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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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육상 남자 마라톤 우승자
파일:오륜기(여백X).svg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젤린도 보르딘
(1988)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황영조
(1992)


파일:남아프리카 공화국 국기.svg 조시아 투과니
(1996)


황영조
黃永祚 | Hwang Youngcho


출생
1970년 3월 22일 (54세)
강원도 삼척군 근덕면 초곡리
(現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근덕면 초곡리)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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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본관
평해 황씨
학력
궁촌초등학교[1] (졸업)
근덕중학교 (졸업)
강릉명륜고등학교 (졸업)
경주대학교 문화관광대학 (문화재학 / 학사)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학 / 학사[2])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체육교육학[3] / 석사[4])
고려대학교 대학원 (체육학[5] / 박사[6])
신체
170㎝, 68㎏, 265㎜
종목
육상
주종목
마라톤
종교
불교
병역
병역특례(예술체육요원)[7]
가족
배우자 안서연(1978년생, 2011년 12월 결혼-현재)[8]
장남 황유찬(2013년생)[9]
SNS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
2. 선수 경력
3. 은퇴
4. 은퇴 이후
5. 평가
6. 수상 기록
7.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前 마라톤 선수며,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이다. 황영조의 뒤를 이어 동갑내기 마라토너 이봉주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받았다. 현재 대한민국 마라톤계는 그와 이봉주 이후의 후계자가 안타깝게도 나오지 않고 있다.[10][11]

2. 선수 경력[편집]



2.1. 마라톤 입문 전[편집]


중학생 시절 사이클로 운동을 시작한 황영조는 강릉 명륜고 입학 후 육상으로 전향했다. 처음에는 중거리로 시작했지만 해녀 어머니의 영향으로 폐활량이 컸던 그는 1학년 2학기 때부터 장거리로 전향했다.

2.2. 1991년[편집]


경주대학교 재학 시절인 1991년 3월, 동아마라톤에서 3위로 입상하면서 마라톤계에 데뷔했다. 또한 같은 해 영국 셰필드에서 열린 하계 유니버시아드에서 금메달을 차지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2.3. 1992년[편집]



2.3.1. 국제대회[편집]


1992년 초에는 일본 벳푸의 벳푸-오이타 마라톤에서 2시간 8분 47초를 기록,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2시간 10분의 벽을 깨면서 2위를 기록했다.

당시 한국 마라톤에서 '2시간 10분'은 국제 무대와의 격차를 상징하는 경계처럼 여겨졌고, 이 점에서 황영조가 2시간 10분의 벽을 넘어선 것은 큰 의미를 가졌다. 여기에 그가 앞선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던 것까지 더해지면서, 수개월 후로 다가온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의 입상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주목받게 되었다.

2.3.2.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편집]



파일:황영조 바르셀로나.jpg


황영조! 여유 있는 모습! 황영조, 골인 직전! 황영조! 황영조! 25회 바르셀로나 올림픽 월계관의 주인, 황영조! 골인 직전! 골인 직전! 황영조! 황영조! 골인! 황영조~! 금메달! 올림픽 금메달! 2시간 13분 23초!

KBS 김윤한 캐스터의 골인 멘트[12]


8월 9일에 열린 마라톤 경기에서 김완기[13], 김재룡[14] 등과 함께 출전해 1936 베를린 올림픽손기정 이후 56년 만에 마라톤 금메달을 수상했다. 이것이 대한민국 국적을 내걸고 받은 사상 첫 마라톤 금메달이자 올림픽 육상에서의 대한민국 소속으로 딴 유일한 금메달이다. 당시 바르셀로나 주경기장 서쪽의 급경사 난코스인 '몬주익 언덕'에서 마지막 스퍼트를 통하여 2·3위로 뒤쫓아오던 일본의 '모리시타 고이치'와 독일 선수 스테판 프라이강[15]과의 차이를 크게 벌리고 1위로 골인한 뒤 쓰러진 일화로 인해 몬주익의 영웅이라고 불렸다. 그의 마라톤 금메달은 과거 손기정이 국권 상실 상태로 출전해 일장기를 달고서 금메달을 획득했던 역사상의 상처를 씻었다는 점에서 민족사적으로 지대한 가치가 있었다. 때문에 황영조의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골인 장면은 꽤 오랫동안 지상파 방송사의 애국가에도 단골로 삽입됐다.

당시 황영조의 올림픽 금메달 획득에는 어느 정도 행운도 따라 주었다. 전년도에 열린 1991 세계선수권 남자 마라톤에서 우승했던 일본의 다니구치 히로미가 레이스 도중 급수대에서 물병을 잡다가 운동화가 벗겨져 넘어지는 바람에 페이스가 흐트러져서 8위에 그쳤다. 만약 다니구치에게 이런 불운이 닥쳐오지 않았다면 황영조, 모리시타와 레이스 막판까지 선두 그룹을 유지할 수 있었고[16], 그렇게 되면 황영조는 이 두 일본인 선수의 견제에 휘말려 금메달 획득이 어려웠을 수 있었다. 오히려 황영조와 코오롱 마라톤 팀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팀 동료 김완기가 33km 지점까지 황영조, 모리시타와 선두 그룹을 이루며 모리시타를 견제하고 뒤로 처졌다.[17] 사실상 김완기가 페이스 메이커 역할을 했던 셈이다.[18] 물론 그런 행운을 감안하더라도 올림픽 마라톤 역사상 최악의 무더위와 최악의 난코스의 조합으로 첫 손에 꼽히는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당당히 따낸 황영조의 금메달은 절대로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되는, 피와 땀과 눈물의 결실이다. 그리고 이 금메달이 지금까지도 올림픽 마라톤 종목에서 아시아 국가가 획득한 마지막 금메달이다. 또한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이봉주의 은메달도 아시아 국가가 획득한 마지막 마라톤 메달이다.[19]


파일:황영조 손기정.jpg

특히 이 날 경기장에는 손기정이 직접 참석하여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컸다. 당시 손기정 옹은 마라톤 경기일(8월 9일)이 56년 전 자신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제패와 같은 날짜임을 알고서 각별한 기대를 안고 바르셀로나를 방문했던 것이다.[20]

2.4. 1994년[편집]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 출전하여, 히로시마 평화기념관에 1위로 골인하며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 옛날 한국 육상계의 대선배 손기정과 남승룡에게 일장기를 달고 뛰도록 강요했던 일본 땅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차지하며 다시금 국민들의 환호를 받은 것이었다.

2.5. 1995년[편집]


10월 28일에 열린 조선일보 춘천국제마라톤 대회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레이스 초반 물병을 집다가 다른 선수들에게 밀려 허벅지에 상처가 나는 불운 탓에 2시간 11분 42초라는 다소 저조한 기록으로 에콰도르의 '롤란드 베라'에 불과 2초 차로 밀려 2위를 차지했다. 이듬해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서는 그 해 3월 동아국제마라톤에서 더 좋은 기록을 낼 필요가 있었다.

2.6. 1996년[편집]


그러나 3월 24일에 열린 동아국제마라톤 대회에서 선두 그룹을 형성하여 잘 달리다 27㎞ 지점에서 발바닥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해 레이스에서 이탈하고 말았다. 다시 일어나 힘차게 달렸지만 이미 경쟁자들은 저만치 앞서 달리고 있었고 결국 29위(2시간 25분 45초)로 골인했다. 전년도 조선일보마라톤과 이 대회의 기록 중 좋은 기록이 3위 안에 들어야[21] 애틀랜타 올림픽에 나갈 수 있었는데, 황영조는 동갑내기 이봉주[22], 김완기[23], 김이용[24]에 이어 4위에 머물러[25] 올림픽행이 좌절되었다. 이에 황영조를 구제해야 한다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커졌고, 대한육상경기연맹은 황영조를 예비 엔트리에 넣어 그가 올림픽에 출전할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황영조를 제외한 누군가가 탈락한다면 해당 선수의 반발이 예상되었고[26], 고뇌하던 황영조는 결국 기자회견을 통해 세는나이로 27세라는 한창 나이에 은퇴를 공식 선언했다.

3. 은퇴[편집]


흔히들 황영조를 올림픽 금메달과 아시안 게임 금메달 이후 전성기를 오래 누리지 않고 빠르게 은퇴해 버린 한량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많다. 특히 후술할 자기관리 부재로 인한 추문이 있었기 때문에, 게으른 천재유리멘탈 취급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사실 이런 평을 듣는 이유가 후술할 은퇴 이후의 사건사고 때문인데, 안타깝게도 그로 인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거기에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동갑내기 이봉주의 성실함, 보다 오랜 선수 생활 기간과 더욱 대비되기도 한다. 물론 황영조가 이른 은퇴를 한 건 그의 멘탈이나 성실성과는 다른 문제인 고질적인 발 부상 때문이었다.

황영조는 올림픽 때도 족저근막염을 앓고 있었다. 황영조는 경기 당일 아침 기상했을 때도 통증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소속팀의 회사인 코오롱 스포츠에서 거액을 들여 개발한 마라톤화와 아식스에서 만든 마라톤화를 두고 고민하다가 결국 아식스 제품을 신고 경기에 나갔는데 상당수가 코오롱 제품을 신고 금메달을 딴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족저근막염이라는 게 심각하지 않을 때는 자고 일어나면 통증이 심하다가 운동을 하다보면 통증이 가라앉는데 황영조도 그러했다고 한다.

족저근막염 때문에 올림픽이 끝나고 휴식과 회복에 전념하고 싶었지만 대한육상연맹이나 언론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고, 결국 족저근이 찢어지는 사달이 나서 수술대에 올랐다. 수술 후 회복에 성공해서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마라톤도 제패했는데, 정말로 황영조가 음주가무에 찌들어 나태한 상태였다면 발바닥 수술을 받고 나서 다시 재활에 성공하고 금메달을 따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1996년 족저근막염 재발로 자신의 미래에 대해 고민할 수 밖에 없었고, 여러 문제로 은퇴하게 된 것이다.

이봉주의 경우는 마찬가지로 수술을 받고 재활에 성공해서 꾸준히 선수생활을 했지만, 황영조는 그러지 못했다고 비난을 퍼붓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족저근막염은 애초에 사람이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이상 반드시 재발할 수 밖에 없는 평생 병이며, 한 번 찢어져서 수술 받은 부위가 또 심각하게 손상돼서 재수술을 받게 된다면 평생 제대로 걷는 게 힘들 수도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은퇴를 결심했으니, 비난하는 것은 잘못된 행위다.

4. 은퇴 이후[편집]



4.1. 2001년[편집]


은퇴 이후 국민체육진흥공단 마라톤팀 감독을 맡았으나 2001년 부적절한 처신과 독단적인 팀 운영, 비인간적 대우와 비상식적인 훈련 등으로 선수들과의 마찰이 발생, 선수들이 육상연맹에 탄원서를 제출하고 집단 이탈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선수들은 모두 다른 팀으로 이적하였으며, 팀 운영과 관련해 물의를 빚은 책임을 물어 육상연맹 강화위원직도 박탈당했다. 12월에는 음주운전에 적발되어 100일 면허정지 처분을 받았다.

4.2. 2003년[편집]


2003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 홍보대사로 위촉되었으며, 강원대학교에서 육상 교양과목과 코칭론을 강의하는 겸임교수가 되었다.

4.3. 2004년[편집]


'황영조 마라톤 스쿨' 이라는 마라톤 입문서를 출간했으며,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강원일보 아테네통신원으로 활동했다. 올림픽이 끝난 후에는 대한올림피언협회(KOA) 이사로 선임되었다.

4.4. 2005년[편집]


대한체육회 이사에 선임되었으며, 세계선수권 마라톤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4.5. 2006년[편집]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마라톤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5. 평가[편집]


마라톤 관련 그의 천재적 재능은 바로 뛰어난 폐활량에 따른 어마어마한 심폐지구력에 있었다. 부친은 어부였고, 모친이 강원도 해녀 이만자 여사인데, 유전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현역 시절 폐활량이야 훈련을 해서 얻었겠으나, 훈련을 해도 늘릴 수 있는 양은 사람마다 선천적인 한계가 있다. 그런데 그는 '일반적인 마라톤 선수들' 범위보다 훨씬 뛰어났다. 해외 탑급 마라토너들에 비해서도 '약간 더 큰' 폐활량을 가진 선수로 심폐지구력이 세계 최고급이라는 것은 마라톤에 매우 유리한 재능이기에, 올림픽 이전에도 원래부터 마라톤계에서 세계적인 유망주로 꼽히기도 했었다. 이봉주조차 황영조의 엄청난 폐활량에 부러움을 느꼈다고 할 정도였다.[27]

6. 수상 기록[편집]


올림픽
금메달
1992 바르셀로나
마라톤
아시안 게임
금메달
1994 히로시마
마라톤
유니버시아드
금메달
1991 셰필드
마라톤

7. 여담[편집]


  •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등장한 공식적인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로서 많은 영예를 누렸으나, 영 좋지 않은 사생활, 음주운전, 불법전대의혹 등 자기 관리 문제로 인해 숱한 질타를 받아 육상 영웅으로서의 위상이 많이 실추되었다.

  •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직후인 1992년 8월 16일 KBS2에서 생방송으로 방송된 '행운의 스튜디오'[28]에 출연하였다.영상은 여기로

  • 본인보다 1년 어린 개그맨 윤정수[29]와 고등학교 동창이다. 심지어 같은 반이었던 적도 있다. 동창이 된 이유는 황영조가 고등학교 1학년이 끝날 때 체육의 길을 반대한 부친과 큰 갈등을 겪다가 결국 반강제로 육상부를 그만두게 된 것에 큰 충격을 받아 1년 휴학을 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부친이 아들 중 첫째인 황영조가 공부로 가난한 집안의 대들보가 되기를 바라서 황영조의 3살 위 친누나[30]에게는 "영조만 대학 공부를 지원하겠다"며 이미 학비를 대 주지 않아 대학 진학을 안 시켰는데, 황영조가 체육의 길을 걷게 되자 4명의 자식 중 황영조만 공부로 대학을 보내려던 본인의 자녀 양육계획이 꼬였고 이미 고졸 후 대학을 못 가고 취업한 큰 딸을 볼 낯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2가 되어야 할 시점에 휴학 상태로 어부인 부친과 함께 어시장에서 일하는 동안 학교 측이 부친을 설득하여 다시 육상의 길을 걷기로 했고, 복학 전부터 훈련을 하였다가 다음해가 되어, 정식 복학 후 1년 후배들과 고2부터 새로 다녔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학창시절, 윤정수의 말로는 황영조의 사정을 알게 된 반 친구들 상당수가 황영조가 훈련할때 상당기간 훈련은 도와줬다고 한다. 황영조가 달리다가 지칠때 반 친구들이 뒤로 쫓아가서 멈추지 말라고 다시 힘을 낼 때까지 그의 등을 손으로 밀어주기를 반복했다. 오죽 열심히 도와줬으면 나중에 반 학생들 대다수가 다같이 체력이 좋아져서 체력장 만점을 받았다. 황영조가 고등학교를 이미 먼저 다니다가 1년을 휴학한거지, 같이 입학한 게 아니라 2학년부터 같이 다닌, 엄밀히 말해 1년 선배임에도 반친구들과 그냥 친구를 먹어서, 윤정수는 황영조에 대해 말할 때 황영조씨나 황영조 선수도 아니고 그냥 "영조가", "황영조를"이라고 그냥 반말로 부른다. 윤정수가 잘 나가던 신인 개그맨이고 황영조가 금메달을 따서 한창 오락프로그램에 나오던 때인 1992년과 1993년에 몇번 같은 방송에 친구로 출연한 적이 있다.

  • 상술된 휴학 문제 때문에 경주대학교에 90학번으로 입학했다. 재수가 아니라 고등학교 휴학 문제이다. 이후 고려대학교로 편입을 했는데[31],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다.

  • 고등학생 시절 구간마라톤 대회 참여 당시 학교 홍보를 위해 1주자로 내세워 1구간 내내 방송에 나갔다고 한다.

  • 연금 점수가 이봉주보다 10점이 더 높다.

  • 2014년 부터 국민체육진흥공단 마라톤 팀 감독으로 재직 중이고, 2015년 11월 1일에는 JTBC의 중앙서울마라톤 대회 중계방송 해설로 참여했으며, 2016년 3월 20일 채널A의 서울국제마라톤대회 중계방송 해설로 참여했다.

  • 2014년 초에는 서울시에서 500만원에 임대받은 잠실주경기장 내의 사무실을 불법으로 지인에게 재임대한 사실이 적발되었다. 이 때문에 징계위원회에 회부되고, 약식기소 되는 등 구설수가 잦은 편이다.

  • 2017년, 스포츠서울과 "이봉주는 내 라이벌이 아니었다"는 제목의 인터뷰를 했는데, 네티즌들의 반응은 위의 사건사고들 때문인지 영 좋지 못한 편이다. 성공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대표적인 케이스다.


  • 모교인 강릉명륜고등학교에서 황영조의 이름을 따서 체육관을 지었다.[32]

  • 이봉주의 부인이 황영조의 중학교 동창이다. 이봉주가 황영조의 고향으로 놀러갔다가 황영조의 생일에 동창들이 모인 자리에서 부인을 처음 만나 결혼까지 골인했다.

  • 젊을때는 당시 히트드라마 파랑새는 있다로 유명해진 배우 이상인과 닮았다고 주목받았었다. 이상인도 드림팀의 스타로서 운동선수는 아니어도 운동선수급 신체능력을 가진 무술인이다 보니 이미지가 상당히 유사했다. 하지만 황영조가 나이를 더 먹고 중년부터 살이 찌면서 외모가 심형래와 비슷하게 변화되고 있다.

  • 그의 출생지인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초곡리에 황영조기념공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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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1년 3월 1일 자로 근덕초등학교 궁촌분교장으로 격하되었다.[2]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3] 체육교육 전공[4] 석사 학위 논문 : 마라토너 孫基禎의 生涯와 思想(1998. 2)[5] 스포츠사회학 전공[6] 박사 학위 논문 : 마라톤의 문화적 인식과 활성화 방안 연구(2009. 2)[7]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8] 직업은 교사로 알려져 있다.[9] 아들이 마라톤 선수가 되겠다면 기꺼이 선수로 키우겠다고 한 적이 있다.[10] 현재 남자 마라톤은 아프리카 출신 선수들이 '그들만의 리그'를 펼친 지 오래되었다. 황영조 이후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는 이탈리아인이 1명(2004 아테네 올림픽 '스테파노 발디니') 있고, 나머지는 다 아프리카 선수들이다. 게다가 올림픽 역사상 금메달을 획득한 "동양" 남자선수는 손기정과 황영조 단 2명 뿐이다. 전체 메달로 넓히면 마지막으로 마라톤 종목에서 메달을 획득한 "동양" 남자선수는 1996년 이봉주(은메달)이다.[11] 심지어 2020 도쿄 올림픽에서는 심종섭이 대회를 4개월 남짓 앞둔 2021년 4월 4일에야 기준 기록보다 불과 6초 빠른 기록으로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다. 그가 출전권을 따내지 못했다면 케냐에서 귀화한 오주한 1명 만이 올림픽에 출전할 뻔했다.[12] 김윤한 아나운서의 회상에 따르면, 당시 감동을 극대화하기 위해 황영조라는 이름을 강조해서 외쳤다고 한다.[13] 황영조가 벳푸-오이타마라톤에서 2시간 10분벽을 돌파하기 전까지 한국기록(2시간 11분 2초) 보유자였다.[14] 황영조 등장 이전까지 김완기와 쌍두마차를 이루던 간판스타로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10위에 오른 이후 이듬해인 1993년 보스턴마라톤 준우승과 세계육상선수권 4위에 올랐다.[15] 이 선수는 일본의 나카야마 다케유키와 경기장 진입시까지 치열한 3위싸움을 벌이다 막판 스퍼트로 나카야마를 2초 차로 제치고 동메달을 땄다.[16] 2000 시드니 올림픽에 출전한 이봉주가 레이스 초반에 넘어졌음에도 페이스를 회복하지 못해 24위로 골인했던 것을 생각하면 중반에 넘어지는 불운 속에서도 8위까지 순위를 끌어올린 다니구치가 그만큼 대단한 것이다. 더욱이 다니구치는 바르셀로나 올림픽 당시 세는 나이로 33세였다.[17] 황영조는 대회 당시 일본선수들과 신경전이 있었다고 한다. 손기정은 이유야 어찌됐든 일본국적으로 금메달을 딴거지 너네나라가 아니다라는 말을 듣고 화가 굉장히 났다고 한다. 결국 경기내내 모리시타가 페이스메이커가 되면서 금메달을 획득했고, 일본에서 두번다시 그런말을 입밖에 꺼내지도 않았다 한다.[18] 보스턴마라톤, 런던마라톤 등 단일 마라톤 대회는 좋은 기록을 내서 권위를 인정받는 것이 주된 목적이기 때문에 코스를 최대한 평탄하게 선정할 뿐만 아니라 페이스 메이커를 최대한 활용하여 기록 단축에 힘쓴다. 여기에 날씨가 비교적 쾌적한 3~4월이나 9~10월에 대회 일정을 잡는다. 하지만 올림픽, 세계선수권, 아시안 게임 등 종합 대회의 마라톤은 기록보다는 메달 경쟁이기 때문에 페이스 메이커의 개념이 희박하고 사실상 모든 선수가 메달을 목표로 레이스를 펼친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의 김완기도 황영조 등장 이전까지는 대한민국 남자 마라톤의 간판스타였고,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좋은 기록을 냈기 때문에 당당하게 국가대표로 뽑힌 것이다. 후배의 페이스 메이커의 역할이나 하려고 바르셀로나의 지독한 무더위 속에서 힘겨운 레이스를 펼친 것이 결코 아니다.[19] 황영조 이후로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에티오피아, 케냐, 우간다 등 아프리카 국가에서 마라톤 금메달이 많이 나왔다. 황영조 이후 유일한 비아프리카인 남자 마라톤 금메달리스트가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의 스테파노 발디니(이탈리아)인데, 그 발디니의 금메달도 레이스 후반까지 압도적 선두를 달렸던 브라질의 '반데를레이 리마'가 관중의 습격을 당하는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리마가 금메달을 땄어도 비아프리카인 금메달리스트다.[20] 바르셀로나 현지로 중계를 간 최우철 앵커 대신 손석희 앵커가 서울 스튜디오에서 백업을 들어갔는데 이 사실을 짚어 주는 코멘트로 그날 아침 MBC 뉴스와이드 오프닝을 했다.[21] 1996 동아국제마라톤에서 국내 3위 안에 든 이봉주, 김완기, 김이용의 기록이 모두 1995 조선일보마라톤에서의 황영조의 기록보다 훨씬 빨랐다.[22] 1996 동아마라톤에서는 전년도 세계선수권 우승자인 스페인의 '마틴 피스'와 막판까지 치열한 선두다툼을 벌이다 결승선을 150m 앞두고 피스에게 추월을 허용, 1초 차로 아쉽게 준우승했다.[23] 황영조 이전까지 한국 남자마라톤의 간판스타였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33㎞ 지점까지 황영조, 모리시타 고이치와 선두그룹을 유지하다 바르셀로나의 무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뒤처져 28위까지 밀려났는데, 사실 무더운 날씨는 김완기의 최대 약점이었다. 그 후 1993 동아마라톤에서 그 해 세계랭킹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을 냈고 국제대회 승격 원년이 된 1994 동아국제마라톤에서 2시간 8분 34초의 한국신기록을 세웠으나 불과 한달 후 보스턴마라톤에서 황영조가 2시간 8분 9초로 다시 깼다.[24] 황영조의 고등학교 후배다.[25] 상술한 대로 1995 조선일보마라톤에서 좋은 기록을 냈다면 논란이 발생할 여지조차 없었을 것이다.[26] 세 선수들 모두 국가대표 선발전을 통해 정정당당하게 선발된 선수들이었다. 이런 선수들이 정당하게 따낸 출전권을 누군가를 위해 양보하게 된다면 공정성이 생명인 스포츠에서 원칙이라는 것이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국제대회에서 초강세를 보이는 쇼트트랙이 잊을 만하면 짬짜미 논란이 불거져 국민들로부터 괄시받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27] 황영조는 어머니가 본인을 임신했을때도 해녀 활동을 하고 계셨다 하셔서 그런 부분애 대한 영향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했다.[28] 근로자들이 회사의 명예를 걸고 다른 회사와 게임을 겨루던 프로그램이었다.[29] 정확히는 2살 차이지만 윤정수가 빠른 나이라 1년 후배여야 한다.[30] 고등학생 때 전교 1등만 하던 수재였다고 한다.[31] 경주대학교를 졸업한 후 1994년에 고려대학교 3학년으로 편입(학사편입)해서 92학번을 들어갔다. 이 역시도 당시 언론에서는 1994년에 편입했다고 신문에 94학번으로 표기하는 등 잘못 알려진 부분이 많다.[32] 그러나 2020년을 기준으로 철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