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세움 암살미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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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및 동기
3. 음모
3.1. 주동자
3.2. 공범
3.3. 협력자
3.4. 루킬라의 계획
4. 사건
5. 심문
6. 결과



1. 개요[편집]


182년, 로마 황제 콤모두스콜로세움에서 열린 국가 행사에 참석할 당시에 벌어진 암살 미수 사건. 로마황제의 여러 암살미수 중 유일하게 콜로세움에서 벌어졌다.

종종 182년의 음모로도 불린다. 마키아벨리의 평으로 오현제로 추앙받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100년여 통치기와 로마 제국의 팍스 로마나가 종식되는 서막으로 평가받는다.

황제의 맏누이 루킬라가 멀쩡하게 제국을 통치하던 동생 콤모두스와 그 아내 브루티아 크리스피나 때문에 권력을 잃게 될 것이라며, 약 3~4년 준비를 거쳐 벌인 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 지극히 멀쩡했고, 평범해도 무난하게 통치를 하던 콤모두스는 큰 충격 속에서 정신적 트라우마를 앓고 암군으로 전락하게 된다.


2. 배경 및 동기[편집]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소 파우스티나의 장녀 루킬라는 아버지, 어머니의 건강이 나빠지는 가운데, 삼촌 루키우스 베루스와 164년 결혼했다. 루킬라는 16살의 어린 나이에 아우구스타 지위를 받았고, 어머니 소 파우스티나와 대등한 아우구스타가 됐다. 이때 루킬라는 로마 내에서 영향력을 키우면서 세를 꾸렸고, 은밀히 그 세력을 이용해 원로원 안팎에서 발언권을 행사했다. 그 결과, 그녀는 지지자들에게 존경받고 영향력이 상당한 아우구스타로 평가받게 됐다.

루킬라는 남편 루키우스 베루스와의 사이에서, 소(小) 루키우스 베루스를 비롯하여 아우렐리아 루킬라와 루킬라 플라우티아를 출산했다. 이중 막내 루킬라 플라우티아 외에는 169년 이전에 모두 요절했고, 남편 루키우스 베루스마저 169년 게르만족과의 전쟁 후 로마로 귀환하다가 쓰러져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따라서 그녀의 지위는 남편 루키우스 베루스가 169년 요절하면서 흔들리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169년 9월 10일 막내 아들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카이사르가 요절하고, 후계자는 콤모두스만 남게 됐다. 이때 황제는 자신과 아내의 건강이 나쁜 것을 알아, 그를 도울 보호막의 필요성이 시급함을 느낀다. 당시 황제는 20대 초반인 고모부, 장인, 양부 안토니누스 피우스 시절부터 계속된 격무에 시달려, 건강이 즉위 전부터 많이 악화된 상태였다. 이는 황후 소 파우스티나 역시 계속된 출산, 공적 업무 수행 속에서 건강이 나빴다. 따라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공동황제이자 동생 루키우스 베루스가 요절한 뒤, 홀로 된 장녀 루킬라를 재혼시켜, 그녀의 새 남편이 콤모두스를 보필하고, 그에게 카이사르 지위를 내려 후계구도를 정비하려고 한다. 그래서 낙점된 인물이 30대 중반의 미혼으로, 시리아 안티오키아 출신의 그리스 혈통 로마 장군 폼페이아누스다.

당시 루킬라는 첫 남편과 사별한 이후, 아우구스타 지위를 유지하면서 어머니 소 파우스티나 이름을 내걸고 권세를 부렸다. 그래서 이 결혼을 격렬히 반대했다. 왜냐하면 원로원 의원 신분에 불과한 폼페이아누스와의 결혼은 자신의 모든 지위와 어울리지 않고, 이 권력을 놓게 된다는 선포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는 어머니 소 파우스티나에게 이를 강조해,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결정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렇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가문과 제국의 미래를 위해 이를 황제의 명령으로 무효화하고, 169년 루킬라, 폼페이아누스를 강제 결혼시켰다.

이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곧바로 사위 폼페이아누스에게 루킬라의 남편 지위에 맞는 황족 지위를 내리고,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를 황족이자 제위계승권자 특권을 미리 하사한다. 아울러 원로원, 로마군 내에서 뛰어난 능력, 휼륭한 인품, 좋은 외모와 높은 교양 등으로 존경받는 폼페이아누스에게 카이사르(칭호)를 내리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폼페이아누스 카이사르"로 개명까지 명령했다. 그렇지만 이 조치에 폼페이아누스는 간곡히 카이사르 지위, 개명만은 받지 않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는 장인에게 권력의 특성상 둘로 나눌 수 없다는 점에서 콤모두스의 미래가 완전히 담보되지 못한다는 현명한 판단 속에서 거절했다. 하여 마르쿠스 황제는 사위에게 콤모두스를 아들처럼 지켜달라고 부탁하면서, 장녀 루킬라가 원한 결혼 전의 지위, 명예를 유지하는 조치를 내리는 선에서 이를 마무리한다.

루킬라는 두번째 남편 폼페이아누스과의 사이에서 아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를 낳았음에도, 남편이 신참자라는 이유로 대놓고 무시하고, 갓 낳은 아들을 폼페이아누스에게 키우라고 명령 후, 별거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의 고종사촌오빠 마르쿠스 움미디우스 콰드라투스 안니아누스 를 시작으로, 콰드라투스 안니아누스의 젊은 양자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움미디우스 콰드라투스를 사실혼 남편으로 삼고, 여러 미남을 남첩으로 두고 생활한다.

175년을 전후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소 파우스티나 황후의 건강은 크게 악화됐다. 그리고 이 틈바구니 속에서 루킬라는 마르코만니 전쟁으로 로마를 비워야 했던 아버지, 건강이 나빠 공식석상을 장녀에게 위임하게 된 어머니 대신 권력을 휘두른다. 그래서 루킬라는 마르코만니 전쟁 기간동안, 재판과 행정 곳곳에도 영향력을 행사했고 인사 역시 루킬라의 의중이 반영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175년 아비디우스 카시우스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서거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반란을 일으켰고, 이 사건으로 소 파우스티나는 매우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만일의 오해 여지를 차단할 목적으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해 콤모두스,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와 소 파우스티나를 급히 자신의 곁으로 오게 했다. 따라서 로마와 이탈리아 전역은 루킬라와 그 세력이 좌지우지하게 됐다.

다행히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반란은 몇개월 만에 진압됐지만, 이때의 일은 로마를 떠나 동방 순행에 나선 황후의 건강을 급속도로 악화시켰다. 따라서 175년 루킬라와 콤모두스의 어머니 소 파우스티나는 오늘날의 터키 카파도키아의 로마군 동방기지가 있던 할랄라에서 사망했다. 이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아내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했는데, 콤모두스 역시 사춘기의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큰 슬픔에 빠졌다. 그래서 마르쿠스 황제는 어린 콤모두스의 심적 안정을 위해, 콤모두스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났던 누나, 매부들에게 의지케 하고, 그들에게 자신이 서거해도 친아들처럼 도와달라고 부탁하고 약조까지 받는다. 따라서 폼페이아누스,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는 장인의 유지를 지키겠다고 맹세했고, 루킬라, 파딜라, 코르니피키아 공주 역시 여린 성격의 콤모두스를 위해 헌신하겠다고 약조했다. 이때 루킬라를 제외한 마르쿠스 황제의 사위, 딸들은 콤모두스에게 아버지 , 어머니 역할을 하면서 도움을 줬다. 특히, 파딜라,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 부부, 폼페이아누스, 코르니피키아는 콤모두스에게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헌신했다. 허나 루킬라는 콤모두스가 어리고, 자신의 보호를 받게 된 처지를 악용해, 이를 빌미로 세를 두텁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마르쿠스 황제와 콤모두스 등 황실 수행원은 동방 순행을 마치고 176년 가을, 로마로 돌아왔다. 이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아들 콤모두스를 공식 후계자로 선포했다. 이어 그는 콤모두스가 16살이 되던 해인 178년 콤모두스의 혼처를 구해 곧바로 결혼시켰다. 신부는 황제의 신임을 받았고 함께 도나우 강에서 벌어진 게르만족들과의 전투에 참전한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의 딸 브루티아 크리스피나였다. 그런데 이 결혼과 후계자 선정은 공교롭게도 루킬라가 큰 질투심을 느끼게 한 결과가 됐다. 왜냐하면 마르쿠스 황제의 공동황제 콤모두스와 결혼한 브루티아 크리스피나의 등장은 루킬라와 그 세력의 권력에 위협이 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루킬라는 179년 자신을 견제할 수 있는 남편 폼페이아누스, 여동생 파딜라, 코르니피키아, 파딜라의 남편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가 남동생 콤모두스와 함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면담하기 위해 빈으로 향한 사이부터, 콤모두스 부부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18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로마군 숙영기지 빈에서 서거했다. 이때 콤모두스가 예정 그대로 단독황제로 제위를 승계하게 된다.

18살의 콤모두스는 즉위 직후, 로마군에게 마르코만니 전쟁 지속 의지가 있음을 밝혔다. 그렇지만 계속된 전시 체제 하의 높은 세금과 그 피로도는 국고 상황을 압박했고, 로마 제국은 현실적 이유로 전쟁 지속이 어려웠다. 전선의 로마군 내에서도 전쟁을 지속하자는 의견보다는 높은 피로도 속에서 휴전을 하자는 여론이 베테랑 장병들을 중심으로 높았다. 그렇지만 콤모두스를 보필하게 된, 마르쿠스 황제가 지명한 섭정단 내 고위 고문들은 전쟁을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고위고문으로 선정한 사람으로는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콤모두스의 맏누이 루킬라의 두번째 남편),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콤모두스의 장인), 티투스 푼다니우스 비트라시우스 폴리오가 있고, 그 아래의 보좌 수석 고문으로는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콤모두스의 사실상 두번째 누이 파딜라의 남편, 하드리아누스의 법적 외손자)와 장군 페르티낙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프라이토리아니 근위대장 푸블리우스 티루테니우스 파테르누스가 있었다.

즉위 이후, 콤모두스는 오랜 회의 끝에 당시 국고 상황의 심각성, 로마군 내 베테랑 장병들의 피로 호소, 교전 세력인 게르만족들의 상황 등을 종합판단해, 전쟁을 평화교섭 하에 끝내기로 결정짓는다. 이 과정에서 폼페이아누스, 페르티낙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로 대표된 군부는 전쟁을 지속해야 한다고 했지만, 콤모두스는 이들에게 전쟁을 계속하지 못한 이유를 정확히 밝힌 다음 설득 후, 길었던 마르코만니 전쟁을 마무리한다.

그 후 콤모두스는 로마로 돌아와서 180년 10월 22일 개선식을 거행했는데, 자신이 총애한 시종 사오테루스를 자신의 황제 마차에 태우고 개선행렬이 거행될 동안 수시로 사오테루스에게 키스를 하는 애정행각을 공개적으로 벌여 행동이 참 경박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그 외에는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아버지를 충실히 섬겼던 대신들과 가족 및 친지들의 도움을 받으며 국정을 큰 무리없이 이끌었다. 그러나 2년 후, 콤모두스가 누구보다 신뢰하고 의지했던 맏누이 루킬라가 오랫동안 꾸며온 암살 계획을 단행했다.


3. 음모[편집]



3.1. 주동자 [편집]


  • 루킬라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소 파우스티나의 장녀.
  • 루킬라 플라우티아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동생[1], 공동황제인 루키우스 베루스, 루킬라가 결혼해 낳은 3남매 중 막내로, 루키우스 베루스 자녀 중 유일하게 성년까지 성장한 공주.(콤모두스의 조카, 사촌)
  • 마르쿠스 움미디우스 콰드라투스 안니아누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여동생 안니아 코르니피키아 파우스티나의 아들(콤모두스의 고종사촌형). 루킬라와 일찍부터 불륜 관계였던 애인 중 한명.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움미디우스 콰드라투스 : 마르쿠스 움미디우스 콰드라투스 안니아누스의 양자. 루킬라와 사실혼 관계였던 남자애인으로, 콤모두스의 둘째 누이 안니아 갈레리아 아우렐리아 파우스티나의 의붓아들.

3.2. 공범[편집]


  •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퀸티아누스 : 루킬라의 두번째 남편 폼페이아누스의 조카.

3.3. 협력자[편집]


  • 마르쿠스 페트로니우스 수라 마메르티누스 : 콤모두스의 누이 코르니피키아의 남편.
  •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부루스 : 콤모두스의 여동생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의 남편.
  •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 : 콤모두스의 장인.[2]
  • 푸블리우스 티루테니우스 파테르누스 : 근위대장.[3]

이 외의 이름 미상의 원로원 의원, 기사계급 관료, 해방노예 등도 있다고, 루킬라 일당과 페렌니스가 주장함.


3.4. 루킬라의 계획[편집]


콤모두스의 첫 재위 2년은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꾸려준 고문단의 도움 아래에서, 무난하고 성공적이었다. 그래서 로마인 모두는 "날 때부터 보랏빛 천을 감고 태어난 콤모두스가 좋은 조상, 휼륭한 지위에 어울리게 온화하고 쾌활하며 성실히 국정을 수행한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허나 루킬라는 동생 콤모두스가 첫 2년 동안 칭찬을 받을수록 증오심을 드러냈다. 그녀는 자신의 여동생 파딜라, 코르니피키아,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가 콤모두스 편을 드는 것을 증오했고, 재혼으로 맞이했던 남편 폼페이아누스가 마르코만니 전쟁 중단으로 불만을 품었음에도 아버지의 유지에 따라 콤모두스를 돕고, 그의 아버지이자 보호자 역할을 하는 것을 혐오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보다 루킬라를 열받게 한 것은, 콤모두스의 치세 아래에서 연착륙에 성공한 새로운 아우구스타 크리스피나 황후가 누린 지위와 영예, 대중들의 칭찬이었다.

루킬라는 콤모두스, 크리스피나 부부 때문에 자신의 신세가 처량해졌다고 증오심을 표출했다. 어릴 때부터 모두의 존경을 받으면서 사는 것이 운명이라고 믿은 루킬라는, 조용한 귀부인이자 황제의 보호자가 된 자신이 힘없는 아우구스타로 전락했다며 신세를 한탄했다. 그래서 그녀는 딸 루킬라 플라우티아와 함께 반(反) 콤모두스 여론몰이를 시작했다. 이들 모녀는 콤모두스가 우유부단하고 변덕스러운 결함을 숨기고 있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면서 콤모두스 부부의 지위와 재산을 내주겠다는 미끼로 야심가들을 포섭했다. 여기에는 루킬라의 연인으로 수년째 불륜, 사실혼 관계인 마르쿠스 움미디우스 콰드라투스 안니아누스 부자가 함께 했다.

루킬라 일당은 콤모두스 부부를 죽이고 이들의 지위를 내걸고, 콜로세움에서 열릴 국가 축제를 기점으로 콤모두스를 먼저 죽이고, 황궁에 있는 크리스피나를 살해하자고 음모를 꾸몄다. 그러면서 이들은 폼페이아누스의 조카로, 야심 많고, 용감하고, 완력이 좋고, 체격에서 콤모두스와 비슷한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퀸티아누스를 포섭했다.


4. 사건[편집]


182년, 콜로세움에서 국가 행사가 열렸다. 로마 황제가 주최하는 만큼, 콤모두스는 수석 고문단, 보좌 고문단과 함께 콜로세움으로 향했다.

콤모두스가 콜로세움 입구로 입장할 때, 암살을 직접 하기로 한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퀸티아누스가 단검을 들고 콤모두스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이때 콤모두스 앞에 나타나서, 이렇게 외쳤다.

"여기 원로원이 보낸 정의의 칼을 받아라! 원로원이 너에게 이 칼을 보내노라!"


하지만 콤모두스는 무사했다. 황제를 둘러싼 경호원들은 폼페이아누스 퀸티아누스를 현행범으로 붙잡았고, 황제를 지키고자 수석 고문단과 원로원 의원들은 황제 주변을 둘러 쌌다. 콤모두스는 폼페이아누스 퀸티아누스의 얼굴을 알고 있었고, 원로원과 협치하면서 칭찬을 받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그는 큰 충격을 받고 실신했다.


5. 심문[편집]


현행범으로 붙잡힌 폼페이아누스 퀸티아누스는 곧바로 심문을 받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자신을 포섭한 인사들을 줄줄이 불었다. 따라서 퀸티아누스 심문 이후 모든 진실을 알게 되자, 충격을 받은 콤모두스의 대응은 보복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무자비했다. 암살범이 본인 앞에서 원로원을 대놓고 언급했기 때문에, 범인 심문 이후 암살미수사건 조사에 연루된 이들은 로마의 핵심 브레인이라고 할 수 있는 원로원의 유력한 의원들, 아버지 시절의 유능한 관리들이나 주변 친척, 친지들 그리고 능력 있는 군단장들까지 모두 기소된 다음, 조사가 시작됐다.

여기에는 붙잡힌 콰드라투스 안니아누스 부자의 물귀신 작전 아래에서 크리스피나 황후의 아버지 등이 언급되면서 확산됐다. 이런 가운데, 콤모두스의 오랜 친구이자 최측근 사오테루스가 별개의 사건으로 살해됐다. 이와 동시에, 콜로세움 암살미수 사건의 배후에 루킬라, 루킬라 플라우티아 모녀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6. 결과[편집]


콤모두스가 일주일 정도 끙끙 앓다가 보고서를 받았을 때에 피바람이 불었다. 콤모두스는 제정신이 아니었고, 모든 사건 지휘를 맡게 된 페렌니스는 두 사건이 연관됐다는 전제 아래에서 추가 조사를 지휘했다.그래서 근위대장 푸블리우스 티루테니우스 파테르누스 등이 마치 강도의 습격을 받아 암살되는 일련의 사건이 연이어 터지게 된다.

콜로세움 암살미수 사건 이후, 반역죄 혐의로 조사받다가 혹은 증거조사 중 약간의 의심이나 증거만 발견돼도 즉시 재판에 넘겨진 뒤 처형됐다. 로마 제국이 자랑하는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고 줄줄이 죽여버렸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이때 콤모두스는 누나 루킬라와 루킬라와 루키우스 베루스의 딸 루킬라 플라우티아가 단순 가담자가 아닌, 자신을 별 이유 없이 죽이려했던 암살 주동자인 것을 알고 큰 배신감을 받아, 심한 충격에 빠졌다. 그는 이때부터 술을 마시지 않고는 버티기 힘들어했고, 사이가 좋던 아내와의 관계 역시 파탄났다. 콤모두스는 우울함을 호소했고, 환청과 환각 증세를 호소하더니, 사람을 피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을 일으킨 루킬라, 루킬라 플라우티아는 체포된 직후, 다른 가담자들과 달리 황족 특권의 보호 아래 사형을 선고받고, 과거 티베리우스 황제가 은둔한 카프리 섬으로 유배보냈다. 이후, 두 사람은 반역죄로 처형됐다.

루킬라와 딸 루킬라 플라우티아가 유배됨과 동시에, 남편이 확실히 개입했지만 증거가 불충분했던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콤모두스 바로 아래의 여동생) 역시 푸닉 지방으로 추방됐다. 이어 코르니피키아 공주의 남편 역시 콤모두스에게 신임을 잃었고, 그는 190년 혹은 192년 초 콤모두스 암살을 아들, 동생, 누나와 기획했다는 이유로 몰살됐다. 그렇지만 콤모두스는 이번 사건과 무관했던 폼페이아누스, 파딜라 부부, 코르니피키아에게는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이 사건 이후, 단독 근위대장이 된 페렌니스는 권력을 쥐고 콤모두스를 조종하고자, 추가로 일련의 정치공작을 통해, 이 사건의 파생 사건이라는 명분으로 공안통치를 시작한다. 그 결과, 살비우스, 파테르누스가 처형되고,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총독으로 있던 수석 고문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해임 후 로마로 송환돼, 가난한 주민들에게 콤모두스 이름으로 시혜를 펼쳤다는 이유로 두 차례에 걸쳐 반역재판에 회부되는 치욕을 겪는다. 아울러 페르티낙스는 강제로 브리타니아로 전출 조치되고, 폼페이아누스는 페렌니스의 감시 아래에서 시골로 은둔하게 된다. 그 결과, 콤모두스 시대는 간신 페렌니스 아래에서 망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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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토니누스 피우스, 대 파우스티나하드리아누스 생전 그의 양손자인 루키우스 베루스를, 이들 부부의 조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함께 입양하게 하면서, 마르쿠스 황제와 형제가 됐다.[2] 콤모두스의 맏누이 루킬라 모녀가 심문 중 물귀신 작전으로 누명을 씌웠다고 평가받음.[3] 경쟁자인 동료 근위대장 페렌니스가 누명을 씌웠다고 평가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