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스 비글리 피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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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피랍자 명단
3. 납치 이전 이들의 생애
4. 사건의 경위
5. 납치와 피살
6. 남은 인질 비글리의 운명
7. 관련 인물


1. 개요[편집]


2004년, 이라크에서 미국인 2명과 영국인 1명이 알 자르카위가 이끄는 일명 유일신과 성전 테러 단체한테 피랍 당한 사건. 본 항목에서는 케네스 비글리와 같이 피랍 당한 유진 암스트롱과 잭 헨슬리도 같이 서술한다.

2. 피랍자 명단[편집]


유진 암스트롱
Eugene Armstrong

출생
1952년 6월 5일
미시간 힐즈 데일
사망
2004년 9월 20일 (향년 54세)
이라크
직업
토목 기사

잭 헨슬리
Jack Hensley

파일:image644990.jpg

출생
1955년 9월 22일
노스캐롤라이나 헨더슨빌
사망
2004년 9월 21일 (향년 49세)
이라크
가족
부인 파티 헨슬리, 자녀 사라 헨슬리, 형제 자매 타이 헨슬리
직업
기술자

케네스 비글리
Kenneth John Bigley

파일:Bigleyandwife.jpg

출생
1942년 4월 22일
잉글랜드 리버풀
사망
2004년 10월 7일 (향년 62세)
이라크 바그다드
가족
母 릴 비글리, 부인 솜밧, 형 스탠, 동생 필립, 아들 크레이그 비글리, 남동생 폴
직업
BBC 현장 기자 및 기술자


3. 납치 이전 이들의 생애[편집]


유진 암스트롱은 미시간 주 출신으로 미국을 떠나서 중동 지역에 토목 기사로 일해왔다. 잭 헨슬리는 집안의 가장이자 부인인 파티 헨슬리와 자녀인 사라 헨슬리를 두고 있었으며 본토인 미국에서 여러 차례 사업이 실패한 후, 극심한 생활고를 겪다가 자신의 가족들이 경제 적으로 어려움과 가난함에 시달려서 어린 딸과 부인을 부양하기 위해 고심한 끝에 이라크에서의 건설 계약직을 택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내 파티 헨슬리는 이라크에서 일하는 남편이 심히 걱정이 돼서 그에게 전화를 걸어서 돈을 받지 않아도 상관 없으니 하루 빨리 미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돌아와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으나 잭 헨슬리는 괜찮다면서 자신의 가족들을 안심시켰다.

케네스 비글리는 이라크에 입국하기 전 까지 평범한 영국인들과 별 다를 거 없이 살았으며 직업은 기술자였다. 그는 아들 크레이그와 구디슨 파크를 찾아서 경기를 관람하는 것을 즐겼으며 뉴질랜드 호주에 회사를 차리기도 하는 등 전 세계적인 기술자 업무를 보았다.

그러나 그의 인생을 뒤바꾸는 비극이 찾아오고 마는 데, 그의 어린 아들 폴이 용돈을 은행에 입금하러 가던 길에 트럭에 치이는 사고를 당했다. 그의 어린 아들 폴은 회복 불능 상태에 빠졌고 비글리는 아들의 생명 유지 장치를 제거하는 데 동의해야만 하는 고통스러운 선택을 내려야만 했다. 참척의 고통에 시달리던 비글리는 생전에 두 번 결혼한 경험이 있는 데, 첫 번째 부인과는 파혼하게 되었고 태국인 아내인 솜밧과 재혼을 하였다. 먼저 떠난 어린 아들을 그리워하며 슬픔에 잠겨 폐인처럼 허송세월을 보냈다. 이를 보다 못한 비글리와 가장 사이가 좋았던 남동생인 폴은 그가 다시 일어나는 걸 돕기 위해 중동에서 기술자로 일해볼 것을 제안했다. 그는 중동에서 근무하며 그의 아내와 떨어져 있는 기간에도 매일 같이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행복한 노후 생활 계획을 세우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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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스 비글리와 그의 동료 잭 헨슬리와 같이 찍은 사진.
찍어준 사람은 유진 암스트롱으로 추정 된다.
비글리보다 앞서 중동 경험이 있던 폴과 그의 태국인 아내는 이라크는 서양인 근무자에겐 너무 위험하다며 비글리의 이라크행을 극구 만류했으나 비글리는 자신이 있게 될 곳은 미군의 보호를 받는 요새화된 완전 안전 지대이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 후로 비글리는 그의 미국인 동료 2명인 유진 암스트롱과 잭 헨슬리와 함께 외국인들이 그토록 꺼리는 이라크 땅을 밟게 되었다. 그들이 셋이서 함께 사는 자택은 바그다드 시내 한복판에 위치해 있었으며 미군이 아닌 이라크인 경호원들이 보안을 담당했다. 또한 비글리와 그의 미국인 동료들은 외국인이 아닌 이라크 현지인들과 부대 끼며 생활하게 되었다.

4. 사건의 경위[편집]


당시 이라크인들은 외국인 근무자들에 대한 반감을 품고 있었으며 그 이전에도 역시 같은 미국인이였던 닉 버그폴 존슨, 한국인 김선일이 참살 당하는 사건들이 벌어지는 형국이였다. 안 그래도 불안 했던 이라크 정세는 급격하게 악화되었고 닉 버그와 폴 존슨, 김선일 참수 사건 이후로 자신도 그 다음이 될 지 모른다는 패닉과 공포감에 수 많은 미군 관련 업무를 보던 외국인 근무자들이 계약을 파기하고 앞다투어 이라크를 떠나는 시기였다.[1]

유진 암스트롱과 잭 헨슬리라는 미국인 2명과 영국 국적인 케네스 비글리는 모두 같은 쿠웨이트 회사인 "Gulf Supplies and Commercial Services" 계약 직으로 건축 토목 기술자로 근무를 하고 있었다. 이 세 사람들은 당시 이라크 전쟁으로 피폐한 상황이었던 이라크의 재건을 돕기 위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라크 내에 있는 집을 따로 얻어서 3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는 데 만일에 일어날 테러 조직의 위협을 대비하기 위한 철저한 감시를 하는 경비원의 아래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자택을 감시하는 경비원이 테러 단체의 폭격을 맞을 듯한 위협 때문에 두려워서 떠나겠다고 선언하자 이들은 결국 자신들이 오히려 큰 위험에 노출 되었다. 이라크인 경호원들은 안전 보장이 되지 않아 더는 경호 업무를 볼 수 없으며, 당신들의 집은 지금 누군가한테 감시 당하는 것 같으니 당신들도 어서 빨리 이곳을 떠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살벌한 경고를 남기고 떠났다.

이후 암스트롱과 헨슬리, 비글리는 신변에 중대한 위협을 감지하고 이라크를 지금 떠나야 하는 지의 여부에 대한 심각한 논의를 하기 시작 했다. 케네스 비글리 역시 은퇴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하루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서 아내를 만나고 행복한 여생을 보내고 싶은 마음도 굴뚝 같았다.

그러나 그들이 고심한 끝에 도달한 결론은 이라크에 끝까지 남는 거였다. 왜냐하면 이들은 건설 계약도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고 도중에 고국으로 떠난다면 이라크에서 일했던 보수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 그들은 경비원이 떠나버린 텅 빈 자택에서 머물면서 9월 16일까지 계속 일을 하면서 살고 있었으며 경비가 허술해버린 자택에서 살던 그들은 결국 유일신과 성전의 대원들이 자택에 쳐들어와서 납치 당하고 만다.

5. 납치와 피살[편집]


유일신과 성전은 세 사람을 모두 인질로 붙잡고 48시간 안에 미군들과 동맹군이 억류하고 있는 이라크인 여성 포로들을 석방 해주지 않으면 이들을 모두 살해하겠다고 밝혔다. 협박 영상에서 그들은 지하드 현수막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고 사복을 입은 채로 눈가리개를 씌우고 있으며 테러범들이 잭 헨슬리의 머리 옆에 총을 겨누면서 유언을 남기게 하는 영상을 공개 했다.

잭 헨슬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협박 영상에서 "내 이름은 잭 헨슬리입니다. 타지 지역의 캠프 공사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라고 유언을 남겼다. 잭 헨슬리의 부인인 파티 헨슬리도 방송에서 남편의 구명을 호소하면서 내 딸도 아버지가 무사히 살아서 돌아오길 바라고 있으며, 그를 데려올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말을 전했다. 또한 내 남편은 진심으로 이라크인들을 도와주기 위해 간 것이며 테러범들이 절대로 그를 해쳐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케네스 비글리 역시 헨슬리와 비슷하게 두려워하는 목소리로 "제 이름은... 케네스 존 비글리 입니다. 그리고 제 일은 미군의 타지 캠프를 건설하고 정비하는 일입니다." 라는 유언을 남겼다.

실제로 시한이 만료 된 직후 유진 암스트롱은 끝내 결국 참수 당했고, 잭 헨슬리도 그 다음 날 24시간 안에 참수 당했다.

유일신과 성전 대원들은 유진 암스트롱과 잭 헨슬리를 참수 하기 직전 둘 모두 눈가리개와 오렌지색 죄수복을 씌우게 하고 성명문 내용으로 미국의 점령자들이 이라크에서 노인과 아이, 남녀를 구분치 않고 마구 도살하고 있다면서 미국과 영국이 동맹군에 의해 억류 중인 모든 이라크 여성 수감자들을 석방하라는 요구를 계속 무시한다면 24시간 내로 다른 인질들도 살해하겠다고 했으며, 닉 버그 사건과도 비슷하게 조지 워커 부시 대통령을 "개" 라고 모독하면서 "너희가 삶을 사랑하듯, 죽음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여기 있으며 그들은 신을 위해 살인하는 것을 최대 소망으로 삼는다"라고 낭독 했다. 그리고 유일신과 성전의 수장인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로 추정 되는 인물이 암스트롱과 헨슬리에게 직접 참수를 시행 하였으며, 유진 암스트롱과 잭 헨슬리를 참수하는 영상물을 인터넷 웹 사이트에도 공개 하였다.

암스트롱의 본 고향인 미국 미시간 주 힐사이드에서 그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한 장례식이 열렸으며 참석한 주민들이 그의 죽음에 슬퍼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위로를 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잭 헨슬리 역시 피살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헨슬리의 유가족들이 오열하면서 암스트롱과 헨슬리의 시신은 유가족들한테 전달 되었다는 보고 연락을 받았고 그들의 시신은 고국에 안장 되었다.

6. 남은 인질 비글리의 운명[편집]


자신의 동료들이었던 암스트롱과 헨슬리가 무참히 살해된 후에는 절망에 빠졌으며 그 다음은 비글리 자신 차례일 것이라는 극심한 공포에 빠졌다. 영국 정부와 언론은 비글리의 운명을 달면서 그를 최대한 구출하기 위해 영국의 주요 정치 이슈로 바꾸면서 신속하게 인질 협상에 대응 하였다. 케네스 비글리는 마지막으로 공개 된 호소 영상에서 블레어 총리한테 죽고 싶지 않다면서 구명을 호소하고 "저를 구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블레어 총리... 당신 밖에 없습니다." 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절규하는 영상이 공개 되었다. 그의 아내인 태국인 아내 솜밧 역시 남편의 석방을 눈물로 호소하고 무사 생환을 간절하게 기도 했다. 고국의 가족들도 비글리의 석방을 호소하는 성명문을 냈다. 영국 각지에서도 비글리의 무사 생환을 기도하는 촛불 집회가 열렸다. 이라크의 미군들도 비글리의 위치를 파악하고 구출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으며 이라크 저항 세력들 중 일부는 케네스의 납치가 정당하지 않다며 그의 석방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 사이에 비글리가 유일신과 성전에서 돈을 노리는 온건한 무장 집단으로 넘겨졌다든가, 곧 비글리가 석방될 것이라든가, 특정 여성 죄수가 석방될 것이라든가, 근거 없는 소문들이 떠돌아다니면서 비글리의 생환을 애타게 바라는 유 가족들은 희망 고문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러나 무사 생환에도 불구하고, 케네스 비글리 역시 동료들과 똑같은 운명을 맞이하면서 참수를 당했다. 유일신과 성전은 철장 안에 들어가서 포박 되어 있는 비글리의 모습이 담겨져있는 영상을 공개했으며, 테러범들한테 구타나 잔혹 행위를 당한 흔적들도 보인다.

케네스 비글리는 끝내 자신을 구출하지 못한 영국 정부에게 한이 맺힌 원망을 하면서 토니 블레이 총리에게 "그는 거짓말을 했다. 그는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라면서 저격을 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비글리의 유언이 끝난 직 후에는 유일신과 성전 대원들이 성명문을 낭독하면서 "시한을 넘겨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누이들이 석방되지 않아 이 인질에게 신의 형벌을 집행 하겠다. 영국 정부는 그들의 국민의 목숨을 별로 심각하게 여기는 것 같지가 않다. 이 사악한 영국인에게 돌아갈 것은 칼 뿐이다." 라고 하면서 주저 앉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그에게 참수를 시행 한다.

비글리 마저 참수 당했다는 소식에 영국 전역은 경악에 빠졌으며 비글리의 가족들도 그 동안의 노력과 눈물의 호소가 모두 무시 당했다는 사실에 극심한 슬픔과 분노를 느꼈다. 케네스 비글리의 어머니 릴 비글리는 충격으로 인해 실신 하였다. 비글리의 형제는 "그들은 우리를 완전히 갖고 놀았다. 케네스 비글리가 죽은 방식도 끔찍하지만 우리가 제일 몸서리 쳐지는 건 그들이 우리와 케네스의 희망을 갖고 놀았다는 점이다."라며 분노를 드러냈다. 비글리의 고향인 리버풀에서는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합동 기자 회견이 열렸다.

그러나 암스트롱과 헨슬리와는 달리 비글리의 시신은 현재까지도 발견 되지 않았다.

7. 관련 인물[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3 21:58:41에 나무위키 케네스 비글리 피살 사건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그러나 이라크에서의 일 자리는 보수가 매우 높았기 때문에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이라크를 찾아오는 외국인 근무자들의 비율 역시 적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