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노노케 히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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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生きろ
살아라.[2]
모노노케 히메는 스튜디오 지브리가 제작하고 미야자키 하야오가 감독한 애니메이션이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 작품 이전까지 만들어왔던 거시적 이야기들의 최종 결과물이자 그의 사상을 완벽하게 대변하고 있는 작품으로, 애니메이션 역사상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평가된다.
2. 특징[편집]
전작 붉은 돼지 이후 5년 만의 신작이며 한때 미야자키 하야오 최후의 은퇴작으로 거론되기도 했던 작품으로 구상 기간 16년, 제작기간 3년에 제작 예산이 200억원에 달했으며 무려 총 14만 장의 동화가 들어간 대작이다.
사실 후술하겠지만 아시타카 전기라는 제목이 될 작품이었고 실제로 작품의 내용도 아시타카 원톱 주연의 영웅적인 대서사시다. 이는 이전의 지브리가 제작하던 장르와는 다른 전쟁물, 대서사시, 고어물을 표방했기에 개봉하기 전에도 많은 관심과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초반부의 재앙신 촉수 움직임은 제작하는 데 19개월이나 걸렸으며 미야자키가 모든걸 쏟아부어 제작했을 정도로 작품 내외적으로 정말 엄청난 공을 들인 작품이다.
일본 영화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세웠는데 1997년 7월 12일에 개봉해서 1998년 7월 12일까지 무려 1년 동안이나 상영함으로써 일본 극장가 역대 최장 기간 상영작이 되었다. 그 결과 일본 내 1420만 관객 동원이라는 전설적인 기록을 남겼다.
미국을 비롯한 서양권에서도 크게 극찬을 받으며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목록에 영화사에 남을 걸작들과 함께 나란히 이름을 올리며 단순 애니메이션을 넘어 영화사적으로도 엄청난 족적을 남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함께 지브리의 양대 최고작으로 꼽히는 명작이다.
3. 예고편[편집]
4. 시놉시스[편집]
5. 등장인물[편집]
자세한 내용은 모노노케 히메/등장인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줄거리[편집]
자세한 내용은 모노노케 히메/줄거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평가[편집]
명실상부 애니메이션 역사상 최고의 작품 중 하나이자 단순한 애니메이션이나 영화의 위치를 넘어선 위대한 걸작이다. 일본 아카데미상 최우수 작품상을 비롯해 일본 내 당대의 상이란 상은 모조리 휩쓸었고, 베를린 영화제에 초청됐으며 북미에도 진출해 크게 성공했다.
환상적인 스토리, 아름다운 영상미, 섬세한 설정, 치밀한 세계관, 매력적인 캐릭터들, 뛰어난 미장센, 현대사를 관통하는 심도깊은 주제의식 등의 내적인 예술성은 물론 연출, 작화, 카메라 워크, 편집, 연기, 디자인, 미술, 음악, 음향, 각본, 호흡, 분량 등의 완성도까지 극찬을 받았다.
이 작품은 단순한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를 넘어서 일종의 문화예술로 평가된다. 애니메이션으로서도 지금까지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함께 대중들에게 '명작 애니메이션'하면 떠오르는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으며 위대한 영화를 논할때도 자주 언급되는 작품이다.
히사이시 조가 담당한 음악도 찬사를 받았는데 고대 일본의 분위기, 자연의 신비함과 장엄함, 동시에 잔혹함과 격렬함을 한껏 느낄 수 있는 신비로운 감성과 박력 넘치는 사운드가 특징이다.
모노노케 히메의 두드러지는 특징은 스튜디오 지브리의 여타 작품들과는 달리 대놓고 성인층을 타깃으로 굉장히 장엄하고 냉혹하고 또 날카롭게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것이다. 대중성보단 예술성과 작품 본연의 주제의식의 표현에 집중한 작품으로 미야자키가 그동안 계속 탐구해왔던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한 작품이지만, 묘사나 연출이 낭만주의적이었던 이전 작품들과 달리 굉장히 현실적이고 냉엄한 묘사를 보여준다. 이전에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다룬 작품인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보이던 동화적인 구성, 전개와는 극명히 대비되는 부분이다.
이런 냉혹하고 어둡고 다소 그로테스크한 특유의 분위기가 특히 부각된 부분은 작품 전반에서 나타나는 잔인한 고어 묘사이다. 대부분 밝은 분위기이거나 적어도 심하게 성인물스러운 묘사는 거의 없던 전작들과 달리[3] , 웬만한 성인 애니 뺨칠 정도로 신체 절단이나 유혈 등의 묘사가 매우 많이 등장한다. 작중 초반에 등장하는 재앙신은 생김새부터가 검붉은 촉수로 뒤덮여 있는 모습이라 굉장히 징그럽게 생겼으며, 주인공은 사무라이들의 사지를 순식간에 절단하기도 한다. 그 외에도 주인공이 총에 맞아 배가 관통되거나 야생동물들이 인간과 전쟁을 벌이는 장면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뿌려진다. 그런데도 한국에선 전체관람가 판정을 받았다.
이 작품이 이토록 격찬을 받는 주된 이유는 절대적인 선도 절대적인 악도 없는 자연과 인간의 입체적인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과, 비현실적인 방법으로 극을 전개하거나 마무리하지 않고 인간과 자연 어느 쪽에도 편중되지 않는 가치 중립적인 태도로 극을 전개하며 '이해와 타협'이라는 현실적인 해결 방안으로 극을 마무리했다는 점이다. 또한 등장인물들의 캐릭터성도 다방면에서 해석이 가능하여 굉장히 입체적이다. 특히 인간 사회와 야생 자연에 양립하는 캐릭터 '아시타카'의 중립적인 태도로 작품 세계의 입체성과 주제 의식에 대한 묘사를 극대화하고 완성시켰다. 절대 선을 지향하거나 절대 악을 지향하는 캐릭터, 세력은 단 하나도 없다. 자연의 신들과 인간의 관계는 서로가 적대적이지만, 반드시 모두를 위해 공존해야 할 존재들로 묘사된다. 숲을 수호하는 신들은 자연 그 자체를 수호하는 존재임과 동시에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남을 해치는 것을 서슴지 않는 잔혹한 존재이며, 인간은 생존을 위해 자연을 파괴하지만 자신들의 사회에 속한 약자들을 보살피고 사회 발전을 위해 힘쓰는 등 최대한 현실적으로 인간 세계와 야생을 묘사한 점이 돋보인다.
이전에 지브리의 작품을 비롯해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주제를 담은 수많은 작품들이 있었지만, 동화적인 전개를 최대한 배제하고 주제 의식과 이를 통한 작품의 메시지를 뚜렷이 전달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 결과 문화예술과 영상 컨텐츠 역사상 한 획을 그은 걸작으로 남게 되었다.
8. 흥행[편집]
요즘 일본 젊은이들이 본 일본 영화라면 《모노노케 히메》뿐인 걸요?[4]
제작 과정의 숱한 노력에 대한 보상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엄청난 흥행 기록을 세웠다. 일본에서만 관객 1300만 명의 신기록과 흥행 수입 190억 엔을 벌어들여 당시 일본에서 영화 흥행 역대 1위를 기록했다.[5]
국내에서는 2003년 4월 놀랍게도 무삭제 전체관람가 등급으로 개봉했다. 더빙판도 있다. 하지만 너무 늦게 개봉해서 이미 볼 사람은 다 봤기에[6] 전국 20만 관객으로 소리 없이 막을 내렸다. 그저 시기가 너무 늦어 흥행에 실패한 것.
9. 원안[편집]
9.1. 초기 구상[편집]
미야자키가 1980년에 구상했던 모노노케 히메 원안은 지금의 것과는 꽤나 달랐다. 시대 배경은 비슷하지만, 토토로처럼 생긴 요괴인 모노노케가 무사를 살려준 것을 구실로 무사의 딸을 데려가는 내용. 즉, '모노노케'가 '히메'를 데려가는 내용으로 동화 미녀와 야수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지금의 결과물에서는 다소 불분명한 모노노케 히메라는 제목의 의미가 이 원안에서는 구체화되는 셈. # 여주인공인 산의 이름도 무사의 셋째(三) 딸이라는 설정에서 나온 것이다. 원안은 뒤집어졌지만 여주인공의 이름은 그대로 남았다. 미야자키는 이 원안을 바탕으로 이미지 보드 작업까지는 하였으나, 결국 이 내용으로 영상화는 되지 않았다. 이미지 보드는 나중에 모아서 출판되었다.
정리하자면, 최초 기획안에 나오는 괴물 또는 요괴가 '모노노케'였고, 그 요괴와 얽히는 셋째 딸(산방메 무스메)이 '히메'였다. 즉, 여주인공 산이 모노노케라는 것도 아니고, 히메는 공주가 아니라 무가 집안의 딸을 높여 부르는 아가씨 정도의 호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가 1983년에 출판한 그림동화 슈나의 여행과도 유사점이 있다.
9.2. 아이누 신화[편집]
모티브가 된 이야기가 존재하는데 아이누족의 신화인 "레타르 세타 설화"가 바로 그것이다. 마찬가지로 아이누 설화를 모티브로 만든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에서부터 아이누 설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미야자키는 자료가 부족하던 레타르 세타 설화를 현대인이 쉽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애니메이션 영화로 부활시켰다. 그 결과 기록이 적었던 레타르 세타 설화는 아이누 신화 중 가장 유명한 이야기가 되었다. 일본에서 레타르 세타 설화를 다룬 작품은 모노노케 히메가 유일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작품 속 에미시족이 바로 아이누족을 모티브로 구상한 것으로, 작품 곳곳에 아이누와 관련되어 있음을 시사하는 설정이 등장한다.
- 에미시라는 이름은 일본의 동북부에 거주했던 종족을 통틀어 이르는 단어였다. 이들은 야마토와의 전쟁에서 패배해서 외곽까지 이주해야만 했다. 아시타카의 부족은 중앙에서 도망쳐서 정착했으며, 아시타카가 스스로를 동쪽과 북쪽의 어느 곳에서 왔다고 말하는 것은 이를 반영한 것이다.
- 에미시족은 자신들이 흰 들개의 자손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아이누족에는 "흰 개가 인간에게 시집와서 아이를 낳았는데 이것이 아이누족의 선조다."라는 신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일본에는 늑대가 살고 있었으므로 늑대가 등장하는 것이 자연스러움에도 들개가 등장하는 이유는 바로 이 설화의 상징성 때문. 작중에서 늑대는 등장하지 않는다.[7]
- 아이누는 자신들이 숭배하는 거대한 짐승들이 각 산의 신으로 존재한다고 믿었다. 작품 속에서도 들개, 멧돼지, 원숭이, 사슴 등이 신으로 등장하는데 바로 이와 관련된 내용을 따온 것. 단, 원숭이의 모습을 한 성성이는 산해경에 나오는 중국 신화 속 짐승이다.
- 아시타카와 에미시(아이누)의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검은 직도에 고리가 달린 환두대도와 비슷한 검인데, 와라비테도(蕨手刀)라고 하며 간토, 토호쿠 지방에서 토속적으로 발전되었으며 토호쿠 지방과 홋카이도 지방의 고분 부장품에서 다수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에미시가 와라비테도를 사용한 작품의 고증은 정확하다.
10. 타이틀에 대해[편집]
영화 제작이 끝난 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제목을 『 記[A] )』로 하자고 제안했다. 傳記가 아니라 記[A] 인데, 𦻙은 미야자키의 언급에 따르면 '정사에는 없고 귀에서 귀로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라는 뜻을 붙여 자신이 만든 한자라고 한다.[8] 그러나 스즈키 토시오 프로듀서와 니혼 테레비 관계자는 이미 모노노케 히메로 선전 계획을 다 세워놨기 때문에 이제와서 영화 타이틀을 바꿀 수 없었고, 아시타카 전기(アシタカ記[A] )라는 일본인도 읽기 힘든 한자보다는 모노노케 히메가 훨씬 대중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미야자키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 니혼 테레비에서 『모노노케 히메』의 제목으로 TV CM을 내보냈다. 뒤늦게 이를 안 미야자키는 화를 냈지만, 이미 이 타이틀로 방송한 것을 알게 되자 순순히 받아들였다. 채용되지 않은 제목인 アシタカ記[A] 는 모노노케 히메의 BGM 중 하나의 제목이 되었다. 또한 미야자키가 직접 쓴 시의 제목도 아시타카 전기다.
일본에서는 1997년에 개봉된 작품이지만 한국에서는 바로 개봉되지 못하고 2003년이 되어서야 정식 개봉되었다. 그러나 정식 개봉 전부터 그 명성이 널리 알려진 터라 많은 사람들이 해적판 비디오 또는 소극장 단체 관람[9] 등으로 이 작품을 감상했는데, 이 과정에서 "원령공주"로 의역된 제목이 굳어졌다.
'원령공주'라는 제목을 공식적으로 처음 사용한 것은 1997년 11월에 한겨레21에 게재된 영화평론가 김의찬의 평론인 것으로 보이는데, 2003년 모노노케 히메의 한국 개봉 당시 그는 씨네21에 올린 평론에서 자신이 직접 '모노노케 히메'를 '원령공주'로 번역했다고 밝힌 바 있다. 모노노케(物の怪)는 일본의 고전(古典)과 신화에 나오는 존재로, 인간에게 빙의해서 괴롭히거나 병들게 하고 죽게 하는 원령(怨霊), 사령(死霊), 생령(生霊) 등의 영혼(靈魂)이며, 요괴를 가리키기도 한다. 한편 일본에서 히메(姫)는 '공주'라는 번역명과는 달리 귀인의 딸이나 지체 높은 아가씨에게 쓰는, 좀 더 넓은 범위의 단어이다. 혹은 일반적인 한 가정의 어린 딸을 비유적으로 공주님으로 부르듯이, 일본에서도 한 가정의 어린 딸을 지칭하며 가볍게 '오히메사마' 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때문에 2003년 이 작품의 정식 발매를 맡게 된 대원미디어에서는 원제의 발음과 의미를 모두 포함할 수 있는 "모노노케 히메"로 개봉했다. 모노노케라는 단어가 가진 뜻을 한 단어로 함축할 수 있는 한국어 표현은 마땅히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품에 비추어 볼 때 '모노노케 히메'란 여주인공 산을 지칭하는 말인데, 타타라 마을의 주민들 외에는 그 누구도 산을 '모노노케 히메'(원령 공주)라 하지 않았다. 심지어 남자 주인공인 아시타카조차 마을 사람들 때문에 산을 가리키는 호칭이라는 것은 알았으나, 산의 이름을 제대로 알기 전까지 그녀를 직접 부를 때는 '들개의 공주'(또는 들개 소녀)라고 불렀다. 딱 한 번 산을 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라고 칭한 적이 있지만, 그것은 그렇게 해야만 산의 이름을 모르는 마을 사람들이 누구를 언급하는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모노노케'의 본래 의미와 연관지었을 때 산이 타타라 마을 사람들에게 있어서 들개의 편을 들어 인간을 습격하는 두려움의 대상이라는 것과 그녀가 숲을 수호하는 동물신의 양녀이니만큼 '공주'라 불리는 게 어색하지 않은 입장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모노노케 히메'란 타타라 마을, 즉 인간들이 산에게 쓰는 멸칭에 가깝다.
사실 작중 대사에서도 타타라 마을 사람들은 산을 '들개에게 혼을 빼앗긴 녀석' 으로 설명하는데 그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인간이면서 짐승들과 함께 살아가는 산은 마치 '요괴나 귀신에게 씌여서 저러는 것' 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즉, 다시 말해 '모노노케 히메' 란 말에는, 자연을 정복하고 활용하여 인간의 터전을 늘리려는 타타라 마을 사람들이, 들개와 살아가는 산을 바라보는 시선이 담겨 있는 것이다. 타타라 마을 사람들이 산을 '모노노케 히메', 즉 '원령 공주'라고 부를 때는 '귀신 씌인 계집애' 정도의 뜻을 담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때의 원령 공주라는 대사상의 번역은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허나, 모노노케라는 단어의 원뜻에는 여러 의미가 중의적으로 섞여 있는 만큼, 원령 공주라는 번역이 가지는 의미의 폭이 한정되기에 작품의 공식 번역명은 모노노케 히메로 하되[10] , 작중 타타라 마을 사람들이 산을 부를 때는 '원령 공주'로 대사를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11]
1990년대에는 '혼령아가씨'나 '귀신낭자'로 번역된 적도 있었다. 발음이 같은 '월령공주'라는 명칭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
해외에서는 '모노노케'에 적절한 번역어를 찾는 것이 어려웠는지 번역하지 않고 원어 그대로 갖다쓰는 경향이 강하다. 반면 '히메'는 그런 거 없이 대부분 자국 번역을 갖다 썼다. 예를 들면 영어판 제목은 Princess Mononoke이다. 언어 특성상 원어 음역을 그대로 쓰기 어려운 중국어권에서는 魔法公主(대만, 싱가포르), 幽靈公主(중국 대륙, 홍콩, 마카오)로 번역되었다.
11. 작품론[편집]
11.1. 해설[편집]
はるか彼方に ねむる人よ
瞳とじればひろがる
あの日のやさしい声
永遠の光が 土にかえるように
大地の ゆるしが とどくまで
저 멀리 잠든 그대여
눈을 감으면 펼쳐지는
그 날의 상냥한 목소리
영원의 빛이 땅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대지의 용서가 닿을 때까지
しんじて ともに生きること
そして 生まれるつよさ
みあげて 遠くをはなれても
心をひとつにむすぶ 愛 希望のそら
함께 믿으며 살아가는 것
그리고 태어나는 힘
보라, 먼 곳을 떠나더라도
마음을 하나로 이어주는 사랑, 희망의 하늘이라
- OST 아시타카와 산(アシタカとサン), 가사 부분 #
미야자키 하야오의 전작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주제, 인물, 결말이 비슷하다고 느껴지기 쉬우나 실제로는 상당히 다른 내용이다. 이는 미야자키 작품에 주요하게 등장하는 '자연과 소통하는 매개로서의 주인공'이 두 작품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나우시카'에서 미야자키 자신의 이상적 인간상을 반영한 영웅이자 인간과 자연 모두와 교감할 수 있는 완벽한 결합상을 보여주는 소녀 나우시카가 등장하는 반면, '모노노케 히메'에는 나우시카와 1 대 1로 대응하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산'과 동물들의 말을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인[12] 아시타카는 타타라의 마을 사람들과도 가까워지나 '숲' 에 대한 그의 관점은 끝끝내 마을 사람들로부터 거부받는다.[13] 즉, 그는 인간이지만 인간을 대표하는 존재가 아니다. 작품 내에서 인간의 입장을 대변하는 존재는 숲을 파괴하려는 타타라의 사람들이며, 아시타카는 타타라에 도달한 '외부인'일 뿐이다. 이는 나우시카가 자연과 교감하면서도 지지와 신뢰를 끝까지 잃지 않은 것, 다시 말해 인간을 대표할 수 있었던 인물이라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타타라 마을은 상당히 특이한데, 철을 여자가 만지면 부정을 탄다고 여겼던 시대에 여자가 제철을 담당하도록 하고 저주받은 존재로 생각되던 나병 환자들이 소외되지 않고 구성원으로서 더불어 살아가는 작은 세계이다. 고대 사회에서 남성에 비해 하등한 존재로 여겨졌던 여성들이 기죽지 않고 타타라 마을의 노동과 병역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모습, 최고 지도자가 여성인 에보시 고젠인 것을 통해 미야자키 하야오의 에코페미니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미야자키 감독의 세계에서 자연과 대립하는 인간 집단이 이토록 긍정적으로 그려진 적은 드물다. 이를 바탕으로 타타라 마을은 감독이 허락한 '인간의 공간'이라고도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이상적인 공간'이라고 볼 수는 없는데, 인간의 복지가 향상되는 그 과정은 분명히 자연에 대한 적대와 파괴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물들은 인간이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고 나무를 베는 것을 증오하여 마을 단위로 촌락을 파괴해갔다.[14] 마찬가지로 타타라 마을이 있는 자리는 원래 나고의 터전이어서 멧돼지의 공격을 받았지만, 이들은 에보시의 화승총 부대에 중상을 입고 축출되었다. 사실 나고의 맷집은 보통이 아니어서 불화살도 무용지물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그나마 에보시가 화승총 부대를 양성해서 물리친 것. 결국 나고는 뼈와 내장이 찢기는 고통을 받고 재앙신으로 변했으며, 에미시가 있는 곳까지 도달해 아시타카를 공격한다. 아시타카에 쓰여진 저주의 원흉은 에보시에게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자연과 인간 모두는 서로의 삶을 위해 대립했던 것이다.
또한 나우시카에서 '오무'와 '부해'가 대자연의 섭리와 인간과 대립하는 자연의 구성물을 동시에 상징했던 것과는 달리, 모노노케 히메에서는 이러한 역할이 여러 캐릭터에게 분담되어 있다. 산은 아시타카와 비슷하게 숲의 세계에 속해있지만 이들을 대변하지는 않는다. "인간도 들개도 될 수 없는 그 애는 가엽고도 사랑스러운 내 딸이다!"라는 모로의 대사에서 잘 드러나듯, 그녀는 숲에 편입되어 있지만 인간이기 때문에 숲에서 거부받는 인물이다.[15] 작중에서 숲을 대변하는 캐릭터는 모로와 옷코토누시를 비롯한 숲 속의 모노노케들이다.
시시가미역시 숲을 대변하지 않는다. 그는 멧돼지 일족의 지도자 옷코토누시의 절망에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사슴신은 목이 잘리고 폭주하기 전까지는 단 한 차례도 인간들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 사슴신은 다만 생을 거두고 부여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사슴신은 "자연" 이상의 범주인 "대자연의 섭리" 그 자체를 상징하는 존재이다. 작품의 결말에서 이것은 더 확실해진다.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죽음에서도 그는 다시 숲을 부활시키고, 아시타카는 "시시 신은 죽지 않아, 생명 그 자체니까."라는 말을 한다. 이는 대자연의 중립성, 그리고 자정력을 상징한다.
모노노케 히메에는 나우시카와 달리 절대선도 절대악도 없다. 오무라는 초월적 존재로 표상되는 나우시카의 자연과 달리 모노노케 히메의 자연은 성성이와 멧돼지들의 모습에서 나타나듯 배타적이고 잔혹하며 자신의 생존을 위해 냉정한 행위도 서슴지 않을 수 있는 존재이다. 또한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들의 행위는 최종적으로 숲 전체의 재앙으로 돌아오기는 하지만, 그 파괴 행위의 결과물이 남녀가 평등하고 나환자들이 보호받는 이상적인 공동체의 건설이라는 점에서 이것을 무턱대고 악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이런 점에서 모노노케 히메에서 보여주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주제 의식은 나우시카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한 것이며,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영화 속 인물들에 대해 어떠한 판단을 내릴 지는 관객의 가치 판단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분노한 신들과 인간들의 싸움 속에서 행복한 결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증오와 살해 속에서도 살아갈 이유는 찾을 수 있습니다.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만남은 존재합니다. 우리는 더 소중한 것들을 위해서, 증오를 그립니다. 우리는 자유를 위해서, 저주를 그립니다. 저희가 그린 것은 소년이 소녀를 이해하고, 소녀가 소년에게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입니다. 마지막에 소녀는 소년에게 "아시타카는 좋아해. 하지만 인간은 용서할 수 없어."라고 말하죠. 그럼에도 소년은 웃으며 말합니다. "그래도 좋아. 나와 함께 살아가자."
- 미야자키 하야오
싸움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노력한 아시타카에 의해서 산은 인간과 조금 더 가까워지게 되고, 에보시도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고 더 좋은 마을을 만들겠다고 다짐한다. 이처럼 모노노케 히메는 극적인 해결이 아닌 현실적인 화법으로 보다 나은 세상으로의 한 걸음을 강조한다. 하루 아침에 세상이 이상향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작은 노력과 변화들이 쌓이며 변해가는 것으로. 산과 에보시의 변화가 바로 이러한 미야자키 감독의 이데올로기를 상징하는 것이다.
11.2. 후일담[편집]
いえ、彼らはずっと良い関係を続けていくだろうと思います。それから、サンが生きていくために、アシタカはいろいろな努力をするだろうと思います。同時に、タタラ場の人々が生きていくためにも、大変な努力を払うだろうと。そのために、アシタカは引き裂かれて、傷だらけになるだろうと思います。それでも彼は、それを曲げずに生きていこうと思って、両方を大切にしようと思い続けるだろう。だから、彼の生き方は、私たちが今の時代を生きていく生き方に、共通するんだと思うんです。
(아뇨. 그들은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계속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산이 살아가기 위해, 아시타카는 여러가지 노력을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타타라 마을의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이고요. 이를 위해 아시타카는 찢기고, 상처투성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것을 굴복하지 않고 앞으로도 모두를 소중히 여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살아가는 방식은 우리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삶에 공통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USA 인터뷰 #
아시타카와 산의 후일담에 대해서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인터뷰에서 직접 언급했다. 미국의 인터뷰에서 질문자가 왜 아시타카와 산이 결혼하지 않았냐는 질문의 대답이다.
그림 콘티에 산이 아시타카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인다는 서술은 있다.[16] 프러포즈가 간접적인 표현으로 묘사된 부분에 대해서는 나쓰메 소세키의 일화를 참고하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이다. 또한 미야자키는 NHK 「전문직업의 방식(プロフェッショナル)」 특집에서 둘의 관계를 가요이콘(通い婚)이라 했는데, 이는 결혼한 부부가 함께 살지 못하고 남편이 아내가 있는 곳으로 왕래하는 혼인 형태다. 링크
정확한 결말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아시타카와 산의 인연은 계속되며 이들은 고난 속에서도 함께 살아간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12. 기타[편집]
- 잔인한 장면 때문에[17] 당시 배급사에서 낮아도 12세 이상 등급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전체관람가를 받아서 놀랐다고 했다. # 실제로 동년에 개봉한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도 비슷한 수위에 청소년 관람불가를 받았다. TV에서 재방영할 때는 잔인한 장면을 대부분 잘라내고 연령 제한을 15세로 했다. IPTV에서도 출혈 장면 다수가 편집되어 올라가 있다.
- 오토모 가츠히로의 AKIRA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함께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편에 뽑혔다.
- 본작의 카피 "生きろ。"(살아라)는 MOTHER 시리즈로 유명한 카피라이터 이토이 시게사토가 고안한 것이다. 비슷한 시기 개봉한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은 "だからみんな、 死んでしまえばいいのに…"(그러니까 모두,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라는 카피를 내세웠는데, 극장에 이 두 카피가 나란히 걸려 좋은 대조가 되었고, 이 때문에 '늙은이는 살라고 하고, 젊은이는 죽으라고 한다.' 라는 말이 생겨났다.
- 영화 시사회에 참석한 배급사 도호 관계자들은 "아이들이 보기에는 어렵다. 10억 엔의 수익도 올리지 못할 거 같다", "어른들도 복잡한 스토리의 작품에다 '살아라' 같은 철학적인 카피로는 오지 않을 것"이라며 영화의 흥행을 부정적으로 내다봤다고. 하지만 스즈키 토시오는 영화에도 철학적인 메시지가 필요한 시대라고 판단, 타카하타 이사오에게서 들은 미국 영화 프로듀서 게리 커츠가 남긴 스타워즈의 흥행 이후 할리우드의 최대 주제가 '사랑'에서 '철학'으로 바뀌었다는 말에 따라서 만약 대중적인 차원에서 철학을 제시하는 작품이 나오면 그것이 승리할 것이라 보았다고 한다.[18]
- 국내 포스터에서는 산을 대자연의 수호신이라고 명명했다. 또한 예고편에서는 작품의 구도를 자연을 지키려는 자와 파괴하려는 자의 이분법으로 나누는, 영화가 의도한 대주제와는 꽤나 반대되는 구도로 연출했다. 포스터뿐이라면 단순히 번역자의 오역일 수도 있지만, 예고편까지 저렇다는 것은 결국 수입할 당시 기준 본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낮았다고밖에 볼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