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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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브라질의 前 축구선수다. SE 파우메이라스의 원클럽맨이며 오베르당 카티니, 발지르 지모라이스 에메르송 레앙과 함께 파우메이라스의 4대 골키퍼로 꼽힌다. 국가대표에서는 브라질의 한일 월드컵에서 주전 골키퍼로 활약하며 브라질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브라질 역대 최고의 골키퍼 중 하나로 평가 받는다.[1] # 국가대표 경력을 본다면 비록 월드컵 우승 멤버였다는 이유로 지나치게 후한 평가를 받고 있다는 말도 나오고 있고 또한 국대에서 서브로 지낸 기간이 훨씬 긴 선수였다. 그가 뛰던 기간 브라질 국대가 우승한 국제 대회 중 한일 월드컵을 제외한 모든 대회의 주전 골키퍼는 지다였다. 물론 마르쿠스가 최고의 골키퍼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 중 큰게 바로 클럽 커리어다. 후술할 프리미어 리그의 아스날 FC의 제안을 거절하고 세리 B로 강등당한 파우메이라스의 상황을 보면 매우 처참한 상황에도 팀을 위해 묵묵히 뛰며 돈 대신 명예를 선택했고 프로 커리어 내내 파우메이라스를 위한 헌신 때문이기도 하다.
2. 선수 경력[편집]
2.1. 클럽 경력[편집]
2.1.1. SE 파우메이라스[편집]
1992년에 SE 파우메이라스에서 데뷔했다. 1999년부터 주전 넘버원으로 활약하게 된다. 주전이 된 해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8강전에서 라이벌 SC 코린치안스를 상대로 승부차기에서 2번 막아냈고 마우리시우 아슬리니는 단 한 차례도 못 막으며 승부차기에서 4:2 승리를 이끌었다. 결승 아소시아시온 데포르티보 칼리전에서 또 다시 승부차기로 돌입했는데 여기서도 활약하며 파우메이라스가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거머쥐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골키퍼인데도 불구하고 MVP를 차지한 것을 보면 얼마나 대단한 활약을 했는지 알 수 있다.
2.1.1.1. 아스날 FC 이적 사가[편집]
2002년에 월드컵에서의 맹활약으로 데이비드 시먼의 대체자를 구하던 아스날의 제의를 받았고, 잉글랜드에 온 뒤 사인까지 앞두고 있었다. 즉 계약 조건, 이적료 등 세밀 사항은 모두 합의했고 선수 본인이 사인만 하면 사실상 오피셜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런던에서 자취를 감추고 결국 계약은 성사되지 않았다.나는 아스날의 제안을 받아 런던으로 갔지만, 파우메이라스가 강등 후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고 나는 부상으로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나는 아스날에 입단할 기회가 있었지만 파우메이라스 팬들에게 구단을 사랑한다고 한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나는 많은 선수들이 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아스날과) 장기계약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 계약은 5년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서 나는 클럽에 적응할 수 없다고 구단에 말하고, 임대 요청을 하고, 여전히 구단의 돈을 벌었다. 물론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아르센 벵거와 공개적으로 대화를 나눴다. #
2.1.2. 이후[편집]
2012년 1월 4일에 38살이라는 나이와 잦은 부상 등의 이유로 현역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2012년 1월 14일 AFC 아약스와의 친선 경기를 통해 은퇴식을 치렀다. 여담으로 관중들이 플래카드의 동작은 마르쿠스의 선수 시절 세레머니를 기념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기는 파우메이라스가 1:0으로 승리했다. #
19년간 팀에서 활약하며 532경기 출전 기록을 갖고 있다. 그리고 현재까지 아데미르 다기아, 자우마 산투스와 더불어 팬들에게 위대한 레전드로 추앙받고 있다. 그리고 선수 생활 중 대부분 사용했던 12번 역시 2016년까지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SE 파우메이라스와 함께 27승, 21세기 일반 경기에서 182승으로 가장 많은 승을 기록한 선수였으며, 2021년에는 각각 웨베르통과 두두가 이 기록을 깼다.
2.2. 국가대표 경력[편집]
1999년 11월 13일에 스페인과의 친선전을 통해 국가대표팀에 데뷔했다. 1999 코파 아메리카와 1999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는 지다와 호제리우 세니에 밀려 서브에 머물렀으나, 2001년부터 브라질의 넘버원으로 자리 잡으며 2001 코파 아메리카에서 주전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이후에는 다시 지다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었고, 2005년 10월 6일에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그런데 갑자기 2006 독일 월드컵에 부상에서 회복하고 있는 상태여서 출전을 할 수 있다고 말하며 대기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결국 최종 명단에 탈락했다.
2.2.1.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편집]
2002년 FIFA 월드컵에서는 1번을 배정받아[2] 브라질 대표팀의 주전 골키퍼로 활약하게 되었다.
결승 독일전에서 전반 9분에 베른트 슈나이더의 슈팅을 막았고 특히 후반 3분에 올리버 뇌빌의 강한 프리킥을 가까스로 막아내며 실점을 면했다. 그리고 호나우두의 멀티골 후 후반 37분 올리버 비어호프의 슈팅을 막아내며 추격골을 허용하지 않았고 그리고 그대로 스코어를 2:0으로 유지한 상태에서 경기가 종료 되며 우승했다. 후에 말 하길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에게 손목 부상 사실을 숨긴 채 토너먼트 경기를 치렀다고 한다. #
3. 플레이 스타일[편집]
승부차기의 달인이며 통산 승부차기에서는 33개를 선방했다. 그리고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역사상 가장 많은 페널티 선방인 11개를 기록한 골키퍼다.
4. 여담[편집]
- 라이벌에게도 외향적이고 선량한 방식으로 도발을 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파우메이라스의 팬 뿐만 아니라 라이벌 SC 코린치안스 등의 팬들에게도 존경을 받는 선수다. #
기사 첫 줄이 "머리가 일찍 빠져서 노안이다.(웃음)"이다.물론 선수 시절 도발을 아예 안 한 것은 아니고 가끔씩 트래시 토크를 했던 것으로 보이며 현재는 그래도 은퇴를 해서인가 가끔식 상대가 누구든 라이벌이 졌을때, 파우메이라스가 이겼을 때 라이벌을 자극하기 위해 도발을 한다. 37라운드에 CR 플라멩구가 산투스 FC를 상대로 가브리에우 바르보자가 PK를 실축하며 0:1로 졌을때 직접 본인의 인스타그램 계정으로 조롱글을 작성했다.
- 선수 시절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탈모다.[3] 구글에 marcos roberto silveira reis hair loss라고 치면 많이 나온다.
- 2017년 7월 20일에 심장 수술을 했고 1주일만에 퇴원했다. #
- 가톨릭 신자다.
- 유난히 상복이 없다. 1999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최우수 선수로 뽑힌 후에 리그에서는 호제리우 세니에 밀려 베스트 11에 단 한번도 들지 못했고 월드컵에서는 올리버 칸이 미친 활약을 보여 한 끗 차이로 야신상을 놓쳤었다.
- 한일 월드컵 당시 모든 경기를 출전해 당연히 한일 월드컵 당시 브라질의 경기를 확인하면 명단에 있는데 한때 한국에서는 영어식 발음인 "마르코스"라고 오기를 했었다. # 그래도 현재는 매우 유명한 사례가 있으니...
- 브라질의 대부분 축구선수가 그렇듯 자이르 보우소나루의 열렬한 지지자다. 그래서인지 역시 좌파 정당을 비난했다. 그리고 어린이의 코로나 백신 의무 접종에 대해 불안하다는 말을 했다. #
- 파우메이라스에서 믿을 수 없는 선방을 수차례 만들며 팬들은 "상 마르쿠스(São Marcos)"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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