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니파시오 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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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도요한 10세레오 6세스테파노 7세요한 11세
제126대제127대제128대제129대제130대
레오 7세스테파노 8세마리노 2세아가피토 2세요한 12세
제131대제132대제133대제134대제135대
베네딕토 5세레오 8세요한 13세베네딕토 6세베네딕토 7세
제136대제137대제138대제139대제140대
요한 14세요한 15세그레고리오 5세실베스테르 2세요한 17세
제141대제142대제143대제144대제145대
요한 18세세르지오 4세베네딕토 8세요한 19세베네딕토 9세
제146대제147대제148대제149대제150대
실베스테르 3세베네딕토 9세그레고리오 6세클레멘스 2세베네딕토 9세
제151대제152대제153대제154대제155대
다마소 2세레오 9세빅토르 2세스테파노 9세니콜라오 2세
제156대제157대제158대제159대제160대
알렉산데르 2세그레고리오 7세빅토르 3세우르바노 2세파스칼 2세
제161대제162대제163대제164대제165대
젤라시오 2세갈리스토 2세호노리오 2세인노첸시오 2세첼레스티노 2세
제166대제167대제168대제169대제170대
루치오 2세에우제니오 3세아나스타시오 4세하드리아노 4세알렉산데르 3세
제171대제172대제173대제174대제175대
루치오 3세우르바노 3세그레고리오 8세클레멘스 3세첼레스티노 3세
제176대제177대제178대제179대제180대
인노첸시오 3세호노리오 3세그레고리오 9세첼레스티노 4세인노첸시오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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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1대제182대제183대제184대제185대
알렉산데르 4세우르바노 4세클레멘스 4세그레고리오 10세인노첸시오 5세
제186대제187대제188대제189대제190대
하드리아노 5세요한 21세니콜라오 3세마르티노 4세호노리오 4세
제191대제192대제193대제194대제195대
니콜라오 4세첼레스티노 5세보니파시오 8세베네딕토 11세클레멘스 5세
제196대제197대제198대제199대제200대
요한 22세베네딕토 12세클레멘스 6세인노첸시오 6세우르바노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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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오 11세우르바노 6세보니파시오 9세인노첸시오 7세그레고리오 12세
제206대제207대제208대제209대제210대
마르티노 5세에우제니오 4세니콜라오 5세갈리스토 3세비오 2세
제211대제212대제213대제214대제215대
바오로 2세식스토 4세인노첸시오 8세알렉산데르 6세비오 3세
제216대제217대제218대제219대제220대
율리오 2세레오 10세하드리아노 6세클레멘스 7세바오로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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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오 3세마르첼로 2세바오로 4세비오 4세비오 5세
제226대제227대제228대제229대제230대
그레고리오 13세식스토 5세우르바노 7세그레고리오 14세인노첸시오 9세
제231대제232대제233대제234대제235대
클레멘스 8세레오 11세바오로 5세그레고리오 15세우르바노 8세
제236대제237대제238대제239대제240대
인노첸시오 10세알렉산데르 7세클레멘스 9세클레멘스 10세인노첸시오 11세


파일:교황 문장.svg 가톨릭 교회의 교황
파일:193_bonifacio_VIII.png
제192대 성 첼레스티노 5세제193대 보니파시오 8세제194대 복자 베네딕토 11세

파일:papstbonifatiusviii.jpg
1300년을 성년으로 선포하는 보니파시오 8세
교황명보니파시오 8세
본명베네딕토 카이타니
(Benedetto Caetani)
출생지교황령 아나니
사망지교황령 로마
생몰년도1230년 ~ 1303년 10월 11일 (73세)
재위기간1294년 12월 24일 ∼ 1303년 10월 11일
문장


복음의 말씀을 통해 배우니, 교회와 그 권력은 2개의 검을 갖는다. 바로 영적 세계를 다스리는 검과 속세를 다스리는 검이다.

ㅡ 칙령인 《Unam Sanctam》에서


1. 개요
2. 상세
2.1. 첼레스티노 5세를 퇴위시키고 교황이 되다
2.2. 교황권 강화 정책
2.3. 콜론나 가문 멸문
2.4. 뺨을 얻어맞다
3. 여담


1. 개요[편집]


카페 왕조 프랑스 왕국의 국왕 필리프 4세와 대립하다가 일개 기사에게 뺨을 맞은 아나니의 사건으로 유명해진 교황이다.


2. 상세[편집]



2.1. 첼레스티노 5세를 퇴위시키고 교황이 되다[편집]


보니파시오 8세는 프랑스의 필리프 4세에 의존하던 첼레스티노 5세를 설득하여 사임시킨 후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첼레스티노 5세가 교황직을 자진 사퇴하도록 지속적인 감언이설로 설득했으나, 막상 첼레스티노 5세가 사임하고 자신이 교황이 되자 돌변하여 그를 체포하고 구금했다. 첼레스티노 5세는 감금된 채 1296년에 사망했다.


2.2. 교황권 강화 정책[편집]


야심만만하고, 당시의 타락한 성직자를 바라보는 기준에서 봐도 부패한 인물이었던 보니파시오 8세는

"교황권이 세속 권력보다 우위에 있다."

라는 주장을 통해 프랑스 국왕 및 잉글랜드 국왕에 맞서면서 쇠퇴해가던 교황권의 회복과 세속 군주들에게 잠식되어가던 가톨릭 교회의 독립성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는 실패했고, 결국 아비뇽 유수라는 최악의 결과로 귀결되고 말았다.

그러나 항상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와 대립 관계를 이어간 것은 아니었고, 재정적인 타격이 심해지자 필리프 4세의 할아버지인 루이 9세성인으로 시성하는 정치쇼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리석처럼 차가운 성격으로 유명했던 필리프 4세는 교황의 이런 정치쇼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교황권 강화를 위해 1300년에 성년을 선포, 많은 순례객들을 로마로 끌어모았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필리프 4세와의 대립은 심화되었고, 그 과정 속에서 1302년 《우남 상크탐》(Unam Sanctam)을 발표하여

"만일 세속적인 권력이 과오를 저지르면 영적인 권력으로 심판받아야 하며, 영적인 권력은 위엄이나 고귀함에서 세속적인 권력보다 우월하다."

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하지만 시대는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태양, 황제는 달"

이라고 불리던 그 시기가 아니었다.


2.3. 콜론나 가문 멸문[편집]


이탈리아에서는 교황 자리를 두고 다투어 왔던 정적인 콜론나 가문을 조져서 그 가문을 거의 멸문시키고, 콜론나 가문이 다스리던 도시와 마을들까지 완전히 초토화시켜 지도에서 지웠다.

보니파시오 8세는 자신에게 반대한다는 이유로 콜론나 가문에게 반역죄를 씌워, 영지와 재산을 몰수한 데 이어 결국 군대까지 동원하여 콜론나 가문의 근거지를 공격했다. 보니파시오 8세는 콜론나 가문에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고 제안했으나, 막상 콜론나 가문의 사람들이 항복하자 죽여버렸다. 뿐만 아니라 콜론나 가문이 근거한 지역의 민가를 완전히 박살내어, 말 그대로 지도에서 도시가 사라져 버렸다.(콜론나 가문 학살)

이렇게 잔인하게 콜론나 가문을 멸문지화하는 데 성공했으나, 살아남은 콜론나 가문 사람들은 보니파시오 8세에 대한 복수의 칼을 갈았고, 그 중에서 시욘나 콜론나가 훗날 프랑스필리프 4세와 결탁하여 아나니에서 보니파시오 8세를 체포하는 데 협력했다.


2.4. 뺨을 얻어맞다[편집]


보니파시오 8세는 프랑스 왕국의 필리프 4세와 성직자 과세를 두고 대립했는데, 1303년 9월 7일 아나니에 머물던 중 첼레스티노를 지지하던 콜론나 가문과 프랑스 군대의 습격을 받았다. 당대의 로마에서 콜론나 가문과 보니파시오 8세가 속했던 카이나티 가문은 적대 관계였다. 양 가문 모두 교황이 되어 부와 권력을 얻으려고 애를 썼고, 이를 위해 이탈리아 외부의 세력까지 끌어왔다. 교황권의 약화를 노리던 필리프 4세의 입장에서는 떡이 굴러들어온 격이었다.

이때 프랑스의 재상이었던 기욤 드 노가레와 콜론나 가문의 가주였던 시욘나 콜론나는 갑주를 입고, 무장한 병사들을 대동한채 교황의 알현실로 와서는 보니파시오 8세를 모욕하고 난폭한 행동을 하며, 필리프 4세의 명령으로 보니파시오 8세에게 당장 사임하라고 협박했다. 이에 보니파시오 8세가 격분하여

"차라리 날 죽여라"

라고 외치며 강력히 거부하자 안그래도 원한이 맺힌 데다가 화까지 치민 시욘나 콜론나가 끼고 있던 장갑을 빼어 교황의 뺨을 후려쳤다. 이후 보니파시오 8세는 프랑스 병사들에게 얻어 맞으며 감금당했다고 한다. 교황의 곁에 있던 성직자들도 두들겨 맞았고, 교황과 같이 감금당했으며 교회의 보물들까지 빼앗겼다. 이는 14세기 교황권의 쇠퇴를 상징하는 사건 중 하나로, 아나니의 뺨 때리기(schiaffo di Anagni / Anagni slap)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보니파시오 8세의 나이는 73세였는데, 노구의 몸으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은 탓에 3일 후, 로마 시민들에 의해 풀려났음에도 불구하고, 1개월 후에 사망했다. 이를 두고 당시

"보니파시오 8세는 여우처럼 교황의 지위에 올라 사자처럼 지배하고, 개같이 죽었다."

라는 말이 돌았다.

부정적인 평가가 많은 교황이지만 교황청의 독립을 위해 세속 군주들, 특히 필리프 4세와 대립했던 마지막 교황이기도 하다. 그의 사후 교황권은 더욱 쇠퇴하며, 1309년 아비뇽 유수가 일어나게 되었다.


3. 여담[편집]


  • 단테 알리기에리가 자신의 작품인 《신곡》에서 아주 가루가 되도록 까댄다. "교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옥에 갈 것"이라는 대범함까지 보였다.

  • 여담으로 로마 순례시에 왼쪽으로 통행하게 하여 좌측 통행의 룰을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 파스타를 좋아하기로 유명했다고 한다[1]. 얼마나 좋아했으면 지금도 그의 이름을 딴 ‘팀발로 알라 보니파초 8세’라고 불리우는 파스타가 존재할 정도라고 한다[2]. 참고로 중세 유럽의 파스타는 오늘날의 파스타와는 생김새가 많이 달랐고, 파이피자와 유사하게 생긴 파스타였다. 매우 비싸고 사치스러운 음식이었다고 하며[3], 무려 송로버섯까지 들어있었다고 한다. 보니파시오 8세가 얼마나 사치를 누렸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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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들로드> 5화 '인류 최초의 패스트푸드'.[2] 만두피 같은 얇은 파스타를 층층으로 쌓아 그 사이에 다른 종류의 파스타나 소를 넣은 요리이다.[3] 당시 유럽에서는 파스타 자체가 귀족이나 부유층이 즐기는 사치 음식이었다. 요리사가 직접 반죽하고 면을 뽑는 등 수작업이 많아 품이 많이 들었고, 오늘날과 달리 건조 파스타가 아닌 생파스타가 주류였던 까닭에 계란을 넣어 반죽하는 등 그야말로 고급품이었다. 1500년대의 나폴리에서 내려진 공고령에 의하면 기근 시에는 파스타 제조 및 소비 금지를 명령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