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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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40px-Imperial_seal_of_Ming_dynasty.svg.png
명의 한왕(韓王)
한단왕 주랑기

주경률

폐지


명 비정통 황제
定武帝 | 정무제

묘호
없음
시호
없음
봉호
한왕(韓王)?
연호
정무(定武)?

주(朱)

본립(本鉝)?
부왕
한단왕(韓端王) 주랑기(朱朗錡)?
모후
한왕비(韓王妃) 송씨(宋氏)?
정실
피씨(皮氏)?
생몰
1616? ~ 1662년 12월 31일?
재위
남명 비정통 황제
1644년? ~ 1662년 12월 31일?

1. 개요
2. 전하는 생애
3. 기타



1. 개요[편집]


남명의 비정통 황제라고 전해지는 인물. 휘는 본현이라고도 하고, 정무제가 실존인물이라고 믿는 일부 학자들은 다른 이름을 제시하기도 한다. 연호가 정무라 정무제로 불린다. 죄유록(罪惟錄) 등에 전하는 야사에 가까운 기록밖에 없어서 실존 여부를 의심하는 학자가 많다. 근대 남명사를 편찬한 전해악(錢海岳)은 홍무제의 20남 한왕(韓王) 주송(朱松)의 자손인 한단왕(韓端王) 주낭기(朱朗錡)의 아들 주단척(朱亶塉)과 동일인물로 간주하였고, 역시 주송의 후손인 주경률(朱璟溧)과 동일인물로 간주하는 설도 있으나 어디까지나 가설로 남았다.


2. 전하는 생애[편집]


1644년, 북경이 함락되고 숭정제가 자살한 시기에 학영충(郝永忠)이 주본립을 명나라 황제로 옹립했고, 주본립은 그해를 정무(定武) 원년으로 정했다고 한다.

1662년, 영력제 주유랑이 청나라 장수 오삼계의 손으로 미얀마에서 피살된 뒤에도 여전히 정무제의 남명은 중국 본토에서 남명 조정을 이끌었다고 한다. 그는 영력제에게 칭신하지 않은 채 방산(房山)에서 그 세를 유지했다고 하며, 이순(李順)의 후예인 이래경과 협력하기도 하였다.

1664년, 청군이 군을 셋으로 나누어 공격해오자 정무제는 학영충, 이래경, 유체순(劉體純)에게 명하여 막게 하였으나 셋 다 대패했고, 이를 계기로 정무 정권은 급속도로 와해되었으며 정무제는 동년 12월 청군에게 처형당했고 한다.

순치제 시기의 군인 조택원(祖澤遠)은 정무제의 세력권인 방산에서 여러 전리품을 얻었다고 순치제에게 보고하였다고 한다.

정무제의 실존 여부가 의심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영력제조차도 청나라 군대의 공격을 피해 외국으로 나가야 했던 판이었다. 만약 정말로 정무제가 실존인물이었고 전해지는 대로 영력제가 죽은 이후에도 여전히 중국 본토 땅에 남아 저항하였다면, 정무제 세력을 언급하는 청나라 기록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야사에 가까운 기록밖에 전해지지 않는단 말인가?


3. 기타[편집]


일부 중국 사이트에선 정무제의 묘호를 평종(平宗), 시호를 규천현도지인정신덕문분무정숙돈강원황제(揆天顯道知仁貞信德文奮武靖肅敦康元皇帝)로 표기하나 출전은 확인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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