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 키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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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 키건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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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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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대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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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3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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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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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시티
37대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제리 프랜시스
(1974~1976)

케빈 키건
(1976~1982)


브라이언 롭슨
(1982~1990)


케빈 키건의 수상 이력


1977 Ballond'or
수상
알란 시몬센
2위
케빈 키건
3위
미셸 플라티니
1976 Onze d'Or
Onze d'Or
Onze d'Argent
Onze de Bronze
로프 렌센브링크
케빈 키건
도미니크 로슈토
1980 Onze d'Or
Onze d'Or
Onze d'Argent
Onze de Bronze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케빈 키건
호어스트 흐루베쉬





잉글랜드의 축구인


파일:external/static.guim.co.uk/Kevin-Keegan-007.jpg

이름
케빈 키건
Kevin Keegan
본명
조지프 케빈 키건[1]
Joseph Kevin Keegan
출생
1951년 2월 14일 (73세)
영국 잉글랜드 동커스터 주 암소프
국적
[[영국|

영국
display: none; display: 영국"
행정구
]]
([[잉글랜드|

잉글랜드
display: none; display: 잉글랜드"
행정구
]]
)
신체
170cm[2]
직업
축구 선수 (공격수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선수
스컨소프 유나이티드 FC (1968~1971)
리버풀 FC (1971~1977)
함부르크 SV (1977~1980)
사우스햄튼 FC (1980~1982)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1982~1984)
블랙타운 시티 FC (1985)
감독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1992~1997)
풀럼 FC (1998~1999 / 임시 감독)
잉글랜드 대표팀 (1999~2000)
맨체스터 시티 FC (2001~2005)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2008)
국가대표
63경기 21골 (잉글랜드 / 1972~1982)

1. 개요
2. 선수 경력
2.1. 클럽
2.2. 국가대표
3. 플레이 스타일
4. 지도자 경력
5. 수상
5.1. 선수
5.1.1. 우승
5.1.2. 개인 수상
5.2. 감독
5.2.1. 우승
5.2.2. 개인 수상
5.3. 수훈
6. 기타
7.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그가 왔을 때, 함부르크의 위대한 시대가 시작 되었습니다."

펠릭스 마가트

잉글랜드축구 선수 출신 축구 감독. 선수 시절 포지션은 공격수.

리버풀함부르크의 전성기를 이끈 공격수이자 잉글랜드의 유일한 발롱도르 다회 수상자[3][4]다. 별명은 마이티 마우스.


2. 선수 경력[편집]



2.1. 클럽[편집]


파일:external/i.telegraph.co.uk/Kevin_Keegan_1816337i.jpg
1968년에 스컨소프 유나이티드에서 데뷔해 3년간 선수 생활을 하다가 1971년에 3만 5000파운드의 이적료를 받고 리버풀로 이적했다.

사실 키건은 이안 캘러한을 대체할 만한 선수여서 그런지 처음에는 미드필더로써 뛰었지만, 당시 감독인 빌 샹클리는 키건의 탁월한 스피드를 알아채자 그를 존 토샥과 함께 스트라이커로 데뷔시켰다.

그는 토샥과 호흡을 맞추어 1972-73 시즌 리그 우승 / UEFA컵 우승을 차지하고, 그 다음 시즌인 1973-74 시즌 FA컵 등 영광을 연속적으로 이루어냈으나, 1974년 리즈와의 채리티 실드 경기에서 당시 리즈 선수인 빌리 브렘너와 주먹다짐을 하다가 둘 다 퇴장을 당했고, 키건은 11경기 출장 정지라는 큰 징계를 받음과 동시에 축구 선수를 그만둘 생각까지 했지만, 밥 페이즐리 감독의 만류 덕에 그는 선수 생활을 지속하여 1976년 리그 우승 및 UEFA컵 우승, 1977년 리그 및 유러피언컵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세우게 되었다.

파일:external/northamptongent.com/Keegan_Hamburg_8_790407Csp.jpg
이렇게 스타가 된 키건은 새로운 도전에 목말라하며 함부르크로 이적했다. 첫 시즌에는 전반기 부진때문에 리그 10위를 차지하였고 발롱도르 2위에 그쳤으나, 1979년에 함부르크 구단 최초 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루어냈고, 1979-80 시즌에 함부르크를 유러피언컵 결승전에 진출시킨다. 그러나 결승전에서 노팅엄 포레스트에게 1:0으로 패해 준우승에 그쳤다. 그래도 함부르크에서 뛰는 동안 발롱도르 2연패를 달성하기도 했다. 이후 리버풀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케니 달글리시라는 대체자가 있어서 키건은 리버풀 대신 사우스햄튼을 거쳐 당시 2부 리그였던 뉴캐슬로 이적해 1984년에 팀을 1부 리그로 승격시킨 뒤에 은퇴하고 가족들과 함께 스페인으로 이주했다.


2.2. 국가대표[편집]


파일:external/www.thedaisycutter.co.uk/England-Kits-Kevin-Keegan-011.jpg
화려했던 클럽 경력과 달리 키건은 국가대표에서는 부진했는데 1974년 서독 월드컵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예선에서 잉글랜드는 탈락했고, UEFA 유로 1980에서는 벨기에이탈리아에 밀려 조 3위에 그쳐 탈락했고,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는 부상때문에 1경기 밖에 출전하지 못했고, 잉글랜드가 2차 조별 리그에서 탈락하는 걸 지켜봐야 했다.


3. 플레이 스타일[편집]



키건은 체격은 작았으나 민첩한 몸놀림과 기술로 상대 선수를 제쳐내는데 뛰어났다. 또한 훌륭한 드리블, 플레이메이킹, 스태미너로 중앙과 측면을 오가며 공격을 이끌었다. 점프력과 유연성이 좋아 아크로바틱한 골과 헤더골도 자주 넣었다.


4. 지도자 경력[편집]


1992년에 친정팀인 뉴캐슬 유나이티드로 돌아와 당시 2부 리그에 있던 팀을 다시 프리미어 리그로 끌어올려 강등권과 거리가 먼 팀을 만들었고, 급기야 1995-96 시즌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이어 2위로 준우승을 차지하기도 했으나 1996-97 시즌 도중에 짤렸고, 이후 풀럼의 단장으로 재직하다가 1997-98 시즌 도중에 경질된 레이 윌킨스 감독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감독 대행으로 일한 바 있었고, 이후 1998/99 시즌 정식 감독으로 풀럼의 3부 리그 우승 및 2부 리그 승격을 이끌었다. 1999년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어 UEFA 유로 2000 조별예선에서 1승 2패로 8강 진출에 실패[5], 옛 웸블리 스타디움의 마지막 경기이기도 했던 독일과의 2002년 한일 월드컵 예선에서도 패배[6]하여 결국 경질당했다.

이후 2001년에 조 로일 감독의 후임으로 맨체스터 시티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2002년에 팀을 프리미어 리그에 승격시키고 강등권과 거리가 먼 중위권 팀으로 만들어 주었고, 2005년 경질 뒤에 방송 해설가 등으로 일하다가 2007-08 시즌 도중에 샘 알라다이스 감독이 해임당하자 감독으로 복귀하여 팀을 간신히 구해냈으나, 다음 시즌초 여름이적시장에서 불거진 구단주 마이크 애슐리와의 불화로 사임하였다.

이후에는 ESPN 등지에서 스포츠 해설가로 일하고 있다.

여담으로, 키건의 뉴캐슬 부임 시절 알렉스 퍼거슨과의 신경전이 벌어졌는데, 이때 퍼거슨 특유의 심리전에 휘말리면서 퍼거슨의 도발을 참지 못하고 인터뷰에서 "I'll tell you, honestly, 'I'll love it if we beat them"이라는 유명한 구절을 얘기하면서 이후 뉴캐슬은 하락세를 타, 타이틀 레이스에 졌다. 흡사 2008-09 라파가 퍼거슨의 심리전에 휘말려 Facts[7] 구절을 남발해 리버풀의 무관을 이어지게 한 것의 원조격.


5. 수상[편집]



5.1. 선수[편집]



5.1.1. 우승[편집]





5.1.2. 개인 수상[편집]




5.2. 감독[편집]



5.2.1. 우승[편집]






5.2.2. 개인 수상[편집]




5.3. 수훈[편집]




6. 기타[편집]


  • 1982년 대영제국 훈장 4등급(OBE)을 수훈받았다. 관보 링크
  • 영화 중경삼림에서 페이(왕페이분)가 비행기로 접어 날린 스포츠 신문을 펼칠 때에 그의 이름이 언급된 기사가 보인다. 기사의 제목과 사진 속 유니폼들로 미루어보아 93-94시즌 당시 키건이 감독으로 속했던 1부로 승격한 뉴캐슬이 마지막 라운드에 2 대 0으로 아스널을 잡고 3위를 달성했던 당시 상황으로 추정.

1981-82 시즌 키건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환상적인 골을 넣었지만 오프사이드로 취소되었다. 하지만 이 골은 온사이드였고 이 장면은 오심으로 취소된 골들 중 가장 멋진 골 중 하나로 언급된다.


7. 같이 보기[편집]





[1] /ˈdʒəʊzɪf ˈkɛvɪn ˈkiːɡən/[2] https://www.celebheights.com/s/Kevin-Keegan-51062.html[3] 케빈 키건보다 더 위대한 잉글랜드 선수로 평가를 받는 바비 찰튼조차 발롱도르 수상은 월드컵을 우승한 해에 단 한 번 받았을 뿐이다. 1977년에는 발롱도르 2위에도 오르며 3년 연속 발롱도르 포디움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4] 1977년 당시 리버풀 소속이었던 키건은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그 해 발롱도르 1위를 차지한 알란 시몬센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꺾고 우승을 차지하여 발롱도르 수상이 확실시된 분위기였으나, 함부르크로 이적 후 그의 엄청난 활약에도 불구하고 전반기 중하위권을 기록한 소속팀의 부진으로 1977년 발롱도르를 시몬센에게 넘겨주게 된다.[5] 66년 잉글랜드 월드컵 결승전에서 승리해 우승한 뒤 무려 34년만에 천적으로 불리던 독일을 잡아냈지만 포르투갈, 루마니아에게 모두 패하며 결국 탈락.[6] 리버풀 후배인 디트마어 하만의 대포알 중거리 프리킥으로 0:1 패배.[7] 사실 이건 라파가 혼자 급발진한 느낌에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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