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와라 히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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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패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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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 히로시 (藤原ヒロシ)
파일:fw2.jpg
이름
후지와라 히로시 (藤原ヒロシ, Fujiwara Hiroshi)
본명
藤原ヒロシ
출생
1964년 (60세)
일본 미에현 이세시[1]
국적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신체
163cm, 66kg
직업
프로듀서, 디자이너, 뮤지션
링크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
2. 생애
3. 영향력
4. 프라그먼트
5. 커리어
6. 기타



1. 개요[편집]


일본의 프로듀서, 뮤지션, 디자이너이자 종합 아티스트.
90년대 일본 스트릿 패션을 풍미했고 지금도 그 명맥을 이어나가며 성장하고 있는 세계적인 아티스트이다.


2. 생애[편집]


1964년에 태어난 후지와라 히로시는 18살이 되던 해에 도쿄로 올라오게 된다.
그는 어릴때부터 펑크를 좋아했고 이에 20살이 되던 1982년에 일본을 떠나 런던의 어느 한 초밥집에서 섹스 피스톨즈의 매니저인 멕라렌을 만나게 된다. 히로시는 음악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며 그와 함께 미국 동부, 뉴욕으로 떠나 힙합을 접하고 나중에 일본에 돌아온 후 힙합 문화를 도쿄로 가져오면서 일본 힙합계의 시작을 알렸다.

동부에 다녀온 그는 서부의 음악은 어떤지 궁금하여 캘리포니아의 해변가에 거닐던 와중 바닷가에서 자신의 사인을 쓴 서핑 보드와 티셔츠를 파는 숀 스투시와 친해지게 되고 이에 스투시는 히로시에게 일본이라면 4면이 바다니 서퍼가 많을 것이라 생각하여 그가 만든 티셔츠를 선물로 주면서 일본에 팔아달라 부탁했고, 이후 숀 스투시는 세계 3대 스케이트보드 스트릿웨어 브랜드[2] 중 하나인 스투시를 전개하며 앞선 이것이 스투시가 일본에 상륙하고 일본 스트릿 씬에서 특별한 위치에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3]

그리고 히로시는 일본에 돌아와서 첫 번째 힙합 DJ가 되어 MAJOR FORCE(메이저포스)라는 레이블을 만들게 된다. 뮤지션 활동도 상당히 주목받아 Nothing Much Better to Do가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후 그는 그의 천재성과 창의성을 기반으로 활동하면서 'Godfather of Streetwear' 또는 'Godfather of Harajuku' 로 불리며 패션계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아티스트가 되었다.

나이키의 HTM 라인[4] [5], 2006년 리바이스의 Fenom 라인의 디렉터로 자리잡았고, 1980년대 후반에는 본인의 브랜드인 Good enough를 런칭했다. 요시다 포터의 Head porter 라인도 대표하고 있다.

이외에도 그는 2005년,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소프넷의 히로후미와 비즈빔의 나카무리 히로키와 함께 HONEYBEE라는 패션 웹진[6]을 만들게 된다.

3. 영향력[편집]


후지와라 히로시는 앞서 언급했듯이 일본 패션계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데, 그의 존재 자체가 지금의 일본 스트리트 패션이라고 할 수 있을정도로 그때 당시와 지금에 와서도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후반 메이저포스 덕에 하라주쿠 뒷골목 아티스트(스지)들과 친해진 그는 1990년, 스지[7] 무리 중 한 명인 SK8TING과 함께 자신의 브랜드 Good enough 스토어를 만들고 이 당시 지금의 중추 세력인 NIGO[8]타카하시 준[9]을 모집하여 NOWHERE 스토어를 컨설팅해주고, SK8TING에게 부탁해 니시야마 테츠[10]의 FPAR과 히카루의 BOUNTY HUNTER(바운티 헌터)를 만들게 해주었으며 타키자와 신스케[11]와 함께 메이저포스를 운영하는 동시에 각 스지 일원들이 각각 베이프, 언더커버, 더블탭스네이버후드를 만드는 것을 원조했다.

비슷한 시기에 친구인 키요나가 히로후미[12]의 소프넷 창립을 돕고 와코마리아의 첫 음악 컬렉션을 만드는데도 도움을 준다. 그리고 그가 좋아하던 요시다 포터에게 HEAD PORTER 라인을 만들자 제안하고, SK8TING을 주축으로 그의 동료들이 만든 브랜드인 카브엠트의 창립에 많은 도움을 준다.

이외에 비즈빔의 나카무라 히로키에게 라는 앨범의 자켓을 보여주며 모카신을 만들어보면 어떻겠느냐 제안했고 히로키는 이에 영감받아 비즈빔을 설립하여 fbt 라는 신발을 만들었고 지금의 비즈빔의 위치에 오도록 하였다.

도쿄로 돌아와서 7년만에 이 모든 것을 이뤄낸 그는 1994년, 과거 숀 스투시가 일본을 향해 지어준 이름인 electric cottage라는 브랜드를 잠깐 전개하면서 '두 개의 번개모양이 있는 로고'[13]를 만들었고 2003년까지 유지했다.

그리고 그후에 electric cottage를 개편하여 바로 만든 것이 지금의 프라그먼트 디자인이다.


4. 프라그먼트[편집]


파일:프라그먼트.jpg
프라그먼트 디자인 (Fragment Design | FRGMT)

후지와라 히로시가 만들었고 만들어가고 있고 만들어질 그야말로 후지와라 히로시 그 자체.
추가예정


5. 커리어[편집]


2011년 미야시타 공원 근처의 스타벅스를 디자인하는데[14] 스타벅스가 특정 인물과 처음으로 콜라보한 사례가 되었다. 후속으로 오모테산도 B-side 매장을 열기도 했다.

2014년 낡은 수영장을 개조해서 만든 편집샵, 더 풀 아오야마 프로젝트와 2016년 그것이 끝내자마자 주차장을 개조해서 만든 파킹 긴자, 또 그것이 끝나자마자 2018년 편의점을 컨셉화 해서 만든 컨비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컨셉스토어를 기획하기도 했었다.

이외에도 루이비통, 몽클레르, 태그호이어, 나이키, 불가리 등과 수많은 협력, 콜라보[15] 등을 진행하였고 대표적으로 최근 스니커 씬이 커지면서 그 값이 한화 약 500만원으로 치솟은 나이키 조던 1 프라그먼트[16]가 있다.

6. 기타[편집]


한국 걸그룹 NewJeans으로, 2023년 인스타그램에 직접 팬 인증글을 업로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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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살에 도쿄로 상경한 후 하라주쿠 스트릿 패션 계의 대부가 되었다.[2] 슈프림, 팔라스, 스투시[3] 이후에 스투시가 엄청나게 유명해지고 나서 숀 스투시가 후지와라 히로시에게 감사를 표했지만 히로시는 오히려 자신은 DHL(택배) 받은 것밖에 없다는 겸손한 태도로 이야기했다고 한다.[4] 나이키에서 전개하는 하이테크 프리미엄 라인. 현재까지도 존재하며, 나이키에서 완전히 새로 개발한 기술이 적용된 신발은 프로토타입으로 이 라인을 통해 세상에 공개된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로 플라이니트. [5] HTM은 후지와라 히로시 본인과 팅커 핫필드(前 조던 디자이너), 마크 파커(나이키 CEO)의 앞글자를 딴 것이다.[6] 사실상 지금의 흔해빠진 패션 웹진의 원조이며 하입비스트가 이를 참고했다고 알려져 있다.[7] 한국으로 치면 홍대 거리에서 빈티지샵하는 형 누나들 같은 느낌이다.[8]베이프 대표[9]언더커버의 수장[10]더블탭스의 수장[11]NEIGHBORHOOD의 수장[12] 소프넷(SOPH)의 수장[13] 파일:eded.png[14] 생긴게 주유소같이 생겼다. 그런데 그의 말로는 카페인을 충전하러 오라는 주유소를 모티브로 잡은게 맞다고 한다.[15] 그의 말에 따르면 1982년 뉴욕 티파니 매장에서 롤렉스와 몽블랑의 만년필을 팔고 있는 것을 보고 직원에게 왜 이것을 티파니 매장에서 파냐 묻자 직원이 "협업"이라고 몽블랑과 롤렉스 제품 안의 로고 옆에 있던 티파니 로고를 보여줬다고 하는데 이것에 큰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16] 파일:fhiroshi.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