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다 쇼세이 이라크 피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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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희생자의 신상
2. 개요
3. 사건 이전의 생애
4. 사건의 경위
4.1. 피랍
4.2. 피랍 이후
4.3. 사후
5. 다른 나라의 사건들과의 비교
6. 여담


イラク日本人人質事件(にほんじんひとじちじけん
イラク日本人青年殺害事件(にほんじんせいねんさつがいじけん

2004년 10월유일신과 성전에 의해 일본인 여행객인 코다 쇼세이가 납치된 후에 피살된 사건이다.


1. 희생자의 신상[편집]


'''{{{+2
코다 쇼세이'''
香田 証生 |Shosei Ko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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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79년 11월 29일
일본 후쿠오카현 노가타시
사망
2004년 10월 29일 (향년 24세)
이라크 바그다드
가족
父 코다 마스미, 母 코다 세츠코, 兄 코다 마키
종교
기독교[1] (개신교, 일본기독교단)




2. 개요[편집]


"고이즈미씨, 그들은 자위대이라크에서 철수하기를 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 목을 베겠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2]

[3]


유일신과 성전이라는 테러 조직에게 붙잡혀 참살 당한 최초의 일본인 희생자. 미국의 닉 버그의 참살, 한국의 김선일의 참살 이후, 피살당한 일본인 피해자이나 오히려 일본 사회의 여론에서는 반감과 분노를 불러 일으킨 사건이기도 하다.


3. 사건 이전의 생애[편집]


코다 쇼세이의 고등학교 졸업 사진과 그의 생전 당시 사진
일본의 평범한 기독교 집안 출신으로,[4] 그는 규슈의 북단 노가타시에서 태어나 자라났다. 코다 쇼세이는 재학 중 취업을 전전하기 위해, 고등학교를 중퇴한 신분이었다. 이후 유학 및 취업을 목적으로 해외인 뉴질랜드로 떠나서 이적하게 되는데, 참고로 이 당시 그를 기억하던 한국인 유학생들도 일부 있었다고 한다. 그 후, 또 얼마 안 가 비슷한 목적으로 이스라엘에 정착했다.[5] 학창 시절의 이야기에 따르면 학교 생활에 부적응적인 경향을 보이거나, 공부를 지지리 못하는 등, 그러한 흔적들은 발견되지 않았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평범한 학생 정도로만 기억했다고 한다.

그는 자국인 일본을 떠나서 워킹 홀리데이 제도를 이용해서 뉴질랜드에도 정착했고, 해외의 여러 국가들을 마음대로 여행하면서 관광도 해볼 겸 견문도 쌓아나가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식으로 여행 비용을 모아두며 생업을 유지해왔다. 그 당시 국제 정세에 의하면, 2003년에 이라크 전쟁이 종결되었지만, 후세인의 잔당과 알 카에다 같은 테러리스트가 이라크 내부에서 말썽을 부리면서 혼란은 계속된 상태였다. 이에 고이즈미 총리는 이라크 특조법을 정하여 자위대를 파견하는 등 이라크 부흥 지원 정책을 실시하였지만, 얼마 뒤 이라크에서 일본인 외교관 피살 사건[6]이라는 통수를 맞으면서 일본 국민들도 당연히 충격에 빠지며 중동에 대한 경계심까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도 일본인 남녀 3명이 이라크 무장 단체한테 피랍 당한 적이 있었지만 풀려나는 등, 테러 단체의 인질 극은 여전히 계속 된 상태였다. 더욱이 일전에 유일신과 성전에 의해 미국인 닉 버그에다 한국인 김선일 또한 살해 당했고, 미국인 폴 존슨과 영국인 케네스 비글리, 미국인 엔지니어 유진 암스트롱과 잭 헨슬리 그들도 모두 이라크에서 살해 당했기에 잘못하면 외국의 희생자들이 더 추가될 지도 모르는 판국이기도 했다.

4. 사건의 경위[편집]


그러나 그는 한편, 이스라엘에서 멀쩡히 머무르고 있다가 돌발적으로 이라크로 향하겠다는 선언을 하였고,[7] 결국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요르단을 거쳐 이라크로 향했다. 요르단 마을의 사람들도 그가 이라크로 갈려고 하는 행동을 말렸으나 옹고집으로 인해 포기하였다고 한다. [8]

요르단에서 버스를 통해 바그다드로 도착한 코다 쇼세이는 100달러 (10만 원)밖에 없었다. 당시 테러리스트+외국인에 대해서 반감과 겁이 있던 이라크의 숙소들은 100달러밖에 안 들고 온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그는 길거리에서 노숙을 단행하다가 납치 당하고 마는데, 하필 납치된 곳이 유일신과 성전이었다.[9]

4.1. 피랍[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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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수 직전의 코다 쇼세이

코다 쇼세이를 잡은 유일신과 성전은 지난번에도 그랬듯이, 협박 영상을 [10][11] 인터넷 상에서 내보내며 인질 극을 벌이기 시작했다. 요구 내용은 48시간 이내로 자위대를 철수시킬 것. 이는 일전에 한국의 김선일 사건과의 요구한 내용과도 상당히 비슷했다. 협박 영상에는 코다 쇼세이 본인이 요구 내용을 들어줄 것을 요청하는 장면도 있었는데, 절규를 지르던 김선일과는 달리, 충격에 빠진 국민들과 총리에게 사과를 시작으로 담담한 말투로 요청하는 태도였다고... [12] 이러한 배경은 아랫부분을 참고할 것.


4.2. 피랍 이후[편집]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본 정부의 대답은 단호하게 거절이었다. 고이즈미 총리는 "본국 소환은 없다"라는 말로 단언했으며, "협상은 없다"는 자세로 일관하였다. 그렇게까지 일본 국민들 대다수는 인질 구출에 부정적인 반응이였고 코다 쇼세이의 어머니 마저 아들의 구출을 포기하고 만다. 물론 적극적으로 나서봐야 자위대 피해만 커질 게 뻔했던 점도 있긴 하지만.

4.3. 사후[편집]


결국엔 48시간이 만료되어 협상은 결렬되었고, 유일신과 성전은 경고대로 코다 쇼세이를 참살했다. 당시 그의 나이 만 24세. 2004년 10월 31일 새벽에 동양인으로 추정되는 목 없는 시신이 먼저 발견되었고, 다음 날 코다 쇼세이의 참수를 집행하는 영상이 공개되었다. 영상에서 유일신과 성전은 알 카에다 조직으로의 편입을 선포하고 이놈은 일본 정부의 미온한 태도로 죽은 것이니 우리들의 잘못이 아니라며 코다 쇼세이의 참수를 정당화하였고, 또한 쇼세이에게 삿대질을 하며 일본 정부의 미국 협조를 비난하며 미국에게도 책임이 있다며 경고했다. 일본 정부의 몸값 제의가 있었으나 거절했다고 밝혔고 성명을 모두 낭독한 뒤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치며 쇼세이를 성조기 위에 강제로 눕힌 뒤 단검으로 참수하였고 [13][14] 참수한 목은 몸 위에 올려놓았다. 특이하게도 다른 인질들과는 다르게 주황색 죄수복을 입지 않고 눈도 가려지지 않은 채 사복을 입은 상태에서 참수 되었는데, 사후 부검 결과에서 머리에 총상이 발견되고 여러 고문 흔적이 있었는데 코다 쇼세이의 저항이 있었거나 인질을 겁박하기 위한 차원에서 가한 고문이였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예시로 미국인 인질이였던 폴 존슨은 심문 영상에서 안대를 씌운 상태로 말을 하지 못하게 입 막음을 당했으며 또 다른 미국인 인질들인 유진 암스트롱과 잭 헨슬리는 피랍 영상에서 테러범들이 총을 머리 옆에 들이갖다 대면서 유언이나 말을 남길 수 있게끔 시켰다. 참수된 시신은 집행 당시 깔아놓은 성조기에 싸인 채 시신에는 총상의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발견 된 그의 시신은 쿠웨이트를 넘어서 일본으로 송환 되어 유가족에게 전달되었고, 기독교 집안의 영향으로 기독교 형식으로 장례가 치러졌다고 한다.

당시 한국 뉴스에서도 그의 보도가 전해졌으며, 고이즈미 총리는 "새삼스레 분노를 느낀다."고 발언했다.

한편 여론의 반응과 별도로 일본 정부는 이 사건을 살인죄로 분류하여 검찰에 송치한 상태이며, 현재 공소시효가 영구 중단되었다. 그러나 김선일 사건과는 다르게 범인 중 한 명은 신원이 밝혀졌으며, 범인의 이름은 후세인 파미 바드르로 2006년 초에 체포되어 그 해 11월 사형 선고를 받았다. 당시 사형 판결 뉴스로, 영문으로 되어있다. # 현재는 사형이 집행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수를 집행한 인물로, 위의 참수 직전 사진에서 맨 왼쪽의 인물이다. 살해범 이외의 다른 범인들의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현재 기준으로써 이들은 이미 미군의 공격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쇼세이를 참수한 범인이 김선일을 참수한 유일신과 성전 소속이고, 체포 직후 심문에서 불교 신자를 포함해 무려 자신이 116명이나 참수했다고 자백한 바 있기에, 이 자가 김선일을 참수했던 자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가 살해한 희생자들 중에서 김선일을 살해한 적도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 가담 여부를 결국 끝까지 밝혀내지 못했다.

5. 다른 나라의 사건들과의 비교[편집]


이런 코다 쇼세이 사건 당시 일본 사회의 반응으로 '와(和)'라고 하는 개인이 전체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정신문화, 즉 메이와쿠에서 기인된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납치범들의 요구 내용과 결국 피살 당했다는 점은 김선일과 판박이었지만, 파헤쳐 보면 김선일 납치 살해 사건과 대조적인 부분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피해자에 대한 질타가 심했던 일본과는 달리 한국은 정부의 태도를 불가피하다고 보며, 피해자 역시 비난하는 목소리가 종종 있었으나 대체로는 동정하였다.

그리고 피살 이후 한국에서도 응징을 주장하는 목소리들도 있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 두 사람을 동일한 선상으로 바라보기에는 무리가 있는데, 왜냐하면 이 둘은 납치되기 이전까지의 행보가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김선일은 그가 속한 가나무역 회사에서 해당 지역에 파견한 근로자였고, 정상적인 업무를 행하고 정상적으로 복귀하던 중에 납치당한 것이었다. 때문에 비록 김선일이 이라크에 간 것이 선교 목적도 있었다는 것이 추후에 알려졌긴 했지만, 대중들의 입장에서 "위험한 곳으로 발령 받아 자신의 일을 하다 납치되어 살해 당한 아주 불쌍한 인생을 살다 간 사람"으로 여겨지기에 충분했다. 반면에 코다 쇼세이는 그냥 자아 찾기 해볼 겸, 다른 나라들을 자기 마음대로 놀러 다니다가 이라크에 들어가서 피해를 끼친 사람으로 밝혀졌다. 이것이 김선일에 대한 동정 여론을 유발하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되었지만, 김선일 그 자신이 그런 위험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간 것이나 다름 없으므로 이에 대해 한국 정부가 테러와 협상하지 않는다는 원론을 고수하는 것도 대중들도 당연히 그것을 대체로 이해하였다.

또한 한국과 일본이 차이가 나는 부분이 한 가지 있는데, 이것은 두 나라의 공동체주의개인주의의 차이점이라고 볼 수 있다.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는 엄밀히 다른데, 이기주의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를 끼치는 것을 서슴 치 않는다면, 개인주의 문화권에선 개인의 자유를 보장해 주고 터치를 하지 않되 타인에게 피해를 끼쳐선 안되고, 본인의 행동에 따른 결과도 자신이 알아서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비슷한 시기에 피살된 이 두 사람 말고도 미국인 민간인이었던 닉 버그 그도 역시 본인이 간 거였고, 본인의 선택으로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니 본인도 담담하게 받아들였으며, 심지어 유가족 인터뷰에선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며 "내 아들이 선택한 길이니 존중한다."는 담담한 식으로 인터뷰하여 이것은 한국과 일본과도 전혀 다르게 문화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것을 확연하게 보여주었다.[15] 왜냐하면 당시 한국의 정서상으로는 유가족들은 이건 다 정부 탓이라며 정부를 비난하며 소송을 걸거나, 피해자는 협상 인터뷰에서 눈물을 흘리며 살려 달라며 빨리 군대 철수하라고 주장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정서가 매우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흐르며 한국도 젊은 층을 중심으로 사회가 개인주의 정서가 강해지기 시작했고, 정부의 책임이 아닌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기 때문에 대응 과정에서 정부가 잘못한 점이 없고, 납치 피해자 본인이 위험을 인지하고도 비필수적인 이유로 들어갔다면 이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온전히 다 져야 한다는 인식이 강해지고 있다.

한국의 샘물교회 선교단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과도 비슷한데, 당시 한국 정치권과 중노년층은 '우리 민족이고 우리나라 사람인데 세금을 들여서라도 당연히 구해와야 한다. 야박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같은 의견이 대다수였고 실제로도 그렇게 하었다. 그러나 청장년층에서는 "선교하겠다고 자기들이 알아서 간 건데 굳이 구해와야 하냐?"라거나 "설사 구한다고 하더라도 구출에 든 비용은 모두 교회 측이 지불해야 한다."와 같은 반응이 많았다. 때문에 샘물교회 납치 피해자들은 물론 샘물교회 신도들과 관련자들 모두 샘물교회 납치 피해자들이 구출된 뒤 엄청난 비난을 직면해야 했고, 한국 정부는 이후 비슷한 사건이 발생할 경우 법적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여행 금지 제도를 만들었다.

일본 사회도 이처럼 비슷하게 "그냥 멋대로 간 사람이 잘못한 것", "죽든 말든"이라는 반응으로 책임은 전적으로 피랍자에게 물어버리며, 구출은 대개 포기해 버린다. 이런 태도는 10년 뒤 유카와 하루나 이슬람 국가 피랍 사건에서도 나타났다. 반면 이 사건의 2차 피해자인 고토 겐지는 유카와 하루나와 달리 지인을 구출하려는 올바른 일을 하다가 죽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동정심을 받았다. 이는 기인하는 문화적 맥락은 다르지만 정당한 대의 없는 자신의 행위로써 공동체에 피해를 끼치는 이들을 매우 안 좋게 보는 한국과 일본의 공통적인 면모이다.

실제로 샘물교회 사건 때도 정부가 분명 테러 첩보 경고를 고지했음에도 오히려 피해자들은 그 경고판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피해자 유족들 중 일부는 출국을 막지 않은 정부가 잘못이라며 정부에 소송을 걸었다가 패소하기도 했다. 샘물교회 납치 피해자들의 주장은 본인의 선택으로 갔음에도 행동의 결과를 본인이 책임져야 하는 게 아니라 정부와 우리 사회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한국 법원은 이것이 궤변이라고 여겨 패소 판결했고, 이미 개인주의적 시각이 강해진 한국 여론도 냉담했다. 다만 한국은 일본과는 달리 거대 시민 단체들의 존재로 정치권에서 구조를 위해 '노력하는 척'이라도 해야 할 뿐이다.

여기에 각 개인을 독립된 인격체로 보는 서양과 각 개인이 사회적 관계 속에 위치해 있다는 일본의 인식의 차이가 더 해져 당시 일본인들은 일본 사회에 폐를 끼친 코다 쇼세이를 그렇게 키우고 코다 쇼세이를 말리지 않은 그의 가족들을 비난한 것이다. 따라서 미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던, 닉 버그의 경우 유가족들은 1차 적으로 닉 버그 본인의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부시 행정부의 무리한 개전에 대해 비판을 하기도 했으며, 미국 내에서도 많은 동정을 받았다.[16] 하지만 코다 쇼세이의 가족들은 오히려 아들의 기행이 낳아버린 무모한 결과에 대해 유가족들이 아들 대신 사죄를 하면서 일본 사회의 비난을 그대로 들어야만 했다.[17] 결론 적으로 다른 국가들의 인질들이 희생 당할 때는 대부분 보통 피해자의 유가족들이 매우 크게 오열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코다의 유가족들은 오열 보단 일본 국민들에게 사죄를 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매우 이례적인 케이스가 되었다.

6. 여담[편집]


  •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고등학교를 2학년 때 중퇴하고, 통신제 고등학교를 통해서 졸업장을 취득했다고 한다. 또한 프로 복서를 꿈꾼 적도 있었다고 하며, 과거에는 도장(塗装) 회사와 다다미 가게에서 일했던 경력도 있다. 그로 인해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일했었다고 한다. 자신의 친구들에게 메시지로 "나 자신을 찾기 위해 자아 찾기 여행을 하고 싶다. 뉴질랜드에 머문 뒤, 각국을 여행하고 싶다."면서 내용을 알렸다고 한다.

  • 중학교 동창회 시절 당시, “뉴질랜드에서 홈스테이로 머무른 뒤, 워킹 홀리데이로 세계 각지를 여행하고 싶다.”라며 자신의 계획을 기쁘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 주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외국에서 견문을 넓히고 싶다는 뜻을 자주 비춰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당시 이라크는 정세와 치안이 극단적으로 악화되어 있었고, 이것을 잘 생각하지 않고 이라크를 방문한 그가 결국 무모한 행동을 벌이는 원인으로 작용되어 격렬하게 비난을 받게 되는 원인이 되고 만다.

  • 나는 테러리스트라네는 2004년에 알 카에다 이라크 지부(Al Qaeda in Iraq; AQI)가 그를 살해할 때 흘러나온 음악이다.

그의 살해 동영상은 인터넷 통신망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버리는 바람에, 자국인 일본에서 겁을 주기 위한 용도, 협박이나 편법인 수단으로 많이 쓰였다고 한다. 인터넷을 통해 그의 살해 동영상을 문자로 보내주거나 인터넷에서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나면서 동물원을 비롯한 온갖 장소들에 영상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신고를 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유가족들도 비난을 받게 된 원인으로 작용된 것이고, 일본 여론은 그의 가족들한테도 인신공격을 시전하여 가족들은 피해자들에게 욕과 비난 섞인 문자와 팩스에 시달렸으며, 급기야 친형과 어머니가 죄인 같은 모습으로 기자 회견에 나타나서 총리와 국민들에게 눈물을 보이며 대국민 사과까지 하는 모습을 보였다.[18][19]

  • 죽은 이후로도 일본 국민들의 반감은 계속되었는지, 네티즌 사이에서는 그가 과거에 몰래 여자친구와 카섹스를 하다 걸린 사진이 우연히 인터넷에 유출되어 떠돌아다니고, 한국의 김선일 사건과도 비슷하게 일본의 중학생들도 해당 고인의 참수 장면을 패러디해서 사진을 찍어 고인을 모독하는 행동을 보이는 등 오히려 조롱 거리가 되고 말았다(...).

  • 호텔로부터 숙박을 거절 당한 이유는 그가 전통 이슬람 국가 사회에서는 도저히 쉽게 볼 수가 없는 반바지 차림이라 외국인이라는 것이 쉽게 들통났기 때문이다.

  • 그가 길거리에서 노숙을 단행하기 전에는 요르단 암만에 위치한 호텔에 머무른 흔적도 밝혀졌는데, 일본 외무성으로 보낸 정보에 따르면 코다가 이라크에 들어간 것은 21일. 이라크 대사관은 그에게 피난 권고를 전하기 위해 그의 부친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 참수 영상은 테러범들이 고화질 카메라로 촬영을 해서 그런지, 그 이전의 희생자들이었던 닉 버그, 김선일과 폴 존슨, 유진 암스트롱, 잭 헨슬리, 케네스 비글리에 비해서도 화질이 상당히 뚜렷하고 선명하다. 그 들에 비하면 유일신과 성전 인질 중에서 가장 최근으로 잡혔던 인질이자 마지막 희생자였기 때문이다.

  • 일본의 록 밴드 KLACK가 자신들의 공연에 해당 인물이 살해당하는 동영상을 대놓고 무대 공연 도중에 틀어서 공개하는 사고를 일으켜 물의를 빚었다. 관객들은 5천여명이었고, 이로 인해서 일부는 경악과 비명, 기절 증세를 보였다.당시 기사

  • 요르단에 있는 한 호텔이 '코다 호텔'로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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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같은 시기 피살 당했던 희생자인 김선일과도 종교가 같다.[2] 협박 영상에서 처음에는 영어로 말했으며, 이후에는 당황에 빠지지 않고 일본어로 굉장히 침착하고 정중한 어조로 말하였다.[3] 영어로는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 "They asked me why the Japanese government broke the law and sent troops to Iraq. They want the Japanese government and Koizumi Prime Minister to withdraw Japanese troops from Iraq, or cut my head.[4] 일본에서는 기독교 신자의 비율이 7~80년대에 비해 비중이 많이 낮은 편이라, 기독교 집안만 해도 특별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부모님이 일본기독교단 정식 교인이었다.[5] 이스라엘에 간 이유도 정확히는 불명확하며, 농장에서 일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짐에 따라 비자를 잘 대줄 수 있다는 점이 그에게 매력적으로 작용해서 그랬다는 설도 있으나, 개인적인 낭설과 추측에 불과할 뿐이다.[6] 이라크로 파견된 일본인 외교관 2명이 차량으로 이동하던 중 현지인 운전자 1명과 함께 총격으로 사살된 사건이다. 이라크 전쟁 종전 이후 최초의 일본인 피살 사건이다. 현재까지도 범인은 체포되지 않았으며, 후세인 잔당 주동설이니 미군 오발설이니 진상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듯.[7] 연락한 지인의 증언에 의하면 이라크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시 상황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 해보고 싶어 하는 호기심 때문에 갔다고 했다지만, 그 이외에는 정말 정확한 진상은 알 수 없다.[8] 그 당시 이라크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요르단을 거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전 문제였는지 이스라엘에서 이라크로 직행하는 교통수단은 없었고, 이스라엘과 육로로 국경을 넘나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가 요르단이었기 때문.[9] 위에 피랍 당했을 때의 사진을 보면 길 거리에서 오랫동안 노숙을 해왔다는 흔적이 확연하게 느껴지는 데, 옷도 더러워지고 더벅 머리로 바뀌게 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10] 성명문 내용 : "우리는 일본 정부에게 이라크에서 자위대를 철수 시킬 48시간의 시한을 준다. 만약 이를 응하지 않는다면 이 이교도 인질은 다른 이교도 인질인 닉 버그와 케네스 비글리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11] 영상에서 코다 쇼세이는 무릎을 꿇고 영상 내내 고개를 숙인 채 부동자세로 있으며 테러범 중 한 명이 쇼세이의 머리채를 잡아 얼굴을 들게 하는 장면이 나온다.[12] 김선일과 마찬가지로 주위의 테러범들이 모두 물러간 채 혼자서 발언했는데, 무릎을 꿇고 마치 죄인처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13] 위의 협박 영상과 비슷하게 끝까지 담담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고 몸을 조금 떨긴 했으나 카메라를 보지도 않은 채 칼에 목이 찔렸을 때 잠깐 신음을 내다가 그 후로는 잠잠해졌다.[14] 다른 국가들의 인질들의 참살 영상과는 다르게 큰 비명이나 발버둥을 치지 않고 외마디의 신음 소리만을 낸 채 참수 당하였다. 이미 영상을 찍던 시점부터 사실상 지친 것으로 보이는 데, 코다 쇼세이를 중앙에 미리 무릎을 꿇어 놓은 채로 두고 약 몇 시간이 지난 후에 테러범들 3명이 갑자기 영상 속에 나타났다. 같은 시기 미국인 인질이었던 폴 존슨과 잭 헨슬리도 참수 당할 때 비명 소리를 지르지 못하고 참살 당하였다.[15] 이건 사실 닉 버그와 김선일 이외에도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던 다른 미국인 인질들과 영국인 인질이었던 유진 암스트롱과 잭 헨슬리, 케네스 비글리도 비슷한 데 이라크에서의 건설 계약직을 택해서 그 곳의 업무 상으로 인해 갔으나 그들도 역시 자택을 감시하던 경비원이 이곳을 빨리 떠나라는 권고를 받았을 때, 본인들이 알아서 고국으로 귀국 해서 귀환 했더라면 애초에 피랍 당할 일이 없었다. 그들은 업무를 미루고 중간에 귀국하면 보수 금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라크에 끝까지 머물러 남았다가 피랍을 당한 것이다.[16] 다만 이 사안은 좌우가 갈리는 사안인데, 미국 내 좌파 진영에서는 대체로 닉 버그에 대해 옹호적이고 닉 버그 아버지의 비판을 옹호했으나, 우파에서는 닉 버그의 행동을 비판하고 닉 버그 아버지의 의견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물론 이는 닉 버그 아버지의 의견에 대한 비판이지 닉 버그 아버지와 닉 버그를 묶어서 비판하지는 않았다.[17] 그러나 비록 코다 쇼세이가 상당히 어이 없는 이유로 이라크에 방문했고 이로 인해 목숨까지 잃게 되었으나, 현지에서 이라크인들을 자극하는 무례한 행동이나 미군 협력 활동도 일절 하지 않았으며, 결정 적으로 그는 아무런 죄가 없는 극악한 테러 범죄의 민간인 희생자였기에 그에게만 비난하는 일본의 풍조에 회의감을 드러낸 일부 일본인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 중 일부는 2007년 코다 쇼세이가 머물렀던 요르단 암만의 호텔에 직접 방문해서 생전에 살아있었을 때 엄지를 세우는 코다의 사진을 영정 사진으로 걸어놓고 밥상에 반찬들을 올려놓으면서 그를 위해 고인에 대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또한 언론들이 코다 쇼세이가 일본에서 살았던 자택에 직접 방문해서 그 곳의 주변 거리 모습을 사진으로 찍기도 했다. 해당 호텔을 운영하던 요르단 사람은 호텔의 이름을 코다 쇼세이를 추모하는 의미로 'KODA' 호텔로 바꾸었다고 한다. 현재도 이 호텔은 운영 중인 것으로 추정된다.[18] 코다의 아버지는 방송 상에서만 모습을 드러냈으며 기자 회견에서는 참석하지 않았다.[19] Q. 왜 이라크로 갈려고 하는 아들을 말리려고 하지 않았나요? 라는 질문에 모친이 A. 母 아들이 이라크에 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자식을 잘못 키웠습니다... 죄송합니다. 라고 사죄하면서 답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