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양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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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81년 3월 11일
평안도 구성도호부 방현면 하단동
(현 평안북도 구성시 남창동)
사망
몰년 미상
사망지 미상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홍양천은 1881년 3월 11일 평안도 구성도호부 방현면 하단동(현 평안북도 구성시 남창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7일 최성진, 최예락,양인항,안승열(安承悅) 등과 태극기를 만들고, 3월 10일 구성군 남시장(南市場)에서 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후 상하이에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 주세국장 대리 고일청(高一淸)의 명령을 받고 국내로 돌아와 각처에서 군자금과 인구세를 징수하여 상하이로 보냈다. 1919년 12월 20일경, 안승열로부터 전의순(全義順)의 기부금 50원을 받았다.

1919년 음력 2월경, 홍시명(洪時明)으로부터 형 홍시옥(洪時玉)의 기부금 100원을 받았으며, 박찬계로부터 김의열(金義烈),장경진(張景辰)의 기부금 100원을 받고 각각 영수증을 교부하였다. 기타 동지가 모집한 자금까지 총 1,200원을 모금하고 이 중 100원은 희생된 독립운동가의 가족을 구휼하는 데에 사용하고, 잔금 1,100원은 2월 29일 및 3월 29일 두차례에 걸쳐 임시정부 요인 송병조(宋秉祚)에게 송금토록 하였다.

1920년 5월 23일 구성군 서산면 평지동 서당에서 동지 20여 명과 만나 비밀결사대 '대한민족자결 국민회(國民會)'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임시정부의 평안북도 독판부(督辨府)와 연계하여 애국금 모집, 인구세 징수, 순사토벌대 보호, 친일파 조사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0년 8월 23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 등을 거쳐, 1921년 4월 16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강도,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공갈,가택 침입으로 징역 15년을 받았다. 불복하고 상고하였으나 1921년 5월 26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홍양천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