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피트나

덤프버전 :

파일:2차 피트나 이슬람.png
전쟁의 중반 무렵인 686년의 형세. 서쪽부터 아브드 알 말리크, 압둘라 이븐 앗 주바이르, 무크타르(녹색), 카와리지 순이다.

1. 개요
2. 배경
2.1. 칼리파 세습 논쟁
3. 전개
3.2. 두 성지의 반란
3.2.1. 메디나의 학살(683년)
3.2.2. 제1차 메카 공방전
3.3. 야지드 1세 사후, 우마이야 칼리파조의 정치적 혼란
3.3.1. 후임 칼리파 문제
3.3.2. 자비야 회의(684년)
3.3.3. 마르즈 라히트 전투
3.4. 마르완 1세 : 반격 개시
3.4.1. 이집트 수복(685년)
3.4.2. 알-라바다 전투
3.4.3. '마르완 왕조'
3.5. 이라크 전역 : 최초의 쉬아 운동
3.5.1. 참회자('앗 타와빈')들의 반란(685년)
3.5.2. 무크타르의 반란(685~687년)
3.5.2.1. 카지르 전투(686년)
3.5.2.2. 무크타르 vs 주바이르 왕조
3.5.2.3. 쿠파 공방전(687년)
3.6. 카와리지의 준동
3.6.1. 나즈다트 (685 ~ 693년)[1]
3.6.2. 아즈라키야(684 ~ 699년)[2]
3.7. 호라산 전역
3.8. 소강 상태
3.8.1. 대리전(~ 689년)
3.9. 제국의 역습
3.9.1. 이라크 평정(691년)
3.9.2. 제2차 메카 공방전(692년)
4. 전후
4.1. 수프리야 카와리지
4.2. 압둘라흐만 빈 무함마드의 반란(701년)
4.3. 오만 평정(8세기 초)
5. 결론


1. 개요[편집]


아랍어 الفتنة الثانية
영어 Second Fitna

제2차 무슬림 내전(680~692년)이라고도 한다.

제1차 피트나를 수습한 무아위야 1세가 붕어하자 재차 후계 문제가 대두되었고, 이는 야지드 1세의 세습에 대한 아랍 원로들의 반발로 이어졌다. 원로들 중 예언자 무함마드의 외손으로서 가장 적임자로 여겨지던 후세인 이븐 알리가 거병하기 위해 쿠파(나자프)로 향하던 중 카르발라에서 비참하게 살해되자 이슬람권 전역에서 동정과 분노가 일었다.(카르발라 참극) 특히 아라비아 반도 서부 히자즈 지방에서 제1대 정통 칼리파 아부 바크르의 외손이었던 압둘라 이븐 앗 주바이르가 칼리파를 칭하고 우마이야 세습 칼리파조에 도전했다. 또한 최초의 쉬아파 대반란인 타와빈('참회자들')과 무크타르가 이라크에서 거병했고, 카와리지파 세력 역시 이란과 걸프 지방을 석권하는 등 대혼란이 이어졌다. 결국 우마이야 칼리파 마르완 1세 때부터 시리아와 이집트를 시작으로 차근차근 반격에 나선 우마이야군은 아브드 알 말리크의 지도력하에 반란 세력을 멸하고 오랜 대내전을 종식시키는 데 성공했다.


2. 배경[편집]


무함마드의 움마에 당신들이 원하는 선은 무엇입니까? 당신들은 이 움마를 헤르칼리야식으로 만들길 원합니까? 헤라클레스가 죽었을 때마다 다른 헤라클레스가 일어났습니다.

ㅡ 압둘라흐만 이븐 아비 바크르, 우마이야 칼리파 야지드 1세에 대한 바이아(충성 서약)를 거부하며.[3]

[세력별 주요 등장 인물 (펼치기 · 접기)]
  • 주요 등장 인물 (우마이야 왕조) [^^]

  • 주요 등장 인물 (주바이르 왕조)
    • 압둘라 이븐 앗 주바이르 692
    • 무사압 빈 앗 주바이르 691
    • 앗 다하크 빈 카이스 684
    • 주파르 빈 알 하리스 691복속
    • 무할랍 이븐 아비 수프라 691전향
    • 이브라힘 알 아슈타르 691
    • 압둘라 빈 카짐 692

  • 주요 등장 인물 (쉬아 세력)
    • 후세인 빈 알리 680
    • 무함마드 빈 알리 (이븐 알 하나피야) 692복속
    • 술레이만 빈 수라드 685
    • 무크타르 앗 타카피 687
    • 이브라힘 알 아슈타르687년전향

  • 주요 등장 인물 (카와리지)
    • 나즈다 빈 아미르 691
    • 나피 이븐 알 아즈라크 685
    • 카타리 이븐 알 푸자아 698
    • 아브드 랍비히 알 카비르 696



2.1. 칼리파 세습 논쟁[편집]


670년 본래 후임자로 약속했던 하산 이븐 알리를 암살한 무아위야 1세는 676년 아들 야지드를 후계자 (왈리 알 아흐드)로 책봉했다.[4] 원로 중의 선출이 아닌 부자 세습제는 아랍의 전통이 부정되고, 로마나 이란식 전제군주제가 도입된 결과였다. 특히 쿠파 총독 알 무기라 빈 샤으바와 바스라 총독 지야드 빈 아비히는 야지드가 쿠라이쉬 부족 자제들 중 가장 출중하고, 그를 후계자로 삼는다면 이전과 같은 피트나(내란)이 없을 것이라며 적극 지지했다. 불과 40년 전만 해도 비잔티움 제국과 사산 제국이 다스리던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지역에서 야지드의 세습을 반대하는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아랍 전통과 정통 칼리파 조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는 아라비아 반도의 히자즈에서는 칼리파 선출에 있어 슈라를 거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이에 무아위야 1세는 참모인 마르완을 메디나로 파견해 주민들에게 야지드에 대한 충성 서약을 요구했다. 예상대로 반발이 거셌는데, 사하바 제2세대인 타비운의 주요 인사들이 그 주축이었다.

무아위야 : 내 생각을 이미 알렸다. (중략).. 야지드는 너희의 형제이자 조카가 아닌가.. (침묵).. 내게 대답하라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 : 당신께는 세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무아위야 : 말하라.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 : 신의 사도 무함마드가 행한 길, 아부 바크르가 취한 길, 또는 우마르가 만든 길을 택하십시오.

무아위야 : 그들이 한 일이 무엇인가?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 : 신의 사도께서는 어떠한 후계자도 지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부 바크르에게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무아위야 : 너희 중에는 아부 바크르와 같은 인물이 없다네. 팩폭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 : 좋습니다. 그렇다면 아부 바크르가 한 대로 하십시오. 그는 자신의 가문 외의 쿠라이쉬 소속 인물을 지목해 후계자로 삼았습니다. 또는 우마르가 택한 길을 따르십시오. 그는 슈라 위원 6명 간에 선출을 맡겼고, 그 중에 친자와 자신의 가문을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보고를 받은 무마위야 1세는 직접 메디나로 향했다. 그는 후세인 이븐 알리,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 압둘라 빈 우마르, 압둘라 빈 알 아바스, 압둘라흐만 빈 아비 바크르 등의 원로들과 논의했으나 합의를 보지 못하자 칼로 그들을 위협해 침묵시킨 후 민바르(모스크에 설치된 설교단)에 올라 원로들이 이미 충성을 서약했다고 선언했다. 이후 대중들에게도 바이아(충성 서약)를 명령하니, 그리 되었다. 기타 지방 도시들에서도 바이아가 행해졌고, 그 결과가 수도 다마스쿠스에 보고되었다. 위에 소개된 대화에서처럼 아부 바크르 역시 후계자를 지목하기는 했지만 무아위야 1세의 경우, 자신의 친자를 지명했고, 그것도 강제적으로 이행시켰기에 논란이 이어졌다. 특히 혈통주의를 주장하며 추후 쉬아 세력의 토대가 되는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추종 세력과 누구나 칼리파가 될 수 있다고 규정한 급진적인 카와리지 세력은 강력히 반발했다. 그외에 예언자 무함마드를 배출한 하심 가문 역시 쿠라이쉬 부족 중에서 자신들이 가장 큰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3. 전개[편집]


무아위야 1세의 카리스마에 의해 세워진 우마이야 왕조는 679년 동로마 제국과 굴욕적인[5] 휴전을 맺은 그가 이듬해 4월 붕어하자 위기를 맞았다. 죽기 전에 무아위야 1세는 야지드 1세에게 후세인 이븐 알리와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가 우마이야의 통치에 도전할 수 있으니 유의하고, 만약 그리 한다면 진압할 것을 당부했다. 특히 위험 인물로 여겨진 압둘라의 경우, 승복하지 않는다면 강경히 대응할 것을 조언했다. 따라서 즉위 이후 야지드 1세는 자신의 사촌인 메디나 총독 왈리드 빈 우트바에게 필요하다면 무력을 써서라도 후세인, 압둘라, 압둘라 빈 우마르의 충성 서약을 받게 했다. 이에 왈리드는 친척인 마르완 빈 알 하캄에게 조언을 구했다. 마르완은 위험 인물인 압둘라와 후세인에게는 서약을 강제해야 하고, 별 위협을 보이지 않는 압둘라 빈 우마르는 내버려 둘 것을 조언했다. 이에 왈리드는 압둘라와 후세인을 소환했는데, 압둘라는 성지 메카로 도주했다.

후세인 이븐 알리는 소환에 응했으나 서약은 공개적으로 행해져야 한다며 밀실 회동에서의 서약을 거부했다. 그러자 마르완이 그를 감금하려 했으나 예언자 무함마드의 외손이라는 지위에 부담을 느낀 왈리드는 별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며칠 후 후세인은 끝내 충성 서약을 하지 않은 채 메카로 떠났다. 메디나의 '아밀'(시장) 역시 그 뒤를 따랐다.(680년 5월) 이런 상황속에서 이라크 쿠파의 알리 지지자들이 알리의 차남인 후세인 이븐 알리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초청 서신을 보냈다. 이에 그는 사촌인 무슬림 빈 아킬을 그곳으로 보내 정황을 살피게 했고, 아킬은 그들의 의지가 확고하다며 답신했다. 이러한 움직임을 파악한 칼리파 야지드 1세는 쿠파 총독 앗 누만 빈 바쉬르 알 안사리[6]를 해임하고 바스라 총독인 우바이둘라 빈 지야드에게 통솔권을 넘겼다. 우바이둘라는 즉시 무슬림 빈 아킬을 처형했고, 반우마이야 세력의 인사들을 체포하며 적극적인 대처에 나섰다. 이에 쿠파 주민들 역시 알리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3.1. 카르발라 참극[편집]


"민심은 그대와 함께 있지만, 그들의 칼은 우마이야 가문과 함께 있다."

쿠파행 도중에 만난 시인 파라즈다크(~728년)가 쿠파의 동향을 묻는 후세인 이븐 알리에게 대답한 말.


급변하는 상황을 알지 못한 채로 쿠파행을 결심한 후세인 이븐 알리는 성지 메카를 근거지로 대항하자는 압둘라흐만 빈 알 하리스, 압둘라 빈 알 아바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가신과 가족들을 대동한채 먼 길을 떠났다.(680년 9월 12일) 80명의 성인 남성을 포함한 200여 명의 대열은 쿠파에서 북쪽으로 50km 떨어진 카르발라에 당도하여 휴식을 취했다.(10월 2일) 쿠파는 이제 이틀 거리였다. 하지만 다음날 쿠파 총독 우바이둘라의 압력을 받은 라이 총독 우마르 빈 사이드가 4,000명의 병력과 함께 나타났다. 후세인은 우마르에게 자신을 야지드 1세에게 알현시키거나 메카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10월 9일 우마르가 공격을 준비하자 후세인은 사절을 보내 마지막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공격을 연기해 달라고 청했으며, 이번에는 수용되었다. 예배를 드리면서 후세인은 가신들에게 헛된 죽음 대신 떠날 것을 제안했으나 전부 그의 곁에 남았다고 한다. 다음날, 후세인은 32명의 기병과 40명의 보병과 함께 4,000명의 우마이야 대군 앞에 나섰다.

우마이야군이 화살을 쏘면 후방의 아녀자들 역시 살상될 수 있기에 후세인은 1대1 대결을 요구했고, 수용되었다. 그러한 방식으로 가신들이 모두 전사한 후, 후세인의 차남 알리 알 아크바르를 필두로 알리 일가 역시 학살과 같은 죽음을 맞았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외손인 후세인을 죽이는 것에 대해 부담이 컸던 우마이야 조의 병사들은 얼굴을 가린 채로 몰려가 그를 난도질하는 방식으로 책임을 분담했다. 병약하여 후방에 남은 후세인의 3남 알리 (자인 알 아비딘)를 제외한 후세인의 아들들 전부가 사망했고, 후세인의 수급은 야지드 1세에게 보내졌다. 한때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 원정에 나섰던 둘은 이렇게 재회하게 되었다. 후세인 일가가 전멸한 헤지라력 61년 무하람 10일은 쉬아 이슬람에서 아랍어로 10을 뜻하는 아슈라로 기념된다.


3.2. 두 성지의 반란[편집]


  • 683년, 세 칼리파의 병립[7]
    • 다마스쿠스: 야지드 1세 빈 무아위야
    • 메디나: 압둘라 빈 한달라 알 가실
    • 메카: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

후세인 이븐 알리의 피살은 이라크에 만연했던 친알리 기조를 이끌어내는데 성공적이었다. 다마스쿠스에 압송된 후세인의 처자식들도 살아남은 3남 알리 자인 알 아비딘과 후세인의 누이 제이납을 중심으로 면회를 온 주민들에게 후세인의 뜻을 설파했고, 이로써 시리아의 여론 역시 후세인에게 동정적으로 바뀌었다. 그 압력을 받은 야지드 1세는 이듬해에 후세인 일가를 석방했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 알리는 제4대 이맘이 되어 메디나에서 쉬아 교리를 확립하는데 힘썼다. 한편 후세인 생전에는 그의 권위를 인정하던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는 카르발라 참극 이후 만연한 분노의 기류를 타고, 후세인의 죽음을 거룩한 순교로 승화시키며 지지 세력을 모았다. 압둘라는 초대 정통 칼리파 아부 바크르의 외손인 자신이 후세인 다음으로 칼리파 자격이 있음을 선포했고, 충성 서약을 받기 시작했다. 이에 야지드 1세는 곧바로 토벌에 나서는 대신 우선적으로 협상에 나섰는데, 압둘라는 이를 거부하고는 메카에서 자립했다.(아직 칼리파 칭하지는 않음)

한편 후세인을 추격하지 않아 680년 6월에 해임되었던 메디나 총독 왈리드 빈 우트바는 681년 8월에 재임명되어 핫즈 기간에 순례단 겸 진압군을 이끌고 메카로 향했으나 압둘라를 제압하지 못했다. 압둘라는 물론, 카와리지 지도자 나즈다 빈 아미르 알 하나피 역시 각자의 순례단을 이끌며 우마이야 칼리파의 권위를 무시했다. 더 나아가 압둘라는 야지드 1세에게 서신상으로 왈리드의 무능함을 조롱했고, 이에 야지드 1세는 자신의 다른 사촌인 우스만 빈 무함마드를 메디나 총독에 봉했다. 계략대로 경험이 부족한 청년인 우스만이 메디나에 부임하자 거칠 것이 없어진 압둘라는 682년, 메카를 완전히 장악하고 우마이야 가문을 축출했다. 이에 야지드 1세는 메카 총독이던 7촌 조카 아므르 빈 사이드 알 아쉬다크에게 토벌군을 주어 파견했다. 아므르는 다시 압둘라와 의절한 동생 아므르 빈 앗 주바이르[8]에게 토벌군을 주어 파견했으나 매복에 당해 패배했고, 후자는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같은 해 야지드 1세는 전 쿠파 총독 누만 빈 바쉬르를 메디나로 파견해 동료 안사르들을 설득하게 했으나 허사였다. 한편 메디나의 우스만은 야지드 1세에 대한 반대 여론을 상쇄하기 위해 도시 유력자들로 구성된 사절단을 다마스쿠스로 파견했다. 이는 경제적 보상으로 칼리파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려는 의도였고, 야지드 1세 역시 이들을 환대하며 다수의 값진 선물을 하사했다. 하지만 메디나로 돌아온 사절단은 이미 받아놓고는 오히려 칼리파 야지드의 사치스러운 행실과 종교적 해이함을 고발하며 여론을 악화시켰다. 메디나의 유지들은 사원에 모여 반우마이야 봉기를 결의했다. 682년 가을 메디나의 주민들은 사절단의 일원이자 안사르 원로인 압둘라 빈 한잘라의 지휘하에 봉기하여 우스만을 공격했다. 우스만은 1,000명의 친우마이야 세력과 함께 원로인 마르완 빈 알 하캄의 구역으로 피신했다. 어쩔 줄을 모르던 우스만 대신 현지 우마이야 가문은 노련한 마르완을 지도자로 삼았고, 후자는 즉각 야지드 1세에게 메디나 파병을 청했다.


3.2.1. 메디나의 학살(683년)[편집]


홍해에 면한 아라비아 반도의 서부 히자즈는 기본적으로 쿠라이쉬 부족의 땅이었기에 그 토벌에 있어 아므르와 우바이둘라 등 쿠라이쉬 계열 인사들이 거부했다. 따라서 비 쿠라이쉬계인 무슬림 빈 우크바가 사령관으로 선임되어 10,000명의 대군과 함께 남하했다. 한편 메디나의 압둘라 빈 한달라는 우마이야 구역에 대한 포위를 풀며, 그들이 토벌군에 합세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떠날 수 있게 해주었는데 마르완 등 대다수는 서약을 어기고 토벌군에 합류했다. 토벌군이 다가오자 압둘라 빈 한달라 휘하의 2,000명의 메디나군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전례에 따라 도시 북쪽에 참호를 파고 기다렸다. 메디나 외곽에 당도한 무슬림 빈 우크바는 연금 지급 및 곡물 가격 인하 등을 조건으로 3일간 메디나군과 협상을 시도했으나 결렬되었다. 이윽고 메디나의 기병대가 돌격하며 전투가 벌어졌고, 한때 승리하는 듯 보였으나 무슬림 빈 우크바가 직접 반격에 나서자 격퇴되었다. 그리고 4등분된 참호의 일각을 맡은 하리싸 부족이 배신하여 마르완의 우마이야 기병대가 후방에서 나타나자 전세는 결정되었다.

메디나 진영은 붕괴했고, 압둘라 빈 한달라를 포함한 1,700여 명의 쿠라이쉬 및 안사르가 전사했다(알 하라 전투).[9] 압둘라 빈 무티가 이끄는 부대만이 메카로 도주하는데 성공했다. 승리 후 무슬림 빈 우크바는 3일간 메디나를 약탈했고, 수천명의 주민들이 학살당했다. 이슬람의 산실은 '무슬림 군대'에 의해 약탈과 강간이 난무하는 지옥도로 변했다. 잔혹한 무슬림 빈 우크바는 전투에 참가하지 않아 무사했던 하심 가문을 포함한 유지들을 쿠바 사원에 모아 야지드 1세에 대한 충성 서약을 시켰는데, 반대하는 이들은 처형했다. 그중에는 자신의 절친한 벗이던 마킬 빈 시난도 있었다. 승리에 고무된 야지드 1세는 메카 진격을 명령했고, 이에 무슬림 빈 우크바는 남하했으나 병에 걸려 메디나-메카의 2/3 지점인 무샬랄(쿠바이드)에서 사망했다. 이에 홈스 부대를 이끌던 부관 후세인 빈 누마이르 앗 사쿠니가 지휘권을 승계하고 계속 진군했다. 압둘라 빈 주바이르는 항복 제안을 거부하고, 우마이야군에 항전을 준비했다.


3.2.2. 제1차 메카 공방전[편집]


우마이야 군대의 메카 진격 소식에 메디나의 패잔병 뿐만 아니라 이라크 쿠파의 무크타르 앗 타카피, 나즈다 빈 아미르 알 하나피 휘하의 카와리지 등 각지에서 자원병들이 성도를 지키기 위해 모여들었다. 9월 중순, 우마이야 군대가 당도하자 압둘라 빈 주바이르는 출병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후세인 빈 누마이르는 침착하게 반격에 나서 전세를 역전시켰고, 9월 24일 우마이야 군은 메카를 포위하고는 투석기로 도시를 포격했다. 압둘라는 대사원 뜰에 지휘소를 세워 대응했고, 쿠라이쉬 부족이 중심이 된 메카 수비대는 결사 항전했다. 따라서 1개월간 공방전이 이어지던 10월 31일, 기어코 이슬람 최대 성지인 카바가 포격당하여 전소되었다. 성유물인 흑석 역시 불타서 3등분되었고, 후에 은으로 된 실로 봉합되었다. 다만 일설에 의하면 수비군이 들고 있던 횃불이 바람으로 인해 옮겨붙어 화재가 발생했다고도 한다. 어쨋거나 카바가 전소된지 11일 후, 야지드 1세는 사냥 도중 낙마하여 40세를 전후로 한 나이에 요절했다.

당대인들이 천벌에 의한 것으로 여기던 야지드 1세의 죽음은 11월 26일 메카의 포위군에게도 전해졌다. 사령관 후세인 빈 누마이르는 즉시 휴전을 청했고, 압둘라 빈 주바이르가 이를 수용하자 더 나아가 자신을 사면한다면 그에게 복속한 후, 함께 다마스쿠스로 진격하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 진의를 의심한 압둘라는 이를 거절했고[10], 신임 칼리파로 즉위한 야지드 1세의 아들 무아위야 2세가 회군 명령을 내리자 우마이야군은 메카를 떠났다. 3대 세습으로 즉위한 무아위야 2세는 병약하고 경건했기에 더이상 성지가 파괴되고 동족상잔을 벌이는 대신 압둘라 빈 주바이르와 평화협정을 맺었고, 더 나아가 그를 후계자로 삼았다. 하지만 나이가 2배 이상으로 많은 압둘라가 제안을 거절하고 공세를 재개하자 무아위야 2세는 칼리파직을 포기하겠다며, 정통 칼리파시대처럼 슈라 위원회에 선출권을 넘겼다. 이후 잠적하던 20대의 칼리파는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684년 2월)

우마이야군의 철수로 압둘라 빈 주바이르는 성지 메카의 지배자로 확실시된 것을 넘어,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로 급부상했다.[11] 이미 아라비아 반도 전역과 이집트, 이란 등이 반란의 불길에 휩쌓여 있었고, 압둘라는 시리아를 포함한 상당수 지역들에서 칼리파로 인정받았다. 야지드 1세에 의해 좌천되었던 누만 빈 바쉬르 역시 압둘라 빈 주바이르에게 복속하여 홈스 총독으로 봉해졌다. 다만 그 충성은 형식적인 것에 그쳤고, 제대로 된 명령 체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메디나를 포함하여 히자즈를 공고히 장악한 압둘라 빈 주바이르는 우마이야 가문과 그 동조자들을 영내에서 추방했는데, 그중에는 메디나 사태 당시 활약하며 이름을 떨친 마르완도 있었다. 압둘라의 '주바이르 정권' 탄생의 정치적 결과 외에도,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 불과 51년만에 이슬람 최고의 성지 메카가 무슬림의 손에 의해 파괴된 것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12] 칼리파로써 압둘라 빈 주바이르는 카바를 기존의 목조 대신 석조 형태로 재건했고, 손수 흑석을 안치하며 종교적 위상을 과시했다.[13]


3.3. 야지드 1세 사후, 우마이야 칼리파조의 정치적 혼란[편집]


파일:이슬람 피트나.png
684년 봄, 존망의 위기에 몰린 우마이야 왕조. 핑크색이 우마이야 왕조이고, 녹색이 압둘라 빈 주바이르의 세력권이다.

야지드 1세의 사후 이슬람권은 분열되었다. 후세인 이븐 알리를 카르발라에서 살해한 이라크 쿠파 총독 우바이둘라마저 병약한 무아위야 2세에 대한 충성 서약을 거부하고, 오히려 바스라 유지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으며 칼리파를 칭했다. 즉위 연설에서 그는 자신과 바스라의 연줄을 강조하며, 주민들의 부를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바스라 주민들은 봉기하여 우바이둘라를 총독궁에서 포위했고, 하심 가문의 압둘라 빈 알 하리스가 새 총독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우바이둘라는 아즈드 부족장 마수드 빈 아므르에게 의탁했고, 예멘-라비아계 부족들과 연합해 타밈-알 하리스 부족들에 맞서려 했다. 마수드 빈 아므르는 바스라 대사원의 연단에서 봉기를 선동했으나 총독 압둘라 빈 알 하리스의 지시로 타밈 부족이 사원을 습격하여 마수드를 살해했다.(684년 3월) 위기에 처한 우바이둘라는 처자식도 두고 단신으로 도시를 떠나 시리아 사막을 건너 여전히 우마이야 왕가를 지지하는 샴 방면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시리아의 상황 역시 복잡했다.


3.3.1. 후임 칼리파 문제[편집]


바누 칼브의 부족장 하산 빈 말리크(이븐 바흐달)는 왕조의 개창자인 무아위야 1세와 결혼한 고모 마이순 빈트 바흐달을 통해 야지드 1세와 사촌 지간이었고, 그 자신 역시 누이를 야지드 1세와 결혼시키며 동시에 매부지간이 되었다. 또한 그녀와 야지드 1세 사이에서 후임 칼리파인 무아위야 2세가 태어나면서 우마이야 왕가에 있어 하산의 지분은 더욱 확대되었다. 우마이야 왕조 제2대 칼리파위에 오르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향하던 야지드 1세를 동행한 사람 역시 그였다. 따라서 바누 칼브 지도부는 각종 요직을 차지했다. 하산 빈 말리크는 팔레스타인-요르단, 동생 사이드는 킨나스린 총독에 봉해졌다.[14] 야지드 1세가 붕어한 후, 하산 빈 말리크는 선왕의 어린 아들들(무아위야, 칼리드, 압둘라)에 대한 후견인으로 지목되었고, 하산의 영향력하에 그의 외조카인 무아위야 2세가 제3대 칼리파로 등극할 수 있었다. 그리고 684년 무아위야 2세가 붕어하고, 후계 분쟁이 벌어지자 하산은 칼리드를 지지했으나 시리아의 원로들 역시 경험이 없는 10대를 제4대 우마이야 칼리파로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 홈스 총독 누만 빈 바쉬르 알 안사리, 킨나스린의 주파르 빈 알 하리스 알 킬라비 등 카이스 부족과 시리아 총독들 대부분은 압둘라 빈 주바이르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심지어는 일부 우마이야 왕족들 역시 그러했고, 다마스쿠스 총독 앗 다하크 빈 카이스 알 피흐리 역시 압둘라 빈 주바이르와 내통했다. 그럼에도 하산 빈 말리크는 바누 칼브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우마이야 왕조를 유지하려 노력했고, 주다암 부족장 라우흐 빈 진바에게 팔레스타인을 맡긴 후, 다마스쿠스 남쪽의 요르단에 주둔하며 사태를 지켜봤다. 하지만 라우흐는 곧 주다암 부족 내의 경쟁자인 나틸 빈 카이스에게 축출되었고, 나틸은 대세를 따라 압둘라 빈 주바이르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한편 이라크에서 축출된 전 총독 우바이둘라 역시 다마스쿠스에 간신히 당도하여 우마이야 조를 유지하고자 했는데, 그는 야지드 1세의 어린 아들들 대신 원로인 마르완 빈 알 하캄에게 접근했다. 압둘라 빈 주바이르에게 복속하기 위해 메카로 향하던 마르완은 우바이둘라의 설득에 변심했다.


3.3.2. 자비야 회의(684년)[편집]


자신감을 얻은 마르완은 우바이둘라와 함께 팔미라로 향하여 칼리파위를 주장했고, 이에 칼리드를 지지하던 하산 빈 말리크는 시리아 유지들과 우마이야 가문을 모아 후계 구도를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수도 다마스쿠스는 충성심이 의심스럽던 앗 다하크의 수중에 있었기에 회동은 친우마이야파인 하산의 통제하에 있었던 자비야에서 열렸다. 앗 다하크 역시 소환되었으나 그는 카이스 부족 유지들의 설득으로 불응하고 군대를 모았다. 비슷한 무렵, 전 메디나 총독이자 야지드 1세의 사촌인 왈리드 빈 우트바가 다마스쿠스에서 앗 다하크에 맞서다가 감금당한 후, 결국 석방되었으나 곧 사망했다.

따라서 남은 우마이야 가문원 중 연장자는 마르완만이 남게 되었기에 원로들의 이견이 없는 지지를 받게 되었다. 이어진 자비야 회동에서 하산 빈 말리크는 압둘라 빈 주바이르를 우마이야 가문을 배신한 '무나피크'(위선자)로 선포하고, 야지드 1세의 아들인 칼리드를 지지했다. 그러자 시리아 원로들은 앗 다하크가 언제 공격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젊은이를 따를 수는 없다며 반대했다. 40일간의 회의 끝에 결국 경험이 많은 마르완이 칼리파로 선포되었다. 다만 하산의 입장도 반영하여 마르완의 후계자는 칼리드, 다시 그 후계자는 아므르 빈 사이드로 정해졌고 바누 칼브는 여러 경제적•정치적 특권을 보장받았다.


3.3.3. 마르즈 라히트 전투[편집]


자비야 회의 동안 군대를 모은 앗 다하크는 다마스쿠스 남쪽 마르즈 앗 사파르에 진영을 세웠다. 다마스쿠스 수비대 역시 내통을 넘어 공개적으로 압둘라 빈 주바이르에게 복속했다. 앗 다하크의 군대는 홈스, 킨나스린 등지의 카이스 부족과 팔레스타인의 주다암 부족장 나틸 빈 카이스가 보낸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마르완 1세는 바누 칼브를 중심으로 킨다와 가산 부족들을 포섭해 우마이야 군대를 조직했다. 한편 마르완 1세의 선출 소식이 당도하자 카이스 부족 연맹은 앗 다하크의 지휘하에 마르즈 앗 사파르 평원에 집결했다. 그러자 마르완 1세는 곧장 다마스쿠스로 진격했고, 가산 부족에 속한 인사의 내통으로 도시를 장악했다. 제한된 시간동안 마르완 1세는 왕실 금고를 접수하고는 도시를 나와 앗 다하크와 맞섰다. 뒤이어 벌어진 전투는 우마이야 왕조의 운명을 결정지을 터였다.

684년 7월 중순에 개시된 전투에서 카이스 부족 연맹은 패하여 북쪽의 마르즈 라히트로 물러나 재정비했다. 그 후 양측은 20여 일간 전초전을 벌였는데, 그동안 마르완 1세는 금고의 재물을 아낌없이 활용하여 카이스 연맹의 세력들을 조금씩 전향시켰다. 따라서 본래 2배에 달했던 병력 차이[15]는 총력전이 벌어진 8월 18일에 이르면 크게 줄어 있었다. 대격돌의 결과는 우마이야군의 대승리였고, 앗 다하크를 비롯한 카이스 부족의 지도부가 전사했다. 일설에 의하면 이슬람 제국에 대한 시리아 지역의 주도권을 이어가고 싶었던 부족들이 아라비아 반도 히자즈 기반의 압둘라 빈 주바이르 대신 마르완 1세를 택한 결과라고도 한다. 결국 전투의 향방은 다마스쿠스의 국고를 접수한 마르완 1세의 결단력과 기득권 유지의 열망이 결정지었다고 할 수 있다. 패배한 카이스 부족의 잔당은 킨나스린 총독 주파르 빈 알 하리스 알 키라비의 지휘하에 카르키시야(키르케시움)로 피신했고, 홈스 총독 누만 빈 바쉬르는 도주 중 피살되었다.[16]


3.4. 마르완 1세 : 반격 개시[편집]


승리한 마르완 1세는 다마스쿠스에 입성하여 즉위식을 올렸다.(684년 8월) 절체절명의 위기로 몰렸던 우마이야 조는 마르즈 라히트 전투로 본거지인 시리아를 굳게 확보하면서 반격의 기반을 마련했다. 자신감을 얻은 그의 다음 목표는 팔레스타인과 이집트였다. 우선 마르완 1세는 라우흐 빈 진바를 팔레스타인으로 파견해 주바이르 왕조에 충성하던 경쟁자 나틸 이븐 카이스를 메카로 축출하고, 주다암 부족을 장악하도록 했다.


3.4.1. 이집트 수복(685년)[편집]


압둘라 빈 주바이르가 칼리파를 칭한 직후, 이집트에서는 카와리지 세력을 중심으로 그에게 충성을 서약했고, 684년 초엽, 주바이르 정권은 압둘라흐만 빈 우트바 알 피흐리(이븐 자흐담)를 총독으로 파견했다. 기존 총독 사이드 빈 야지드가 저항없이 승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므르 이븐 알 아스와 함께 종군했던 아랍계 엘리트 정착민 ('우주흐')들은 외부인의 집권에 불만을 품었고, 마르완 1세가 시리아를 장악하자 그와 밀통했다. 이에 고무된 마르완 1세가 이집트 친정을 결심했던 것이다. 그러한 배경 하에 685년 2월, 마르완 1세는 아들 압둘 아지즈를 앞세워 이집트로 진군했다. 이 소식을 접한 압둘라흐만 총독은 푸스타트를 요새화하고, 시나이 반도 끝단의 아일라(아카바)에 육군과 해군을 파견해 우마이야군의 진격을 1차로 저지하도록 했다.

하지만 함대는 도중에 폭풍으로 좌초되어버렸고, 이를 전해듣고 사기가 저하된 육군 역시 우마이야군에 항복하거나 도주해버리면서 소멸되었다. 따라서 우마이야군은 별 저항 없이 푸스타트에 당도했고, 알 칸다크 전투에서 주바이르-카와리지 연합군을 격파했다. 동시에 아므르 빈 사이드는 푸스타트의 모스크에 있는 연단에 서서 마르완 1세에 대한 지지 연설로 아랍 귀족들을 포섭했다. 며칠간의 충돌 이후 푸스타트의 유력자들은 항복했고, 마르완 1세는 주바이르쪽 총독인 압둘라흐만에게 소유물과 함께 이집트를 떠나도록 관용을 베풀었다. 이집트 인들의 충성 서약을 얻어낸 마르완 1세는 아들 압둘 아지즈를 이집트 총독으로 봉하고 회군했다.(685년 2월) 비옥한 이집트의 수복은 우마이야 왕조에게 큰 힘이 되었다. 사막이 가로막은 히자즈-이집트와 달리 이집트-시리아는 더욱 안정적인 연동성이 있었다.


3.4.2. 알-라바다 전투[편집]


한편 이집트를 빼앗기는 동안 압둘라 빈 주바이르 역시 손놓고 바라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우마이야 지도부의 부재를 틈타 그는 동생 무사압에게 얼마전 상실한 팔레스타인을 공격하게 했지만 마르완 1세가 급파한 아므르 빈 사이드에게 격퇴되었다. 얼마 후 시리아로 돌아온 마르완 1세는 승리의 여세를 몰아 제1차 피트나때부터 우마이야 조에 충성해 왔던 쿠다아 부족장 후바이쉬 빈 둘자[17]에게 주바이르 조의 심장부인 히자즈 원정을 명령했다. 후바이쉬는 깊숙히 진격했으나 메디나의 동쪽에서 벌어진 알-라바다 전투에서 주바이르측 바스라 총독 알하리트 빈 압둘라 알마크주미에게 대패했다.

우마이야군은 대부분 전사했고, 후바이쉬 본인도 페르시아인 궁수 야지드 이븐 시야흐 알 우스와리의 활에 맞아 사망했다. 다만 일부의 생존자 중에는 훗날 이라크 부왕에 오르는 알핫자즈 빈 유수프가 있었다. 아직 주바이르 조가 건재하다는 것을 확인한 마르완 1세는 주바이르 조와의 정면 대결 대신 막내 아들 아부 압둘라흐만 무함마드를 시리아 동부로 보내 유프라테스 강 중류에 웅거하고 있는 카이스 부족을 견제하게 했고, 칼리파 추대의 공신 우바이둘라에게 정복한 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약속하며 자지라(메소포타미아 북부) 서부에서 이라크 방면 침공을 준비하도록 했다.


3.4.3. '마르완 왕조'[편집]


아들 압둘 아지즈에게 이집트를 맡기고 귀환한 마르완 1세는 명실상부한 우마이야 칼리파조의 구원자로서 위세가 하늘을 찔렀다. 이에 기반한 그는 얼마후 신나브라 회의를 열어 원정 도중 섭정직을 수행한 장남 압둘 말리크를 팔레스타인 총독에 봉함과 동시에 후계자로 선포했다. 동시에 차기 계승자 역시 압둘 아지즈로 변경했다. 자비야 회의를 부정하는 결정에 대해 칼리드와 아므르가 반발했지만, 결국 대세를 따랐다. 얼마 후 마르완 1세는 하산 빈 말리크를 소환하여 압둘 말리크의 계승을 승인하게 한 후에야 눈을 감았다.[18] 확고한 세습 구도가 확립되었기에 아브드 알 말리크는 별탈 없이 칼리파에 오를 수 있었다.

한편 이슬람 세계의 대규모 내전을 틈타 반격에 나선 동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노스 4세가 소아시아 남부 킬리키아로 진격하여 모프수에스티아를 점령했다. 이에 686년 아브드 알 말리크는 동로마 제국에 매일 1,000개의 금화와 말 1필, 노예 1명을 바친다는 휴전 협정을 맺은 후 내전에 집중했다. 그 무렵 이슬람 세계는 서부의 우마이야 왕조, 남부의 주바이르 왕조, 동부의 무크타르의 3파전의 구도로 나뉘었다.[19] 685년 주바이르 조의 침공을 격퇴한 이후, 시리아와 이집트는 안정적이었기에, 쉬아 세력이 준동하여 주바이르 조의 지배가 와해되던 이라크가 주요 전장이 되었다.


3.5. 이라크 전역 : 최초의 쉬아 운동[편집]


파일:2차 피트나 이슬람.png
전쟁의 중반 무렵인 686년의 형세. 핑크색은 우마이야 왕조, 푸른색과 옅은 푸른색은 주바이르 왕조, 녹색은 무크타르의 세력, 노란색은 카와리지 세력이다.

카르발라 참극 이후, 이라크 쿠파에서는 최초의 쉬아 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후세인 이븐 알리를 초청했다가 신임 쿠파 총독 우바이둘라의 숙청에 굴복했던 쿠파인들은 뒤늦게 죄책감을 느끼며 참회자들('앗 타와빈')이 되어 세력화했다. 카르발라 참극 몇달 후, 쿠파에서는 5명의 알리 지지자들이 중심이 되어 100명의 주민들을 모았다. 모두 60세 이상의 노인들이었던 그들은 사하바 원로인 술레이만 빈 수라드 쿠자이의 집에서 첫 모임을 가진 후 그를 지도자로 선출했다. 그들은 후세인 이븐 알리의 복수를 외치며 우마이야 왕조의 감시와 차별에 놓인 이라크 지역의 아랍-페르시아계 무슬림들을 규합해 나갔다. 비밀리에 전개되던 운동은 684년 우바이둘라가 이라크에서 축출되자 공개적으로 전환되었고,

"후세인의 복수를 ! "(یا لثارات الحسین)

이란 구호는 무려 16,000명의 주민들을 결집시켰다. 한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휘하에 있었고, 후세인 이븐 알리의 사촌 무슬림 빈 아킬을 도왔던 무크타르 빈 아비 우바이드 앗 타카피[20] 역시 두각을 드러냈다.

우바이둘라에 의해 수감되었던 무크타르는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제자였던 페르시아인 해방노예 마이탐에게 수학했고, 매형인 압둘라 빈 우마르의 청원으로 감옥에서 석방될 수 있었다. 다만 쿠파에서 추방되었기에 메카로 향한 무크타르는 압둘라 빈 주바이르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제1차 메카 공방전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압둘라가 그의 가치를 몰라보고 홀대하자 무크타르는 쿠파로 돌아갔다.[21](684년 봄) 같은 시기, 쿠파에서는 폭동이 벌어져 총독 우바이둘라가 축출되었다. 바스라 총독 압둘라 빈 하리스는 이미 우바이둘라가 부패를 지적하자 압둘라 빈 주바이르의 정권에 복속한 바 있었는데, 쿠파의 주민들 역시 뒤따랐다. 따라서 압둘라는 압둘라 빈 야지드를 총독으로 파견하여 쿠파를 장악했다. 알리의 혈통이 아닌 압둘라 빈 주바이르의 지위를 위태롭게 할 수 있기에 쉬아 세력은 우마이야 조 뿐만 아니라 압둘라의 영토에서도 박해받았다. 그럼에도 무크타르는 승리와 부를 약속하며 후세인 이븐 알리의 복수를 위한 세력을 모았다.


3.5.1. 참회자('앗 타와빈')들의 반란(685년)[편집]


동시에 등장한 두 쉬아 지도자들 중 여론은 무크타르보다 사하바의 일원인 술레이만 빈 수라드 쿠자이에 기울었다. 상술한 대로 많은 지지를 얻은 타와빈 세력은 쿠파와 주변 부족들로부터 무기를 모았고, 술레이만은 바스라와 마다인의 쉬아 지도부로부터 지지를 얻어냈다. 마침내 684년 12월, 술레이만은 누카일라에 병사들을 소환했다. 다만 기존에 서약한 16,000명 중 1/4에 해당하는 4,000명만이 모였는데, 이는 무크타르가 전쟁 경험이 전무한 술레이만이 가망이 없다고 여겨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술레이만은 3일을 더 기다렸으나, 세력이 불어나기는 커녕 1,000명이 더 이탈했다. 따라서 술레이만은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우선 카르발라로 향하여 후세인 이븐 알리의 무덤 앞에서 애도를 표했다. 그후 유프라테스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시리아로 향하던 타와빈 군대는 마르즈 라히트 전투에서 배배한 카이스 부족이 피신해 있었던 카르키시야(부세이라)[22]에 이르렀다.

카이스 부족장 주파르 빈 알 하리스 알 킬라비는 그들에게 보급품을 지원한 후, 술레이만에게 우마이야군의 위치를 알려주며 광야 한 가운데의 요충지인 아인 알 와르다로 빠르게 진군하여 거점으로 삼을 것을 조언했다. 또한 큰 병력 차이를 지적하며 전면전 대신 군대를 세분화하여 화살을 퍼붓는 집요한 게릴라 전에 나서고, 전부 기병인 타와빈 병력 중 일부를 필요시에 보병으로 전환할 수 있게 하라고 덧붙였다. 다만 그 뜻을 이해하면서도 주파르는 가망이 없다고 보며 카이스 병력을 합류시키지는 않았고, 술레이만에게 카르키시야에 머물며 함께 싸울 것을 제안했으나 후자는 거절했다. 이후 조언대로 타와빈 군대는 아인 알 와르다에 당도하여, 마을 앞에 주둔했다. 그리고 5일 후, 20,000명에 달하는 우마이야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만 우마이야측 지휘관들이었던 후세인 빈 누마이르와 슈라빌 빈 딜칼라 간의 갈등으로 둘은 각각 8,000명, 12,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따로 행군했다.

먼저 도착한 슈라빌은 진영을 세우다가 타와빈의 공격을 받자 도주했다. 다음날 당도한 후세인 빈 누마이르는 타와빈 측에 항복을 요구했으나, 역으로 술레이만은 그가 항복하고, 후세인 이븐 알리의 죽음을 초래한 우바이둘라를 처형을 위해 내놓으라고 답했다. 따라서 1월 4일 아인 알 와르다 전투가 개시되었다. 술레이만은 타와빈 군대를 3분하여 둘은 우마이야군의 측면을, 자신이 이끄는 본대는 그 중앙을 공격하는 작전을 폈다. 첫날의 전투는 타와빈군의 우세로 끝났으나, 다음날 후세인 빈 누마이르 휘하에서 싸우라는 우바이둘라의 협박에 복귀한 슈라빌의 병력이 합세하자 우마이야군의 수적 우세가 확대되었다. 타와빈군은 필사적으로 버텨으나, 큰 손실을 입었다. 3일째에 결국 포위당하자 술레이만은 병사들에게 말에서 내려 백병전을 지시했다. 말에서 내리는 타와빈군에게 우마이야군은 화살 세례를 퍼부었고, 전자는 괴멸되었다. 술레이만 역시 화살에 맞아 전사했고, 남은 네 지휘관들 중 3명도 곧 전사했다.

깃발을 건내받은 마지막 지휘관 리파아 빈 샷다다는 마다인과 바스라의 쉬아 공동체가 파견한 지원군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이미 전열이 붕괴된 상태였기에 그들을 기다리는 대신, 밤을 트타 카이스 부족이 있는 카르키시야로 도주했다. 살아남은 타와빈군 병사들은 희생의 서약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쿠파의 무크타르에게 합류했고, 스스로 '쉬아 알마흐디' / '쉬아 알 학크' / '쉬아 알 무함마드' 등으로 칭하며 무크타르 군대의 중추를 이루었다.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계획이 있었던 무크타르는 이븐 알 하니피야를 칼리파로 지지하는 한편, 기존 아랍인에 더하여 페르시아계 마왈리까지 포섭하여 쿠파를 장악했고, 후자가 이끄는 13,000명의 군대는 같은해 11월 카지르 전투에서 우바이둘라 & 후세인 빈 누마이르 & 슈라빌을 전사시키며 후세인 이븐 알리와 타와빈군의 복수를 이루었다. 비록 실패로 귀결되었지만 타와빈 운동의 참가자들은 카르발라 전투의 72인과 마찬가지로 순교자들로 승화되어 쉬아파 반란의 열기를 더했다.


3.5.2. 무크타르의 반란(685~687년)[편집]


타와빈 세력에 밀려 난관에 봉착했던 무크타르의 모병 활동은 그의 예상대로 노쇠하고 군사적으로 미숙했던 술레이만이 이끈 참회자들의 반란이 시기상조의 실패로 귀결되자 힘을 얻었다. 쿠파의 유일한 쉬아 지도자로 남은 무크타르는 스스로 이븐 알 하나피야를 '마흐디'(구세주)라 선전하며 세력을 모았고, 위협을 느낀 주바이르파 총독 압둘라 빈 야지드는 그를 체포해 감금했다. 옥중에서 무크타르는 타와빈 잔당과 귀환한 리파아를 포섭했다. 685년 초엽, 재차 압둘라 빈 우마르[23]의 주선으로 반정부 활동을 자제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석방된 무크타르는 스스로 후세인 이븐 알리의 이복형제인 무함마드 빈 알리(이븐 알 하나피야)가 복수를 위해 보낸 사자라 선전하여 큰 호응을 얻었고, 그 결과 500명의 마왈리를 포함한 쉬아 세력 대부분이 그에게 합류했다. 이븐 알 하나피야가 실제로 무크타르에게 내린 지령은 없었지만, 격앙된 분위기를 이끄는 데는 충분했고, 하나피야도 자신의 이름을 차용한 것에 별 반발을 하지 않았다.[24]

특히 무크타르를 의심하던 일부 쉬아 당원들이 메카로 향하여 이븐 알 하나피야에게 해당 주장의 진위를 물었을 때 후자가

"누구든 하나님께서 선지자 가문의 복수를 위해 쓰시는 자에 대해 만족한다."

는 애매한 답을 내놓자 무크타르의 주장이 확인된 것이라 여겨 쿠파로 귀환한 후, 그에게 합류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휘하의 장수 말리크 알 아슈타르의 아들이자 나카이 부족장이었던 이브라힘 빈 알 아슈타르가 끝까지 이를 불신하자 무크타르는 (높은 확률로 위조된) 한 문서를 이븐 알 하나피야의 편지[25]라며 제시해 포섭하기도 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는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던 총독 압둘라 빈 야지드를 해임하고, 압둘라 빈 무티를 파견해 (예견된) 무크타르의 쉬아파 반란에 맞서게 했다.한 진영의 세 압둘라.. 한편 무크타르의 휘하 세력은 685년 10월 19일 목요일에 쿠파를 장악한다는 계획하에 봉기를 준비했고, 10월 17일 저녁, 횃불을 밝혀 신호로 삼았다.

이어진 무크타르군과 주바이르군간의 무력 충돌은 18일 저녁에 이르면 무크타르의 승리로 굳어졌다. 주바이르 조 총독 압둘라 빈 무티는 숨어들었다가 주바이르 정권과 완전히 척을 지지 않으려는 무크타르의 배려로 바스라로 도주할 수 있었다. 10월 19일 아침, 무크타르는 쿠파 대사원에서

'《성서》, 선지자의 순나, 선지자 가문에 대한 복수, 약자의 보호와 악자와의 전쟁'

에 기반한 쿠파 주민들의 충성 서약을 받으며 지도자에 올랐다. 이에 주바이르 정권으로부터 자립하려 하던 바스라 총독 압둘라 빈 하리스 등이 복속해왔다. 한편 세력의 양대 구성원인 아랍 부족 출신의 귀족층(아슈라프)과 마왈리를 상대할 때 무크타르는 양측를 평등히 대하려고 노력했다. 비록 시대적 한계로 아슈라프가 모술, 마다인 총독위 등 요직을 차지했으나 마왈리들도 2등 시민격으로 대우받으며 전리품과 녹봉을 받았고, 말을 소지할 수 있었다. 무크타르는 자신에게 가담한 마왈리는 누구나 해방될 것이라 선포했고, 이는 큰 호응으로 이어져 세력이 불어났다.[26]


3.5.2.1. 카지르 전투(686년)[편집]

상술한대로 우마이야 칼리파조는 우바이둘라에게 이라크 재정복을 일임했다. 다만 기존 병력으로는 역부족이라 여긴 그는 마르즈 라히트 전투에서 적이었던 이들을 포함한 시리아 일대의 부족들을 회유하여 군대를 모았다. 따라서 685년 초엽에 이르면 우바이둘라 휘하에 20,000명 가량의 병력이 준비되었고, 유프라테스 강변의 만비즈에 주둔했다. 그 무렵 우바이둘라의 부관 후세인 빈 누마이르가 동쪽으로 200km 떨어진 아인 알 와르다(라스 알 아인)에서 쉬아파 타와빈 군대를 괴멸시켰다. 얼마후 마르완 1세가 붕어할 무렵 우바이둘라는 라카에 주둔하고 있었다. 약 1년 가량 주파르 휘하 카이스 부족의 카르키시야를 포위하던 우바이둘라는 686년 여름,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의 이라크 진군 명령에 포위를 풀고, 쿠파인들이 지배하던 모술로 진군했다. 아브드 알 말리크 본인은 지원군과 함께 뒤따랐고, 우마이야군이 모술을 장악하자 무크타르 역시 야지드 빈 아나스에게 3,000명의 기병을 주어 맞서게 했다.

한편 685년부터 이라크 진군을 준비하던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는 686년 여름 우바이둘라와 후세인 빈 누마이르에게 무크타르 토벌군을 주어 진격하게 했고, 자신은 지원군과 함께 뒤따랐다. 우마이야군이 모술을 장악하고 남하하자, 7월 17일[27] 모술 부근에서 야지드 빈 아나스의 무크타르군이 두 차례에 걸쳐 우마이야군을 격파했다. 다만 도중에 병 혹은 부상을 얻은 그는 시리아인 포로 전원의 처형을 명령한 후 그날 밤 사망했다. 지휘관을 잃은 쿠파 군대는 우마이야군이 증원되자 철수했다. 그러자 쿠파에서는 전투에서 패배하고, 야지드 빈 아나스가 전사했다는 헛소문이 펴졌다. 이에 무크타르는 이브라힘 알 아슈타르 휘하의 7,000명의 지원군을 파견했다. 한편 무크타르의 친마왈리 정책에 반감을 품던 쿠파 귀족들은 핵심 전력이 부재한 틈을 타 주바이르측 무사압 빈 앗 주바이르의 선동하에 무크타르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앗아갔다며 거병하여 궁전을 포위했다.

무크타르와 그의 일당은 우리의 경건한 조상들을 외면했다. 그는 우리의 노예들과 마왈리들을 선동하여 징병했고, 그들에게 우리 세수의 일부를 주거나 약속함으로써 우리를 도적질했다.

ㅡ 쿠파의 아랍 귀족들, 반무크타르 봉기를 일으키며.

절박한 상황에서도 무크타르는 이브라힘에게 사태를 알려 소환할 수 있었고, 쿠파에서 출정한지 3일만에 귀환한 이브라힘은 쿠파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했다. 반대파를 숙청한 무크타르는 우마르 빈 사드, 쉬므르 빈 지자우샨 등 카르발라 전투에서 후세인 이븐 알리에 맞선 이들 대부분을 처형하며 쉬아파의 정통성을 다졌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간접적으로 가담했다며 부역자로 몰려 학살되었고,[28] 그 결과 10,000명에 달하는 주민들이 바스라로 도주했다. 이들의 집들은 파괴되었고, 따라서 무크타르는 더더욱 아랍 귀족('아슈라프')들과 척을 지며, 마왈리에 의존하게 되었다. (7월 말) 쿠파의 안정을 회복한 지 이틀 후 무크타르는 재차 이브라힘을 파견해 우바이둘라의 우마이야군 남하를 막게 했다. 시리아 아랍인들로 구성된 60,000명의 우마이야 군대는 대자브 강의 지류인 카지르 강가에서 복수에 목마른 마왈리들로 구성된 13,000명(혹은 20,000명)의 쿠파 군대와 조우했다.[29] 쿠파 군대는 비록 열세였지만 '알리의 의자'를 언약궤처럼 대동하는 등 사기가 높았다.[30]

이브라힘은 투파일 빈 라키트 휘하의 선발대를 파견해 모술 동쪽 24km의 카지르 강변에 위치한 바리타를 장악하게 했고, 이에 우바이둘라 역시 바리타로 향했다. 그날 밤, 우마이야측 카이스 부족군을 이끄는 우마이르 빈 알 후바브 앗 술라미가 몰래 이브라힘과 만나 전투 도중 그가 우마이야 측 좌익을 공격하면 전향할 것임을 밝히고 돌아갔다. 이브라힘은 밤새 보초를 세운 후 다음 날, 우마이야군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에 군대를 배치했다. 수피안 빈 야지드 알 아즈디가 우익, 알리 빈 말리크 알 주샤미가 좌익, 이복동생인 압둘라흐만 빈 압둘라가 기병, 투파일 빈 라키트가 보병을 맡았다. 이브라힘은 기병대와 함께 우익 쪽에 있었고, 기병 압둘라 빈 주하이르 앗 살룰리를 보내 우마이야 진영을 염탐하게 했다. 대화와 모욕을 교환하고 돌아온 살룰리가 우마이야군의 기강이 흐트러져 있다고 보고하자, 이브라힘은 병사들을 사열하며 '후세인 이븐 알리 살해자' 우바이둘라에 대한 지하드에 나설 것을 독려했다.

한편 우마이야군은 후세인 빈 누마이르가 우익, 우마이르 빈 알 후바브가 좌익, 슈라빌 빈 딜 칼라 알 힘야리가 기병, 우바이둘라가 보병을 지휘했다. 양측의 연설 이후 카지르 전투가 개시되자 후세인 빈 누마이르가 이끄는 우마이야군 우익은 쿠파군 좌익을 맹공하여 그 지휘관 알리 빈 말리크 알 주샤미를 전사시켰고, 뒤이어 그의 아들 쿠라와 호위대를 전사시켰다. 이로써 쿠파군의 좌익이 괴멸되었지만, 압둘라 비 와르카 앗 살룰리가 잔병을 수습하여 우익에 합류했다. 궁지에 몰린 이브라힘은 약속한대로 카이스 부족의 우마이르가 전향할 것을 기대하며 우익을 총동원하여 우마이야 측 좌익을 공격했지만, 우마이르가 약속과 달리 버티며 접전이 이어졌다. 우마이야 측 좌익 역시 건재하자 이브라힘은 도박을 하듯 적군을 분산시키려는 의도로 우마이야측 중앙에 대한 총공격을 지시했다. 여기서 이브라힘은 동료들과 함께 선봉에 서서 적군을 여럿 베어넘겼고, 양측 모두 큰 출혈을 겪은 끝에 우마이야군이 대패했다.

전세가 기울자 우마이르 빈 알 후바브가 이브라힘에게 연락하여 전향의 뜻을 밝혔는데, 이브라힘은 아군이 분노로 해칠 것을 염려하여 그에게 가만히 있도록 했다. 중앙이 무너지자 좌익과 우익이 분열된 우마이야군은 붕괴했고, ' 후세인 이븐 알리 살인자' 우바이둘라는 후퇴 도중 전사했다. 일설에 의하면 이브라힘이 직접 '그의 발이 동쪽, 팔이 서쪽에 있도록' 반으로 베어버렸다고 한다. 비슷한 무렵 쿠파 사람 샤리크 빈자디르 앗 타글라비가 후세인 빈 누마이르를 우바이둘라로 착각하고 죽였다고 한다. 그외에 슈라빌 빈 딜 칼라, 라비아 빈 알 무카리크 알 가나위 등 우마이야군 지도부 대부분이 전사했다. 대승한 쿠파 군대는 적진을 장악하고 패잔병을 추격했는데, 우마이야 군대의 전사자 중 대부분은 이때 카지르 강에서 익사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대승한 무크타르는 후세인 이븐 알리의 복수를 이루었고, 모술 일대를 확고히 장악했다. 그 총독은 당연히 승장 이브라힘이었다.

지원군을 이끌고 동진하던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는 카지르 전투의 패전보를 접하고는 회군하여 내부를 다지는 데에 주력했다. 여담으로 전투 날짜로 전해지는 8월 6일은 이슬람력으로 무하람 10일이다. 만약 날짜가 정확하다면, 카르발라 참극 후 정확히 6년만에 복수가 이루어진 것이다. 한편 바누 칼브가 중심인 우마이야 군대가 패배하자 자신감을 얻은 카이스 부족은 주파르와 우마이르의 연합으로 세력을 강화한 이후, 카지르 전투에서 살아남은 후마이드 빈 후라이트 휘하의 칼브 부족을 지속적으로 습격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중립이던 타글리브 부족까지 공격하여 타글리브 부족이 칼브 부족 등 예멘계에 합류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카지르 전투는 우마이야 칼리파조의 이라크 탈환을 4년이나 저지시켰다. 690년에야 아브드 알 말리크가 친히, 왕실 구성원들로 구성된 지도부와 함께 진격하여 마스킨 전투에서 무사압과 이브라힘을 전사시키고, 이라크에 대한 지배권을 재정립하게 된다.


3.5.2.2. 무크타르 vs 주바이르 왕조[편집]

파일:주바이르 이슬람.jpg

이란에서 발행된 주바이르 왕조의 디르함 은화

이라크의 쿠파를 장악한 685년부터 무크타르는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가 약속을 어겼다며 비판하면서도 협상에 나서기도 했다. 다만 주바이르 조에서 우마르 빈 압둘라흐만을 쿠파 총독으로 임명해 파견하자 무크타르는 항복을 거부하며 그에게 뇌물을 주고 위협하여 축출했다. 그리고 686년 카지르 전투 이후 우마이야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가 이라크 대신 아라비아 반도의 히자즈로 파병하자 (혹은 이를 지어낸) 무크타르는 원군 파병을 제안했고,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는 이를 수용하여 메디나 북쪽 와디 알 쿠라(알 울라)로 오도록 했다. 그러나 무크타르는 3,000명의 병력을 파견하며 그 지휘관 슈라빌 빈 와르스에게 별다른 고지가 없는 한 곧장 메디나를 점령하라는 밀명을 내렸다. 한편 무크타르를 완전히 믿지 않은 압둘라 빈 주바이르 역시 심복인 아바스 빈 사흘에게 2,000명의 정예병을 주고, 와디 알 쿠라로 보내어 영접하게 하면서, 그에게 만약 쿠파 군대가 불복한다면 죽이라고 지시했다.

와디 알 쿠라에서 실제로 쿠파 군대가 불복했기에 아바스 빈 사흘은 이들을 공격하여 대부분 살상했고, 잔병들은 사막으로 도주했다. 한편 쉬아측 기록은 무크타르에 보다 더 호의적이다. 무크타르보다도 늦게 원군을 보낸 압둘라 빈 주바이르가 전자가 승리할 경우, 그에게 메디나가 넘어가고 결국 본거지를 상실할 것이라 여겨 우마이야 군대와 쿠파 군대가 싸우는 동안 쿠파군의 후방을 치도록 했다는 것이다. 여하튼 결과적으로 무크타르가 보낸 '원군'은 괴멸되었다. 그후 무크타르는 (자신의 명목상 주군인) 이븐 알 하나피야에게 알리 가문을 위한 히자즈 장악이 실패했음을 알리고, 그가 주민들에게 무크타르가 자신의 사자임을 알린다면 재차 메디나로 파병할 의사를 밝혔다. 비록 이븐 알 하나피야는 유혈 충돌을 반대하며 이를 거부했지만, 히자즈에서의 쉬아파 봉기를 우려한 압둘라 빈 주바이르는 어쨋거나 그를 구금한 후, 강제로 충성 서약을 받아내어 무크타르 역시 뒤따르게 했다.

그러자 이븐 알 하나피야는 기존의 평화 노선을 버리고 무크타르에게 도움을 청했고, 무크타르는 4,000명의 정예병을 파견해 그를 구출하도록 했다. 다만 제2차 메디나 장악 시도 역시 실패했고, 4,000명의 구출군은 사막에 피신했던 잔병들을 수습하여 쿠파로 돌아갔다.[31] 일련의 충돌로 무크타르와 대립하게 된 압둘라 빈 주바이르는 동생 무사압을 바스라 총독으로 봉하며 무크타르 토벌을 지시했다.[32] 무크타르에 반기를 들었다가 실패한 샤바트 빈 리비, 무함마드 빈 알 아샤트 등의 쿠파 출신 아랍 귀족('아슈라프')들의 지지와 함께 무사압은 스스로를 '도살자'(알 자자르)라 칭하며 무크타르 토벌군을 편성했다. 바스라의 5대 부족들[33]을 중심으로, 본래 임지인 호라산으로 향하던 도중 바스라 유지들의 애청으로 남아 카와리지와 싸우던 무할랍 빈 아비 수프라 역시 무함마드 빈 알 아샤트의 강한 권유로[34] 소환되어 좌익을 맡았다. 마침 카지르 전투 이후 명성을 떨친 모술의 명장 이브라힘과 주군 무크타르 간의 관계가 틀어져 있었다.

무사압은 공격에 앞서 쿠파에 요원들을 잠입시켜 동조자를 모색하고 내분을 조장하게 했다. 이후 바스라-쿠파 혼성 병력을 이끌고 북상하자 무크타르는 쿠파 주민들을 모아 마다르(바스라 북쪽 65km 지점 티그리스강 하류에 위치)에서의 승리를 약속했다. 모술의 이브라힘이 무크타르의 서신에도 출정하지 않자 일부 병력이 쿠파로 돌아갔다. 아흐마르 빈 슈마이트가 이끌게 된 쿠파 군대의 우익은 압둘라 빈 카밀 앗 샤키리, 좌익은 압둘라 빈 와하브 알 주샤미, 보병은 카티르 빈 이스마일 알 킨디, 기병은 압둘 살룰리가 맡았다. 가장 열정적이던 마왈리 병력은 무크타르의 친위대장 아부 아므라 카이산이 지휘했다. 이들은 마다르에 도착해 주둔했고, 곧이어 무사압의 주바이르 대군도 당도했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 다민족으로 구성된 쿠파 진영에 재차 민족 갈등이 일었다. 본래 마왈리 병력은 좌익의 기병으로 배치되었는데, 그 상관 압둘라 빈 와하브가 마왈리 차별주의자였던 것이다.

그는 마왈리들이 나약하다며 전투시에 도망치지 못하도록 보병으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간 마왈리들이 보인 충성심을 보면 말도 안되는 궤변이었지만, 놀랍게도 지휘관 아흐마르 빈 슈마이트는 이를 수용하는 오판을 저질렀다. 따라서 마왈리들은 말을 빼앗기고 보병이 되었으며, 가뜩이나 수적 열세에 놓인 상황이 기병의 감소로 더욱 악화되었다. 상호간 항복 혹은 복속을 요구한 후, 수용되지 않자 양측은 마다르 전투를 개시했다. 주바이르 측 기병대가 먼저 공격했으나 격퇴되자 좌익의 무할랍이 나서 쿠파측 우익을 격파했다. 쿠파 측 좌익 역시 상대편의 공격에 무너졌고, 지휘관 아흐마르 빈 슈마이트가 전사했다. 기회를 잡은 무할랍은 휘하 기병들을 쿠파 측 보병들에 돌격시켰고, 후자는 도주했다. 이에 무사압은 무함마드 빈 알 아샤트가 이끄는 쿠파 출신 아랍 귀족들에게 기병들을 주며 도주하는 적들에 대한 복수를 지시했다.


3.5.2.3. 쿠파 공방전(687년)[편집]

신에 의해 노예(마왈리)들이 전례 없는 규모로 살해되었다.

ㅡ 무크타르, 패전보를 접한 이후.

마다르 전투는 주바이르 대군의 대승으로 귀결되었다. 쿠파 기병대 대부분이 도주한 것과 달리 대부분의 보병들은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고, 후자 역시 복수에 굶주린 쿠파 귀족 출신 망명자들에 의해 학살되었다. 또한 압둘라 빈 와하브의 의심과 달리 마왈리 부대는 가장 완강히 저항했고, 대장 아부 아므라 카이산을 위시로 하여 대부분이 장렬하게 전사했다. 패잔병들을 통해 결과가 알려지자 무크타르의 위상은 하락했고, 한 마왈리는

"이번에는 그가 거짓을 말했다."

고 회상했다. 한편 패잔병을 추격하며 북상하던 무사압은 속히 쿠파에 당도하기 위해 보병과 보급품을 배에 실어 유프라테스 강을 거슬러 올라가게 했다. (기병은 그대로 육상 진군) 이에 무크타르는 궁전을 요새화하며 물자를 축적햤고, 쿠파를 압둘라 빈 샷다드에게 맡긴 후, 남쪽 히라와 카디시야 사이의 앗 사일라힌으로 향하여 유프라테스 강에 댐을 세우고, 강물이 히라 및 카디시야 방면 수로로 빠지도록 했다.

따라서 물길이 끊긴 강이 진흙뻘로 변하여 선박이 그에 파묻히자, 무사압은 보병들에게 하선하여 진군하도록 하고는 기병대를 이끌고 댐을 파괴했다. 그후 진군을 지속하니 무크타르는 쿠파 남쪽 외곽의 하루라[35]에 진영을 세워 맞섰다. 곧이어 당도한 무사압은 무할랍에게 우익, 우마르 빈 우바이둘라 빈 마마르 앗 타이미에게 좌익, 무카틸 빈 미스마 알 바크리에게 보병의 지휘를 맡겼다. 무크타르는 술라임 빈 야지드 알 킨디에게 우익, 사이드 빈 문키드 알 함다니에게 좌익, 우마르 빈 압둘라 앗 나흐디에게 기병, 말리크 빈 아므르 앗 나흐디[36]에게 보병, 압둘라 빈 쿠라드 알 카타미에게 정예병인 '슈르타'를 맡겼다. 하루라 전투가 개시되자 무크타르는 선제 공격을 명령하고는 진영에 머물렀다. 쿠파 군대는 주바이르측 5대 바스라 부족들 중 바누 바크르, 압둘카이스, 아흘 알 지발을 격파하고 중심부로 진격했다. 그리고 이들은 고지대에 견고히 자리잡은 무사압과 마주했다.

위기의 상황에서 무사압은 당황하지 않고, 준비시킨 궁수들에게 사격을 명령하여 쿠파 군대의 기세를 꺾었고, 무할랍을 닥달해 소환하여 남은 타밈-아즈드 부족 병력을 이끌고 반격하게 했다. 오랜 전투로 지쳤고 예봉이 꺾인 쿠파 군대는 무할랍의 반격에 우마르 빈 압둘라, 말리크 빈 아므르, 사이드 빈 문키드, 술라임 빈 야지드 등의 지휘관들을 잃으며 붕괴했다. 사이드 빈 문키드와 술라임 빈 야지드는 각각 70명과 90명의 휘하 기병대와 함께 전사하여 쿠파 진영의 기동력이 약화되었다. 주바이르측에선 망명한 쿠파의 아랍 귀족 무함마드 빈 알 아샤트를 위시로 하여 그 휘하 기병 대부분이 전사했다. 슈르타 병력과 함께 버티던 무크타르는 결국 잔존 병력과 함께 앗 샤바트 대로를 따라 쿠파의 궁전으로 패주했다. 마왈리가 중심이 된 핵심 전력이 마다르 전투에서 궤멸되었기에 하루라 전투 역시 무사압의 승리로 귀결되었고, 그는 쿠파에 입성한 후, 무크타르와 주민들이 농성하는 궁전을 포위했다.

사기가 저하된 수비대가 제대로 싸우려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크타르의 강한 의지로 포위는 4개월간 지속되었다. 도중에 무크타르는 200명의 병력과 함께 습격에 나서 100명의 주바이르측 포위군을 격파하며 조금이나마 사기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포위가 장기화되자 무크타르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쿠파 주민들이 지지를 거두었고, 결국 65세의 무크타르는 17(혹은 19)명의 심복만을 거느린 채로 주바이르군 진영에 돌격하여 전사했다. (687년 4월 3일) 그 후 무사압은 쿠파 주민들에게 비무장 상태로 성문을 나오면 사면을 약속했고, 이에 주민들이 따랐다. 하지만 무함마드 빈 알 아슈라트의 아들 압둘라흐만 등 복수에 목마른 쿠파 귀족들의 압력을 못이긴 무사압은 약속을 깨고 항복한 이들에 대한 학살을 허가했다. 그 결과 총 700명의 아랍인과 수천 명의 페르시아인, 6,000명의 무크타르 동조자들이 무사압과 쿠파 귀족들에 의해 학살되었다고 한다. 무크타르의 부인들 중에선 우므라 빈트 누만이 남편에 대한 비판을 거부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37]

무사압은 무크타르의 손을 베어 쿠파 대사원의 벽에 걸었고, 나머지 시신은 불태웠다. 그 잔해는 훗날 수습되어 대사원 뒤편 무슬림 빈 아킬의 성소 내에 안장되었다. 얼마 후 모술의 무크타르군 장수 이브라힘이[38] 복속하면서[39] 무사압은 이라크 전역과 캅카스, 자지라, 이란 등 이슬람권 동부 전역을 관할하게 되었다.

한편 무크타르의 지지자들은 스스로 '알 무크타리야' 혹은 '알 카이사니야'로 불렀는데, 후자의 경우, 무크타르가 자신이 제4대 정통 칼리파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에게서 '카이산'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고 주장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무크타리야'('카이사니야')는 역사상 최초의 쉬아파 대반란으로 여겨진다. 일부 잔당은 니시비스를 중심으로 주바이르 조의 무사압에 맞서며 얼마간 세력을 이어나갔다. 다만 무크타르를 꺾었다고 주바이르 왕조가 우마이야 왕조를 제외한 유일한 세력으로 남은 것은 아니었다. 이란 남부와 아라비아 반도 동부에는 계속되는 내전을 틈타 세력을 확장하던 카와리지 세력이 큰 위협으로 등장하게 된다.


3.6. 카와리지의 준동[편집]


7세기 후반, 현재까지도 아라비아 반도 네즈드의 주요 부족인 바누 하니파에서는 두 명의 걸출한 카와리지파 지도자들이 나타났다. 먼저 680년, 불과 25세의 나즈다 빈 아미르는 카르발라 참극과 거의 동시에 거병하여 고향 야마마를 장악했다. 한편 이라크에서는 법학자 출신의 나피 빈 알 아즈라크가 지지자를 모으고 있었다. 두 사람은 683년 압둘라 빈 주바이르의 제1차 메카 방어전에 기병대를 이끌고 참전해 승리에 일조했다. 다만 칼리파를 칭한 압둘라 빈 주바이르와의 사이에서 우스만(제3대 정통 칼리파)의 살해를 두고 이견차가 나타나자[40] 나피와 나즈다는 성지 메카를 떠나 부족들 간에 내분이 벌어지던 바스라로 향했다. 나피는 임시 총독을 살해하고 도시를 장악한 후, 감옥에 있었던 카와리지파 동료 140명을 풀어주었다. 다만 얼마 후 압둘라 빈 주바이르가 우마르 빈 우바이둘라 빈 마마르를 바스라 총독으로 파견하자 주민들은 그에게 복속했다. 바스라에서 축출된 나피는 후제스탄의 아바즈로 거점을 옮긴 후, 바스라에 대한 잔혹한 습격을 가하여 보복했다.


3.6.1. 나즈다트 (685 ~ 693년)[41][편집]


한편 아바즈에서 나피와 의견 충돌을 벌인 나즈다는 자신의 세력과 함께 고향 야마마로 귀환했다. 다만 그가 부재한 동안 아부 탈루트 살림 빈 마타르가 야마마의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살림은 본래 하니파 부족의 소유였지만 무아위야 1세가 압수했던 인근의 자운 알 카다림을 점령하고, 그 농지와 4,000명의 노예를 동료들에게 분배했다. 그러자 685년 나즈다는 휘하 병력만을 대동하고 자발라에서 바스라에서 메카로 향하는 카라반 상단을 습격해 그 전리품을 자운 알 카다림의 동료들에게 나눠주고, (교리에 따라) 해방된 노예들을 계속 노동시키게 하여 생산량을 늘렸다. 그의 능력과 혜안을 인정한 야마마의 카와리지파 신도들은 나즈다를 새로운 지도자로 추대했고, 살림 역시 동의하며 퇴위했다. 이후 네즈드 지방의 카와리지파 세력은 '나즈다트'로 불리게 되었다. 나즈다는 곧바로 아라비아 반도 동부의 바누 카압을 공격해 둘 마자즈 전투에서 격파하고, 그들이 인근 시장에서 약탈한 곡물과 대추야자를 취했다.

686년 나즈다는 카와리지파를 거부하던 아불 카이스 부족을 공격했고, 아즈드 부족의 도움으로 카티프에서 많은 압둘 카이스 부족원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이후 나즈다는 카티프로 본거지를 옮기며 아라비아 반도 동부, 즉 바레인을 확고히 장악했다. 나즈다의 세력 확장으로 압둘라 빈 주바이르는 본거지인 성지 메카와 주요 거점인 바스라 간의 소통을 위협받게 되었다. 주바이르측 바스라 총독 함자는 압둘라 빈 우마이르 알 라이티 휘하 14,000명의 대군을 파견해 바레인 수복을 시도했으나 나즈다의 매복에 당하여 격퇴되었다.(686년) 승리 이후 나즈다는 부관 아티야 빈 알 아스와드를 오만으로 파견해 현지 부족장인 압바드 빈 압둘라 알 줄란디로부터 일대를 점령하게 했다. 아티야는 성공적으로 오만을 장악했고, 몇달 후 대리인 아불 카심을 두고 귀환했다. 다만 얼마 안가 압바드의 아들 사이드와 술레이만이 아불 카심을 죽이고 현지인들의 지지로 재차 오만에서 자립했다.

한편 나즈다가 전리품을 불공평하게 분배하고, 우마이야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와 연락을 취한 것을 이유로 그와 아티야 간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687년 아티야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이탈하여 시스탄으로 향하여 훗날 헬만드를 기반으로 한 '아타위야' 세력을 구축했다. 그에 상관없이 나즈다는 같은 해 현재의 쿠웨이트에 해당하는 카지마를 점령하고, 타밈 부족의 조공을 얻어냈다. 몇달 후 그는 예멘의 사나를 점령했고, 부관 아부 쿠다이크는 하드라마우트를 점령했다. 따라서 나즈다는 히자즈와 오만을 제외한 아라비아 반도 전역을 장악하고, 각지의 조공을 받게 되었다. 한편 우마이야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는 나즈다에게 지원과 충성 서약을 요구하며, 대가로 사면과 야마마 총독직을 제안했다. 이미 아라비아 반도 최대의 세력으로 부상한 나즈다는 이를 거절했지만, 외교 관계는 유지했다. 다만 아브드 알 말리크의 진의는 '나즈다트'에 내분을 초래할 목적이었다.[42]

687년 6월 나즈다는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핫즈 순례에 나섰는데, 주바이르 및 우마이야 측 인사들을 대동했다. 이는 나즈다가 두 지도자들과 동급이라는 것과 압둘라 빈 주바이르가 나즈다의 수도 메카 입성을 저지할 수도 없을만큼 무력하다는 것을 뜻했다고 한다. 순례를 마친 후 나즈다는 북상하여 메디나를 점령하려 했는데, 현지의 주비아르 수비대가 철저한 준비를 마쳤고, 그 지휘관인 압둘라 빈 우마르가 카와리지파 중에서도 명성이 높았던 것 등의 현실적 & 종교적 이유로 포기했다. 그는 대신 메카 주변의 타이프로 향하여 현지 지도자인 아미르 빈 우르와 앗 타카피의 복속을 얻어냈다. 뒤이어 타발라로 향한 나즈다는 알 하루크 알 하나피를 타이프-타발라-사라트 총독에 봉하고, 사드 앗 탈라이에게 나즈란의 힐랄 부족으로부터 조공을 징수하게 한 후, 카티프로 귀환했다. 그 곳에서 나즈다는 메카, 메디나로 향하는 식료품을 차단하여 압둘라 빈 주바이르를 압박하려 했으나 압둘라 빈 아바스의 간청에 중단했다.[43]

나즈다는 히자즈 해안을 제외한 전 아라비아 반도를 5년간 석권하며 위세를 떨쳤으나, 결국 내분으로 붕괴했다. 나즈다트 세력은 우마이야 칼리파조에 대하여 협상을 주장하는 온건파와 '찬탈자'들과의 싸움을 주장하는 급진파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다. 결국 불공정한 군대 봉급, 아브드 알 말리크와의 친교, 교리에 위배된 측근들에 대한 특별 대우 등은 군사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급진파 카와리지 인사들의 반발로 이어졌다. 결국 691년 나즈다는 카티프에서 하드라마우트 총독 아부 푸다이크에 의해 살해되었다. 뒤이어 '나즈다트'의 지도자가 된 아부 푸다이크는 692년 바스라에서 파견된 우마이야측 토벌군을 격퇴했으나 결국 693년 무샤하르 전투에서 대패했다. 이후 나즈다트는 사막의 외진 곳에 은둔하다가 10세기 카르마트가 준동할 때 흡수되거나 소멸했다. 한편 케르만 총독을 자처하던 헬만드의 아티야 역시 695년에 토벌당하여 발루치스탄으로 도주하던 중 사망했다.


3.6.2. 아즈라키야(684 ~ 699년)[44][편집]


파일:카타리 이슬람.jpg

690년경 '칼리파' 카타리가 발행한 디르함 은화[45]

자신의 영토외의 주민들에 대한 무자비함으로 유명했던 '아즈라키야'의 습격은 남부 이라크에 큰 피해를 입혔다. 바스라의 병력을 이끌던 타밈 부족장 알 아흐나프 빈 카이스는 수 차례 반격을 시도했으나 모두 패배했다. 연전연승을 거둔 나피는 예멘과 오만에서 온 카와리지파 신도들로부터 칼리파로 추대되었고, 그를 따르는 '아즈라키야' 세력은 30,000명에 이르렀다. 이를 기반으로 나피는 동쪽의 파르스와 케르만을 점령하며 이란 남부의 상당 부분을 장악했다. 절박해진 바스라 주민들의 마음을 대변하듯, 알 아흐나프 빈 카이스는 수비대와 총독 알 하리스 빈 아비 라비아 알 마크주미에게 당시 호라산 총독으로 부임하기 위해 일대를 지나던 명장 무할랍 빈 아비 수프라만이 '아즈라키야'에 맞설 수 있다고 호소했다. 무할랍이 제안을 거절하자 그들은 압둘라 빈 주바이르의 조서를 위조하여 대카와리지파 전선에 나서도록 했고, 바스라 군대의 충성심과 충분한 물자 확보에 만족한 무할랍은 결국 남기로 했다.

무할랍은 우선 티그리스 강 유역을 확보한 후, 685년 후제스탄으로 진격하여 실라브라(둘라브)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나피를 포함한 7,000명에 달하는 아즈라키야군이 전사했다. 후임 지도자로 선출된 우바이둘라 빈 알 마쿠즈 역시 바스라를 습격했으나, 재차 출병한 무할랍은 686년 두자일 운하 전투에서 그를 전사시켰다. 아즈라키야는 우바이둘라 빈 알 마쿠즈의 동생 주바이르 휘하에 뭉쳐 다시 습격에 나섰으나 실패했고, 이듬해 이란 중부의 이스파한을 공격하던 중 전사했다. '아즈라키야'는 흩어져 파르스와 케르만으로 도주했는데, 이라크에 부임한 무사압은 아바즈에 주둔하던 무할랍을 파르스 총독으로 봉하여 이들을 소탕하게 했다. 그럼에도 '아즈라키야'는 카타리 빈 알 푸자아 알 마지니[46]를 지도자로 선출했고, 그는 스스로 '아미르 알 무미닌'이라 선포하며 칼리파를 칭했다. 카타리는 아즈라키야 세력을 재편했고, 688년부터는 독자적인 화폐를 주조했다.

이렇게 조직을 체계화한 카타리는 687년 무할랍이 쿠파의 무크타르 원정에 차출되자 재차 아바즈를 장악하고, 바스라를 공격했다. 이에 무크타르 토벌 후, 모술 총독으로 있던 무할랍은 688년 재차 '아즈라키야' 전선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카타리의 뛰어난 방어전에 무할랍의 진격은 두자일 강에서 막혔고, 그렇게 대치가 이어지던 691년 우마이야군에 의해 무사압이 전사하자 무할랍은 병사들에게 승자인 우마이야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에 대한 충성을 서약시켰다. 우마이야 조의 신임 바스라 총독 칼리드 빈 압둘라는 무할랍을 해임했고, 대신 아바즈의 토지세를 걷게 했다. 그리고 칼리드 총독의 동생 압둘아지즈가 아즈라키야 전선을 맡게 되었으나, 곧 카타리에게 패배했다. 이 소식을 접한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는 칼리드 총독에게 서신을 보내 유능한 무할랍을 활용하지 않은 그를 다그쳤다. 주바이르 조를 멸한 후인 693년 아브드 알 말리크는 재차 무할랍에게 아즈라키야 전선을 일임했다.

다만 토벌군은 후제스탄 동부 람호르모즈에 이르러 바스라 총독 비쉬르 빈 마르완이 사망했다는 소식에 회군해버리는 등 오합지졸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던 694년 이라크 총독으로 부임한 핫자즈 빈 유수프의 대대적인 지원으로 무할랍은 재차 반격에 나섰다. 696년 3월 아즈라키야군은 이드 알 아드하에서 사부르를 공격했지만 격퇴되었고, 시라즈로 향하던 중 무할랍에게 패배하여 이스타크르로 피신했다. 몇달 간의 포위 끝에 아즈라키야군은 무할랍에 협조한 주민들을 응징한 후, 인근 베이자 마을에서 농성했다. 다만 무할랍이 다시 패배하자 카타리는 베이자 역시 포기하고 동쪽 케르만으로 향하여 험준한 지로프트에 새 거점을 마련했다. 이후 핫자즈는 아즈라키야 진영에 감사를 표한다는 서신과 사례금 명목의 돈을 보내었고, 이에 카타리가 독선적이라며 불만을 품고 있던 자들이 공개적으로 불신과 불복종을 드러냈다. (696년)

카타리는 다수의 의견에 따라 칼리파위를 포기했고, 숙고 끝에 알 무크타리 알 압디에게 지도자 자리를 넘겨주기로 했다. 그러나 이는 더 큰 분열로 이어졌다. 아즈라키야의 2/3을 차지하는 페르시아계 마왈리들은 아브드 랍비히 알 카비르와 아브드 랍비히 앗 사기르를 선출하여 각각 8,000명과 4,000명씩 세력을 이루었다. 남은 4,000명의 아랍인들은 여전히 카타리를 지지했다. 이들은 지로프트에서 충돌했고, 그 결과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랍비히 알 카비르는 후퇴했으며, 랍비히 앗 사기르가 전사하는 등 카타리가 승리했다. 그후 카타리는 추종자들과 우마이야 조의 지배력이 닿지 않는 타바리스탄으로 이동했고, 지로프트에 남은 랍비히 알 카비르는 칼리파를 칭했다. 이에 기존에 케르만에서 칼리파를 칭하던 아티야가 반발하여 반우마이야 연합 전선에서 이탈했고, 논쟁 끝에 랍비히 알 카비르는 아티야를 죽이고 말았다.

남은 '아타위야' 세력은 아즈라키야 진영을 이탈하며, 무할랍에게 사면을 청하고 귀순했다. 그는 이들을 수용한 후에도 직접적인 공격 대신 지로프트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적들의 자멸을 기다렸다. 랍비히 알 카비르는 수차례 포위를 돌파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기근에 시달린 끝에 그는 최후의 공격에 나섰고, 자신을 포함한 4,000명의 병력 전부가 전멸했다. 이때 무할랍은 철제 등자를 도입하여 기병의 능력을 극대화했고[47], 항복하는 자에 대한 관용을 베품[48]과 동시에 '해로운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은 모두 처형하여 효과적으로 케르만을 평정했다.[49] 한편 타바리스탄의 카타리 역시 수피안 빈 알 아브라드가 이끄는 시리아 기병대에 의해 토벌되었다. 카타리 본인은 골반을 다친 후, 바잠이라는 '마울라'에게 살해되었다. 우바이드가 이끄는 잔당이 쿠미스에서 농성했는데, 사면 혹은 처형의 선택지에 반응하지 않고 식량이 떨어지자 말을 잡아먹으며 버티다가 최후의 돌격으로 전멸했다.[50]


3.7. 호라산 전역[편집]


제4대 정통 칼리파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를 따르다가 무아위야 1세와 협상하여 우마이야 왕조의 동쪽 절반을 책임지게 된 지야드 빈 아비히에게는 아들이 여럿 있었다. 그중 우바이둘라는 부친에 이어 바스라 총독이 되어 제2차 피트나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다른 아들들 중에서는 압둘 라흐만이 호라산, 압바드가 시스탄 총독을 맡았다. 681년 이들은 각각 다른 형제들로 대체되어 살름이 호라산, 야지드가 시스탄 총독에 부임했다. 임지인 메르브로 향하며 살름은 바스라에서 2,000명의 정예병을 선발했다. 그중에는 아즈드 부족의 알 무할라브 빈 아비 수프라, 술라임 부족의 압둘라 빈 카짐, 쿠자아 부족의 탈하 빈 압둘라, 타밈 부족의 우마르 빈 우바이둘라 빈 마마르가 있었다.

호라산 총독으로서 살름은 트란스옥시아나를 원정하고, 내부를 안정시켜 큰 존경을 받았다.[51] 한편 시스탄의 야지드는 동부 아프간의 세력들과 맞섰는데, 특히 자불리스탄의 준빌과 카불리스탄의 샤히 정권이 그 대상이었다.준빌의 창건자 루트빌은 카불의 형 테긴 샤로부터 자립하기 위해 살름에게 복속하고 조공했다. 그러나 683년 야지드 1세의 사후 우마이야 칼리파조가 혼란에 빠지자 루트빌은 복속을 철회했다. 이에 시스탄 총독 야지드와 지휘관인 동생 아부 우바이다가 토벌에 나섰지만 전자는 전사하고 후자는 포로가 되는 대패를 당했다. 살름은 휘하의 탈하 빈 압둘라를 신임 총독으로 파견했고, 탈하는 협상하여 아부 우바이다를 석방시켰지만 곧 사망했다. (684년 말엽)

더욱이 호라산 전역은 바스라에서 유래한 무다르-라비아 계열 부족들 간의 내분에 휩쌓였고, 결국 통제에 실패한 살름은 가문의 본거지인 바스라로 향했다.(684년 여름) 다만 바스라에 당도하니 이미 주바이르 정권하에 있었기에 살름 역시 그에 복속했으나 메카로 압송되어 감금되었다.[52] 살름이 떠나며 후임으로 지목한 무다르계의 압둘라 빈 카짐 앗 술라미는 주바이르 정권에 복속했으나 내분은 계속되었다. 특히 라비아 계열의 부족들은 헤라트 등지에서 완강히 저항했고, 압둘라 빈 카짐은 호라산 아랍인들 중 주류인 타밈 부족의 도움을 받으며 이들에 맞섰다. 그러나 반란이 진압될 무렵 이번에는 타밈 부족이 반란을 일으켜 헤라트를 점령한 후, 압둘라 빈 카짐의 아들 무함마드를 죽이고 마루드로 진격했다.

다만 도중에 타밈 부족은 그들 스스로 내분을 겪어 해체되었고, 685년 말엽 주바이르 정권이 호라산으로 파견한 압둘 아지즈 빈 압둘라 빈 아미르가 부족들의 내분을 잠재우고 준빌을 공격해 재차 복속시켰다. 이로써 안정을 되찾은 호라산은 주바이르 정권이 멸망할 때까지 안정적인 자치를 유지했다. 692년, 주바이르 정권을 멸망시킨 우마이야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가 총독위를 대가로 복속을 요구했을 때도 압둘라 빈 카짐은 거부했다. 이에 아브드 알 말리크는 타밈 부족의 부카이르 빈 위샤 앗 사디에게 총독위를 대가로 반란을 일으키게 했고, 결국 압둘라 빈 카짐은 살해되어 그 수급이 수도 다마스쿠스로 보내졌다.


3.8. 소강 상태[편집]


  • 688년 기준 칼리파 주장 인물들[54]
    • 나즈다 빈 아미르(나즈다트)
    • 아브드 알 말리크(우마이야 조)
    •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주바이르 조)
    • 카타리 빈 알 푸자아 알 마지니(아즈라키야)
    • 무함마드 빈 알리 / 이븐 알 하나피야(카이사니야)[53]

687년 이라크 전역 이후 일종의 소강 상태가 도래했다. 이라크를 제패한 무사압은 부관 무할랍을 모술 총독에 봉하여 우마이야 조를 견제했다. 다만 무사압은 잔인함에 더하여 토지를 착복하는[55] 탐욕까지 있었기에 주민들의 원성을 샀다. 무사압에게 학살당한 이들의 유족들이 중심이 되어 탄원하자 압둘라 빈 주바이르는 그를 해임하고, 자신의 아들 함자를 이라크 총독으로 봉해 파견했으나, 이내 함자의 무능함이 드러나 무사압이 재임명되었다.[56] 한편 무크타르의 지배기부터 이라크 중부에는 쿠파 귀족 출신의 도적 우바이둘라 빈 알 후르 알 주피가 약탈을 일삼았다. 그는 무사압의 쿠파 포위전에 참전하는 등 초기에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나, 훗날 틀어져 다시 약탈에 나섰다. 수차례 토벌군을 격퇴한 우바이둘라는 티크리트를 장악하고 세금을 거두었다. 그러다가 1,500명의 토벌군과 싸운 후에는 재산과 함께 카스카르(미래의 와시트 부근)로 거점을 옮겼다.

그 곳을 거점으로 우바이둘라는 쿠파 부근에서 주바이르 군을 격파한 후 마다인을 점령했다. 사와드(이라크 중부)에 대한 지속적인 습격과 약탈에 나서던 그는 무사압에 맞서기 위해 절치부심하던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를 방문했다. 아브드 알 말리크는 우바이둘라에게 쿠파로 향하여 지지 세력을 모으게 했다. 안바르에 다다른 그는 쿠파에 병력을 파견했는데, 이에 무사압이 임명한 총독이 반격에 나섰다. 주바이르군의 역습에 반군은 도주했고, 홀로 남겨진 우바이둘라는 타고 있던 말이 익사하자 배를 타고 피신하다가 농민들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반란은 우마이야 왕조에 있어 이라크를 수복할 기회였지만, 아브드 알 말리크는 688년 동로마 제국군이 안티오크와 바르카(키레나이카)를 일시 점령하는 등 서부 전선에 치중해야 했기에 제대로 개입하지 못했다. 마침내 689년 그는 기존 연공을 지속하고, 동로마 제국과의 사이에서 키프로스 섬을 공동 지배하며 흑해 연안의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의 세금을 양분한다는 강화를 맺었다.


3.8.1. 대리전(~ 689년)[편집]


다만 이라크 방면에 아무런 군사 행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고, 아브드 알 말리크는 9촌 조카이자 홈스 총독인 아반 빈 알 왈리드에게 카르키시야를 거점으로 이라크 진군로를 교란하던 카이스 부족장 주파르를 공격하게 했다. 주파르는 주바이르 왕조에 복속하고, 무사압에게서 수조권을 얻어 바누 타글리브 등 친우마이야파 예멘계 부족들을 습격하고 있었다. 이라크 중북부 타르타르에서 타글리브 부족과 카이스 연맹 간의 대치가 이어지던 무렵, 아반 빈 알 왈리드의 우마이야 군대가 다가오자 주파르는 카르키시야로 후퇴했다. 다만 그의 부관인 술라임 부족장 우마이르 빈 알 후바브[57]는 남았다가 전사했고, 타글리브 부족에게서 후자의 수급을 받은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는 배신자의 말로라며 기뻐했다. 이에 주파르는 크게 슬퍼했지만 군사 행동은 삼갔는데, 우마이르의 동생 타밈과 자신의 아들 후다일 등이 카이스 연맹의 수장으로서 복수에 나서야 한다고 강권하여 출정했다.

주파르는 동생 아우스 빈 알 하리스에게 카르키시야를 맡기고, 후다일과 함께 타글리브 부족을 향해 출정했다. 그가 선발대로 파견한 무슬림 빈 라비아가 모술 부근에서 승리하자, 주파르는 티그리스 강변의 쿠하일 전투에서 타글리브 패잔병을 매복하여 격파했다. 원정 도중 사로잡힌 200명의 타글리브군 포로들은 처형되었다. 카르키시야로 귀환하면서 주파르는 마침내 아반 빈 알 왈리드의 우마이야군에 맞서 싸웠다. 그는 아들 중 하나를 잃는 등 패배했으나 무사히 카르키시야로 피신할 수 있었고, 그 험준함에 막힌 우마이야군은 철수했다.(689년) 한편 동로마와 휴전을 맺은 아브드 말리크는 같은 해 여름, 마침내 이라크 원정을 위해 킨나스린에 주둔했다. 이에 무사압은 티크리트 인근 바주마이라에 주둔하며 맞섰다. 아브드 알 말리크는 바스라의 바크르 부족장 말리크 빈 미스마와 연락해 포섭했고, 칼리드 빈 압둘라를 파견해 무사압의 후방을 교란시켰다.

칼리드는 바스라의 친우마이야파와 함께 봉기하여, 인근 주프라에서 압둘라 빈 주바이르에게 충성하는 우마르 빈 우바이둘라와 맞섰다. 양측의 충돌이 30여 일간 지속되자 바주마이라 진영의 무사압은 주흐르 빈 카이스 휘하 1,000명의 원군을 파견했다. 아브드 알 말리크 역시 무크타르의 쉬아파 반란 당시 무사압에게 동생을 잃은 쿠파인 귀족 우바이둘라 빈 지야드에게 원군을 주어 파견했다. 다만 양측의 지원군이 당도하기 전에 압둘라 진영이 우세를 점했고, 휴전 협상이 열렸다. 회담 결과 칼리드는 다마스쿠스로의 안전 귀환을 보장받았고, 부상당한 말리크 빈 미스마는 야마마로 도주했다. 한편 다마스쿠스에서는 자비야 회의의 결과와 달리 계승 서열에서 제외된 아므르 빈 사이드가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의 부재를 틈타 반란을 일으켰다. 칼브 부족장 후마이드 빈 후라이트의 지지를 받아 도시를 장악한 아므르는 칼리파 계승권을 주장했다. 이에 아브드 알 말리크는 원정을 포기하고 신속히 수도 다마스쿠스로 귀환했다.

아므르가 후마이드와 주하이르 빈 알 아브라드 휘하의 기병을 출전시키자 아브드 알 말리크는 후마이드의 사촌인 하산 빈 말리크와 주하이르의 동생 수피안에게 명령하여 맞서게 했다. 양측이 충돌하며 칼브 부족 간의 동족상잔이 수일간 이어진 후, 부족의 여인들이 아이들과 함께 나타나 후마이드와 수피안에게 우마이야 가문을 위해 서로 죽이지 말라고 간청했다.사비니 여인의 고사 그후 대치가 이어지던 중 후마이드는 마침내 수긍하며 다마스쿠스로 회군했다. 그러자 아브드 알 말리크는 도시를 포위했고, 이는 16일간 지속되었다. 마침내 그가 안전과 정치적 권리 보장을 조건으로 내걸며 회유하자, 아므르는 이를 수용하고 항복했다. 하지만 그의 야망을 경계한 아브드 알 말리크는 약속과 달리 손수 아므르를 처형했다. 다만 반란에 가담했던 후마이드와는 화해햤다.[58] 한편 아므르의 반란 진압 도중 후세인 빈 누마이르의 장교였던 핫자즈 빈 유수프가 활약하여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3.9. 제국의 역습[편집]


파일:피트나 이슬람.png
제2차 피트나의 주요 전장

한편 아므르가 일으킨 반란의 후속 조치를 위해 아브드 알 말리크가 다마스쿠스로 돌아가자 무사압 역시 바스라로 귀환하여 반란에 가담한 이들을 가혹하게 처벌했다. 그들은 모욕에 이어 각각 100대의 채찍질이 가해졌고, 머리카락과 수염이 깎인 후 작열하는 햇빛 아래에 3일간 놓였으며 강제로 이혼당했다. 이로써 쿠파 뿐만 아니라 바스라의 귀족들 역시 무사압을 싫어하게 되었다. 그러던 689년 말엽, 주바이르 왕조의 자지라 총독 무할랍이 카와리지파의 습격에 시달리던 바스라로 배치되었는데, 이로써 자지라 지역의 통제력이 약화되었다. 따라서 690년 여름, 아브드 알 말리크는 참모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차 북상했고, 무사압 역시 출정하여 각자의 전진 기지로 향했다. 다만 별다른 충돌은 없었고, 겨울이 되자 각자의 본진으로 돌아갔다. 691년 봄, 상황은 재개되었고, 아브드 알 말리크는 본격적인 이라크 진격에 앞서 두 차례의 토벌 시도에도 불구하고 굳건히 세력을 유지하던 카이스 부족의 주파르를 친히 공격했다.

카르키시야를 겹겹이 포위한 우마이야 대군은 40일간 투석기를 동원하여 성채를 포격했고, 바누 칼브 기병대가 공격에 나섰다. 하지만 여름 내내 이어진 공성전에도 주파르가 버텨내자 아브드 알 말리크는 협상에 나서 전자와 같은 카이스 계열인 장군 핫자즈 빈 유수프와 사상가 라자 빈 하이와를 사절로 파견했다.[59] 그들은 주파르에게 무슬림 다수가 인정하는 우마이야 칼리파에 가담해야 하며, 복종하면 보상이 있겠지만 저항하면 처벌될 것이라고 전했다. 주파르는 제안을 거절했으나 이번에도 아들 후다일이 설득했고, 아브드 알 말리크 역시 동생 압둘라흐만 무함마드[60]로 하여금 카이스 지도부에 대한 사면과 호의를 보이게 했다. 결국 주파르는 압둘라 빈 주바이르와의 서약을 지키기 위해 우마이야군에 가담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항복에 합의했다. 그럼에도 바누 칼브의 수뇌부는 조건이 건방지다며 아브드 알 말리크에게 수용하지 말 것을 주장하고, 카르키시야를 지속적으로 공격했다.

그에 따라 성벽 대부분이 무너졌으나 수비대의 기세가 꺾이지 않자 아브드 알 말리크는 주파르와 화해하며, 그의 조건을 수용했다.[61] 일족의 안전 보장과 그간 살상에 대한 면책을 대가로, 주파르는 아브드 알 말리크에 적대하지 않기로 약속했고, 아들 후다일에게 카이스 병력을 이끌고 이라크 원정에 참전하도록 했다. 주파르 본인은 남았지만, 자신의 딸 앗 라바브와 왕자 마슬라마를 결혼시키며 아브드 알 말리크와 사돈지간이 되는 방식으로 서약을 공고히했다. 새로 우마이야군에 가담한 카이스 부족에게는 상당한 양의 자금과 작위가 주어졌다. 이후 아브드 알 말리크는 니시비스로 진군했고, 그곳에 남아있던 2,000여 명의 카이사니야 세력 역시 항복하자 사면하여 자신의 편으로 삼았다. 가을 무렵 자지라를 평정한 아브드 알 말리크는 칼브-카이스 계로 구성된 시리아 군대를 이끌고 이라크로 진격했다. 무할랍의 차출 후 모술 총독으로 복귀했던 이브라힘은 바주마이라의 무사압과 합세했다.


3.9.1. 이라크 평정(691년)[편집]


아브드 알 말리크는 과거 무아위야 1세와 마찬가지로 이라크 중부의 마스킨에 주둔했다.(691년 10월) 우마이야군의 수뇌부는 전부 왕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압둘라흐만 무함마드가 선발대, 칼리드 빈 야지드가 좌익, 압둘라 빈 야지드가 우익을 지휘했다. 한편 바주마이라의 무사압은 진영 주위에 깊은 참호를 파고 수비를 강화했다. 요새화된 그의 진영은 9세기까지 잔존할 정도로[62] 견고했지만 내부의 불만이 팽배한 상태였다. 개다가 그의 정예 병력 역시 무할랍의 대카와리지파 전선에 차출되어 있었다. 결국 바스라 주민 대부분이 무사압을 따라 출정하지 않았고, 마지못해 출정한 이들 중에서도 라비아 부족 등 무사압의 가혹한 처벌에 치를 떨던 이들이 상당수 있었다. 바주마이라 진영의 주바이르군 대부분을 차지하던 쿠파 주민들 역시 이전의 학살에 대한 불만이 남아있었다. 내분을 감지한 마스킨 진영의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는 무아위야 1세처럼 포섭에 나섰다.

그는 무사압 진영의 부족 지도자들에게 서신을 보내어 이스파한 일대의 영지를 대가로 전향을 유도했다. 하지만 충성심을 잃지 않던 이브라힘 빈 알 아슈타르가 뜯지 않은 편지를 무사압에게 바치며, 다른 장교들 역시 서신을 받았는데 그에게서 숨기고 있다고 고하며 그들을 전부 처형하라고 간언했다. 하지만 무사압은 부족들의 반발을 우려하며 주저했고, 감금했다가 승리하면 석방하고 패배하면 죽이라는 조언 역시 듣지 않았다. 10월 중순 아브드 알 말리크와 무사압은 다이르 알 자탈리크에서 대치했다. 전자는 협상을 시도했으나 무사압은 단칼에 거절했다. 그후 이브라힘이 우마이야 진영으로 돌격하자 압둘라흐만 무함마드의 선발대가 후퇴했다. 하지만 아브드 알 말리크는 당황하지 않고 좌익과 우익에게 깊숙히 들어온 적을 양옆에서 포위하게 했으며, 선발대 역시 가세하자 전세가 역전되어 이브라힘과 무사압의 우익 지휘관 무슬림 빈 아므르 알 바힐리가 전사했다.[63]

전세가 기울자 적과 내통하던 무사압의 기병대장 아타브 빈 와르카가 휘하 병력과 함께 전장을 이탈했다. 남은 병력 역시 전투를 거부했고, 고립된 무사압에게 아브드 알 말리크는 재차 목숨을 살려주고 이라크 혹은 그가 원하는 어디든 총독으로 봉해줄 것이라 회유했다. 그러나 무사압은 재차 거부했고, 그의 아들 이사 역시 남은 병력과 함께 메카로 피신하라는 부친의 조언을 어기고 나아가 전사했다. 그러자 무사압 역시 적을 향해 돌격했고, 화살에 맞아 낙마했다. 그는 타키프 부족 출신의 병사 자이다 빈 쿠다마에 의해 살해당했다. 자이다 빈 쿠다마는 같은 부족 출신인 무크타르의 복수라 외치며 무사압의 몸을 두동강냈다. 무사압의 능력을 높히 사던 아브드 알 말리크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시인들에게 그의 영웅적인 죽음을 기리게 했다. 다이르 알 자탈리크 전투에서의 승전 이후 아브드 알 말리크는 쿠파에 입성하여 현지 부족들의 충성 서약을 받았고, 아바즈에서 카와리지파와 맞서던 무할랍을 복속시켰다.


3.9.2. 제2차 메카 공방전(692년)[편집]


쿠파에 입성한 직후 아브드 알 말리크는 핫자즈 빈 유수프에게 2,000명의 시리아군을 주어 아라비아 반도의 서부 히자즈로 파견했다. 그러면서 아브드 알 말리크는 협상을 통해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를 항복시키고 안전을 보장하여 성지 메카를 피로 더럽히지 말도록 했다. 다만 항복을 거부한다면 포위하도록 했다. 따라서 핫자즈는 곧바로 메카로 향하는 대신 고향인 타이프에 당도하여 주둔했다.(692년 1월) 그는 메카 동쪽의 아라파트 평원에 분견대를 파견하여 전초전에서 주바이르군을 격파했다. 한편 아브드 알 말리크는 자신의 마왈리 출신 장군 타리크 빈 아므르를 바스라 총독으로 봉했다가, 곧 생각을 바꾸어 핫자즈를 보조하도록 그에게 5,000명의 시리아군을 주어 히자즈로 파견했다. 타리크는 어렵지 않게 제2의 성지 메디나를 장악했다. 그리고 압둘라 빈 주바이르와 핫자즈와의 협상이 결렬되자 핫자즈는 아브드 알 말리크에게 지원군과 메카 공격 허가를 청했고, 아브드 알 말리크는 메디나의 타리크에게 핫자즈를 돕게 했다.

3월 25일 핫자즈는 메카를 포위했고, 1개월 후 타리크의 병력이 합세했다. 핫자즈는 메카의 보급로를 차단했고, 수비대만 10,000명이 넘었던 도시는 기근에 시달리게 되었다. 또한 핫자즈는 카바 북쪽에 위치한 아부 쿠바이스 산에 투석기를 설치하여 시내를 포격했다. 포위가 장기화되며 핫즈 순례 기간이 다가오자 알 핫자즈는 개인 자격의 순례자로서 입성 및 타와프(순례 중 카바를 도는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분노하여 카바에 대한 포격을 지시했다. 다만 그 직후 폭풍이 몰아치자 이를 천벌이라 여긴 병사들은 포격을 중단했다. 이에 핫자즈는 단순한 자연 현상이고 오히려 승리의 증표라며 포격을 지속하게 했다. 일설에 의하면 핫자즈는 압둘라 빈 주바이르가 개조한 카바 부분만 포격했다고 하지만 당대에 그러한 정밀 포격이 가능했을지는 의문이다. 결과적으로 카바의 벽에 균열이 갔고, 결국 전후에 전면 해체하여 재건하게 된다.[64]

여인의 품에서 난 이들 중 그보다 더 남자다운 이는 없었다.. (중략).. 그는 방어 참호, 요새, 거점도 없었지만 우리와 대등히 싸웠으며 직접 나섰을 때에는 심지어 우리를 압도하기도 했다.

ㅡ 타리크 빈 아므르,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의 주검 앞에서.

6개월간의 포위 끝에 핫자즈가 사면을 약속하자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의 아들 쿠바입과 함자를 비롯한 그의 지지자 대부분이 항복했다. 최후를 직감한 압둘라는 모친인 아스마 빈트 아비 바크르에게 핫자즈에게 항복할지의 여부를 여쭈었다. 그녀는 이미 그가 고령이었고, 많은 이들이 그를 위해 싸우다 죽었음을 상기시키며 끝까지 싸울 것을 조언했다. 그녀의 말에 따라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는 막내 아들과 압둘라 빈 무티[65] 등을 포함한 추종자들과 함께 우마이야군의 진영으로 돌격하여 카바 주변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692년 10월) 핫자즈는 그의 시신을 걸대에 효수했다가 아브드 알 말리크의 허가 후 모친 아스마에게 인도했다. 아들의 시신을 수습한 아스마 역시 며칠 후 약 10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66] 압둘라의 죽음과 함께 아라비아 반도의 히자즈,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서부 이란 등 이슬람권 주요부가 우마이야 세습 칼리파조의 기치하에 통일되면서 기나긴 제2차 피트나는 실질적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4. 전후[편집]


메카를 정복한 핫자즈는 히자즈 총독이 되어 카바를 예언자 무함마드 시대의 형태로 재건했고, 693년 순례를 이끌었다. 주바이르 왕조의 붕괴 이후 이븐 알 하나피야는 직접 제국의 수도 다마스쿠스로 향하여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에게 충성을 서약한 후, 700년에 메디나에서 사망할 때까지 천수를 누렸다. '카이사니야'는 그의 아들 아부 하쉼 압둘라를 새 이맘으로 섬겼다고 한다. 716년 그가 암살당하자 8촌인 무함마드 빈 알리 빈 압둘라를 선출했다. 후자는 비밀리에 하쉬미야 반란을 계획했고, 그의 아들들인 아부 압바스알 만수르가 아바스 혁명을 성공시켜 아바스 칼리파조를 개창했다.(제3차 피트나) 한편 주바이르 왕조의 멸망 후에도 카와리지파 세력은 여전히 극성이었다. 693년 '나즈다트'파, 695년 '아타위야'파, 698년 '아즈라키야'파가 토벌된 후에도 이란은 안정을 찾지 못했다. 동시에 691년에 평정된 이라크에서도 새로운 카와리지파 반란이 터지는 등 제2차 피트나의 후유증은 여전했다.

한편 689년경 호라산 총독 압둘라 빈 카짐의 아들 무사는 바드기스(현 아프간 북부)의 에프탈 군주 네자크 타르칸과 연합하여 테르메즈를 점령했다. 그곳을 바탕으로 연합군은 트란스옥시아나의 주둔군을 축출하고 일대를 장악했다. 다만 699~700년 무할랍의 원정으로 트란스옥시아나 남부에는 우마이야 칼리파조의 지배가 회복되었다. 702년 무할랍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야지드가 호라산 총독이 되었다. 야지드는 703년 바그디스에서 네자크 타르칸을 격파한 후, 704년 무사로부터 테르메즈를 빼앗았다. 우마이야 조에 복속했던 네자크 타르칸은 709년 토하리스탄의 야브구 등 현지 세력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으나 710년 핫자즈에 의해 파견된 쿠타이바 빈 무슬림에 의해 격파되었다. 네자크 타르칸은 사로잡혀 처형되었고, 야브구는 수도 다마스쿠스로 보내져 인질이 되었다. 이로써 토하리스탄이 정복되었고, 같은 해 부하라가 함락되면서 트란스옥시아나 정복이 완숙 단계로 접어들었다.


4.1. 수프리야 카와리지[편집]


684년 카와리지파의 주류가 나피와 나즈다를 따라 아바즈나 아라비아 반도로 이주했을 당시 그대로 바스라에 남은 이들이 있었다. 그 지도자인 지야드 빈 사파르와 압둘라 빈 이바드는 각각 수프리 종파와 이바디 종파의 시조가 되었다. 대체로 주바이르-우마이야 왕조의 지배에 순응하며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던 이들은 694년 핫자즈가 이라크 총독으로 부임한 후 반란에 나섰다. 먼저 타밈 부족 출신의 '수프리야' 지도자 살리흐 빈 무사리흐는 자지라 지방의 니시비스, 신자르, 다라 등지를 장악했으나 695년 9월 알 무답바즈 전투에서 전사했다. 뒤를 이은 바누 샤이반 출신의 샤비브 빈 야지드는 그해 봄 메카 순례에 나서며 같은 시기 순례 중이던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를 암살하려 시도했던 자였다. 샤비브는 나흐라완, 카나킨에서 우마이야군을 격파하고 200명의 정예병과 함께 쿠파를 공격했다. 696년 3월 그는 재차 루드바르, 알 바트에서 우마이야군의 장군 자이다 빈 쿠다마와 우스만 빈 카탄 알 하리티를 연거푸 격파했다.

마다인 총독이던 우스만 빈 카탄이 전사했고, 샤비브는 마다인에 대한 공세에 나섰다. 696년 여름, 3개월에 걸친 공방전 끝에 샤비브 휘하 600명의 '수프리야' 병력은 아타브 빈 와르카 앗 리야히를 격파하고, 마다인을 점령했다. 이에 수피안 빈 알 아브라드 알 칼비가 이끄는 수천 명의 시리아군이 파견되어 마다인 외곽에서 샤비브를 격파했다. 샤비브는 안바르로 후퇴하여 게릴라전에 나섰다가 잔여 병력과 함께 아바즈, 케르만 등을 주파하며 추격을 따돌리려 하다가 두자일 운하를 건너던 도중 익사했다.(697 혹은 698년)

이바디파는 우마이야-아바스 교체기인 제3차 피트나 때에야 군사적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한편 이라크인들은 시리아 병력에 대비한 이라크 병력에 대한 차별로 핫자즈에게 반감을 품게 되었다. 그러던 700년 무크타르와 샤비브의 반란 진압에 투입되었던 압둘라흐만 빈 무함마드[67]가 쿠파 병력과 함께 아프간의 준빌 원정에 투입되었는데, 핫자즈의 무리한 진격 요구를 거부하고, 회군하여 반란에 나섰다.


4.2. 압둘라흐만 빈 무함마드의 반란(701년)[편집]


본래 핫자즈에 국한되었던 반란은 전자에 대한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의 신뢰로 우마이야 제국 자체에 대한 반란이 되었다. 준빌과 동맹을 맺은 압둘라흐만은 이란 각지에 배치된 이라크 출신 병사들을 규합하여 서진했고, 이스타크르에 이르러 그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았다. 기록에 의하면 반란군은 120,000명의 보병과 33,000명의 기병으로 이루어진 대군이었기에 핫자즈는 다마스쿠스의 칼리파에게 원군을 청했다. 701년 1월 압둘라흐만은 후제스탄의 투스타르에 배치된 핫자즈의 선발대를 격파했고, 패배한 핫자즈는 바스라로 후퇴했다가 그곳을 지킬 수 없다고 여기며 다시 앗 자위야로 향했다. 2월 13일 바스라에 입성한 압둘라흐만은 앗 자위야 진영의 핫자즈와 전초전을 벌였고, 우세를 점했다. 3월 초엽 양측은 전면전에 나섰고, 압둘라흐만이 우세를 이어가는듯 했으나 수피안 빈 아브라드 휘하의 시리아군이 맹렬히 반격하여 결국 우마이야군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이에 압둘라흐만은 휘하 병력과 함께 쿠파로 철수했다.

당시 쿠파 성채는 마다인 출신 장교 마타르 빈 나지야가 장악하고 있었기에 압둘라흐만은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바스라에 남겨진 그의 하심 가문 출신 부관 압둘라흐만 빈 아바스는 주민들이 사면을 대가로 성문을 열어버리자 쿠파의 본진과 합류했다. 핫자즈는 사면 약속을 깨고 바스라에서 11,000명의 주민을 학살한 후, 4월 쿠파로 북상했다. 반란군의 기병대가 습격했지만 핫자즈의 토벌군은 유프라테스 강 동안의 다이르 쿠라에 진영을 세웠다. 압둘라흐만은 허세를 더하여 200,000명의 대군과 함께 출병하여 다이르 알 자마짐에 주둔했다. 양측은 참호를 파고 각자의 진영을 요새화하며 전초전을 벌였다.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는 증원군을 보내는 한편 동생 무함마드와 아들 압둘라 등의 사절을 보내어 압둘라흐만과의 협상을 시도했다. 칼리파는 핫자즈를 해임하고, 대신 그를 이라크 도시들 중 하나의 총독으로 봉하며 이라크/시리아군의 봉급을 공평히 주겠다고 제안했다.

압둘라흐만은 이를 수용하려 했으나, 쿠라 등의 과격파가 이로써 우마이야 왕조의 나약함이 드러났다며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100일간 48차례의 소규모 전투가 벌어진 끝에 9월, 양측은 재차 전면전에 나섰다. 전과 마찬가지로 압둘라흐만은 초반에 선전했지만, 시리아군의 반격에 격퇴되었다. 일몰 직전 반란군은 흩어졌고, 군대를 재정비하지 못한 압둘라흐만은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쿠파로 향하여 가족들에게 작별한 후 사라졌다. 쿠파에 입성한 핫자즈는 다수의 반란 가담자들을 처형했고, 동시에 복속하고 불신자였다고 자백한 이들은 사면했다. 한편 압둘라흐만은 반란군의 잔존 세력 중 우바이둘라 빈 사무라가 바스라, 무함마드 빈 사드 빈 아비 와카스가 마다인을 재점령하자 바스라로 향했다. 1개월간 쿠파에 머물며 병력을 재정비한 압둘라흐만은 두자일 강변의 마스킨에서 우마이야군과 조우했다. 2주간의 전초전 후 핫자즈는 반란군 진영을 전•후방 양편에서 공격해 격파했다.[68]

반군은 그야말로 전멸했고, 대부분 도주하려다가 강에 빠져 익사했다. 그후 압둘라흐만은 소수의 잔병들과 함께 이란을 횡단하여 시스탄으로 도주했다. 핫자즈는 우마라 빈 앗 타밈 알 라크미 휘하의 추격병을 파견했다. 우마라는 수스와 사부르(호라마바드 외곽)에서 두 차례 반란군을 따라잡았으나 섬멸하지 못했다. 천신만고 끝에 압둘라흐만은 자란즈에 당도했으나 지휘관('아밀')에게 입성을 거부당했고, 그후 옛 거점인 부스트(라쉬카르가)의 아밀에 의해 체포되었다. 다만 약속을 지킨 준빌 군대가 나타나 압둘라흐만을 석방시켰고, 영내로 데려가 호의를 베풀었다. 또한 그는 모여드는 패잔병들을 수습하여 60,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편성해 자란즈를 점령하고, 자신을 문전박대했던 아밀을 처벌했다. 다만 우마라의 토벌군이 다가오자 반란군은 호라산으로 향하여 세력을 모으고, 핫자즈나 아브드 알 말리크의 죽음을 기다리며 버틸 것을 주장했다.

압둘라흐만은 그에 승복하여 북상했으나, 도중에 2,000여 명의 병력이 이탈하자 자신을 따르려는 이들만 대동하고 자불리스탄으로 돌아왔다. 대부분의 반란군은 압둘라흐만 빈 아바스를 지도자로 삼아 호라산에 머물렀는데, 총독 야지드 빈 알 무할랍에 의해 격파되었다. 무할랍은 예멘계 병사들만 풀어주고 나머지는 핫자즈에게 보냈으며, 대부분 처형되었다.[69] 그동안 우마라는 항복 시 관용을 베풀며 시스탄을 평정했고, 압둘라흐만은 준빌에 의탁했다. 준빌을 자극하기 싫었던 핫자즈는 위협과 호의를 담은 서신들을 보내어 설득한 끝에 704년, 7~10년간 연공을 면제한다는 조건하에 그를 복속시켰다. 압둘라흐만은 병사 혹은 살해되었거나, 핫자즈에게 압송되기 위해 룩카즈 성채에 감금되어 있다가 간수를 쇠사슬로 연결해 동반 투신하여 자살했다고도 한다. 반란을 진압한 후 핫자즈는 이라크 동부에 병영 도시 와시트를 건설하고 시리아 군대를 배치했다. 그 후 이 일대는 20년가량 평화를 유지했다.


4.3. 오만 평정(8세기 초)[편집]


693년 아라비아 반도의 네즈드에 있었던 카와리지파 세력을 일소한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는 알 핫자즈에게 줄란드 가문의 오만에 대한 토벌을 명령했다. 알 핫자즈는 우선 사절을 파견하여 우마이야 조에 대한 복속과 자카트 납부를 요구했다. 사이드와 술레이만 형제가 이를 거부하자, 알 핫자즈는 우선 무사 빈 시난 빈 살마를 총독으로 파견했으나 격퇴되었다. 그러자 알 핫자즈는 타필 빈 후세인 알 바흐라니를 파견했고, 그는 오만을 일시적으로 장악하는 데 성공했으나 현지인들의 저항은 지속되었다. 알 핫자즈는 타필을 소환하고, 하집 빈 쉬바흐를 대신 파견했는데, 그럼에도 효과는 미미했다. 교착 상태가 계속되던 701년, 압둘라흐만 빈 무함마드의 반란을 진압한 알 핫자즈는 줄란드 가문을 일망타진할 목적으로 카심 빈 샤와흐 알 무자니 휘하의 정규군을 파견했다. 우마이야 함대가 하탓트에 상륙하자 술레이만은 기병을 이끌고 돌격하여 카심을 포함한 원정군 다수를 전사시켰다.(하탓트 전투)

분노한 알 핫자즈는 바스라 내의 아즈드 부족 지도부가 오만의 친척들을 돕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하며, 니자리 부족에 징병령을 내려 40,000명의 대군을 편성했다. 카심의 동생 무자아 빈 샤와흐 알 무자니가 이끄는 원정군은 20,000명씩 나뉘어 각각 해상과 육상으로 진군했다. 함대의 준비가 지연되었기에 말 혹은 낙타를 탄 기병이 먼저 오만에 당도했다. 이에 술레이만은 말에 탄 3,000명, 낙타에 탄 3,500명으로 구성된 기병으로 맞섰다. 여기서 술레이만은 다시 승리했다. 한편 줄파르에 상륙하려던 무자아는 육군의 패전보를 접하고는 줄파르 대신 무산담 반도를 돌아 소하르의 바티나 해안에 상륙했다. 육군에 맞서기 위해 술레이만이 줄란드 주력군 대부분을 데려갔기에 동생 사이드에게는 소수의 병력만이 남아있었다. 따라서 바크라 전투에서 무자아는 손쉽게 사이드를 격파했다. 대적할 수 없다고 여긴 사이드는 아크다르 산지로 피신했다.

무자아는 산중의 사이드를 포위했고, 술레이만은 형제를 구원하기 위해 남하했다. 도중에 술레이만은 무스카트 항구에 정박한 300척의 우마이야 함대를 공격, 그중 50척을 불태웠고 나머지는 열린 바다로 피신했다. 한편 포위를 풀고 하산한 무자아는 아크다르 산지와 무스카트 사이의 사마일에서 술레이만과 격돌했다(사마일 전투). 술레이만은 여기서도 승리했고, 패주한 무자아는 줄파르에 이르러 배에 올라 도주했다. 무자아의 지원 요청을 받은 알 핫자즈는 압둘라흐만 빈 술레이만에게 바디야 출신의 시리아 기병 5,000명을 주어 원군으로 파견했다. 우마이야군에 복무하는 바스라 출신 아즈드 부족원에게서 이를 전해들은 술레이만과 사이드는 더이상 원정군에 맞설 여력이 없다고 여겼다. 이어진 전투에서 형제는 용감히 싸웠으나 무자아에게 패배했고, 이후 가족과 측근들을 대동한 채 동아프리카로 피신하여 죽을 때까지 머물렀다고 한다.


5. 결론[편집]


  • 주바이르 칼리파조의 멸망 요인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의 반란은 무슬림 원로들에게 있어 초기 정통 칼리파들의 이상을 복원하는 이상주의적인 운동이었다. 일부 지지자들은 그를 마흐디로 추앙하며 메디나에서 메카의 카바로 피신한 것을 예언자 무함마드의 히즈라와 비견하기도 했다. 시리아를 포함한 대다수의 지역에서 지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바이르 왕조가 비교적 쉽게 무너진 이유는 압둘라의 칼리파위를 인정한 세력은 많았지만, 대부분 명목상의 지지에 그쳤고, 이들을 단일 체제하에 통합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684년 우마이야 칼리파조가 붕괴 직전의 위기에 봉착했음에도 그들의 본거지인 시리아로 진격하지 않고 내부 결속에만 치중한 것도 조기에 대내전에서 승리할 기회를 날려버린 우유부단함이었다. 결정적으로 아라비아 반도와 이란에서 준동한 카와리지파 때문에 총독들 간의 교통로가 단절되었고, 결국 우마이야 칼리파조에게 각개 격파당하게 되었다.

  • 우마이야 칼리파조의 중앙집권화
기나긴 대내전을 승리로 귀결시킨 우마이야 왕조는 이슬람권 전역에 대한 지배력을 회복했고, 칼리파 세습제를 정착시켰다. 또한 아브드 알 말리크는 기존 로마/사산 조의 화폐를 대신하는 디나르 화를 발행하고, 친족들을 고위직에 임명했으며, 아랍어를 공용어로 지정하는 등 대제국의 중앙집권화에 나섰다. 지방에 있어서는 이라크와 호라산을 중심으로 왕조에 충성하는 시리아 병력을 주둔시켰으며, 초기 이슬람 정복을 이끈 병사들의 후예들에게 주어지던 연금 등의 특권을 폐지하고, 현직 병사들에 대한 고정된 녹봉을 지급했다. 이로써 쿠파와 바스라를 중심으로 한 사하바 세력이 약화되었고, 우마이야 군대의 정예화로 이어졌다. 이후 우마이야군은 692년 세바스토폴리스 전투, 698년 카르타고 함락, 703년 타바라카 전투, 709년 부하라 함락, 711년 신드와 이베리아 반도 정복 등 연이어 승리하며 7세기 중반 이후, 재차 이슬람 정복에 나서며 우마이야 칼리파조의 최전성기를 열었다.

  • 아랍 부족주의의 심화
한편 제2차 피트나는 중세부터 근대까지 시리아와 자지라(메소포타미아 북부) 지방에서 지속된 북부 아랍(카이스 = 무다르)과 남부 아랍(예메니 = 칼브) 부족들 간의 분쟁을 야기했다. 마르즈 라히트 전투에서 시작된 분열은 카이스 부족이 결국 우마이야 왕조에 복속하며 일단락 되는 듯 했지만, 그 후 칼리파의 중재 시도에도 불구하고 상호간 보복이 이어졌다. 결국 740년대 우마이야 왕조의 내전때 각자가 다른 왕공들을 지지하며 양측의 분쟁은 재발했고, 우마이야-아바스 교체기인 제3차 피트나의 도화선 중 하나가 되어 우마이야 왕조의 멸망에 기여했다.

  • 이라크의 불만과 쉬아 / 마왈리 세력의 조직화
시리아와 자지라 외에 이라크 지역은 702년에 들어 평정되긴 했지만, 시리아군의 주둔에 대한 반발은 여전했고 세습적인 기득권을 상실한 쿠파의 귀족들은 반란이 일어날 때마다 그에 동조할 정도였다. 740년 자이디 반란을 시작으로 이라크에서는 끊임없이 병란이 일었고, 결국 749년 아바스 가문의 앗 사파흐가 쿠파에 입성하여 칼리파에 즉위하면서 우마이야 왕조의 지배가 종식되었다. 한편 카르발라 참극과 타와빈('참회자들'), 무크타르의 반란으로 조직화된 쉬아파 운동은 내전 후에도 이라크와 히자즈 지방에 잔존했다. 특히 무크타르에 의해 이슬람 정복 이후 처음으로 중임을 맡게 된 마왈리들은 '카이사니야', '하쉬미야' 운동을 거쳐 이맘직을 승계한 아바스 왕조를 지지했다. 그리고 마왈리 출신의 아부 무슬림은 호라산에서 아바시야 혁명을 이끌게 된다. 그외에 주바이르 왕조가 활용하고, 무크타르가 도입한 마흐디 개념은 향후 쉬아 이슬람에서 적극 활용되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0-18 12:57:54에 나무위키 2차 피트나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분파 - 아타위야 (687 ~ 695년)[2] 696 / 697년 분열[3] 이후 후세인, 압둘라 빈 우마르,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 등도 일어나 동조했다[4] 그 외에 671년, 50,000명의 쿠파 주민들을 동쪽 변방인 호라산메르브로 이주시켰다. 그 후손인 호라산 아랍인들은 70여년 후 제3차 피트나 당시 아바스 혁명군의 주축이 되었다.[5] 30년 휴전을 대가로 동로마 제국에 매년 금 15kg과 말 50마리, 노예 50명을 보내고, 에게 해의 섬들에서 철수하는 것이었다.[6] 시리아의 도시 마라트 알 누만의 건설자였으며, 안사르 중에서 처음으로 아부 바크르에게 충성 서약을 하여 이슬람 공동체('움마')의 분열을 막은 바쉬르 빈 사드의 아들이었다. 제1차 피트나 당시 무아위야 1세를 지지했고, 666년 압둘 라흐만 빈 칼리드 빈 알 왈리드의 사후, 홈스 총독이 되었다. 그의 두 딸들 중 아므라는 무크타르와 결혼했고, 그의 사후 남편에 대한 비난을 거부하며 죽음을 맞았다. 이에 동생 아반이 간수를 공격해 체포되었으나 그 용기를 가상히 여긴 무사압이 석방시켰다. 다른 딸 움무 아반은 훗날 알 핫자즈 빈 유수프와 결혼했다. 누만의 손자 압둘 사마드 빈 아반은 야지드 3세의 치세 때 쿠파의 부총독이 되었다.[7] 그 외에 카와리지 지도자 나즈다 빈 아미르 알 하나피 역시 칼리파를 칭했으나 아직까지는 큰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기에 제외함[8] 당시 메디나의 '슈르타'(치안유지군) 지휘관이었다.[9] 알 하라 전투 당시 활약한 병사가 있었는데, 훗날 우마이야 조의 동방 부왕이 되는 핫자즈 빈 유수프이다.[10] 또한 후세인은 시리아에서 통치할 것을 조건으로 걸었는데, 압둘라는 시리아 유지들을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고도 한다. 나중에 시리아의 여러 총독들이 충성 서약을 한 것을 알고는 땅을 치고 후회했을 듯[11] 또한 메카 공방전 도중 히자즈 쿠라이쉬 계열의 다른 칼리파 후보인 무사압 빈 압둘라흐만과 (사하바인) 알 미스와르 빈 마크라마가 전사 혹은 병사하면서 우마이야 가문이나 쉬아 세력 외에는 압둘라 빈 주바이르의 칼리파 주장에 반대할 사하바는 없게 되었다. 다만 무함마드 빈 알리(이븐 알 하나피야)와 사촌 압둘라 빈 아바스는 무슬림 사회 전반의 더 폭넓은 지지가 있어야 한다며 충성 서약을 보류했다. 이에 압둘라는 하심 가문 구역을 포위하고, 이븐 알 하나피야를 감금했다[12] 압둘라 빈 아바스를 비롯한 여러 주민들은 신의 징벌을 두려워하며 도시를 떠날 정도였다. 이들은 후에 카바의 잔존 부분이 허물어지고, 재건 공사가 시작되자 돌아와 이를 도왔다.[13] 흑석을 친히 옮긴 것은 예언자 무함마드 이후 그가 처음이었다. 한편 압둘라 빈 주바이르는 카바와 앞에 있는 반원형 구조물인 '하팀'을 이었다. 본래 아브라함이 아들 이스마일과 그 모친 하자르의 거주용 공간으로 마련한 하팀은 카바와 함께 이어져 있었다. 다만 605년 쿠라이쉬 부족이 카바를 보수할 때 석재를 충분히 구하지 못하여 하팀 부분은 낮은 벽으로 표시만 해두었다. 예언자 무함마드는 이를 다시 카바와 완전한 벽으로 이으려 했으나 행하지 못한채 죽었고, 이를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가 완수한 것이다. 그러나 우마이야 조가 692년 메카를 점령한 후, 다시 이전처럼 되돌리며 결국 현재까지 하팀은 카바 본 건물과 분리되어 있다[14] 다만 킨나스린의 카이스 부족은 이를 혐오했고, 부족장 주파르 빈 알 하리스 알 킬라비는 결국 사이드를 축출했다.[15] 앗 타바리에 의하면 우마이야군은 6,000명이었다고 하며, 다른 기록에는 13,000명 대 30,000명이었다고 한다. 이븐 카야트는 30,000명 대 60,000명이었다고 기록했다.[16] 그는 바누 칼브 출신의 아내 나일라와 함께 홈스를 떠나 도주하다가 보상을 노리고 추격해 온 수비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한편 나일라와 그 자녀들은 바누 칼브의 보호를 받았고, 딸들은 각각 무크타르와 알 핫자즈 빈 유수프와 결혼했다.[17] 시핀 전투에서 무아위야 1세측에 참전했고, 683년에는 1,000명의 병력과 함께 무슬림 빈 우크바의 알 하라 전투에 참전했다. 743년, 후바이쉬 빈 둘자의 손자 하캄 빈 주루, 라쉬드 빈 주루가 야지드 3세에 대한 무함마드 이븐 압둘말리크의 반란시에 요르단 부족 병력을 이끌었다. 이에 우마이야 왕공 술라이만 빈 히샴이 진압했다.[18] 영향력이 감소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산은 여전히 우마이야 왕조의 충신으로 남았고, 아브드 알 말리크가 아므르 빈 사이드 알 아쉬다크의 반란을 진압할 때도 참여했다.[19] 카와리지 세력도 있긴 했으나 중심지인 이집트-히자즈-시리아-이라크에서 멀고, 바스라에서도 주바이르 왕조에 축출되었기에 제외했다.[20] 히즈라가 있었던 622년 타이프에서 출생했다. 부친 아부 우바이다는 이슬람군을 이끌고 이라크 전선으로 향했다가 634년 11월, 다리 전투에서 전사했다. 남겨진 무크타르는 정복 이후 이라크에 머물며 숙부 사이드 빈 마수드에게 거두어져 길러졌다. 30대의 무크타르는 제4대 정통 칼리파 알리가 이라크의 쿠파로 천도하자 그의 휘하에 등용되었고, 숙부 사이드 빈 마수드는 마다인 태수가 되었다. 알리의 암살 이후, 사이드는 하산 이븐 알리카와리지의 자객에게 공격당해 부상당하자 돌봤는데, 이때 무크타르는 하산을 무아위야 1세에게 넘겨주고 이권을 챙길 것을 주장했으나 거절되었다. 그럼에도 알리에 대한 충성심은 여전했는지 기존 쿠파인들이 대거 이주당한 후에도 남은 무크타르는 알리 당파의 주요 인사들 중 한 명으로 떠올랐으며, 후세인 이븐 알리가 무슬림 빈 아킬을 보내자 그를 수용했다. 다만 도시를 떠나 있던 중 무슬림 빈 아킬이 때이른 봉기에 나서자 주변에서 지지자들을 모아 도우려했으나 쿠파 귀환 전에 진압되었다. 그 후 총독 우바이둘라에게 압송되었을 때 반란 가담 혐의를 부인했으나 수감당했다.[21] 무크타르의 잠재력을 두려워한 압둘라 빈 주바이르가 기존에 충성 서약을 받으며 약속한 지위(에 더하여 중대사의 결정에 있어 상의할 것)의 부여를 이행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정확히 말하면 초장에 압둘라가 제안을 거절하여 무크타르가 고향 타이프로 갔다가, 참모들의 설득을 압둘라가 결국 수용하여 메카에서 함께 싸웠는데, 전투 이후 오리발을 내민 것이다. 다른 설에 의하면 압둘라가 우마이야 조의 반격에 대비하기 위해 무크타르를 쿠파 총독으로 삼아 보냈다고도 하나 신빙성이 낮다. 오히려 압둘라에 복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쿠파에서 독립적인 지도자를 원하는 이들이 무크타르를 초청했다고도 한다.[22] 다마스쿠스와 카르발라의 대략적인 중간 지점[23] 함께 야지드 1세에게 대항했던 동료의 부탁이기에 후세인 이븐 알리의 복수를 천명한 주바이르 정권 역시 거절하기 힘들었다[24] 메카에 머물던 시기, 무크타르는 후세인 이븐 알리의 3남 알리 자인 알 아비딘에게 지지를 부탁했으나 거절당하자 그의 이복 숙부인 무함마드 빈 알리(이븐 알 하나피야)에게 접근했다. 후자는 승인도 거부도 안하며 단지 유혈 충돌의 자제를 부탁했다. 이를 암묵적인 동의로 여긴 무크타르는 자신이 그의 사자라는 프로파간다를 적극 활용한 것이다. 실제로 이븐 알 하나피야는 무크타르의 거병을 승인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이름을 빌리는 것을 묵과했다. 아마 사태를 관망했거나 인샬라형의 인물이었던 것 같다. 다만 무크타르 역시 이븐 알 하나피야를 경계하여, 그가 쿠파의 지지자들을 방문하려 하자 '참된 마흐디는 칼에 베여도 죽지 않는다'는 소문을 퍼뜨려 실제로 누군가 암살을 시도할 것을 우려한 하나피야가 방문을 취소하도록 했다.[25] 스스로 '마흐디'라 공표한 이븐 알 하나피야가 이브라힘에게 무크타르를 지지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 이브라힘은 이를 의심하면서도 결국 합류했다.[26] 무크타르의 친위대 역시 아부 아므라 카이산이 이끄는 마왈리들로 구성되었다. 이에 대해 아랍 귀족들이 불평하기도 했으나 이미 이라크 대부분과 서부 이란, 캅카스 일대를 장악한 무크타르의 권위에 복종했다.[27] 혹은 9-10일, 우바이둘라의 승리로 묘사되기도 함[28] 특히 마왈리들이 옛 주인들을 찾아내 '사냥'했다고 한다. 신분역전 공산화 이후 농촌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비슷한 모습[29] 다수를 차지하는 보병은 무크타르의 '슈르타' (정예병)로, 페르시아인 아부 아므라 카이산이 지휘했다. 우마이야군에서 전향해온 이들은 무크타르 진영에서 아랍어가 거의 들리지 않는 것에 놀랐다. 이브라힘 역시 자신의 군대가 페르시아 전사들과 귀족들의 자제들이라고 평가했다.(사산 제국이 멸망한지 불과 35년이 지났다.) 다만 기병들은 아랍인들을 다수 포함했고, 사령부도 대부분 아랍인이었다.[30] 이는 성유물처럼 활용하려는 무크타르의 발상 혹은 그가 사기 진작을 위해 허가한 것이라고 한다.[31] 그래도 이븐 알 하나피야가 풀려나는 성과가 있었다.[32] 기존 바스라 총독은 알 하리스 빈 아비 라비아 알 마크주미였다.[33] 바누 바크르는 말리크 빈 미스마 알 바크리, 압둘카이스는 말리크 빈 알 문디르, 아흘 알 지발은 카이스 빈 하이샴 앗 술라미, 아즈드는 지야드 빈 아므르 알 아타키, 바누 타밈은 알 아흐나프 빈 카이스. 그외에 좌익은 무할랍, 우익은 우마르 빈 우바이둘라 빈 마마르 앗 타이미, 보병은 압바드 빈 알 후세인 알 하바티가 맡았다.[34] 무사압에게 원정을 설득하며 자신은 무할랍 없이는 출정하지 않겠다고 했다고..[35] 657년 시핀 전투 당시 제4대 정통 칼리파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진영을 이탈한 주전파 카와리지들의 첫 거점이던 곳으로, 카와리지들은 초창기에 이곳의 지명을 본따 하루리야로 불렸다[36] 시핀 전투에 참전했던 베테랑[37] 다른 부인은 비판하고 목숨을 부지했다.[38] 우마이야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의 포섭 노력에 응하지 않고.[39] 다만 모술 총독으로 무할랍이 파견되었고, 이브라힘은 쿠파로 소환되었다가 688년 모술 총독으로 귀환했다.[40] 본래 압둘라 빈 주바이르는 카와리지와 마찬가지로 '라 후크마 일라 릴라'(하나님 외에 판단할 수 없다)라는 구호를 슬로건으로 삼았을 만큼 비슷한 성향을 보였다. 그러나 제1차 메카 방어전 이후 압둘라가 칼리파를 칭하자 틀어진 것이다.[41] 분파 - 아타위야 (687 ~ 695년)[42] 그는 일시적인 동맹을 얻는데 실패하더라도 나즈다와 지지자들 간의 불신을 초래할 목적이었음으로 소기의 성과를 얻은 셈이었다.[43] 아바스에게 패배한 이후로 그렇게 했다고도 한다.[44] 696 / 697년 분열[45] 카와리지파 신조인 '라 후큼 일라 알라'(판단은 하나님만이 하신다.)가 적혀 있다[46] 카타르 북부 알 쿠와이르 출신으로 '카타리'('카타르인')라는 말이 쓰인 가장 오래된 용례로 추정된다.[47] 기존의 목재 등자는 기사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부서지는 경우가 잦았다. 무할랍의 발상은 훗날 이슬람권 전역으로 퍼졌다.[48] 그들이 '해로운 신앙'을 포기할 시에 친척들로 하여금 부상자를 데려다 치료할 수 있게 해주었다.[49] 살해된 아즈라키야 병사들의 가족들은 승자들의 전리품이 되었다. 698년 핫자즈에게 소환되어 보고를 마친 무할랍은 아들 야지드를 총독으로 두고 퇴역했다.[50] 다만 일부 아즈라키야 세력은 시스탄 지방을 중심으로 남았으며, 사파르 왕조 시기에야 소멸되었다고 한다. 9세기 잔즈 반란을 주도한 알리 빈 무함마드 역시 아즈라키야에 속했다고도 한다[51] 그는 아무다리야 강을 건너 숙영한 첫 아랍 장군이었다. 그의 아내 움무 무함마드는 그 곳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소그디아나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앗 수그디'라 이름 지어졌다.[52] 그 후 살름은 압둘라 빈 주바이르에게 400만 디나르를 토해낸 후에야 석방되었고, 692년 우마이야군이 메카를 점령하자 사면되어 재차 호라산 총독에 봉해졌으나 임지로 향하던 중 바스라에서 병사했다.[53] 동시에 '마흐디'로 불림[54] 이 중 카타리를 제외한 4인은 688년의 순례를 이끔[55] 바스라 총독때부터 습지대에 둑을 쌓아 홍수를 막은 후 그 땅을 사유화했다.[56] 함자는 '나즈다트'로부터 바레인을 수복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이라크 지역의 세금을 메카의 국고로 전달하는 데도 실패했다. 이러한 군사적, 경제적 무능함에 분노한 압둘라 빈 주바이르는 그를 소환했고, 일설에 의하면 감금했다고 한다.[57] 카지르 전투에서 주바이르 측으로 전향했고, 전투 후 자지라(메소포타미아 북부)에 대한 우마이야 조의 지배력이 붕괴되자 바누 칼브를 공격해 사마와에서 1,000명에 가까운 이들을 학살했다.[58] 이후 그는 협상을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된다.[59] 라자 빈 하이와는 비록 예멘계 킨다 부족원이었으나 주파르와 혈연 관계였다.[60] 마르완 1세 때부터 자지라의 카이스 부족 견제를 맡고 있었다.[61] 한편 복수에 목마른 후마이드 휘하의 칼브 부족은 히자즈 원정시에 예멘-카이스 분쟁에 상관없이 메디나 부근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던 파자라 부족을 공격해 일부를 학살했다. 이에 가만히 있다 얻어맞은 파자라 부족이 반격하여 사마와에서 70여 명의 칼브 부족원을 죽였다.(693년)[62] '무사압의 카리바트(유적)'라 불리며 잔존했다고 한다.[63] 한편 무슬림 빈 아므르 알 바힐리는 부상을 입은 채 포로가 되어 죽었는데, 사망 직전 아브드 알 말리크로부터 아들 쿠타이바 빈 무슬림에 대한 사면을 얻어냈다. 쿠타이바는 훗날 우마이야 칼리파조의 장군으로 크게 활약했다.[64] 압둘라 빈 우마르의 요청으로 순례 중에나마 포격이 중단되었다고도 한다.[65] 메디나 반란을 주도한 후 잠깐동안 주바이르 왕조의 쿠파 총독을 역임했다.[66]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가 전사하고 10일 후.[67] 아부 부크르의 외조카이자 킨다 부족장이던 쿠파 귀족 무함마드 빈 알 아샤트의 아들이었다.[68] 목동의 안내에 따라 일부 군대로 하여금 습지대를 건너게한 후, 반란군의 후방에 나타나게 했다고 한다.[69] 핫자즈는 아랍인들은 대부분 사면한 반면 수천 명의 마왈리들과 주트(수메르 습지대 거주민)인들은 전부 처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