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삼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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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吳三桂
명나라 말기, 명청교체기, 청나라 초기의 장수이다. 후에 청나라에 불만을 가지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그 후 사망하고 손자 대에 이르러 반란은 실패한다.
한족의 입장에선 민족의 배신자이자 기회주의자의 전형이며, 그가 투항하였던 청나라의 지배민족인 만주족의 입장에서도 기회주의자이자 배신자이다. 몽골족 중에서도 청나라 때 만주족과 일체화된 바 있었던 내몽골인들에게도 오삼계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이다.[2]
2. 명나라의 장군[편집]
오삼계는 1612년 6월 8일 지금의 랴오닝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오양(吳襄)으로 명나라의 장수였는데 원래 오양의 집안은 강소성 고우(高郵)에 살았지만 오삼계가 태어날 때쯤 만주족이 건국한, 후일 청으로 이름을 바꾸는 후금이 맹렬한 기세로 팽창해서 명나라 군 상당수가 요동 근처에 주둔하게 되었다. 오삼계의 아버지 오양도 이때 요동에 정착하고 아들 오삼계를 본다. 소년시절 오삼계는 아버지 오양이 만주군에게 포위되자 필마단기로 적진에 뛰어들어 아버지를 구했다. 나름 효자이자 맹장이라는 멋진 컨셉으로 데뷔한 것이다.
1641년에 29세에 제독이 되었다.[3] 명나라군은 송산 전투로 결국 만주지방에서 패퇴했는데. 이 과정에서 오삼계는 1만의 군대를 이끌고 결사적으로 청군의 포위망을 돌파해서 1만의 군대라도 건져서 산해관 안으로 후퇴했기 때문에 송산 전투의 패배로 산해관까지 공짜로 넘어가는 것은 막았으나 송산 전투에서 명나라의 손실이 너무 치명적이라 이자성의 반란군을 막을 수 있는 군사력까지 소멸되었다. 이후 후금군을 견제하며 버티기로 한다.
후금과 이자성 반란군 양측으로부터 투항권유가 날아오는데 후금측은 비록 만주족이라는 큰 단점이 있었으나 투항한 명나라 장수들을 실권은 없으나 그래도 섭섭치 않게 대우를 해주었고 점령한 명나라 영지에서 모병한 한인들로만 구성된 군대를 창설할 정도로 포용정책을 내세웠다. 반면 이자성 측은 오삼계의 부친의 신병을 붙잡고 있는 이자성이며 같은 한족인 이자성과 손을 잡아 후금을 막는다 라는 것이 가능했기에 부하들과의 논의 끝에 같은 한인끼리 뭉치자로 결정될 무렵 이자성이 명나라 수도 베이징을 함락하는 과정에서 무차별적으로 약탈과 파괴를 일삼는 이자성과 그의 반란군의 모습을 보고 맘을 바꿔 되려 후금측에 사신을 보내 투항할테니 같이 이자성으로부터 북경을 되찾게 도와달라라는 사신을 보낸다.
그러나 명나라는 이자성에 의해서 멸망하였고, 그때를 틈타 후금군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서 산해관에 임박했다. 오삼계는 긴급징병으로 겉으로는 10만의 대군이었지만 실질적으로 송산 전투에서 겨우 수습한 1만과 어떻게든 명군으로 다시 복귀한 군대를 합쳐 제대로된 군대가 3만명 정도 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군사적 규모차이, 이자성으로부터 제대로된 군사적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 등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서 결국 항복했다고 할 수 있다.
3. 청나라의 번왕[편집]
그런데 1644년 이자성의 난으로 북경이 함락되고 명나라는 멸망하였다. 청나라군과의 전쟁으로 국력에 심대한 타격이 있었는데다가 결정적으로 송산 전투로 오삼계가 결사적으로 이끌고 퇴각한 1만정도의 병력을 제외하고 사실상 송산 전투에 참여한 명나라 정예군 13만 중 대부분이 붕괴되었기 때문에 농민반란에 대처할 수가 없었다.
기존에는 송산 전투 등으로 인한 명나라의 피해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북경에 있던 자신의 첩을 이자성군의 한 지휘관인 유종민이 뺏었다는 게 원인으로 알려져있었다. 이 첩은 '진원원(陳圓圓)'이라는 여성으로, 본래 기녀였으나 오삼계가 그녀의 자태에 반해서 애첩으로 삼았다. 이후 오삼계가 외지에서 근무하다가 이자성이 봉기하자 마음을 돌려 이자성군에 투항했는데, 진원원을 이자성 봉기군의 지휘관이 빼앗았다는 것을 알고는 화를 내더니 이자성군을 뭉개버리고 진원원을 되찾기 위해 청군을 산해관으로 들였다는 것.
첩 때문인 것이 사실이라면 오삼계의 첩 진원원이 중국 역사를 바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명나라가 쇠잔하기는 했어도, 산해관에서 청나라를 막는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진원원은 당대 오삼계의 배신에 분개한 이들이 '고작 여자 때문에 오랑캐에게 나라를 내어준' 존재로 비하하기 위해 강조된 설명이기도 하다.[4]
고작 여자 하나라는 원인이 신빙성이 떨어진다면 다른 한가지 원인은 이자성군의 만행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이자성군에게 투항한 명나라 관리들이 많았는데 이자성군은 이들을 약탈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투항한 명나라 관리들을 고문하고 이들의 재산을 삥뜯었다.[5] 그리고 여기서 삥뜯긴 관리들 중에서는 오삼계의 아버지인 오양도 있었다. 명나라는 없어지고 이자성/청나라에서 선택해야 하는 시점에서 오랑캐에 투항하긴 좀 그러니 그나마 같은 한족 정권인 이자성군에게 투항하려던 오삼계였으나 북경으로 가던 중 아버지가 감금과 고문과 약탈을 당했다는 소리를 듣고 분노해 투항을 포기했다.
이 사실을 인식한 이자성도 오양에 대한 약탈을 멈추고 풀어줬지만 이미 늦었다. 이자성은 발끈해서 오양을 죽이고 산해관을 공격했다. 북경을 점령한 이자성 군은 투항에 응하지않는 '명나라 사령관' 오삼계를 벌하기 위해 산해관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고 그 병력이 10만에 이르렀다. 당시 산해관을 지키는 오삼계의 병력은 정예이긴 했으나 3만에 불과했다.[6] 거기에 이 전쟁을 통한 어부지리를 노리는 청 섭정 도르곤이 산해관 밖에서 역시 10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대기 중이었다. 혼자 힘으로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오삼계는 청나라에 도움을 청했다. 욕 먹는 건 싫으니 명분을 투항이 아닌 동맹으로 하려고 했지만 청나라는 끝까지 귀순을 요구한다.[7] 숫적으로 열세인 오삼계군이 밀리면서 전세가 험악해지자 오삼계는 청나라에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즉 진짜 투항원인은 송산 전투의 패배로 명나라 주력군이 궤멸되어 실질적으로 청나라군보다도 명나라군 숫자가 확연하게 줄었기 때문에 산해관에서 막는게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청군은 투항한 명군과 함께 무서운 기세로 중국 본토로 들어와 보병위주의 농민병인 이자성군을 박살내고 결국 북경에 입성했다. 북경에 들어온 도르곤은 일등공신인 오삼계를 왕으로 봉하고 숭정제를 황제의 예우로 장례를 치러 민심을 다잡았다. 이후 본격적으로 잔여세력 처단에 나선 청은 중국 본토를 급속히 장악하였다.
오삼계는 산해관을 열어준 공로로 다른 한족 협력자와 함께 멀리 떨어진 귀주성과 운남성의 왕인 평서왕(平西王)으로 봉해진다. 이때 오삼계를 왕으로 봉해준 이유는 단순히 항복한 장군을 우대해줬다기 보단 당시 오삼계가 가지고 있던 군사력 전체를 회유하고자 했던 청 조정의 의도가 내포되어있다. 이와 비슷한 이유로 청 조정에서는 다른 한족 협력자였던 상가희와 경중명을 각각 평남왕(平南王)과 정남왕(定南王)으로 봉해 번왕으로 삼았다. 이는 아직 남쪽에 잔존한 남명을 확실하게 끝장내기 위해서였고 결국 남명은 이들 손에서 사실상 끝장난다. 오삼계는 왕으로 봉해지자마자 이자성 잡기에 돌입했고 결국 이자성을 완전히 처단했다. 이후 남중국 토벌을 명 받고 사천지역을 차지했던 대서군의 우두머리인 장헌충을 죽여 사천도 완전히 토벌했다. 이후 그 잔당이 남명 정권 밑으로 들어가자 당시 정서대장군이었던 국한과 함께 운남을 밀어버리고 최종적으론 버마로 도망간 영력제 주유랑을 데려와 곤명에서 죽였다.[8] 결국 오삼계는 자기 손으로 명을 완전히 뿌리 뽑은 셈이다.
4. 통치[9][편집]
청 조정에서 명의 뿌리를 뽑는 공을 세운 오삼계에게 운남지역을 통치하도록 명령함으로써 그의 공을 치하했다. 운남은 중국 최서남의 변방으로, 토착세력이 대대로 통치하여 국가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있던 곳이었다. 또한 명말의 혼란기 속에서 반란과 반청세력의 최후의 근거지였던 만큼 통치하기 빡센 곳인 것은 당연했다.
오삼계를 여기 보낸 것은 삼번 중 가장 강한 오삼계를 변방인 운남에 보내 그를 격리하고자 한 정치적 의도와 그의 군사력을 통해 국가권력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고 반청복명세력의 중심지였던 운남을 통치하게 함으로써 반청세력의 소멸과 이후의 변방 보호를 통한 지방통치의 군사적 보안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오삼계는 이런 운남 통치를 위해 운남의 토착세력을 군사적으로 제압해서 통치했는데, 일부러 토착민들을 탄압하고 약탈하여 난을 일으키도록 조성해 조정에 번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내부적으론 난을 무력으로 때려잡고 땅을 몰수했다. 토추(土酋)에 대해서도 온갖 방법의 약탈을 자행하였는데, 이들에게 매년 조향(助餉)과 조병(助兵)을 강요하고 재산을 몰수하거나 지방 관원을 종용해 비리와 약탈을 부추기는 등의 악행을 지속하였다. 한마디로 탐관오리였던 셈이다.
특히 군량을 구실로 한 민간 착취를 심하게 하였는데 흉년이 들자 쌀값 폭등을 구실로 토지 700여경(頃)[10] 을 번장으로 삼았다. 이는 운남 일대의 막대한 토지를 번의 땅으로 만들었고, 백성들에게 소작료를 내도록 하여 운남의 자경농 대부분이 번하 관병의 전호로 전락하게 되었다.
오삼계는 이런 착취를 통해 마련한 재산으로 염정(鹽井), 광산개발을 통해 부를 축적했고, 관진(關津)을 독점해 상세와 공업, 무역업을 독점하며 고리대금업을 통해 재물과 부를 늘리는데 사력을 다했다. 또한 달라이 라마(達賴刺麻)와 통사(通使)하여 차, 말 등을 교역하는 시장을 개설하고 서장(西藏)을 통해 서번(西番), 몽골족과의 변방무역을 했는데 사천에서 생산된 황련, 부자와 같은 약재를 요동으로 판매하거나 요동지역에서 생산되는 인삼을 운남으로 판매했는데, 이러한 무역을 모두 번에서 독점했다.[11]
사실상 남중국의 왕으로 살았던 셈이다. 다른 번들도 상황은 비슷했는데 상가희의 경우 광산개발과 바닷소금(海鹽) 등으로 막대한 이익을 벌어들였고, 경중명의 손자인 경정충(耿精忠, 1644~1682)은 나루터 입구마다 관리소를 세워 염과를 징수하고 이익을 독점하여 폭리를 취했다. 하지만 이민족인 청나라도 중국사의 전통인 왕조 성립후 토사구팽에 들어간다. 아무리 변경이지만 제국 내에 국가나 다름없는 자치권을 인정받는 번국이 있다는 건 아무래도 이민족인 만주족 입장에선 부담스럽고, 무엇보다 번국이 중앙정부보다 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기에 중앙정부로선 큰 위협이었다. 오죽하면 오삼계는 인사, 재정, 군사권을 가지고[12] 본인의 화폐[13] 까지 주조해 사용했을 정도였다. 당시 청의 재정 수입이 은 875만여 냥인데 반해 운남에서 매년 은 900만여 냥이 군량으로 사용되는 것을 보면 많이도 해 먹었다 싶다. 이때문에 삼번의 난도 번을 폐지하기 위해 벼르고 있던 강희제가 일부러 조장했다는 설이 많다.[14]
5. 주나라의 황제[편집]
오삼계가 보기에 애송이인 강희제가 초반에 여러 문제 때문에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자, 오삼계는 운남에서 한족 왕조를 다시 건국한다는 명분을 세워 군사를 이끌고 삼번의 난을 일으켰다. 이에 다른 번도 호응하여 1673년 반란을 일으키고 중원으로 군사를 몰았다. 이 때 북경에 살던 오삼계의 아들 오응웅(吳應熊)[15] 과 오응웅의 2남인 오세림은 교수형에 처해졌고, 나머지 어린 아이는 궁형에 처해져 내시가 되었다.[16][17] 여기에 1678년(강희 17년)에 삼번의 맹주 오삼계는 스스로 황제에 올라 국호를 주(周), 연호를 소무(昭武)라 정했다. 삼번의 난 이전 청의 명장들이 건국 초기의 전통인 숙청에 휘말렸기에 청 진압군은 약체였고, 숙련된 장군인 오삼계는 진압군을 격파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이미 67세의 노인이었던 그는 그 해 8월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오삼계의 사망으로 반군의 기세가 흔들렸고, 강희제는 전열을 다듬는 한편 한족 장군들까지 등용하며 군을 재정비, 반격에 나섰고 결국 삼번의 난은 1681년 뒤를 이은 손자 오세번이 자살함으로서 진압된다. 오삼계는 부관참시되어 곤명 저잣거리에 세워진 대나무 장대에 내걸렸다. 장대는 2개가 있었는데 오른쪽에는 이미 죽은 오삼계의 두개골이 걸려 있었고 왼쪽에는 오세번[18] , 마보, 하국상, 이본심, 왕영청 등의 머리가 걸려 있었다.
6. 후손[편집]
현존하는 오삼계의 직계 후손들은 모두 오삼계의 또 다른 아들인 오응기(吳應麒)의 후손이다. 오응기는 지금의 구이저우성 지역으로 피신하여 몰래 숨어 살아간 덕분에 후손을 남길 수 있었다.
7. 평가[편집]
아주 오랜 기간 동안 "한족의 배신자"로 악평이 높았다. 한족이 중국의 주인이라는 관점을 견지한다면, 한족 국가를 저버리고 외침을 한 변방민족의 앞잡이로 한족국가를 멸망시키는데 일조한 한간이라고 치부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관점에서 벗어나서 본다면, 오삼계를 일개 기회주의자로 치부하기엔 어려운 점도 있다. 그는 명나라의 장수로서 산해관을 지키고 있었고, 그가 충성을 바쳐야 할 국가인 명나라는 이자성에 의해 멸망된다. 따라서 명을 넘보는 청나라도 적국이지만 명을 멸망시킨 이자성군도 오삼계에겐 적이자 원수이다.[19] 이들 가운데 누구를 선택하는 것이 절대선이고 정의일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청에 붙어서 부귀영화를 누리다 청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점도 까이지만, 가만히 있으면 오삼계는 지나치게 강력한 군세를 가졌기 때문에 숙청당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화려한 갈아타기 전적 때문에 정권의 명분을 세우는데 실패하여 민중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이 삼번의 난 실패의 원인이지만, 이것을 오삼계의 간사함으로만 치부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더군다나 당시엔 민족이란 개념이 확립되지 않았던 시기이기에, 민족이 애국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현대와 달리, 당시의 애국은 주군에게 충성을 하는 봉건적 형태의 충성이었기에, 현대의 관점으로 그를 민족의 배신자로 보는 건 무리가 있다.[20]
다만 숭정제가 오삼계에게 북경 구원을 요청했을 때 오삼계가 일부러 진군을 늦춘 점(다만 이 점에는 오삼계가 의도적으로 조정의 위험을 방치한 것이 아니라, 청에게 약점을 눈치채이지 않기 위해 속도를 조절하라는 숭정제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는 반론이 있다.)[21] , 진원원 사건(다만 오삼계가 정말 첩인 진원원 때문에 자신의 정치적 행보를 바꾸었다고 볼 근거는 없다는 반론이 있다.)+오양 감금과 약탈 사건이 터지기 전에는 오삼계도 이자성에게 항복하려고 했기 때문에 오삼계를 충신으로 여기고 청나라로의 투항도 명의 복수를 위한 것이라는 식의 정당화는 무리가 있다. 게다가 남명의 황제를 미얀마까지 추격하여 죽인 것도 오삼계 본인이다.
종합적으로 본다면, 기회주의자와 배신자의 대표주자로 널리 알려진 악명과는 달리 자신이 속해있던 나라를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배신해가며 자신의 이익을 탐한 인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최소한 평상시에는 별로 나무랄 데 없는 충성심과 유능함을 보여주던 인물인 것. 하지만 이 충성심이 시험대에 오르는 상황, 즉 충성심을 지키기 위해 자기 자신(그리고 자기 가문)의 희생이 요구되는 상황이 되면 가차없이 충성심을 던져버리고 새로운 충성의 대상으로 편을 바꾸는 데 별다른 거리낌이 없던 인물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다르게 보자면 녹봉 받은 만큼 자기 일은 잘 하지만 지신이 손해를 보고 희생하면서까지 충성을 다하지는 않는, 유교적 가치관에 따른 충(忠)[22] 보다는 차라리 일본 전국시대의 사무라이[23] 및 현대의 직업적 계약관계에 가깝게 행동한 인물이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청나라로 귀순한 다음에는 명의 잔존세력을 가차없이 공격하여 후계 황제까지 직접 죽이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굳이 긍정적으로 보자면 일단 충성의 대상을 바꾼 이상 새 나라에 그만큼 충실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도 있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다르게 보면, 전향(청나라로의 귀순) 자체는 외통수에 몰린 상황에서 '충성을 다하기 위해 스스로 희생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고 보아 이해하더라도, 자신의 입지를 얻기 위해 한때 속해있던 나라를 적극적으로 공격할 정도라면 능동적 배신자와 별로 다를 바도 없지 않으냐고 지적하는 것 역시 가능할 것이다. 결국 그의 배신(또는 매국)행위에 나름의 사정이 있었음을 감안할 수는 있겠지만, 항상 손해를 감수하기보다는 신의를 저버리는 길을 선택했고, 신의를 저버리더라도 이익을 얻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기회주의자라는 평가를 피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울 것이다. 또한, 그의 처참한 말로 역시 명청 교체기의 혼란 속에서 계속 기회주의적인 행보를 보인 끝에 결국 누구에게도 신뢰받지 못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사실 청에 귀순한 이후 오삼계가 꼭 명의 잔존세력을 철저히 추적하여 뿌리뽑는 역할을 앞장서서 맡을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물론 항장(降將) 출신인 오삼계가 운남·귀주의 번왕이 되어 남중국에서 독립 왕국이나 다름없는 거대한 세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손으로 명나라의 잔존세력을 도륙해버릴 정도로 독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더 이상 명나라에 미련이 없고 새롭게 청나라에 충성하겠다는 명확한 제스처를 보여줌으로써 (그리고 강남의 지리와 정세에 익숙하지 못한 만주족 대신 남명 토벌에 앞장서는 공을 세움으로써) 가능했던 일이니, 만약 그가 이와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면 실제 역사에서 누렸던 것과 같은 권세를 얻지는 못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기는 하다. 그러나 그 성공가도의 끝은 결국 자신은 반역자로 전락하여 시체까지 훼손당하고, 자신의 가문 역시 몰락하는 것이었으니 당대인들의 가치관을 생각하면 그렇게 얻은 부귀영화의 결말은 지극히 비참했던 셈이다. 차라리 살아남기 위한 전향 자체는 어쩔 수 없었더라도 그 후 보다 큰 출세를 위한 적극적인 배신자의 행보라도 자제하고 은인자중했다면 대단한 부귀영화와 권세를 얻지는 못할지언정 그나마 노후는 편안히 보내고, 가문이라도 온전히 보전하며 후세에 욕이라도 덜 먹을 가능성이 있었던 것.
무장으로서는 당대 수준급 백전노장. 이 때문에 삼번의 난 초기에는 청군을 상대로 굉장한 선전을 해 강희제도 쩔쩔맸다. 오삼계 생전에 삼번의 난의 기세는 정말로 청을 뒤집고 한족 국가가 다시 들어서는 듯 보이기까지 했다.[24]
일단 중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한간 정도의 강도 높은 비판은 아니고, 기회주의자 정도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명말 청초를 다룬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어째 첩 진원원과 관련한 이야기 때문인지 로맨티시스트로 각색되는 경우도 많다.
종합하자면 중국 정부의 입장과 관점은 공기화 처리+기회주의자, 역사를 잘 모르는 일반인들이나 한족주의 성향을 가진 입장에서는 한간, 만주족과 내몽골인의 입장에선 자신들의 중원 정복을 도와줬다가 이내 배신을 때리고 청나라를 멸망시키려 한 간사한 기회주의자. 역사를 좀 아는 입장에서는 강희제가 상대해야 할 보스급 캐릭터 정도이고, 여러모로 평가가 갈리긴 하지만 명나라의 입장에서든, 청나라의 입장에서든, 현대 중국의 입장에서든 충신으로 평가받기는 힘들 것 같다.
네이버캐스트 <명청전쟁> 시리즈 마지막편에 오삼계의 활약(?)상이 나와있다.
8. 기타[편집]
흔히 오삼계의 초상으로 알려진 위의 이미지는 사실 상가희의 초상이다.
9. 매체[편집]
무협소설작가 김용의 녹정기에도 직접 등장한다. 오삼계 자신보다는 그 가족들 위주로 등장하는데 아들인 오응웅은 건녕공주가 이미 위소보에게 마음이 있었기에 사고를 가장해 거세시켜 버리고 전부터 위소보랑 사고친 덕분에 위소보의 아이까지 임신, 결국 훗날 오응웅은 아비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고 수도를 탈출하려 하였으나 위소보가 재빨리 뒤쫒아간 탓에 사로잡히고 건녕공주는 위소보에게 가버리게 된다. 이후 오응웅은 청 조정이 본격적으로 오삼계 토벌에 나서면서 처형당한다.
주성치 주연의 녹정기 2에서는 홍콩배우 진패(秦沛)가 오삼계로 분했다. 아들 오응웅은 거세당하고, 본인도 망가지다가 풍석범의 배신으로 강희제에게 아주 간단하게 토벌당한다.[26] 구 자막에는 계와 규자가 헷갈려서 오삼규로 오역된 흑역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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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희제 평전에 나온 내용을 중심으로 써 오삼계에게 불리한 내용이 많다.[2] 독립국가인 몽골국과 러시아 내 몽골 문화권인 부랴티야 공화국 · 칼미키야 공화국에서는 오삼계를 그냥 외국의 기회주의자 정도로 여겨진다.[3] 여기서의 제독은 해군이 아니라 그냥 육군의 지휘관을 말한다. 오히려 장성(將星)이란 말은 최근에 만들어진 조어. 제독이 해군 장성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된 것은 근대 일본이 Admiral의 번역어로 제독을 채택한 이후의 이야기이다. 유럽은 육군과 해군의 기원이 다른 나라가 많지만, 기본적으로 동아시아는 이순신, 진린의 예에서 보듯이 유럽과 달리 수군과 육군의 사령관이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딱히 구분이 없다. 이 단어의 원조국인 중국(대만 포함)은 "提督"이라는 말은 현대에 쓰이지 않고 해군과 육군과 마찬가지로 해군장령, 계급으로서의 admiral(별넷)은 해군상장으로 번역한다.[4] 김용의 무협소설인 녹정기도 이런 부분에서는 여전히 전통역사의 관점을 유지했다.[5] 참고로 이들은 숭정제가 재정난으로 자금 좀 기부하라고 할 때 모두 없다고 궁상을 떨었던 자들이었다. 아예 투항을 작정했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자성군은 힘없는 백성들도 약탈했다.[6] 송산전투에서 오삼계가 이끌고 결사적으로 포위망을 뚫은 1만명에 송산 전투 후 궤멸되었어도 복귀했을 군대 숫자를 생각하면 실질적으로 3만의 군대가 있었다고 보는게 옳다. 거기에 긴급징병을 통해서 외형적으로는 10만을 유지했을 것으로 파악된다. 실질적으로 제대로된 군대가 너무 적었다.[7] 이때 동맹을 맺자는 오삼계의 서신에 도르곤이 자기 친동생인 아지거, 도도랑 머리를 붙잡고 진짜인지 고민하면서 출병을 고민했다는 후일담이 있다.[8] 이때 살려서 북경으로 보내자는 의견도 많았으나 영력제에게 비단끈으로 자살하라고 밀어붙였다. 밀어붙인 이유는 영력제가 살아서 북경으로 압송될 경우 남은 세력들이 그를 되찾기 위해 공격할 수 있다는 걱정과 명분상이라도 명의 마지막 황제를 만주족들에게 보낸 후 받을 악명에 자결시킨 것이란 추측이 있다.[9] 강희제 평전에 나온 내용을 중심으로 써 오삼계에게 불리한 내용이 많다.[10] 1경(頃)은 100무(畝)에 해당하는 토지로 현재의 개념으로 환산하면 약 2만 여평의 토지임.[11] 운남에서 먼 서변과 교역한 것은 산해관에서 총병으로 제수하던 대부터 쌓아온 요동과 오래된 관계가 도움이 됐다.[12] 청에서 왕은 일종의 작위로, 토지를 분봉 받거나 정사에 관여할 권리는 없고 단지 황제의 명을 받아 군대를 거느리고 출병할 때에 잠정적 군사 지휘권을 주는 것에 불가했다. 하지만 순치 16년(1659)에 운귀총관(雲貴總管)에 임명되면서 지역 의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13] 이용통보(利用通寶)[14] 물론 청 왕조 입장에서야 당연히 번을 철폐하고 싶어했을 테지만 워낙 삼번이 강력하다보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마침 상가희가 번왕을 그만두겠다고 하자 얼싸좋다 싶어서 철번을 밀어붙인 것이다. 즉, 일부러 조장했다기보다는(물론 그런 점도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타이밍이 딱 맞아떨어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15] 청태종의 사위였다. 청태종의 14녀인 건령공주와 결혼.[16] 적장자인 오세번은 북경 탈출에 성공하여 운남으로 도피할 수 있었다.[17] 청사고 열전, 오삼계전 吳應熊及其子吳世霖處絞,其餘幼子俱免死入官[18] 자살한 후 시신이 부관참시되었다.[19] 민족주의자 입장에서 그래도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면 오랑캐 정권인 청나라보다는 그나마 같은 한족 정권인 이자성이 낫지 않냐는 비판을 하기도 하는데... 문제는 명을 직접 멸망시킨 게 청이 아니라 농민반란군 순나라고, 청은 한동안 명나라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행세했다.[20] 물론 명-청 교체기 당시에도 농경민인 한족과 수렵채집민인 만주족 사이에는 문화나 생활양식의 차이 및 역사적 경로 등으로 인한 차이가 명백히 있었고, 이 때문에 오삼계 역시 처음에는 명나라를 직접 멸망시킨 이자성의 순나라에 귀순하려 했었다. 즉 '민족국가는 근대 이후 발명된 개념'이라고 말할 때 흔히 예시로 주어지는 전근대 유럽 국가들처럼 민족 개념이 무의미한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명-청 교체와 오삼계의 행보를 현대의 민족국가 개념에 끼워맞춰 '왕조 교체나 개인의 원한은 작은 일이고, 작은 일 때문에 이민족에게 나라를 팔았으니 매국노이다!' 라고 말할 수도 없다. 무엇보다도 전근대 왕조국가의 충성은 민족국가와 같은 이념적 정치체를 대상으로 한 개념이 아니라 군주 개인이나 왕조와 같은 특정한 실체를 대상으로 한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민족국가 자체를 가장 중요한 충성(애국)의 대상으로 제시하는 현대의 민족주의/국가주의 체제에서는 그 민족 국가 내에서의 정권 이동은 상대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 단순한 정치행위의 일부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이자성이 '주씨 정권이 정치를 너무 못하니 내가 뒤집어엎어야겠다!' 고 외치며 봉기한다거나, 오삼계가 방어에 성공한 뒤 '나라를 구한 것이 나이니 내가 정권을 잡아야 한다!'고 외칠 경우, 그것들이 최소한 이민족(만주족)에게 국체가 넘어가는 것보다는 낫게 여겨져 반역이 아닌 정변, 또는 정권교체 정도로 간주되어야 민족국가가 사회적 가치체계에서 가장 핵심적인 정치적 실체로 자리잡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인데, 당대의 가치관으로는 '주씨의 나라'인 명나라에서 이씨나 오씨가 정권을 잡겠다고 나서는 것은 '매국'과 별 다를 것도 없는 '반역'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전근대 국가에 대해 근대 민족국가와 같은 '애국'을 요구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21] 오삼계의 정예부대가 오면 베이징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한 숭정제는 이를 듣지 않았으며 오삼계가 빨리 북경으로 오면 청이 눈치챌까봐 이자성의 진군 속도에 맞춰 북경에 오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북경으로 이어지는 길목을 막던 명의 장수들이 쉽게 항복하는 바람에 이자성이 예상보다 빨리 도착한 것이다.(출저:한 권 동양사)[22] 조선의 사대부 및 일본 에도 시대 중후기의 사무라이가 여기에 해당한다.[23] 위의 각주에 나온 에도 시대 중후기 사무라이와 달리 오히려 현대의 직업적 계약관계에 가까운 활동을 한 이들이었다. 흔히 알려진 부시도, 사무라이 정신은 에도 시대 중후기에 생겨난 것이다.[24] 사실 이는 누르하치, 홍타이지와 함께 초원을 누리던 숙련도 높은 장수들이 죽거나 늙어서 인재가 많이 부족했던 탓도 있었다. 강희제가 인재를(특히 한족 인재들) 발굴하고 역습에 나서자 곧바로 삼번은 데꿀멍하게 되었다. 소설 녹정기에도 이런 모습이 나오는데 장용, 손사극, 조양동, 왕진보 등이(실존인물들이다) 위소보가 발굴해 강희제에게 바친 한족 인재들이다.[25] 천지회를 치는 것을 도우라는 강희제의 명을 거역했다가 신룡도에 감금되었다. 그래도 강희제는 옛 정을 잊지는 않아서 신룡도에 가둬두기만 했고 위소보 역시 자기 옛 동료들인 천지회를 치는 건 양심에 어긋났고 그렇다고 천지회에 가입해서 청에 반역할 생각도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를 핑계로 섬에서 아내들과 신나게 떡만 치고 자식도 낳고 잘 살았다.[26] 원작에서는 풍석범은 위소보의 사부 진근남을 배신해 죽이는 인물이고 원래 대만 출신이라 오삼계 및 삼번과는 별 상관이 없다. 작중 오삼계는 오응웅을 사로잡은 이후로는 위소보가 신룡교를 멸망시킨 후 그 본거지인 신룡도에서 짱박혀 있다보니[25] 후일담만 나온다. 후일담에서는 반란을 일으켜 크게 난리가 나지만 위소보의 의형제들인 장용, 왕진보, 손사극, 조양동 등이 군을 지휘하여 삼번의 난에서 큰 공을 세우고 서서히 진압되어 가면서 마지막으로 주나라 황제에 등극하는 쑈를 벌이지만 점점 불리해지는 형세 때문에 홧병으로 죽고 뒤를 오세번이 잇지만 결국 토벌당하게 된다. 현실에서는 상황은 나름 유리했지만 병으로 죽은 것에 비해 차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