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즈데게르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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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사산 왕조의 제18대 샤한샤.
2. 생애[편집]
바흐람 5세의 아들로, 사산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사냥과 연회에 탐닉하던 부친의 관행을 따르지 않고 할아버지 야즈데게르드 1세처럼 폭정을 일삼지도 않은, 정의와 안녕에 관심이 있고 조로아스터교에 대한 신앙이 지극했던 인물이었다고 한다. 438년 부친이 사망한 후 샤한샤에 오른 뒤, 그는 금욕적인 생활 방식을 수행하는 한편 기독교와 유대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감행했다. 445년 또는 446년, 그는 군대 내부의 기독교 신자들 중 조로아스터교로 개종하길 거부하는 자들을 추방하라는 칙령을 반포했다. 또한 아르메니아에 대정관 미르 나르세를 보내 조로아스터교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는 칙령을 반포하게 하면서, 이를 따르지 않는 자들을 가차없이 처단하게 했다.
이에 451년 바르단 마미코니안이 이끄는 아르메니아 귀족들의 봉기가 일어나 페르시아 관리들과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이 살해되었다. 야즈데게르드는 무슈칸 니사바르트를 아르메니아로 급파하여 진압하게 하였고, 451년 6월 2일 아라라트 산 기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아르메니아 반란군이 전멸했다. 무슈칸은 아르메니아를 점령한 뒤 기독교 주교들을 처형하거나 강제노역에 처했고, 기독교 신자들을 호라산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조로아스터교로 개종한 아르메니아인들의 입지를 강화하였다. 455년, 야즈데게르드는 유대인들이 공개적으로 안식일을 기념하는 걸 금지하는 칙령을 반포하였다. 467년 유대교 학교를 폐쇄하고 유대인 지도자 일부를 처형했다. 유대인들은 이에 분노하여 이스파한의 조로아스터교 사제 2명을 살해하였고, 이후 더 많은 박해와 반란이 일어났다.
이렇듯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확립하기 위해 타종교 신자들을 박해하는 한편, 로마 제국과 백훈족과의 전쟁을 벌였다. 이보다 앞서, 바흐람 5세와 테오도시우스 2세는 유목 민족의 침략으로부터 캅카스를 방어하기 위해 공동으로 협력하고, 로마인들은 500파운드의 금을 사산 왕조에 지불한다는 협약을 체결한 바 있었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 2세는 지불을 차일피일 미루었고, 야즈데게르드 2세는 이를 보복하기 위해 즉위하자마자 굽타 왕조를 비롯한 국내의 다양한 군대로 로마 제국을 공격했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당시 반달족 등 여러 이민족의 침략에 시달렸던 로마 제국은 아나톨리우스를 파견하여 평화 협상을 제의했다. 야즈데게르드 2세는 이를 받아들였고, 440년 두 제국은 메소포타미아에 새로운 요새를 건설하지 않고, 사산 왕조는 로마 제국으로부터 약간의 원조를 받는 협약을 체결했다.
450년, 야즈데게르드 2세는 동방 영토를 잠식하고 공물을 강요하는 백훈족을 몰아내기 위한 대규모 원정을 단행했다. 그는 백훈족의 영역으로 들어가 여러 요새와 도시를 약탈했으며, 많은 포로와 재물을 얻어냈다. 또한 453년 궁정을 동방 전선에 가까운 니샤푸르로 옮겨서 백훈족에 전념하기로 했고, 미르 나르세에게 크테시폰에 남아서 행정을 이끌게 하였다. 이후 4년간 거듭된 전쟁을 치르면서 국경지대에 여러 요새를 세웠고, 구르칸 주 북부에 에란-흐와라-야즈데게르드(Eran-Khwarrah-Yazdegerd: 이란, 야즈데게르드의 영광) 시를 건설했다.
457년 동방 전선에서 병사했는데, 생전에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은 바람에 장남 호르미즈드 3세와 또다른 아들 페로즈 1세와의 내전이 발발했다. 호르미즈드 3세는 레이에서 샤한샤를 칭했고, 페로즈는 북동부에서 군대를 일으켜 샤한샤를 칭했다. 내전 결과, 백훈족의 지원을 받은 페로즈 1세가 승리를 거두고 단독 샤한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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