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레사 탈리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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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탈리앵
Madame Tallien


이름
후아나 마리아 이그나치아 테레사 카바루스
(Juana Maria Ignazia Therésa Cabarrus)
출생
1773년 7월 31일
스페인 마드리드
사망
1835년 1월 15일 (61세)
벨기에 에노 시메
배우자
장 자크 데빈 퐁트네 (1788년 결혼 / 1793년 이혼)
장랑베르 탈리앵 (1794년 결혼 / 1802년 이혼)
프랑수아 조제프 필리프 드 리케 (1805년 결혼)
자녀
앙투안, 로즈, 프란시스, 클레멘스, 쥘, 클라리스, 오귀스트, 엘리자베스, 조제프, 미쉘, 마리
아버지
프랑수아 카바루스
어머니
마리아 안토니아 갈라베르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편집]


Thérésa Cabarrus, Madame Tallien

프랑스의 귀족이자 사교계 인사.


2. 생애[편집]


1773년 마드리드에서 프랑스의 은행가이자 스페인의 백작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 3살까지 마드리드에서 보낸 테레사는 교육을 위해 프랑스에 있는 수녀원에서 자랐다. 12살 때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지만 테레사의 아버지는 좋은 신랑감을 찾게 하기 위해 테레사를 다시 프랑스로 돌려보냈다. 테레사는 알렉산드르 드 라보르드라는 백작 가문 출신의 남성과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알렉산드르의 아버지는 테레사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테레사의 아버지 또한 자신의 입지를 다질 수 있는 더 좋은 혼사를 찾았다.

1788년에 테레사는 장 자크 데빈 퐁트네 후작과 결혼했다. 퐁트네 후작은 키가 작고 못생긴 남성으로 테레사보다 12살은 더 많았다. 결혼 후 테레사는 루이 16세의 프랑스 궁정과 카를로스 4세의 스페인 궁정에 모두 소개되었다. 1789년 5월에 테레사는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이 아이의 아버지는 퐁트네 후작이 아닌 것으로 추측된다.


1794년에 감옥에 갇힌 테레사. 한 손에 잘린 머리카락을 들고 있다.

1789년에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고 퐁트네 후작은 해외로 도망을 갔다. 테레사는 남편의 도주 이후 결혼 전의 이름을 쓰기 시작했고 1791년에 정식으로 이혼했다. 보르도로 피난을 간 테레사는 귀족의 아내라는 명목으로 체포되었다. 이때 테레사는 보르도에 파견되어 있었던 장랑베르 탈리앵과 만나게 되었다. 테레사는 그의 정부가 되어 파리로 따라갔지만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감옥에서 테레사는 조제핀 드 보아르네를 만나 친분을 쌓았다. 테레사는 옥중에서 편지로 탈리앵과 연락했고 탈리앵이 테르미도르 반동에 참가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1794년, 반동이 일어난 뒤 탈리앵은 테레사와 그녀의 친구인 조제핀을 석방시켰다. 같은 해 12월에 테레사와 탈리앵은 결혼해 로즈라는 딸을 낳았다. 테레사는 남편의 힘을 이용해 구금되어 있는 여러 사람들을 도왔고, '노트르담 드 테르미도르(Notre-Dame de Thermidor[1])'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후 테레사는 파리 사교계의 유명 인사로 떠올랐으며, 그녀의 살롱은 항상 사람들로 붐비게 되었다. 아름답고 화려한 테레사는 총재 정부 시대의 패션 리더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각종 보석으로 장식된 반지와 팔찌를 한번에 일고여덟개씩 하거나, 파격적인 의상을 하고 오페라에 나타나곤 했다. 사교계를 주름잡은 그녀는 감옥에 있었을 때 친해진 절친 조제핀을 사교계에 소개해 조제핀이 유명해지는 데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바라스를 풍자한 그림. 커튼 뒤의 나체의 여성들은 조제핀과 테레사다.

테레사는 수많은 연인을 두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폴 바라스 총재다. 테레사는 1797년에 바라스의 아이를 한 명 낳았다. 조제핀 또한 바라스의 정부였으며 당시 세 사람이 3P를 했다는 소문도 있었다고 한다. 한편 탈리앵은 반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인기가 없었고 빠르게 권력을 잃었다. 1802년에 테레사는 탈리앵과 이혼했다. 이후 테레사는 나폴레옹과 잠시 시시덕대다가[2] 바라스와 동거하였다. 바라스와 헤어진 뒤에는 이전부터 사귀어 왔던 우브라르라는 부유한 투기꾼과 만나며 5명의 아이를 두었다.

방탕한 생활을 하던 그녀는 1805년에 카라만 백작이자 16대 시메 공(Prince of Chimay)인 프랑수아 조제프 필리프 드 리케와 결혼하면서 자리를 잡았다. 음악을 사랑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던 두 사람은 여러 음악가와 교류하고 그들을 시메령에 초대했다. 테레사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3명의 아이를 낳았으며 1835년에 시메에서 사망하여 남편 옆에 안장되었다.

3. 여담[편집]


피부 관리를 위해 딸기 주스로 목욕을 했다. 한번 목욕할 때마다 10kg의 딸기를 썼다고 한다.

그녀의 삶을 다룬 각각 다른 영화가 <마담 탈리앵 (Madame Tallien)>이라는 제목으로 1911년, 1912년, 1916년에 개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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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어로 번역하기 어려운 별명인데, 영어로 번역하면 Our Lady of Thermidor라는 의미이다. Notre-Dame(Our Lady)는 가톨릭에서 성모 마리아를 일컫는 명칭인데, 그 자체로는 종교적 의미 없이 '우리의 레이디'라는 의미이다. 요컨대, Notre-Dame de Thermido는 '테르미도르의 성모' 내지는 '테르미도르의 레이디'라는 의미이다.[2] 이때 나폴레옹은 조제핀과 결혼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