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대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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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례에 걸친 흑인 대이동 이전의 미국 흑인들의 분포도. 대부분 미국 남부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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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차례의 흑인 대이동의 지도. 1차 대이동은 주로 동북부, 그리고 2차 대이동은 서부에 집중되어 있다.

1. 개요
2. 상세
2.1. 노예 해방
2.2. 남부의 흑인 학대
2.3. 남부 흑인 대이동
2.4. 백인 폭동
2.5. 인종 분리 정책과 미국 흑인 민권 운동
3.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흑인 대이동(Great Migration)은 1916년부터 1970년까지 일어난 미국 흑인들의 대이동/대이주 현상으로 그 원인은 1910년대에 미국 남부에 주로[1] 살던 흑인들이 매일같은 백인들의 린치, 살인 등을 겪다 못해 미국 동부, 중서부, 서부 등지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1916년부터 1940년까지 160만 명의 남부 흑인들이 이주했는데 이를 1차 대이동이라고 하고 1940년부터 1970년까지 500만 명의 남부 흑인들이 이주했는데 이를 2차 대이동이라고 한다. 이 두 차례 및 55년에 걸친 대이주로 1900년에 93%였던 남부 거주 흑인 비율이 1970년 50%로 내려갔다. 40여 %의 미국 흑인이 이 기간 동안 이주한 것이다. 나머지 50%는 1970년 이후 1964년 미국 연방 민권법에 의해 미국 흑인의 인권이 보장되고 일자리도 많아지면서 남부에 그대로 남았고 21세기 들어 서부, 중서부, 동부 등에서 일자리가 줄어들어 남부로 되돌아오는 흑인들도 조금씩 증가하는 추세다.


2. 상세[편집]


흑인들의 대이동의 원인에 대해서는 '흑인들이 노예제가 폐지되고 실업자가 되어서 일자리를 찾기 위해 이주했다'는 것이 20세기 역사학자들의 많은 의견이었고[2] "흑인들이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쳤다"는 해석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21세기에 이르러서였다.


2.1. 노예 해방[편집]


1865년부터 1877년까지 남북전쟁에서 남군이 지면서 미국 남부에 연방군이 13년 동안 주둔했다. 연방군은 남부 백인들의 흑인 강간, 린치, 살해 등을 금지했으며 이 기간 동안 미국 흑인들은 한동안 이루지 못한 자유와 행복, 평화를 느꼈다.

연방 정부의 승리로 1865년 노예제가 연방 전체에서 폐지되면서 미국 흑인들은 미국 시민권을 얻게 되었다. 당시 인종차별 반대, 노예제 철폐 등을 주장하던 공화당, 더 정확하게는 공화당 급진파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미국 흑인들은 당연히 선거권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남부도 마찬가지였다.

연방군 치하 남부에서는 흑인들이 선거권을 갖게 되면서 미국 상하원에 흑인 의원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흑인에 대한 대우 변화로 흑인 엘리트 계층이 생겨났다. 이들 흑인 엘리트 계층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인종차별 철폐를 주장하고 미국 흑인들을 이끌었다.


2.2. 남부의 흑인 학대[편집]


그러나 이런 자유도 오래 가지 않았다. 연방군이 13년간의 주둔을 끝낸 1877년에 미국 연방 정부는 남부의 내전 세력이 없어지고 더 이상 반군이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여 연방군을 남부에서 전격 철수했다. 연방군에 눌려 살던 미국 남부 백인들은 이들이 떠나자마자 법안을 바꾸기 시작했다.

흔히 말하는 '짐 크로우 법'이 이때 남부 주들에서 나온 법안인데 흑인들의 선거권을 박탈하고[3] 다른 권리들도 박탈하기 시작했으며 흑인에 대한 처우 개선을 전혀 하지 않아서[4] 흑인들은 노예제가 유지되었던 시절보다도 더 못한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뱀발로 '짐 크로 법'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유색인종과 백인의 시설 분리다. 유색인종과 백인의 화장실까지 다르게 쓰기 시작한 것이 이때다.

사실 최소한 노예제가 유지될 때는 한 백인 부자[5]가 거느린 흑인 노예가 많았기 때문에 본보기로 한 명만 고문하고 나머지를 겁에 떨게 했지만[6] 노예제가 폐지되면서 이제 백인 부자들이 더 이상 자신들의 재산이 아닌 흑인들을 보호해 주지도 않았고 흑인을 고문하거나 죽여도 주 정부에서 제대로 처벌하지 않았다. 백인들은 흑인들을 사람으로 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자유롭게 흑인들을 린치하고 살해하고 고문했다.

'존중은 공포에서 나온다.'는 속언이 있듯이 오히려 노예제가 성행하던 시기엔 흑인을 폭행하거나 살해하려는 욕구가 있어도 그 흑인의 주인이 두려워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면 노예제가 철폐되고 주둔하던 연방군마저 떠나자 흑인들을 음해하려는 세력들이 거리낄 것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결국 주 정부들의 비호 아래[7] 이러한 린치 사건은 매일같이 벌어졌다. 당시의 린치는 백인들이 그냥 길 가고 있는 무고한 흑인들을 잡아 기분 전환 목적으로 고문하고 살해한 것이다. 길 가던 무고한 흑인들을 집단폭행하는 건 예사고 목을 베는 정도면 덜 잔인한 정도였으며 아예 숨이 끊길 때까지 불태워 죽이는 일도 많이 있었다. 물론 이래도 주범인 백인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그리고 사진 기술이 널리 퍼지면서 백인들이 린치한 후 자신들에게 죽임을 당한 흑인들의 사진까지 찍었는데 이걸 아예 기념사진 정도로 생각하고 교회 목사가 축하의 말을 하러 오기도 했다. 당시 린치당한 무고한 흑인들의 사진들은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남부에 거주하던 흑인들은 1877년부터 40여년 간 대규모 이동을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박해가 심한데도 흑인들이 이동하지 않은 이유는 첫 번째로 당시 남부의 흑인들은 아직은 북부로 이주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고[8] 둘째로는 북부나 서부 등 다른 지역으로 이주할 만한 돈이 없는 흑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흑인들이 이동할 자유조차 못마땅하게 여긴 일부 극우주의자 백인들이 린치로 흑인 이주를 막았다.


2.3. 남부 흑인 대이동[편집]


그런데 1910년대 중반 제1차 세계 대전 등의 여파로 사회가 격변기를 겪으면서 흑인들도 이주할 시기와 돈이 생기게 되고 단체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1910년대에 대규모 흑인들이 기차를 타고 남부에서 중서부, 동부, 서부의 대도시로 이주했다.

주로 자기 도시에서 가장 편하게, 그러니까 환승 없이 갈 수 있는 기차 노선을 선호했다. 그래서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뉴욕 등의 대도시로 대거 이주하게 되었다.

이주한 흑인들은 백인들이 전쟁으로 인해 어느 정도 빠진 틈을 타 주로 북부, 서부의 회사들의 값싼 노동자 등으로 일하면서 이주 생활을 시작했는데 문제는 전쟁이 끝나고 백인 남성들이 돌아오면서 이주를 온 흑인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는 점이다. 이는 붉은 여름의 발단이 되었다.


2.4. 백인 폭동[편집]


남부에서 흑인들이 대거 이주하면서 상기했듯 일자리 문제가 불거지자 제노포비아 성향과 당시 백인들 사이에서 일반적이었던 백인 우월주의까지 겹쳐 이들 지역에서도 흑인에 불만을 품은 일부 백인들에 의한 인종 폭동이 일어나면서 1919년은 미국 흑인들의 암울한 해가 되었다.

특히 이 시기 미국 전역에서 일어난 백인 폭동들은 백인이 일방적으로 흑인 동네를 약탈하고 불태우고 거기에 살던 흑인 주민들을 고문하고 불태우고 죽인 사건이었다. 이를 통틀어 붉은 여름이라고 하며 시카고 인종 폭동이 대표적인 사례다. 붉은 여름으로 사태가 심각해지자 연방 정부와 주 정부들은 인종 폭동을 없애려고 노력하기는 했는데 그게 바로 인종 분리 정책이었다. 이게 실시되어 백인들에 의한 인종 폭동은 사라지는 듯했으나 1921년에 털사 인종 학살이 일어나면서 미국 흑인들을 더 암울하게 만들었다.


2.5. 인종 분리 정책과 미국 흑인 민권 운동[편집]


털사 인종 학살 이후 인종 분리 정책은 더욱 강화되었고 한동안 흑인과 백인들은 모든 것이 분리되었다. 초창기에는 대다수 흑인들도 인종 폭동이나 린치를 당할 염려가 없으니 이 정책을 지지했고 백인들도 '열등한' 흑인을 안 봐도 된다는 생각으로 이를 지지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인종 분리 정책은 문제를 드러냈다. 일단 미국 어디에서든 백인이 정치적 헤게모니를 쥐고 있으니 흑인이 있는 곳은 백인이 있는 곳보다 공공시설 등 모든 제반 조건이 열악했으며 로자 파크스의 사례마냥 "흑인은 백인에게 양보해야 한다" 따위의 인종차별 규정들이 흔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상황에서 태어난 젊은 흑인 세대들은 "왜 우리가 분리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찰과 "우리도 백인과 같은 사람이므로 같은 처우를 받아야 한다."는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에 미국 흑인들이 많이 참전하면서 돌아온 흑인 참전용사에 의한 인권 개선, 인종차별 철폐의 목소리는 더 강해졌고 트루먼 정부 이후 인종적 민권 운동의 고조 속에 1947년 재키 로빈슨이 흑인 최초로 메이저 리그에 진출해 대성공을 거두며 젊은 흑인 세대는 "우리도 할 수 있다, 우리도 백인과 다를 게 없다!" 를 더 외치기 시작하고 1955년 로자 파크스 사건으로 미국 흑인 민권 운동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고 10년 여 간의 운동 끝에 기어코 1964년 미국 연방 민권법이 통과되면서 법적으로 흑인들은 백인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또 이 연방법으로 흑인뿐만 아니라 모든 인종에 대한 차별 금지가 연방법제화되면서 아시아계 미국인이나 히스패닉, 미국 원주민에 대한 차별도 금지된다.

3.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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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00년대 초에 93%의 미국 흑인들이 남부에 거주하고 있었다. 나머지 7%는 주로 미국 동부에 살았고 중서부나 서부에 거주하던 흑인들도 있었다.[2] 남부의 해방노예 흑인들은 토지를 분배받지 못해 옛 주인들의 농지에서 소작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는데 20세기 들어 목화 산업이 주춤해지고 40~50년대에 농업 기계화가 진행되면서 일자리를 크게 잃었다. 이 학설도 현재까지도 완전히 사장되진 않고 (특히 2차) 대이동의 주 요인으로 지목된다.[3] 미국은 연방정부 선거와 주 선거를 가리지 않고 선거 절차를 주에서 결정한다. 주 정부가 선거 절차를 마음대로 결정하여 특정 유권자의 권리를 빼앗는 것인데 이는 2021년에도 벌어지고 있다.# 이를 막고 싶다면 연방의회에서 투표권법(Voting Rights Act of 1965)과 같은 별도의 법률을 제정해 간섭해야 한다.[4] 시민권은 연방 정부 관할이라 주 정부가 어떻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흑인들의 시민권은 유지되었다.[5] 노예는 비싸서 당시 남부 백인 중 어느 정도의 형편 이상만 노예를 거느릴 수 있었다. 당시 남부엔 못 사는 백인들이 과반수였고 주 정부나 부자들의 입장에서 이들의 계급적 반발과 인종간 연대를 막기 위해 백인 우월주의로 저소득층 백인들을 선동한 것이었다. 또 남부 사람들 사이에서는 노예를 사들여서 성공하는 것이 일종의 유망한 성공 루트와 같이 받아들여지고 있었기 때문에 노예가 없는 사람들도 노예제 폐지에 반대하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6] 이는 흑인 노예들이 당시 남부 백인 부자들의 재산으로 취급받았기 때문이다. 인간 취급을 하지 않았으나 자기 재산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주인도 노예들을 너무 심하게 다루진 않았다. 물론 반대인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7] 미국의 주들은 하나의 작은 국가나 다름없기 때문에 자치가 헌법으로 강하게 보장되어 있어 주마다 법도 따로 있고 법원도 따로 있다. 연방법에 따라 특별히 규정하는 사항이 아니면 모두 주법으로 처리하고 주 법원의 사법 절차를 밟는다.[8] 왜냐하면 당시 미국의 서부, 동부, 북부(중서부) 등지에는 흑인들이 구할 수 있는 일자리가 없었다. 한마디로 이주는 하고 싶었으나 일자리가 없으니 터전을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