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애들레이드 메리 루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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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세스 로열
독일 제국 프리드리히 3세의 황후
빅토리아 애들레이드 메리 루이자
Victoria, Princess Roy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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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영어
빅토리아 애들레이드 메리 루이자
(Victoria Adelaide Mary Louisa)
독일어
빅토리아 아델하이트 마리아 루이제
(Viktoria Adelheid Maria Luise)
출생
1840년 11월 21일
영국 런던 버킹엄 궁전
사망
1901년 8월 5일 (향년 60세)
독일국 헤센 대공국 프리드리히쇼프 성
장례식
1901년 8월 13일
독일국 포츠담 평화 교회
배우자
프리드리히 3세 (1858년 결혼 / 1888년 사망)
자녀
빌헬름 2세, 샤를로테, 하인리히, 지기스문트, 빅토리아, 발데마르, 조피, 마르가레테
아버지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 공자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
형제
에드워드 7세, 앨리스, 알프레드, 헬레나, 루이즈, 아서, 레오폴드, 베아트리스
종교
성공회 (잉글랜드 국교회,신명:빅토리아)
서명
파일: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서명.png
1. 개요
2. 작위
3. 생애
3.1. 대영제국의 첫째 공주
3.2. 결혼과 육아
3.3. 가정 내의 불화
3.4. 말년
4.1. 조상
4.2. 자녀
5. 여담



1. 개요[편집]


영국빅토리아 여왕앨버트 공장녀이자 맏이.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7세의 누나. 프로이센 왕국왕비, 독일 제국의 황후이자 영국 역사상 4번째 프린세스 로열이다.

빌헬름 2세, 그리스의 소피아 왕비의 어머니이자 영국의 국왕 조지 5세, 노르웨이의 모드 왕비, 루마니아의 마리 왕비의 큰고모이다.

애칭은 비키.(vicky)


2. 작위[편집]


파일:Coat_of_Arms_of_Victoria,_the_Princess_Royal.svg.png
문장


3. 생애[편집]



3.1. 대영제국의 첫째 공주[편집]



파일:1280px-Victoria,_Princess_Royal,_1842.jpg

1842년 2세 때의 빅토리아 공주


1855년 14세 때의 빅토리아 공주[1]
빅토리아는 1840년 빅토리아 여왕과 부군 앨버트 공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들을 기대한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은 처음에는 맏이인 빅토리아 공주에게 정을 붙이지 못했으나, 이내 빅토리아 공주를 무척 사랑하게 되었다. 빅토리아 공주는 형제들 중 가장 총명했고, 당대의 지성인 중 하나였으며, 특히 아버지의 사상을 물려받아 자유주의를 지지했다.

빅토리아 여왕앨버트 공 부부는 빅토리아 공주가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항상 아쉬워했다고 한다. 여성의 승계권은 인정하지만 같은 부 또는 모 슬하의 친형제자매끼리는 남성이 여성보다 우선권을 가지는 당시 영국 왕위 계승의 법칙에 따라, 빅토리아 여왕의 둘째이자 장남인 남동생 에드워드 7세가 누나 빅토리아 공주를 제치고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다.[2][3][4]


3.2. 결혼과 육아[편집]


빅토리아 여왕은 딸을 항상 곁에 두고 외국에 시집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외교 관계를 고려한 앨버트 공의 의향으로 프로이센 왕국과의 혼약이 체결되었다. 1858년 1월 25일, 빅토리아 공주는 빌헬름 왕태제의 장남인 프리드리히 왕자와 결혼했다.[5]

1855년 약혼 당시 사진. 왼쪽에 서있는 남자가 프리츠 왕자, 가운데 앉아 있는 사람이 빅토리아 여왕, 오른쪽에 서있는 남자가 아버지 앨버트 공, 맨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빅토리아 공주 본인이다.


파일:프리츠와 비키의 결혼식 포스터.jpg

결혼 당시 포스터


파일:The_Marriage_of_Victoria,_Princess_Royal,_25_January_1858.jpg

프로이센 왕실에서는 두 사람이 베를린에서 결혼식을 올려야 한다고 했지만, 워낙 아꼈던 딸인데다 빅토리아 여왕의 독단적인 고집까지 맞물려, 프로이센 왕실의 주장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직접 프로이센 대사를 불러 "영국 이외의 장소에서는 결혼식을 할 수 없다."고 통보해, 결국 런던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훗날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 앨리스 공주도 아버지 앨버트 공의 뜻으로 독일 헤센 대공국루트비히 4세에게 시집갔다. 그 이후로 빅토리아 여왕은 더 이상 딸들을 외국에 시집보내지 않으려 했고, 3녀 헬레나 공주, 4녀 루이즈 공주, 5녀 베아트리스 공주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결혼한 후에도 영국에서 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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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의 가족사진.[6]
1874년의 가족사진.

부부간에 금슬은 매우 좋았고, 4남 4녀를 낳았다. 프리드리히 3세 또한 아내와 마찬가지로 자유주의자였기에, 결혼 생활은 행복한 편이었다. 두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8명의 자녀 중 맏이가 훗날 독일 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는 빌헬름 2세다.


파일:프리츠, 비키 부부 결혼기념 25주년 포스터.jpg

결혼 25주년 기념 포스터


3.3. 가정 내의 불화[편집]


그러나 상대적으로 가부장적인 프로이센에서 똑똑한 자유주의자인 빅토리아는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 특히 독일의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의 정치적 대립이 심각했다고. 거기에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여자의 미덕이라고 생각한 시어머니 아우구스타 황후는 총명한 며느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급기야 빅토리아가 본인의 장남이자 아우구스타의 장손인 빌헬름 2세를 장애가 있는 왼쪽 팔을 치료한답시고 학대하다시피 하자 보다 못해서, 손자를 며느리에게서 데려와 자신이 직접 양육했고 할머니의 품에서 자란 빌헬름 2세는 부모의 성향과는 반대되는 군국주의자가 되었다. 사실 가정 내 불화의 원인은 빅토리아와 프리드리히 부부가 부모로서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다.

파일:비키와 빌리.jpg
빅토리아 황태자비와 장남 빌헬름 2세.

이런 빌헬름 2세와 빅토리아 모자의 불화는 당대에도 유명했다. 아들인 빌헬름 2세는 어머니를 반쯤 영국의 스파이로 여겼다. 심지어 간혹 '어머니' 혹은 '모후' 라는 호칭 대신 '그 (영국) 여자' 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가 사망하자마자 어머니 빅토리아가 영국 왕실의 일원들과 가족 서신이라는 명분 하에 주고 받은 반역적인 편지와 서류들을 찾아내겠다며 어머니의 처소를 폐쇄해 버리고 개인 서신까지 전부 검열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례 중 하나이다.

다만 빌헬름 2세와 빅토리아 모자의 불화는 빌헬름이 패륜아여서 그런 것이 아니라 빅토리아가 자초한 것이 매우 컸다. 특히 빅토리아는 빌렐름 2세 뿐만 아니라 다른 자식들과도 관계가 나빴다. 왜냐면 빅토리아는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상상 이상으로 엄격했던 스파르타식 육아법을 그대로 따랐던것이 문제였다. 빅토리아 왕세자비 본인이야 매우 명석하고 성실했기에 어머니의 교육을 잘 따라갈 수 있었지만[7] 그녀의 자녀들에게는 전혀 아니었고 누가봐도 잘못된 방식이었다. 게다가 빌헬름 2세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왼쪽 팔이 짧은 장애가 있었는데 빅토리아는 이를 수치스럽게 여겼고[8], 몸이 불편한 아들을 보듬어주기보다는 오히려 냉대하며 학대에 가까운 치료들을 끊임없이 행했다.

특히 빌헬름이 8살 때 빅토리아는 왕위 계승자로서 빌헬름이 뒤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몸이 불편한 아들에게 승마를 강제로 배우게 시켰고 당연히 빌헬름은 승마를 하는데 힘들어했다. 몇 번이고 떨어지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다시 제자리에 앉았고, 몇 주 뒤에 겨우 승마를 그럭저럭 잘 탈 수 있게 되었다. 이외에도 아드르이 팔을 치료한답시고 죽은 토끼의 내장에 팔을 담그게 하거나 전기 충격을 팔에다 하는 등 아들이 싫어하는 행동을 치료라고 했다.

이는 당연히 어린 빌헬름 2세에게 큰 트라우마로 남았고, 계속되는 어머니의 냉대에 어머니를 싫어하며 성격이 비뚤어졌다. 이때 받은 상처가 얼마나 컸는지 훗날 빌헬름 2세는 빅토리아에게 "제발 어머니로서의 사랑을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을 정도였다.[9] 빅토리아의 비정함은 장남 빌헬름 2세 뿐만 아니라 다른 자식들인 샤를로테 공주하인리히 왕자와도 끊임없이 갈등을 빚었고 결국 그들에게도 미움을 받으며 큰 상처를 남겼다.[10]

게다가 아내와 자식들 간의 갈등을 중재해야 하는 프리드리히 3세[11] 역시 아버지로서 막장이었는데, 자식들한테 제대로 된 관심을 주지도 않고 공처가라서 무책임하게 아내의 편만 들면서 갈등의 봉합은커녕 자식들의 상처만 더욱 커지게 했다. 결국 "아버지가 나약해서 어머니에게 휘둘린다"는 빌헬름 2세의 의심은 완전한 망상만은 아니었던 셈.

또한 대영제국프린세스 로열이라는 높은 신분과 친정의 위세 역시 빅토리아의 프로이센 궁정 생활에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일부 프로이센 귀족들은 '영국이 빅토리아를 통해 내정간섭을 한다'고 생각했고, 이는 앞서 언급된 비스마르크는 물론이고 아들인 빌헬름 2세마저 공유했던 의견이였다.

실제로 빅토리아는 정치적으로는 시아버지 빌헬름 1세와 비스마르크의 견제에 밀려 딱히 정치적으로는 친영적 행보를 드러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자녀들을 키울 때는 철저하게 영국인 가정교사의 손을 빌려 영국식 교육법을 고수하고, 주치의를 선별할 때도 독일인 의사들을 제치고 영국인 의사들을 최우선적으로 신임하는 등, 일상적인 궁정습관이나 가정생활에서는 철저히 친영국적이었다. 그나마 영국풍을 선호했던 남편 프리드리히 3세는 아내의 이런 습관들을 나쁘지 않게 여겼지만 이런 모습을 독일 귀족들과 국민들 입장에서는 곱게 보일 리가 만무했고, 이런 탓에 빅토리아는 평생 영국 여자라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재정적인 면에서도 빅토리아는 독일 궁정에서 푸대접을 받았는데 왕위계승자였던 시아버지 빌헬름 1세가 형의 뒤를 이어 왕위를 물려받고 남편 프리드리히 왕자도 정식으로 왕세자가 되어 신분이 완전히 바뀐 뒤에도 연금이 거의 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프리드리히와 빅토리아 부부가 시종한테 연유를 묻자 "전하께는 부자인 왕세자비께서 계시니까 연금을 올릴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라는 식의 대답이 돌아왔다고.(…) 이는 아들 부부가 자신과 정치 성향이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던 빌헬름 1세가 안 그래도 부유한 그들에게 연금까지 올려주면 이를 기반으로 자신의 권력에 반하는 정치 세력을 거느리게 될 것을 염려한 노골적인 견제였지만, 빅토리아가 처신을 너무 못하여 빌헬름 1세한테 크게 밉보였고 빅토리아의 신분과 재력이 독일 정계에서 어느 정도로 위협적이었는지 반증하는 일화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빅토리아 왕세자비는 왕세자의 체통에 맞는 궁정을 운영할 경비가 부족해서 지참금과 개인 재산을 써야 했고, 부부 동반이 당연한 공무 여행에서마저 공금이 안 나와서 제대로 가지 못할 지경이었다. 당연히 며느리를 싫어하여 이렇게 학대한 빌헬름 1세도 좋은 인격이 아님을 보여준다.


3.4. 말년[편집]



파일:독일 2대 황제 부부와 황태자 부부.jpg

1888년 3월 9일, 시아버지 빌헬름 1세 사후 남편 프리드리히 3세가 제위에 오르면서 황후가 되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3세는 즉위 전부터 골초인터라 심각한 후두암에 걸려 있어서, 이때부터 않아 누웠고 빅토리아 황후가 남편 대신 온갖 정무를 처리했다.

그런데 프리드리히 3세의 후두암 치료를 둘러싸고 영국독일 의료진들 간에 분쟁이 일어났다. 왜냐면 영국인 의사 멕켄지 박사가 "후두암이 아니다"고 진단을 내리는 바람에[12], 프리드리히 3세는 치료 시점을 놓쳐 제대로 된 수술을 받지 못하여 즉위 3개월 만에 사망했다. 이 때문에 1888년은 '세 황제의 해(Dreikaiserjahr)'로 불리게 된다. 프리드리히 3세의 오진과 사망 또한 빅토리아의 평판을 더더욱 깎아내리는 데 일조했고 아들 빌헬름 2세는 이 일로 인해 두고두고 어머니를 원망했다.

"영국 의사가 내 아버지를 죽였고 영국 의사가 내 팔을 불구로 만들었다. 이는 내 어머니의 잘못이다."

빌헬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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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빅토리아 황태후

빌헬름 2세의 즉위 이후 찍은 가족 사진. 모자간의 거리감과 불편함이 너무 대놓고 잘 드러나 있다.


빌헬름 2세와 함께[13]
장남 빌헬름 2세의 즉위하면서 황태후가 되었으며, 2년뒤 시어머니 아우구스타 태황태후가 사망하면서 황실에서 가장 큰 어른이 되었다. 정치성향이 정반대인 빌헬름 2세가 황제가 된 이후에는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지 않고 아들에 의해 궁전을 떠나 프리드리히쇼프 성에서 조용히 지낸다. 빌헬름 2세는 어머니가 독일을 떠나기 원했지만 형제들이 반대하고 설득하여 포기했고 어머니한테 황족으로서의 예우를 해주었다. 그래서 빅토리아는 해외여행도 떠나며 취미생활을 하여 여유로운 생활을 한다. 하지만 아들의 정치적인 노선을 싫어하여 자주 비판했다. 말년에 가면 곁에 있던 딸들이 시집가고 자식들은 자신한테 오지도 않아 갈수록 외로움을 심하게 느껴 우울증에도 걸린다. 결국 유방암에 걸려[14] 1901년 8월 5일[15] 6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독일 황후임에도 불구하고 영국인이라는 자부심이 강해서, 유언으로 자신의 관을 유니언 잭으로 감싸서 매장해 달라고 했다. 물론 유언대로 해줬지만 독일 국민들이 보기에는 뭐.....

개인적으로는 매우 똑똑한 인물이었고 자유주의에 대한 신념도 강했으며 남편과도 사이가 좋았고 나름대로 자식들을 아꼈지만 어머니로서는 결국 0점짜리인 최악의 어머니였고 시아버지와의 갈등이 심하여 왕세자비임에도 푸대접을 받았으며 한평생 시아버지랑 아들과 적대관계가 되고 말았고 다른 자식들도 미움을 받았다. 게다가 아들 2명이 생전에 요절하는 슬픔까지 겪었다. 그나마 남편이 황제가 되었을때는 황후가 되어 대우가 좋아졌고 빌헬름 2세도 어머니를 싫어해도 푸대접은 하지 않았다.


4. 가족관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호엔촐레른 가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Victoria,
Princess Royal)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자 앨버트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
(Ernest I,
Duke of Saxe-Coburg and Gotha)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프란츠 프리드리히
(Francis Frederick,
Duke of Saxe-Coburg and Saalfeld)

로이스-에보스도르프 여백작
아우구스타 카롤리나
(Countess Augusta Carolina
of Reuss-Ebersdorf)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공녀 루이즈
(Princess Louise
of Saxe-Gotha-Altenburg)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작 아우구스투스
(Augustus, Duke of Saxe-Gotha-Altenburg)
메클렌부르크슈베린 여공작
루이즈 샤를로트
(Duchess Louise Charlotte
of Mecklenburg-Schwerin)

빅토리아 여왕
(Victoria)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
(Prince Edward,
Duke of Kent and Strathearn)

조지 3세
(George III)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샬럿
(Princess Charlotte of Mecklenburg-Strelitz)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공녀 빅토리아
(Princess Victoria
of Saxe-Coburg and Saalfeld)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프란츠 프리드리히
(Francis Frederick,
Duke of Saxe-Coburg and Saalfeld)

로이스-에보스도르프 여백작
아우구스타 카롤리나
(Countess Augusta Carolina
of Reuss-Ebersdorf)



4.2.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남
빌헬름 2세
(Wilhelm II)
1859년 1월 27일
1941년 6월 4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공녀
슬하 6남 1녀[16]
그라이츠의 헤르미네 로이츠 공녀
1녀
작센마이닝겐 공작부인 샤를로테
(Charlotte, Duchess of Saxe-Meiningen)
1860년 7월 24일
1919년 10월 1일
작센마이닝겐 공작 베른하르트 3세
슬하 1녀
2남
하인리히 왕자
(Prince Heinrich)
1862년 8월 14일
1929년 4월 20일
헤센의 이레네 공녀[17]
슬하 3남
3남
지기스문트 왕자
(Prince Sigismund)
1864년 9월 15일
1866년 6월 18일

2녀
샤움부르크리페의 아돌프 공자비 빅토리아
(Viktoria, Princess Adolf of Schaumburg-Lippe)
1866년 4월 12일
1929년 11월 13일
샤움부르크리페의 아돌프 공자
알렉산더 줍코프
4남
발데마르 왕자
(Prince Waldemar)
1868년 2월 10일
1879년 3월 27일

3녀
그리스 왕국의 왕비 소피아
(Sohpia, Queen of the Helenes)
1870년 6월 14일
1932년 1월 13일
콘스탄티노스 1세
슬하 3남 3녀[18]
4녀
헤센 방백비 마르가레테
(Margaret, Landgravine of Hesse)
1872년 4월 22일
1954년 1월 22일
헤센카셀 방백
프리드리히 카를

슬하 6남

빅토리아 여왕/가족관계 참고. 여담으로 빅토리아의 자녀들인 빌헬름 2세와 그 형제자매들은 어머니보다 이모인 앨리스 공주를 더 닮은 편이었다고 한다.


5. 여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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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공주가 세례식 때 입었던 옷
  • 빅토리아 공주의 성공회 유아세례식 때 사용했던 세례복[19]과 세례반[20]은 현재까지도 영국 왕실 일원의 세례식 때 이용되고 있다. 세례반은 유지니 공주를 제외한 모든 엘리자베스 2세의 자녀/손자녀들은 세례식 때 사용되였으며, 세례복 또한 2004년 루이즈 마운트배튼윈저의 세례식 때까지 사용되었고, 그 이후에는 복제품으로 대체되어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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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들인 빌헬름 2세의 어린시절과 닮았다. 조카 앨버트 빅터의 얼굴도 살짝 보인다.[2] 빅토리아 여왕은 조지 3세의 4남 켄트 공작의 무남독녀이며, 켄트 공작의 손위 형제들(장남 조지 4세, 차남 프레데릭, 3남 윌리엄 4세) 중 후사를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군주가 될 수 있었다. 정확하게는 빅토리아 여왕보다 계승권이 앞서는 사촌언니 샬럿이 있었으나 출산 중에 아기와 같이 죽어서 빅토리아 여왕 앞에 선순위 후계자가 없었다. [3] 2015년 이후 영국 왕실에서는 남녀 구별 없이 출생 순서에 따라 왕위 계승 순서가 정해진다. 바뀐 제도의 혜택을 처음으로 받게 되는 공주는, 윌리엄 왕세자캐서린 왕세자비의 장녀이자 둘째인 샬럿 공주이다.[4] 남동생 에드워드 7세의 존재 때문에 본인이 어머니의 뒤를 이어 대영제국의 여왕이 되지 못하고 독일 제국의 황후로만 남아야 했기에 훗날 아들 빌헬름 2세에게 학대에 가까운 엄격한 훈육을 하는 원인이 되었다는 얘기도 많다.[5] 당시에는 백부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살아있었고 아버지 빌헬름 1세는 왕태제였다. 즉 왕위 계승 2순위이다.[6] 왼쪽의 아이는 빌헬름 2세, 오른쪽의 아이는 샤를로테 공주이다.[7] 그에 비해 동생 에드워드 7세는 완전히 엇나간 걸 보면 빅토리아 여왕의 육아에 문제가 많았다는 걸 알수 있다. 혈혈단신의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할 당시 막내외삼촌 레오폴드 1세 같은 정치적인 멘토는 있어도 가정적인 멘토가 될 만한 어른은 딱히 없었기 때문. [8] 아들의 장애에 대해 빌헬름 2세가 나이에 비해 똑똑한데 왼팔만 아니면 자랑스러워했을 것이라는 수기에서 알수 있다.[9] 비슷하게 아버지와 어머니의 무관심과 불행한 가정환경에 둘러싸여 고통받았던 동시대의 인물인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황태자처럼 안된 것이 다행이라고나 할까.[10] 이는 빅토리아와 갈등을 빚는 시부모 빌헬름 1세와 아우구스타가 프리드리히 3세와 빅토리아의 자녀들 중 빌헬름 2세, 샤를로테, 하인리히를 예뻐하고 나머지 손녀들은 냉대해서 그랬다는 얘기도 있다.[11] 이 때문에 프리드리히 3세가 오래 살았어도 독일 제국은 원 역사 그대로 망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많다. 당장 1848년 혁명이 가장 활발했던 것도 독일이고 마르크스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을 한 곳도 독일이었다.[12] 병리학의 아버지라는 루돌프 피르호의 조직검사에 근거하기는 했다.[13] 시부모와 자식들 사이에서 마음고생을 심하게 받아서인지 60세에 죽었음에도 엄청 늙어 보인다. 물론 상술하듯 빅토리아의 책임도 매우 크다. 유방암 발병원인 중 스트레스가 차지하는 비중이 제일 크다.[14] 암이 척추까지 퍼져 죽기전까지 거동도 못하며 침대에서 않아누웠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15]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이 세상을 떠나고 약 7개월 뒤였다.[16] 독일의 황태자 빌헬름, 아이텔 프리드리히 왕자, 아달베르트 왕자, 아우구스트 빌헬름 왕자, 오스카 왕자, 요아힘 왕자, 브라운슈바이크 공작부인 빅토리아 루이제.[17]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다. 하인리히와는 이종사촌지간이다.[18] 요르요스 2세, 알렉산드로스, 루마니아의 왕대비 엘레니, 파블로스 등.[19] Christening gown.[20] Lily Font. 세례식 때 이용하는 성수를 담아놓은 큰 그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