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디 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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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Paddy Moore.jpg
이름
패트릭 무어
(Patrick Moore)
생년월일
1909년 8월 4일
사망년월일
1951년 7월 24일 (향년 41세)
국적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아일랜드
출신지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더블린 발리보
포지션
센터 포워드
신체조건
168cm / 69kg
등번호
-[1]
소속팀
샴록 로버스 FC (1928-1929)
카디프 시티 FC (1929-1930)
머서 타운 FC (1930)
트란메어 로버스 FC (1930)
샴록 로버스 FC (1930-1932)
애버딘 FC (1932-1935)
샴록 로버스 FC (1935-1937)
셸번 FC (1937-1938)
브라이드빌 (1938)
샴록 로버스 FC (1938-1941)
국가대표
9경기 / 7골 (아일랜드 자유 주 / 1931~1936)
1경기 / 0골 (아일랜드 / 1932)
감독
스텔라 마리스 FC (?-?)



1. 개요
2. 생애[2]
2.1. 선수 생활
2.2. 감독 생활
2.3. 사망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4. 뒷이야기
5. 수상
5.1. 클럽



1. 개요[편집]


포켓 헤르쿨레스


아일랜드의 전 축구 감독


2. 생애[3][편집]



2.1. 선수 생활[편집]



2.1.1. 클럽[편집]


무어는 유스 시절에 여러 클럽을 돌아다니다 아일랜드 A 디비전샴록 로버스 FC에서 성인팀에 데뷔했다.

이듬해 웨일스카디프 시티 FC로 이적해서 1년간 머물렀지만 단 한 경기 출전에 그쳤고 머서 타운과 트란메어 로버스를 거쳐 샴록 로버스에 복귀했다.

샴록에서 무어는 처음으로 우승의 감격을 누렸다. 1931-32 시즌에 아일랜드 A 디비전FAI컵 우승을 모두 달성해 더블을 달성한 것. 이 활약으로 무어는 조 오레일리(Joe O'Reilly)와 지미 달리(Jimmy Daly)와 더불어 국가대표팀 발탁과 스코틀랜드 에버딘 FC 진출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4] 그리고 무어는 첫 해에 1932-33 시즌에 29경기 27득점이라는 빼어난 성적을 거뒀고 팀 내 최다득점자도 그의 몫이었다.

하지만 1932-33 시즌이 끝날 무렵부터 무어의 평생을 발목 잡을 문제가 떠올랐으니 바로 이었다. 당시 에버딘의 감독이었던 패디 트라버스(Paddy Travors)는 무어가 아일랜드에서 이탈리아 월드컵 지역 예선전을 치를 동안 술을 못 마시게 하기 위해 일정 내내 그를 감시했다. 트라버스는 무어의 커리어가 알코올 중독때문에 빨리 끝날 것을 우려했고 이는 정확히 들어맞았다. 1935년에는 스위스와의 A매치 선발 명단에 올랐지만 이동 중에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바람숙취로 경기 출전이 불가하게 되는 사고도 쳤다.

결국 에버딘은 1935년, 무어와의 계약을 해지했고 무어는 샴록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샴록에서 1935-36 시즌 FAI컵의 우승을 차지한 이후 무어의 커리어는 계속 내리막을 탔다. 샴록으로의 3차 복귀 이후의 커리어는 정확하지 않다.


2.1.2. 국가대표[편집]


아일랜드는 1919년 독립 선언 이후, 1949년에서야 영국으로부터 영연방 탈퇴를 승인받았다. 그래서 이 당시 아일랜드의 국가대표 축구 선수들은 아일랜드 자유 주아일랜드의 2개의 대표팀에서 뛴 선수들이 많다. 무어도 그 중 하나이다.


2.1.2.1. 아일랜드 자유 주[편집]

무어의 A매치 데뷔전은 1931년 4월 26일의 스페인전이었다. 바르셀로나 몬주익 경기장[5] 원정 경기에서 무어는 전반 32분, 당시 세계 최고급 골키퍼였던 리카르도 사모라의 방어를 뚫고 선제골을 기록했다. 무어는 사모라와의 1대1 상황에서 칩슛으로 간단히 득점에 성공했고 사모라는 이 실점에 열이 받았는지 셔츠를 찢어 네트 뒤로 던져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아일랜드 자유 주는 무어의 득점 이후 불과 3분 만에 동점골을 허용했고 더 이상의 골은 안 나와서 결국 강호 스페인과 1대1로 비겼다.

스페인과의 리턴 매치에서 무어는 부상으로 빠졌고 그의 다음 A매치는 1932년 네덜란드와의 시합이었다. 무어는 후반 6분, 추가골을 기록해 아일랜드 자유 주의 2대0 승리를 이끌었다.

무어의 커리어 하이라이트는 바로 이탈리아 월드컵 지역 예선 벨기에전이었다. 1934년 2월 25일, 달리마운트 파크에서 무어는 벨기에의 골문에 무려 4골을 집어넣으며 FIFA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4골 득점자[6]에 등극했지만 아일랜드 자유 주는 벨기에와 4대4로 비겼다.

아일랜드 자유 주는 4월 8일에 네덜란드에 2대5로 패했는데 무어는 여기에서 만회골이자 A매치 마지막 득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4월 29일, 네덜란드가 벨기에를 4대2로 깨뜨리면서 아일랜드 자유 주는 벨기에에 골득실에 밀려 이탈리아 월드컵 본선 진출에는 실패했다.

무어는 1936년 10월의 독일전에서 또 한번의 대활약을 펼쳤다. 아일랜드 자유 주는 독일에 5대2 승리를 거뒀는데 무어는 직접 골을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4개의 골에 도움을 주었다.

그의 대표팀 마지막 경기는 1936년 12월 6일 헝가리전이었고 아일랜드 자유 주는 2대3으로 패했다.


2.1.2.2. 아일랜드[편집]

무어는 1932년에 아일랜드 소속으로 A매치에 뛴 적이 있다.

1932년 10월 17일, 무어는 잉글랜드와의 시합에 참가했지만 아일랜드는 잉글랜드에 0대1로 패했다.

12월 7일에 아일랜드 대표팀은 멤버를 그대로 유지한 채 웨일스와 경기를 치렀지만 무어는 부상으로 이 경기에 참가하지 못했다.

무어는 아일랜드 소속으로 1경기에 출전했다.


2.2. 감독 생활[편집]


무어는 1940년대에 스텔라 마리스의 감독을 맡아 훗날 아일랜드 대표팀에도 발탁되는 로니 웰란 시니어[7]를 지도하기도 했다.


2.3. 사망[편집]


무어는 1951년에 알코올 관련 질환으로 사망했다. 향년 41세.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편집]


무어는 양발잡이로 드리블과 공을 어느 발로든 편안하게 다룰 수 있었다. 그와 더불어 폭발적인 가속력과 엄청난 점프력도 갖춰 위협적인 공격수로의 재능을 갖고 있었다.


4. 뒷이야기[편집]


  • 로니 웰란 시니어를 처음 주목한 사람은 무어의 부인이었다고 한다.


5. 수상[편집]



5.1. 클럽[편집]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2] 출처: 풋볼핑크, 위키피디아, 11v11[3] 출처: 풋볼핑크, 위키피디아, 11v11[4] 3명을 묶어 에버딘은 천 파운드도 안 되는 싼 값을 이적료로 지출했다.[5] 1992년 올림픽 마라톤에서 황영조가 금메달을 딴 바로 그 경기장이다.[6] 본선으로 한정하면 월드컵 최초의 4골 득점자는 폴란드에른스트 빌리모프스키이다.[7] 1990년 월드컵에서 녹색 돌풍을 일으켰던 아일랜드 대표팀의 멤버 중 하나인 로니 웰란의 아버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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