 원정에서 드디어 사상 첫 승을 거두었다.
- 지금은 약체로 전락한 부산에 꽤 약한 모습을 보인다. 강호였던 대우 로얄즈 시절 부산이 포항을 많이 때려 잡기도 했지만, 더블을 달성한 2013년도에도 부산에게 패하며 부산의 상위 스플릿 진출을 스틸야드에서 지켜봐야만 했고, 부산이 강등됐던 2015년도에도 덜미를 한 번 잡힌 적이 있을 정도였다. 이후 2020년 K리그1 17라운드 원정 경기에서도 2:1로 패하였다. 부산과의 상대 전적은 56승 47무 50패로서, 이상하게 부산만 만나면 고전하는 경향이 있다.
- 2020년 5월 10일, 부산과의 리그 홈 개막전이 2:0 승리와는 별개로 화제가 되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무관중 경기의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경기장 스피커를 통해 응원 효과음을 재현하였다. 다른 몇몇 구장에서도 응원 효과음을 사용하긴 하였으나, 포항은 차원이 다른 준비성으로 실제로 관중들이 있는 듯한 느낌을 잘 구현했다는 평가였다. 실제로 경기 후 여러 매체에서 담당자 인터뷰를 통해 포항의 새로운 시도가 많이 기사화되었으며 MBC 뉴스데스크 스포츠 뉴스에도 방영되었다.#
- 포항은 J리그 팀에 11승 5무 2패라는 매우 강한 상성을 갖고 있다. 특히 포항의 홈 스틸야드에서는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 J리그 팀 상대 2패는 2021시즌 나고야 그램퍼스와의 중립구장(태국)에서의 기록과 2010시즌 산프레체 히로시마와의 원정에서의 기록이다.
- 강한 상성이 있으면 약한 상성도 있는 법. 포항은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 호주 A리그의 애들레이드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단 1승만을 거뒀다. 그 1승을 거뒀던 시즌마저도 리매치에서 다시 패배하면서, 그 여파로 조별 리그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애들레이드 유나이티드와의 상대 전적은 1승 1무 4패다.[71]
- 2021년 9월 3일, 아시아 구단 최초로 스포츠 블록체인 핀테크 기업 칠리즈와 파트너십 체결을 발표했다. 칠리즈는 스포츠 팀과 파트너십을 체결하여 팀의 팬 토큰을 발행하고, 팬들은 팬 토큰을 구매하여 팀의 의사 결정에 영향을 끼치는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다. 포항 스틸러스는 칠리즈 소시오스닷컴의 팬 투표를 통해 2022 시즌 선수단 버스, 축구 스타킹, 시즌권 카드의 디자인을 결정했다. 2021년 11월에는 팬 투표에 참여한 팬들과 오프라인 팬 미팅을 갖기도 했다.#
- 2022년, 포항 스틸러스가 '태풍 힌남노' 여파에도 홈경기를 예정대로 개최할 수 있었던 건, 구단 직원들이 직접 팔을 걷고 들어가서 청소하고 발전기, 명단 프린트, 목욕탕 등을 철저히 준비하는 등의 노력이 있던 걸로 드러났다.#
- 포항 스틸러스는 포항시 연고의 기업들이 주가 된 컨소시엄 형태의 기업 구단이다. (주)포스코 16.7% + (주)삼일 16.7% +(주)조선내화 8.3% + 포항상공회의소 4% 등 43개 기업이 포항 스틸러스를 소유하고 있다. 구단은 포스코에서 전담해서 운영하지만, 명목상으론 1995년부터 포항 소재 43개 기업들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팀이 되었다. 그로 인해 2010년까지는 포항 시의원 중 한 명이 단장 자리에 앉는 관행이 있었다.#
28. 둘러보기[편집]
[1] 1983년부터 1986년까지는 순회 경기 시절로 명목상으로만 연고가 있던 때다.[2] 스틸야드의 잔디 보수 공사로 인해 2003년 시즌 개막부터 2003년 7월 4일까지 홈구장으로 사용했다.[3] 스틸야드의 잔디 보수 공사로 인해 2013 시즌 28라운드부터 시즌 종료까지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당시 포항종합운동장은 조명 시설이 없어서 주중 경기를 낮에 진행해야 했다.[4] 오늘날의 포항 스틸러스를 있게 한, 포항 축구의 창립자이자 열렬한 후원자. 포항 서포터즈가 흔드는 깃발이나 착용한 머플러에 한 인물이 그려져 있는데, 그 인물이 바로 박태준 회장이다. 또한 스틸야드 E석의 별칭인 청암존 역시 박태준 회장의 호 '청암'에서 따 온 것이다.[5] 포항항에서 따왔다.[6] 포항항 TV 개설 이전에는 메인으로 운영하던 유튜브 채널이었으나 포항항 TV 개설 이후에는 하이라이트나 골 영상 등을 업로드하는 서브 채널로 활용했다. 현재는 쇠돌이 TV로 이름을 변경해 마스코트를 중심으로 하는 컨텐츠를 게시한다.[7] 세미프로까지 포함한다면 대전 코레일 FC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축구단이다.[8] K리그에서는 FC 서울과 함께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모두 우승을 경험한 유이한 구단 중 하나다. 국내 다른 프로 스포츠에서는 KBO 리그의 두산 베어스와 KIA 타이거즈가 이 기록을 갖고 있다.[9] FA컵에서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2020년대 모두 우승을 경험했고 이 기록은 FA컵에 참가하는 대한민국 모든 축구단 중 포항이 유일하다.[10] 동아시아 구단 중 공동 최다 우승 기록이다.[11]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2020년대[12] K리그1, FA컵, ACL[13] 당시 클럽 월드컵 우승은 UEFA 챔피언스 리그 챔피언 바르셀로나가 차지했고, 준우승은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챔피언 에스투디안테스가 차지했다.[14] 1980년대부터 이미 여러 중·고·대학교와 협약을 맺는 등 유소년 시스템의 골격을 갖추고 있었으며 공식적으로 2003년 산하 유소년 팀 운영을 체계화했다.[15] 당시 법인명은 ㈜포항프로축구였으며 2003년에 현재의 법인명인 ㈜포항스틸러스로 법인명을 변경했다.[16] 공식적으로는 2003년부터 유스 팀으로서 체계가 완비됐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포항의 유스 팀 기능을 해 왔으며 실질적인 시작은 1980년대로 올라간다.[17] 2011년에 포철공고가 마이스터고로 지정되면서 2012년 말까지 모든 운동부를 폐지하게 되었기 때문에 2012년을 끝으로 포항공고 야구부와 더불어 포항 유스 팀 기능은 포항제철고등학교로 모두 이관되었다.[18] 2017년 두 학교가 통합되었다. 효곡동 지역의 인구 감소 영향이 큰 것으로 파악된다.[19] 1974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1975 전기 전국실업축구연맹전, 1981 후기 전국실업축구연맹전, 1982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우승.[20] 1986 축구대제전, 1986 후기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우승.[출신] A B C D E F G 선수 출신 감독.[21] 구단 최초의 선수 출신 감독이다.[22] 1988 한국프로축구대회, 1988 후기 전국실업축구연맹전, 1992 한국프로축구대회 우승.[23] 이회택 감독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소집된 동안 감독대행으로 선임되어 팀을 지휘했다.[24] 1993 아디다스컵 우승.[25] 허정무 감독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코치로 소집된 동안 감독대행으로 선임되어 팀을 지휘했다.[26] 1996 FA컵 축구대회, 1996-97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1997-98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우승.[27] 구단 최초의 외국인 감독.[28] 2007 삼성 하우젠 K-리그, 2008 하나은행 FA CUP 전국축구선수권대회, 2009 피스컵 코리아, 2009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29] 2010 포르티스 보험회사 호랑이 구정컵 우승.[30] 2012 하나은행 FA CUP, 2013 현대오일뱅크 K리그 클래식, 2013 하나은행 FA CUP 우승.[31] 2023 하나은행 FA CUP 우승.[32] 롯데 자이언츠의 '부산 갈매기' & '돌아와요 부산항에', KIA 타이거즈의 목포의 눈물 & 남행열차, SSG 랜더스의 '연안부두', LG 트윈스의 서울 & 서울의 찬가 등과 비슷한 포지션의 노래다.[33] 또 다른 팀이 있다면 광주 FC. 홈경기에서 승리를 굳혀갈 즈음 스마트폰 플래시를 켜고 모든 관중이 남행열차를 부른다.[34] 이때는 전후기 리그 제도라 성적을 따로 계산했기에 전체 꼴찌는 아니었다. 2004년 후기 리그만 꼴찌였는데 전기리그에 벌어놓은 게 있어 플레이오프에 나갈 수 있었고 수원과 승부차기까지 간 끝에 준우승했다. 포항의 추락이 워낙 커서 그렇지 전기리그에서 잘한 팀이 후기리그에서 퍼진다는 문제점은 전후기리그가 시행되는 내내 지적되던 문제점이다. 초호화 멤버를 자랑했던 성남 일화조차 전후기리그로 치러진 마지막 시즌이었던 2006 시즌 전기리그 우승 이후 후기리그에서 힘 빠진 게 눈에 보여서 말이 많았다.[35] 원정은 무승부가 목표. 앞서고 있는 경기는 후반에 무조건 수비수 교체하고 잠그기.[36] 황선홍 감독 본인부터 부산 시절 정성훈, 포항 시절 배천석, 박성호 등 매 시즌 장신 타깃 스트라이커를 한 명 이상은 기용했다. 2011년에는 슈바를 쓰긴 했지만 제대로 된 활약을 못해 플레이오프에서 제대로 피를 보는 시행착오도 있었다.[37] 유럽에도 바르셀로나처럼 팀 컬러가 확연해 이를 거거스르면 수뇌부가 알아서 컷하는 팀이 있고 첼시나 인테르처럼 감독이랑 선수들이 당시 환경에 따라 알아서 하는 팀이 있는데, K리그에선 전자가 드문 편이다. 니포 축구로 K리그에 센세이션을 불러왔던 부천 SK는 모기업의 무관심 속에 제주로 연고 이전하는 와중에 니폼니시 시절 쌓아둔 자원까지 날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고, 서울은 딱 감독이랑 선수들이 알아서 하는 유형이라 감독 바뀌면 스타일도 바뀐다. 최강희 감독 이래 닥공 축구라는 특유의 스타일을 구축한 전북은 2010년대 센세이셔널했지만 2016년 이후 명문이 아니라 K리그 최악의 수치가 되었다.[38] 2007년 포항 우승 이후 포항 관계자들 사이에서 나온 말이다.[39] 1993년 이전에도 경북 지역의 여러 중·고·대학교와 협약을 맺어 유소년 시스템의 골격을 갖추기도 했다. 이것이 전면적으로 개편된 것이 1993년이다.[40] 초대 감독인 한홍기 감독이 김병수가 중학생일 때부터 애지중지 키워왔다. 심지어 1군 선수단 훈련에도 참가시켰을 정도.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시스템을 생각하면 꽤나 파격적인 교육이었다.[41] 이때 유소년 시스템에 투자해 둔 것이 신의 한 수가 되었다.[42] 이는 모기업의 사업 영역과도 연관되는데, 포스코의 주력 사업은 철강 제조업으로 B2B를 위주로 한다. 따라서 축구단 운영으로 인해 얻는 가장 큰 이익인 홍보 효과에 대해 별달리 큰 영향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43] 그러나 드래프트 제도에도 맹점이 있다. 유스 출신 선수 우선 지명이 4명뿐인지라 그 4명을 빼면 다른 팀에 뺏기기 때문이다.[44] 한국의 프로축구단에서는 한국 특유의 학원 축구 시스템과 관련 규정으로 인해, 구단 측이 유소년 선수와 프로 계약을 체결하여 선수에 대한 소유권을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45] 대표적으로 박주영을 배출한 청구고등학교.[46] 같은 대경권에 김천 상무 FC가 있긴 하지만 여긴 팀의 특수성과 연고지의 한계 때문에 아직 갈 길이 멀다.[47] 포스코의 제2제철소인 광양제철소가 전라남도 광양시에 있다.[48] 정원진의 경우 이석현과의 트레이드로 이적했다.[49] 틀린 말은 아닌 게 연고제 도입 당시 포항제철의 홈구장은 대구시민운동장이었다.[50] 광역연고제에 대해 모를 리 없는 서울 팬덤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진짜 그렇게 생각해서라기보단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호도에 앞장섰던 김현회나 타 팀 팬덤이 서울 연고를 부정할 때 이 광역연고제 시절을 걸고 넘어지곤 했기 때문이다.[51] 심지어는 2군 내보내고도 포항이 이긴 경기가 있을 정도. 오죽하면 성남시민운동장을 문수경기장에 이은 포항 제3의 홈구장이라고 하던 때가 있었다.[52] 다만 당시 일부 포항 팬들의 모습은 울산만 잡으면 다냐, 핵심 선수들을 전북에게 판게 한둘이 아니라서 자존심도 없냐고 포항 팬들끼리도 이견이 있다.[53] 수원이 축구 수도라는 별명이 붙은 건 리그 참가 초기부터 우승을 계속 하고 이로 인해 관중 동원력이 한동안 K리그 탑을 유지하며 다른 팀들을 압도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대회의 우승 트로피를 합치면 수원이 K리그 팀들 중에서 가장 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렸다.[54] 2016년 우승-2017~2018년 4강, 2019년 우승.[55] 참고로 2019년 FA컵 우승하기 전까지는 두 팀 모두 FA컵 최다 우승 타이 기록(4회)을 가지고 있었지만 2019년 수원의 우승으로 수원이 FA컵 5회 우승을 기록하면서 포항은 최다 우승 기록을 뺏기게 된다.[56] 임상협은 수원을 떠난 뒤 포항으로 이적했고, 여기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57] 태풍으로 인해 스틸야드 일부가 파손되고 무엇보다 침수 피해가 너무 심해, 정상적으로 경기가 열리기 매우 어려운 환경이었다.[58] 실업구단 당시 별도의 구단 엠블럼은 없었고, 모기업 포항종합제철의 CI를 사용하였다.[59] 당시 유니폼에는 엠블럼이 부착되지 않았고, 트레이닝복에는 아래의 엠블럼이 부착되었다.
[60] 당시 유니폼에는 아래의 엠블럼이 부착되었다.
[61] 아스날, 맨유 등 1800년대 후반~1900년대 초반에 창설한 대부분의 축구단은 그 지역 노동자들이 주축이 되거나 노동자들을 위한 축구단에서 시작했다.[62] 이 때문에 포스코에서는 자사의 협력 업체들한테까지 포항 스틸러스의 티켓을 많이 뿌리는 편이다. 야빠와 안티 국축 팬들은 이를 공짜 표라며 헐뜯지만 기업의 지역 사회 환원 취지에서 오히려 긍정적으로 봐야 할 부분. 그리고 이렇게 자사와 계열사에 표를 뿌리는 건, 야구나 기타 스포츠 모두 마찬가지이다. 제철소 노동자들에게는 아예 복지 카드에서 차감하는 형식으로 제공한다.[63] 이때는 포항종합운동장을 홈으로 쓰고 있었다.[64] 포항역-양학동역(이 운행 계통이 없어지면서 같이 폐역되었다)-효자역(방향 변경)-괴동역 통과-제철역 순으로 운행했다. 원래 포스코 직원용이었으나 포항 스틸러스의 홈경기가 열리는 날에는 일반인에게도 개방했다. 그러나 2005년 이후 폐지했다.[65] 2008년 올림픽 당시 축구장 물 채우라는 말이 나오게 한 걸로 유명한데 이탈리아에 지고, 카메룬과 비기고, 온두라스에 승리한 건 그냥 이길 팀한테 이기고, 질 팀한테 지고, 비길 팀한테 비긴 것일 뿐이다. 그 전에 맡았던 청소년 대표팀도 마찬가지. 2002 세대와 축협의 유스 투자가 맞물려 성과가 나기 시작한 건 2010년대 이후의 일로, 2012 세대가 그 첫 세대이다.[66] 젠틀한 이미지와 달리 황선홍의 축구는 거칠고 파울도 많이 나오는 편이다. 물론 닥공의 반작용으로 나타난 공간 메운다고 거친 파울 쏟아내고 그와 비례해 판정 시비도 쏟아낸 전북 수준은 아니지만. 반대로 파울이 적었던 감독은 경기 템포를 느리게 가져가는 최용수 감독이었다.[67] 포항 역사상 최초로 홀짝 순번을 모두 체험하게 된다.[68] 동시대 최인영에게 가려진 선수였지만 미국 월드컵까지 부동의 국가대표 넘버 2 골키퍼였다.[69] 심지어 정성룡과 신화용은 활동 시기가 아예 겹쳐서 키퍼 로테이션을 돌았다.[70] 일본 대중문화 개방 정책은 1998년부터 시행되었다. 이 때문에 그 당시 어린이들과 시민들 사이에서는 아톰이 일본 만화 캐릭터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71] 2021 시즌 종료 기준.
[60] 당시 유니폼에는 아래의 엠블럼이 부착되었다.
[61] 아스날, 맨유 등 1800년대 후반~1900년대 초반에 창설한 대부분의 축구단은 그 지역 노동자들이 주축이 되거나 노동자들을 위한 축구단에서 시작했다.[62] 이 때문에 포스코에서는 자사의 협력 업체들한테까지 포항 스틸러스의 티켓을 많이 뿌리는 편이다. 야빠와 안티 국축 팬들은 이를 공짜 표라며 헐뜯지만 기업의 지역 사회 환원 취지에서 오히려 긍정적으로 봐야 할 부분. 그리고 이렇게 자사와 계열사에 표를 뿌리는 건, 야구나 기타 스포츠 모두 마찬가지이다. 제철소 노동자들에게는 아예 복지 카드에서 차감하는 형식으로 제공한다.[63] 이때는 포항종합운동장을 홈으로 쓰고 있었다.[64] 포항역-양학동역(이 운행 계통이 없어지면서 같이 폐역되었다)-효자역(방향 변경)-괴동역 통과-제철역 순으로 운행했다. 원래 포스코 직원용이었으나 포항 스틸러스의 홈경기가 열리는 날에는 일반인에게도 개방했다. 그러나 2005년 이후 폐지했다.[65] 2008년 올림픽 당시 축구장 물 채우라는 말이 나오게 한 걸로 유명한데 이탈리아에 지고, 카메룬과 비기고, 온두라스에 승리한 건 그냥 이길 팀한테 이기고, 질 팀한테 지고, 비길 팀한테 비긴 것일 뿐이다. 그 전에 맡았던 청소년 대표팀도 마찬가지. 2002 세대와 축협의 유스 투자가 맞물려 성과가 나기 시작한 건 2010년대 이후의 일로, 2012 세대가 그 첫 세대이다.[66] 젠틀한 이미지와 달리 황선홍의 축구는 거칠고 파울도 많이 나오는 편이다. 물론 닥공의 반작용으로 나타난 공간 메운다고 거친 파울 쏟아내고 그와 비례해 판정 시비도 쏟아낸 전북 수준은 아니지만. 반대로 파울이 적었던 감독은 경기 템포를 느리게 가져가는 최용수 감독이었다.[67] 포항 역사상 최초로 홀짝 순번을 모두 체험하게 된다.[68] 동시대 최인영에게 가려진 선수였지만 미국 월드컵까지 부동의 국가대표 넘버 2 골키퍼였다.[69] 심지어 정성룡과 신화용은 활동 시기가 아예 겹쳐서 키퍼 로테이션을 돌았다.[70] 일본 대중문화 개방 정책은 1998년부터 시행되었다. 이 때문에 그 당시 어린이들과 시민들 사이에서는 아톰이 일본 만화 캐릭터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71] 2021 시즌 종료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