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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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
청(淸)
파일:일월기.svg
파일:청나라 국기.svg
1368. 1. 23. ~ 1644. 4. 22.
(276년 2개월 30일)

1616. 2. 17. ~ 1912. 2. 12.
(295년 11개월 26일)


총 544년 19일

明淸時代(明清时代)

1. 개요
2. 상세
3. 역사
4. 특징
4.1. 제도
4.2. 외교
4.3. 의복
5. 외국에 끼친 영향
5.1. 한국
6. 미디어에서


1. 개요[편집]


명나라청나라 두 시대를 합쳐서 부르는 말로, 명청대() 혹은 명청제국()이라고도 한다. 1368년 1월 23일 명이 건국된 시점부터 1912년 2월 12일 신해혁명으로 청이 멸망하기까지 총 544년 19일의 기간을 말한다. 중국사에서는 근세~근대 초기를 아우르는 시대이다.

명 태조 주원장부터 청 선통제까지 28명의 황제가 다스렸다.[1]

2. 상세[편집]


한국사에서는 한 왕조의 존속기간이 상당히 길기 때문에 두 왕조를 하나의 시대로 묶어서 보기가 힘들다. 당장 고려시대조선시대를 합쳐서 보자면 918년부터 1910년까지 무려 1000년에 가까운 시대가 된다. 게다가 그 왕조 안에서도 시대에 따른 변화가 크기 때문에 흔히 전기(前期)와 후기(後期)로 나누어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사에서는 두 개 이상의 왕조를 한 시대로 묶어서 보는 게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다. 비단 명청시대 뿐이 아니라 한 왕조의 수명이 짧은 중국 역대 왕조 특성상 위진남북조 시대수당시대 등 여러 왕조를 하나의 시대로 묶어서 보고 있다. 다만 수당시대는 수나라가 너무 단명을 했기 때문에 당나라 역사에 흡수된 것 뿐이며, 수나라와 당나라는 건국 세력 자체가 같은 관롱집단이었기 때문에 구분하기가 더욱 힘든 부분이 있다.[2]

명나라한족 국가, 청나라만주족 국가였다는 점에서 민족의 차이가 있었고, 그만큼 언어의식주, 문화의 차이도 크다. 명이 만 276년, 청이 만 295년을 존속했으니 둘 다 중국사에서는 상당히 장수한 왕조이기도 하다. 위의 사례들처럼 왕조가 짧은 경우면 몰라도 명청시대는 한 시대로 묶기에는 꽤 긴 시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명나라와 청나라를 명청시대로 한 데 묶어서 부르는 이유는, 가장 큰 이유는 세계적으로 근세(近世)라는 역사적 시간 구분을 대략 14세기에서 18세기까지의 기간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 근세라는 시간적 범위 안에 명나라와 청나라가 들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근세란, 중세근대의 사이, 그러니까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대인데, 동양에서는 몽골 제국의 붕괴를 보통 중세의 끝자락으로 보며, 이 근세는 산업혁명 이후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이 도래하고 신문물이 들어오는 시기에 끝이 난다. 근대 자체는 동양의 전통적 가치관이나 생활양식이 무너지고 급격히 서구화가 시작되는 시점이라 명확히 구분된다는 특징이 있다.

세계적으로 보면 근세가 시작되는 시점인 14세기 초부터 소빙하기가 시작되며 농작물의 흉년이 들고 민심이 이반되어 많은 국가가 위기를 맞았다. 특히 무지성으로 확장을 해대던 몽골 제국 역시 예외가 아니었는데, 흉년은 드는데 다스려야 할 영토는 너무 넓고 백성들은 많으니,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것이 바로 홍건적의 난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명나라가 건국되기에 이른다. 비슷한 시기에 한국 역시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이 세워졌으며, 일본에서는 가마쿠라 막부가 무너지고 무로마치 막부가 세워지는 등 전세계적인 혼란과 정권 교체가 발생했다. 동양 3국의 근세 국가는 이렇게 정립되었다.

이 시기 국가의 특징은 기존에 남아 있던 봉건제의 요소가 완전히 무너지고 완고한 중앙집권제를 바탕으로 강력한 공권력을 지녔다는 점이다. 명나라의 행정체계는 관료제 성향이 특히 강하였고, 청나라 역시 명의 제도를 이어 받아 관료제가 강하게 작용했다. 이는 동 시대에 존재했던 조선에서도 보이는 공통적인 특성이다. 즉, 문화나 다른 것은 몰라도 명나라와 청나라는 국가의 기본적인 틀 자체는 같은 시대로 묶을 만큼 비슷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랜 시간 분열되고 합쳐지기를 반복하던 중국 역사에서 거의 고스란히 통일제국을 인수받은 것도 상당히 드문 일이기도 하다. 청나라가 베이징을 점령한 이후에도 명의 잔존 세력들은 남명을 만들어 약 18년 간 버티긴 했지만 그마저도 실질적으로 유지한 기간은 몇 년 되지 않는다.

특히 청나라는 수도를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고 명의 수도였던 베이징을 그대로 사용하였는데, 이례적으로 궁궐도 새로 짓지 않고 명나라 때 쓰던 자금성을 그대로 사용한다. 이러한 점 때문에 청이 명을 계승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청 또한 근본적으로 유교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았으므로 명의 제도나 정책 등을 상당 부분 그대로 이어 받아 보완하며 사용하기도 했다. 명나라 초기에 만들어졌던 제도는 훗날에 더 보완이 되거나 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그것이 청이 망할 때까지 거의 500년을 존속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원명교체기와 대비되는 점은, 원나라가 북쪽으로 쫓겨 올라갔어도 거의 명이 멸망하기 직전까지도 살아 있었고, 원이 망해서 한족들이 정권을 인수받은 것이 아니라, 이민족이 물러가고 다시 한족의 나라를 세웠다는 점에서 원나라와 명나라는 같은 시대에 묶일 수 없다는 점이다.

또, 원나라가 중국을 지배하던 동안에 한족과 몽골족의 동화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몽골족은 철저한 계급제를 시행하며 아예 한족과 몽골족이 섞일 만한 여지를 원천봉쇄를 해버렸고, 명나라가 세워진 후에는 또 중국에 남아 있던 몽골족의 문화를 완전히 말살시켜버렸다. 이런 이유로 원과 명은 서로 다른 시대라는 느낌이 강하며, 이때문에 결과적으로 원나라와 명나라 두 왕조는 보통 원명시대로 묶이지는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청은 아예 명을 멸망시키고 거의 그 정권을 인수 받다시피 했고, 그 과정에서 춘추전국시대처럼 분열의 시기가 길었던 것도 아니고, 원나라만큼 철저한 분리주의도 아니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동화가 빨리 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는 한족 백성들에게 만주족의 의복이나 변발 등을 강요하기도 했으나, 반대로 명의 제도나 문화 중 본받을 것은 본받으며 본인들 스스로도 한족에 동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청나라 말기로 가면 현재는 만주어가 거의 사라졌을 만큼 아예 한족에 동화가 되어버렸고, 청의 마지막 황제였던 선통제는 만주어를 거의 할 줄 몰랐다고 한다.

그렇게 300년에 가까운 긴 시간을 거친 후에 비로소 한족과 만주족은 거의 구별 없이 한 국민 집단으로 융화되었으며, 명청시대를 거치며 만들어진 문화가 지금의 중국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위와 같은 여러가지 이유로 명나라와 청나라는 하나의 시대로 묶이게 되었다.

3. 역사[편집]



3.1. 원말명초[편집]


13세기 후반, 14세기 초중반 무렵에는 소빙하기가 시작되며 흉년이 이어졌고, 대규모로 민심이 이반되며 원나라는 급격히 중국에 대한 통제를 잃어 갔다. 또한 한족은 원나라의 지배 하에 굉장한 억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반발심이 대단했다.

이런 와중인 1351년, 황하가 물길이 바뀌자 원나라의 승상이었던 토크토아가 물길을 원래대로 바꾸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다른 강도 아니고 황하의 물길을 바꾸는 것인만큼 백성들의 불만이 쌓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상황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던 중백련교의 교주였던 한산동은 마침내 지금이 때라고 생각하고, 농민 출신이었던 유복통과 손을 잡아 자신이 새로운 중국의 황제가 되기로 결심했다.

한산동은 자신이 송 휘종의 8세손이라는 선전을 하고 송나라의 재건을 선언하며 드디어 홍건적의 난이 터졌다. 그러나 한산동은 낌새를 눈치 챈 수령에 의하여 살해 당하고, 홍건군은 동계홍건군과 서계홍건군으로 분열되었다. 동계홍건군의 수장이었던 유복통은 송나라의 후신을 자처하며 한산동의 아들인 한림아를 소명제(小明帝)로 옹립하였다. 서계홍건군은 천완국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그 수장인 서수휘가 스스로 황제를 칭하였다.

1357년의 홍건군은 북벌을 단행하여 원나라의 여름수도였던 상도(上都, 지금의 내몽골 자치구 시린궈러맹)까지 진격하였고, 중원을 거의 다 수복할 정도였지만, 곧바로 원나라의 반격을 받아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고, 고려까지 밀려 들어갈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었다.

결국 1363년 2월에 유복통이 전사하면서 동계홍건군은 곽자흥이 이끌게 되었으나, 끝내 곽자흥 또한 전사하면서 1366년에 이르러서는 동계홍건군의 송나라는 멸망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앞선 1361년에는 서계홍건군 내에서 내분이 일어나 진우량이 수장이었던 서수휘가 살해 당하며 천완국도 멸망하고 말았다.

이후 서수휘를 살해한 진우량이 (진한)을 건국하였고, 명옥진하나라(명하)를 세웠으며 그 밖에 홍건적에 속하지 않은 방국진, 장사성, 진우정 등의 세력이 일어나 서로 싸우며 중원은 혼란에 빠진다.

이렇게 한족 국가의 재건은 무위로 돌아가나 싶었지만, 곽자흥의 수하였던 주원장이 소명제 한림아를 데리고 탈출하여 舊 동계홍건군 세력을 흡수하였고, 홍건군의 지도자로 추대된다. 이후 파양호 대전에서 승리한 후 1364년, 최대의 적이었던 진우량의 세력을 격파하고 그 영역을 흡수한 후에는 오왕(吳王)이 되어 중서성(中書省)을 설치하였고, 1367년에는 원나라의 위협에서 한림아를 보호하기 위해 난징으로 모시고 오던 중에 주원장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것으로 추정되는 침몰 사고로 한림아가 익사하고 또 다른 적수였던 장사성이 투항하면서 사실상 남부 지방의 패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이윽고 1368년, 주원장이 황제로 즉위하고 명나라를 건국하면서 명청시대 544년의 서막이 올랐다.

명나라는 건국 직후 이후에도 북벌을 단행하며 군벌들을 계속해서 흡수해 갔고, 명군이 원의 수도였던 대도를 함락시키며 원나라는 북쪽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이로써 잠시간의 혼란기가 끝나고 중원이 통일된 것이다.

명나라는 이 무렵 수도를 난징으로 정하였다. 이후 홍무제는 공신들을 대거 숙청하고 제도를 정비하며 명나라의 기틀을 닦았고, 홍무제가 사망한 후 홍무제의 손자인 어린 건문제가 명나라 제2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홍무제의 4남 연왕 주체(朱棣)가 정난의 변을 일으켜 건문제는 실종되고 주체가 보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명나라의 제3대 황제, 영락제였다.

영락제는 명청시대에서는 훗날 청나라강희제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한국사로 따지면 조선의 기틀을 닦은 태종이나 세종에 대응하고, 강희제는 조선의 중흥을 이끈 영조정조에 비견되는 인물이다.

영락제는 아버지 주원장처럼 신하들을 대거 숙청하며 폭군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지만, 북방 영토를 확장하여 국경을 안정시키고 제도를 정비하는 한편, 지방 통치 제도를 확립하였다. 이때 만들어진 제도가 거의 청말까지 계승되며 명청시대를 관통했다.

그리고 영락제는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천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영락제 시절에 만들어진 자금성은 명청시대의 궁궐로 500년 간 사용되었다.

3.2. 번영[편집]


명나라는 약 2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안정적으로 중원을 통치하였다. 6대 정통제 때는 끊임없이 북방의 위협을 받다가 토목보의 변으로 황제가 오랑캐에게 납치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 잠시 혼란기에 빠졌던 적도 있으나, 성화제홍치제 시절에는 다시 안정을 되찾는다.

그러나 이른바 홍치제 이후로는 이른바 명 4대 암군의 치세가 이어지며 명나라는 빠르게 쇠락의 길을 걷는다. 이 즈음부터는 변방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어 다음 왕조인 청나라의 전신이 되는 여진족이 세력을 키우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3.3. 명말청초[편집]



3.4. 강건성세[편집]



3.5. 청말[편집]



4. 특징[편집]


청나라는 300년에 걸쳐 한족을 동화시키려고 무진 애를 썼다. 청대 내내 한족들은 반청복명 운동을 일으켰고, 때로는 유화책으로, 때로는 강경책으로 한족들을 달랬다. 그만큼 명나라의 색채를 지우기란 청나라에게 두고두고 숙제와도 같은 일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상당 부분 한족의 문화 전반에 만주족의 문화 요소를 침투시키고 원래 한족의 문화를 대체하기는 하였으나, 청말까지도 명나라의 물을 완전히 빼지는 못 하고 도리어 본인들이 한족에 동화가 되어버렸다.

명대에 생겨난 신사(紳士)라는 지식인 계층은 조선사대부처럼 나라를 지탱하는 근본이기도 했다. 이 신사 계층은 한족 집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청나라 대에 가서도 청나라가 기본적으로 유교 제도로 운영됨에 따라 그대로 청을 떠받치는 집단으로 계속되었다. 신해혁명 이후에도 이 신사 계층은 사라지지 않다가 문화대혁명 때 가서 자취를 감춘다.

4.1. 제도[편집]


이 시대부터는 일세일원제(一世一元制)라고 하여 한 황제의 치세 동안은 한 번 정한 연호를 바꾸지 못 하게 하였다. 이전에는 한 황제의 치세 동안에도 연호가 계속해서 바뀌었다. 연호가 바뀌는 이유는 국가에 재앙이 닥치는 데에 나쁜 연호가 영향을 끼쳤다는 다소 주관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그냥 황제 마음대로 바꾸는 일도 다반사였다. 이렇다 보니 백성들도 불편하고, 국가적으로도 행정력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중국의 연호는 중국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과 사대관계를 맺은 주변국들도 사용하는 것이었으니, 주변국들까지 싹 다 연호를 바꿔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일세일원제가 시행되며 황제들은 시호 대신 연호를 제호로 삼아 불리게 되었다. 예를 들면 홍무(洪武)라는 연호를 사용한 황제는 홍무제(洪武帝)라고 불리는 식. 이는 청나라 대에도 계속되었고, 현대에도 입헌군주제를 시행하며 연호를 사용하는 일본에서도 메이지 유신 이후 일세일원제를 채택하게 되며 시호 대신 연호로 천황을 부른다. 메이지 덴노라던지, 쇼와 덴노라던지.

4.2. 외교[편집]


영락제 때까지만 해도 정화가 멀리 아프리카까지 항해를 하고 올 정도로 개방적이었으나, 그 이후로는 나라의 문을 걸어 잠그고 동양의 기존 조공국들과의 관계만 유지할 뿐, 먼 국가와는 통교를 하지 않았다. 이러한 기조는 주변 조공국들에게 영향을 미쳐 조선일본도 자연스럽게 서양과는 무역을 하지 않았다.

명나라가 유일하게 서양에서 관계를 맺고 있던 나라는 누에바에스파냐였다. 마카오포르투갈에게 조차하여 서로 교역을 하였다.

쇄국은 청나라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청말에 이르러 서구 열강들은 본격적으로 동양으로 침략해 왔다. 기를 쓰고 나라의 문을 열지 않으려고 애쓰던 청나라는 아편전쟁을 겪은 후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나라의 문을 열고 말았다.

4.3. 의복[편집]


명나라가 세워지며 다시 송나라 때의 한푸로 돌아갔다. 그러나 원나라의 지배 기간 동안 이미 상당 부분 호복(胡服)의 영향을 받아 송나라 때와 완전히 같지는 않았고, 고려양이 가미되어 한복과 외양이 비슷해지기도 했다. 고려양은 명이 건국되고 한참이 지난 홍치제 대에 가서야 원래 중국의 의복이 아니라는 이유로 금지되었다.

청나라 대에는 현대 치파오의 원형이 되는 만주족의 호복을 강제하면서 한푸가 거의 잊히게 되었다. 다만 황제가 입는 곤룡포의 경우 명나라 황제가 입던 곤룡포에서 상당 부분 영향을 받았다.

5. 외국에 끼친 영향[편집]


명청교체기 이후 많은 수의 한족들이 동남아조선 등으로 피난을 갔다. 보트 피플의 원조인 셈이다. 동남아로 이주한 사람들은 현대의 화교가 되었으며 동남아 일대의 경제를 꽉 쥐고 있는 상류층이 되었다. 특히 현재의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이 화교의 세가 가장 강한 국가들이다.

명나라의 학자들은 조선에 와서 조선인들의 의복을 보고 "이것이 선왕의 법복이다"라며 울기도 했다고 한다.

5.1. 한국[편집]


명청시대 때 한국은 대략 조선시대였다. 대략 조선 전기가 명나라, 조선 후기가 청나라에 대응된다. 1368년에 명나라가 건국되었고, 그보다 약 24년 뒤인 1392년조선이 건국되었으니 대충 명청시대와 조선시대가 비슷한 시기에 시작된 것이다.

임진왜란 지원의 여파로 명나라는 임진왜란 종전 후 급격하게 쇠퇴했고, 조선 역시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조선 전기의 끝을 대략 임진왜란의 종전 이후로 보는데, 그로부터 약 20년 후 청나라가 건국되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끝난 지 46년 후에는 명나라가 멸망한다. 그러니 전기와 후기의 구분도 얼추 맞는 것이다.

조선은 건국하면서부터 명과 사대관계를 맺었고, 그건 중원을 청나라가 차지하고 나서도 사대관계는 청나라로 계승되어 계속되었다. 특히 조선왕조는 청나라보다는 명나라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 대명률을 참고하여 법을 시행했고, 이 시기 중국으로부터 곤룡포를 하사 받기도 했다.

명청교체기에도 조선은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싶어 했으나 중원의 패권을 노리던 후금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조선을 자신들의 우방으로 삼고 싶어 했다. 광해군 때부터 이러한 압박은 계속되었지만, 조선은 이중외교 노선을 취하며 번번히 무마시켰다.

명나라를 치기 전, 후금은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후금 입장에서는 조선을 굴복시키지 않고서는 명나라를 칠 수가 없었다. 행여 조선이 명나라를 도와 후방에서 공격하면 후금으로서는 그야말로 사면초가에 처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후금의 목적대로 병자호란은 후금의 승리로 끝나면서 조선은 어쩔 수 없이 굴복하고 만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명이 정말 망해버려 명에 대한 의리는 영영 지킬 수 없게 된다.

후금은 조선이 기존에 명의 연호를 쓰던 것을 폐지하고, 후금의 연호를 쓰게 하였으나, 조선은 후금에 보내는 문서에만 후금의 연호를 쓰고, 국내 문서에서는 명나라의 마지막 연호였던 숭정(崇禎)을 계속 사용하였다. 명나라가 망하고 나서도 숭정후(崇禎後) 234년으로 쓰는 기상천외한 일도 벌어졌다.

1910년대한제국한일강제병합 조약을 맺게 되어 결국 멸망하게 되고, 청나라는 이보다 2년 늦은 1912년신해혁명으로 멸망하면서 끝나는 무렵도 얼추 맞게 되었다.

6. 미디어에서[편집]


한국 사극에서 現 대한민국의 바로 앞 시대인 조선시대를 많이 다루는 것처럼, 중국 사극에서도 이 시대를 특히 많이 다룬다. 그것도 청나라를 배경으로 한 사극이 많이 나오는데, 남자 배우들의 경우는 비주얼을 엄청나게 깎아먹는 변발을 필수적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별로 선호하지는 않는 편이다.

명나라 대를 다룬 사극의 경우, 당시 고려양의 영향을 받은 한푸가 등장하여 중국인들은 한복이 한푸를 베낀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아졌다. 당연히 사실이 아니며, 고려양 문서만 봐도 알겠지만, 명 대의 한푸는 오히려 한복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청나라 이래 오랜 시간 치파오를 입느라 한푸가 낯설어졌기 때문에 생긴 오해라고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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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슷하게 동시대에 존재했던 조선왕조 역시 총 28명의 임금이 다스렸다.[2] 당장 수 문제의 황후였던 문헌황후부터가 당 고조의 이모였고, 수 양제와는 사촌지간일 정도로 인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