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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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오유환(吳侑煥)
일본식 성명
鄕村侑煥
본관
해주 오씨
생몰
1917년 6월 9일 ~ 1947년 11월 8일
출생지
경상남도 울산군 언양면 동부리
(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동부리)[1]
사망지
경상남도 울산군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오유환은 1917년 6월 9일 경상남도 울산군 언양면(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동부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본으로 이주한 뒤 도쿄에서 살다가 1941년 6월 도쿄의 정지두공원에서 민족의식이 투철한 김규엽(金圭燁)을 만났다. 김규엽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현재 내선일체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단순한 정책상의 호성(呼聲)에 지나지 않고 내선인 평등의 대우는 도저히 바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인 지원병을 식민지의 토민병(土民兵)으로 사역시키려 하는 것이다. 또 조선인이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하나 본적지를 내지(內地)로 옮길 수는 없다. 이민족의 융합이 곤란하다는 것은 역사상 명백하다. 고로 우리는 조선민족의 행복을 위해 민족적으로 단결하여 조선을 독립시켜야 할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무지몽매한 농민대중을 계몽하고 그것을 민족적으로 지도하는 것이 급무이다.”


오유환은 그의 주장에 동조하고 함께 농촌계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의했다. 그 후 1941년 10월에도 김규엽이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름 방학에 조선으로 돌아가 조선 농촌의 실정을 보니 일반 농민은 무지몽매하여 매우 피폐하다. 우리는 고등교육을 받은 자로써 장래 조선에 돌아가 서로 제휴하여 조선 민족의 계몽운동을 해야 할 것이다. 나는 민족운동의 지도자가 되고자 전문부 졸업후는 대학부에 진학하여 면학하고 먼저 자기완성에 힘쓸 것이다.”


이에 오유환이 답했다.

“나도 장래 취직 후 서로 제휴하여 조선민족의 계몽운동을 할 것이다."


1941년 12월 16일 오유환의 하숙집에서, 김규엽이 다음과 같이 알렸다.

“일본은 5년간이나 중국과 전쟁하여 상당히 피폐하여 있고, 지금 또 세계의 최대 강국인 미·영과 개전하고 있으므로 일본은 패전할 것이다. 이번 가을이 곧 우리가 독립운동을 전개할 절호의 기회이다. 나는 근일 조선으로 돌아가 경성방면에 취직하여 지방의 동지와 암호 전보로 비밀리 연락을 하고 독립운동을 실행할 각오이다. 군도 크게 운동을 해야 할 것이다.”


오유환은 이에 감동받아 다음과 같이 화답했다.

“일본이 아무리 무력이 강하다고 해도 세계의 최대강국인 미·영을 상대로 싸운다면 경제적으로 파탄을 초래하여 결국 패전할 것이다. 우리는 서로 제휴하여 독립운동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이 발각되어 일제 경찰에게 검거된 오유환은 1943년 4월 23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육군형법위반, 해군형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후 고향에서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다 1947년 11월 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오유환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8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해주 오씨 집성촌이다. 오위영 전 국회의원도 이 마을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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