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영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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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창덕궁 후원의 건물이다. 주합루의 동남쪽, 부용정의 동북쪽에 있다.
'영화(暎花)' 뜻은[1] '꽃(花)과 어우러진다(暎)'이다. 주변에 아름다운 꽃이 많이 피어 지은 이름인 듯하다. '暎(영)'은 '비치다'는 의미지만 시에서는 '어우러진다'는 뜻으로 많이 쓴다.#
현판 글씨는 영조가 1754년(영조 30년)에 직접 썼다.
2. 역사[편집]
언제 처음 지었는지 모른다. 공식 기록에는 《광해군일기》에 영화당 건설 중지를 언급하는 내용으로 처음 나온다. 그런데 기존에 있던 건물을 중건한 건지, 아니면 창건한 건지 역시 명확하지 않다. 다만 확실한 것은 광해군 때부터는 존재했다는 것이다. 1692년(숙종 18년)에 고쳐지어 오늘에 이른다.
《궁궐지》에 따르면, 영화당에 선조, 효종, 현종, 숙종이 쓴 편액이 걸려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영조가 쓴 영화당 현판을 뺀 나머지는 현재 없다.
3. 활용[편집]
영화당의 앞쪽에는 넓은 마당 '춘당대(春塘臺)'가 있었다.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에 있어 지금은 구역을 담으로 나누었지만, 조선시대에는 구분이 없었다.
왕들은 영화당과 춘당대를 함께 묶어 활용했다. 이곳에서 잔치를 베풀고 신하들에게 음식을 내려주었으며 활을 쏘는 곳으로 사용했다. 또한 과거 시험도 여기서 열었다. 과거에도 단계가 있는데, 각 지방에서 예비 과거 시험인 초시에 합격한 응시자들이 보는 최종 시험장이 이곳이었다. 그래서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과거를 본 곳으로 나왔다.
1760년(영조 36년)에는 청계천 준설 공사를 마친 후 여기서 공로를 치하했다. 그 때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 《영화당친림사선도(暎花堂親臨賜膳圖)》로,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보관한다.
영조 이후 왕들이 대보단이나 문묘[2] 에 참배하기 전에 하룻밤 묵는 곳으로도 사용했다.#### 그리고 주변에 연못 부용지 및 우물들이 있어 습했기 때문에 기우제를 지내거나 작은 논을 만들어 농사를 살피는 장소로도 사용했다.#
4. 구조[편집]
- 동향이며 이중으로 높게 쌓은 기단 위에 지은 건물이다. 아랫 기단의 높이가 더 높다.
- 정면 5칸, 측면 3칸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용마루와 내림마루 및 추녀마루는 기와를 얹어 마감했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공포는 이익공 양식이다. 공포 사이에는 화반을 하나씩 두었다. 기둥과 주춧돌은 사각이며 단청은 모루단청이다.[3]
- 정면(동쪽 면)의 왼쪽에서 2, 3칸은 대청이고 오른쪽(북쪽)의 1칸은 온돌방이다. 그리고 건물 가장자리에 툇간을 한 칸씩 두었는데, 오른쪽의 1칸만 온돌이 깔려있고 나머지는 전부 마루이다. 그래서 오른쪽 면의 가운데는 벽이다.
5. 여담[편집]
- 정조가 창덕궁 후원에서 10가지의 아름다운 풍경을 꼽았는데, 이를 '상림십경(上林十景)'이라고 한다. 그 중에 9경이 '영화시사(暎花試士)', 즉 영화당(暎花)에서 시험(試)보는 선비(士)들의 모습이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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