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호(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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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운초 정영호.png


운초(芸焦)
본관
진주 정씨
출생
1924년 8월 19일
평안남도 평양시 기림리

사망
1994년 3월 17일
서울특별시 강동구 진황도로61길 53, 중앙보훈병원
학력
남경 국립중앙대학 의학원 생물계(2년 수료)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생물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식물학과 교수
군경력
한국광복군 제 3징모분처 환남분실 한교전지공작대
중화민국 제 3전구 제 1정진유격종대사령부 대일책반
(中華民國 第三戰區 第一珽進遊擊從隊 對日策班)공작대원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136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한국출판문학상
한국과학기술도서상
국민훈장 모란장
국민훈장 동백장
저서
한국동식물도감 제9권 담수조류
자연보호총람
국제식물명명규약정해
한국식물분류학사개론
식물대백과 등 40여권

1. 개요
2. 생애
3. 독립운동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아나키스트, 자연보호협회장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한 공적을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편집]


평안남도(平安南道) 평양(平壤) 기림리(基林里)에서 정봉주(鄭奉周)와 길정운(吉正運)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7년 평안북도(平安北道) 선천군(宣川郡) 심천면(深川面) 마성동(磨星洞)으로 이주했고 1931년 4월 5일 선천공립보통학교를 입학하여 1937년 3월 30일 신의주 제 1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3. 독립운동[편집]


독립군 자금을 제공하던 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1941년 독립운동가 유기석 접선 후, 1942년 8월, 중화민국 난징국립중앙대학교(南京國立中央大學校) 부속고급중학교(附屬高級中学校)를 졸업하고 동년 9월, 난징국립중앙대학교(南京國立中央大學校) 의학원(醫學院) 생물계(生物係)에 입학하여 지하공작 활동을 전개한다.

난징국립중앙대학에서 송지영(宋志英)·이일범(李一凡)·박철원(朴哲遠)·이정선(李正善)[1]·신영묵(申榮默)·박익득(朴益得) 등과 접선이 되었고, 난징중앙대학 한인유학생들과 한족동맹(韓族同盟) 결성, 중국인 학생 쑤징허(蘇景和) [2] 적극적인 협조로 다음과 같은 활동을 하게 된다.

① 애국 청년 규합 공작

② 일본군 동태 탐사

③ 초모 인원 후송 공작


파일:김병호 사진.jpg

1943년 6월, 충칭(重慶) 임시정부에서 밀파된 한국독립당 소속김병호(金柄豪, 金仲民)가 송지영의 거처로 찾아와 한국독립당 상하이ㆍ난징 지구 공작 임무를 맡아 줄 것을 제의했고 이에 송지영은 쾌히 승낙한다. 당시 김병호는 국내에 갔다가 돌아온 후 난징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면서 베이징으로 떠났다.

김병호(金柄豪)가 상하이(上海)의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므로써 송지영도 임시정부의 비밀 공작원이라는 사실이 탄로나고 말았다. 송지영도 상하이에서 체포되었다.[3] 그리하여 당시 난징(南京)에 있던 일본 헌병대와 영사관 경찰에서는 이같은 사태를 중대시하고 난징중앙대학에 재학중이던 모든 한국인 학생의 숙소를 수색하고 이들의 신변을 압축하였다.[4]

송지영 사건 이후, 난징중앙대학교 내 모든 한국 학생은 송지영(宋志英)의 뒤를 이어 구속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 한국 유학생들은 일제의 쇠사슬보다 죽음을 무릅쓴 탈출과 항일투쟁에의 길을 선택하였다.[5]

1944년 3월, 정봉주(鄭奉周)[6], 정영(鄭瑛)[7], 정영호, 왕하이칭(王海靑), 피안창주(片昌柱), 정희섭, 안병성, 유익배, 아동 이근[8]과 같이 가족동반으로 무기를 휴대하고 화중일대에서 지하공작 중에 매형인 이일범(李一凡)[9]의 피체 사실을 알게 된다.

1944년 4월 초, 유기석 상교의 안내로 조일문, 이일범과 함께 일본군점령지구를 대거 탈출하여 중화민국 제 3전구[10] 광복군 징모 제 3분처와 합류하게 된다. [11]

이후, 유기석의 주임으로 한 한국광복군 제 3징모분처 환남분실 한교전지공작대원 겸 중화민국 제 3전구 제 1정진유격종대사령부 대일책반(中華民國 第三戰區 第一珽進遊擊從隊 對日策班) 공작대원으로 초모공작과 교량폭파등 일본군 병참루트 차단, 미 제 5공군에 타전하여 폭격하는 등 활동을 했다고 전한다.

정영호 : 안후이성(安徽省) 마오린(茂林)에 본거를 둔 광복군 제3 징모처의 한교전지공작대원(韓僑戰地工作隊員)으로 활동했습니다. 또한, 중화민국 제 3전구 제1유격종대사령부 대일책반 공작대원(中華民國 第三戰區 第一珽進遊擊從隊 對日策班)으로도 활동했지요. 3년 여 동안 태평천국의 무대였던 저장(浙江省), 안후이성(安徽省)의 그 넓은 벌판을 누비고 다녔어요.

A : 구제척으로는 어떤 공작을 했습니까?

정영호 : 우리의 공작지구는 혼전지대였어요. 일본군과 장제스(蔣介石)의 중앙군(中央軍)[12]

이 있으며 마오쩌둥(毛澤東)의 씬쓰준(新四軍)이 있었지요. 광복군도 중앙군과 신쓰준[13] 두 갈래로 속해있었죠. 우리는 중앙군 산하의 50명 한국인으로 구성된 부대였습니다. 일본군의 괴뢰군[14]도 있고 민병대격인 대도회(大刀會)도 있었습니다. 여기에다 미 제 5공군(5th Air Force)산하 공수단이 절간 같은 걸 점령하여 활동하고 있었죠. 우리 부대는 일본군의 동향을 파악하여 미군부대에 정보를 주면 미 제 5공군이 타전하여 폭격하게 하는 임무가 많았어요. 병참루트를 끊으라는 지령을 받고 교량폭파공작도 했죠. 중국인을 사서 폭약을 주고 우리는 먼 발치서 보고 있다 폭파되는 것을 보고 사라지지요. 또한 일본군에 있는 한국인을 중국 사람을 시켜 빼내거나 탈출해 숨어있는 사람을 구출하여 광복군 부대에 보내는 일도 했어요. 저도 지금 천안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분을 비롯하여 6~7명을 구했어요.[15]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과 함께 1946년 3월 미군정에서 제공한 L.S.T.상륙정을 타고 부산항에 귀국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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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정순(呂正淳)[2] 쑤젠궈(蘇建國)[3] 김용의 회고에 따르면 송지영은 최상교의 밀고로 일본영사관 형사에게 검거되었다. 김용, 나의 길을 찾아, 도서출판 이화, 2012, p.90 [4] 이때 체포된 인원은 김병호, 송지영, 김덕원, 이일범, 조일문, 이정선이다.[5]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pp.853~857[6] 정영호의 아버지[7] 정영호의 누나[8] 이일범정영사이에서 낳은 아들[9] 정영호의 매형[10] 중앙군[11] 고정훈, 軍, 동방서원, 1967[12] 수도 난징과 상하이가 근처에 있는 3전구를 중앙군이라고 불림[13] 연안파 조선의용군을 말함. 제 3징모분처가 중국군 제 3전구내에서 활동하는데 공산화된 조선의용군이 중국 신사군(新四軍)과 관계를 가져 말썽을 일으켰다.[14] 왕징웨이 정부의 화평건국군(和平建國軍)[15] 정영호, 아름다운 마음, 운초서사, 1995, p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