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육과정평가원/역대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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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박도순 원장 (초대)
3. 김성동 원장 (2대)
4. 이종승 원장 (3대)
5. 정강정 원장 (4~5대)
6. 김성열 원장 (6대)
7. 성태제 원장 (7대)
8. 김성훈 원장 (8대)
9. 김영수 원장 (9대)
10. 성기선 원장 (10대)
11. 강태중 원장 (11대)
12. 이규민 원장 (12대)
13. 오승걸 원장 (13대)



1. 개요[편집]


파일:한국교육과정평가원 CI.svg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역대 원장


성명
재임 기간
초대

박도순
1998. 1. 1 ~ 2000. 12. 31
제2대

김성동
2001. 1. 1 ~ 2002. 9. 13
제3대

이종승
2002. 9. 14. ~ 2003. 12. 4
제4~5대

정강정
2003. 12. 24 ~ 2007. 12. 24
제6대

김성열
2008. 5. 16 ~ 2011. 3. 10
제7대

성태제
2011. 3. 16 ~ 2014. 3. 15
제8대

김성훈
2014. 4. 15 ~ 2014. 11. 24
제9대

김영수
2015. 4. 13 ~ 2017. 6. 30
제10대

성기선
2017. 10. 31 ~ 2021. 2. 18
제11대

강태중
제12대

이규민
제13대

오승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역대 원장 목록.


2. 박도순 원장 (초대)[편집]


한국교원대학교, 고려대학교 교수 출신. 고려대학교 교육학 학사, 석사, 피츠버그 대학교 교육방법론 전공 박사.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전신인 국립교육평가원의 마지막 원장을 지냈으며 1998년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설립 후 자연스레 초대 원장이 되었다. 이전에 대학수학능력시험 도입에 참여하였다.

퇴임 후 2004년 노무현 정부의 교육혁신위원회 선임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정권의 의중에 따라 전성은 교육혁신위원회 위원장과 함께 수능 5등급제(수능 등급제)와 입학사정관제를 밀어붙여 큰 논란을 야기했다. 교육혁신위원회는 수능과 본고사 등의 기존 입시 체제를 모두 비판하며 미국식 입학사정관제 위주의 대입 제도를 도입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안병영 교육부 장관이 5등급제를 결사 반대하고 9등급제를 고집하여 관철시켰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의 의중을 거스른 대가로 안병영 장관은 2005년 1월 곧바로 경질되었다.

결국 2007년 수능은 사상 초유의 9등급제로 실시되었다. 등급 이외에는 성적이나 퍼센트를 일체 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에 대해 로또 수능이라는 여론의 반발이 거세었기 때문에 2007년 이후 곧바로 폐기되었다.

원장에서 물러난지 근 20년이 지난 최근 언론에서 현행 수능을 비판하고 있다. 현재의 수능은 지나치게 어려워 원래 수능의 취지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이다. 박도순 본인이 원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초기 수능은 대학에 갈 정도의 수험생이라면 누구나 맞출 수 있게 설계되었다고 한다.[1] 하지만 지금의 수능은 처음의 수능과 99% 달라졌다고 말했다. “수능은 교육과정을 충실히 이행한 사람이면 능히 맞힐 수 있는 문제를 내야 하는데 자꾸 변별력을 높인다.", “내가 지금 수능을 보면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아마 졸업한 대학에 입학할 수 없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최근 박도순이 수능을 비판하는 인터뷰가 언론에 자주 실리며 언론에서 박도순을 수능 창시자라고 띄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박도순이 수능 창시자라는 것은 매우 과장된 수식어다. 박도순이 수능 도입에 참여한 여러 인물 중 한명인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이지만, 수능 개발에는 많은 연구진과 학계 관계자가 참여했다. 특히 중앙교육평가원과 함께 초기에 수능 개발을 주도했던 인물로는 황정규[2], 이종승[3] 등이 있다. 이들은 중앙교육평가원의 의뢰를 받아 수능 개발 연구를 진행했다. 박도순은 당시 학회 등에서 대입 제도 개선 등에 대해 발표한 적은 있지만 수능 개발 당시 중앙교육평가원으로부터 직접 의뢰를 받아 연구를 진행한 적은 없다. 박도순이 현(現) 평가원 초대 원장이기 때문에 수능창시자라고 한 듯한데, 이는 막 갖다 붙인 말에 지나지 않는다. 수능 자체가 현 평가원이 출범하기 한참 전에 개발, 시행되었다. 수능은 중앙교육평가원 장기옥 원장(초대)과 주순호 원장(2대) 시절에 기초연구가 진행되었다. 이후 공영목 원장(3대) 시절에 사실상 체계 개발이 완료되었고, 이와 함께 문교부의 대입입시 개편안도 확정되었다. 이후 오덕렬 원장(4대) 시절부터 고3을 대상으로 수능 실험평가가 시행되었고, 박병용 원장(7대) 시절인 1993년 8월 첫 수능이 시행되었다. 첫 수능 이후 김하준 원장(8대)이 2년차인 95학년도부터 97학년도 수능까지 출제 및 시행을 주관하였고, 이후 1997년 9월 박도순이 8대 국립교육평가원장으로 취임하여 1998년 1월 1일 국립교육평가원을 대신하여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출범하자 초대 원장이 된 것이다.[4]

3. 김성동 원장 (2대)[편집]


서울교육대학 학사,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철학 박사.

대통령 비서실 교육비서관 출신이다.

고등학교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에 대한 편향 서술 관련한 정부 내부의 대책 문건을 외부로 유출한 혐의에 따른 책임으로 1년 8개월 22일만에 중도 사퇴했다. 대통령비서실 교육비서관, 교육부 기획관리실장 등을 지냈으며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 사임 이후 경일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4. 이종승 원장 (3대)[편집]


충남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출신. 문산농고,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학사, 시카고 대학교 교육평가 전공 박사.

1980년대말, 대학수학능력시험 도입에 관한 여러 연구 논문, 보고서 등을 발표하여 수능의 토대를 마련한 바 있다.

2004학년도 수능에서 고3 자녀를 둔 학부모가 출제위원에 위촉된 현황, 학원 강사 출신 대학교수가 출제 위원에 포함된 사실, 언어 영역에서 사상 초유의 복수 정답 사태[5] 등의 논란이 발생하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5. 정강정 원장 (4~5대)[편집]


국무조정실, 장상, 고건 국무총리 비서실장 출신.

노무현 정권 출범 이후 임명된 첫 평가원장이며, 이후 연임되어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하기 두달 전까지 평가원장을 역임하면서 노무현 정부 하에서 이뤄진 수능 개혁의 중심에 있었다.

평가원장 취임 전에는 김대중 정부 ~ 노무현 정부에서 국무조정실을 거쳐 국무총리비서실장을 역임했다. 평가원이 설립된 이래 최초로 교육 관계자가 아닌 행정관료 출신으로 원장이라는 점에서 큰 충격과 화제를 몰고 왔다. 원래는 초등교사를 하다가 9급 공무원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으며 김대중 정부에서 1급인 국무조정실 규제개혁조정관, 차관급인 국무조정실 총괄조정관 및 국무총리비서실장을 역임하였다.

노무현 정권에서 4년간 평가원장을 지내며 당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노무현 정권의 교육정책을 추진하는데 앞장선 인물 중 하나였다. 수능 과목 대폭 축소, 수능 범위 대폭 축소 등 숱한 논란 속에서 진행된 노무현 정권의 교육 개혁을 충실히 이행했다. 그러나 수능 과목과 범위가 대폭 축소되면서 학생들을 입시 지옥에서 해방시키겠다는 정권의 공언과 달리 오히려 수능이 점차 어려워지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킬러 문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노무현 정권의 교육 개혁 방향에 충실하게 따른 결과, 최초의 비교육계 출신 평가원장이라는 우려와 비판에도 불구하고, 평가원 설립 이래 처음으로 연임되며 6년 임기를 보장받았다.

특히 임기 후반에는 노무현 정권의 숙원 사업이자 당시 엄청난 논란을 야기했던 수능 등급제 시행에 앞장섰다. 노무현 정권이 추진한 '수능 등급제'는 수능 성적표에 점수와 석차, 백분율 등을 일체 표기하지 않고 오로지 등급만 표기하는 방식이었다. 로또 수능이라는 숱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노무현 정권이 끝나기 직전인 2007년 11월에 치러진 2008 수능에서 기어코 등급제 수능을 실시했다.

그러나 2008학년도 수능 물리Ⅱ 복수정답 사태가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평가원 원장은 관습법을 운운하며, 거짓 해명 등으로 오히려 논란을 키웠다. 복수정답 사태 이후 한 달 넘게 자리를 버텼으나, 2007년 12월 치러진 17대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사상 최대의 득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되며 정권 교체가 확정되자 그제서야 책임을 지겠다며 울먹이며 사퇴했다. 그리고 국민들의 엄청난 반발을 샀던 '수능 등급제' 역시 1년만에 폐지되었다.

6. 김성열 원장 (6대)[편집]


경남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출신. 서울대학교 교육학 학사, 석사, 박사.

고교 다양화 300프로젝트,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등에 참여하였다. 재임 기간은 2008년 5월 16일부터 2011년 2월 28일이며, 2009, 2010, 2011학년도 3차례 수능을 큰 무리 없이 치러냈다. 2009학년도, 2011학년도 수능은 역대급 불수능으로 유명하고 2010학년도 수능도 본수능은 무난했으나 6월, 9월 모의평가가 매우 어려운 난이도로 출제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7. 성태제 원장 (7대)[편집]


이화여자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출신. 고려대학교 교육학 학사, 위스콘신대학교(매디슨캠퍼스) 석사, 교육평가 전공 박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성태제 원장 개인 홈페이지

  •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위스콘신대학교(매디슨캠퍼스)에서 교육평가 분야의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 1989년부터 이화여자대학교 교육학과 교수를 맡았으며 1995년부터는 평가원 수능출제 자문위원이었다. 3대 이종승 원장처럼 대학수학능력시험의 기초적인 틀을 닦은 바 있다.

  • 과거에 몇 차례 평가원장에 응모하였다가 최종 3인 후보에서 낙마한 적이 있었다.

  • 2011년 3월 16일 제7대 평가원장에 취임했다. 평가원장이 되기 전에는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사무총장으로 재임하고 있었다.

  • 수능 자문위원 시절 수능 개편안 연구에서 선택형 수능인 A/B형 체제에 대한 연구물을 내놓은 바 있다. 자기 연구 결과물로 자기가 수능 치를 줄은 몰랐겠지


  • 재임 중에 수능 난이도 하향을 위한 만점자 1% 정책을 내기도 했다. 물론 별 의미없는 1% 맞추기용 난이도 조절을 하다가 2년만에 실패로 돌아가 없던 일이 됐지만, 최근의 불수능 기조에서는 오히려 재평가 받고 있다는 듯. 2012학년도 수능 외국어와 수리 나형, 2013학년도 수능 언어에서 물수능을 보여주면서 전임 원장에 비해 쉬운 난이도를 선호하는 것으로 보였으나 2014학년도 수능 수학 B형과 영어 B형에서 화끈한 불쇼를 보여주고 임기를 끝마쳤다. ???: 한번쯤은 불로 내야지

  • 대한민국 교육평가 부문의 권위자이며, 공립 교원을 양성하는 사범대학의 교직수업, 특히 교육평가 강좌에서 성태제의 저서가 주교재로 많이 사용된다.

8. 김성훈 원장 (8대)[편집]


동국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출신. 서울대학교 교육학 학사, 석사, 일리노이대학교 교육측정평가 전공 박사.

평가원장에 취임하기 전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학장을 역임했다.

2014학년도 수능 세계지리 출제 오류 사태 수습을 시도했으나, 2015학년도 수능에서 벌어진 생명과학Ⅱ와 영어에서 일어난 복수정답 사태의 책임을 지고 1년만에 사퇴했다. 이에 따라 총 재임기간 7개월 9일로 역대 최단명 평가원장이 되었다. 또한 2015학년도 수능은 역대급 물수능으로 알려지며 난이도 조절에도 완전히 실패했다는 평을 받았다.


9. 김영수 원장 (9대)[편집]


서강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출신. 스탠포드 대학교 사회학 박사.

서강대 입학처장을 두 번 역임였다. 이후 18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참여했다. 2014년 12월부터 교육부 수능개선위원회 위원을 역임하고 있으며, 2015년 4월 10일에 9대 원장으로 부임했다.

  • 2016학년도 모의평가들에서는 전임 원장 때에 이어 역대급 물모의(...)가 출제되었지만 본수능에서는 국어와 영어에서 꽤 변별력 있는 난이도의 수능이 출제되었다. 그리고 2017학년도에는 난이도가 더욱 상승해서 몇년만에 불수능으로 평가받는 수능이 되었다.

  • 2017학년도 수능 물리Ⅱ와 한국사에서 출제 오류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책임으로 2017년 6월 30일 사임하였다.

  • 결국 2018학년도 수능 9월 모의평가는 평가원장이라는 수능 출제의 사령탑이 부재인 상태로 진행되었는데 6월 모의평가와 달리 정형을 깨거나 신유형이 다수 출제되는 등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본수능에 대한 예측은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며 수능이 쉽게 출제될 것이란 관측이 있었으나 수험생들의 혼란을 막기 위해 기존의 출제 기조를 유지할 것으로 보였다. 결국 2018학년도 수능은 불수능으로 밝혀졌지만, 포항 지진으로 인한 일주일 연기로 인해 사회탐구 영역 과목들의 1등급컷이 50점을 찍는 등 불난이도에 끓는 물수능 정도의 등급컷을 보여주었다.


10. 성기선 원장 (10대)[편집]


가톨릭대학교 교직과 교수 출신. 서울대학교 국어교육 학사, 교육학 석사, 박사.

문재인 정권 출범 후 취임한 첫 평가원장. 평가원장 취임 전에는 교육감 선거에서 진보 진영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등 정치 활동에도 활발하게 참여해 왔다. 민주당 정권에서 임명한 평가원장답게 수능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여왔다.[6] 평가원장에서 물러난 후에는 평가원장 경력을 내세워 본인이 직접 교육감 선거에 진보 후보로 출마했다.

전임 김영수 원장의 사퇴 후 약 4개월 후인 2017년 10월 평가원장에 임명되었다.

취임 이후 치러진 2019학년도 수능 6월 모의평가는 국어 영역에서는 딱히 신유형이 있지 않았지만, 수학 가형[7]의 난이도를 높여 수능 절대평가와 자격고사를 주장했던 행보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2019학년도 수능 국어 영역에서 최고난도 문항이 출제되는 등 불수능 기조가 유지됐다.

수능 국어 영역 1등급컷이 19학년도 9월 모평을 제외하고 92점 이하로 나오는 등 불국어의 탄생에 일조했다. 2020학년도 6월, 9월 모평도 전반적으로 어려운 난이도로 출제되어 많은 수험생들에게 빅엿(?)을 선사했다.

수학 영역에서 준킬러의 난이도가 대폭 상승했고 21, 30번 킬러의 그나마 쉬워지면서 수학 가형 1등컷이 92점으로 고정됐었다. 또 국어 영역에서도 한동안 독서에 집중되었던 변별력이 2021학년도 모의평가와 수능을 거치면서 화작, 문법(언어), 문학, 독서 전 영역에 걸쳐 고루 분포되는 중이었다. 하지만 물리학Ⅱ 2등급 블랭크 발생과 국어 및 영어 난이도 조절 실패로 인해 비판받기도 했다.

지진으로 인해 일주일 연기된 2018학년도 수능, 코로나19 방역 체계에서 이뤄진 2021학년도 수능을 치렀다.

연임을 한 정강정 원장을 제외하면 단일 임기로는 역대 최장 기간인 3년 3개월 동안 업무를 수행하고 명예퇴직하였다. 본래 평가원장의 임기는 3년이지만 후임 평가원장을 구하는 기간 동안 공석이 없도록 자리를 지켰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임플란트를 11개나 할 정도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고 밝혔다. 성기선 전 교육과정평가원장, “수능으로 고통받는 교육 이젠 끝났으면” 또한 현재 수능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교과 중심만으론 못 푸는 수능, 수명 다했다” 평가원 퇴임 후 2022년 교육감 선거에 진보 진영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1. 강태중 원장 (11대)[편집]


중앙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출신. 서울대학교 교육학 학사, 석사, 위스콘신 대학교 교육학 박사.

민주당 정권에서 임명된 다수의 평가원장들과 마찬가지로 수능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 왔다.

문이과 통합 체제로 진행되는 2022학년도 입시에서 개편된 수능 시험의 사령탑으로 부임하였다.


  • 2022학년도 수능의 첫 시험대였던 6·9월 모의평가에서는, 수학 영역에서의 선택과목 유불리 최소화는 비교적 성공했지만, 국어 영역에서의 선택과목인 화법과 작문언어와 매체 간의 표준점수 차이가 크게 나타난 만큼, 이를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2022학년도 수능이 199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이래 역대 최고난도의 불수능으로 출제되며 난이도 조절에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생명과학Ⅱ 20번 문항이 오류로 의심되는 상황에서 평가원이 "문항의 조건이 완전하지 않더라도, 교육과정 성취기준을 준거로 학업성취 수준을 변별하기 위한 평가문항으로서의 타당성은 유지된다"고 밝힌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출제 오류에 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견해가 있다.[8]



12. 이규민 원장 (12대)[편집]


연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출신. 연세대학교 교육학 학사, 석사, 아이오와 대학교 교육측정통계 전공 박사.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하여 2022년 3월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2023년 6월 19일, 윤석열 정부 수능 출제 방침 지시 관련 파문과 관련하여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13. 오승걸 원장 (13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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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로 94학년도 1차 수능 수학 시험지를 보면 맨 마지막 문제가 상용로그표 문제이다. 현행 수능 체제에서 수학 시험지의 마지막 문항이 가진 위상을 생각하면 절로 코웃음이 나오는 수준.[2] 서울대 교수. 중앙교육평가원의 의뢰를 받아 '대학교육 적성시험 개발을 위한 기초연구(1989, 중앙교육평가원)', '대학교육 적성시험의 활용방안(1989, 중앙교육평가원)', '대학교육적성시험의 활용방안(1989, 중앙교육평가원)', '대교육적성시험 실험평가연구(1990, 중앙교육평가원)' 등의 연구를 진행했다.[3] 충남대 교수. 중앙교육평가원의 의뢰를 받아 '대학교육적성시험의 개념화(1989)', '대학교육 적성시험 문항 개발연구(1989)' 등의 연구를 진행했다.[4] 수능 창시자라는 수식어가 사실과 다름에도 불구하고 지난 몇 년간 언론에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박도순 본인부터가 이를 정정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처음 한두번은 언론이 임의로 수식어를 잘못 붙였다 하더라도 이것이 몇번 반복되면 박도순 본인이 이같은 표현을 정정해 달라거나 앞으로 사용하지 말아줄 것을 언론에 이야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5] 미궁의 문 문제라고 많이 알려진 문제다.[6] 과거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박도순, 문재인 정권의 성기선, 강태중 등은 수능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7] 1등급컷 85점으로 2013학년도 9월 모의평가 이래로 가장 낮았다.[8] 알기 쉽게 간단하게 풀이하여 말하자면, "문항의 조건에 빈틈이 있더라도, 수능에서 변별력을 가지는 문항으로서의 타당성은 유지된다."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