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발라 참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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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2.1. 무슬림 빈 아킬의 죽음
2.2. 쿠파를 향해
2.3. 협상의 결렬
3. 처절한 전투
3.1. 일방적인 학살
4. 결과
4.1. 영향
4.1.1. 문학적 승화
5. 평가

아랍어 مَعْرَكَة كَرْبَلَاء
영어 Battle of Karbala

1. 개요[편집]


'카르발라 전투', 혹은 '카르발라 참극'은 후세인 이븐 알리가 이라크의 카르발라에서 살해된 대사건이다. 이슬람의 선지자 무함마드의 외손자이자 제4대 정통 칼리파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차남이었던 후세인은 680년 10월, 우마이야 칼리파조의 개창자이자 아버지 알리의 최대 숙적이었던 무아위야 1세가 붕어한 이후 그의 아들 야지드 1세의 세습을 반대했다. 부친 알리의 수도였던 이라크 쿠파(나자프) 주민들의 초청을 받은 그는 거병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성지 메카에서 쿠파로 머나먼 길을 향했다. 하지만 후세인이 출발할 무렵 쿠파의 신임 총독 우바이둘라 빈 지야드는 반체제 인사들을 모두 숙청하고 여론을 잠재운 상태였다. 이를 알지 못한 채로 쿠파에서 이틀 거리인 카르발라에 당도한 후세인은 우바이둘라가 파견한 우마르 빈 사이드의 병력과 마주했고, 50배의 병력 차이에 의한 일방적인 전투 끝에 후세인과 그 지지자들은 전멸했다.

2. 배경[편집]


1차 피트나 당시 열렬히 제4대 칼리파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를 지지했던 쿠파 주민들은 알리의 암살 이후 그의 장남인 하산 이븐 알리가 무아위야 1세에게 칼리파직을 양위한 것에 아쉬워했고, 우마이야 칼리파조의 차별에 시달렸다. 670년 하산이 독살당한 이후 쿠파 주민들은 그의 동생인 후세인 이븐 알리에게 대우마이야 반란 의사를 밝혔으나 거절되었다. 680년 무아위야 1세의 사후 그들은 재차 후세인에게 거병 의사를 밝혔다. 이맘으로 추대한다는 수천 통의 편지를 받고 고무된 후세인은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사촌인 무슬림 빈 아킬을 파견했다. 무력으로 유명했던 무슬림 빈 아킬에게 후세인은 그의 파견이 우마이야 칼리파 야지드와의 전쟁을 뜻할 것이라 곡해될 수 있다며 평화적인 의사를 상징하도록 두 아들인 무함마드와 이브라힘을 데려가게 했다. 그외에 카이스 빈 마샤르, 이므라 빈 압둘라 앗 살룰리, 압둘 라흐만 빈 압둘 아즈드 및 쿠파 출신 전령이 대동했다. 6월 중순에 메카를 떠난 일행은 우선 메디나로 향하여 두 길잡이를 고용했다. 허약했던 길잡이들은 험난한 사막 횡단 중 갈증으로 죽었지만, 올바른 방향을 제시했다.

2.1. 무슬림 빈 아킬의 죽음[편집]


따라서 680년 7월 무사히 이라크 쿠파에 당도한 무슬림 빈 아킬은 우선 여론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무크타르 빈 아부 우바이드 앗 타카피의 집을 방문했다. 그러자 (쉬아 측 묘사에 따르면) 20,000여 명의 군중이 몰려와 이맘 후세인에 대해 목숨을 걸며 충성 서약, 곧 바이아를 했다. 이에 무슬림은 후세인에게 합류를 권하는 서신을 보냈다. 한편 무슬림의 행보를 보고받고도 쿠파 총독 앗 누만 빈 바쉬르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5촌 조카에게 해를 가하는 것을 주저하여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에 친우마이야 주민들이 고발한 결과 우마이야 칼리파 야지드는 그를 해임하고, 바스라 총독이자 잔인한 우바이둘라 빈 지야드에게 쿠파 총독도 맡기며 명령했다. 즉

''쿠파로 가서,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무슬림 빈 아킬을 체포한 후 감금 혹은 추방 혹은 처형하라.''

였다. 비밀리에 쿠파에 당도한 우바이둘라는 이튿날 아침 쿠파 주민들을 대사원에 모아 대 우마이야 반란 가능성을 경고한 후, 복속한다면 관대한 보상을 내리겠지만 모의자를 숨겨줄 경우 그 문에 못박을 것이라고 위협했다.[1]

후세인 지지자들의 회동 장소를 알아내기 위해 우바이둘라는 부하 마킬에게 3,000 디르함을 주며 그에게 스파이 임무를 맡겼다. 스스로 무슬림 빈 아킬에게 기부를 하고 싶은 시리아인 노예라 밝힌 마킬은 대사원에서 그와 만났고, 돈 전부를 건내며 (거짓으로) 충성을 서약했다. 이로써 신뢰를 얻은 마킬은 며칠간 회동에 참석한 후, 어느날 저녁 그간 보고 들은 바를 주인인 우바이둘라에게 고했다. 그를 통해 무슬림 빈 아킬이 하니 빈 우르와의 집에 있다는 것을 파악한 우바이둘라는 하니를 불러 추궁했고, 그가 모략이라며 반박하자 부하 마킬을 불러 잠재웠다. 체포된 하니는 철봉으로 매질당한 후 감금되었다. 소식을 접한 무슬림은 후세인에게 경고하기 위해 도시를 빠져나가려 시도했다. 하지만 8월에 우바이둘라가 도착한 직후, 쿠파는 총독의 직인이 있어야만 출입이 가능하도록 통제되었기에 이틀 간의 탈출 시도는 실패했고, 후세인에게는 긍정적인 서신 외에는 전달되지 않았다.

어느날 저녁, 허기지고 배고픈 상태의 무슬림은 쿠파 외곽의 한 집에 이르러 갈증을 해소할 물을 청했다. 집의 여주인 투와는 물을 내어준 후, 그의 정체를 깨달은 후 안으로 들여 음식을 주고 은신처로 방까지 내어주었다. 한편 밤 늦게 귀가한 투와의 아들은 손님이 다름아닌 수배 중인 인물인 것을 깨달았다. 우바이둘라 총독이 약속한 보상을 떠올린 그는 야밤에 어머니 투와 몰래 집을 빠져나와 우바이둘라의 부하에게 소식을 알렸다. 다음날 아침 500여 명의 병사들이 투와의 집을 에워싸고, 무슬림에게 투항을 요구했다. 칼을 쥐고 나타난 무슬림은 (쉬아 측 기록에 의하면) 150명의 적병을 죽이고 3차례나 적을 물러나게 했으며, 우바이둘라는 두 차례나 지원군을 보내야 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그러자 몇몇 병사들이 옥상으로 올라가 돌과 횃불을 던졌고, 다른 이들은 구덩이를 파고 위에 풀을 덮었다. 무슬림은 안전 보장 약속 역시 거부하고 계속 싸웠는데, 결국 부상이 심해지던 와중에 구덩이에 빠져버렸다.

포로가 된 무슬림은 사슬에 묶여 우바이둘라 앞에 대령되었다. (쉬아측 기록에 의하면) 무슬림은 중상을 입어 이빨이 부서지고 온 몸에서 피가 흐르는 와중에도 안뜰에 들어설 때 마치 사자와 같은 기운을 뽐냈다고 한다. 포졸이

"아미르'에게 예를 갖추라."

고 하자 그는 자신의 아미르는 오직 후세인 이븐 알리 뿐이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우바이둘라가 마지막 소원을 묻자 무슬림은 자신의 칼과 갑옷을 팔아 빚을 갚아줄 것, 제대로 장례를 치러줄 것, 후세인에게 쿠파에 오지 말라는 서신을 보내줄 것을 요구했으나 첫 번째만 수용되었다. 그후 무슬림은 하니와 함께 총독궁 옥상에서 처형되었고, 군중이 보는 앞에 목과 몸은 차례대로 바닥에 던져졌다. (680년 9월 10일) 우바이둘라는 시체를 저잣거리에 끌리도록 행진시킨 후 거꾸로 하여 십자가형에 처했다. 둘의 수급은 다마스쿠스의 칼리파 야지드에게 보내져 길거리에 효수되었으며, 무슬림의 두 어린 아들 역시 쿠파에서 살해되었다.

2.2. 쿠파를 향해[편집]


"민심은 그대와 함께 있지만, 그들의 칼은 우마이야 가문과 함께 있다."

ㅡ 쿠파행 도중에 만난 시인 파라즈다크(~728년)가 쿠파의 동향을 묻는 후세인에게 대답한 말


쿠파 외에 후세인은 바스라에도 측근을 파견해 지지 세력을 모으고자 했다. 다만 그곳에서는 별 호응을 얻지 못했고, 해당 측근은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한편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던 후세인은 무슬림 빈 아킬의 처형과 핫즈(순례)의 시작 하루 전인 9월 9일 성지 메카를 떠났다. 이라크행은 적절치 않고, 만약 떠난다면 처자식만은 두고 가라는 압둘라 빈 아바스와 압둘라 이븐 앗 주바이르[2]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후세인은 결국 가족 전부와 가신들을 대동했다. 전승에 따르면 메카에서 거병하자는 사하바들의 제안에 후세인은 성지를 피로 더럽힐 수 없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얼마 후 후세인의 사촌 압둘라 빈 자파르는 메카 총독 아므르 빈 사이드를 설득, 그의 동생 및 자신을 후세인에게 보내어 메카 귀환을 청하도록 했다. 그러나 후세인은 꿈에 예언자 무함마드가 나타나 결과에 상관없이 전진을 명령했다며 귀환을 거절했다.[3] 여정이 계속되면서 일단의 지지자들이 행렬에 합세하자 후세인은 자신감을 얻었다.

메카 북쪽 외곽의 타님에서 그는 예멘 총독이 다마스쿠스로 진상한 염료와 천을 운반하던 카라반 행렬을 사로잡았다. 메디나 방면의 탈라비야에서 후세인은 한 상단에게서 무슬림 빈 아킬의 잔혹한 처형과 쿠파 주민들의 변심을 전달받고는 메카 귀환을 고려했다. 그러나 복수를 원했던 무슬림의 형제들에게 설득되어 여정은 계속되었다. 현재의 사우디 북부에 해당하는 주발라에서 후세인은 자신의 도착을 알리기 위해 사전에 파견했던 전령 카이스 빈 무사히르 앗 사이다위가 붙잡혀 처형된 것을 알게 되었다.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그는 추종자들에게 떠날 것을 조언했고, 이에 여정 도중 합세한 이들 대부분이 돌아갔으나 메카에서 함께 출발한 이들은 전부 남았다고 한다. 한편 우바이둘라는 쿠파로 향하는 길목마다 군대를 배치해 두었고, 후세인 일행은 쿠파 남쪽의 카디시야에서 후르 빈 야지드 앗 타미미 휘하의 1,000명의 병력과 조우했다. 후르는 후세인에게 초청 서신을 보낸 인사들 중 한 명이었다.

"너희의 편지들이 당도하고 사절들이 와서 '오십시오, 우리에게는 이맘이 없습니다'라 말하기 전까지 나는 오지 않았다... (중략) 따라서 너희가 서약시의 맹세를 지킨다면 나는 너희의 도시로 갈 것이다. 다만 그러지 않고 내가 오는 것이 싫다면, 나는 너희를 두고 돌아갈 것이다."

ㅡ후세인, 쿠파인들로 구성된 군대에게 한 연설 중에서

후세인이 편지들을 내보이자 후르는 이를 부인하며 자신과 함께 우바이둘라에게 가자고 했다. (당연히) 후세인이 거부하자 후르는 쿠파에 입성하거나 메디나로 돌아가는 것은 불허하지만,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은 막지 않겠다고 답했다. 또한 4명의 쿠파인들이 그 행렬에 동참하는 것 역시 제지하지 않았다. 약간 불어난 후세인 행렬은 그대로 카디시야로 향했고, 후르의 병력은 거리를 두고 뒤따랐다. 나이나와에서 후르는 후세인 일행을 방어 시설이나 수자원이 없는 외진 곳에서 멈추게 하라는 우바이둘라의 지시를 받았다. 상황을 눈치 챈 가신이 후르를 공격하고 요새화된 알 아크르 마을로 이동할 것을 제안했으나 후세인은 먼저 적대 행위를 시작하기 싫다며 거절했다. 쿠파를 우회하여 계속 북상한 후세인 일행은 10월 2일(무하람 2일), 쿠파에서 북쪽으로 60km 떨어진 황무지인 카르발라에 당도하여 진영을 세웠다.

2.3. 협상의 결렬[편집]


다음날 라이 총독 우마르 빈 사드가 이끄는 4,000명의 쿠파 병력이 카르발라에 모습을 드러냈다. 우바이둘라는 그에게 후세인은 항복하거나 무력으로 굴복시켜야 하며, 그 일행이 유프라테스 강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따라서 강변으로 향하는 길목에 500명의 기병대가 배치되었고, 후세인 일행은 3일간 갈증에 시달렸다. 그러다 후세인의 이복동생 압바스가 50인의 결사대와 돌격해 차단을 뚫고, 겨우 20자루의 물을 떠올 수 있었다. 한편 애초에 우바이둘라의 압박으로 출전한 우마르는 협상을 제안했고, 후세인과 밤에 회동했다. 그 자리에서 후세인은 메디나 귀환, 야지드 알현, 변방 복무의 세 제안을 했다고 한다. 우마르의 보고를 받은 우바이둘라는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했으나, 쿠파 귀족인 샤미르 빈 자우샨이 그의 영지에 들어온 후세인을 그냥 보내주는 것은 나약함을 보이는 것이라 하자 변심했다.

따라서 우바이둘라는 샤미르를 파견해 후세인에 재차 복속을 요구하고, 거부한다면 공격해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라는 명령을 전하게 했다.[4] 또한 만일 우마르가 공격을 하지 않으려 하면 샤미르가 지휘권을 받아 이행하도록 했다. 이를 전달받은 우마르는 평화적 합의에 도달하려 하는 자신의 시도를 망친다며 샤미르를 저주했지만, 총독의 명령은 따르기로 했다. 10월 9일 저녁, 쿠파 군대가 후세인 진영으로 전진하자 후세인은 압바스를 보내어 더 생각하고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다음날 아침까지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우마르가 승낙하자 후세인은 적들은 자신만을 원한다며, 일행에게 밤을 틈타 가족과 함께 떠나도 좋다고 했으나 극히 일부만이 그렇게 했다. 그후 방어 준비에 나선 후세인은 천막들을 한데 모아 묶었고, 그 뒤에는 참호를 판 후 전투가 벌어질 경우, 불을 붙일 나무를 넣어두었다. 준비가 끝나자 후세인과 지지자들은 기도를 올리며 밤을 지새웠다.

10월 10일, 새벽 기도 후 양측은 전투에 나섰다. 후세인은 주하이르 빈 카인에게 우익, 하빕 빈 무자히르에게 좌익을 맡겼고 압바스를 기수로 지목했다. 후세인 측 병력은 일반적으로 32인의 기병과 40인의 보병으로 구성되었다고 전해지나, 기병 45명과 100명의 보병이 있었다고도 한다. 어느 겨우든 우마르 휘하의 4,000명의 병력과 대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쉬아측 자료에 의하면 협상 도중 우바이둘라의 지원군이 더해져 쿠파 병력은 30,000명까지 불어났다고도 한다. 참호의 목재에 불을 붙인 후세인은 적들을 향해 예언자 무함마드의 손자로서 자신의 지위를 역설하고, 자신을 초대한 후 배반하는 그들을 비판하는 연설을 했다. 이에 설득된 후르 빈 야지드가 후세인 측으로 전향했다. 연설과 함께 후세인은 재차 우마르에게 자신이 떠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으나 먼저 우마이야 칼리파 야지드의 권위에 복종하라는 답장이 돌아오자 역시 거부했다. 한편 주하이르 빈 카인 역시 적군을 설득하려 했으나 허사였다.

3. 처절한 전투[편집]


파일:이슬람 카르발라.jpg

쿠파 군대가 화살을 쏘기 시작하면서 전투가 개시되었고, 곧 1대1 결투가 벌어져 후세인측 병사들이 다수 살상되었다. 그후 쿠파군의 우익을 이끈 아므르 빈 알 핫자즈가 후세인 진영을 공격했으나 격퇴되었고, 양측은 화살 세례를 주고 받았다. 뒤어어 쿠파군의 좌익을 이끈 샤미르가 공격을 가했으나 역시 격퇴되었다. 그러자 우마르는 기병대를 진격시켰고, 이에 후세인측 기병대가 결사 항전하자 중무장 기병과 500명의 궁병을 가세시켰다. 이로써 후세인 기병대의 말들이 화살에 맞아 쓰러지자 기병들은 말에서 내려 도보로 계속 싸웠다. 한편 후세인이 후방에 참호를 파고 불을 질러 정면 대결만이 가능했는데, 이로써 승부가 쉽게 갈리지 않자 우마르는 후세인측 막사들에 불화살을 쏘아 방화하도록 했다. 다만 샤미르의 반발에도 후세인의 가족들이 머무는 막사 하나만큼은 표적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불화살 작전은 오히려 불길이 되돌아오며 쿠파군의 진격을 한동안 저지시키는 역효과를 낳았다.

3.1. 일방적인 학살[편집]


그러나 정오 기도 후, 쿠파군은 절대적인 수적 우위를 앞세우며 맹공격을 퍼부어 후세인 일행을 포위하는데 성공했다. 끊임없이 증원되는 쿠파군과 달리 지속적인 출혈을 메우지 못한 후세인 측은 소수만이 남았고, 기존에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던 후세인 직계 가족들까지 나섰다. 먼저 후세인의 장남 알리 아크바르가 전사했고, 아바스를 비롯한 후세인의 이복 형제들이 그 뒤를 따랐다. 또한 그 사촌들과 하산 이븐 알리의 아들들 역시 다수 전사했고, 후세인의 무릎 위에 앉아있었던 그의 어린 아들도 화살에 맞아 죽었다. 한편 후세인은 물을 마시러 강가를 다녀오던 중 입에 화살을 맞았는데, 흘러나오는 피를 양손에 모은 후 하늘에 뿌리며 신에게 자신의 고난을 토로했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외손자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주저하던 병사들은 상관의 독촉에 그를 에워쌌고, 그중 말리크 빈 누사이르가 후세인의 머리를 칼로 가격했다. 중상을 입은 후세인은 머리에 쓰고 있던 망토를 벗으며 그를 저주했다.

후세인이 머리에 두건을 쓴 후, 터번을 묶어 지혈을 시도하는 동안 말리크 빈 누사이르는 피로 얼룩진 망토를 가지고 돌아갔다. 이를 지켜보던 샤미르는 일단의 보병들과 함께 나아갔고, 누군가 칼로 후세인을 내려치려 하자 진영에서 탈출한 한 소년이 몸을 바쳐 보호하려다 팔이 잘려나가기도 했다. 그 무렵 후세인 진영을 접수한 우마르는 후세인의 누이 제이납과 마주쳤고, 후세인의 죽음을 그저 지켜만 볼거냐는 그녀의 질문에 그는 눈물을 흘렸으나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한편 병사들 역시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며 감히 후세인을 죽이려 하지 않았고, 따라서 후세인은 중상을 입은 몸으로도 여러 병사들을 죽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병사들이 머뭇거리자 분노한 샤미르는

''부끄러운줄 알라! 왜 그를 기다리냐? 죽여라!''

라고 호통쳤고, 비로소 병사들은 후세인의 팔과 어깨를 어깨를 찔렀다. 이에 후세인이 얼굴을 땅에 박은 채로 쓰러지자, 시난 빈 아나스라는 병사가 그의 숨을 끊고 목을 베었다.

4. 결과[편집]


파일:아르바인 이슬람.jpg
아르바인 행사시의 카르발라 이맘 후세인 성지

후세인 측에서는 70~72명이 전사했는데, 그중 20여명은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부친인 아부 탈립의 자손들이었다. 이들은 후세인 이븐 알리와 그의 두 아들 및 여섯 형제, 하산 이븐 알리의 세 아들, 자파르 빈 아비 탈립의 세 아들, 아킬 빈 아비 탈립의 세 손자들로 구성되었다. 카르발라 전투 이후 후세인의 옷가지와 칼, 신발 등의 소지품과 여인들의 보석 및 망토들이 압수되었다. 샤미르는 병약하여 참전하지 못하고 남아있었던 후세인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 알리 자인 알 아비딘 역시 죽이려 했으나 우마르의 만류로 제지되었다. 다만 60여 군데의 상처로 유혈이 낭자한 후세인의 육신은 우바이둘라 총독의 지시대로 말발굽에 짖이겨졌고, 다른 동료들의 주검 역시 목이 베어졌다. 한편 쿠파 군대에서는 88명이 전사하여 우마르의 철수 이전에 매장되었다. 우마이야 군대가 떠난 후, 인근 가디리야 마을에 거주하던 아사드 부족이 전장에 남겨진 후세인 일행의 목 없는 시신을 수습해 매장해주었다. 이 일이 카르발라 성지의 근원이 되었다.

한편 후세인의 가족들과 전사자들의 수급은 쿠파로 보내졌다. 우바이둘라는 후세인의 입에 쇠막대를 끼우고는 (샤미르와 마찬가지로) 그의 유일한 자손인 알리 자인 알 아비딘을 죽이려 했는데, 이번에는 제이납의 애원으로 살려두었다. 이후 후세인 일가와 수급들은 제국의 수도인 다마스쿠스로 보내졌는데, 한때 후세인과 함께 군사 원정에 동행하기도 했었던 칼리파 야지드 1세는 그의 가족들에게 동정적인 편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야지드는 후세인 살해에 대해 우바이둘라를 욕하며, 자신이 그곳에 있었다면 목숨만은 보장했을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명령대로 해도 욕을 먹는다 한편 궁정의 한 관리가 포로로 잡힌 후세인 일가의 여성들 중 한 명과 결혼할 의사를 밝혔는데, 이로써 칼리파 야지드와 제이납 간에 설전이 일기도 했다. 결국 우마이야 왕족의 여성들 역시 감금지에서 함께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등 동정 여론이 확산되자, 야지드는 며칠 만에 후세인 일가의 여성들에게 약탈된 재산을 반환하고, 메디나로 가게 해주었다.

4.1. 영향[편집]


파일:카르발라 이슬람.jpg
19세기 이란 카자르 왕조 시대의 이스파한에서 제작된 후세인 순절도. 백마를 탄 중앙의 인물은 후세인이 아닌 그의 이복동생 아바스이다.

히즈라 후 불과 60여년 만에 벌어진 예언자 무함마드의 외손자 후세인 이븐 알리의 참혹한 죽음은 이슬람 공동체, 즉 움마에 충격으로 다가왔다. 우마이야 칼리파 야지드에 대한 여론은 악화되었고, 특히 복수에 이를 갈게 된 알리 지지자들은 쉬아로 세력화되었다. 카르발라 사건 이전에도 알리 당파 정도의 분파는 있었지만, 주류 이슬람과 차별화될만한 정체성이나 의식은 딱히 없었다. 그러나 후세인의 처참한 죽음 이후 이들은 각종 추모 의식을 전례화하고, 상속론 및 재림론을 구체화시켜 이맘 지도 체제를 확립했다. 역사가 하인츠 할름은 카르발라 참극을 쉬아를 만들어 낸 빅뱅이었다고 묘사했다. 쉬아 이슬람에서 후세인의 순교는 전제 군주에 의한 이슬람의 타락을 막고, 참된 신앙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는 계란으로 바위치기인 결과를 알았으면서도 영적으로 견뎌내었고, 순교자들의 성인 (사이드 앗 슈하다)의 지위에 올랐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그리스도관과 뭔가 비슷한 것은 덤

이러한 '고통과 순교'의 개념은 아슈라 행사 등에서 잘 드러나고, 여기에 복수심까지 겹쳐 쉬아 공동체는 향후 수세기간 순니 칼리파들에 대한 저항을 이어간 끝에 부와이 왕조파티마 왕조와 같은 성공적인 사례를 만들어냈다. 쉬아 마흐디 사상에 의하면 후세인과 72인의 순교자들은 훗날 그들을 살해한 자들과 함께 부활해 후자에 대해 징벌을 내릴 것이라고 한다. 또한 카르발라 참극은 독특한 순례 문화로 이어졌다. 후세인의 아들 알리 자얀 알 아비딘이 참배한 것을 시작으로 2차 피트나 당시 참회자(앗 타왑빈) 봉기를 주도한 술레이만 빈 수라드가 시리아로 진격하던 중 동료들과 함께 후세인의 무덤 곁에서 밤을 지새우며 애도하고 가슴을 때리던 것에서 아슈라-아르바인 의식이 정립되었다. 그후 제6대 이맘 자파르 앗 사디크와 부와이 왕조, 사파비 왕조, 카자르 왕조의 장려하에 해당 풍습은 쉬아 공동체 전체로 확산되었다. 또한 카르발라의 토양은 기적의 치유 효과가 있다고 알려졌다.

"무함마드여! 여기 (당신의 손자) 후세인이 팔다리가 잘리고 피에 젖은 채로 있습니다. 무함마드여! 당신의 딸들은 죄수들이고, 자손들은 살해되었으며, 동풍은 그들 위의 먼지를 쓸어냅니다."

ㅡ 제이납 빈트 알리, 오빠 후세인 이븐 알리의 주검 앞에서 오열하며[5]

쉬아 무슬림에 있어 후세인을 위해 애도하고 그의 고통을 기억하는 것은 내세에서의 구원의 원천으로 여겨진다. 쿠파 총독 우바이둘라에게 포로로 끌려가 목이 없는 후세인의 시신을 보고 통곡한 제이납의 선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조카인 알리 자인 알 아비딘 역시 여생을 부친에 대한 애도로 지세웠다고 한다. 쉬아 무슬림들에게 애도는 슬픔을 나누는 방식이며, 마잘리스와 같은 단체 애도식이 열리는 '후사이니야'라는 시설까지 있을 정도이다. 마잘리스에서는 카르발라의 이야기와 전문적인 낭송가들에 의한 비가(슬픈 노래)들이 울려 퍼진다. 아슈라가 있는 무하람 달에는 카르발라 전투를 기리는 공개 행렬이 많은데, 이는 10세기 경부터 시작되었다. 963년 부와이 왕조의 군주 무이즈 앗 다울라가 바그다드에서 행한 것이 선례라고 한다. 참석자들은 거리를 맨 발로 걸으며, 울부짓고, 가슴과 머리를 때리다가 마잘리스를 위해 시작점인 후사이니야로 돌아오는 여정을 거친다.

후세인의 죽음은 또한 2차 피트나의 서막이 되어 여러 반란들의 근원이 되었다. 앞서 언급한 참회자들의 봉기나 '후세인 죽음의 복수'를 천명했던 무크타르의 난을 비롯하여 향후 발생하는 쉬아파 반란의 상당수가 이에 기반했다. 중세와 근대를 넘어 1979년 이란 혁명 당시에도 카르발라 이념은 전제주의 및 착취에 대한 혁명으로 형상화되었고, 후세인의 죽음은 혁명적 투쟁의 본보기가 되었다. 따라서 이때에 이르면 애도보다는 후세인의 이상을 깨닫기 위한 정치적 활동주의가 이란 쉬아 사상의 대세로 자리매김했다. 비이슬람적인 왕정에 대한 투쟁은 이슬람의 타락을 막고자 했던 후세인의 투쟁과 일치된다는 것이다. 레자 샤가 야지드 1세로 대응된 것은 덤[6] 혁명 후에는 성직자들이 선거를 독려하며 이는 후세인의 정치 활동과 비견된다고 할 정도였다. 다만 이란의 정치성 강조와는 달리 카르발라와 쿠파를 품은 이라크에서는 여전히 애도의 물결이 매우 강한 편이다.

4.1.1. 문학적 승화[편집]


문학적으로도 카르발라의 참극은 이슬람권 각지의 수많은 작가들에게 소재로 활용되었다. 대표적으로 여러 작가들이 저술한 《무크탈 후세인》 시리즈와 19세기 벵골 작가인 미르 모샤라프 호세인의 《비샤드 신두》(《슬픔의 바다》)와 같은 서사시가 있다. 후세인의 고난은 이스마일과 비견되기도 하며, 일각에서는 10세기 수피인 만수르 알 할라즈의 순교와도 연결시키기도 한다. 또한 아슈라 당일이 천지 창조가 벌어진 날이고, 동시에 아브라함과 무하마드의 탄생일이자 예수가 승천한 날이라는 전설 역시 널리 퍼졌다. 후세인 역시 손가락으로 동료들의 갈증을 해결하고, 하늘에서 음식을 가져오며 수천명의 적을 죽이는 기적을 행한 존재로 승화되었다. 후세인이 죽자 그의 말이 눈물을 흘리며 많은 적군을 죽였다는 전승도 있다. 적토마 하늘 역시 핏빛으로 물들어 피가 비처럼 내렸고 진들과 야생 동물들이 울었으며, 잘린 후세인의 머리가 빛을 발하며 《쿠란》을 낭송하고, 많은 적병들이 결국 끔살당했다고 한다.

쉬아 계열의 12이맘파를 국교로 한 이란의 사파비 왕조 시대에 들어서는 제2대 샤한샤 타흐마스프 1세의 후원하에 카르발라 전투를 낭만적으로 묘사한 페르시아어 서사시인 《마르티야》 장르가 발전했다. 그 제목들에는 종종 '라우다'(정원)[7]가 들어갔기에 《라우다》로도 불리며, 마잘리스 애도식 당시 낭송되며 영적 분위기를 고취시켰다. 이는 16세기 페르시아어 문학의 중흥으로 이어졌고, 아제르바이잔 등지로 보급되었다. 특히 알바니아인 작가 달립 프라세리의 《콥쉬티 이 테 미르베트》는 알바니아어로 쓰여진 가장 오래된 서사시로써 의미가 있다. 인도 아대륙에서는 비자푸르, 골코다 등의 술탄 등이 우르두어 《마르티야》를 후원했고, 인도 전역으로 보급되었다. 조쉬 말리하바디는 후세인을 카를 마르크스와 비교하며 카르발라 전투가 단순히 종교적인 과거 사건이 아닌 계급 투쟁의 혁명적 모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신앙을 위해 몸을 바친 후세인은 수피즘에서 스승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잘랄루딘 루미의 경우, 그가 고통을 통해 신과 합일에 이르렀다고 묘사했다.

5. 평가[편집]


1차 피트나가 우스만 피살로 촉발되었다면, 2차 피트나는 후세인의 순교가 원인이었다

현대 역사가들은 야지드 1세의 간략한 묘사 등을 참고하여, 위에 나온 상세한 서술은 당대의 영웅이 전투도 없이 허망히 죽은 것에 만족하지 못했던 후대 이라크인들의 창작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실상은 한 시간도 걸리지 않은 일방적인 학살이었다는 것이다. 다만 후세인에게 동정적이었던 우마르 빈 사드가 그의 복속을 유도하여 목숨을 살리기 위해 일부로 조금씩 공격한 결과, 전투가 길어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후세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는 편이다. 일각에서는 무모한 반란을 시도했고, 그랬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무능한 지도자로 여긴다. 또한 주변의 만류에도 끝내 행군을 계속하다가, 때가 너무 늦은 후에야 회군을 제안하는 등 부친 알리의 우유부단함을 더 크게 물려받았다고 비판당하기도 한다. 애초에 카르발라 '전투' 역시 무아위야 1세의 사후 벌어진 무슬림 2세대들의 권력 투쟁일 뿐이라는 평가도 많다. 하지만 확실히 후세인은 매우 경건하고 종교적인 인물이었으며, 끝까지 자신이 믿는 바(야지드 1세는 정당한 칼리파가 아님)를 버리지 않고 죽었다는 점에서 높히 평가받기도 한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절개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기에 부족하기 그지 없다. 쉬아 이슬람에 온정적인 학자들은 그가 뒤늦게나마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더라도 부정한 정권에 대한 이슬람 공동체의 전반적인 봉기를 유발하기 위해 순교를 택했다고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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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바이둘라는 기밀을 누설하지 않기 위해 얼굴을 검은 천으로 가리고 밤에 쿠파에 당도했다고 한다. 이에 주민들은 이맘 후세인이 쿠파에 입성했다고 여겨 환영 노래를 부르며 그 주위에 모여들었다. 우바이둘라는 그 얼굴 하나 하나를 외우며 지켜보았고, 이윽고 행렬이 멈출 정도가 되자 수행원 중 무슬림 빈 아므르 바힐리가 그의 정체를 밝히자 군중은 혼비백산하여 도주했다. 그후 우바이둘라는 쿠파 총독궁에 들었다.[2] 후에 칼리파로 등극하는 그의 진의는 의심되긴 한다. 다만 떠나기 전 후세인에게 메카에 남는다면 야지드에 대한 반란을 돕겠다고 제안하긴 했으나 거절되었다[3] 그밖에 이복동생 무함마드 (이븐 알 하나피야)가 형 하산 이븐 알리를 배신한 쿠파인들을 다시 믿을 수 없다며 우마이야 칼리파조의 감시가 덜한 예멘으로 향할 것을 제안했으나 효과가 없었다.[4] 우바이둘라는 후세인을 반란자이자 선동자이며, 도적이고, 박해자이기에 죽은 후에는 더 해를 가하지 못할 것이라 말했다[5] 둘은 626년 연년생 남매이다[6] 실제로 레자 샤는(본인도 쉬아파였음에도) 무하람의 아슈라 행사가 미개하다고 여겨 반대했다[7]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 역시 같은 어근에서 유래한 단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