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디오 레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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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디오 레이나의 역임 직책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토마스 둘리
(1998)

클라우디오 레이나
(1998~2007)


카를로스 보카네그라
(2007~2012)


클라우디오 레이나의 기타 정보





미국의 축구경영인


파일:C.Reyna_Profile.jpg

이름
클라우디오 레이나
Claudio Reyna

출생
1973년 7월 20일 (50세) /
미국 뉴저지 주 리빙스턴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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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 [[포르투갈|

포르투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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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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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75cm
직업
축구선수 (미드필더/ 은퇴)
축구경영인
소속
선수
버지니아 캐벌리어스 (1991~1993 / 유스)
바이어 04 레버쿠젠 (1994~1999)
VfL 볼프스부르크 (1997~1999 / 임대 )
레인저스 FC(1999~2001)
선더랜드 AFC (2001~2003)
맨체스터 시티 FC (2003~2007)
뉴욕 레드불스 (2007~2008)
기타
뉴욕 시티 FC (2013~2019 / 스포팅 디렉터 )
오스틴 FC (2019~2023 / 스포팅 디렉터 )
국가대표
112경기 8골 (미국 / 1994~2006)
가족
배우자 다니엘 이건 레이나[1]
아들 조반니 레이나
1. 개요
2. 클럽 경력
3. 국가대표 경력
4. 은퇴 이후
5. 여담



1. 개요[편집]


미국의 축구 경영인.

미국 국가대표에서 가장 화려한 기술을 지녔던 에이스였다. 미국 축구가 배출한 첫 세계적인 선수라고도 평가받는다. 하지만 잦은 부상에 고생스런 선수생활 후반기를 보내야 했던 비운의 선수기도 하다.

아들인 조반니 레이나 역시 축구선수이며 현재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서 뛰고 있다.


2. 클럽 경력[편집]



2.1. 프로 입단 전[편집]


혈통은 포르투갈계이며 선조는 아르헨티나에서 살다가 그의 아버지가 1968년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라틴계 이민 2세로 그는 자연스럽게 축구를 접하게 되었고, 고등학교때는 현 미국 국가대표 감독인 그렉 버홀터와 같이 학교의 주축선수로 활약했었다. 이후 축구 장학생으로써 버지니아 대학교에 진학했다. 이런 성장세는 곧 자국에서 열릴 94년 월드컵 준비에 한창이던 미국 축구협회에까지 포착되었고, 그는 전략적으로 키워질 미국 축구의 유망주로 선정된다. 그러면서 미국에서 유망주들이 받는 상이란 상은 다 휩쓸게 되고, 대학생 신분으로써 1994 미국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도 뛰게 된다. 월드컵을 통해서 유럽에서도 그의 재능을 주목하기 시작한다.


2.2. 바이어 04 레버쿠젠[편집]


1994년 바이어 04 레버쿠젠이 그를 영입했다. 월드컵이 끝난 직후 그를 합류시켰지만 레버쿠젠 1군은 미국에서의 경쟁과는 차원이 다른 곳이었고, 출전기회를 자연히 못잡게 된다. 두 시즌 동안 고작 5경기 출전에 그치면서, 레버쿠젠도 레이나의 임대를 추진하게 되고, 1996-97 시즌 당시 2부리그 소속이던 볼프스부르크 임대가 성사되었다.
  • 통산 26경기 0골


2.3. VfL 볼프스부르크[편집]


레버쿠젠에서와 달리 볼프스부르크는 그를 중용했고, 임대 첫 시즌부터 주전으로 도약하며 팀의 분데스리가 승격을 이끌게 된다. 승격 후 첫 시즌에서도 그는 주전급으로 활약했고, 임대 두 시즌 동안 리그 48경기 6골을 기록하는 좋은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레버쿠젠의 스쿼드는 2년 전보다도 더 두꺼워져있었고, 레버쿠젠은 그를 매각하기로 결정한다.
  • 통산 48경기 6골


2.4. 레인저스 FC[편집]


마침 98-99 시즌 막판, 스코틀랜드 거함인 레인저스에서 그에게 관심을 보였고, 1999년 4월 1일, 임대 도중 데려간 볼프스부르크에게는 80만달러, 그리고 원 소속팀 레버쿠젠에겐 276만달러를 지불하며 약 360만 달러의 이적료로 레인저스가 레이나를 영입했다. 독일에서 어느정도 검증된 점, 한 나라의 국가대표 에이스인 점, 그리고 같은 영어권 선수인 점에서 레인저스는 레이나에게 아주 적응하기 편안한 팀이었고, 1999-2000 시즌 리그 우승과 컵대회 우승의 더블을 달성하는데 핵심 역할을 한다. 또한 이 시즌 레인저스는 2년 만에 UEFA 챔피언스리그 조별예선에 진출했는데, 당시 파르마 FC와의 3차예선에서 넣은 기가막힌 골이 레인저스의 본선행을 결정짓는 중요한 골이기도 해서, 그는 레인저스 팬에게 큰 사랑을 받는 선수가 되었다.
  • 통산 64경기 10골


2.5. 선덜랜드 AFC[편집]


스코틀랜드에서의 활약으로 인해 EPL에서도 그에게 관심을 보였고, 선덜랜드가 그를 285만 파운드에 영입하며 그는 프리미어리그에 입성한다. 그러나, 선덜랜드에서는 별 활약을 하지 못했는데, 2001-02 시즌 무난한 활약 이후 2002-03 시즌 초반 전방 십자인대 부상이라는 매우 큰 부상으로 인해 시즌 아웃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후 이 부상의 후유증은 남은 선수생활 내내 그의 발목을 잡게 된다.

여담으로, 선덜랜드에 있었을 때 아들 조반니 레이나가 태어났으며 그의 이름은 전 팀이었던 레인저스의 전 동료 조반니 판브롱크호르스트의 이름을 땄다.
  • 통산 28경기 3골


2.6. 맨체스터 시티 FC[편집]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량은 검증된 편이라, 부상 회복 직후 당시에는 중위권 팀이었던 맨체스터 시티가 그를 영입해간다. 부상으로 한 시즌을 날린 선수에게 250만 파운드라는 꽤 묵직한 이적료를 투자했고, 풀럼과의 영입전까지 붙어서 힘들게 영입했기에 구단의 기대가 큰 편이었다. 영입 첫 시즌에는 다행히 30경기에 나서며 부상에서 완벽히 회복한 듯 보였으나, 2004-05 시즌, 다시 반년짜리 부상을 끊으며(...) 시티 팬들의 속을 태운다. 하지만, 나올때마다 그는 시티의 공격 첨병으로써 제 역할을 하며 팬들에게 인기선수였다고 한다. 그래도 부상으로 인해 더 이상 프리미어리그에서 버틸 몸이 아니었고, 2007년 1월 구단은 그의 미국 복귀를 발표하면서, 기나긴 레이나의 유럽생활은 마무리되었다.
  • 통산 87경기 4골


2.7. 뉴욕 레드불스[편집]


이전 구단인 메트로스타스를 인수한 레드불이 야심차게 그를 구단의 아이콘으로써 영입해왔다. 여기서 대학 시절 은사이자 국대 발탁의 은인인 브루스 어리나와 다시 재회하게 되었다. 2007 시즌 21경기를 뛰며 그럭저럭 괜찮은 내구성을 보였지만, 또 부상이 그의 발목을 잡았고, 이번에는 디스크 파열로 인해 2008 시즌, 6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다. 결국 2008년 7월 부상으로 인해 그는 은퇴를 선언하고 선수생활의 마침표를 찍었다.
  • 통산 29경기 0골


3. 국가대표 경력[편집]


이미 대학생시절부터 미국의 연령별 대표를 두루 섭렵하며 1992, 1996 두 차례의 올림픽에 나섰고, 결국 아마추어 신분으로 1994년 1월, 성인 국가대표까지 발탁되어 노르웨이와의 평가전에서 A매치에 데뷔했다. 이어 1994 미국 월드컵 본선무대까지 밟아 자국의 기대주로 급부상했다.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도 주전이었고, 특히 2002 한일 월드컵에선 미국 국가대표팀 주장으로써 참여하였다. 2002 월드컵이 가장 그가 대활약했던 월드컵이었는데, 1차전 포르투갈전을 부상으로 결장했지만, 이후 2차전부터 8강전까지 전 경기를 소화하며 미국 공격의 핵심으로써 기능했고, 이 활약으로 대회 올스타팀에 뽑히기도 한다.

하지만 대표팀에서도 큼직큼직한 부상이 항상 그를 붙잡았다. 자신의 마지막 월드컵인 2006 독일 월드컵, 조별리그 3차전 16강이 결정되는 중요한 경기에서 가나와 맞붙게 되었고, 이 경기에서 가나 선수와 부딪히는 과정에서 또다시 십자인대 부상을 당하게 된것.[2] 그대로 그는 교체되어 나갔고, 미국도 1-2로 지면서 결국 16강 진출에 실패해 쓸쓸하게 귀국해야 했다. 이 경기는 그대로 레이나의 국가대표 은퇴경기가 되어버렸다. 두번째 십자인대 부상으로 원 소속팀 맨체스터 시티에서도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이로 인해 2007년 1월, 자국 리그인 MLS 복귀를 추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어린 시절부터 미국 대표팀의 핵심으로 활약했다보니 A매치 112경기 8골이라는 굵직한 기록을 남기고 은퇴했다.


4. 은퇴 이후[편집]


은퇴 후 그는 코치가 아닌 축구경영인의 길을 걷고 있다. 2013년, 시티 풋볼 그룹 계열의 신생팀 뉴욕 시티 FC가 창단될 때 맨체스터 시티와의 인연으로 팀의 초대 스포팅 디렉터에 임명되었다. 이 포지션에서 그는 신생팀의 영입 전략을 담당하게 되었고, 5년동안 뉴욕 시티를 빠르게 강팀으로 만들며 성공적인 직무 수행능력을 보여주었다.

2019년 11월, 그를 다시 창단 예정팀인 오스틴 FC가 영입해가면서 창단팀만 두 번 경험하는 이색적인 경험을 한다. 2021년 오스틴 FC가 MLS에 신생팀으로써 참여하면서 그도 2년만에 다시 MLS에 복귀하게 되었다.


5. 여담[편집]


  • 부인인 다니엘레 에건도 축구선수 출신으로, 1997년 미국 여자 국대에도 선발되었을 만큼 엘리트 축구선수였다.


  • 미국에서 클라우디오 레이나 재단을 설립해 유소년 축구 교육과 유망주 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고 한다. 선수시절 성과와 이런 공로를 기려 2012년 미국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했다.

  • 아르헨티나계라 스페인어를 영어처럼 잘한다. 또한 독일에서 오래 있었던 덕에 독일어로도 회화가 가능하다고 한다.

  • 영국에서 활약할 당시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장이었기 때문에 '캡틴 아메리카'라는 별명을 얻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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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anielle Egan Reyna. 전 축구선수. 미국 여자 대표팀 6경기 출전.[2] 심지어 그 상황에서 하미누 드라마니에게 볼을 뺐기는 바람에 골키퍼와 일대일 찬스를 내줬고 결국 선취골을 헌납했다.[3] 국가대표팀 후배 크리스천 풀리식 또한 이 별명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