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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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陳友定
(? ~ 1368)
원나라 말기의 군벌. 다른 이름으로는 진유정(陳有定)이 있으며, 자(字)는 안국(安國)이다. 복건성(福建省)을 장악하여 강력한 세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주원장(朱元璋)에게 토벌되었다.
2. 초기 생애[편집]
원래는 복청(福清)[1] 출신이었으나 나중에 정주(汀州)의 청류현(清流縣)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살았다.
진우정은 원래 한낱 농부에 불과했지만 사람됨이 침착하면서도 용맹했다. 그리고 그는 협객(俠客)의 기질이 있어서 떠돌아다니기를 좋아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면서 복종했다.
3. 공을 인정받고 출사하다[편집]
지정(至正) 연간[2] 에 정주부판(汀州府判) 채공안(蔡公安)이 도적을 토벌하기 위해 청류현의 장정(壯丁)들을 모집했는데, 진우정이 응하여 그를 따라나섰다. 채공안은 진우정이 하는 말을 듣고 그를 비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그에게 장정들을 모집하는 일을 맡겼고, 진우정은 마을의 장정들이 모이자 황토현(黄土縣)에 산채를 쌓아 적들을 순찰했다. 뒤에 도적들의 산채를 모두 격파하는 데에도 공을 세우니 진우정은 청류현윤(清流縣尹)[3] 으로 임명되었다.
4. 진우량의 군대를 격파하다[편집]
진우량(陳友諒)이 그의 부장(副將) 등극명(鄧克明) 등을 보내와서 정주, 소주(邵州)를 함락시키고 삼관(杉关)을 노략질하자 복건행성(福建行省)에서는 진우정의 관직을 정주로총관(汀州路總管)으로 높이고 병사들을 지휘하게 하여 침략해온 도적들을 막게 했는데, 진우정은 황토현에서 등극명과 격돌하여 그를 크게 깨드려 달아나게 했다.
다음 해가 되자 등극명이 다시 공격해와서 정주를 무너뜨리고 건녕(建寧)[4] 을 공격했는데, 그 기세가 대단하고 상황이 급박하여 건녕의 수비장 완자첩목아(完者帖木兒)는 진우정에게 편지를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진우정이 이에 따라 지원군을 이끌고 건녕에 도착하여 싸울 때마다 적들을 격파하니 점령당했던 고을들을 모두 되찾을 수 있었다. 등극명을 격파하는데 진우정의 공이 으뜸이었으므로, 진우정은 복건행성의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승진한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조정에서 진우정을 평장정사(平章政事)로 높이니 진우정은 복건행성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관청이 있는 연평(延平)에 부임하여 복건 전체를 다스리게 되었다.
5. 강압적인 정치를 펴다[편집]
진우정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고관대작이 되었지만 그는 농사와 품팔이로 생계를 유지해왔던 사람이었기에 글을 전혀 읽을 줄 몰랐다. 그 때문에 명령을 내려 복건행성의 모든 고을에서 글을 가르치는데 뛰어난 명사(名士)들을 추천하도록 했는데, 민현(閩縣)의 정정(鄭定)과 여주(廬州)의 왕한(王翰)이 뽑히니 진우정이 그들을 초청하고 자신의 밑에서 일하게 했다. 그들에게 매일 가르침을 얻으니 문학과 역사를 대강이나마 섭렵할 수 있었고, 가르침을 받은 직후에는 다섯 글자와 짧은 시를 날마다 부지런하게 익혔는데 모두 진전이 있었다.
그렇게 글을 배워서 어느정도 고관으로서의 권위를 갖출 수는 있었지만,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대해서는 잔혹하였다. 휘하의 관리들 중 법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죽음으로써 죗값을 치르게 하니 죄를 짓고 도망치는 자들이 끊이지 않았는데, 장주(漳州)의 수비장 나량(羅良)이 진우정의 가혹함을 불평하여 글을 써서 진우정을 꾸짖었다.
군(郡)과 현은 나라의 영토이고, 정무를 주관하는 관리들은 모두가 군주의 신하들이라고 할 수 있소. 곳간들은 조정의 밖에 있을 뿐이지 모두 나라의 관청들과 같소. 족하(足下)께서는 지금 고을들을 자신의 집처럼 여기고 관청의 관리들을 노비처럼 대하여 내몰고 있으면서 곳간들을 멋대로 점유하고 있으니, 비록 족하의 명성이 나라에 떨쳐져있긴 하지만 족하가 일삼는 전횡은 아주 특출난 것 같소. 족하께서는 실로 곽자의의 위세를 누리려는 탐욕과 조맹덕(曹孟德)처럼 사람들을 억압하려는 마음을 모두 가지고 계신 것 같은데, 본인은 어째서 이를 모른단 말이오?
6. 원나라에 충성하다[편집]
이 무렵 장사성은 절서(浙西), 방국진은 절동(浙東)을 점거하였는데, 그들이 비록 원나라의 편에 붙긴 했지만 곡식을 제때에 보내지 않아서 강남 지역의 곡식을 싣은 선박들은 해를 넘겨도 대도(大都)에 도착하지 못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에 진우정은 바닷길로 10만 석의 곡식을 꾸준히 운반하여 대도로 보내니, 바닷길이라 다른 방법들보다 더욱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대략 13~14일만에 보낼 수 있었고, 황제가 매우 기뻐하며 글을 내려서 진우정을 칭찬하였다.
주원장이 무주(婺州)를 점령하게 되자, 진우정과 경계가 맞닿게 되어 격돌이 불가피해졌다. 먼저 공격한 쪽은 진우정으로, 그가 먼저 처주(處州)를 침략했지만 그곳을 지키던 참정[5] 호심(胡深)에게 격퇴당했다. 호심은 더 나아가 역습을 가하여 포성(浦城), 송계(松溪)를 함락시켰고 진우정의 부장 장자옥(張子玉)을 붙잡았다. 그는 또 주량조(朱亮祖)와 합세하여 건녕을 공격해와서 성 주변에 설치된 울타리들을 부수고 있었다. 진우정은 부장 완덕유(阮德柔)에게 4만의 병사들을 주어 금강(錦江)을 막게 하였으며, 자신은 군대를 이끌고 몰래 호심의 뒤를 포위하여 그가 달아날 길을 끊었다. 태세가 갖춰지자 진우정이 아장(牙將) 뇌정(賴政) 등을 선봉에 세우고 호심의 군대를 뒤에서 들이쳤으며, 완덕유 또한 진우정에 호응하여 호심을 공격하였다. 호심은 이 싸움에서 패배하여 진우정에게 살해당한다.
7. 주원장에게 패배하다[편집]
주원장이 방국진을 제압한 뒤 진우정을 토벌하고자 하여 장수들에게 명령을 내리니, 호정미(胡廷美)와 하문휘(何文輝)에게는 강서(江西)에서 출발하여 삼관을 치게 했고, 탕화와 요영충(廖永忠)에게는 명주(明州)의 바닷길로 나아가서 복주(福州)를 치도록 했으며, 이문충에게는 포성에서 출발하여 건녕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는 한편 자신은 연평에 사신을 보내서 진우정에게 항복을 받아내고자 하였다.
태조의 사신이 도착했을때 진우정은 술자리를 열어 자신의 부하들과 빈객(賓客)들을 모아놓고 있었는데, 모두가 보는 앞에서 주원장이 보내온 사신의 목을 베어버렸다. 진우정은 사신의 목을 쥐어 그 피를 술독에 떨어지게 했고, 그렇게 피가 섞인 술을 부하들과 나누어 마셨다. 진우정은 술을 즐거이 마시며 자리에 모인 부하들에게 맹세했다.
그러고는 술자리가 끝나자 복주로 향하여 병사들을 이끌고 성 주변에 보루를 쌓았다. 보루의 길이는 50보를 넘었으며, 복주성의 각 성문마다 쌓아놓고는 병사들에게 굳게 지키도록 했다.우리들은 모두 원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니, 죽을 각오로 적들을 막지 않는 자가 있다면 내가 그자를 찢어죽이고 그 처자식들까지 같이 죽여주겠소.
얼마 못가서 삼관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됨에, 진우정은 급히 이끌고 있던 4만의 정예병들을 둘로 나누었다. 한쪽은 동첨(同僉) 뇌정손(賴正孫), 부추밀원사(副樞密院事) 사영보(謝英輔), 원판(院判) 등익(鄧益) 등의 장수들에게 넘겨주어 복주를 지키게 했고, 자신은 남은 2만을 거느리고 돌아가 연평을 지켰는데, 이로써 두 군대로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게 하여 적을 막고자 하였다.
탕화 등이 수군을 이끌고 복주의 오호문(五虎門)으로 들어갔을 때, 탕화는 우선 사람을 보내서 복주의 수비대장인 평장[6] 곡출(曲出)에게 항복할 것을 권유했지만 곡출은 탕화가 보내온 사신을 죽여버리고 전투를 벌였다. 탕화의 군대가 성 주변의 암벽들에 올라와서 성을 포위하려고 하자 곡출이 병사들을 끌고 성을 나와서 요격했지만 되려 패배하였고, 곡출의 패배를 본 참정 원인(袁仁)은 밤중에 몰래 사람을 보내서 탕화에게 항복의 뜻을 전함과 동시에 내응을 약속했다. 탕화는 그 기회를 틈타 공성을 위해 축조했던 대(臺)들에 병사들을 집결시키고 복주성의 남문(南門)을 공격하니 그의 병사들이 성벽에 붙어서 남문을 기어올랐는데 그 광경이 마치 개미 떼 같았다.
1367년 12월 28일[7] , 남문이 함락되어 복주가 마침내 무너졌다. 곡출을 비롯하여 성을 수비했던 대부분의 장수들은 인수(印綬)와 처자식을 챙기고 성 밖으로 달아나 숨어버렸다. 그 외에 뇌정손과 사영보는 성의 서쪽 문을 열고 빠져나와서 연평으로 도망쳐왔다. 항복을 거부하고 죽은 장수들도 있었는데 등익은 끝까지 수문(水門)을 지키면서 탕화의 군대와 맞섰지만 탕화에게 살해당했다. 참정 윤극인(尹克仁)은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했으며, 선정사(宣政使) 타이마(朵耳麻)는 항복을 거부하고 감옥에 갇혀서 죽었다.
복주를 지키던 장수들 중 가장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사람은 첨원(僉院) 백첩목아(柏帖木兒)였다. 그는 집의 대마루에 잡초더미를 두둑하게 쌓은 뒤 아내와 첩에 이어서 두 딸까지 모두 죽였고, 자신도 잡초더미에 불을 지른 뒤 그 속으로 뛰어들어 죽었다.
1368년 1월 21일[8] , 건녕이 호정미에게 무너졌고, 탕화는 연평으로 공격해왔다. 진우정은 지구전(持久戰)을 펼치려 하였기에 나가서 싸우자는 부장들의 말을 듣지 않고 성을 굳게 지키려고 하였는데, 부장들도 나가서 싸우게 해달라는 청을 멈추지 않으니 진우정은 그들이 배반할 마음을 품었다고 의심하게 되었으며, 그들 중 원판 소(蕭)씨를 본보기로 죽였다. 부장 유수인(劉守仁)은 죽이지는 않았으나, 그가 이끌던 병사들을 빼앗았다. 유수인은 여기에 원한을 품고 성 밖으로 달아나 탕화에게 항복해버렸다.
자연히 군대의 분위기가 험악해져 성을 빠져나와 적에게 항복하는 자들이 늘어났고, 무리를 모아서 무기고와 관청을 불태우는 자들도 생겨났으며, 심지어 적을 방비하려고 설치한 돌대포를 성 안으로 발사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 때문에 성 안에서 우레와 같은 굉음이 울려퍼졌고, 성 안에 변란이 있음을 알아차린 탕화가 군대를 이끌고 급하게 성을 공격했다. 진우정은 상황이 매우 불리해지자 그를 따르는 부하들에게 결연한 태도로 작별을 고했다.
일이 불행히도 잘못되었는데, 나는 나라의 은혜를 목숨으로 갚으려고 하오. 여러분들은 분발해 주시오.
적들은 곧바로 관청에 침입하여 진우정을 잡기 위해 달려왔는데, 그는 기절해 있었지만 목숨은 아직 붙어있었다. 진우정은 끝내 붙잡히니, 이날이 1월 29일[9] 이었다.
8.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다[편집]
기절해있는 진우정을 납치한 병사들은 물길을 통해 성의 동문을 빠져나왔는데, 하늘에서 뇌우가 쏟아지자 그 소리에 진우정이 다시 깨어났다. 진우정을 넘겨받은 탕화는 그의 몸에 형틀을 채우고 남경으로 보내서 주원장을 보게 했는데, 주원장이 그를 꾸짖자 진우정 또한 언성을 높여서 말했다.
진우정은 결국 그의 아들과 함께 남경에서 처형당했다.나라가 망하고 집안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으니 죽으면 죽는 것이지, 어째서 그렇게 말이 많느냐!
9. 가족[편집]
진우정의 아들은 이름이 해(海)로, 종해(宗海)라고도 불렸다. 말타기와 활쏘기에 뛰어났으면서도 문사(文士)들을 예의있게 대하는 등 자질이 뛰어났다. 진우정이 붙잡히자 스스로 성 밖으로 나가서 명의 군대에 붙잡혔고, 아버지를 따라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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