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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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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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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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분파
3.1. 전서공파(典書公派)
3.2. 봉상대부공파(奉常大夫公派)
3.3. 판서공파(判書公派)
4. 항렬
5. 과거 급제자
5.1. 문과
5.2. 생원시
5.3. 진사시
6. 집성촌
7. 인물
7.1. 역사인물
7.2. 현대인물
8. 인구 분포
9. 여담
10. 참고자료


1. 개요[편집]


충청북도 옥천군을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옥천의 고호(古號)가 관성(管城)이므로 관성(管城) 전씨, 관산(管山) 전씨라고도 부른다.

한국의 모든 전씨백제의 개국공신 환성군(歡城君) 전섭(全聶)을 도시조(都始祖)로 모시며, 옥천 전씨 역시 환성군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있다. 때문에 전씨 종중에서는 본관을 일종의 분파처럼 말하여 옥천파(沃川派)라 일컫기도 한다.


2. 역사[편집]


시조는 고려 시기 영동정(令同正)이라는 벼슬을 한 전학준(全學浚)이다. 전학준의 현손인 전유(全侑)가 고려 충숙왕 치세에 봉익대부(奉翊大夫)[1] 밀직부사(密直副使) 판도판서(版圖判書) 상호군(上護軍)의 벼슬을 지내고 관성군(管城君)으로 피봉되어 옥천을 관향으로 했다.

다만 전학준의 선계는 한동안 모호하였는데, 지금은 북한 지역인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경릉리 묘소에서 "이갑(以甲)의 11세손이자 검교도위(檢校都尉)를 지낸 필(弼)의 아들 관성(管城) 전공(全公) 유(侑)"라고 쓰인 묘지석(墓誌石)[원문][해석]을 발굴하여 비로소 정선 전씨 충렬공(忠烈公) 전이갑의 후손임을 알게 됐다.

시조인 관성군 전유의 화상(畵像)이 옥천의 목담서원에 후손인 송정(松亭) 전팽령(全彭齡), 사서(沙西) 전식(全湜)과 함께 봉향되어 있는데 전유의 화상과 찬문(讚文)은 1933년에 부여군 외산면 무수리에 사는 윤란수(尹蘭秀)의 집에서 발견되었다. 발견된 경과는 윤란수의 6세조 소남(邵南) 윤동규(尹東奎)가[2] 중국에 있는 용도각(龍圖閣)에서 동국 13현(東國 十三賢)의[4] 진상(眞像)을 발견하고 화공(畵工)을 통해 모본(摹本)을 그려 가지고 와 그의 가문에서 간직하여 왔다고 한다. 이를 1933년에 관성군의 20세손인 전용하(全用夏)가 관성군의 진상(眞像)과 찬문(讚文)을 구해와 몇 년간 간직하다가 을해(乙亥, 1935년) 족보 편찬과 1936년 병자(丙子)에 옥천의 자손들이 현재의 목담서원에 봉안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옥천군토성(土姓)으로 옥천 육씨, 옥천 황씨에 이어 옥천 전씨가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온 성씨를 의미하는 내성(來姓)에도 전씨가 있는데 이는 옥천 전씨 삼곤계(전서공파, 봉상대부파, 판서공파)의 파조들이 관직생활을 하다 고려 멸망 후 본관으로 낙향한 것을 새롭게 이주했다고 기록자가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조에 들어 단종 절신 휴계(休溪) 전희철(全希哲), 청백리 송정(松亭) 전팽령(全彭齡), 야옹(野翁) 전응방(全應房)[5], 효자 쌍암(雙岩) 전엽(全燁), 인봉(仁峰) 전승업(全承業), 충간공(忠簡公) 사서(沙西) 전식(全湜), 병자호란 때 순절한 호종공신 규천(虬川) 전극항(全克恒), 설월당(雪月堂) 전익희(全益禧), 영서(𤃡西) 전명룡(全命龍) 등 다수의 인물을 배출했다. 세거지가 기호학파의 주요 지역인 회덕과 영남학파의 본거지 중 하나인 안동 인근에 모두 집중되어 있는 까닭에 학맥으로는 서인이나 동인 어느 한 쪽으로 편중되지 않은 편이다.[6][8][9]

하지만 남인들의 계보인 남보(南譜)에 옥천 전씨가 기록되어 있고 기록된 인물로는 송정(松亭) 전팽령(全彭齡)과 그의 형인 송오(松塢) 전팽수(全彭壽),그리고 충간공(忠簡公) 사서(沙西) 전식(全湜)의 이름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보아[10] 전체적으로 어느 한 쪽에 편향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현조(顯祖)를 중심으로 본다면 남인동인계열이다.[11]

1554년 송정 전팽령족보를 기록하는 등 계보는 꽤 일찍부터 확립되어 있었으나 원본은 서천부원군(西川府院君) 충익공(忠翼公) 백곡(栢谷) 정곤수(鄭崑壽)가 열람하려고 빌려갔다가 화재로 소실되어 버렸다.[12] 대신 1635년 영서 전명룡이 남은 사본을 바탕으로 족보를 새로 증수하였고 이후 주기적으로 대동보(大同譜)와 파보(派譜)를 만들어 왔다.

3. 분파[편집]


크게는 관성군 전유의 세 아들을 각각 파조(派祖)로 하여 전서공파(典書公派), 봉상대부공파(奉常大夫公派), 판서공파(判書公派)로 나뉜다. 이들 삼곤계(三昆系) 아래로 세거지의 명칭을 파명(派名)으로 삼는 소파(小派)들이 다시 나뉜다.


3.1. 전서공파(典書公派)[편집]


관성군 전유의 첫째 아들인 전광운(全光韻)의 후손들이다. 전광운은 고려 말 정의대부(正議大夫)[13] 판비서감사(判秘書監事)를 지내고 이부전서(吏部典書)에 제수되었다가 치사(致仕)했다. 현손인 휴계 전희철의 옛 묘갈에는 '전광원(全光遠)'이라 기록되어 있었다고 전하며,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이 지은 송석충(宋碩忠)의 묘갈에도 '전광원'이라 기록되어 있다.[14] 관향인 충청북도 옥천군·영동군을 비롯해 경상북도 영주시·봉화군, 충청남도 금산군 등지에 세거한다. 휴계 전희철, 영서 전명룡, 야옹 전응방, 설월당 전익희, 언눔 전우익 등이 이에 속한다.

6세 전광운(全光韻)
정의대부 판비서감사 이부전서
7세 전비
(全備)
전감
(全瑊)
8세 전귀덕
(全貴德)
전미덕
(全美德)
전시대
(全是大)
전시천
(全是天)
9세 전의
(全義)
전례
(全禮)
전지
(全智)
[15]
號 농수(農叟)
전상
(全尙)
전상
(全相)
전림
(全林)
10세 전희식
(全希軾)
전희로
(全希輅)
전희철
(全希哲)

號 휴계(休溪)
전희윤
(全希尹)
전맹검
(全孟儉)
전중검
(全仲儉)
전성복
(全聖復)
전량복
(全良復)
전현복
(全賢復)
전불로
(全不老)
전명형
(全命亨)
▼1 ▼2 ▼3 ▼4 ▼5 ▼6

1. 전의(全義, 진의부위(進義副尉)) 계열

  • 진목정파(眞木亭派): 참봉(參奉) 전만령(全萬齡, 12세) 계열의 소파. 세거지는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화림리 참나무정이(眞木亭)다.
  • 서정자파(西亭子派): 전억령(全億齡, 12세) 계열의 소파. 세거지는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서정리 서정자(西亭子)이다.

2. 전희철(全希哲, 호(號) 휴계(休溪) 통정대부(通政大夫) 부호군(副護軍)) 계열

  • 이곡파(伊谷派): 설봉(雪峰) 전주(全宙, 13세) 계열의 소파. 세거지는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지동리 이르실(伊谷)이다.
  • 모산파(慕山派): 증판결사(贈判決事) 전결(全潔, 15세) 계열의 소파.
  • 학촌파(鶴村派): 고산(孤山) 전설(全渫, 15세) 계열의 소파. 세거지는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 학산리 황새끼미(鶴村)이다.
  • 연기파(燕岐派): 전황(全滉, 15세) 계열의 소파. 세거지는 세종특별자치시연기군 일대이다.
  • 공주파(公州派): 화암(花岩) 전택(全澤, 15세) 계열의 소파. 세거지는 충청남도 공주시 일대이다.
  • 진잠파(鎭岑派): 삼성재(三省齋) 전길(全洁, 15세) 계열의 소파. 세거지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진잠동 일대이다.
  • 삼정파(三政派): 공산현령(公山縣令) 전관(全寬, 13세) 계열의 소파. 세거지는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 봉소리 삼정골(三亭)이다.
  • 강화파(江華派): 전희철의 증손 전성(全宬, 13세) 계열의 소파. 세거지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일대이다.
  • 진산파(珍山派): 죽담(竹潭) 전지영(全摯頴, 12세) 계열의 소파. 세거지는 충청남도 금산군 일대이다.
  • 구천파(龜川派): 야옹(野翁) 전응방(全應房, 12세) 계열의 소파. 세거지는 경상북도 봉화군 상운면 구천리 귀내(龜川)이다.
  • 망동파(望洞派): 송파(松坡) 전응두(全應斗, 12세) 계열의 소파. 세거지는 경상북도 영주시 상망동 보름골(望洞)이다.
  • 거촌파(巨村派): 숙릉참봉(淑陵參奉) 전응벽(全應璧, 12세) 계열의 소파. 세거지는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거촌리 일대이다.
  • 이계파(伊溪派): 칠리수(七里叟) 전응삼(全應參, 12세) 계열의 소파. 세거지는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지동리 이르실(伊溪)이다. 이계파, 성주파(星州派), 대구파(大邱派), 만촌파(晩村派), 행정파(杏亭派), 호매파(湖梅派), 이계파(伊磎派)로 세분된다.

3. 전희윤(全希尹, 계천위(啓川尉)) 계열

  • 계천위파(啓川尉派): 부록사(副錄事) 전례(全禮)의 아들 전희윤 계열의 소파. 세거지는 충청북도 옥천군 일대이다.

4. 전지(全智, 호(號) 농수(農叟)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계열

  • 안남파(安南派): 통덕랑(通德郞) 전상문(全尙文, 14세) 계열의 소파. 세거지는 충청북도 옥천군 안남면 일대이다.
  • 산대파(山垈派): 전상길(全尙吉, 14세) 계열의 소파. 세거지는 대전광역시 대덕구 장동 산디(山垈)이다.
  • 신창파(新昌派): 전우적(全佑迪, 12세) 계열의 소파. 세거지는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 일대이다.

5. 전미덕(全美德, 선교랑(宣敎郞)) 계열

  • 조운파(朝雲派): 봉례랑(奉禮郞) 전귀덕(全貴德)의 동생 전미덕 계열의 소파. 세거지는 현재 북한 지역인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일대이다.

6. 전감(全瑊, 선교랑(宣敎郞)) 계열

  • 조운파(朝雲派): 사복소경(司僕少卿) 전비(全備)의 동생 전감 계열의 소파. 세거지는 현재 북한 지역인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일대이다.


3.2. 봉상대부공파(奉常大夫公派)[편집]


관성군 전유의 둘째 아들인 전인숙(全仁淑)의 후손들이다. 전인숙은 봉상대부(奉常大夫)[16]의 벼슬에 올랐다. 관향 옥천에 주로 분포한다. 독립운동가 단여(檀如) 전좌한(全佐漢) 등이 이에 속한다.


3.3. 판서공파(判書公派)[편집]


관성군 전유의 셋째 아들인 전숙(全淑)의 후손들이다. 전숙은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고 관성군(管城君)으로 봉해졌는데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옥천으로 낙향하여 은둔했다고 전한다. 옥천군 동이면 일대에 '지시래'라는 지명이 있는데 본디 기사천(棄仕川, 耆士川)으로 전숙의 사적(事跡)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관향인 옥천·영동경상북도 상주시, 충청남도 금산군 일대에 세거한다. 송오(松塢) 전팽수(全彭壽), 송정 전팽령, 쌍암 전엽, 인봉 전승업, 충간공 사서 전식, 규천 전극항, 창주(滄州) 전극념(全克恬) 등이 이에 속한다.

6세 전숙(全淑)
봉익대부 판도판서 관성군
7세 전사추
(全思諏)
전도
(全都)
8세 전오이
(全五二)
전오례
(全五禮)
전오용
(全五用)
9세 전효숭
(全孝崇)
전효충
(全孝忠)
전효순
(全孝順)
전효증
(全孝曾)
전희문
(全熙文)
10세 전응경
(全應卿)
전응보
(全應輔)
전원계
(全元繼)
전원말
(全元末)
전의형
(全義亨)
전만손
(全晩孫)
전만성
(全晩成)
11세 전팽조
(全彭祖)

號 송로(松老)
전팽수
(全彭壽)

號 송오(松塢)
전팽령
(全彭齡)

號 송정(松亭)
전술조
(全述祖)
전수천
(全守天)
전귀정
(全貴貞)
전수운
(全壽運)
전가석
(全可石)
▼1 ▼2 ▼3 ▼4 ▼5 ▼6 ▼7


1. 금산파(金山派): 전오례(全五禮, 8세) 세거지는 충청북도 금산군

  • 각신파(覺新派)
  • 노동파(魯洞派)
  • 창주공파(滄州公派)
  • 간목파(干木派)
  • 화룡파(化龍派)
  • 오덕파(五德派)
  • 적하파(赤下派)
  • 성당파(聖堂派)
  • 은풍파(殷豊派)
  • 적하파(赤下派)·용산파(龍山派)·서산파(鋤山派)
  • 연산파(連山派)
  • 홍성파(洪城派)
  • 목담파(鶩潭派)·무주파(茂朱派)·능월파(陵月派)·황호파(黃湖派)
  • 진천파(鎭川派)·서화파(西華派)·봉산파(鳳山派)
  • 율림파(栗林派)
  • 독곡파(獨谷派)·유성파(儒城派)·소독곡파(小獨谷派)·이인파(利仁派)·우산파(牛山派)
  • 홍산파(鴻山派)
  • 목담파(鶩潭派)
  • 옥산파(玉山派)
  • 이평파(梨坪派)·노성파(老成派)·대덕파(大德派)·궁촌파(弓村派)·진안파(鎭安派)·예의동파(禮儀洞派)·장수파(長水派)·탄부파(炭釜派)
  • 의정부파(議政府派)
  • 갈전파(葛田派)
  • 필력파(筆力派)
  • 길왕파(吉旺派)
  • 중가파(中加派)
  • 구일파(九逸派)
  • 양구파(楊口派)



4. 항렬[편집]


대수1911년(신해보) 1958년(무술보)1974년(갑인보)
27세우(遇)○만(萬)○
28세○구(九)○훈(勳)
29세병(丙)○기(基)○
30세○녕(寧)○종(鍾)
31세성(成)○수(洙)○승(丞)○
32세○범(範)○상(相)○종(宗)
33세용(庸)○환(煥)○정(正)○
34세○헌(憲)
35세오(五)○

신해보는 천간법(天干法), 무술보는 오행상생법(五行相生法), 갑인보는 수교법(數交法)을 따르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타성에 비해 대동항렬을 철저히 지키는 편은 아니며, 파별로 다른 항렬자를 사용하기도 한다.


5. 과거 급제자[편집]



5.1. 문과[편집]


  • 전팽수 (全彭壽, 1478-?): 중종 14년(1519년) 식년시 병과 5위
자(字) 중로(仲老), 호(號) 송오(松塢). 판서공파.
父: 증(贈) 이조참판(吏曹參判) 전응경(全應卿), 祖: 증(贈) 이조참의(吏曹參議) 전효순(全孝順), 曾祖: 증(贈)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전오례(全五禮), 外祖: 안동(安東) 김력(金酈).

  • 전팽령 (全彭齡, 1480-1560): 중종 19년(1524년) 별시 병과 23위
자(字) 숙로(叔老), 호(號) 송정(松亭). 판서공파.
父: 증 이조참판 전응경(全應卿), 祖: 증 이조참의 전효순(全孝順), 曾祖: 증 한성부우윤 전오례(全五禮), 外祖: 안동(安東) 김력(金酈).

  • 전식 (全湜, 1563-1642): 선조 36년(1603년) 식년시 병과 6위
자(字) 정원(淨遠), 호(號) 사서(沙西). 판서공파.
父: 증(贈) 이조판서(吏曹判書) 전여림(全汝霖), 祖: 증 이조참판 전혼(全焜) 曾祖: 증(贈)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송로(松老) 전팽조(全彭祖), 外祖: 월성(月城) 이신(李信).

  • 전익희 (全益禧, 1598-1659): 인조 2년(1624년) 식년시 병과 7위
자(字) 자수(子綬), 호(號) 설월당(雪月堂). 전서공파(망동파).
父: 광흥창봉사(廣興倉奉事) 전뢰(全磊), 祖: 군자감직장(軍資監直長) 망일당(望日堂) 전개(全漑), 曾祖: 생원(生員) 송파(松坡) 전응두(全應斗), 外祖: 진양(晉陽) 정호인(鄭好仁).

  • 전극항 (全克恒, 1590-1636): 인조 2년(1624년) 정시 병과 2위
자(字) 덕고(德古), 호(號) 규천(虬川). 판서공파(노동파).
父: 증(贈)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 충간공(忠簡公) 사서(沙西) 전식(全湜), 祖: 증 이조판서 전여림(全汝霖), 曾祖: 증 이조참판 전혼(全焜), 外祖: 남양(南陽) 홍천서(洪天叙).

  • 전명룡 (全命龍, 1606-1667): 인조 5년(1627년) 식년시 병과 12위
자(字) 백유(伯兪), 호(號) 영서(𤃡西). 전서공파(모산파).
父: 전대승(全大承), 祖: 증(贈)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 전결(全潔), 曾祖: 선교랑(宣敎郞) 전천성(全天性), 外祖: 함양(咸陽) 박운(朴芸).

  • 전석교 (全錫喬, 1847-1906): 고종 13년(1876년) 식년시 을과 5위
자(字) 경세(景世). 전서공파(학촌파).
父: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 전효승(全孝昇), 祖: 증 이조판서 전응로(全應魯), 曾祖: 전헌(全櫶), 外祖: 선산(善山) 김방(金坊).

  • 전우현 (全禹鉉, 1855-?): 고종 28년(1891년) 정시 병과 1위
자(字) 하경(夏卿). 전서공파(안남파).
父: 전형기(全炯基), 祖: 전인환(全仁煥), 曾祖: 전익주(全翼柱), 外祖: 광산(光山) 김기형(金箕瑩).


5.2. 생원시[편집]


자(字) 숙로(叔老), 호(號) 송정(松亭). 판서공파.
父: 증 이조참판 전응경(全應卿), 祖: 증 이조참의 전효순(全孝順), 曾祖: 증 한성부우윤 전오례(全五禮), 外祖: 안동(安東) 김력(金酈).

  • 전오상 (全五常, ?-?): 중종 5년(1510년) 식년시 3등 18위
자(字) 중이(仲彛). 父: 전맹린(全孟麟).

  • 전팽조 (全彭祖, 1478-?): 중종 14년(1519년) 식년시 3등 18위
자(字) 백로(伯老), 호(號) 송로(松老). 판서공파.
父: 증 이조참판 전응경(全應卿), 祖: 증 이조참의 전효순(全孝順), 曾祖: 증 한성부우윤 전오례(全五禮), 外祖: 안동(安東) 김력(金酈).

  • 전응방 (全應房, 1493-1556): 중종 20년(1525년) 식년시 3등 1위
자(字) 이기(而紀), 호(號) 야옹(野翁). 전서공파(구천파).
父: 숙릉참봉(淑陵參奉) 전박(全珀), 祖: 부호군(副護軍) 휴계(休溪) 전희철(全希哲), 曾祖: 가각부록사(架閣副錄事) 전례(全禮), 外祖: 영양(英陽) 김철우(金哲友).

  • 전응두 (全應斗, ?-?): 중종 26년(1531년) 식년시 3등 12위
자(字) 천추(天樞), 호(號) 송파(松坡). 전서공파(망동파).
父: 숙릉참봉 전박(全珀), 祖: 부호군 휴계 전희철(全希哲), 曾祖: 가각부록사 전례(全禮), 外祖: 영양(英陽) 김철우(金哲友).

  • 전엽 (全燁, 1505-1583): 중종 38년(1543년) 식년시 3등 64위
자(字) 용회(用晦), 호(號) 쌍암(雙岩). 판서공파.
父: 상주목사(尙州牧使) 전팽령(全彭齡), 祖: 증 이조참판 전응경(全應卿), 曾祖: 증 이조참의 전효순(全孝順).

  • 전응삼 (全應參, ?-?): 명종 1년(1546년) 증광시 2등 23위
자(字) 수부(秀夫), 호(號) 칠리수(七里叟). 전서공파(이계파).
父: 숙릉참봉 전박(全珀), 祖: 부호군 휴계 전희철(全希哲), 曾祖: 가각부록사 전례(全禮), 外祖: 영양(英陽) 김철우(金哲友).

자(字) 흠재(欽哉). 전서공파(이계파).
父: 승훈랑(承訓郞) 전성헌(全成憲), 祖: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 학계(鶴溪) 전해(全海), 曾祖: 생진구중(生進俱中) 칠리수(七里叟) 전응삼(全應參), 外祖: 인동(仁同) 장세희(張世禧).

  • 전유익 (全有翼, 1595-1624): 인조 2년(1624년) 식년시 2등 4위
자(字) 여필(汝弼), 호(號) 태암(泰岩). 전서공파(이계파-대구파).
父: 선교랑 수당(壽堂) 전시헌(全時憲), 祖: 통례원인의 학계 전해(全海), 曾祖: 생진구중 칠리수 전응삼(全應參), 外祖: 밀양(密陽) 손영제(孫英濟).

  • 전명룡 (全命龍, 1606-1667): 인조 2년(1624년) 증광시 3등 20위
자(字) 백유(伯兪), 호(號) 영서(𤃡西). 전서공파(모산파).
父: 전대승(全大承), 祖: 증 장례원판결사 전결(全潔), 曾祖: 선교랑 전천성(全天性), 外祖: 함양(咸陽) 박운(朴芸).

  • 전효승 (全孝承, 1608-1663): 인조 20년(1642년) 식년시 2등 22위
자(字) 인술(仁述), 호(號) 취죽헌(醉竹軒). 전서공파(학촌파).
父: 제용감참봉(濟用監參奉) 고산(孤山) 전설(全渫), 祖: 선교랑 전천성(全天性), 曾祖: 부사용(副司勇) 전안(全安), 外祖: 밀양(密陽) 박린(朴璘).

  • 전명직 (全命稷, 1626-?): 효종 3년(1652년) 증광시 3등 14위
자(字) 성유(聖兪), 호(號) 송월당(松月堂). 전서공파(모산파).
父: 전대승(全大承), 祖: 증 장례원판결사 전결(全潔), 曾祖: 선교랑 전천성(全天性), 外祖: 함양(咸陽) 박운(朴芸).

  • 전재만 (全在萬, 1645-?): 숙종 16년(1690년) 식년시 3등 28위
자(字) 선장(善長). 판서공파(적하파).
父: 전호태(全好泰), 祖: 용양위부호군 전극경(全克慶), 曾祖: 증 장례원판결사 전흔(全忻), 外祖: 진주(晉州) 하위국(河衛國).

  • 전초벽 (全楚璧, 1669-?): 숙종 31년(1705년) 식년시 2등 23위
자(字) 원옥(圓玉). 父: 전상부(全尙溥).

  • 전수산 (全壽山, 1671-1746): 숙종 34년(1708년) 식년시 2등 14위
자(字) 여인(汝仁), 호(號) 정숙암(整肅庵). 전서공파(이곡파).
父: 전성삼(全省三), 生父: 전계삼(全戒三), 祖: 눌재(訥齋) 전명열(全命說), 曾祖: 전유승(全有承), 外祖: 안동(安東) 권혜(權(黑+惠)).

  • 전서봉 (全瑞鳳, 1678-?): 숙종 41년(1715년) 식년시 3등 66위
자(字) 덕휘(德輝). 판서공파(연산파).
父: 성신재(省身齋) 전수성(全守性), 祖: 무위당(無爲堂) 전대(全(日+戴)), 曾祖: 선교랑 전복경(全復慶), 外祖: 함양(咸陽) 박한축(朴漢軸).

  • 전계선 (全繼善, 1686-1749): 숙종 45년(1719년) 증광시 2등 12위
자(字) 효칙(孝則), 호(號) 곡남(谷南). 전서공파(모산파).
父: 통덕랑 전시하(全始夏), 祖: 영해부사(寧海府使) 영서(𤃡西) 전명룡(全命龍), 曾祖: 전대승(全大承), 外祖: 안동(安東) 이응명(李應蓂).

  • 전필기 (全必錡, 1691-1756): 경종 3년(1723년) 증광시 1등 3위
자(字) 기숙(器叔), 호(號) 농수(聾叟). 전서공파(이곡파).
父: 전수억(全壽億), 生父: 생원 정숙암(整肅庵) 전수산(全壽山), 祖: 전성삼(全省三), 曾祖: 눌재(訥齋) 전명열(全命說), 外祖: 전주(全州) 류종해(柳宗海).

  • 전필구 (全必銶, 1689-1758): 영조 2년(1726년) 식년시 3등 50위
자(字) 도숙(度叔). 전서공파(이곡파).
父: 생원 정숙암(整肅庵) 전수산(全壽山), 祖: 전성삼(全省三), 曾祖: 눌재(訥齋) 전명열(全命說), 外祖: 전주(全州) 류종해(柳宗海).

  • 전구 (全球, 1724-1806): 정조 1년(1777년) 식년시 2등 15위
자(字) 사정(士貞), 호(號) 반암(半岩). 전서공파(거촌파).
父: 전성초(全性初), 祖: 전옥현(全玉賢), 曾祖: 전성원(全聖源), 外祖: 단양(丹陽) 우세백(禹世伯).

  • 전일흠 (全一欽, 1762-1798): 정조 7년(1783년) 식년시 3등 58위
자(字) 성중(聖中), 호(號) 성봉(星峰). 전서공파(망동파).
父: 전상철(全尙喆), 祖: 전달국(全達國), 曾祖: 죽와(竹窩) 전덕구(全德久).

  • 전경희 (全敬熙, 1764-1833): 순조 1년(1801년) 식년시 3등 67위
자(字) 이직(以直), 호(號) 동곡(同谷). 전서공파(이곡파).
父: 전응렴(全應濂), 祖: 생원 농수(聾叟) 전필기(全必錡), 曾祖: 전수억(全壽億), 外祖: 기성(岐城) 반흠(潘欽).

  • 전규병 (全奎炳, 1840-1905): 철종 12년(1861년) 식년시 3등 46위
자(字) 여명(汝明), 호(號) 우엄(愚广). 전서공파(이계파-이계파).
父: 전승렬(全承烈), 祖: 전수행(全秀行), 曾祖: 야은(野隱) 전택홍(全宅泓), 外祖: 야성(冶城) 송상종(宋相宗).

  • 전종황 (全宗璜, 1826-?): 고종 2년(1865년) 식년시 3등 64위
자(字) 상보(尙寶). 父: 전몽성(全夢誠).


5.3. 진사시[편집]


  • 전팽수 (全彭壽, 1478-?): 중종 5년(1510년) 식년시 2등 18위
자(字) 중로(仲老), 호(號) 송오(松塢). 판서공파.
父: 증 이조참판 전응경(全應卿), 祖: 증 이조참의 전효순(全孝順), 曾祖: 증 한성부우윤 전오례(全五禮), 外祖: 안동(安東) 김력(金酈).

  • 전형 (全烱, ?-?): 중종 29년(1534년) 식년시 3등 58위
자(字) 사회(思晦), 호(號) 기기재(棄棄齋). 판서공파.
父: 증 승정원좌승지 송로 전팽조(全彭祖) , 祖: 증 이조참판 전응경(全應卿), 曾祖: 증 이조참의 전효순(全孝順), 外祖: 회덕(懷德) 황효곤(黃孝坤)

  • 전응삼 (全應參, ?-?): 명종 1년(1546년) 증광시 3등 9위
자(字) 수부(秀夫), 호(號) 칠리수(七里叟). 전서공파(이계파).
父: 숙릉참봉 전박(全珀), 祖: 부호군 휴계 전희철(全希哲), 曾祖: 가각부록사 전례(全禮), 外祖: 영양(英陽) 김철우(金哲友).

  • 전식 (全湜, 1563-1642): 선조 22년(1589년) 증광시 2등 9위
자(字) 정원(淨遠), 호(號) 사서(沙西). 판서공파.
父: 증 이조판서 전여림(全汝霖), 祖: 증 이조참판 전혼(全焜) 曾祖: 증 승정원좌승지 송로 전팽조(全彭祖), 外祖: 월성(月城) 이신(李信).

자(字) 덕고(德古), 호(號) 규천(虬川). 판서공파(노동파).
父: 증 의정부좌의정 충간공 사서 전식(全湜), 祖: 증 이조판서 전여림(全汝霖), 曾祖: 증 이조참판 전혼(全焜), 外祖: 남양(南陽) 홍천서(洪天叙).

자(字) 성지(性之).
父: 전응두(全應斗).

  • 전극념 (全克恬, 1597-1660): 인조 11년(1633년) 식년시 3등 26위
자(字) 유안(幼安), 호(號) 창주(滄州). 판서공파(창주공파).
父: 증 의정부좌의정 충간공 사서 전식(全湜), 祖: 증 이조판서 전여림(全汝霖), 曾祖: 증 이조참판 전혼(全焜), 外祖: 남양(南陽) 홍천서(洪天叙).

  • 전유장 (全有章, 1612-1675): 현종 1년(1660년) 증광시 3등 7위
자(字) 여환(汝煥), 호(號) 정봉(正峰). 전서공파(이계파-대구파).
父: 선교랑 수당(壽堂) 전시헌(全時憲), 祖: 통례원인의 학계 전해(全海), 曾祖: 생진구중 칠리수 전응삼(全應參), 外祖: 밀양(密陽) 손영제(孫英濟).

  • 전계선 (全繼善, 1686-1749): 숙종 45년(1719년) 증광시 2등 10위
자(字) 효칙(孝則), 호(號) 곡남(谷南). 전서공파(모산파).
父: 통덕랑 전시하(全始夏), 祖: 영해부사 영서 전명룡(全命龍), 曾祖: 전대승(全大承), 外祖: 안동(安東) 이응명(李應蓂).

  • 전성천 (全聖天, 1719-1778): 영조 35년(1759년) 식년시 3등 59위
자(字) 희중(希仲). 판서공파(간목파)
父: 전도제(全道濟). 祖: 전세구(全世耈), 曾祖: 장사랑 전금(全嶔).

  • 전구 (全球, 1724-1806): 정조 1년(1777년) 식년시 1등 3위
자(字) 사정(士貞), 호(號) 반암(半岩). 전서공파(거촌파).
父: 전성초(全性初), 祖: 전옥현(全玉賢), 曾祖: 전성원(全聖源), 外祖: 단양(丹陽) 우세백(禹世伯).

  • 전용암 (全龍巖, 1874-?): 고종 31년(1894년) 식년시 3등 923위
父: 전흥귀(全興龜)

6. 집성촌[편집]


  • 대전광역시 대덕구
  • 대전광역시 서구 오동
  • 강원도 양구군 남면 가오작리
  • 충청북도 옥천군
  •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 박계리·아암리[17]·학산리
  • 충청북도 진천군
  • 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 요광리
  • 경상북도 봉화군 상운면 구천리[18] 참고
  • 경상북도 상주시 모서면 유방리·정산리
  •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국면 화달리
  •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월호리 참고
  • 경상북도 영주시 상망동[19]·적서동 참고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지동리 참고
  • 황해도 연백군 목단면 동운리
  • 평안남도 용강군 신녕면 오학리

7. 인물[편집]



7.1. 역사인물[편집]


  • 전희철 (全希哲, 1425-1521; 전서공파)
자(字)는 원명(原明), 호(號)는 휴계(休溪). 조선 초 생원시,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무과에 올라 사직(司直)의 벼슬을 지냈다.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고향인 옥천으로 낙향하였다가 곧 아내 감천(甘泉) 문씨(文氏)의 집안이 자리잡은 경상북도 영주시 일대로 이거했다. 이때 호를 휴계라 했는데, 현재 영주시 휴천동 일대의 지명을 딴 것이다. 단종이 승하하자 복상(服喪)하고 자손들에게 단종의 묘소를 찾아뵙도록 분부했다. 이로 인해 단종 때 절신들의 위패를 모신 동학사 숙모전에 봉안되었다.[20]

  • 전팽령 (全彭齡, 1480-1560; 판서공파)
자(字)는 숙로(叔老), 호(號)는 송정(松亭). 조선시대 청백리이다.

  • 전주 (全宙, 1501-1559; 이곡파)
자(字)는 태허(太虛), 호(號)는 설봉(雪峰). 휴계 전희철의 증손이자 이곡파의 파조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인의, 선전관과 같은 관직을 두루 거치고 온성, 강릉, 홍원 등지의 지방관을 지냈다. 홍원 읍지(邑誌)의 관안(官案)에 중종 31년에 현감으로 부임했다가 33년 체임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강릉판관으로 재임할 때 형인 참봉 전우(全宇)의 유일한 아들 전천석(全天錫)이 사망하였는데, 전천석은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으나 그 중 아들 하나와 딸 하나는 모두 서자녀로서 승통(承統)할 수 없었다. 스스로도 아들이 없고 줄곧 외직으로 지방에 부임해 있는 처지였으므로 동생인 부사용 전안(全安)에게 가산을 일부 떼어주면서 제사를 이어나갈 것을 부탁했다. 벼슬을 그만두고는 증조부 전희철이 낙향했던 영주 이산면 지동리 일대의 이르실이라는 곳에 99칸 집을 지어[21] 거처하고 후학을 양성하며 만년을 보냈다. 평소 시경의 추우(騶虞) 장을 즐겨 읊었는데, 이는 주 문왕의 교화를 제후들이 받들어 정치를 하자 온 나라에 초목과 짐승이 번성했음을 노래한 것이다. 동생 전안의 둘째 아들인 봉사 전천기(全天紀)가 양자가 되었는데, 양부에 대한 효성이 깊어 시묘살이한 곳을 향내 사람들이 빈소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영주시 이산면 지동리 이르실 부근에 빈소골이라는 지명이 여전히 남아있다.

  • 전설 (全渫, 1563-1609; 학촌파)
자(字)는 시응(時應), 호(號)는 고산(孤山). 휴계 전희철의 5대손이자 학촌파의 파조이다. 중봉 조헌과 읍청당 박사종의 문인으로 활계 이대유, 비암 박이항 등과 교유했다. 옛날 중국 난정(蘭亭)에서 명사들이 계회를 연 일을 흠모하여 이대유, 박이항, 사촌 화암(花巖) 전택(全澤) 등 뜻을 같이하는 친우들과 함께 고당덕업계(高塘德業契)[22]를 결성하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스승 조헌이 의병을 일으켰는데 당시 관찰사였던 윤선각이 손 놓고 관망만 하고 있자 분개하여 상소문을 작성하였으나 조정에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이후 조헌과 합류하고자 했지만 2차 금산 전투에서 조헌이 전사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를 한으로 여기고 상주에 은거하고 호를 고산이라 했다.

  • 전식 (全湜, 1563-1642; 판서공파)
자(字)는 정원(淨遠), 호(號)는 사서(沙西), 시호(諡號)는 충간(忠簡)이다.[23] 임진왜란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며 청요직당상관을 두루 지낸 명신(名臣)이다.

  • 전극항 (全克恒, 1590~1636; 노동파)
자(字)는 덕고(德古) 또는 덕구(德久)이고, 호(號)는 규천(虯川). 사서(沙西) 전식(全湜)의 장남이다. 아버지와 함께 상사(商社)의 삼로(三老)라 불린 상주의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와 창석(蒼石) 이준(李埈)의 문하에서 배웠다.[24] 광해군 4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인조 2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대교,예문관검열 등을 역임한 후 예조정랑을 지냈다. 예조정랑으로 있던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서 호종하던 중 한성을 지키라는 명을 받고 가서 수십 일을 머물며 지키다 결국 전사했다. 이 공으로 사후 도승지로 추증되었고 정조 10년 국가에서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와 문장으로 당대에 명망이 있었으며 그 명성이 멀리 한양에도 퍼져 이에 대해 은근히 자부하는 시가 존재한다.[25] 본인 외에도 아버지인 전식과 동생인 창주(滄州) 전극념(全克恬) 또한 문장으로 명성이 있어 666년 역사를 지닌 상주의 유명 시회(詩會)인 낙강시회에 삼 부자가 참석하였다.[26][27] 그의 문집(文集)으로 규천문집(虯川文集)이 있다.

  • 전명룡 (全命龍, 1606-1667; 모산파)
자(字)는 백유(伯兪), 호(號)는 영서(𤃡西). 휴계 전희철의 7대손이다. 한강 정구의 문인이었던 숙부 전중승(全仲承)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생원시와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직을 두루 거쳤는데, 특히 지방관을 지내면서 업적이 많았다. 흥덕현감을 지낼 때 어사였던 청봉 심동구가 상주하여 포상을 받았고 주민들이 임기를 늘려줄 것을 조정에 청원하였다. 다만 영암군수에 재직 중일 때는 대동미를 주민들에게 지급하면서 적절히 배분하지 못하여 약천 남구만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기도 했다. 첫째 부인은 개성(開城) 고씨(高氏)로 월봉 고인계의 딸인데 장인의 눈에 들어 그 문하생이 되었다. 고인계의 집이 상주에 있어 인근인 산양 일대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 가운데를 영강(潁江)이 가로지르므로 그 뜻을 취해 호를 영서라고 지었다.

  • 전필기 (全必錡, 1691-1756; 이곡파)
자(字) 기숙(器叔), 호(號) 농수(聾叟). 설봉 전주의 7대손이자 정숙암 전수산(全壽山)의 아들로 족숙 전수억(全壽億)의 양자가 되었다. 형 전필구(全必銶)와 함께 나란히 생원시에 합격했는데, 생부인 전수산도 생원이었으므로 향내의 사람들에게 소순, 소식, 소철 부자와 비견된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인좌의 난 때 의병에 참여하였다. 영남 유생의 일원으로 영조와 대리청정 중이었던 왕세자에게 이광좌 등을 역적으로서 처벌할 것을 여러 차례 상소하였고, 이와 함께 이종성, 박문수 등을 함께 논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7.2. 현대인물[편집]




8. 인구 분포[편집]


순위시/도지역별 인구비율(‰)인구수(명)
1대전광역시3.4915,304
2충청북도2.1973,402
3세종특별자치시2.184436
4경상북도1.3003,409
5대구광역시1.2543,055
6충청남도1.2262,497
7인천광역시1.0212,882
8경기도0.93111,202
9서울특별시0.8958,562
10강원도0.7081,062
11울산광역시0.654743
12부산광역시0.6272,135
13전라북도0.5541,000
14경상남도0.4081,323
15제주특별자치도0.303179
16광주광역시0.163242
17전라남도0.141248
전국0.95947,681

대체로 관향 옥천을 비롯하여 집성촌들이 위치한 충청 지역과 영주, 상주 등 주요 현조(顯祖)들이 터전을 닦은 곳들이 있는 경북 지역에 높은 비율로 분포한다. 반면, 호남과 제주 일대는 상대적으로 인구비율이 낮은 편이다.


9. 여담[편집]


  • 옥천지역 양반연구에 관한 논문에 따르면 옥천 지방 사람들이 일컫기를 옥천을 대표하는 양반가문으로 6토반(土班)과 8대반(大班)이 있다고 한다. 여섯 토반에는 옥천 전씨, 옥천 육씨, 무송 유씨, 순흥 안씨, 초계 주씨, 봉화 금씨이고 여덟 대반에는 선산 곽씨, 인천 이씨[28], 하동 정씨, 은진 송씨, 연일 정씨, 전주 이씨, 청풍 김씨, 연안 김씨이다. 토반 중에서 옥천 전씨와 육씨는 오래전부터 지역의 유력 가문으로 살아온 토성(土姓)이고 그 외의 가문은 다른 지역에서 옮겨온 내성(來姓)이다. 대반은 모두 내성(來姓)이다. 토반중에서 무송 유씨, 순흥 안씨, 봉화 금씨 그리고 대반중에서 하동 정씨가 옥천 전씨와 혼인을 통해 옥천으로 입향한 가문이다. 다만 이 둘을 구분하는 기준은 명확하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위의 성씨들이 옥천 지역의 사마안[29]에 기록된 사람들의 본관 중, 사마안에 따라 조금의 차이는 있지만 최대 61%의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위의 성씨들은 모두 옥천에서 향론을 주도하는 가문이었을 것이다.[30]

  • 옥천 전씨는 여말선초 시기부터 지속적으로 여러 유력자와 통혼을 하여 세력을 키웠다. 이를 알 수 있는 자료로 옥천 사마안에 기록된 사람 중 조선전기에 입록되는 사람들의 입향조를[31] 보면 총 10개 가문 중에서 입향 동기를 알 수 없는 구례 장씨, 문화 류씨, 초계 주씨, 인천 이씨 그리고 옥천 황씨, 옥천 육씨와 혼인을 통해 입향한 선산 곽씨[32] 제외한 다섯 가문 즉 남원 양씨, 순흥 안씨, 울산 박씨, 진위 이씨, 하동 정씨가 옥천 전씨와 혼인을 통해 옥천으로 입향했다. 또한 조선후기에 처음 입록되는 가문의 입향조를 봐도 총 7개 가문 중 입향 동기를 알 수 없는 풍천 임씨, 연일 정씨, 여흥 민씨 그리고 선산 곽씨와 혼인하여 입향한 은진 송씨를 제외한 봉화 금씨, 무송 유씨가 옥천 전씨와 혼인하여 입향했고 함양 여씨 입향조는 매제가 옥천 전씨인 인연으로 입향하였다.#

  • 옥천과 그 인근 지역은 옥천 전씨를 필두로 한 혈연적, 학연적으로 강하게 이어진 세력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는데[33] 그 영향력을 짐작하게 해주는 일화가 바로 삼계서원의 건립과 이를 둘러싼 갈등이다.[34] 삼계서원과 서원을 이끄는 가문들에 불만이 컸던 반대 세력이 서원을 없애기 위해 상소를 올려 임금의 윤허를 받아 없애려고 했는데 서원을 이끄는 세력의 권세가 너무 강해 명망있는 방백과 수령(名公望士)이 와도 없애기는 커녕 위패조차 건들지 못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 권세가 막강했다.[35] 또한 삼계서원이 철폐된 이후 서인이 강세를 보이는 지역인 충청북도에서 동인 계열의 지지를 받는 전팽령을 모신 영당(影堂)으로 대곡영당(代谷影堂)을 짓고 대곡영당이 훼철된 후에도[36] 이를 잇는 목담서원을 다시 지어 위패를 모신 것을 보면 서인의 힘이 강한 조선후기의 충청북도에서 옥천 전씨는 지역의 동인계 가문인데도 불구하고 가문의 영향력이 줄어들지 않았다.

10. 참고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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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 후기의 종2품 문산계.[원문] '旌善君以甲十一世孫檢校都尉弼之子忠肅王朝奉翊大夫密直副使版圖判書上護軍封管城君管城全公侑之墓'[해석] 정선군 이갑의 11세손이자 검교도위 필의 아들이며 충숙왕 조에 봉익대부, 밀직부사, 판도판서, 상호군을 지내고 관성군에 봉해진 관성전공 유의 묘[2] 본관은 파평 윤씨이며 성호사설의 저자 이익의 제자로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다.[3] 강릉 유씨의 시조 유창(劉敞)의 초명이 유경이고 시호가 문희공이라서 동방 13현의 유경이 바로 유창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희'가 '禧'과 '僖'으로 다른데 이름이 같고 '희' 자도 발음은 같은 한자이므로 기록자가 한자를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4] 동국 13현 명단: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 관성군(管城君) 전유(全侑), 문희공(文禧公) 유경(劉敬)[3], 최유경(崔有慶), 김진손(金振孫), 추수경(秋水鏡), 정차(鄭茶), 전득시(田得時), 문래(文萊), 조대림(趙大臨), 강지(姜漬), 이익재(李益齋), 황면재(黃勉齋)[5] 휴계 전희철의 손자이다. 소과에 합격했지만 조부의 유언을 본받아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정자인 야옹정(野翁亭)을 건립한 후 산수를 즐기고 후학을 양성하며 평생 은둔하는 삶을 살았다. 퇴계 이황과도 교류하여 동인과 관계를 맺었다. 이황과의 교류를 알 수 있는 사례로 야옹정의 현판이 퇴계 이황의 친필이며 현판과 함께 정자 건립을 축하하는 시도 한 수 지어주었다고 한다.[6] 오히려 지역과는 상관없이 영남 지방대구에 거주하는 인물이 서인으로 활동한 경우가 있는 반면 서인이 지배적인 충청좌도(現 충청북도)에서 동인 세력으로 꾸준히 영향력을 발휘한 경우도 있다.[7] 연경서원은 옥천 전씨와 본관은 다르지만 시조는 같은 옥산 전씨의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이 배향된 서원이기도 하다. 연경서원은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된 후 현재는 복구되지 못했다.[8] 전서공파는 야옹 전응방이 퇴계 이황과 교류하며 동인과 관계를 맺었다. 이 후 증손인 전해(全海)가 풍산 류씨 류경심(柳景深)(족질(族姪)이 류성룡)의 사위가 되며 류성룡의 문하에 들어간다. 이렇듯 15세기 중반 영주의 옥천 전씨는 퇴계 이황과의 교류, 풍산 류씨와 혼인을 계기로 동인의 일원이 된다. 옥천 전씨와 풍산 류씨의 관계는 옥천 전씨 중 일부가 대구로 이거한 뒤에도 이어진다. 전유장(全有章)이 류성룡의 아들인 류진에게 방문하고 류경심의 문집인 구촌집(龜村集) 편찬에 참여하는 등의 인연을 이어갔다. 전해의 사후 전해의 삼남 전시헌(全時憲)이 밀양 손씨와 혼인을 계기로 대구로 이거하게 된다. 이들은 새롭게 입향하여 대구에서는 기반이 적었기에 영천 이씨와 경주 최씨 등 기존에 정착한 가문과 혼인을 하였고 혼인이 이어진 가문이 한강 정구의 문인인 것을 기반으로 17세기 중반까지는 남인계로 활동했다. 특히 전유장은 대구의 수서원(首書院)이자 남인계 사족의 거점이 되는 연경서원의[7] 원장을 맡는 등 남인 사이에서 인정받는 인물이었다.[9] 그러나 시간이 흘러 전유장은 대구부사와 경상도관찰사로 온 이유겸, 홍처후, 한수원, 이상진과 교류를 통해 서인으로 기울게 된다. 남인 사이에서 인정받던 인물이었으나 서인으로 전향하였기에 전유장은 당시 향촌 사회에서 비판을 받는데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서인으로 활동한 이유는 대구의 옥천 전씨는 전유장이 서원의 원장을 맡으면서 사회적 지위는 확보되었으나 충분한 경제적 기반이 마련되지는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7세기 후반의 조선은 경신대기근을 대표로 하는 여러 대기근을 겪으며 엄청난 경제적 위기를 맞이한 시기였기에 대구의 옥천 전씨는 경제적 어려움을 벗어날 수단으로 서인 계열인 관찰사의 천거를 통한 관직 진출에 주목한 것이었다.#[10] 17세기 忠淸道 沃川 資風書堂의 운영과 인적구성-고수연[11] 남보에 기록된 옥천 전씨 인물 3명이 모두 판서공파 인물이듯이 판서공파에 소속된 종파 중 대부분은 동인의 계열을 이어나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옥천에 집성촌이 있는 종파의 경우 조선 후기에 들어 옥천서인이 지배적인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향력이 강했다. 문중서원인 목담서원이 동인서원인데도 노론 집권 시기에 건립된 점, 충청북도에 건립된 8개의 문중서원 중 서인계 서원이 아닌 곳이 목담서원과 백록서원 두 곳인 점, 제향 인물에서도 남당서원의 이황, 기암서원의 강백년, 목담서원의 옥천 전씨 인물, 백록서원의 권상을 제외하면 모두 서인계 인물인 것과 옥천에 남아있는 옥천 전씨와 관련된 유적지를 보면 중앙 정계와 옥천서인이 집권했더라도 옥천에서의 영향력은 여전히 유지되었다.#[12]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1476년에 발행된 안동 권씨성화보(成化譜)이고 족도(族圖)로 범위를 넓히면 1401년에 발행된 해주 오씨의 족도가 가장 오래되었다. 이외에 16세기에 발행된 족보로는 1562년에 발행된 문화 류씨가정보(嘉靖譜) 그리고 1565년에 발행된 강릉 김씨을축보(乙丑譜)가 대표적이다. 비록 화재로 소실되어 현존하지는 않지만 1554년에 발행된 기록이 있기 때문에 족보가 발행된 시기는 다른 가문의 오래된 족보와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다.[13] 고려 후기 정3품 문산계.[14] 송석충은 전희철의 사위이며, 박승임은 송석충의 외손서(外孫壻)다. 즉, 박승임의 부인인 예천(醴泉) 권씨(權氏)에게는 전희철이 외외증조부(外外曾祖父)가 된다.[15] 무덤을 정리하던 중 발굴된 묘지(墓誌)에 따르면 정묘 기묘년(1399년) 생으로 영락 계묘년(1423년)에 문과에 오른 뒤 관직이 봉상대부 홍문관 부제학에 올랐다고 한다. 문종이 승하한 후에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며 살다가 세묘 을유년(1465년)에 세상을 떠났다. 훗날 사람들이 그가 살던 마을을 농막촌(農幕村)이라 불렀다고 한다.[16] 고려 후기 정4품 문산계[17] 독립유공자 전기서·전만표전인평 전 중앙대학교 국악대학 교수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18] 작가 전우익이 이 마을 출신이다.[19] 독립유공자 전정석이 이 마을 출신이다.[20] 송천(松泉) 최흥원(崔興源)이 지은 노송정(老松亭) 정지년(鄭知年)의 행장에 '사직 전희철 공과 함께 경회루에서 사육신과 울며 작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후대에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가 전희철의 행적을 칭송하는 시를 지었고 성재(性齋) 허전(許傳)은 휴계전공유사서(休溪全公遺事序)라는 글을 통해 그의 행적을 칭송했다.[21] 100칸 이상은 왕족의 권한이었다. 따라서 99칸은 왕족을 제외한 범위에서 최고의 부자인 것이다.[22] 활계(活溪) 이대유(李大㽕), 충암(忠巖) 김대호(金大好), 고강(高江) 정곡(鄭谷), 풍뢰당(風雷堂) 박정필(朴廷弼), 의재(毅齋) 박이겸(朴以謙), 영모재(永慕齋) 박정로(朴廷老), 난고(蘭皐) 우흥룡(禹興龍), 비암(秘巖) 박이항(朴以恒), 심천(深川) 박정량(朴廷亮), 석계(石溪) 민욱(閔昱), 화암(花巖) 전택(全澤), 고산(孤山) 전설(全渫)이 계원으로서 결성한 계회.[23] 시호를 하사하는 교지가 현재까지 남아있는데 교지에 따르면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임금을 받들었다(危身奉上)하여 '충'이요. 정직하여 간사함이 없다(正直無邪)하여 '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24] 정경세의 문집인 우복집(愚伏集) 제1권 시(詩)편에 제자인 전극항에게 부친 시가 있는데 전극항을 수재(秀才)라고 칭하였다. 전극항 이외의 제자에게 수재라는 표현을 쓴 경우는 권후(權垕)에게 부쳐준 시 밖에 없으며 우복집에 권후에게 준 시는 제2권에 수록되어 있지만 전극항에게 준 시는 제1권에 수록된 것을 보아 정경세가 전극항을 제자로서 매우 아꼈던 것으로 보인다.[25] 시문에 관한 일화로 9살에 우복 정경세의 문하에 처음 들어갈 때 우복이 산장(山庄)을 주제로 시를 짓게하니 그 자리에서 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 다른 일화로 동생 전극념이 남긴 증도승지규천산인유사(贈都承旨虯川山人遺事)에 따르면 '그 재주가 민속(敏速)하기를 마치 귀신이 실어다준 것 같아 작은 종소리 울릴 시간에 사운시를 짓고 밥 한 그릇 먹을 시간에 회문시(回文詩)를 지었다. 장문대작(長文大作)이라도 문장에 어색함이 없고 어법이 신기하며 의취(意趣)가 표일했다. 독자로 하여금 어금니에 바람이 나게 하고 모골이 신선같이 느껴지게 하여 세상 사람들이 베껴 외우게 되니 거의 종이값을 올릴 정도였다. ...(중략)... 사람들이 이태백후신으로 볼 정도였다.'라고 전해진다.[26] 이 시회의 시작은 1196년 최충헌의 난을 피해 상주에 살았던 백운(白雲) 이규보부터이다. 시회는 1862년까지 총 51회 열렸는데 시회의 개최자나 참석자로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규보, 김종직, 유호인(兪好仁), 김일손, 이황, 이준(李埈), 채득기(蔡得沂), 홍여하(洪汝河), 신석번(申碩蕃), 이만부(李萬敷), 정종로(鄭宗魯) 등의 인물이다. 이 인물들은 모두 한국 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문장가이므로 낙강시회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시회임을 알 수 있다. 시회의 역대 내력은 다음을 참고[27] 낙강시회의 역대 참석자 중 삼 부자가 함께 참석한 경우는 전씨 삼 부자가 유일하다.[28] 삼가(三嘉) 이씨라고도 한다.[29] 과거시험 중 첫 단계인 소과를 사마시라고도 하는데 이 사마시를 합격한 사람을 기록한 명단을 사마안이라 한다. 사극에 나오는 생원진사가 이 사마시를 합격한 사람이란 의미이다. 옥천에는 이 사마안이 현재 3가지가 남아있다. 대중의 인식과 달리 당시 양반은 한 사람을 기준으로 직계 4대조안에 과거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없다면 그 사람을 양반으로 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양반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관직에 나갈 생각이 없더라도 최소 사마시에는 합격해야 양반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사마안은 해당 지역에서 특정 가문의 영향력을 유추하기에 좋은 자료이다.[30] 朝鮮後期 沃川地方 士族의 存在形態 : 司馬案을 中心으로 - 이정우[31] 입향조는 해당 지역에 처음 자리 잡은 조상이다. 지금과 달리 지역 간 이동이 흔한 시절이 아니기에 만약 지역을 옮긴다면 아내의 가문이 해당 지역의 유력가문인 경우에 그 지역으로 가서 아내의 가문을 바탕으로 터를 잡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대표적인 예로 양동마을여주 이씨가 있다. 만약 여러 가문의 입향조가 모두 같은 가문을 통해 입향했다면 그 가문은 지역에서 강한 영향력을 지닌 가문이라는 의미이다.[32] 일부 논문에서는 선산 곽씨 또한 옥천 전씨와 혼인을 통해 입향했다고 보기도 한다.[33] 세력을 이끈 중심 가문으로 옥천 전씨, 선산 곽씨, 하동 정씨, 인천 이씨 등이 있다. 이들은 삼계서원 건립의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서원의 원장이 이들 가문에서 대부분 나왔을 정도로 서원의 운영에도 가장 많은 관여를 한다.[34] 조상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 있다는 것은 그 가문이 지역의 유력한 양반가임을 의미하고 특히 여러 위패 중 가장 윗 자리에 모셔진 인물의 가문은 지역에서 영향력이 가장 강한 가문이라는 의미이다. 삼계서원과 이 서원의 뒤를 잇는 삼양서원에 모셔진 위패 중 가장 윗 자리에 모셔진 위패가 바로 옥천 전씨 가문의 인물인 전팽령의 위패였다.[35] 갈등의 자세한 내막은 삼계서원 문서 참고[36] 대곡영당은 계사년에 훼철되었다고 하는데 대곡영당이 사라져서 지은 목담서원이 1765년에 건립되므로 기록에서 말하는 '계사년'은 1713년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