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성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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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성윤의 수상 및 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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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p1_2051125j1175.jpg
서울 SK 입단식 당시.
파일:external/image.chosun.com/2009010400529_0.jpg
SK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던 당시의 모습.
이름
방성윤(方成允)
출생
1982년 6월 3일 (41세)
서울특별시 강남구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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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출신학교
서울대현초 - 휘문중 - 휘문고 - 연세대
가족
1남 1녀 중 첫째
혈액형
A형
포지션
스몰 포워드
신체 사이즈
195cm, 92kg[1]
프로입단
2005년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 (부산 KTF 매직윙스)
소속팀
로어노크 대즐 (2004-2005) [2]
서울 SK 나이츠 (2005~2006)
애너하임 아스널 (2007) [3]
서울 SK 나이츠 (2007~2008)
리노 빅혼스 (2008) [4]
서울 SK 나이츠 (2008~2011)
국가대표팀
2002 부산 - 금메달
2003 하얼빈 ABC - 2위
2005 도하 ABC - 4위
2006 도하 아시안게임 - 5위
2009 톈진 ABC - 7위
등번호
11[5], 7[6], 19[7]
종교
불교
병역
병역 특례[8]

1. 개요
2. 기록
3. 선수 생활
3.1. KBL 데뷔 이전
3.2. KBL 데뷔 이후
3.2.1. 2005-06 시즌
3.2.2. 2006-07 시즌
3.2.3. 2007-08 시즌
3.2.4. 2008-09 시즌
3.2.5. 2009-10 시즌
3.2.6. 2010-11 시즌
4. 몰락
5. 기타 사항
6. 왜 그는 KBL의 대표적인 유리몸이 됐나?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1199409_STD.bmp

서울 SK 나이츠 소속 포워드. 대학 시절 누구나 한국 농구의 미래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실제로도 거의 근접했지만 부상과 미국 행에 따른 혹사, 그리고 범죄행위로 인해 무너진 비운의 농구선수.[9]


2. 기록[편집]


정규시즌[10]
165경기 17.50점 4.21리바운드 2.50어시스트 1.64스틸 FG 42.98% 3P 38.70% FT 79.37% TS 57.2% eFG 52.3% PER 17.04

플레이오프
2경기 20.50점 4.00리바운드 3.00어시스트 0.50스틸 FG 39.39% 3P 31.58% FT 64.29% TS 52.3% eFG 48.0% PER 22.29


3. 선수 생활[편집]



3.1. KBL 데뷔 이전[편집]


195cm, 92kg의 포워드로 고교시절부터 신장과 힘을 겸비하고 거기에 에이스기질까지 갖춘 선수로 2000년 아시아청소년선수권대회 최우수선수에 선정되며 일찌감치 촉망받는 유망주였다. 휘문고 2학년때 무릎 연골이 찢어지는 부상을 입었으나 연세대에 진학한 후 대학 농구 무대에서 활약을 보였다. 등장 초기에는 3점슛 되는 현주엽같은 선수가 등장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실제 활약상을 보면 덩치 되는 문경은에 가까웠다.[11] 하지만 저 덩치야말로 방성윤의 최대 장점. 경기 전반에는 들어가지도 않는 3점슛 난사로 팀 분위기를 말아먹나 싶다가 경기 후반에는 덩치를 앞세운 저돌적인 인사이드 공격으로 팀을 승리로 이끄는 게 대학 시절 방성윤의 플레이었다. 그 시절엔 난사만 안 하면 참 좋은데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결국 난사 소리는 프로 가서도 끊어지지 않았다. 좋게 말하면 에이스기질이고 나쁘게 말하면 볼호그, 즉 슛 욕심이 심한 타입이었다.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대표팀에 막내로 발탁되었고, 결승 중국전에서 막판 무리한 공격으로 팀을 말아먹을 뻔도 했으나 10득점 하는 등 괜찮은 활약을 하며 중국을 격파, 병역혜택을 받았다.

당연히 국내에선 특급 유망주로 전체 1번이 확실시되었지만, 국내의 계약금 규모나 자신의 마인드때문에 국내진출에 별 관심이 없었던 방성윤은 전격적으로 NBA 도전을 위해 NBA G 리그 드래프트에 참가 신청하였으며 로어노크 대즐에 4라운드 20번에 지명되었다.[12] 04-05 G 리그 시즌에서 평균 득점 12.5점 (15위), 3점슛 38개 (1위)에 선정되었다.

2005년 드래프트에서 부산 KTF가 1순위로 지명하였으나 서울 SK 나이츠와 3:3 트레이드를 통해 지명권을 넘겼다. KTF가 보낸 선수는 방성윤(지명권), 정락영, 김기만 등이고, SK가 보낸 선수는 조상현, 황진원, 이한권 등이었다.


3.2. KBL 데뷔 이후[편집]



3.2.1. 2005-06 시즌[편집]


KBL 데뷔 첫 경기에서 현주엽과 맞상대하며 21득점 했으나 3쿼터에 5반칙 퇴장을 당했다. 이 때 3점슛은 7개 던져서 2개 성공. 05-06시즌에 평균 득점 17.2점, 4.2 리바운드, 1.8 어시스트로 신인왕에 오른다. 시즌 막판 LG의 외국인 선수 드미트리우스 알렉산더와 충돌하며 시즌아웃되었다.[13]


3.2.2. 2006-07 시즌[편집]


2006 도하 아시안 게임에 국가대표로 뽑혔다. 카타르전 42득점(3점슛:12개) 활약은 유명하다.[14] 국가대표 훈련 도중 발목 부상을 당해 06-07 시즌 초반에 제대로 뛰지 못하였으나 평균 득점 19.3점의 활약으로 국내 선수 득점 1위에 올랐다. (이후 3년 동안 3점슛 성공 1위, 2년 동안 국내 선수 평균 득점 1위) 시즌이 끝나고 손가락 수술을 위해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3.2.3. 2007-08 시즌[편집]


평균 득점 항목에 주목

07-08 시즌에도 부상은 여지없이 찾아왔다. 12월 21일 전주 KCC 이지스 전에서 코트에서 미끄러지며 끔찍한 부상을 당했다. 왼쪽무릎인대파열이었는데 팀의 6강 플레이오프 진출을 위해서 조기 복귀를 결정했고, 무릎에 테이핑을 둘둘 말고 시즌 막판 경기와 플레이오프를 치렀다.

이 해의 방성윤이 대단한 것은, 귀화선수인 문태영을 제외한 마지막 국내선수 평균 득점 20점을 올린 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난사를 해댔는데도 야투율 45.2%, 3점슛 성공률 40.6%를 기록하기도...


3.2.4. 2008-09 시즌[편집]


08-09 시즌 전에 다시 NBA 진출을 타진하기 위해 G 리그에 진출했다. 리노 빅혼스가 전체 42순위로 그를 지명했고, 당시 리노의 감독은 전자랜드 감독을 지낸 바가 있는 제이 험프리스였다. 그러나 G 리그에서 불과 4경기를 뛴 상황에서 하위권을 맴돌던 SK나이츠의 강력한 복귀 요청에 KBL 컴백을 결정하게 되는데 체중을 10kg 이상 감량해서 얼굴이 반쪽이 된 사람이 새벽에 비행기에서 내리더니 경기장에서 싸이클 좀 밟다가 23득점을 꽂아넣었다. 그러나 여지없이 한달도 안돼서 1월 4일 전주 KCC 이지스 전에서 추승균과 부딪혀 목 탈골 부상을 당하고 4주 진단을 받았으나 보름도 안되어 다시 복귀했다. 평균득점 17.3점으로 시즌 활약은 괜찮았다.


3.2.5. 2009-10 시즌[편집]


09-10시즌도 여지없이 부상 악령은 찾아왔고 발목 부상으로 시즌을 저조하게 마쳤다. 시즌이 끝나고 FA 자격을 취득하였고 원 소속팀 SK에 무려 5억 7천만원을 요구해 협상이 결렬되었다. 현재 KBL의 규정상 SK가 제시한 5억 2천만원 이상을 불러야 영입이 가능했고 SK가 김효범을 인센티브 포함 총 5억 1300만원에 영입하며 FA 미아가 되는 게 아닌가 싶었으나 1억 3천만원에 극적으로 잔류했는데 저 계약을 그대로 믿는 농구팬은 그다지 없다.


3.2.6. 2010-11 시즌[편집]


10-11 시즌엔 부상으로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 출전하지 못했고 2011년 2월에도 결국 발등 피로골절 확진을 받고 사실상 시즌 아웃됐다.

결국 30세의 다소 이른 나이은퇴를 선언했다.[15] 이로서 부상에 시달리던 Mr.빅뱅은 한국 농구계에 굵고 짧은 족적을 남기고 떠났다. SK 나이츠는 그의 공백을 김선형이라는 걸출한 신인으로 잘 메우게 되고 방성윤이 떠난지 7년 후 두 번째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4. 몰락[편집]


지인이 운영하는 사업체의 종업원을 상습 폭행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2012년 2월부터 7월에 걸쳐 지인과 함께 하키채, 골프채 등을 사용한 폭력을 모두 포함해서 총 500회를 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추가로 2012년 7월에 최모씨로부터 5000만원을 가로챈 혐의도 받고 있다.

그러다 복귀를 추진한다는 기사나왔다. 다만 기사 댓글에서도 보듯 폭행 혐의로 인해 반응은 냉담할 뿐이다.

결국 징역 4년을 구형받았고, 1심에서 1년 6개월 실형이 선고되면서 법정 구속되었다.

2심은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전 KBL선수 방성윤 “농구팬들께 진심으로 사죄” 복귀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다시 농구를 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리고 같은 날 SK는 변기훈노마크 3점 팅팅팅(...)으로 대활약하면서 인삼공사에게 3점 폭격을 당하면서 패배해 방성윤 복귀에 대해 긍정적인 팬들도 조금은 늘어났다. 그런데 나이가 나이인지라...

상고심(3심)인 대법원에서는 폭행과 관련해서는 무죄로 판명이 났다고 하지만 사기에 대해서는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다.

2018년에 초 방성윤은 다시 한번 코트로의 복귀를 원한다고 밝혔다. 더군다나 폭행 연루 사건의 피해자가 팟캐스트 세컨리바운드에 출연하여 자신의 입장과, 사건의 개요를 밝혔다. 링크 결국 2018년 11월 6일 열린 KBL 집행위원회에서는 방성윤이 집행유예 중이라는 점을 들어 복귀 불허 조치를 내렸다. 이후 일본 리그 진출을 시도했지만 역시 범죄 혐의로 인해 무산됐다.

2020년에는 3X3 프리미어 리그에서 한울건설 소속으로 활동했다.


5. 기타 사항[편집]


  • NBA G 리그에서 한 시즌 3점슛 개수 1위도 찍어보고 나름대로 활약한지라 한국 농구 선수의 NBA 진출 떡밥에 자주 오르내리던 선수. 물론 당연히 많은 사람들의 착각이었다. 참조. 3점슛 리그 1위라는 걸 보면 대단해보이지만 G리그란 것 자체가 선수들이 왔다갔다하는 경우가 많아서(콜업되었다가 짤리는 등) 꾸준히 G리그에서만 뛴 방성윤의 시즌 누적 기록이 높은 것 뿐이며(41경기를 뛰었다), 경기당 3점 개수론 성공개수가 0.9개, 성공률도 39.2%에 불과해 그리 눈에 띄는 성적도 아니었다. 방성윤이 이때 12.5점 1.2어시스트 2리바운드 0.9스틸에 필드골 42.6% 자유투 80.8%를 기록했는데, 그가 미국에선 득점원툴이며 슈팅가드론 지극히 평범한 체격에 운동능력은 크게 쳐진다는 걸 생각하면 별 흡족한 성적도 아니었다. 그의 로아노크팀 동료이자 04-05시즌 G 리그 MVP였던 맷 캐롤은 NBA에서 짤린 후 로아노크에서 뛰어 24경기 출전에도 3점슛 리그 2위 (경기당 1개 성공/성공률 60.5%로 리그 1위), 득점 1위로 20.1점 1.6어시스트 2.8리바운드 필드골 50.3% 자유투 86.2% 등을 기록한 다음 04-05시즌 막판에 다시 NBA로 불려가 12-13시즌까지 그럭저럭 롤플레이어로 커리어를 보냈다. 그 외에 95드래프티로 6년동안 NBA에서 뛰다가 퇴출되어 G 리그와 이탈리아 리그 등을 돌다가 캐롤과 마찬가지로 04-05시즌 막판에 NBA로 돌아가 마지막 시즌을 보낸 코리 알렉산더가 16.4점 8.3어시스트 3.6리바운드로 방성윤보다는 훨씬 나은 모습을 보였다. 사실 성적도 성적이지만, 방성윤 정도 피지컬로 NBA에서 뛰려면 최소한 카일 코버스티브 커 수준의 기계처럼 정확한 3점슛 능력이 필요했다. [16] 위에서 언급된 캐롤의 성적을 보면 득점 외엔 방성윤과 큰 차이도 없으면서도 NBA에 불려간 건 슈팅력 하나만큼은 믿을만하다고 여겨졌기 때문. 사실 그나마도 초창기를 제외하면 들쭉날쭉했다. 방성윤의 슈팅은 04-05시즌만큼은 미국에서도 제법 괜찮은 수준이었지만, NBA는 저 정도 슈팅력을 갖고 방성윤보다 다른 모든 걸 훨씬 잘하는 선수들이 넘쳐났기 때문에 별 어필을 하지 못했다. 그나마 G 리그에 재도전했을 때는 슈팅력도 제대로 선보이지 못하고 포기해야 했다. 정리하자면 04-05시즌 방성윤은 G 리그에선 수준급의 선수 [17] NBA에 어필할 만한 확실한 장점은 없던 선수였다고 볼 수 있다.

  • 연세대 출신에 인기가 많은 편이라 KBL 올스타전에 자주 출전했지만, 정작 부상으로 벤치에 앉아있는 모습이 많았다.

  • 09-10 올스타전에서는 3점슛 컨테스트에서 우승하기도 했다.

  • 문경은은 자신의 은퇴 후 누가 통산 3점슛 기록을 갈아치울까 묻는 질문에 방성윤이 가장 유력하지만 NBA 간다고 왔다갔다 해서 잘 모르겠다고 한 적이 있다.

  • 사이즈와 힘이 모두 좋아 상대팀의 4번을 마크할수도 있는 등 수비 능력 자체는 괜찮은 편이지만 오지랖이 코트를 덮는 몹쓸 헬프 디펜스가 단점이다. 할리우드 액션을 자주 시도하는 편인데, 방성윤은 워낙 덩치가 커서 금방 티가 난다.

  • 커리어에서 플레이오프는 딱 2번. 04-05 G 리그 플레이오프와 07-08 KBL 플레이오프.

  • 난사라는 이미지가 강하고 무리한 슛을 많이 시도하는것 또한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결과로 나타나는 3점슛 성공률은 높은 편이다.[18] 최근에 소극적인 국내 슈터들을 볼때 앞으로 국내에서는 언제 나올지 모르는 슛욕심의 레전드급. 유명한 카타르전에서도 흑형 2-3명이 붙건 말건 슛을 쏘고 마는 근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점 때문에 국내선수 평균득점 20점 이상을 마지막으로 기록한 선수이다. 최근 이에 가장 가까운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선수는 이정현.[19]

  • 별명은 미스터 빅뱅[20], 방난사, 방유리[21], 방역귀[22], 방완용(국제대회에서 역적 역할을 했다는 이유), 방바닥, 방변덕, 방가...

  • 지붕뚫고 하이킥에도 출연했다.[23] 주요 내용은 소아암 환자 돕기를 위해 방성윤이 돈을 내기로 하자, 극 중 정보석이 경기당 3만 원씩 후원을 하기로 계획을 한다. 그러나 정보석의 오해로 한 경기당 3만 원이 아닌, 1점당 3만 원을 후원하기로 한 것이었고, 극 중에서 방성윤은 부상에서 회복한 지 얼마 안됐음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득점을 뽑아내며, 심지어 72득점을 해버리며 정보석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 주요 내용.

  • 집행유예 판결 이후에는 모교였던 휘문고등학교 농구부에서 주말마다 슛 자세 등을 가르쳐주는 인스트럭터로 활동을 하며 업템포라는 이름의 동호회 농구팀에서 농구를 하고 있다는 근황이 전해졌다.



6. 왜 그는 KBL의 대표적인 유리몸이 됐나?[편집]


방성윤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라면 십중 팔구는 유리몸을 떠올릴 것이다. 커리어 270경기 중 불과 131경기에 출전에 그치며 커리어 절반도 채 출전하지 못했고, 최고 많이 출전했던 시즌이 두 번째 시즌인 2006-07시즌의 36경기다. 특히 마지막 시즌에는 단 6경기를 출전하는 데 그쳤다. 그의 재능과 실력을 운운하기 전에, 일단 경기 자체를 거의 뛰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부상에 시달렸다.

무엇보다 그는 부상 부위가 한 두군데에 국한되지 않았다. 데뷔 시즌인 2005-06시즌에는 어깨 대흉근 파열[24] 두 번째 시즌은 발목, 손가락 부상, 세 번째 시즌은 그 유명한 왼 무릎 내측 인대 파열, 네 번째 시즌은 시즌 도중 목 부상과, 이미 한 번 다쳤던 왼 무릎 내측 인대를 다시 다쳤다.[25] 마지막 시즌에는 발목 부상 재발로 시즌 아웃. KBL, 아니 전 세계 스포츠 리그를 통틀어도 이 정도로 다양한 부위에 부상을 당한 선수는 거의 방성윤이 특이 케이스일 정도로 억세게 운이 없었다. 자기관리나 유리몸을 운운하기 전에 이 정도로 다양한 부위에 매 시즌 부상 입은 선수가 과연 존재할까?

이렇듯 단 한번도 제대로 풀 시즌을 치러본 적이 없을 정도로 부상이 잦아서 남들 FA 대박칠 때 바라보기만 했다. 얼핏 보면 게으른 천재같지만, 김남기 감독, 김진 감독이나 신선우 감독 등의 말을 들어보면 의외로 성실하고 자기 관리에 철저한 편이라고 한다. 운동능력만큼은 2000년대 나온 동급 신장의 선수들 중 최고를 다툰다.

감독들의 증언에서 보듯, 자기 관리가 그리 나쁘지 않았음에도 커리어 내내 잦은 부상에 시달린 가장 큰 이유는, 커리어 초중반 시절 미국 진출 등으로 인해 오프시즌 훈련량이 부족했으며, 더군다나 내, 외곽에서 활동량이 많았던 방성윤의 플레이스타일 특성상, 그의 신체가 그의 플레이스타일을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방성윤 같이 내, 외곽에서 활동량이 많은 선수는 기본적으로 부상 위험성이 다른 선수들에 비해 상당히 높다. NBA 역시 예외가 아니다. 현 NBA 최고의 빅맨 중 하나인 앤서니 데이비스도 타고난 재능에 비해 내구성이 약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데, 데이비스 역시 커리어 첫 4시즌 동안 단 한 번도 68경기 이상 출전하지 못했다. 그나마 2016-17시즌 부터는 구단과의 갈등이 절정에 달해 템퍼링 논란을 일으킨 2018-19시즌을 제외하면, 두 시즌 연속 75경기 이상 출전하며 내구성도 어느정도 보완했다. 데이비스 역시 방성윤 못지 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빅맨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활동량을 자랑하는 슈퍼스타다.
그와 뉴올리언스 펠리컨스에서 같이 뛰었던 드마커스 커즌스역시 마찬가지. 사실 그는 2017-18시즌 도중 아킬레스건 파열로 시즌 아웃을 당한 것이 결정타였지만, 그 역시 이전까지 매 시즌 10경기 이상 꾸준히 결장하며 잦은 부상에 시달렸다. 특히 최고 전성기였던 2015-16시즌에는 59경기를 출전하는데 그쳤다.

이렇듯 내, 외곽에서 활동량이 많은 선수들은 다른 선수들 보다 자기관리가 더욱 철저해야 하며, 그만한 신체가 동반되어야 한다. 하지만 방성윤은 프로의 기본 덕목이라고 할 수 있는 비시즌 몸관리에 소홀했으며, 알고보면 방성윤의 부상 악령 또한 이런 불분명한 행보 들로 인해 신체 밸런스가 완전치 않은 상황에서 경기에 출전함으로써 시한폭탄과도 같은 몸을 안고 뛴 것에서 비롯된 인재나 다름없다. 언제 찍힐지 모르는 펀치 드렁크 복서처럼 말이다. 특히 2008-09시즌 당시에는 최하위까지 떨어진 서울 SK 나이츠를 구원하기 위해 시차적응도 되지 않던 상황에서 미국에서 복귀했으나, 복귀 이후 계속된 강행군으로 인해 경기를 거듭할수록 체력과 활약상이 크게 떨어지다 결국 무릎 부상 재발이라는 비극을 맞았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부상을 당한 이후 잦은 조기 복귀로 인해 컨디션이 완전치 못한 상황에서 경기에 출전하면서 다른 부위까지 상태가 악화된 것이다. 이 때문에 복귀한 이후에도 부진-맹활약한 경기의 편차가 매우 심했으며, 완전치 못한 컨디션으로 경기에 임한 경기가 수도 없이 많았다. 이에 대해 면죄부가 있다면 당시 서울 SK가 워낙에 주전 의존도가 높은 팀인 탓에 그의 존재가 없어지면 팀 전체가 빡빡해질 정도의 열악한 상황이였던 것이다. 이는 방성윤의 잘못이라기보다, 스타 선수들의 이름값만 믿고 벤치 멤버들을 마구잡이로 내보낸 이전의 무능력한 프런트의 잘못이 100%다. 더군다나 현대 농구에서는 더 이상 한 두 명의 스타 선수만 의존하는 시대가 아니다. 어느 팀이라도 벤치를 탄탄하게 구상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특히 우승 후보 팀들이라면 스타급 선수들 못지 않게 벤치 전력도 그에 못지 않게 탄탄하게 강화한다. 대표적인 팀이 NBA의 샌안토니오 스퍼스. 이로 인해 부상 변수로 인한 성적 하락은 현대 농구에서는 예년과 달리 결코 변명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방성윤 본인도 워낙에 조급증이 심했던 탓에 무리하게 조기복귀를 감행한 적이 많았으며, 이로인해 몇 경기도 뛰지 못하고 계속 결장과 출장을 반복했다.

이는 코칭스태프의 미스도 빼놓을 수 없는 결점이다. SK를 유일하게 당시 암흑기를 끊어주고 PO에 진출했던 김진감독은 커리어 후반부로 갈수록 KBL 최다승 3위라는 성적이 무색할 정도로 지나친 혹사 논란과 임기응변 능력 부족이라는 비판에 시달리다, 결국 2012-13시즌에는 고의 패배 의혹의 중심까지 서며 커리어 평가가 급속도로 악화됐다. 신선우 감독 역시 신산이라는 별명과 어울리지 않게 SK 시절에는 주축들의 부상 릴레이에 대한 별다른 대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이는 2011-12시즌부터 부임한 문경은 감독의 초기 감독 대행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시즌 초반까지 알렉산더 존슨과 김선형콤비로 6위까지 오르며 선전했지만, 12월 초 알렉산더 존슨의 부상을 시작으로 또 다시 부상 연례 행사가 시작되어 결국 PO 진출에 실패했다. 이를 느낀 문경은 감독은 다음 시즌인 2012-13시즌 부터는 벤치 뎁스를 탄탄하게 강화시키는 밸런스 라인업을 구상했고, 이는 현재까지 SK의 최대 전성기로 이어지고 있다. 문경은 감독 부임 이후 SK는 2015-16, 2016-17, 2018-19시즌을 제외하면 매 시즌 4강권 이상의 성적을 올렸다. 비록 선수빨이라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문경은 감독이지만, 적어도 이전의 교훈을 얻고 팀을 이렇게 강하게 만든 업적은 높게 평가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SK는 문경은 감독 부임 이전까지 이런 점이 극도로 부족했다.
여담이지만, 방성윤 입장에서는 차라리 문경은 감독이 빨리 부임했더라면 당시 은퇴라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내몰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세계 최고의 농구 리그인 NBA에서도 빈번히 발생되는 문제인데, 특히나 NBA는 스타 선수들의 부상 릴레이가 그 어느 리그보다도 빈번히 쏟아진다. 그래서 현대 농구에서는 아예 시작부터 내구성이 검증된 선수들을 구성하여 최대한 부상 위험 요인을 제거한 체 시즌에 돌입하는 것이 부지기수. 아울러 감독 역시 다방면에서 능력이 검증되고, 단순한 성적과 전술 경기 운영 뿐 아니라, 선수단 관리 등 외적인 요인까지 중요시한다. 이 때문에 예년처럼 성적이 높다고해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필연적으로 혹사 논란에 시달리게 된다.
대표적으로 현재 뉴욕 닉스로 새로 부임한 티성근 톰 티보도감독과 휴스턴 로키츠마이크 댄토니감독. 두 감독 모두 NBA에서 대표적인 혹사 감독으로 악명이 높다. 이 때문에 두 감독이 부임한 팀들은 주축 선수들의 부상 악령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방성윤 역시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에 유리몸이 된 것이다.[26]

종합하자면 방성윤은 내, 외곽에서 활동량이 많은 선수들의 필연적인 부작용, 프런트의 무능력함, 감독들의 판단 미스로 인한 악재들로 인해 끝내 유리몸 기질을 벗지 못한 체 비운의 은퇴를 하게 됐다.


7. 관련 문서[편집]



[1] 현역시절 프로필은 100kg이나 최근에는 눈에띄게 슬림해진 모습이다.[2] NBA G 리그팀 41경기, 플레이오프 1경기 출장[3] NBA G 리그팀 출장기록 없음[4] NBA G 리그팀 4경기 출장[5] 05-06 시즌[6] 06-07 시즌~09-10 시즌[7] 10-11 시즌[8]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금메달[9] 농구인생과 가진 인터뷰에서 폭행 혐의는 무혐의라는 것이 드러났다. 하지만 집행유예 처분을 받은 것에 대해서도 밝혔는데, 폭행은 무죄였지만 금전을 받은 부분에서 사기죄라는 판결이 났다고 한다.[10] 6시즌동안 165경기를 뛰었다. 가장 많이 뛴 시즌이 36경기에 불과할 정도로 부상에 시달렸다.[11] 포워드로서 기본적인 피지컬이 뛰어나고 다재다능함과 동시에 3점슛도 좋았던 것을 말하는 듯. 물론 압도적인 3점 슛 능력과 뛰어난 공격력에 비해 문경은의 약점은 수비였다. 대학과 상무 시절에는 좋은 피지컬과 젊은 몸으로 커버했지만 프로에 와서는 수비가 아킬레스건이였던 선수가 문경은이었다. 방성윤은 전성기 시절 한정 수비도 잘했기에 덩치 좋은 문경은으로 불렸던 듯.[12] 겨우 4라운드? 라는 반응이 많았는데 NBA G 리그는 선수들을 0명에서부터 고른 선수들로 팀을 꾸리는 방식이다. 한마디로 4라운드라는 것은 팀에서 4번째로 중요한 선수라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한국 출신 선수에다가 대개 앞순위 선수들이 기존의 명성이 높은, NBA 언저리에서 내려온 선수들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4라운드 20위, 42위낮은 순위가 아니다.[13] 여담이지만 2005년 12월 30일 경기에서는 알렉산더와 충돌하고 식빵(...)을 날렸다(...) 그걸 보고 놀래는 먹보스 쭈엽이 형님 아래의 사진 장면이 바로 방성윤이 식빵을 외치는 장면이다.
[14] http://pann.nate.com/video/73548632 동영상은 여기에...[15] 보통의 농구선수라면 전성기가 찾아올 나이다... 김주성의 기량이 최절정에 달했던 시기가 32살이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16] 커는 백업수준이지만 포인트가드로서 최소한의 게임리딩 능력은 갖고 있었고, 코버는 뛰는 리그가 NBA라 그렇지 체격/운동능력/기술 등 모든게 방성윤보단 확연히 앞섰다.[17] 평균 12점이 낮아보이지만 리그 1위가 20점이고 리그 10위가 15점대이다.[18] '난사' 이미지를 갖고 있는 선수들의 공통점은 슛셀렉션이 안 좋다는 점이다. 슛은 그 어떤 선수라도 기복이 있을 수 밖에 없는만큼 슛감이 안 좋으면 골밑돌파로 자유투를 얻어내거나 수비에 막히면 수비나 리바운드 등 다른 방식으로 팀에 공헌해야 하는데 고집스럽게 감을 되찾을 때까지 슛을 쏘거나 슛을 쏠만한 찬스가 아닌데도 억지로 슛을 쏘는 선수들이 있다. 클래스가 다르긴 하지만 마찬가지로 '난사' 이미지가 있는 선수는 코비 브라이언트가 있는데, 브라이언트는 실제로 어시스트 수치도 수준급이고 슛성공률도 동시대 슈퍼스타 스윙맨들에 비해 오히려 높은 축에 속하지만 안 들어갈 때도 고집스럽게 쏘는 성향이 있다. 물론 이런 선수들은 감이 좋을때는 정말 무리하다 싶은 슛도 다 들어가기 때문에 저 정도 성공률을 유지하는 것.[19] 그런데 이졍헌도 커리어 최고 시즌이 2018-19시즌의 17.23득점으로 커리어 최고득점을 기록했던 방성윤의 22.1점의 80% 정도밖에 미치지 못한다. 물론 이정현은 타고난 강철로 데뷔 이래 10경기 이상 결장한 시즌이 전무하다. 9억 논란에 시달렸던 전주 KCC 초창기 시절에도 적어도 꾸준한 퍼포먼스는 발휘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정작 이정현은 방성윤과는 다르게, 잦은 할리우드 액션으로 악정현이라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20] 소속구단인 SK 나이츠의 스포테인먼트 정책에 따라 지어준 공식별명. 하지만 농구팬들은 거의 쓰지 않으며 인정하지 않는다. 사실 스포테인먼트 정책에 따라 선수들에게 붙인 별명 중 어설픈 게 꽤 있었다. 대표적으로 노경석에게 붙였던 '경서가'. 심지어 선수들 유니폼에 이름 대신 별명을 붙혀 시즌을 소화한 적도 있었는데, 당연히 팬들 반응은 매우 안 좋았다.[21] 잦은 부상으로 인해 붙은 별명.[22] 잦은 난사로 패배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23] 다만 직접 배우로 출연한 것은 아니다.[24] 무엇보다 부상 과정이 안타깝다. 당시 창원 LG 세이커스의 드미트리우스 알렉산더의 팔에 걸려 어깨가 꺾였는데, 한동안 병원에서 제대로 된 진단을 내리지 못했다고 한다. 진단을 내린 이후에도 2달 이상의 휴식밖에는 답이 없다고 했으며, 수술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나마 시즌 막판 무리에서 출전하기는 했지만, SK는 끝내 시즌 막판 10경기에서 4연패 포함 2승 8패로 추락하며 당시 9위로 PO 진출이 좌절된다.[25] 여담으로 2007-08시즌이 끝난 이후 왼 무릎 연골 파열 진단을 받았다. 당시 시즌 막판 PO 진출을 위해 무리한 것이 화근이 된 것.[26] NBA에서 방성윤과 비슷한 케이스가 바로 데릭 콜먼이란 선수인데, 1990년 전체 1순위로 지명될 정도로 뛰어난 유망주였으며 20점 10리바운드 이상을 세 시즌 연속, 올스타에 올NBA팀까지 선정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지녀 칼 말론, 찰스 바클리같은 엘리트 파워포워드에 비견될 정도였으나, 부족한 몸관리와 계속되는 부상으로 대성하지 못했다. 콜먼의 경우 비시즌 몸관리 부족->부상->재활하는 동안 체중 증가->늘어난 체중으로 인해 또 부상->누적된 대미지로 관절 등 내구도 악화->또 부상->체중 증가의 악순환을 겪었는데, 파워와 기술을 겸비한 선수라 위력적이었지만 몸관리가 안되어 이 점이 신체내구도를 깎아먹었다. 방성윤은 콜먼처럼 게으른 선수는 아니었지만 미국 진출 등으로 인해 훈련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포워드의 몸을 지닌 외곽선수'란 플레이스타일로 뛰다보니 몸에 과부하가 올 수 밖에 없었고, 부상이 잦으니 당연히 훈련 부족이 되어 몸관리가 안된 상태에서 새 시즌을 맞으니 또 부상에 취약해지는 악순환을 겪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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