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태 (r20200302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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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초대
김지태


제2대
고원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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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智泰
1908년 7월 ~ 1982년 4월 9일
1. 개요
2. 일생
3. 선거이력
4. 친일과 부정축재 논란
4.1. 친일 의혹
4.2. 부정축재 사실
5. 옹호와 반박
6. 정수장학회 관련 문제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기업인, 언론인, 정치인으로, 아호는 자명(子明)이다.
친일 및 부정축재 의혹이 꾸준한 기업가로, 특히 박근혜정수장학회는 정치권의 오랜 쟁점 중 하나이다. 그 와중에 친노 진영과 관계가 폭로되기도 했다.[1]

2. 일생


1908년 경상남도 부산부 좌천정(현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에서 토호 집안의 아들[2]로 태어나 1927년 부산제2공립상업학교(현 개성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첫 직장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입사해 5년간[3] 근무하다 동 기업에서 울산 지역 2만평의 토지를 불하 받아 이를 기반으로 중일전쟁의 일제 군수사업으로 부를 이뤘다고 회고록에서 인정한 바 있다.
그는 이 농장을 바탕으로 1935년 조선지기주식회사를 세워 기업가의 길을 걷기 시작해 1943년 조선주철공업합자회사를 인수해서 성장을 거듭했고, 1945년 8.15 해방 후 이듬해에 귀속재산 조선견직 관리인을 맡기도 했다. 1947년에는 <산업신문(현 국제신문)>을 인수하여 언론사업에 뛰어들기 시작했으나, 2년 뒤에 산업신문을 같은 지역 사업가 이연재에게 넘기고 부산일보를 인수했으며 1958년 삼화고무를 인수하고 부일장학회를 설립하였다. 1959년 부산문화방송을 개국하고, 1961년 문화방송을 개국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부산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4년 자유당에 입당하였고, 같은 해 치러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다시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하다 같은 해 제명되었다가 1957년 복당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공천에서 안준기에 밀려 탈락하자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부산시 부산진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이종남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4.19 혁명 당시 김지태는 부정축재자 명단 1호에 오른다. 당시 부산 학생들은 김지태의 집으로 몰려가 ‘악질친일재벌을 처단하라’며 목소리를 높였다.[4] 자유당 시절에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으로 20여만평의 농지를 편법으로 구입한 바 있는데, 이것이 부산 지역 민심을 격발시켰던 것.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에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되었고, 중앙정보부의 강압에 의해 국가에 재산을 헌납하였다. 그런데 박정희 정부는 부일장학회를 국유재단으로 만들지 않고 5.16 장학회로 만들고,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자 박근혜정수장학회가 되어 논란이 부상했다.

3.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선여부
비고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경상남도 부산시 갑)
무소속
-
당선

1954
제3대 국회의원 선거 (경상남도 부산시 갑)
자유당
-
당선

1958
제4대 국회의원 선거 (경상남도 부산시 부산진구 갑)
무소속
-
낙선


4. 친일과 부정축재 논란



4.1. 친일 의혹


친일행위는 명백하게 드러난 바가 없으며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친일명단이나 친일인명사전에도 수록된 바 없다.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지 않은 이유로 참여정부 시절 간부가 아닌 직원은 제외하기로 방침이 정해진 것과 관련하여 정권의 영향력을 우려하는 시각이 있었으나, 당시 수록 대상의 범위를 협의하는 과정에서 친일파 범위를 축소하는 문제에서 정치적인 잡음이 있었다.[5]
1908년 부산 좌천동에서 태어난 그의 집안은 부산에서 12대를 살아왔는데 조부 김채곤은 통도사 신도회장을 맡았을 뿐 아니라 육영제(育英齊·부산진초등학교 전신)라는 학교를 세울 정도의 재력가였다. 1927년부터 1932년까지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에서 근무했으며, 재직 중 폐결핵에 걸려 5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면서 그 회사 울산농장의 땅 2만평을 10년 분할상환 조건으로 불하받았다.[6] 2년여에 걸친 투병생활 끝에 병세가 호전되자 이 농장을 바탕으로 1934년 인조견 생산회사 부산진직물공장을 인수하여 기업인으로서 첫 출발을 했으나 경험 부족과 큰 기업과의 경쟁으로 1년반 만에 회사는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고 빚만 졌다. 이후 1935년 종이를 생산하는 조선지기(紙器)주식회사를 설립한데 이어 부동산 사업으로 큰돈을 벌었다고. 이 조선지기주식회사 뿐만 아니라 직물공장, 조선주철공업 등을 운영하면서 포장상자, 군복, 군수물자 생산을 하면서 전쟁특수로 때돈을 벌었다#
다시 말해 당시 중일전쟁에 일제 군납사업을 한 것은 사실이고, 결국 친일파 의혹은 이례적인 일제의 특혜에서 기인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실제 동서고금 어디에서도 군납사업은 권력층과의 유착으로 이루어져 왔다. 참고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정의)에 따르면 14. 일본제국주의의 전쟁수행을 돕기 위하여 군수품 제조업체를 운영하거나 대통령령이 정하는 규모 이상의 금품을 헌납한 행위 역시 친일반민족행위로 지목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알거 다 아는 나이인 20대에 (당시 평균 수명을 고려하면 20대는 성인이 되고도 한참 지난 나이로서 지금의 기준과는 다르다.) 5년씩이나 핵심 수탈 기관에 근무 하였으며, 근무를 마치고는 ’재수 좋게도’ 막대한 토지를 ‘맘씨 좋은’일본인 상사들의 배려로 불하받았고, 경험이 부족한 관계로 사업을 말아먹었는데도, ‘재수가 좋아서’ 막대한 이문이 남는 군납사업을 또 역시 ‘맘씨 좋은’ 일본인들의 배려로 따내어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대재벌이 되었다는 얘기인데..
상식적으로 일본 식민정부에 대단한걸 팔아 넘기지 않고서야 이런 특혜는 일본인에게도 잘 주어지지 않던 것이다. 독립운동가 한두명 팔아 넘기는 정도로는 이 정도 특혜를 얻기 힘들다.

4.2. 부정축재 사실


김지태는 50년대에도 이미 비리로 구설수에 올랐던 인물로 1959년 국세청으로부터 생사수출시 2억500여만환의 세금을 포탈한 혐의로 5개회사 대표들과 함께 조세처벌법 위반혐의로 고소당했다. 이 역시 자유당에 박해를 받았다고 하지만, 앞서 언급되다시피 4.19 혁명 이후 제2공화국 때도 그는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었다. 오히려 이기붕에게 조선견직의 탈세묵인조로 자유당에 선거자금 1000만환을 공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3.15 부정선거를 거들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더구나 5.16 군사정변이 터지기 전에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어 당시 기준으로 5억환의 부정축재 환수금을 추징당했으며, 1961년 2월에는 반민주행위자 공민권제한 대상자 심사 명단에 올랐다.
거기다 군사정권 당시 재산을 헌납한다고 각서를 썼을 당시 그의 집에서는 다이아몬드 반지, 외제 카메라 등 밀수품이 발견됐다. 참고로 이 시절은 이기붕이 집에서 귤 한박스 나왔다고 욕먹고, 미제 중고 냉장고를 뇌물로 받았다고 비난을 받던 시대였다.
1952년 부산 대연동 마을에 '국군이 토지를 징발한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발칵 뒤집어졌다. 주민들은 동네로 진입한 군인들에게 "땅을 이렇게 빼앗아가는 법이 어디 있느냐”며 애원했지만 당시 전쟁 중이었던 국가 분위기는 군대가 쓰겠다는 상황에서 함부로 토를 달 수가 없었다. 결국 마을주민들은 언젠가 되돌려주리라는 기대를 하며 삶의 터전을 내놓는다. 그러나 ‘되돌려받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는 당시 국방위원회 소속이었던 김지태가 징발당한 농민들의 땅을 인수하면서 물거품이 된다. 김지태의 유족이 정부에 빼앗겼다고 주장하는 토지 10만 평 중 4만평이 이 대연동 토지이며, 본래 주인은 땅을 부치던 이 지역 농민들이었다. 김지태와 몇몇 브로커들이 국가에 징발된 땅이라는 점을 악용해 "정부에선 보상금을 주지 않으니 일단 넘기라"는 감언이설로 당시 배우지 못한 농민들을 속여 교묘한 방법으로 인수해간 것이다.
김지태의 수사를 맡았던 박용기 당시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장은 “국군에 징발되어 있는 농민들 소유 전답을 김씨가 국방위원이라는 신분을 활용해 헐값에 넘겨받아 치부 수단으로 이용했다”면서 “땅을 징발당한 농민 후손들의 주장은 사실”이라고 확인했다. 또 “특히 땅 부분은 김씨가 농민들에게 원성을 사게 된 가장 큰 이유”라고 덧붙였다. 김지태는 1962년 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 7년형을 구형받았는데 혐의 내용은 크게 탈세, 밀수, 농지개혁법 위반 등으로 나뉜다. 이 세 가지 혐의 중 대연동 땅과 관련된 것은 농지개혁법 위반이다.
대연동을 비롯해 부산 서면 일대 토지 10만 평은 김지태가 자신의 석방을 위하여 부산 토지를 국방부에 기증했으나 석방되지는 못했다, 담당검사인 오영근이 땅을 받고 석방해 줄 수는 없다며 석방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에 김지태는 황영주를 통해 국가재건최고회의와 접촉하여 5.16장학회에 토지 기증을 제안하여 토지를 기증했다.
김지태의 이 부산 토지는 부일장학회의 소유가 아니었으며, 전부 차명으로 소유하고 있었다. 이 토지는 김지태가 부산일보를 헌납하면서 정부로 넘어갔으며, '원소유주'는 정수장학회로 돼 있다.

5. 옹호와 반박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인물의 일생에 대한 평가에 조심스러움을 요구하는 의견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친일인명사전도 일부 친일파들은 기재되지 않는 등 완벽하다고 할 수 없기에 절대적인 기준으로 둘 순 없다.
첫째 식민지시절 김지태는 부산공립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인 교사의 소개로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입사했다면 불과 20대 초반에서 5년 뒤에 퇴사했을 시기조차 20대 중후반 정도 밖에 안된다. 본인의 회고록에서도 확실하게 설명해 주지 않아 자세한 내막을 모르지만 합리적으로 생각을 해도 젊은 나이에 친일을 해서 아무나 토지 2만평을 받았다면 너도나도 친일을 했을 거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당시는 대학을 대신하던 최고 교육기관이 고등학교. 지금과 같이 30~40대가 아닌, 20~30대가 사회 주축인 시대였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된다는데 설득력이 떨어지는 주장이다. 또한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5년은 당시 시대상을 감안했을 때 민간 경력으로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이는 동시대 인물들의 이력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둘째는 박정희 정권 자체가 군부 쿠데타로 인한 정권이였고 당시 반대하던 세력과 인물들을 누명을 씌웠던 과거 사례들을 살펴본다면 당시 저 부정 사례도 곧이곧대로 신뢰하기도 어렵다는 반론도 있다. 당시 눈 밖에 난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죄를 만들어서라도 정치적 이익을 보는 시대였다. 인혁당 사건 부터 장기독재를 위해 10월 유신 까지 어떻게든 명분을 만들어 정권을 유지시켰던 당시 상황을 감안하여야 한다는 이야기지만, 김지태의 여러 친일, 비리 의혹과 정치, 공안사건과는 결이 엄연히 다르다. 특히, 이승만-박정희까지 이어진 동척 근무 친일 의혹과 조세포탈 등의 여러 혐의는 상술한대로 엄연한 기록이고, 사실이다.
셋째로 친일인명사전에 등록조차 된 적이 없다는 데에서 앞으로 정확한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친일파라고 규정하기란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관련 부정부패 의혹도 최근 재판결과로 당시 박정희 정권의 의해 재산을 강압적으로 빼앗겼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는 주장이지만, 김지태의 여러 혐의가 이승만 정권부터 장면, 박정희 정부까지 이어졌다는데 설득력이 떨어진다. 재론하지만, 박정희 이전, 1960년 4.19 당시에도 김지태에 대한 시위대의 구호는 "친일 부정축재자"였다. 한마디로 김지태의 의혹은 일제강점기 이후부터 꾸준히 지속된 사실이라는 것이다. 더우기 정수장학회 문제 역시 강탈이 아니라고 결론이 나면서 억울하다는 일부 의견은 상당히 희석되었다.
한편 김지태의 유족들은 그가 신간회에서 애국활동도 했다고 주장하였고, 일제의 제국주의에 반대하던 조선노농총동맹에서 1923년, 1924년 연거푸 회장직을 맡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김지태는 1908년 생으로, 유족들이 주장하는 시기에 15세~16세의 나이로 부산제2공립상업학교(現 개성고등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던 소년이었다[7]. 당시 쟁쟁한 사회주의자들을 제치고 거대 사회단체의 회장이 되었을 리가 만무하다. 오히려 이러한 주장은 유족들의 유서 조작 의혹과 맞물려 의심을 더욱 짙게 만들어주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6. 정수장학회 관련 문제


정수장학회는 1961년 김지태씨의 재산 헌납이 모태가 된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이 때문에 18대 대선 당시 정수장학회 장물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모태가 된 김지태의 부일장학회는 애초에 이름만 있지 형체가 없는 소규모 단체에 지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장학재단을 설립하려면 문교부의 인가를 받아야 하며, 기본 재산 보유가 필수적인 설립 요건인데, 부일장학회는 공익재단으로 설립허가를 받은 적도 없고 기본재산 또한 단 한 푼도 없다. 이는 곧 부일장학회라는 비영리법인은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거기다 정수장학회가 김지태가 100% 전부를 기부한것처럼 오도해서는 안된다. 현 정수장학회 재산의 15.96%만 김지태가 기부하고, 나머지는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박흥식 화신산업 사장 등 국내기업인과 일반국민, 재미교포 등이 기부한 기금이다. 여기에 석호필박사 같은 친한파 외국인들이 기부한 자금도 자료를 통해 알수 있다.
김지태의 유족들은 박정희가 5.16 쿠데타 거사자금으로 500만 환을 김지태에게 요청한 것에 거절당한 앙심을 품고 재산을 빼앗겼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김지태는 1976년 '나의 이력서'라는 자서전을 냈는데, 여기엔 박정희나 그 세력이 혁명거사자금을 요청했다는 내용이 없다. 진실화해위와 국정원의 과거사위도 찾아내지 못했다. 군사정권은 정변 직후 부정축재자를 골라 재산 환수 통보를 했다. 김지태는 총 5456만 3000환의 환수금을 내야 했다. 1962년 3월 군사정권은 김지태를 부정축재처리법 위반혐의 등으로 입건했다. 그의 부인은 외환관리법 위반혐의과 밀수 등으로 구속되어 부부가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동년 5월 군 검찰이 김지태에게 징역 7년을 구형하자, 그는 부산일보[8]와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 언론 3사의 재산 환원을 결심했다. 언론 3사를 정부에 헌납한 후 그는 바로 석방됐다. 그가 헌납한 기본 재산을 토대로 하여 5.16 장학회가 1962년 7월 14일에 발족하였다. 이 헌납이 정수장학회=장물 이란 논리의 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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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김지태는 이후 사업가로 실패하지 않아 삼두마차인 조선견직 등 세 회사를 내세워 고속질주했다. 1973년 동방증권을 인수해 금융업에도 손을 뻗었다.
1970년 11월 박정희는 20여 명의 기업인에게 산업훈장을 수여했는데, 김지태는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9] 6년 뒤인 1977년 한국은 대망의 수출 100억 달러를 돌파했고, 그해 수출의 날 행사에서 김지태는 1억5000만 달러를 수출한 공로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이렇다 보니 군사정권이 그의 뒤를 봐줬다는 이야기도 있다. 김지태는 사업을 확장해야 하고, 박정희는 경제를 성장시켜야 했으니 각자의 필요에 따라 조심스럽게 관계를 유지하는 불가근불가원 관계를 맺었다는 것.
김지태는 1972년부터 아들을 각 회사 대표로 임명했다. 장남에겐 조선견직, 차남에겐 한국생사, 삼남에겐 삼화를 맡겼다. 문제는 그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사정이 나빠졌다. 삼화는 신발 수출이 활기를 띤 덕분에 잘나가 1977년 종합무역상사가 됐으나 대규모 부실채권이 발생해 1979년 은행관리를 받게 됐다. 다른 두 회사의 사정도 비슷했다. 김지태는 소유하고 있던 부동산을 담보로 제공해 세 회사가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있게 해줬다. 이 돈의 성격에 대해 유족들은 그들끼리의 소송에서 '구제금융'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3사가 은행에서 빌린 돈을 갚지 못한 1982년 4월 김 씨가 타계해 유족들은 상속을 받게 됐다. 상속은 재산뿐만 아니라 채무도 함께 물려받는다. 그들은 김 씨가 은행에 담보 설정한 부동산도 상속받아야 한다. 그런데 세 기업이 은행 돈을 갚지 못하면, 거액의 상속세를 내고 상속받은 그 부동산을 은행에 넘겨야 했다. 기업들이 은행 빚을 갚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상속세만 날리게 된 것이다.
김 씨 사망 1년이 지난 1983년 7월 7일 유족들은 동부산세무서에 상속세를 신고하면서, 이 부동산을 세 아들이 경영하는 회사에 증여한다고 쓰여 있는 김 씨의 유서를 제출했다. 유서는 사망 7개월 전인 1981년 9월 15일 작성한 것으로 돼 있었다. 유서가 나오면 증여는, 김 씨가 사망하면서 바로 이뤄진 것으로 본다. 김씨의 사망과 동시에 기업으로 토지가 유증됐으니 유족들은 상속세를 낼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갑자기 김 씨의 자필 유언서가 나왔다고 하자 세무서 측은 필적이 다른 것 같다며 김 씨의 필적을 알 수 있는 문서 제출을 요구했다. 유족들은 생전에 김씨가 쓴 편지를 내놓았다. 그런데 필적이 달랐다. 그리하여 유서를 놓고 진위 논쟁이 일었다.
1984년 2월 동부산세무서는 김 씨의 유서를 인정하지 않고 상속세 116억 원을 부과했다. 그 후 부산지법에서 승소한 유족들은 국세심판소에 심판 청구를 했다. 이 청구가 기각되자 그해 12월 유족 전원의 이름으로 대구고법에 상속세 부과 취소 소송을 냈다. 유족들은 이 유서가 진짜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1982년 8월 부산지법에서 받은 검인 심판서 등을 증거로 제출했다. 그러자 1986년 3월 대구고법은 원고 승소 판결을 했다. 동부산세무서는 불복해 상고했으나 1986년 12월 대법원이 기각해 유족들은 최종 승소를 확정지었다. 상속세 부과를 취소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 기업은 2세 경영체제로 들어선 후 몰락의 길을 걸었다. 1982년 동방증권을 태평양화학에 팔았고, 조선견직도 1985년 거제리 공장을 팔아 하청업체로 전환했다. 이후 1992년에 한국생사와 삼화가 부도났고, 조선견직도 1995년 중국으로 이전하려다 실패한 후 서서히 문을 닫았다.
그러던 2006년 김지태의 6남이 서울중앙지법에 장남, 차남, 3남 등을 상대로 한 구상금 청구 소송을 냈다. 6남은 김지태 씨 첫 부인의 소생인데 계모, 계모가 낳은 자녀, 김 씨의 두 소실이 낳은 자녀 등 이복형제들과 함께 친형들을 상대로 구상금 청구 소송을 내면서 '유서는 가짜였다'고 주장했다.
1심에선 구상권 채권은 이미 소멸했다는 이유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으나, 2010년 대법원은 원심을 파기하고 서울고법으로 환송했다. 2011년 5월 환송심을 맡은 서울고법 민사9부는 앞에서 정리한 대로 김 씨의 유서가 가짜인 것을 인정했다.
정치적인 논란을 떠나, 유족들이 재산 때문에 김씨 유서를 조작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정수장학회를 빼앗겼다며 돌려달라는 것도 진정성이 의심받게 된다.
정수장학회의 총자산은 238억 원으로, 지금도 부산일보 주식 100%와 MBC 주식의 30%를 갖고 있다.
2003년 노무현 정부는 과거 정권의 비인륜적 사건을 조사하겠다며 2005년 5월 국회에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약칭 과거사법)'을 만들게 하고, 그해 연말 4년 한시(限時)기구로 '진실화해위원회'를 출범시켰다. 국가정보원은 따로 '과거사위'를 조직했다. 유족들의 청구에 따라 국정원 과거사위는 김지태 씨 재산 헌납 과정에 대해 조사했으나 그러나 박 정권이 강탈했다는 마땅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고, 유족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정권이 빼앗아간 것은 아니라고 결론 내린 것이다. 오히려 재산헌납으로 처벌을 면하고, 김지태가 계속 기업을 운영하게 됐다는 의견이 많았다. 사법처리를 받게 된 대기업 회장들이 수천억 원을 사회에 헌납하고 풀려난 것과 비슷한 경우라는 것.
그러나 2007년 5월 29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장학회가 박정희 정권에 강제헌납했다고 볼수없다고 하였다..
[1] 노무현은 중학생 시절 김지태의 부일장학회 지원을 받았고, 변호사 때 김지태 유족의 상속세소송 변호를 맡았다. 이 때문에 '친일재벌 일가의 변호를 해 준 사람이 친일 단죄를 떠벌리냐'는 비판을 받은 것. 이 불똥은 현재 당시 같은 법무법인에 몸담고 있던 훗날의 대통령에게도 튀었다.#[2] 조부 김채곤은 통도사 신도회장까지 지냈다.[3] 이 5년이 친일 의혹의 반론으로 주로 제기되는데 일제시대 엘리트 인물들 중 민간 분야에서 10년 근속은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이는 언론인 등 대다수가 그러하다. 따라서, 당시 5년 경력은 현재와 판이하게 다르다고 할 수 있는 짧지 않은 기간이다.[4] 이 당시 흥분한 시민들이 김지태의 집으로 몰려가 소란을 피우고 심지어 똥물을 뿌린 일이 있다. 당시 부산의 군수 기지사령관 박정희가 경리참모였던 박태준을 시켜 헌병 1개 중대를 배치해 김지태 집을 보호해 주었다.[5] 애초에 반민특위에서도 단순한 경력자는 처벌 대상에 놓지 않았다.[6] 당시에 일본인도 1만평 이상 불하받기 힘들었다. 일제가 설치한 조선 식산은행 정보에 따르면 농업 대부는 15정보(약 45000평) 이상의 지주계급에게만 한정하였고, 토지 개량 사업을 위한 국고 지원금은 30정보 이상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위에 언급되어 있듯 김지태 집안은 부호였기에 이것이 가능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일제에 비협조적이었다면 이런 혜택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점을 가만하면 김지태 본인이나 그의 집안 성향이 어땠는지 안 봐도 잘 알만하다.[7] 더구나 김지태는 교장의 추천을 받고 동척에 입사했다. 사회주의 단체 회장까지 된 사람을 공립학교 교장이 추천 한다는 건 애초에 말이 안된다.[8] 문제는 이 부산일보는 정부 헌납 당시 부채율이 800% 에 이르는 빚더미를 안고 있었다.[9] 한진그룹 전신인 한진상사의 조중훈 대표가 최고상, LG그룹 전신인 반도상사의 구자경 사장이 동탑, 대우그룹 창설자인 대우실업의 김우중 사장이 철탑산업훈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