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다효/비판/우크라이나 설명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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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우크라이나의 외교정책 설명 관련 비판
2.1. 반론
2.1.1. 반론에 대한 비판
2.1.2.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시도 무용론에 대한 반박
3. 우크라이나 언어법 설명 관련 비판
3.1. 우크라이나 언어법 연표
3.2. 문제시되는 영상 및 발언
3.3. 우크라이나의 헌법에 보장된 러시아어의 지위
3.4. 쟁점 1 : 우크라이나에 한국의 민족 개념 도입
3.5. 쟁점 2: 우크라이나의 언어법은 단순한 정치적 포퓰리즘인가?
3.6. 쟁점 3: 언어법으로 우크라이나 정부가 과연 민심을 잃었나?
3.7. 쟁점 4: 러시아어가 일반적으로 차별을 받아온 언어인가?
3.8. 쟁점 5: 키이우라고 부르는게 단순히 감성팔이인가?
3.9. 쟁점 6: 우크라이나 내의 러시아 언어 사용자 전반이 가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언어 인식
3.10. 쟁점 7: 우크라이나 민족성에 대한 역사왜곡
3.11. 쟁점 8: 중국의 소수민족 탄압 정책 비유
3.11.1. 간다효의 반응
3.11.1.1. 이에 대한 비판
3.12. 쟁점 9: 지나치게 러시아쪽으로 편향된 해석
4. 유튜브 댓글 삭제 관련
5. 지나친 현실주의적 관점에 대한 비판
6. 간청단이라면 무조건 봐야 하는 공지영상에 관한 반론
6.1. 과연 나토는 동진 금지를 약속하였는가?
6.2. 러시아의 부다페스트 각서 위반
6.3. 러시아의 대전략적 실패
6.4. 우크라이나에 대한 서방의 실질적 지원
7.1. 페트로 포로셴코 설명에 관한 가짜 뉴스
7.2. 오데사 폭동 설명 관련 오류
7.3. 러시아어 금지법 관련 오류[1]
7.4. 친러 여론 관련
7.5. 돈바스 반군보다 우크라이나군이 강군이었는가?
8. 우크라이나에서 젤렌스키가 당선된 진짜 이유에 관한 비판
8.1. 가짜 뉴스에 대한 적반하장 태도
9. 결론



1. 개요[편집]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2] 전쟁 이해를 위해 양국관계에 대한 러시아우크라이나 각국의 입장과 인식을 이해해야 한다. 러우전의 배경에 대한 간다효의 설명에서 사실과 다르며 누락된 점들을 비판하고자 한다.

2. 우크라이나의 외교정책 설명 관련 비판[편집]


【원문 펼치기 · 접기】
A large group of the authors are Western scholars of Russia, often commanding leadership positions in University centers and departments focusing on the former communist world. Russian-language media remains prevalent in Ukraine and many publications have Russian and Ukrainian versions. Three of Ukraines five political weeklies are published in Russian" All official websites have Russian-language pages. Ukrainian media and official websites can be accessed from anywhere. Nevertheless, few scholars use sources from Ukraine and for Western Russianists, the default is always to use sources from Russia.

Putin's re-election in 2012 and his turn to a more extreme Russian nationalism has been evident in Russian information warfare towards Ukraine and Ukrainians who have been the main target (Kuzio, 2019). “Almost five years into the conflict between Russia and Ukraine, the Kremlin's use of the information weapon against Ukraine has not decreased; Ukraine still stands out as the most misrepresented country in pro-Kremlin media

Downplaying Russian and exaggerating Ukrainian nationalism leads to the apportioning of blame on Kyiv for the violent conflict. President Poroshenko is blamed for unleashing a war after he was elected in May 2014 rather than seeking compromise. Just as the West is blamed for democracy promotion, NATO and EU enlargement leading to the crisis, so too are Ukrainian leaders, blamed for fighting rather than negotiating. In such an analysis, Putin presumably shares no, or little, responsibility.

러시아어 미디어는 여전히 우크라이나에서 널리 퍼져 있으며 많은 출판물에 러시아어우크라이나어 버전이 있다. 우크라이나의 5개 정치 주간지 중 3개는 러시아어로 발행되며, 모든 공식 웹사이트에는 러시아어 페이지가 있다. 우크라이나 미디어와 공식 웹사이트는 어디서나 접속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의 출처를 사용하는 학자는 거의 없으며 서방 러시아 학자의 경우 항상 러시아의 출처를 사용하는 것이 기본이다.

2012년 푸틴의 재선과 극단적 러시아 민족주의의 등장인 러시아 정보전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갈등이 거의 5년이 지난 지금, 우크라이나에 대한 크렘린의 정보 무기 사용은 줄어들지 않았다. 우크라이나는 친크렘린 언론에서 가장 실패한 국가로 묘사된다. 러시아 언론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대규모 허위 정보와 선전 공격이 우크라이나를 "인위적인 국가", "실패한 국가"로 묘사하고 있다.

러시아인들의 책임을 경시하고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과장하면 폭력적인 분쟁에 대한 책임이 우크라이나에 배분된다. 포로셴코 대통령은 2014년 5월 당선된 후 타협보다는 전쟁을 촉발한 혐의를 받고 있다. 서방이 민주화 촉진의 책임을 지고 있는 것처럼, NATO와 EU 확대가 위기를 촉발한 것처럼 우크라이나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로 책임을 받고 있는 것이다. 푸틴은 책임을 거의 받지 않을 것이다.

Taras Kuzio, Euromaidan revolution, Crimea and Russia–Ukraine war: why it is time for a review of Ukrainian–Russian studies, 2019- #


국제정치학계가 러시아의 프로파간다에서 자유롭다는 보장이 없다.

위 인용문의 타라스 쿠지오(Taras Kuzio, Тарас Кузьо)는 간다효가 신뢰성 있는 출처로 영상에서 직접 언급한 전 나토 소속 우크라이나 전문가이다. 타라스 쿠지오는 문헌에서 서방 학계가 러시아의 책임을 줄이기 위해 학문적 곡해를 수행한다고 꾸준히 언급하고 있다. 이는 동일 저자의 다른 문헌에서도 비슷하게 관찰된다. 다만 참고해야 할 것이 결코 이 저자는 우크라이나의 문제점을 전부 부정하고 덮으려고 하지 않는다.

2014년부터 반러를 외쳐왔어요. 우크라이나는.

이 모든 게 푸틴의 설계다? 영상 7분 21초.


러시아는 18세기 코자크 헤트만국(Cossack Hetmanate)을 멸망시키고 주기적인 진압으로 카자크의 자치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18세기 자포리자 코자크의 반란을 진압함과 동시에 회유와 탄압을 번갈아 수행하였다. 더불어 19세기에 세금 면제, 경작지 소유화 등 특권을 제공함으로써 영토를 합병하고 제국에 복속시켰다. 18세기 초 부터 우크라이나어를 탄압하고 러시아 제국의 농노제를 도입하였다.

급격한 러시아화로부터 우크라이나어와 문화를 보호하는 것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우크라이나 정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3]

두 국가 사이의 관점의 차이는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올라간다. 러시아는 러시아 제국의 통치는 폴란드, 오스만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보다 온건하고 합당하였다고 보는 반면, 우크라이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보다 훨씬 더 좋지 않은 시절로 표현되고 있다. 특히 1933년 우크라이나 대기근을 러시아는 단순한 기근으로 보지만, 우크라이나는 의도된 집단 학살로 보는 다른 접근방식을 가지고 있다.

푸틴 집권 후 드러나기 시작한 러시아 민족주의는 이런 갈등을 부추겼다. 이는 2009년 러시아 전 대통령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빅토르 유셴코에게 보낸 서한에서 드러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관계는 (중략) 민족주의자들이 1932-1933년 기근에 대한 그들의 해석을 지지하도록 국제 사회를 압박하려는 시도에 의해 시험을 받고 있다. 공공 생활, 과학, 교육, 문화, 미디어 및 사법 절차에서 러시아어에 대한 탄압이 진행되고 있다.

2009년 러시아 전 대통령 메드베데프.


우크라이나는 2014년 이전에도 러시아를 좋아하지 않았고 이러한 감정은 2014년 이후 심화된 것에 불과하다.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겠다는 이야기를 2010년 중후반부터 하거든요?

이 모든 게 푸틴의 설계다? 영상 10분 48초.


간다효는 우크라이나가 성급하게 NATO 가입을 추진하다가 러시아의 심기를 건드려 러시아의 침공을 유발했다고 우크라이나 정부를 비판하였다. 여기에 대해 전 우크라이나 주재 한국 대사인 권기창 전 대사는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 추진은 이미 94년도에 2대 대통령이었던 레오니드 쿠치마 대통령 시절부터 NATOEU 가입을 추진하였으며,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정부에서 성급하게 추진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정책들을 계속 이어왔던 것이라고 설명하였다.[4] 또한 이번 침공의 책임은 어디까지나 침공을 한 러시아 및 푸틴의 잘못이지, 침공을 당한 우크라이나의 잘못이라는 것은 밤길에 어두운 골목을 지나가지 말라고 충고하였지만 사정으로 인해 어두운 골목길을 지나가다 강도에게 당한 사람이 있을 경우 책임이 사람에게 있다고 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또한 러시아-우크라이나 관계의 본격적인 악화는 2010 중-후반이 아닌 2005~2010년 유센코 대통령 시절부터 발생하였다. 이 갈등의 원인 중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 시도 가 있었고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외교관을 추방한다.

크림 반도 주민들이 (러시아군들에게) 웰컴을 외치게 뭐하러 만들어줬느냐?

이 모든 게 푸틴의 설계다? 영상 9분 09초.


간다효는 2012년, 2014년 노보로시야(Novorossiya) 프로젝트의 처참한 실패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러시아가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우크라인들이 많이 사는 8개 역에서 친러시아 봉기를 일으켰으나, 우크라이나 대중은 전혀 이를 지지하지 않았다. 크림 반도 이외의 가장 친러적인 돈바스 지역에서조차 친러세력은 지지를 받지 못하는 소수에 불과하였고 진압되기 직전(2014년 7월~8월) 러시아군이 개입하여 목숨을 건졌다.

애당초 우크라이나의 분리주의자는 2014년 전, 돈바스 인구의 1/3 이상, 크림 인구의 40% 이상을 차지한 적이 없었다. 크림 반도와 돈바스에 이어 가장 분리주의 지지율이 높았던 하르키우조차 16%에 불과하였다. 심지어 돈바스에 사는 러시아인들 중 30%만 분리주의를 지지했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이중 국적을 가진 사람의 11%만 분리주의를 지지하였다. #

간다효가 핵심으로 지목한 러시아어 화자 차별은 과장된 면이 심하다. 반군이 점령한 도네츠크루한스크에서는 9.4%와 12.7% 만이 우크라이나어 단독 사용에 대한 불만이 있었고. 도네츠크에서는 59%, 우크라이나 동부 및 남부에서는 80%가 러시아어 사용자에 대한 차별이 있다고 믿지 않았다.#

노보로시야(Novorossiya) 프로젝트가 처참히 실패한 이후, 푸틴은 분노했고 이는 크림 반도에 대한 강탈로 이어졌다. 이러한 러시아의 공격적 행동은 우크라이나에서 극우적인 민족주의가 발생하는데 기여 하였고. 이는 다른 민족주의 세력 및 서방 세력이 우크라이나 사태 개입에 미온적이 되는 원인이 되었으므로 차라리 이 부분을 지적하는 것이 더 일리가 있다.

한편 이 영상에서 독일프랑스와 같은 서유럽 국가들이 러시아의 천연가스로 인해 러시아와 멀어지지 않으려고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독일 사회민주당 출신으로 친러적인 성향을 보이던[5] 현직 독일 대통령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부차 학살이 일어난 직후 “지금의 푸틴 대통령 치하에서는 (러시아와 유럽이) 과거와 같은 상태로 복귀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또한 프랑크 대통령은 노르트스트림 2 사업 강행이 엄청난 실책이었고, 이번 일을 통해 독일이 동유럽에서 많은 신용을 잃었다고 평가하여 간다효와는 다른 주장을 하였다.

또한 우크라이나 군대는 2014년, 최고 사령관 빅토르 무젠코(Віктор Муженко, Viktor Muzhenko)가 "우크라이나 군대는 폐허가 되었다" 라고 자학할 정도로 무너진 상태였다. 그러나 간다효가 무능한 정부라고 비판한 우크라이나의 반러 정권은 나토 가입정책을 추친하면서 서방에게서 수백만 달러의 군사지원을 받았고 군사장비 및 편재 등 전반적인 개혁을 시작하였다.

분명 이 과정에서 간다효가 지적한 부정부패가 있었다는 점에서는 반론의 여지가 없으나[6], 이 개혁은 실질적으로 성공하였다. 2016년 포로셴코 대통령은 지휘 통제, 계획, 작전, 의류·물류·전투식량, 전문성 등 5개의 범주에서 전면적인 개혁을 실시하였고, 러시아의 침공에 대한 두려움이 동기로 작용하여 상당한 개선을 이뤄내어 이는 러시아의 침공에 대한 유능한 대응으로 증명되었다. 우크라이나는 NATO 가입을 추진하면서 NATO 표준, 규칙, 절차를 NATO에게 조언받았으며, 실제로 험비, 무인 항공기, 저격 소총, 레이더, 열화상 카메라 등 다양한 무기와 장비 또한 지원받았다. 특히 우크라이나 정부가 제일 관심을 보인 장비는 대전차 미사일로 2014년 절망을 안겨주었던 T-90 전차에 대해 유효한 타격을 줄 수 있는 각종 대전차 무기 및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간다효가 "정치과 대학생인 저도 아는 내용(NATO 가입 시도 무용론)을 우크라이나 정부가 추진했다는 것은 그냥 무능한 것이다" 라고 주장한 것과 대치되는 내용이다. 우크라이나는 분명 NATO 가입은 힘들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이득이 있기 때문에 접근한 것이고 NATO 또한 우크라이나를 완충지대로 삼기 위해 상당한 기여를 한 것은 분명하다.

한쳔, 러시아의 침공 명분으로서 바라볼때 중요한 점은 우크라이나는 단순히 NATO에 가입하려는 것 뿐만이 아니라, 우크라이나 군의 개편이 2020년대에 상당히 진전되었다는 사실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군이 NATO 가입 시도를 하는 것 뿐 아니라 우크라이나군이 실질적으로 개혁되고 무장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영향력을 잃지 않기 위하여 마지막 수단으로써 침공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는 러시아가 평화 조약 중 하나로 주장한 "우크라이나군 비무장화"로써 맥락이 일치한다.

또한 간다효가 우크라이나 정부를 비판하는 태도 또한 모순적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간다효는 박정희 등 논란이 되는 정치인에 관해서는 공도 있고 과도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였지만 우크라이나 정부에 대해서는 비판 일변도로 나와 일관성이 없어 보인다는 의견이다.


2.1. 반론[편집]


우선 이 문제는 현재 진행 중인 문제이며 간다효가 이러저러한 주장을 한 시점과 이를 논박하는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상황에 얼마든지 차이가 있을 수 있으므로 그것을 감안하고 무조건 옳다 그르다를 따지는 것(무분별한 옹호 및 무분별한 비판)은 지양할 필요가 있다. 가령 러시아의 예상 밖 졸전과 전쟁범죄 행위가 거듭될수록 정치인들이나 학자들의 견해에 수시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한 이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두고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몇몇 측면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기 때문에 어느 한쪽의 의견만이 맞는다, 틀리다를 단정지을 수는 없으며, 이는 간다효의 의견 또한 포함된다.[7]

우크라이나의 정치외교적 행보를 비판하는 것이 곧 러시아의 침공 행위에 대한 옹호라는 것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문제를 각자 비판하는 제3의 선택지를 배제한 거짓 딜레마의 오류이다. 간다효가 중도에서 벗어나 의도적으로 러시아를 지지하고 우크라이나를 비난하려는 목적을 품었다는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간다효가 편향적이라는 주장은 힘을 잃는다.

실제로 간다효는 영상에서 우크라이나 침공과 예상 밖 졸전에 대해 러시아의 잘못이자 실책이라고 수시로 못을 박은 바 있으며, 러시아의 침략 행위에 대해서 그에 걸맞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비판 태도와 관련한 지적에 대해서는 비판 내용 대부분이 전쟁 이전의 정치 외교적 실책이 중심이다. 다만 젤렌스키 대통령이 전시 상황에서 타국으로 망명하지 않고 자국에 남아서 보여주는 긍정적인 모습들에 대해서는 폄하하면 안된다. 간다효 역시 이미 벌어진 전쟁 치하에서 러시아의 초반 의도대로 젤렌스키 대통령이 타국으로 망명하거나 우크라 정부가 와해되지 않고 자국에 남아서 항전하는 등의 재평가 요소를 부정하진 않았다.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가 러시아를 비판하였더라도 추후에도 러시아와 멀어지려 할 것이냐는 아직 확실하진 않다. 지금 당장은 독일 내에서의 지지율, 국제적 위상을 위해 겉으로는 비판하더라도 이후에 시간이 흐르고 독일 내부의 정치적 상황, 국제 정치적 판도가 변함에 따라 러시아에 대한 입장이 어떻게 달라질지는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8][9]

우크라이나 현 정부가 과거 정부의 정책을 계승했을 뿐이라는 이유로 비판을 피할 수 없는 것은 우크라이나가 처음 NATO 가입을 시도하고 우크라이나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와 접경한 발트 3국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이 NATO에 물밀듯이 합류한 소련 해체 ~ 2000년대 초반과 2020년대의 국제 정세와 러시아의 영향력은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중국의 인권 탄압을 비롯한 각종 문제들이 한두해 일이 아님에도 미국-중국 패권 경쟁이 본격화된 2010년대 이후에 전 세계적 현안으로 급부상했듯이[10] 과거에는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를 사안이 지금 현재 시점에서도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강도와 피해자에 대한 비유에서도 국제사회에선 그 강도를 제압하고 피해자를 위해 길을 밝혀줄 경찰이나 보호자가 없다는 것이 맹점이다. 거의 유일하게 러시아에 대항할 국력을 가진 초강대국 미국마저 러시아에 대한 무력 개입을 기피하는 상황이 그것을 증명한다.[11]

NATO 가입 시도로 확충한 군사력도 실제 전쟁에서 기여한 바가 큰 것은 사실이나 NATO의 구성 국가 모두가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으로 보긴 어렵고 어디까지나 개별국가의 이해득실에 따른 결과에 불과하다는 시각으로 볼 수도 있다. 실제 노르트스트림과 관련한 자국 이익을 고려한 독일이 우크라이나에게 NATO 호환장비 판매를 거부한 바 있다. 또한 NATO 가입 시도가 하나의 명분으로 작용한 이상 이는 양날의 검과 같은 것이며 전쟁 위협이 고조되는 길을 택했으면서도 한편으론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억지력 구축에는 소극적이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소규모 방어 자산 외 전차, 전투기 등 고가치 공격자산에 대한 NATO 최신예 호환 장비 도입과 판매에 양측이 모두 소극적인 결과 우크라이나군의 고가치 장비 상당수가 여전히 소련제 위주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전투기 전력을 벌충하기 위해 소련제 장비를 가진 일부 국가의 지원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한계를 드러냈다.

간다효가 비판한 반러시아란 국가 간의 적대뿐만이 아닌 같은 우크라이나 국민인 자국 내 러시아계에 대한 억압[12] 그로부터 초래된 내부 분열과 러시아의 개입 명분 강화에 더 중점이 있다. #

젤렌스키에 대한 비판 일변도 지적에서 예시로 든 박정희의 경우 오랜 기간 동안 개개인의 정치 성향과 주요한 관점 등에 따라 첨예한 논란을 거친데 비해 젤렌스키의 경우 현시점에서 한국을 비롯한 친서방 진영 내에선 거의 찬사 일변도에 가까운 옹호 기조[13]를 띈다는 차이가 있으며 간다효는 이를 지적하며 잘 거론되지 않는 비판 요소를 문제 삼고자 하는 입장이다. 추후 젤렌스키가 박정희와 같이 일정 시간이 지나 여러 차례 호평과 비평의 균형이 이루어졌을 때에라야 이러한 지적이 알맞다 할 수 있을 것이다.[14]

섬네일에 대한 지적은 단순히 젤렌스키에 비우호적인 매체와 유사한 사진을 썼다는 것만으로 그 의도까지 같을 것이라 단정하는 것은 부당한 유추의 논리적 오류이다. 비판 측에서 예시로 든 메갈리아 손가락은 남성 혐오 표식으로 대중에게 이미지가 오랜 기간 명백히 굳어진 경우로서 이 경우 적절한 비교가 되려면 해당 섬네일에 첨부된 사진이 메갈리아의 손가락처럼 비하적 의도로 널리 쓰인다는 것을 입증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Google 렌즈에 해당 이미지를 넣고 돌렸을 때 30여건 이상의 매체[15]에서 이 사진을 차용했고 개중에는 젤렌스키의 연설에 감격한 통역사가 눈물을 흘린다든지 그의 연설이 정치적 반대자들에게까지 지지를 받는다는 등 비하적 혹은 비판적과도 거리가 먼 옹호성 성격의 보도에까지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썸네일을 단순히 비하 목적으로 사용하였다는 주장은 명백한 증거가 없는 이상 단정짓기 힘든 것이 맞다.

비판 문단에서 "러시아는 19세기부터 우크라이나의 카자키 자치권 박탈, 농노제 도입, 러시아화를 추진했다."고 서술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실제로는 18세기부터 시작했다. 또한 본격적인 러시아화는 니콜라이 1세와 알렉산드르 2세가 시작하지만, 러시아화(русификация, Russification)라고 부르는 러시아의 벨라루스·우크라이나 동화 정책의 시작은 18세기부터였다.

"주기적인 숙청 및 진압으로 카자크의 자치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18세기 자포리자 코자크의 반란을 진압함과 동시에 회유와 탄압을 번갈아 수행하였다."는 내용도 논란의 여지가 존재한다. 카자키들에 대한 러시아의 조치는 매우 복합적이었으며 인정하지 않았다는 자치권도 실상, 박탈보다는 통제와 제한에 가까웠다. 즉, 러시아 제국 정부는 지속적으로 카자키 공동체의 자치권과 특권을 계속 제한해 나갔지만, 자치권을 완전히 인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예카테리나 2세의 조치 이후에도 수많은 카자키 공동체들은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행사했으며 이 자치권은 제정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카자키들은 농민과 달리, 부역이나 가혹한 세금에 시달리지 않았고 이들이 부담한 '부역'은 군역이었다. 그리고 이 군역을 수행하는 것으로서 카자키들은 정부로부터 토지를 수여받았다.

제국 정부는 귀족과 부유층 카자키들을 우대하고 특권을 주어 비교적 평등했던 카자크의 계급 분화와 갈등을 유도, 상층 카자크들의 지지를 받아 하층 카자크들을 통제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혁명기에 하층 카자키들이 볼셰비키에 합류하고, 상층 카자키들이 백군에 합류한 것도 제정 러시아의 이러한 정책의 결과로 볼 수 있다.

"더불어 19세기에 세금 면제, 경작지 소유화 등 특권을 제공함으로써 영토를 합병하고 제국에 복속시켰다."는 내용도 옳지 않은 내용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러시아는 이미 16세기 초에 체르니고프를 위시한 우크라이나 동북부 지역을 리투아니아로부터 할양받았고, 그 때부터 카자키들에게 국경 수비 업무를 부담하는 대가로 급료와 자치권, 물자, 면세 혜택을 주었다. 또한 그들이 영유한 토지에 대한 소유권에 대한 인정은 당연히 이루어졌다. 그리고 러시아는 대홍수를 기점으로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을 장악해 "영토를 합병하고 많은 카자키들을 제국에 복속시켰으며" 18세기 후반에 대부분의 우크라이나 지역을 장악했다. 따라서 19세기에 특권을 주어 영토를 합병하고 제국에 복속시켰다는 내용은 완전한 거짓이다.

"러시아는 러시아 제국의 통치는 폴란드, 오스만 제국 및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보다 온건하고 합당하였다고 보는 반면, 우크라이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보다 훨씬 더 좋지 않은 시절로 표현되고 있다." 는 내용도 잘못되어 있다. 타타르의 멍에 이래로 우크라이나와 관련된 이해 당사국은 폴란드 - 러시아 - 투르크의 3개국으로서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는 1772년 이전까지는 우크라이나 땅을 제대로 밟아보지도 못했고 대부분의 우크라이나인들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를 받지 않았다.

1772년 이후를 기준으로 삼아도, 오스트리아가 지배한 영역은 우크라이나 서부의 갈리치아 - 로도메리아 지역에 국한되며 대부분의 우크라이나 지역은 러시아에 속했다. 이는 우크라이나 - 러시아 간의 역사적 관계를 잘못 서술한 내용이다.

반론에 대한 비판 문단에서 "카자크 관련 부분에서 학살과 강압 정책이 없었다고 단순히 반박하는 것은 무리수이다."라고 했지만, 위의 반론에는 학살과 강압이 없었다는 내용이 전혀 없다. 이는 논점 일탈이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는 갈리치아에서 부상한 게 아니라, 키예프를 중심으로 하는 동부와 갈리치아가 있는 서부에서 함께 태동했으며 굳이 따지자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역사는 키이우가 더 오래되었다. 따라서 갈리치아에서 부상했다고 하는 것은 역사 왜곡이며 키이우의 중요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다.


2.1.1. 반론에 대한 비판[편집]


일단 타라스 쿠지오는 간다효가 언급한 신뢰성 높은 우크라이나 전문가 이다. 우크라이나 전문가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러시아 제국보다 관대하였다고 말한 것을 근거로 인용한 것이고 반박을 위해서는 반대되는 저명한 다른 학자의 주장을 가져오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일단 그래도 간단히 반론을 작성하자면, 민족과 국가의 개념 부터 정의를 한다면, 민족과 국가는 완성품의 형태로 하늘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과정 속에서 구성원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발전하는 것이다. 민족적 정체성도 민족 자체와 마찬가지로 불변하지 않고 선험적으로 예정된 것이 아니고 모두 민족 건설(nation-building) 과정에서 형성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겪은 민족 건설은 다른 양상을 띄었는데 러시아는 서,동유럽 갈등, 개신교와 러시아 정교회의 정체성 갈등을 겪었고 러시아인가 서유럽인가의 이분법에 근간하여 있었다.

우크라이나의 민족 건설은 러시아와 다르게 이들 지방을 지배하던 민족들과 자신들의 차이점을 발견해야 했고, 크게 폴란드-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러시아, 양면에서 발생하였다. 이런 상태에서 폴란드 분할 이후 우크라이나-러시아가 더 지배적인 아젠다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1845-1847년 3월 까지 존재하였던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 형제단(Кирилло-Мефодиевское братство) 에 속한 지식인들은 러시아 제국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이 겪는 민족적, 사회적 억압에서 구출해야 한다고 보았고, 이를 위해서는 계몽 운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런 운동은 러시아 제국으로 부터 크게 체포 및 탄압을 받았고, 이들이 겪은 일들로 부터 우크라이나 민족운동의 신화성이 발족하기도 하였다.

우크라이나 본토에서 민족 운동이 어려움을 겪자 많은 학자들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갈라치아로 몰려들었고, 거기서 오랜 언어 탄압으로 구어 수준에 그치고 있던 우크라이나어가 시인들에 의해서 개발되었고,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고 카자크 문화를 공유하는 우크라이나 민족'의 개념이 탄생하였다.

대표적으로 판텔레이몬 쿨리시(Пантелеймон Куліш, Panteleimon Kulish) 등이 갈라치아로 이주하여 우크라이나어를 연구한 작가였다. 이런 사실은 갈라치아가 우크라이나 민족 부흥의 원류지라고 평가받기 충분하고 학계에서도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사실이다. 초기 반론글에서 갈라치아는 우크라이나 역사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데? 수준으로 작성된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지 증명하기 충분하다. 우크라이나 민족 건설의 주역이라고 평가받는 미하일로 흐루셰우스키조차 르비우로 옯긴 뒤 서술 활동을 시작하였다. 어떤 이유로 갈라치아를 내려치기 하는지 의심된다. 그리고 이런 평가를 내리고 있는 학자들이 많은데 전부 본인의 주장대로 역사 왜곡을 하는 것인가? 과연 진실로 타라스 쿠지오 등이 역사 왜곡을 하는 학자라면 이를 인용한 간다효 또한 비판받아야 하는 것이 된다.

또한 카자크는 수십개의 파가 나뉘어져 있었던 카자크에서 도대체 어떤 카자크를 말하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설명을 추가하는 것이 필요하고, 아에 우크라이나의 카자크 역사를 다르게 보는 수준의 서술이므로 더 정확한 레퍼런스와 주장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적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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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크 관련 부분에서 학살과 강압 정책이 없었다고 단순히 반박하는 것은 무리수이다. 카자크에 대한 러시아의 정책은 매우 복잡한 것은 사실이나, 우크라이나가 뿌리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카자크 헤트만국을 18세기에 철저히 탄압하고 자치권을 박탈한 것은 사실이다.

※ 자세한 아래 연표로 정리함. 자포리자 카자크 중점으로 해설한 관점임을 파악할 것.

파일:카자크 역사.png

오스트리아 관련 서술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는 특히 합스부르크 왕가의 '비교적 관대한 통치' 아래 오스트리아의 갈리치아에서 부상했기 때문에 [16] 실질적으로 우크라이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였다. 단순히 점령한 땅이 적다고 중요하지 않은게 아니다. 실제적으로 서우크라이나공화국이 잠시동안 건국된 곳이 갈라치아 지방이다. [17]

그리고 비판의 서술 부분의 레퍼런스는 다음과 같다.

History writing and school and university textbooks since the late 1980s have opened up deep divisions in how Russians and Ukrainians view their history. For example, Tsarist rule in Ukraine is viewed in completely negative terms by Ukrainians when contrasted with Ukrainian life in the more liberal Austrian-Hungarian Empire. Russians and Ukrainians have completely different approaches to the 1933 famine with the former viewing it as a Soviet-wide phenomenon, and the latter seeing the Holodomor (Murder Famine) as a genocide against (...) Ukrainians Russian stereotypes and myths of Ukraine and Ukrainians and why Novorossiya failed.

1980년대 후반부터 역사 집필과 학교 및 대학 교과서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인들이 그들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깊은 분열을 일으켰다. 예를 들어, 우크라이나의 차르주의 통치는 더 자유주의적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의 우크라이나 생활과 대조되어 우크라이나 사람들에 의해 완전히 부정적인 의미로 여겨진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1933년 기근에 대해 완전히 다른 접근 방식을 가지고 있는데, 전자는 그것을 소련 전체의 현상으로 보고 있고, 후자는 홀로도모르를 대량학살로 보고 있다. (...) 우크라이나와 우크라이나인에 대한 우크라이나인들의 고정관념과 신화, 그리고 왜 노보로시야가 실패했는지.

Taras Kuzio



2.1.2.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시도 무용론에 대한 반박[편집]


나토 가입시도에 단순한 실정이고 무능하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적어도 2014년 이전과 이후의 나토 가입 시도는 전혀 다른 맥락으로 보아야 한다.

한국국방안보포럼(KODEF) 에서 작성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분석에 맥락이 아주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신뢰성이 없는 문서가 아니며 간다효의 의견과는 전혀 다른 세부적인 고찰이 들어가 있다.

양측 간의 정전협정은 2014년 9월 15일에 조인되었지만 국지적인 전투는 이번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후 ‘우-러 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 국민의 뇌리 속에는 안보 불안감이 조성되었고, 우크라이나군은 다음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 전투준비태세를 강화했다. 즉, 불안정한 안보 환경이 우크라이나로 하여금 러시아와의 다음 전쟁을 준비하게 한 것이다.우크라이나는 돈바스 전쟁 이후 미국, 나토(NATO) 회원국, 舊 동구권 국가들과 지속적으로 군사협력을 추진했다. 舊 소련의 잔재인 노후화된 무기체계와 조직편성, 중앙집권적인 조직 문화로부터 벗어나 작지만 강한 군대(强小軍)로 거듭나기 위해서였다. (중략) 우크라이나군 스스로 전술(前述)한 내용을 발전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舊 소련의 잔재가 남아있었을 뿐만 아니라 임무형 지휘와 관련된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잘루즈니 장군을 비롯한 우크라이나군 지도부는 이 문제를 나토군과의 군사협력을 통해 해결해나갔다. 그 결과, 미 유럽사령부 예하의 7군 훈련사령부와 협조하여 2016년 우크라이나 야보리브(Yavoriv) 지역에 전투훈련센터를 설립하였다. 미 유럽사령부 예하의 7군 훈련사령부는 2016년 우크라이나 야보리브(Yavoriv) 지역에 전투훈련센터를 설립했다. 이곳은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국경에 위치하고 있다. 우크라이나군은 이곳에서 미군을 비롯한 나토군과 함께 정기적으로 연합훈련을 실시하여 정규전뿐만 아니라 비정규전 수행 능력도 배양했다.이곳에는 나토군으로 구성된 다국적훈련그룹(Joint Multinational Training Group-Ukraine, JMTG-U)이 편성되었다. JMTG-U에 참여한 나토군은 미군, 영국군, 캐나다군, 폴란드군, 리투아니아군 등이다. 이중 미군은 다영역전투(Multi-Domain Battle) 능력과 훈련 기능을 보유한 주 방위군(National Guard)의 여단 전투단이 전투훈련센터에 순환 배치된다. 이들은 전투훈련센터에 입소하는 600명 규모의 우크라이나군 대대에 단계적이고 체계적인 훈련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중략) 이와 같은 군사혁신의 결과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군을 상대로 비대칭적 우위를 갖추게 되었다. 이번 우-러 전쟁에서 우크라이나군이 강력한 러시아군을 상대로 선전(善戰)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여기서는 우크라이나군의 군사혁신 노력 중 이번 전쟁에서 성과를 발휘하고 있는 핵심적인 사항을 싸우는 방법, 무기체계 및 조직편성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자 한다.


우크라이나가 단순히 포퓰리즘으로 NATO 가입을 추진했고, 간다효 주장처럼 "우크라이나에 아무런 이득도 가져오지 못하는 무능한 실정" 이라는 것에 대치되는 또 다른 자료이다.


3. 우크라이나 언어법 설명 관련 비판[편집]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설명에 있어서 간다효가 가장 비판받는 부분이다. 우크라이나의 언어법 설명에 관해 근거가 상당히 부족하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실제적 설문조사 자료를 제시하지 않고 우크라이나의 민심에 대해 설명하였으며, 우크라이나 이중언어와 민족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영상에서는 2014년 언어법이라고 설명을 하긴 하였으나, "러시아어 금지"라는 키워드로 우크라이나 언어법의 역사에 대해 알고 있는 시청자는 2019년 국어법으로 잘못 이해할 여지가 크다.


3.1. 우크라이나 언어법 연표[편집]


파일:교육어 연표 V1.png

여기서 간다효가 주로 비판한 것은 간다효가 돈바스 전쟁의 원인 중 하나라고 설명한 2014년 언어법이다. 저건 격상된 러시아어 지위를 내리는 것(정확히는 10% 이상 러시아어 화자기준을 50%로 올린다고), 즉 2012년 언어법을 폐지한다고 하여 촉발된 논쟁이다. 일단 이게 러시아어를 금지했다고 보기는 매우 힘들다. 저 법안이 러시아어 금지법이면 우크라이나는 1989년부터 러시아어를 금지시킨 국가가 된다.

일단 2012년 언어법이 왜 논쟁이 되었냐면, 소수민족 언어법이라는 명분하에 10% 이상의 화자를 가지면 그 언어는 지역어 지위를 가진다는 법이다. 문제는 10%라는 수치가 러시아어를 제외하고는 단 하나도 없다. 그래서 러시아어는 대부분의 주에서 지역어 지위로 격상되게 된다. 그래서 노골적인 러시아 영향력 확대 정책으로 보였으므로, 반러주의자들은 10%가 아닌 50% 라는 수정안을 제시하였고 여기서 논쟁이 촉발된다. 애당초 러시아어 금지를 처음부터 주장했으면 50%라는 수정안은 제의가 되지 않았어야 한다. 러시아는 이 문제에 대해서 소수민족 탄압이라는 프로파간다를 실행하였다.

저 당시 폐기법에 대해서 논쟁이 오고 간 것은 맞으나, 러시아어 지위 격상 폐기법안이라고 말해야 훨씬 정확하다.

오히려 2019년 언어법이 러시아어 금지에 훨씬 가깝다. 애시당초 러시아어는 제2국어 지위에 올라간 적이 없다. 분리주의자들은 러시아어를 제2국어로 격상하자고 주장하였다. 제2국어 지위는 헌법까지 수정해야되는 매우 큰 사항이다. 이를 거부하는 것은 포퓰리즘이나 민족 탄압으로 단정지어 해석할 수가 없는 문제이다.

다만, 이를 가지고 포퓰리즘으로 "우크라이나어만 써야 된다!"고 말하는 것 또한 무책임한 발언이다. 도네츠크에서는 2008년에 오히려 우크라이나어 학교를 개설 금지하는 법안을 지역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애당초 한쪽의 일반적인 잘못과 감정이 아니다.


3.2. 문제시되는 영상 및 발언[편집]


중국이 그러는 건 욕하면서 우크라이나가 중국처럼 똑같이 하는 건 왜 내버려두냐는 거에요. (우크라이나가) 하나의 단일 민족 국가가 아닌데. 단일 민족 국가가 아닌 국가를 단일 민족 국가 처럼 하는 생각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에요.

(중략)

애초에 하나의 단일 민족 국가가 아닌데, (중략) KBS가 키예프를 키이우로 바꿔 부르자고 하고 있어요, KBS가 국민들을 얼마나 멍청하게 보는 거에요? 국민들에게 저기는 다민족 국가라는 걸 알려줄 생각도 안하고. (중략) 아무런 부질없는 거에요 혈안돼서, '키이우로만 불러라',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이야, 이게 우크라이나 정치꾼들이 우크라이나 국민들을 위해 열심히 해야 하는데 표 받을려고 되도 않는 표퓰리즘으로 '우리는 우크라이나인이니까 러시아어를 쓰지 말고 러시아인이 있든 말든 개차반 취급하고 우리 국민이더라도 개무시하고 우크라이나어만 써야 된다!' 라고 했던 거에요. 그거에 전 세계가 놀아나고 있어요.

4월 9일 러시아-우크라이나 11편 다시보기

4월 19일 키예프를 키이우로 불러야하는 것의 본질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어 금지로 주민 차별했다"고?

2022년 04월 18일자 오마이뉴스 기사



3.3. 우크라이나의 헌법에 보장된 러시아어의 지위[편집]


파일:우크라이나헌법10조.png
[18]

애당초 러시아어를 금지 하려면 개헌을 해야 하는데, 그런 주제로 논의가 된 역사조차 없다. 모든 언어법은 이 헌법에 적용이 되는지 검토를 받고 합헌 판결을 거친다.


3.4. 쟁점 1 : 우크라이나에 한국의 민족 개념 도입[편집]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어 사용자가 모두 본인들을 러시아 국가에 속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크라이나에서는 특히 정체성을 정의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한국에서 흔히 적용되는 민족이라는 개념, 즉 영상에서 간다효가 설명한 '다민족국가'의 개념으로 우크라이나를 이해해서는 안된다. 중국의 위구르족들과 한족들의 정체성이 다른 것처럼 자신이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이라고 한들 그것이 우크라이나인의 정체성이 없다고 오해하면 안된다.

러시아 국민의 81% 만이 자기를 러시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슬로바키아, 독일, 세르비아, 슬로베니아에서 볼 수 있는 소수 민족들이 많은 경우입니다. 우크라이나의 경우 국민의 92%가 스스로를 우크라이나인이라고 생각하며 6%만이 자신을 러시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18-29세의 경우 러시아인의 수는 절반으로 감소하여 3%에 불과합니다.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인의 비율은 1989년 소비에트 인구 조사에서 22%, 2001년 우크라이나 인구 조사에서 17%, 현재 사회학적 연구에서 6% 에서 감소했습니다 .(Razumkov Center, 2017a, 5) 우크라이나는 이탈리아(93%), 포르투갈 (96%), 폴란드(98%)에 이어 유럽에서 네 번째로 인종적으로 동질적인 국가입니다. (중략) 2014년 이후 우크라이나 정체성를 가진 러시아어 화자 비율이 더 높아졌습니다 (Razumkov Center, 2016a, b, 2017a, b). EEU 회원국에 대한 지지는 2014년 이전 수준의 3분의 1 미만으로 떨어졌습니다. 이는 NATO 회원국 지지율이 2014년 4분의 1 미만에서 69%로 거의 3배 가까이 증가한 것과 대조됩니다.(Razumkov Center, 2019) EU와 NATO 가입을 지지하는 이 상당한 증가는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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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ras Kuzio, Euromaidan revolution, Crimea and Russia–Ukraine war: why it is time for a review of Ukrainian–Russian studies, 2019-[19]


(논문에서 검토한 것은) 유로마이단 혁명, 크림반도 병합, 러시아어-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우크라이나 정체성의 극적인 변화였고, 두 번째 는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의 높은 수준의 애국심이었습니다. 서방 학문에서 우크라이나의 러시아어 화자를 '친러시아'으로 묘사하는 전통적인 묘사는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Kulyk 2019, pp. 156‒62).

Anna Olinyk & Taras Kuzio, The Euromaidan Revolution, Reforms and Decommunisation in Ukraine, 2019


우크라이나 언어 정책의 진실

우크라이나어-러시아어 이중언어 체계와 우크라이나의 국가 정체성에 미치는 영향.[참고]

하버드 대학 우크라이나 연구 : 우크라이나 언어법(2019)는 러시아어를 금지하는 것이 아닌 우크라이나어에 할당제에 가깝다.

[관련칼럼]


3.5. 쟁점 2: 우크라이나의 언어법은 단순한 정치적 포퓰리즘인가?[편집]


물론 포퓰리즘이 관련되어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언어법은 매우 진지하게 논의되었다, 한 국가의 정체성과 국가 발전 방향을 정하기 위해서 수년 동안 진지하게 논의되었다. 이 과정에서 동부 및 남부와 갈등을 빛은 것은 맞으니 그것 정치인들의 포퓰리즘으로 논의되었고 때문에 분리 운동이 촉발되었다고 보는 건 올바를 고찰이라 할 수 없다.

설사 간다효의 주장에 따라 젤렌스키 및 이전의 우크라이나 정부들이 러시아어를 차별하고 반러 정서만을 이용한다고 가정하더라도, 이 논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유럽의 상당수 국가들이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벨기에나 스위스, 스웨덴같은 나라들은 차치하더라도, 대표적으로 카탈루냐와 바스크가 있는 스페인, 본래 (영국이 없었다면) 모국어였어야 할 게일어를 이수 못하면 대학 졸업을 아예 못하는 아일랜드 같은 나라들은 오히려 우크라이나 이상으로 지역언어 혹은 마이너언어 사용에 대한 논란이 많은 나라들이다. 오히려 모국어인 언어를 제대로 사용조차 못하게 하는 나라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더구나 특정지역 언어와 정서를 이용하는 문제라면 앞에 언급된 스페인이 우크라이나보다 훨씬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 그리고 룩셈부르크어와 동계언어이자 독일 국경 근처 주민들이 실제 사용해오던 독일어를 문어체로만 쓰고 부분적으로 '사실상' 무시해버린 룩셈부르크도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트리어 근처 독일국경지대에 사는 룩셈부르크인들은 실제 이것 때문에 피해를 보고 있는 실정이다.

비록 룩셈부르크어가 독일어와 비슷한 형태의 언어일지언정, 독일어라는 언어를 쓰는 건 하나의 언어를 새롭게 문법과 단어 및 발음들을 다시 익혀야 하는 문제이다.[20] 그런데 프랑스나 벨기에 국경 쪽 룩셈부르크 주민들은 막상 이 문제에서 자유롭고.[21] 독일 국경 쪽 주민들은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왜냐하면 룩셈부르크의 공식 언어교육 과정에서 독일어 교육은 어디까지나 글로 쓰는 것과 부족한 룩셈부르크어 어휘를 '보충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독일 국경 근처 주민들이 원래 독일어 화자였던 것과는 관계없이 말이다. 1980년대까지는 프랑스어/독일어를 공용어 지위에 두다가[22] 1984년에 이 문제는 공식화되었고,[23] 독일어는 그때부터 공용어의 지위를 사실상 잃어버려서 해당지역 주민들은 (독일 방면으로의 교류을 위해서) 독일어를 배울 때 '룩셈부르크어' 공부를 위한 목적 이외의 독일어 자체를 공부할 경우 각자 스스로 알아서 공부해야 하는 상황이다. 물론 문어체로서의 독일어는 살아있어서 구어체로서의 룩셈부르크어도 독일어로 받아쓰는 경우가 종종 있다.[24]

하지만 이 정도는 우크라이나 내에서의 우크라이나어/러시아어 간의 관계를 생각하면 특별하다고 보기도 힘든 수준이다.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 간의 동질성과 독일어와 룩셈부르크어 간의 동질성을 생각해보면, 이는 생각보다 훨씬 민감한 이슈이다. 물론 경제 여건이나 교육 환경 등이 우크라이나와는 상당히 달라서 룩셈부르크인들은 78% 정도가 독일어를 말할 수 있지만, 프랑스어 화자비율은 98%로 모국어와 더 비슷한 독일어보다 언어계통 자체가 다른 프랑스어가 훨씬 더 중요하고 특히 수도권일수록 더 자주 쓰이는 상황이다. 양쪽 다 역사에 기반한 언어적 이슈인 만큼, 간다효의 주장 곧이곧대로 우크라이나의 '바보짓'이라고만 받아들이면, 룩셈부르크 뿐만이 아니라 유럽 내 선진국들 다수를 '바보짓'하는 나라로 몰아가는 오류를 범할 수 있는 문제이다. 백번 양보해서 저런 선진국들이 '바보짓'을 한다고 쳐도, 그 바보짓을 정말 아무런 이유없이 혹은 단순히 차별을 하기 위해서 한다는 것은 맞지 않는 추론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러시아어 정책에 대한 유권자 민심은 그닥 중요하지 않았다, 2016-2017년에 KMIS, Sociological Group Rating 및 GfK Ukraine에서 조사한 '"언어 문제"가 친러시아 유권자를 움직일 것인가?'라는 여론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어 법안은 응답자의 1%에게만 중요하였다. 2017년 5월 KMIS 조사에 따르면 동부권에서도 3%에 불과하였다. 국민의 64%는 우크라이나어를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동부와 남부의 응답자(각각 35% 및 38%)도 우크라이나어에 대한 국가 지원을 최우선 순위로 꼽았다.

러시아어를 금지하는 초강경 법안은 2018년 9월 르비우 주 의회에서 재정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영토 점령이 중단될 때까지 주 전역에서 러시아어 문화 제품(영화, 책, 노래 등)의 공공을 사용 금지한 법안이다. 이는 확실히 논란이 있는 법이 맞으나 어디까지나 르비우 주에 국한된다. 르비우 주는 우크라이나의 제일 서부에 위치해 있어 러시아 영향력이 제일 적은 주이다. 또한 지난 대선 당시 젤렌스키의 지지율이 낮은 유일한 주였다.

정리하면 우크라이나의 러시아어 정책은 마치 마치 중국 정부가 소수민족 탄압하듯이 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우크라이나는 꾸준히 러시아로부터 역사, 문화, 언어 등 정체성 공격을 당했으며, 친러 정권은 러시아어를 제2국어로 격상시키려고 했다. 더불어 실질적으로 우크라이나어가 러시아어보다 많이 쓰이지도 않은 상황에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로부터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벨라루스처럼 되지 않기 위해 우크라이나어를 '장려'하기 위해 할당제를 시행하는 것이다. 물론 이에 관해 찬반 논란이 있을 수는 있겠으나, 국가적 위기위식 속에서 정체정 확립을 위해 실시하는 정책이지, 이를 무조건 특정 언어에 대한 탄압 정책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당장 젤렌스키도 우크라이나어를 못해서 공부하였고 아직도 잘 못한다. 대통령조차 러시아어를 잘만 쓰고 다닌다.


3.6. 쟁점 3: 언어법으로 우크라이나 정부가 과연 민심을 잃었나?[편집]


파일:Ukraine 2019 election.png

위 사진은 2019 대선 결과를 정리한 지도이다. 우크라이나의 대통령 선거는 결선 투표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1차(왼쪽)투표 다음에 2차(오른쪽)투표를 실시한다. 1차 투표 결과를 보면 친러(연한 파란색)를 투표한 곳은 동부와 오데사 부근 뿐이다. 동부는 친러 정당을 투표함으로써 간다효의 고찰이 적용 될 수 있겠으나, 러시아어 사용자가 많은 남부는 전혀 그렇지 않다.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이 모두 언어법으로 탄압 받는다고 느끼지는 않는다는 사실의 근거이다. 여기서 말하는 언어법은 2019년 발효된 제일 강경하다고 볼 수 있는 언어법이다.

간다효는 이 항목에 대해서 "러시아 민족"의 비율에 대한 확실한 정보가 없는 똥글이라고 '2022년 05월 03일 - 젤렌스키는 왜 당선 되었을까?' 다시보기에서 폄하하였으나, 이 글은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이 아니라 "러시아어 화자"를 기준으로 설명된 글이다.

러시아어를 쓴다고 러시아 민족이 아니며, 우크라이나는 민족 비율과 언어 비율이 서로 비일치하는 대표적인 국가이다. 2001년 이후 학자들의 사회과학적 통계를 제외하면 전국적인 인구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간다효의 "러시아계 민족"에 관한 정보는 사실상 없다. 또한 유일한 전국적인 인구조사인 2001년 인구 조사에 의하면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 인구는 8,334,100명으로, 당시 우크라이나 전체 인구의 17.3%에 달했으며, 간다효도 이 수치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해당 통계에서 러시아계로 분류된 인구는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인구가 아니라, 인구조사 자가응답에서 자신을 러시아계라고 응답한 경우에 한했다.


3.7. 쟁점 4: 러시아어가 일반적으로 차별을 받아온 언어인가?[편집]


2017년의 조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인의 68%가 우크라이나어를 모국어로 생각하지만 집에서는 50%만 사용하고 직장에서는 39%만 사용하고 있다. 러시아어는 결코 우크라이나 내부의 소수민족 언어가 아니며, 오히려 우크라이나어가 적게 사용되고 있다. 그러니까 러시아계는 소수민족이 맞지만, 러시아어는 소수민족 언어가 아니라는 소리다.

우크라이나어는 오랜 러시아화 정책(우크라이나 정체성 탄압 정책) 을 거치면서 공적인 자리 및 직장에서 품격이 낮은 언어로 인식되어온 역사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크라이나어가 오히려 차별을 받아온 언어에 속한다. 실제로 이런 이유 때문에 2019년 국어법으로 우크라이나어 강제할당을 시행하기 전에는 러시아어 미디어가 더 많았다. 웃긴 것은 우크라이나어를 모국어로 생각하는 비율이 거의 70% 였다. 우크라이나 2019년 국어법이 비판을 받는 이유는 언뜻 보기에 강경한 탄압 정책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모어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어가 더 선호받는 현상이 심각하였다.

파일:러시아-우크라이나 교육 경향.png
[25]


3.8. 쟁점 5: 키이우라고 부르는게 단순히 감성팔이인가?[편집]


2022년 3월 1일 주한 우크라이나대사관 페이스북 계정에 한 게시글이 올라왔다. 대사관의 설명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는 우크라이나식 발음으로 ‘크이우’ 로 불러야 한다. 국립국어원은 우리나라 외래어표기 지침을 적용했을 때 ‘크이우’가 아닌 ‘키이우’로 하는 게 바르다고 밝혔다.

일단 정식 발음은 키예프에 더 가깝다. 하지만 이건 외래어표기법 차원의 문제이고 간다효가 주장한 무능한 국내언론의 감정팔이 문제가 아니다. 주한 우크라이나대사관이 우크라이나어 발음으로 불러달라고 요청하였고, 국립국어원이 이를 반영하였다.

N자가 뒤집어져 있는 И은 음성적으로 ‘이와 으 사이의 소리’가 납니다. 우크라이나어 사용자는 ‘이’와 ‘이와 으 사이의 소리’를 구분해서 쓰기 때문에 둘을 구분해서 적으려 합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와 으 사이의 소리’는 어떻게 발음해도 ‘이’로 인식되기 쉽습니다. 우크라이나어의 실제 발음을 인정하되 한국어의 음운 체계를 표기에 반영한 결과가 ‘키이우’입니다.

국립국어원 - 한겨레 인터뷰에서

거기에 외래어 표기법이라는 것 자체는 기본적으로 한국인에게 어떻게 들릴것인가를 상정하고 그것을 한글로 표기하는 방식을 정해놓은 것뿐이다. 결국 덕분에 별 차이나지도 않는 발음인데 한국에서는 '키이우' 라고 불린 것이다.[26]


3.9. 쟁점 6: 우크라이나 내의 러시아 언어 사용자 전반이 가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언어 인식[편집]


파일:우크라이나 인식 3.png

"우크라이나 당국이 우크라이나어 언어 개발에 기여해야한다고 생각합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크라이나어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2019 년에 선출 된 새로운 우크라이나 정부의 활동에 만족하거나 만족하지 않습니까?"라는 설문조사에 대한 답변 ※ 일부 브라우저에서는 안 보이므로 주의


애시당초 우크라이나의 러시아어 사용자들이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는 것을 부정적이고, 강압적으로 본고 있다고 보는것도 무리가 있다.

위 설문조사는 2019년 언어법에 대한 설문조사이다. 그 강도가 매우 강하여 러시아어 사용자들에게 비난을 받은 법으로, 간다효가 말한 러시아어 금지에 제일 가까운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어 사용자/이중언어 사용자들이 우크라이나어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고 또한 그것을 차별로 느낀다고 보는 것은 힘들다.



3.10. 쟁점 7: 우크라이나 민족성에 대한 역사왜곡[편집]


파일:GA1_1a.png

우크라이나는 애초에 독립의지도 없었고, 애초부터 독립된 민족도 아니었고 러시아의 영향력을 벗어나려고 하려는 의지도 없었고 우크라이나가 우크라이나어를 강요하려는 것은 정치인들이 기득권을 잡기 위해서라고 설명하고 우크라이나 시민들을 선동한단 식으로 이야기 한다. 화룡점정으로 미국까지 거론한다. 우크라이나 민족성은 마치 소수의 기득권 및 미국의 러시아 견제 때문에 만들어진 거라는 주장이다.[27] 이는 마치 일제가 조선에 행했던 주체성론과 유사하다.

일단 당장 구글 학술 검색에 대강 검색해도 이게 틀린 주장이라는 것을 금방 파악할 수 있다. 일단 키이우가 모스크바보다 역사가 길다.

발칸반도, 체코-슬로바키아 같은 나라들도 19세기 중후반까지만 해도 독립적인 나라가 아니었다. 폴란드인,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세르보크로아티아어를 사용하는 민족들[*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보슈냐크인, 몬테네그로인, 불가리아인, 루마니아인발칸 반도의 여러 민족들이 독립된 국가 즉 기존의 군주제에 일방적으로 희생당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들끼리 뭉쳐서 군주제에 대항하고 자유를 되찾자는 민족주의 열풍이 나폴레옹 이후로 동유럽까지 퍼지기 시작하였고 그 민족주의 열풍으로 생긴 국가들이다.[28] 결국 근본적으로 자신들은 저들과 다르다는 정체성을 가지지 못했으면 시작도 못하는 운동이였다.

민족주의가 민족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민족이라고 할 수 있는 정체성의 차이가 있었기에 민족주의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영상에서는 주류역사학계라고 하는데, 위키피디아에도 우크라이나 지방 역사는 수백페이지 분량으로 세분화되어있다. 주류학계가 저런 식으로 우크라이나를 설명하고 하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파일:1897우크라이나화자분포.png

1897년 러시아 제국의 인구 조사에서 파악된 우크라이나어 화자 분포도. 러시아화가 200년 넘게 진행되었지만 현재 우크라이나 국경의 윤곽이 대강 보일 정도로 언어가 잘 유지되었다.

애당초 같은 민족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정체성의 구분이 모호하였으면, 러시아가 러시아화 정책을 300년 넘게 수행할 필요도 없다. 키이우의 지식인들이 러시아 제국의 우크라이나 언어 금지 조치에 몇백년간 반항하였고, 강한 러시아어 강요 정책에도 우크라이나어는 계속 부활하였다. 러시아 학계에서는 이 당시 러시아화 정책을 언어적 유사성을 근거로 들어 표준어 권유 정도로 왜곡하는 경우가 많으나 당연하게도 정설이 아니며, 문화적으로도 유의미하게 차이가 존재하였다.

이 당시 근대 국가에서는 민족성 및 정체성을 가지게 해준 사례도 많지만, 소수민족 문화 소멸 및 탄압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따라서 러시아화 정책을 가지고 마냥 부도덕하다고 볼 수는 없다.[29] 그러나, 소련 시절을 거치면서 1980년대까지 진행된 러시아화는 민족국가로써 독립하지 못하게 하려는 정치공작으로 변모한다. 아직도 우크라이나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 러시아이다.


3.11. 쟁점 8: 중국의 소수민족 탄압 정책 비유[편집]


영상에서는 우크라이나 민족성을 축소하고, 러시아의 민족성 탄압 정책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30] 이렇게 논리가 전개되면 우크라이나를 중국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민족성을 유의미하게 평가하고, 러시아의 탄압 정책을 논리에 포함시킨다면 독립 이전까지는 우크라이나가 탄압받는 소수민족, 러시아가 중국이라고 비유할 수 있다.

중국의 소수민족 탄압은 한족이 주체가 되어 작동하였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언어 문제는 우크라이나어만을 사용하는 우크라이나인들만이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다. 서부와 중부에도 많은 러시아어 화자가 살았고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을 러시아인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존재하였다. 이들로 하여금 언어 정책에 대한 다른 의견을 표출한 근본적인 원인은 인구 비율 뿐 아니라 주체성의 차이였다. 자신을 우크라이나인이라 생각하는 정체성이 강한 이중어 사용자/러시아어 사용자는 기꺼이 우크라이나 언어 정책 부흥에 상당히 많은 비율로 참여하고 있다. 이에 대한 근거는 2가지가 있는데, 돈바스와 크림반도를 제외한 러시아어 민족성이 강하게 나타는 지역에서 우크라이나어를 기본 언어로 사용하는 학교가 크게 증가하였고 꾸준히 러시아인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감소하였다. (1989년 22.1% > 2001년 17.3% [31]), 이는 러시아계나 러시아어를 선호하는 사람들에게조차도 우크라이나 정체성으로 모국어를 점차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파일:1989Ukraine.png

이런 경향의 예외는 돈바스 지역과 크림 반도 뿐이며, 그 원인으로 예외적으로 러시아어 정체성이 높았고 우크라이나인에 대한 관용성이 부족한 지역이였다는 것에 근간한다. 우크라이나의 인종 그룹 간 사회적 거리를 수치로 표기한 (1~7로 표기, 숫자가 클 수록 불관용이 높아짐) 1996년의 연구에서 서부 우크라이나인들이 우크라이나인들에게 가지는 인종적 불관용 수치는 1.08로 매우 낮았으며, 러시아인에 대한 불관용성은 2.71로 더 높았다. 이는 동일한 정체성을 가지는 집단을 더 친근하게 느끼는 일반적인 경향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경향성은 우크라이나의 러시아인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크림과 돈바스 지방에서만 우크라이나보다 러시아인들에게서 더 동질감을 느꼈다.[32]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단순히 러시아계라고 소수 민족이 아니라 우크라이나인/러시아인 이라는 국가 정체성의 혼란에서 오는 반발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이번 사태를 굳이 중국에 비유하자면, 중국의 오랜 지배로부터 독립한 소수민족 국가에서, 소수민족의 정체성을 재확립해가는 과정 중에 발생한 주민과의 정체성 차이로 인해 발생한 갈등이라고 비유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러나 크림 반도과 돈바스도 이와 같은 흐름을 모두 거부한 것이라고 오해하면은 안된다, 제일 분리주의가 강했던 크림에서조차 40%를 넘기지 못하였다.


3.11.1. 간다효의 반응[편집]


러시아어 금지 관련 논란에 대해 <키예프를 키이우로 불러야 하는 것에 대한 본질> 영상의 댓글란을 통해 '법안이 시작된 연도와 법안이 만들어진 과정을 봤을 때 우크라이나어 장려 법안이라 볼 수 없다'며 여전히 자신의 주장을 고수하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우크라이나 언어법을 만든 것이, 우크라이나어를 장려하고자 하는 것일 뿐이라고 하는 분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어쩌다가 저 법이 '장려법안'으로 평가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 법안이 처음 시작된 년도, 그리고 법안이 만들어진 과정을 보면 절대로 '장려법안'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크라이나라는 다민족, 특히나 이중언어 국가입니다. 오랫동안 그래왔습니다. 중국은 다민족, 다언어, 다문화국가입니다. 한국은 하나의 민족성을 갖고 있는 국가이지만, 세상에 정말 많은 국가는 다민족, 다언어 국가입니다. 우린 우리식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려는 것을 바꿔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간다효 유튜브 <키예프를 키이우로 불러야 하는 것에 대한 본질> 영상 댓글란



3.11.1.1. 이에 대한 비판[편집]

간다효가 비판한 법은 2014년 언어법이고 실질적인 우크라이나어 장려법안은 2019년 언어법으로 평가가 되고 있다. 두 법은 근본적으로 다른 법이다.

1. 우크라이나의 상황은 모어 분포에 상관 없이 러시아어가 우크라이나어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는 문제.
2. 2012년 러시아어 격상법이 가지는 근본적인 문제점.
3.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역사 및 문화 전쟁.
4. 러시아의 러시아어로 작성된 프로파간다 문제.
--> (러시아 TV 프로그램 등 러시아 미디어에 노출됨에 따른 국가 안보 문제)
5. 우크라이나 국론 분열 문제.
6. 2014년 언어법은 임시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헤서 통과하지 않은 법이라는 것.
7. 우크라이나 극우 세력은 유로마이단 임시 정부 당시 일시적으로 세를 잡은 것은 맞으나 포로셴코 대통령이 취임한 후 통제되기 시작했다는 것.
8. 친러 정권이 가지는 부정 부패.
9. 러시아 사회를 다원적인 사회로 포장하는 것. (예를 들어 크림 병합 후 소수민족 크림 타타르족 탄압 문제, 동우랄 지역에 대한 차별 문제.)

우리식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려는 것을 바꿔야 한다면서 본인의 우크라이나 언어법에 관한 고찰 부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간다효의 주장에 대해 대치되는 하버드 대학교 우크라이나 연구팀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하버드 대학 우크라이나 연구팀 : "널리 퍼진(그리고 종종 선전적인) 소문과는 달리, 새로운 언어법(2019)은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어 또는 다른 언어를 금지하지 않습니다. 이 법은 우크라이나어를 진정한 국가 언어, 즉 전 세계의 다른 많은 국가에서와 같이 다양한 민족적 또는 언어적 배경을 가진 화자들을 모으는 언어로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될 뿐입니다."

하버드 대학 우크라이나 연구팀 : 언어법(2014) "우크라이나어가 유일한 "국가 언어"로 선언된 1989년과 러시아어가 "지역"언어로 확립된 2012년 사이에 우크라이나의 언어 문제는 주기적으로 정치적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중략) 국가 기관을 포함하여 서부 우크라이나 이외의 모든 도시에서 러시아어가 우크라이나어보다 용인된 우위를 점한 환경에서 (중략) 러시아어 사용자가 우크라이나어를 전혀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신호를 보내면서 2012년 법은 1989년 우크라이나 언어법 또는 이와 관련하여 전 세계 대부분의 언어법이 고안된 핵심 원칙을 뒤집었습니다. (중략) 유로마이단 혁명 이후 2014년 2월에 2012년 언어법이 신속하게 폐지되었습니다. (중략) 2012년 법안의 핵심 원칙이 EU 기관에서 비판을 받았고, 단순히 러시아어 우세를 용인해왔던 2012년 이전의 합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했음에도 불구하고 크림반도 병합과 돈바스에 대한 개입이 러시아어 화자를 보호하는 러시아의 선전 수단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이후 간다효가 공지영상을 올리면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관련입장을 추가하였다. 여전히 자신의 주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12. 쟁점 9: 지나치게 러시아쪽으로 편향된 해석[편집]


우크라이나가 설사 러시아어 사용을 완전히 금지했다고 가정을 한다 하더라도, 이 사태의 문제점이 전부 마치 우크라이나 정치인들에게 있다고 설명하고, 세계가 거기에 놀아났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언행이라 비판받을 수 있다.[33] 애당초 우크라이나의 반러 감정이 생긴 이유에 대한 고찰이 단 하나도 없다. 왜 우크라이나인들에 언어에 대해 민감하게 생각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지, 우크라이나인들에 우크라이나어에 대해 가지는 의미를 고찰하지 않는다. 또한 이 문제를 중국의 소수민족 탄압에 비유한 것은 상당한 비판의 여지가 있는 비유이다.

이는 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어/우크라이나 이중언어 국가가 되었는지에 대한 고찰이 없어서 생기는 문제이다. 시청자들도 당연히 이해할 수 없고 무비판적으로 의견을 수용하게 된다. 우크라이나/러시아어 이중 언어 사용은 오랜 기간에 걸친 러시아화와 민족 정체성 탄압 및 대기근으로 인한 동부의 우크라인 인구 감소, 소수민족 추방 정책 및 러시아인 이주 정책으로 발생한 문제이다. 우크라이나 동부는 본래 러시아인이 살던 지역도 아니였다.

심지어 영상에서는 간다효는 우크라이나 정치인들의 도덕성만을 비판한다. 물론 우크라이나 정치인들의 부패를 생각하면 당연히 비판을 받을만 하지만, 그렇다면 러시아의 잘못과 러시아 정치인들의 도덕성은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34] 다른 관점으로 보면 이 사태의 원인은 거슬러 올라가면 러시아에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애당초 아 다르고 어 다른 수준이다.

아무리 국제정치에서 도덕성과 민족주의를 배제한다고 하더라도 우크라이나의 언어 정책 설명에 있어서 위키백과 수준으로도 설명 안하고 넘어간 것은 과하다는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참고1 : 우크라이나어참고2 : 우크라이나의 러시아화

이런 문제점의 근본은 간다효는 역사관 및 관념이 민족주의/도덕성을 배제하고 정치현실주의에만 매몰되어 콘텐츠를 제작하기 때문인데, 민족주의/도덕성을 완전히 배제해버리고 설명해버리면 그것 또한 올바른 역사관이라고 볼 수가 없다는 비판을 받을 여지가 충분하다.[35]

4. 유튜브 댓글 삭제 관련[편집]


간다효 다시보기 채널에 올린 2022년 04월 03일 - 2부 생방송 다시보기 영상의 58분 ~60분에서 비판 댓글 삭제 논란에 대해 "오해일 뿐이며 가짜 뉴스를 삭제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후 공지영상을 올리면서 계속 댓글 검열을 실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5. 지나친 현실주의적 관점에 대한 비판[편집]


간다효가 우크라이나 설명 관련해서 비판을 받는 이유 중 하나가 간다효가 지나치게 현실주의적 관점을 추구하여 생긴 폐해라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사실 현실주의라는 단어를 여기에 적용하는 것도 옳지 않다. 역사를 맥락과 흐름에 따라 유기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그럼 비현실주의적 사관인가? 전혀 그렇지 않듯이 그냥 파편주의 역사관이라 부르는 것이 옳다.

"고구려는 고구려의 역사고, 신라는 신라의 역사야. '얘들아 나중에 몇천 년 뒤에 대한민국 생기면은 대한민국의 역사라고 해줘~' 이랬겠어요? 신라는 신라의 역사야."

위의 경우에는 역사를 제3자의 시점으로 해석하는 방법으로 과거의 한 국가를 특정 국가의 역사로 해석하지 말아야 하는 대신 특정 지역의 역사로는 바라볼 수 있다는 관점이다.[36] 역사를 제3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현실주의적인 해석 방법이 아닌 정통성과 계승성을 강조한 민족주의적인 해석 방법으로 바라보게 될 경우, 오히려 자신들에게 불리하다고 판단되는 역사적 사실들이 과장 혹은 왜곡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분명히 이는 일리있는 말이다. 이를테면 고대의 주나라, 한나라, 심지어 원나라 등과 현대 중국을 동일시하여 수많은 문제가 생기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중국의 패권주의와 문화적 우월주의의 근간에 그러한 동일시가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해석하게 될 경우, 일부에서는 한 국가의 정통성과 계승에 관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말한다. 역사에는 연속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결국 고구려와 신라와 같은 독자적인 고대국가의 존립이 고려-조선으로 이어져 마침내 현대 독립국가인 대한민국이 나올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특히 언어의 형성을 비롯하여 건축, 생활, 도덕관념, 종교와 같은 문화적 유기성은 정부의 변화보다 더 오래가기 때문에 마냥 그 나라는 그 나라의 역사로 봐야 한다라는 의견은 옳다고 보기 힘들다는 주장이다.[37] 특히 민족주의, 국가주의, 보수주의 성향이 강한 경우 이렇게 정통성이나 법통이라는 개념을 중요시하는 편이다.

일단 민족주의적 테제가 옳으니 그르니 하는 것에 앞서 약육강식의 힘의 논리, 사회진화론으로 흐를 수 있는 위험성은 확실한 문제이다.[38] 게다가 민족주의조차도 현실주의의 반대편이 아니며, 대부분의 경우 극도의 현실주의적 성향을 띄면서 사회진화론과 결합하기도 하는 이데올로기이기에 이 둘을 완전히 분리한채, 현실주의적 시점에서 민족주의, 국가주의를 마냥 비판할 수도 있는 것도 아니다.[39]

현실주의와 힘의 논리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현실주의는 학문으로 인문학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또한 간다효의 영상과 주장은 현실주의 관점을 채용하는데, 현실주의는 분명히 맹점이 있다. 현실주의는 현실을 완전히 담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어떠한 이론도 현실을 제대로 담지 못한다. 그러나 현실주의는 특히 더 위험할 수 있다. 현실주의는 결론적으로 힘의 논리를 많이 따라가기에 인문학적 고찰이 부족하거나 틀릴 경우 오히려 그 현실을 왜곡할 가능성이 크다. 힘의 논리,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논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현실주의는 특성상 도덕적 관점을 배제하는 경향이 있다. 정확하게는 도덕적 관점을 배제하고 객관적인 시점에서 현상황을 관망하여 미래를 해석하는 것인데, 이게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사건에 끼워맞추기 식으로 작용하면 객관적인 해석이 나올 수 없다. 분명 간다효의 논지는 직관적이고, 논리가 간결하며 독자들로 하여금 주장하는 이의 의견을 이해하기 쉽게 만든다. 문제는 소재에 대해 스스로 판단이 서지 않는 독자들이[40] 단순히 '간다효의 주장을 이해한 것을 두고 간다효를 통해 깨달았다 착각' 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현실주의적 해석은 도덕적 관점을 감정팔이라 부정적으로 보게 만들어 오히려 인문학적 고찰 능력을 상실하게 만든다.[41] 자칫하면 국가간의 관계에서 약한 것은 죄악이라는 논리로 귀결되기 쉽다.

분명 "국제정치는 야생이다"라는 간다효의 말처럼 현대에도 국가간의 약육강식이 존재 한다. 그러나 이것의 부당한 침략행위나 강대국에 의한 압제를 정당화하는 의미로 쓰이지만은 않는다. 반대로 "약육강식의 세상이기에 약소국들은 국력을 키워 스스로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라는 의미로도 곧잘 쓰인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초강대국인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벌였을 때 전세계적으로 규탄이 일어났으며, 이라크 전쟁에 한국군을 파병하려는 정부에 대해 강한 비판이 생겨났던 것이다. 물론 이라크 전쟁 당시에도 "세상은 도덕 교과서같은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현실주의의 관점을 이유로 이라크 침공에 대한 파병을 지지하기도 했고,[42] 또 중국의 타국에 대한 내정간섭 시도에 대해서도 정부가 일부러 침묵을 유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주의적 행동이 이라크 전쟁이 마냥 정의롭다고 포장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 아니고, 마찬가지로 중국의 전랑(戰狼)외교를 납득하고 한국 내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되지는 않는다. 현실주의라는 건 '지피지기면 백전불패'라는 말처럼 국제사회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한 자기 객관화에 가까운 정치외교적 개념일 뿐이지 승자를 위한 축사나 패자에 대한 변명으로 쓰이는 개념이 아니다.

만약 간다효의 현실주의, 정확하게는 파편주의 역사관과 약육강식 논리가 결합된 간다효식 현실주의의 논리로 따지면 일제강점기 시절의 조선이 겪은 고초에 대해서 우리은 아무 말도 해선 안 된다. 이유야 당연히 일제는 힘이 강한 나라였고 조선은 힘이 약한 나라였으며 힘이 없는 나라가 힘이 강한 나라에게 침략당하고 짓밟히는건 너무 당연하기 때문. 거기다가 유기적 계승성을 부정하는 역사관에 따라 조선(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은 분명히 다른 나라로 봐야한다. 설령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다한들 당대에 스스로를 임시정부 하의 대한민국 국민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었을지 미지수이다. 심지어 이제는 일제강점기를 겪지 않은 세대에 이르렀기에 일제의 피해를 직접적으로 입었다고 볼 수 있는 개인도 몇 없다. 그러니 지금의 대한민국이 정부차원에서 일본 정부에게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거나 과거사를 가지고 비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논리가 세워진다.

그렇다고 간다효식 현술주의의 논리에 따라 저대로 행한다고 한들 우리에게 어떤 손익이 있느냐를 다시 따져보면 그의 사상이 어떤 한계에 다다르는지 가늠할 수 있다. 위에서도 언급되어있지만 정말 현실주의적 관점으로 특정 역사관과 국가관을 비판할 수 없으며 오히려 서로 결합되기도 혹은 분리되기도 하는 등 오히려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관철을 위해 다양한 관점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그 외에도 홀로코스트, 홀로도모르, 제국주의, 식민주의, 파시즘, 나치즘 등 역사의 수많은 악행들도 그저 현실이라는 이유 하나로 퉁칠 수 있다. 정녕 이것이 옳은 관점인지는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일이며 국가 대 국가의 국제관계가 사람 대 사람의 인간관계와는 별개이지만 결국 국가도 사람이 만든다는 점에서 둘은 결코 완전히 다른 존재가 아니다. 때론 내 이익을 위해 타국의 이익을 침해, 묵인하기도 하는 일이 일어나며 힘으로서 이러한 일들을 하거나 그런 일들을 침묵하기도 하는게 국제관계지만 아시리아의 사례에서 보듯 그것이 너무 지나치게 되면 오히려 나라의 멸망으로 이끈다는 점에서 국제관계가 인간관계보다는 도덕적 관점이 약하다고 쳐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은 분명히 있다.[43]

6. 간청단이라면 무조건 봐야 하는 공지영상에 관한 반론[편집]



6.1. 과연 나토는 동진 금지를 약속하였는가?[편집]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토의 동진 금지에 대해서 미국의 고위급 인사가 언급은 한 적이 있으나, 단 한번도 명문화된 문서로 나토의 동진 금지를 약속한 적은 없다.참고 기사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원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90년 서방과 소련은 독일 통일에 합의했지만, 여전히 동독 지역엔 38만 명의 소련군이 있었고 소련의 광범위한 법적 이해관계가 존재했다. 서방으로선, 독일 통일 이후에도 나토가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소련을 안심시켜야 했다. 그해 1월31일 한스-디트리히 겐셔 당시 독일 외무장관은 “동부 유럽의 변화와 독일 통일 과정은 결코 소련의 안보 이익을 해치는 방향으로 이뤄지지 않을 것이며, 나토는 동쪽 소련 국경 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가능성을 배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2월 9일 제임스 베이커 미 국무장관은 모스크바에서 고르바초프에게 “우리가 나토 일원인 독일에 미군을 배치하더라도, 나토 관할권(jurisdiction)은 동쪽으로 1인치도 확장하지 않겠다”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이나 나는 일방적인 이익을 취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고르바초프는 “나토 확대는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은 언급할 필요도 없다”고 했고, 베이커는 “우리도 동의한다”고 화답했다. 고르바초프는 베이커로부터 이 ‘1인치 약속’을 세 번이나 들었다고 했다.

2017년 12월 이 대화록을 공개한 미 조지워싱턴대의 미 국가기록 분석에 따르면, 당시 미국‧영국‧독일프랑스 지도자들은 소련의 안보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비슷한 발언들을 쏟아냈다. 그때는 소련 해체(1991년 12월) 전이었지만, 서방 지도자들은 이미 중‧동부 유럽국가들의 나토 가입을 고려했고, 이를 배제하기로 했다. 부시 대통령은 1989년 12월 몰타에서 고르바초프를 만나 “(무너진)베를린 장벽 위에서 기뻐 날뛰지 않았다”며 소련의 이익을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소련이 무너진 뒤에도, 당시 영국 총리였던 존 메이저는 “우리는 나토의 확장을 거론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베이커 국무장관의 “1인치 발언”은 미 백악관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발언은 통독(統獨) 이후에도 나토의 관할권이 ‘동독 지역’에는 미치지 않는다고 해석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베이커는 5월 모스크바에서 “소련군이 동독에서 철수하는 동안(1994년), 나토군은 그 지역으로 진출하지 않겠다”고 슬쩍 말을 바꿨다. 고르바초프는 그럼에도 이를 받아들였다. 당시 체결하려는 문서는 어쨌든 통일 독일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베이커는 2014년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 뒤 가진 인터뷰에서 “1인치 발언은 잠시 운을 뗀 정도였는데, 푸틴이 협상 과정에서 나온 얘기를 근거로 삼는 게 말이 되느냐”고 반박했다. 당시 국가안보위원회(NSC)에서 소련‧동부유럽 담당 국장이었던 콘돌리사 라이스 전 국무장관은 뉴욕타임스에 “그때는 소련의 붕괴, 바르샤바조약기구 해체 이런 것이 모두 불분명한 시점이라, 나토 확장은 1990~1991년 의제에는 있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공개된 당시의 미 외교‧안보 기록과는 맞지 않는다.

이 합의는 오로지 통일 독일의 지위에 관한 것이므로, 냉전 시절 소련 영향권에 있었던 국가들에 대한 언급은 당연히 없었고, “나토군의 동독 지역 활동을 허용한다”고만 명시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를 ‘독일의 동쪽’으로는 나토가 동진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해석했다. 당시 미 CIA 국장이었던 로버트 게이츠도 회고록에 “서방 지도자들이 계속 ‘동진 안 한다’고 발언했기 때문에, 고르바초프와 소련 수뇌부는 ‘나토 확장은 없을 것이라고 믿게끔’ 되었다”고 썼다.

그러나 1993년이 되면서 폴란드‧헝가리‧체코의 나토 가입이 논의 대상이 됐다. 미국과 나토, 러시아는 이 문제를 다루는 1997년 ‘나토-러시아 관계정립조례’를 체결했다.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은 1990년 통독 합의는 “나토 존(zone)을 동쪽으로 확장하는 선택권은 아예 배제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양 진영간에 오간 대화 문서록을 보면, 서방 지도자들은 고르바초프에게 ”바르샤바조약기구를 떠나는 나라 중 어느 나라도 나토에 가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옐친은 따라서 “나토 확장에 대해 러시아가 거부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나토 확장을 멈출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옐친은 국내 정적(政敵)들을 의식해, 마치 러시아가 ‘거부권’을 가진 것처럼 선전했다. 이는 이후 푸틴과 러시아 대중이 “계속 미국에 속고 있다”고 말하는 근거가 됐다. 푸틴으로서도 “러시아가 냉전 때의 위엄을 잃은 것은 소련 붕괴가 아니라, 서방의 거듭된 배신 탓”이라고 주장하는 게 국내에서 더 설득력이 있었다.


6.2. 러시아의 부다페스트 각서 위반[편집]


1994년 러시아‧미국‧영국은 ‘부다페스트 각서’를 체결했다. 신생 독립국 우크라이나가 자국에 배치된 1,900개의 러시아 핵탄두를 러시아로 보내는 대신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독립‧주권‧국경을 존중하고, 군사력 사용이나 위협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약속은 2014년 우크라이나의 친러정권이 유로마이단으로 무너지자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무력으로 합병함으로서 처참하게 깨지게 되었다. 약속은 이미 휴짓조각이 되었으며 우크라이나는 실존적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실존적 위기에서 나토가입은 단순히 유럽으로서의 정체성 문제가 아닌 실질적인 안전 보장의 문제가 되었고 그당시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선택한 길이었다. 2019년 우크라이나는 나토와 유럽연합 가입을 헌법에 명문화하는 법안에 우크라이나 의회는 이날 우크라이나의 EU와 나토 가입을 명시한 헌법 개정안을 찬성 334표 반대 35표로 통과시켰다.


6.3. 러시아의 대전략적 실패[편집]


러시아는 러시아의 나토 동진을 막는다는 명분과는 반대로 전작 그동안의 중립국을 자처하였던 스웨덴과 핀란드가 나토 가입을 신청함으로서 그나마 확보하였던 회색지대마저 상실하는 결과가 발생하고 있다.[44] 굳이 이 전쟁에서 교훈을 얻자면 오히려 대전략적 관점에서 러시아의 처절할 정도의 실패를 언급하는 게 더 나을 것이며, 힘의 논리라는 관점에서도 결국 러시아는 본인들의 역량을 오판하고, 서방 국가들의 지원이라는 변수를 고려하지 못해 함대의 기함을 어이없이 날려버리고, 기껏 몇개월 동안 확보한 점령지들을 며칠 만에 탈환당하며 자기들의 일부이자 자기들보다 약하다고 무시하던, 겨우 국경선 근처의 '약소국' 하나를 병탄하는 데에 실패했다. 그렇게 우크라이나가 버티는동안 그동안 러시아의 눈치를 보던 스웨덴과 핀란드가 중립국의 탈을 벗어 던지고 나토에 가입하기로 결정하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45]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수준의 국가라면 사실 서방과 미국이 전부 지켜보고 있는 와중에 구태여 미국의 패권에 정면으로 도전하지도 않았을 것이기에, 애초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쟁이 나기 전까지 전쟁이 진짜로 일어날 거라 믿지 않았다.

하다못해 우크라이나는 전후에 서방의 경제지원이라도 받을 것이고, 국제적으로 긍정적인 여론이라도 얻는다지만 러시아는 이 전쟁으로 무엇이 남을 것인가? 러시아에게 남을 것은 본인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진정한 나토 동진의 가능성해군이 없는 나라에게 기함이 격침당하고 패퇴당하는 이미 소련과는 비할 바 없이 약해진 러시아의 이미지뿐이다. 거기다가 전쟁중에 벌인 러시아군의 행적은 21세기판 나치라 러시아라는 국가이미지 자체도 크게 실추되었다. 그것도 탈나치, 나치 정권 척결 같은 소리를 하는 나라가 말이다.


6.4. 우크라이나에 대한 서방의 실질적 지원[편집]


현시점에서 우크라이나를 위한 렌드리스법안이 상하원의 압도적 지지속에서 통과되어 5월10일 바이든 대통령의 서명으로 발효되었으며 이미 우크라이나가 사용법을 알고 있는 재블린은 이미 러시아 탱크 모두에게 4발씩을 쏘고도 남을 정도로 지원하였으며 전차와 전투기등은 서방에 동구권측 장비가 부족하여 즉각 지원이 힘들분 당장 훈련이 필요없는 동구권 무기들은 최대한도로 지원하고 있는 중이다.

또한 우크라이나 군의 현재 훈련 수준은 나토의 지원이 있었기에 크게 향상될 수 있었으며 이는 러시아의 공수부대를 효과적으로 조기에 차단한 것과 작게는 군사 보급 계획부터 서구화된 각종 편제들을 통해 알 수 있다.

결과론적으로 결국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군에게 이미 전술적 규모가 아닌 전략적인 패배를 여럿 안겨주었고 이미 러시아는 주공의 위치를 여럿 바꾸며 초기의 목표와 달리 수도를 점령하는데에 실패하고 동부와 남부에 집중하고 있다. 현재 우크라이나의 가을 공세로 인해 동부전선은 현재 붕괴되었으며 남부의 헤르손 전역은 우크라이나가 교량을 파괴함에 따라 보급이 차단되어 고립되어있다.


7. 2022년 05월 03일 다시보기: '젤렌스키는 왜 당선 되었을까?'에 관한 비판[편집]



7.1. 페트로 포로셴코 설명에 관한 가짜 뉴스[편집]


파일:가짜뉴스 수정.png

우크라이나 정부를 비판하는 주장을 펼쳐나가면서 연설을 일부만 인용해 문맥을 완전히 왜곡하였다. 관련 정정이나 수정이 필요한 상황이다.

저 말은 10월 23일 돈바스 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대한 연설에서 나온 말로 실제로 우크라이나 포로셴코 전 대통령이 돈바스를 무력으로, 경제적으로 압박한다는 메세지가 아니다. 실제적인 돈바스 전쟁에서 우크라이나 측의 잘못은 둘째로 치더라도[46] 저 연설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그리고 "돈바스 전쟁 직전 연설" 이라는 글귀도 가짜 뉴스이다. 실제로 돈바스 전쟁은 포로셴코가 당선되기 전 부터 발생하였고 (전쟁 발발은 4월, 당선은 6월) , 저 연설은 10월 23일 돈바스 전쟁이 한창일 때이다.

또한 포로셴코는 중도주의이고 2014년 초기 유로마이단 정국에서 정권을 잠시 잡았던 민족주의자나 극우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러시아어가 모어인 전통적인 친러지역 오데사 출신이다.

“This war can’t be won with weapons. Every bullet produces two enemies. And every peaceful day Ukrainian state demonstrates on the liberated territories that citizens, who sang praises to false separatist regime a month ago, receive heat, electricity, at last they can send their children to school, they started to receive pensions, survivorship and disablement payments, they have jobs, they have salaries.

“And from the other side – I have spoken by phone with a woman, the associate professor of Taras Shevchenko Luhansk University. I have asked her: “How do you spend your day?” and she has answered me: “I get up at 5 am in order to reserve a > place in a queue and to get two pots of water. As we have no water. I return home at 10 am and hurry to a queue for bread. One and a half loaves of bread. Till 12 o’clock there would be no bread.

I return from there and stay at home from that moment because armed men start to appear in streets from 2 pm and they could shoot everyone.“My dear people of Odesa! This is what we avoided thanks to your wisdom, your solidarity. And thanks to – now we all are confident about this – your pro-Ukrainian position. I was full of joy, when after visiting Odesa the delegation of the OSCE made a conclusion that Odesa is a city of harmony, the city of peace. There can’t be a better compliment.

I was very happy about it. Thank you for your wisdom, people of Odesa!“And we win together by means of peace! Because we have jobs, and they have not. We have pensions, and they have not.

We have support of children and pensioners, they have not. Our children would go to kindergartens and schools, theirs would be sitting in cellars. Because they do not know anything how to do! That’s how we are going to win this war.

Because wars are won in minds, and not on the combat fields! They do not know this, but I know. And I have your support, I need it very much in order we win this war without perished Ukrainians, without perished inhabitants of Odesa.”

“이 전쟁은 무기로 이길 수 없습니다. 모든 총알은 두 명의 적을 생성합니다. 그리고 평화로운 날마다 우크라이나 국가는 해방된 영토에서 한달 전 거짓 분리주의 정권을 찬양했던 시민들이 난방, 전기를 받고 마침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고, 연금, 생존자 및 장애 수당을 받기 시작했음을 보여줍니다. , 직업이 있고 급여가 있습니다.

“그리고 반대편에서 저는 타라스 셰우첸코 루한스크 대학교의 부교수인 여성과 전화 통화를 했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하루를 어떻게 보내세요?”라고 물었다. 그녀는 나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줄을 서야 할 자리를 예약하고 물 두 그릇을 얻기 위해 오전 5시에 일어납니다. 우리에게 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전 10시에 집에 돌아와 빵을 사러 서둘러 줄을 섭니다. 빵 한 덩어리. 12시까지는 빵이 없을 것입니다. 오후 2시부터 무장한 남자들이 거리에 나타나기 시작하고 모두를 쏠 수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돌아와서 그 순간부터 집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오데사 국민 여러분! 이것은 당신의 지혜와 연대 덕분에 우리가 피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 모두는 이에 대해 확신합니다. 당신들이 우크라이나를 지지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오데사를 방문한 후 OSCE 대표단이 오데사는 화합의 도시, 평화의 도시라는 결론을 내렸을 때 나는 기뻤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칭찬은 없습니다. 나는 그것에 대해 매우 기뻤습니다. 지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데사 국민 여러분들!

“그리고 우리는 평화를 통해 함께 이깁니다! 우리에게는 직업이 있지만 그들은 직업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연금이 있지만 그들은 없습니다. 우리는 어린이와 연금 수급자에 대한 지원이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유치원과 학교에 가지만 그들은 지하실에 앉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런 정책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입니다. 전쟁은 전쟁터가 아니라 마음으로 승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모르지만 나는 압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지원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크라이나인과 오데사의 주민들 없이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매우 필요합니다.”

- 문제의 연설 전문-

실제 문맥은 평화적으로 전쟁에서 이기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분리주의자들은 나라를 잘 운영할 줄도 모르는 폭도들이기 때문에 우크라이나가 더 좋은 정책을 하면 전쟁에서 평화적으로 이길 수 있다고 주장한다 보는 것이 맞다.

심지어 이 연설은 아래 오데사 폭동에 대한 화합 연설이다.


7.2. 오데사 폭동 설명 관련 오류[편집]


파일:가짜뉴스 2.png
오데사 충돌에 관하여도 가짜 뉴스를 제작하였다. 레퍼런스도 제시하지 않아 신뢰성에 대한 검증도 힘들다. 확실히 하고 가면 오데사 충돌은 2014년 5월 2일 흑해 항구 오데사에서 48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당한 사건으로 극우 친우크라이나 세력들이 친러 시위대를 공격한 것은 맞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옹호 관점을 제하고서라도 간다효의 서술은 완전히 편향되었다.

파일:1920px-Odessa_Russian_Sring_20140413_08.jpg
4월 13일 오데사의 친러 시위대, 무장한 것이 보인다.[47]

파일:RussianSpringOdessa20140420_11.jpg
2014년 4월 20일 반정부 시위대 : "마리우폴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규탄하는 팻말을 들고 있다. [48]

파일:1024px-Anti-War_protest,_Odessa_02.jpg
2014년 3월 4일 우크라이나 반전 시위대 : 나치 문양 팻말에는 블라디미르 푸틴드미트리 메드베데프가 합성되있는 것이므로 주의.

이 사건은 영상, 목격자들의 증언등을 참고하여 the 2 May Group라는 지역 언론에 의해 2014년, 2016년 보고서가 작성되었고 OSCE[49]의 보고서도 나온 상태이다.

참고자료: 더 가디언지의 2015년 보도.

간다효는 영상에서 반러 시위대와 러시아어 금지법안 반대 시위대가 충돌한 것으로 설명했다. 일단 러시아어 금지 반대 시위대라고 주장할 만한 근거가 없다. 어느 영문 레퍼런스에서도 러시아어 금지 반대 시위대라고 적힌 것은 없다. 물론 친러 세력이기 때문에 2012년 언어법 폐지법안, 즉 러시아어의 제2공용어 폐지법안은 기본적으로 반대하겠지만, 이 시위를 일반적으로 대표하지는 못한다. 심지어 영상에는 근거자료도 없어서 이를 뒷받침 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 확인도 불가능하다.

오데사는 2014년 1월부터 친러-반러 세력이 충돌하였다. 1월에 유로마이단 시위대들이 야누코비치의 축출을 요구하면서 지역 행정부를 공격하는 사태가 있었는데, 오데사에서는 1월 26일에 유로마이단 시위대들이 오데사 행정부를 공격했지만, 친정부 세력[50]과 시 당국이 바리케리트를 쳐서 방어하였다. 이 시점에서 반-마이단, 유로마이단의 충돌은 계속 진행되었다.

양쪽 모두 온건파와 극렬파가 섞여 있어 양쪽 모두 무고한 피해자가 속출하였다. 러시아가 지원하는 러시아 민족주의 단체 또한 개입하기 시작하였다.[51]

3월 3일에는 러시아 국기를 든 200~500명의 시위대가 오데사 주 의회 건물을 점거하려 했다. 또한 오데사 자치 공화국 수립에 대한 국민 투표를 요구했다.

3월 30일, 러시아의 군사 개입을 주장하는 친러시아 전복 단체 지도자가 체포되어 추방되었다. [52]

4월 16일 군수품 보관소를 점령한 세력이 오데사 인민 공화국 건국을 선포하고 오데사 주 의회 건물을 점령하려고 시도하였다. 친러 시위대들 또한 대부분이 분리독립이 아닌 자치권 획득을 주장함으로써 4월 17일 해산되었다. 4월 20일 친러 시위대들은 자신들의 목표가 로보로시아 연방 국가라고 주장하였다. #

4월 25일 오데사 외곽의 경찰 검문소에서 수류탄 공격으로 7명이 부상당하여 지역 긴장이 고조되었다.

5월 2일 오데사 거리에서 친마이단 세력과 반마이단 세력의 무장 충돌이 발생하였다. 2명의 친마이단 운동가와 4명의 반마이단 활동가가 거리에서 총격으로 사망하였다. 가장 먼저 사망한 사람은 27세의 이고르 아바노프로 극우 민족주의자로 관광객들이 붐비는 길거리에서 총에 맞았다. 친러세력에 경찰 일부가 가담하여 무기를 나눠준 것으로 판정되었다. 5월 2일 사건을 취재하다 부상을 입은 지역 언론인 올렉 콘스탄티노프에 따르면 오데사의 경찰은 친러시아 활동가들과 오랜 협력 역사를 갖고 있다. 그는 경찰력의 최대 80%가 러시아에 동조하는 것으로 추산했다. [53]

친마이단 시위대에서 반마이단 진영을 파괴하고 죽이라는 극단적인 여론이 SNS에 퍼졌고, 수많은 극우 시위대가 반마이단 진영을 공격하였으며, 반마이단 진영은 압도적인 수에 밀려 노동 조합원 건물로 들어가 농성하였다. 극우 시위대가 여기에 불을 질러 화재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추가 설명을 하면 화재는 극우민족주의 단체 '프라비 섹토르' 세력이 주도하였다.

이 오데사 폭동은 도저히 러시아어 금지법안 반대 시위자들에 대한 일방적인 공격으로만 설명될 수가 없다. 친-유로마이단 시위자들의 반-유로마이단 시위자들에 대한 일방적인 공격이라는 본인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자료[54]도 제시하지 않았다.


7.3. 러시아어 금지법 관련 오류[55][편집]


간다효는 2014년에 러시아어 금지법이 책과 신문과 같은 출판물들에서 러시아어를 사용하면 과태료를 부과하는 법안이고, 그것이 러시아어 금지법, 즉 러시아 민족 탄압법이라고 여전히 주장하고 있다.

여전히 2012년 언어법에 대해서는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위 언어법 관련 비판과 맥을 같이 하는데 1989년부터 2012년까지 유일한 국어는 우크라이나어였고 2012년에 러시아어가 공식어로 지정되었을 뿐이다.

2014년 유로마이단 직후 인 2014 년 2월 23일 우크라이나 의회는 2012년 러시아어 법안을 폐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결정은 올렉산드르 투르치노우 대통령 권한대행에 의해 거부권이 행사되었고 언어법(러시아 공용어법)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선언하였다. 이 때가 3월 1일이다.

2014년 언어법은 단순히 출판물에서 러시아어 사용을 금지하는 법이 아니다. 2014년 언어법은 실제로는 2012년 언어법 폐기이고, 러시아어는 공식어에서 제외되었을 뿐 사용이 금지되지 않았다. 한국 기사.

또한 간다효는 2014년 러시아어 금지법이 2019년 언어법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지만, 2014년 언어법은 2012년 언어법 폐기이고, 2019년 언어법은 2018년 10월 4일에 초안이 작성되었다.


7.4. 친러 여론 관련[편집]


간다효는 동부, 및 남부에 관하여 선거 결과를 가지고 정확히 민심 변화를 알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근거가 있는 주장으로 2001년 이후 인구 조사 이후에 민족 비율이 나온 통계가 없으므로 정확한 고찰은 할 수 없으나, 관련한 간단한 추정은 가능하다.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인 정체성을 가지는 사람은 점차 감소 중이고, 나이가 적을 수록 친러 정당에 대한 지지율은 크게 감소한다. 이는 러시아 정체성을 가지는 인구의 감소 경향과 일치한다.

다음은 2019년 7월 21일 우크라이나 국회의원 선거 출구조사 결과를 나타낸 표이다.

파일:연령별.png
우크라이나어를 한국어로 바로 번역한 것이라 오타가 있음에 유의. 빨간색 부분이 우크라이나의 친러 정당이다. 또한 이 친러 정당과 지지자들이 러시아의 침략을 옹호하는 수준은 아니다.

파일:러시아 저항 설문조사.png


7.5. 돈바스 반군보다 우크라이나군이 강군이었는가?[편집]


돈바스 전쟁 문서 참고.

결론부터 말하면 현재의 우크라이나군이면 모를까 2014년 돈바스 전쟁이 처음 발발했을 당시만 해도 러시아의 소위 친절한 청년들의 지원과 장비지원으로 인해 친러 반군세력의 장비가 우크라이나군보다 우수했다고 본다.

러시아군이 기습적으로 크림반도를 점거하는데도 별다른 대응을 못하고 고위급 사령관이 감금당했던 것이 당시의 우크라이나군이었다.#

2014년까지 우크라이나 군의 약화는 야누코비치 정권의 친러정책 때문이었다. 야누코비치 집권 4년간 크렘린궁의 의중을 받들어 친러시아, 탈서방 정책을 폈다. 야누코비치는 취임 한달여만에 크림반도 세바스톨항의 러시아 해군기지에 대해 전임 유첸코 정부 당시의 대여 취소를 철회하고 2030년까지 연장했다. 국방장관과 정보부장관에는 러시아 국적자를 지명했다. 재정난을 이유로 군대 규모를 축소, 2013년 10월 징병제를 폐지했고 5년 후인 2018년까지 육군 병력을 18만 명에서 12만 명으로 감축하겠다고 발표했다. 노후화된 장비와 무기를 폐기 처리했으나 새로운 보충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나마 있는 장비도 예산 부족으로 유지 관리에 어려움을 겪었다. 러시아군과의 군사 교류를 강화했고 나토와는 냉각기에 접어들었다.

간다효는 돈바스 반군이 탱크와 대공미사일을 지원받지 못했다 주장하나 실상 둘다 뻔히 지원받았으며 최신예 장비도 지원하였었다. 관련 문서를 조금만 뒤져보면 알겠지만 친러 반군세력은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장비와 인적자원 측면에서 우크라이나군보다 나았으며 러시아제 최신 전차인 T-90 전차까지도 지원받았다. 2016년 10월, 우크라이나 측에서 돈바스 반군 기지에 대한 항공촬영 사진을 공개하면서 러시아군만 사용하는 UR-77 공병전차가 식별되는 등 러시아로부터 각종 장비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으며 포로셴코-젤렌스키 정권 때의 군제 개혁이 본격적으로 있기 전까지는 2019년까지도 돈이 없어서 스트리밍과 도네이션으로 장비를 조달하는(...) 수준의 열악한 군대를 유지하였으며 가용병력이 돈바스 사태초기 6000명에 불과한 등 전형적인 후진국 군대의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대공미사일이 없었다면 말레이시아 항공 17편 격추 사건 이후 돈바스 반군들이 이를 자랑이랍시고 사진을 찍고 인증 샷을 찍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미 국제적으로는 이 사건은 돈바스 반군이 부크 미사일 시스템으로 민간항공기를 격추시킨 전쟁범죄라고 결론이 나온 상태이다.

우크라이나군은 포로셴코 대통령 시기에 물적, 질적 향상을 이루기 전에는 극우 민병대에도 전투력이 밀릴 정도로 심각한 약군이었다. 포로셴코 대통령이 취임하고나서 극우 민병대의 극우 색을 최대한 겉으로나마 뺀 후 우크라이나 군의 통제를 받게 하고 우크라이나 군에 질적, 양적인 투자와, 위에서도 언급된 NATO 국가와의 군사교리 교류 등을 받게했다. 이런 포로셴코-젤렌스키 정권 시절의 군사력 강화로 인해 현재 러시아군과도 맞서 싸울수 있게 된 것이 우크라이나 군인 것이다.


8. 우크라이나에서 젤렌스키가 당선된 진짜 이유에 관한 비판[편집]



8.1. 가짜 뉴스에 대한 적반하장 태도[편집]


위 다시보기 원본 영상을 편집한 컨텐츠이다, 문제점이 있는 내용을 전혀 수정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다.
영상 뒷편에는 가짜 뉴스 관련 코멘트를 달아서 업로드하였다.

이 정도로 가짜 뉴스를 만들면 믿겠지? 이런 식으로 퍼트리는 법안이 만들어지는 것을 희망합니다.

이 영상 보고 켕기는 사람 있을 거에요.

- 간다효의 우크라이나에서 젤렌스키가 당선된 진짜 이유 마지막 코멘트


정작 본인이 포로셴코 관련 가짜 뉴스를 인용하고, 오데사 학살은 "러시아어 금지 법안 반대 시위대"라는 오류를 인용하여 영상을 만들고 논리를 전개한 것은 본인임에도 불구하고 교조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파일:댓글1.png

그리고 이같은 오류를 지적하는 댓글에 위와 같은 건성한 답변으로 대꾸하였다.[56] ,[57]

※ 근거 :
1.관련 기사.(영국 언론 더 가디언)
2.관련 기사.관련 기사 독일 언론 - 돈바스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프로파간다 까지 나와 있음.
3.영어판 위키피디아
4.분 단위로 정리되어 있는 시민 단체의 정리 글 : 5월 2일 위원회.
5. UN 우크라이나 기금
6. 군사 밀리터리 위키
7. CNN 관련 기사
위 기사들은 우크라이나의 시위대에 옹호적인 글을 쓰는 단체가 아니지만 양측 모두의 잘못과 친러시아 측의 잘못이 모두 공통적으로 교차검증 되고 있다. 간다효는 반면 단 하나의 레퍼런스도 제시하지 않았다.

"러시아어 금지 법안 반대 시위대"는 러시아 언론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9. 결론[편집]


간다효가 비판받아야 할 부분은 1. 우크라이나 언어법에 대한 내용의 왜곡된 근거 또는 근거 부족 2. 러시아의 실책에 비해 우크라이나의 실책을 부각하는 점 3. 이러한 점을 지적한 비판 여론에 대한 원천봉쇄다.

우크라이나어 설명 관련해서는 간다효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명확한 자료들이 있다. 이를테면 하버드 대학교 우크라이나 연구팀은 2014년 제정된 언어법은 2012년에 제정된 언어법의 폐기법안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2019년의 법안 역시 러시아어 금지법안이 아닌 우크라이나어 장려법안이라 설명하고 있다.

또한 러시아의 실책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은채 우크라이나의 실책을 강조함으로써 전쟁의 책임이 전적으로 우크라이나에게 있는 듯한 인상을 주며 친러들에 의해 왜곡된 자료로 무분별하게 사용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비판들에 대해 간다효는 제기된 반대 의견들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재반박할 수 있는 모두가 인정할만한 자료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간다효는 자신에 대하여 비판하는 사람들을 싸잡아 "음해하려는 세력"이라 통칭하고 댓글을 검열 삭제하겠다는 것이다. 그 중에는 유튜브봇이 정제되지 않은 특정단어를 인식하여 삭제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만.. 여튼 반대 의견을 수용하려는 자세를 보이지는 않고 있다.

댓글 검열은 비판 받아야하지만 동정의 여지도 있긴 하다. 간다효의 전 계정 효기심에서 국내정치병 환자들의 분탕 댓글들로 인해 곤욕을 치뤘고, 분탕질의 개선이 보이지 않는다 판단하여 계정을 정지시켰으나 새 계정 간다효에서도 여전히 분탕질 악플이 달리고 있다.[58][59] 하여 댓글 관리에 나선 것이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삭제된 댓글들이 그런 유형의 악플들인지 아니면 간다효의 주장에 위배된 댓글인지는 알 수 없다. 댓글 검열은 특히 우크라이나-러시아 관련 내용의 영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이기에 그런 의심이 깊어진다.

이러한 비판점의 원인은 간다효의 경직된 정치현실주의적 관점 때문이다. 정치현실주의는 국제관계를 힘의 논리만으로 정의하기에 인문학적 고찰의 부족함으로 인해 현상이 편향 해석될 수 있다.[60] 따라서 간다효는 러우관계의 특수성과 보편적 가치 즉 동슬라브족 민족관계와 국제사회의 도덕적 규범을 함께 설명하며 현상 이해를 위한 다양한 장치를 두어 시청자들이 독립적인 관점을 찾아가도록 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간다효는 오직 현실주의적 관점으로 설명하여 시청자들에게 간다효의 시각에서만 현상을 바라보게 했다.

간다효를 자신의 의견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근거없는 억측과 비난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61] 그러나 이번 러시아-우크라이나 설명 관련해서는 한쪽으로 치우친 모습에 실망하여 떠나겠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진영 가리지 않고 소위 정치병 환자들에게 덴 적이 많아서 자신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 무작정 정치병 환자라 치부하고 무시하는 경우도 꽤 있는 편이다.

[1] 이에 관련된 비판은 위의 언어법 설명 관련 비판 항목에 더 자세히 나와있다.[2] 러시아 주장 특수군사작전. 1969년 중소국경분쟁 때도 특수군사작전으로 불렀다. 전면적인 전쟁이 아닌 특수목적의 제한된 군사작전이란 의미[3] 러시아화는 1720년 표트르 1세의 우크라이나어 인쇄물 말소 정책을 시초로 보는 시각이 있고, 예카테리나 2세부터 러시아화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고, 본격적인 러시아 제국의 공식 법령으로 행정적, 법적, 사회적 조치가 적용된 것은 1831년부터이므로 참고하면 좋다.[4] 우크라이나는 동맹이 없기 때문에 유사시 적대국의 군사적 개입이 있을 경우 자국을 지켜줄 무언가가 필요해 NATO 가입을 추진한 것이라 덧붙였다.[5] #[6] 간다효는 우크라이나의 부정부패는 포로셴코 정부 뿐 아니라 다른 정부들 역시 전반적으로 부정부패가 만연했다고 설명하였다.[7] 단적인 예로 이번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 위에서 언급된 권기창 전 우크라이나 주재 한국대사의 의견과 간다효의 의견이 일부 측면에서 다르다는 것을 들 수 있다.[8]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이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러시아를 비판하자 지지율이 치솟은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프랑스 지지율 보기[9] 다만 독일 내부에서도 반러감정이 심해지고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입에 대해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만큼 일단은 두고봐야 할 일이다.[10] 칼럼 및 사설 등지에서도 2010년대 이후부터 중국의 세계 패권 장악 기도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11] 이 문제에 대해서는 영상에서 해당 비유를 제시한 권기창 전 대사가 서방 세계가 제3차 세계 대전을 두려워하여 직접적인 개입을 꺼린다고 언급한 바 있다.[12] 간다효의 주요 비판 사항인 우크라이나의 러시아어 금지 정책을 다수 민족(우크라이나계)의 소수 민족(러시아계) 문화에 대한 탄압으로 보자면 중국의 소수민족 탄압과 문화 침탈 행위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13] 한국일보의 같은 보도임에도 전쟁 이전의 비판적 색채전쟁 이후에 급격히 옹호로 선회했음을 알 수 있다.[14] 실제로 젤렌스키가 평소에 했던 정책은 부패 문제를 시정하려 한 점을 제외하면 딱히 잘했다고 볼만한 게 없다. 물론 전직 대통령 포로셴코는 대통령으로써의 자질은 있었고 나름 업적도 있었으나 심각한 부패 정치인이었고, 티모셴코나 보이코 같은 나머지 후보들은 아예 대통령 되면 안된다고 딱 행동에 적혀있는 사람들이라서 젤렌스키를 뽑은 것인데, 어느 정도냐면 침략에 직면하기 전 젤렌스키의 지지율이 20%대에 불과했을 정도. 즉 우크라이나인들도 평시 젤렌스키의 정책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다만 전시상황에 필요한 지도자로써의 자질은 굉장히 우수했고 푸틴의 침략으로 본인도 몰랐던 전시 대통령으로써의 재능이 갑자기 드러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15] 파일:Google.jpg[16] 참고 도서[17] 참조[18] 좌측은 원본이 아니라 우크라이나 정부에서 게재한 러시아어 번역본이다. 우크라이나 동부에는 아직 상당수가 우크라이나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며, 러시아어를 주 언어로 사용하고 있다.[19] 해당 논문에서 사용된 설문 원본에 대한 정확한 사례가 필요하다. 우선 러시아를 지칭하는 러시아어는 두가지이다. 하나는 민족, 문화등을 지칭하는 руский(루스끼이) 그리고 다른하나는 국가로서의 러시아를 지칭하는 российский(로씨이스끼이)이다. 두 단어 모두 한글로 번역하는 경우 '러시아의'라는 뜻이지만 러시아어로 받아들이는 경우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전자의 경우 과거 키에프를 수도로한 고대국가 루시(Русь)에 어원을 두고 있으며, 후자의 경우 국가로서의 체제가 확립된 모스크바를 수도로 하는 러시아를 의미한다. 고로 만약 설문지에 российский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을 경우 대부분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은 법적으로는 러시아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단순히 법적인 의미로 러시아인이 아니라고 답하였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하지만 русский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면, 그 결과가 달라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참고] 간다효가 언급한 우크라이나 정치인들의 잘못에 대한 근거와 오류에 대한 근거가 모두 들어가 있는 이 논쟁에 대해 중립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논문이다.[관련칼럼] 워싱턴 포스트 : 전쟁으로 인해 우크라이나의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어와 문화를 버리다[20] 이는 우크라이나어-러시아어의 관계와 유사한 부분이라 볼 수 있다.[21] 프랑스어 또한 공용어이기 때문이다.[22] 이 때도 프랑스어가 상위[23] 이 때 룩셈부르크어가 공식적으로 '언어'로 인정받음[24] 공공기관일수록 더더욱 그렇다.[25] Aref’ev A. L. . Russian-Language Education in Ukraine: History and Present Situation. Herald of the Russian Academy of Sciences 2018[26] 당초에 외국어 발음을 한국어식으로 옮기는 것은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키예프는 러시아어를 반영한 발음이다. 그런데 똑같이 러시아어를 반영한 북한은 끼예브 혹은 끼이브라고 부른다.[27] 일단 우크라이나는 1989년 소련의 개혁-개방 이후 바로 우크라이나어를 유일한 국어로 지정한다. 그리고 독립 이후 즉각적으로 친서방 정책을 펴서 러시아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였다. 우크라이나가 2000년대 초반부터 친러 정책을 핀 것은 서방의 외면과 1990년대부터 계속된 러시아의 협박 및 경제제재로 경제가 좋지 못했고, 푸틴이 보리스 옐친 때와는 다르게 초기에는 유화책으로 접근했기 때문이였다. 참조[28]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민족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여러 갈등이 극단적으로 표출 될 것을 우려한 영국이나 미국, 독일 같은 나라들의 합의로 진행된 것이였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지정학적 중요성과 러시아의 민족주의 때문에 이때 본격적인 독립 민족국가 우크라이나가 성립되지 못하였고, 이후에 이런 상황이 소련의 지배시기까지 이어지면서 독립국가를 형성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 것 뿐이다.[29] 러시아 제국 시절, 키예프 루스를 모스크바 민족성의 뿌리로 삼았기에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은 형제라는 민족주의가 있었다.[30] 참고자료1 https://en.wikipedia.org/wiki/Russification_of_Ukraine[31] 참고자료2 https://www.tandfonline.com/doi/full/10.1080/1060586X.2018.1445460[32] National identity and politics in Southern and Eastern Ukraine[33] 다만 우크라이나 정부의 잘못이 절대로 없진 않다. 그럼에도 우크라이나 측의 잘못을 러시아측의 잘못보다 강조해서 설명하는 것은 반대로 러시아의 비판받아야 할 점을 상대적으로 가려버리는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34] 가령 전 대통령인 포로셴코는 자국에서 반역 혐의를 받고 해외로 토꼈을 정도로 부패 정치인이었지만 푸틴을 위시한 러시아의 정치인들의 부패 정도는 그보다 더하고 포로셴코는 후에 나라로 돌아와 나라를 구하기 위한 무기를 사는데 아낌없이 돈을 퍼붓기라도 했다. 물론 이는 그가 정치인 이전에 성공한 기업가라는 점을 감안해야 하지만 푸틴과 그 측근들도 부패로 해먹은 재산은 많다.[35] 이 현실주의적 방향성 자체는 정치학의 한 형태이기에 개개인의 그러한 경향 자체로는 비판할 수 없지만, 간다효는 너무 매몰된 게 문제다.[36] 예를 들면, '조선대한민국의 역사가 아니다. 그러나 한반도의 역사라고는 할 수 있다'라는 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37] 단적인 예로 패드립을 들 수 있다. 현대 한국인들 사회에서 전통적인 유교관념은 나날이 희박해져 가고 있으나 미국의 젊은층처럼 'yo mama' 같은 농담은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거의 쓰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더이상 조선의 유교적 국가관에 가치를 두고 있지 않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관념에는 그 흔적이 남아 좀 더 지속되고 있고 이는 다시 한국만의 문화적 특성을 만드는 밑바탕이 되고 있다.[38] 우승 열패의 신화 (박노자) 참조.[39] 중화민족주의를 통해 중국이 한족을 비롯한 소수민족을 하나로 묶어 팽창하지만 동시에 티베트나 위구르의 민족주의에 따라 중화민족이라는 개념을 거부하고 분리독립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는 것처럼 민족주의라는 것도 관점에 따라 그 방향이 서로 엇갈리기도 한다.[40] 평소 관심 없던 사안이었는데, 간다효를 통해 알게되었다거나 원래부터가 팔랑귀였다거나 이유는 많다. 그만큼 간다효만의 문제는 아니고 유튜브, 더 나아가서는 인터넷 정보와 그 정보수용자의 태도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41] 사실 역사 문제 뿐만이 아니라 도덕을 '감정팔이'로 몰아붙이는 것은 2022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유행하는 태도이다. 이는 정치외교학이라는 학문 자체의 특성과도 관련이 있는데 정치외교학은 인문학이 아닌 사회과학이라는 별개의 영역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42] 파병을 통해 전쟁 특수를 누리거나 미국과의 외교관계 유지에서 우위를 점해 국익이 증대될 것이라는 예측에서 비롯된 것이였다.[43] 다만, 그 넘지 말아야 할 선의 기준이 각 개개인, 집단, 국가, 문화권마다 서로 다르고 통합되지 않은 부분이 많다는 점 또한 고려해야 한다.[44]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까지 대체적으로 '아무리 그래도 전쟁을 일으키겠어?' 반응이었다. 그러나 진짜로 침공한데다가 그것도 모자라 경악할만한 대민범죄에 핵 언급까지 꺼내는 상태가 되니 스웨덴이나 핀란드 같은 나라들도 더는 중립으로 남기 힘들어진 것이다. 심지어 러시아는 이것으로 멈출 생각이 없어서 몰도바, 발트 3국, 카자흐스탄 등 다른 나라들도 침략할 예정이었다는 이야기가 나옴에 따라 정말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게 점령되더라도 러시아가 그걸로 멈출지는 아무도 모른다.[45] 이 과정에 전적으로 우크라이나 힘만은 아니다. 우크라이나는 서방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 그러나 의용군 외의 병사 지원은 없었고 본격적인 지원을 받기 전에도 결국 키이우를 지켜내는 등 러시아가 졸전을 한건 사실이다. 이게 그저그런 나라의 실적이라면 모르겠는데 자타공인 세계 2위의 군사력을 가졌다는 나라의 실적이다. 1위인 미국은 이라크든 아프가니스탄이든 어쩄든 당시 정권은 엎어버리는건 성공했다는 점에서 러시아는 한참 하수라는 점이 드러난 것이다. 하다못해 소련도 아프가니스탄에서 죽을 쑤긴 했지만 기존 정권을 엎기는 했다.[46] 절대로 없진 않았다.[47] #[48] "마리우폴 3057 부대의 지휘관과 인원들에게 비무장 자들을 쏘는 것은 지울 수 없는 죄! 영원한 저주!"[49] #[50] 야누코비치 축출 전이기 때문이 친정부세력은 일반적으로 친러세력과 동일하다[51] #[52] #[53] #[54] 즉, 오데사 폭동을 러시아어 금지법안 반대 시위자들에 대한 일방적인 공격이라고 설명하는 논문, 신뢰할 만한 기사 및 칼럼 및 도서 등.[55] 이에 관련된 비판은 위의 언어법 설명 관련 비판 항목에 더 자세히 나와있다.[56] 당연히 이런 행동은 잘못된 것이고 옹호하는 것이 아니므로 유의[57] 5월 17일 오후 11시 기준 삭제되었다.[58] 간다효 채널의 규칙이 매우 엄격한 이유다. 전 채널이 워낙 홍역을 치렀고 그 이후, 불편러 요구사항 하나하나 들어주느니 그냥 싹 다 밀어버리는게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59] 이 덕에 분탕러는 거의 보이지 않으나 반대급부로 정당한 비판도 대부분 차단당하는 악효과가 나타난 것이다.[60] 정치현실주의가 현대에 국제관계 현상을 설명하는 가장 유력하며 강력하게 지지받는 이론이기는 하다. 대표적인 학자로 한스 모겐소, 존 미어샤이머, 헨리 키신저가 있다. 다만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현실주의로는 설명 할 수 없는 것들도 당연히 존재한다.[61] 가령 20대 대선에서 계속 언급된 부정선거에 관련된 간다효의 설명에 대한 무지성 비판을 예로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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