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부산 아시안 게임/농구

덤프버전 :


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파일:external/sports.chosun.com/6bh82002.jpg

1. 개요
2. 당시 멤버들
3. 준결승전 - 필리핀전
4. 결승전 - 중국전
4.1. 운명의 4쿼터
4.2. 기적의 연장전
5. 여담


1. 개요[편집]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의 남자농구 대표팀의 활약상을 다룬 항목


2. 당시 멤버들[편집]




3. 준결승전 - 필리핀전[편집]


2002년 10월 12일에 열린 경기. 4강전부터 극적이었는데 필리핀과의 4강에서 대한민국은 경기 종료 51초 전 필리핀의 로데리코 라셀라에게 3점슛을 허용, 66-68로 역전당한 뒤 공격 기회가 모두 무위로 돌아가면서 패색이 짙었으나 3점라인 밖 중앙에서 수비 2명을 제친 이상민이 종료 버저 소리와 동시에 3점포를 터뜨려 짜릿한 뒤집기 승리를 맛보면서 결승에 진출한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반대편에서 올라온 결승상대는 카자흐스탄을 꺾고 올라온 아시아의 최강 중국이었다. 예상대로 중국이 결승 상대로 확정되자 한국은 절망했는데, 무엇보다 그 당시 남자 농구에서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 이후 20년동안 중국을 이겨본 적이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당시 중국에는 NBA 출신 229cm의 거인 야오밍[1]이 있었다. 우리나라 역시 주장 문경은, 센터 서장훈 등의 국가대표 베테랑 선수들과 김주성, 방성윤, 김승현 등 최강의 신인들이 활약하고 있었지만 야오밍이 있는 중국을 넘는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보는 시선이었다. 그리고 아시안 게임의 마지막 날이었던 10월 14일 사직실내체육관에서 결승전이 시작된다.


4. 결승전 - 중국전[편집]


아시안게임 결승전
10.14(월) 부산사직체육관

국가
1Q
2Q
3Q
4Q
연장
합계
대한민국
18
18
26
28
12
102
중국
25
24
18
23
10
100


4.1. 운명의 4쿼터[편집]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요기 베라



예상대로 중국은 한국을 상대로 리드를 이어나갔다 1쿼터 초반부터 5-16으로 한국을 압도했고[2] 그리고 4쿼터 종료 2분 40초 전에는 73-86으로 점수를 벌렸다. 이 때만 해도 사람들은 "결국 은메달에 만족해야 하는가?"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특유의 근성있는 플레이가 시작된다. 교체 선수로 들어온 현주엽김승현이 펄펄 날기 시작하며 조금씩 간격이 좁혀지기 시작했다. 종료 22초전 현주엽의 과감한 골밑 돌파로 85-90으로 따라붙은 우리나라는 김승현이 야오밍의 인바운드 패스 미스를 놓치지 않고 곧바로 가로채 문경은의 3점포로 연결했다. 2점 차가 된 상황에서 중국은 종료 17초 전 자유투 2개를 얻었으나 슛이 정확하기로 소문난 슈터 후웨이동이 자유투 2개를 모두 놓치면서 한국에 마지막 기회가 왔다. 리바운드를 잡은 한국은 현주엽이 종료 4.7초를 남기고 일대일 상황에서 스핀무브를 활용한 과감한 골밑 돌파로 승부를 원점으로 돌려놓는데 성공한다. 이때 중국이 빠르게 역습을 가해 4쿼터 종료 약 3초를 남기고 3점 라인 밖에서 후웨이동이 공을 잡았고 그 순간 야오밍이 노마크 상태로 골밑으로 쇄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후웨이동이 야오밍에게 패스를 안 하고 성급하게 3점슛을 날렸고, 야오밍이 공격 리바운드에 이어 덩크를 성공시켰으나 이미 4쿼터 종료 버저가 울린 뒤였다. 대한민국 대표팀 킬러로 유명했던 후웨이동의 이해할 수 없는 연이은 클러치 실책으로 인해 경기는 연장전으로 접어들게 되었다.[3][4][5]


4.2. 기적의 연장전[편집]



경기는 연장으로 접어들었고 기적적으로 중국을 따라잡은 대한민국은 중국보다 기세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기세에서 밀려버린 중국은 야오밍이 대한민국 에서 원천 봉쇄에 나서자 힘을 못쓰기 시작하면서 중국의 득점루트가 말리기 시작한다. 한국팀은 연장에 들어서자마자 첫 공격에서 서장훈 3점포를 성공시킨 것[6]을 시작으로 현주엽의 연속 득점과 김승현의 어시스트에 이은 문경은의 골밑 득점[7] 등으로 오히려 99-94로 달아났고 결국 102-100 2점차이로 극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 이후 20년만에 만리장성을 넘으면서 금메달을 따낸다.


5. 여담[편집]


  • 서장훈은 경기 직후 '왜 중국을 못 이기나'라는 비판을 떠올리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후일 방송에 나와 자신이 뛴 경기 중 비열한 짓까지 해가며 가장 열심히 뛴 경기라 술회했다.
  • 이 금메달로 병역 특례를 받은 인물은 두 명으로 김승현방성윤이었다.[8] 한국 농구의 미래를 이끌 선수들이었지만 둘 모두 선수생활이 순탄치 못했다.
  • 야오밍이 중국성인대표팀에 선발되어 뛴 경기 중 아시아 팀에게 당한 유일한 패배가 바로 이 경기이다.[9]
  • 김주성은 유일하게 2002년과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획득, 연금 수령 대상자가 되었다. [10]-서장훈은 금메달이 하나뿐이라 연금을 못 받는다. 대신 월세 받는다.
  • 당시 최강의 위용을 자랑하던 중국대표팀을 상대로 역전승을 거둔 임팩트, 그리고 2002년 한국대표팀의 화려한 네임밸류 등으로 인해 역대 최강의 대표팀 후보 논쟁에서 2014년 아시안게임 대표팀과 함께 계속해서 회자되고 있다. 2014년 대표팀 감독이었던 유재학은 2002 멤버가 워낙 화려해서 두 팀이 붙으면 2002년 팀이 이길 것 같다고 하면서도 2014년 팀이 더 잘 조직된 팀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두 팀에 모두 몸 담았던 모 선수는 2014년 팀이 서로 손발 맞출 시간도 훨씬 길었고 조직력도 탄탄했다는 이유로 2014년 팀의 손을 들어줬다고 한다. 대체로 기자들이나 팬들은 2002년 팀의 선수 개개인의 기량이 더 좋고 전성기 서장훈을 제어할 선수가 2014년 팀에 없지만 양동근, 양희종 등으로 대표되는 2014년 대표팀의 막강한 수비 조직력과 국대 역사상 최고의 활약을 펼쳤던 문태종의 존재를 이유로 2014년 대표팀이 조금이나마 더 강하다는 쪽에 의견을 모으고 있다. 2014 인천 아시안 게임/남자농구 참고.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0-16 00:33:42에 나무위키 2002 부산 아시안 게임/농구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당시 2002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로 휴스턴 로키츠에 지명[2] 서장훈은 야오밍을 막다가 이미 1쿼터에 반칙 3개를 범하고 벤치로 일찍 물러났다. 3쿼터 들어서는 서장훈, 김주성 모두 파울트러블에 걸리고 만다. 사실 제대로 판정했다면 이미 경기 끝나기도 전에 빅맨 다수가 파울아웃 당했을 상황이어서 대한민국 대표팀이 홈콜의 이점을 누리긴 했다.[3] 김승현이 이후 이 경기를 회고하면서 저 당시에 후웨이동이 야오밍에게 패스했으면 무조건 지는 경기였다고 인정했을 정도였다.[4] 당시 후웨이동은 '중국의 마이클 조던'으로 야오밍 자서전에 따르면 휴스턴 로키츠에 합류한 그에게조차 팀동료들이 "너희 후웨이동이란 선수 있지 않느냐"고 물어볼 정도로 중국 농구계의 레전드였다. 반면 10살이 어린 야오밍은 2002년에 맹활약하며 처음으로 상하이를 CBA우승으로 이끌었고 당시 이미 아시아 무대에선 막을 수 없는 포스를 보이고 있긴 했지만 이제 막 명성을 쌓아가는 단계였다. 자존심이 강한 후웨이동 입장에서는 까마득한 후배 야오에게 맡기는 것보단 자기가 직접 해결하려는 욕심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5] 다만 당시 워낙 시간이 촉박하다보니 야오밍을 못봤을 가능성도 있고, 설사 봤다 하더라도 남은 시간을 봤을때 패스로 득점까지 힘들수도 있다 판단하고 본인이 슛을 던진 부분일수도 있기 때문도 있다. 물론 진실이 어떻게 됐던 간에 후웨이동의 엄청난 판단미스인 건 확실하다. 야오밍이 골밑에 도착했을 때는 1.8초나 남아있어 공받고 원드리블을 하는 여유를 부리고 덩크를 해도 충분할 정도의 시간이었고(게다가 야오밍은 키가 워낙 커 덩크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다른 선수들보다 훨씬 짧다. 드리블을 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가까이 있기도 했고), 스탠딩 리치가 291cm에 달하는 야오밍이 덩크를 날릴 가능성도 희박했다. 당시 중국은 연장전에 도입했을 때 지고 있어서 바로 파울작전을 해야함에도 시간을 한참 소모한 다음에야 파울을, 그것도 문경은에게 하는 이해할 수 없는 타임 경기운영을 보였다. 이를 두고 KBS '경기의 재구성'에서 진행자 김현태 아나운서와 손대범 기자는 '중국이 아시아권에서 저렇게 위기에 몰려본 적이 없어서 위기상황 경기운영이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고 한 바 있다. 실제로 당시 중국과 한국의 전력 차이가 컸기 때문에, 저 시간대까지 중국이 몰리는 건 예상 밖이었을 것이다.[6] 3점슛을 성공시킨 후 서장훈은 양팔을 벌리며 평소 이미지와 달리 기쁨에 젖은채 포효했다. 2015년 2월 20일 부산 KT 대 서울 SK 경기를 서장훈과 같이 해설하던 현주엽은 해당 장면에 대해 "속공 나가듯이 빨리 뛴 건 이때 이후로는 본 적이 없다."는 소감을 남겼고#, 그 슛을 어시스트했던 김승현은 2019년 유튜브 채널 슬램덕후와의 인터뷰에서 "장훈이형이 그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국대 동료들에게도 꽤나 인상적인 모습이었던 것 같다.[7] 김승현이 워낙 예상 밖의 타이밍에 기습패스를 날리는 바람에 당시 카메라 앵글이 앞을 지나가던 심판에 의해 살짝 가려졌다. 훗날 김승현은 본인 인생에서 이를 가장 기억에 남는 패스로 꼽았다.슬램덕후 19.8.17[8] 현주엽은 상무 입대 중 선발되어 속칭 '대포주사'를 맞아가며 헌신했지만, 당시 규정에 금메달 취득시 조기 전역 규정이 없었던 시기라 조상현과 마찬가지로 상무에서 복무기간을 다 채우고 나와야했다. 다만 현주엽은 실제로는 부대에서 복무전환을 제안을 받았던 적이 있는데, 그 당시의 현주엽은 이미 말년병장이었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 복무전환을 하는 메리트가 없다고 판단해서 이 제안을 거부하고 그대로 남은 복무기간을 다 채우고 전역했다고 한다. 복무전환을 하더라도 예술체육요원 점수는 다른 선수들과 똑같이 채워야하는 데다가 얼마 안 남은 군생활 기간 동안 이걸 다 채우기 힘들었기 때문에 이러한 선택을 한 것. 김주성의 경우 부모님께서 모두 장애를 갖고 있었던 것 때문에 생계곤란으로 이미 병역면제를 받은 상태였다.[9] 야오밍은 이 경기에서 득점과 리바운드 모두 양팀 최다인 23점 22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한국의 김주성의 21점, 서장훈의 6리바운드가 최다) 제몫을 했으나 경기 후반부 승부처에 힘을 못 썼다. 당시 야오밍은 최전성기 당시처럼 140kg 이상의 막강한 파워를 자랑하던 당시가 아니고, 다소 마른 편이라 집중마크를 당하면 체력이 떨어지곤 했다. 이 피지컬 부족 문제로 NBA에서도 문제를 겪자 (루키 시즌 올스타 브레이크 이전까지 필드골 성공률 52.5%를 기록하다가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엔 득점은 거의 비슷한데 성공률이 46%로 떨어졌다) 2003 오프시즌에 벌크업을 해 20파운드 (9kg) 이상 근육을 늘린다. 대부분 팬들이 기억하는 건 140kg을 상회하던 시절의 야오밍.[10] 장애아동 지원을 목적으로 기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