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스턴 처칠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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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월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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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국가연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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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국가연립
4차 국가연립/체임벌린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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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턴 처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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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턴 처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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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럴드 맥밀런
알렉 더글러스흄
해럴드 윌슨 (1)
에드워드 히스
해럴드 윌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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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대처
존 메이저
토니 블레어
고든 브라운
데이비드 캐머런
테레사 메이
보리스 존슨
리즈 트러스
[[찰스 3세|

찰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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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 트러스
리시 수낙

* 총리 성명 옆 (1, 2...) 표시는 총리가 재취임했을 때의 내각의 회차를 말한다.







원스턴 처칠 내각 (제1차 집권)
Winston Churchill Cabinet

1940년 5월 10일 ~ 1945년 7월 26일[1]
출범 이전
이후
네빌 체임벌린 전시내각
클레멘트 애틀리 내각

총리
윈스턴 처칠 / 제61대
부총리
클레멘트 애틀리 (~ 1945. 5. 23.)
여당


연립여당

(~ 1945. 5. 23.)

(~ 1945. 5. 23.)
국민노동당



원스턴 처칠 내각 (제2차 집권)
Winston Churchill Cabinet

출범 이전
이후
클레멘트 애틀리 내각
앤서니 이든 내각
}}}
총리
윈스턴 처칠 / 제63대
여당



1. 개요
2. 윈스턴 처칠 전시-과도 내각
2.1. 배경
2.2. 전시내각 (1940. 5. 10 ~ 1945. 5. 23.)
2.3. 과도내각 (1945. 5. 23. ~ 1945. 7. 26.)
2.4. 구성
3. 제3차 윈스턴 처칠 내각 (2차 집권)



1. 개요[편집]


영국의 제61대 및 제63대 총리를 지낸 윈스턴 처칠이 이끈 두번의 내각. 1차 내각은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대연정으로 수립된 전시 거국내각이었으며, 2차 내각은 전후 처칠이 이끈 보수당이 1951년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수립한 단독내각이다.

2. 윈스턴 처칠 전시-과도 내각[편집]



2.1. 배경[편집]


1939년 9월 1일, 대독 선전포고로 네빌 체임벌린 총리가 전시내각 수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선전포고는 했지만 아직 정식으로 서부전선 내 교전이 시작된 시기는 아니었기 때문에 제1야당인 노동당과 제2야당인 자유당이 참여하는 대연정 구성까진 필요없다고 여긴것인지 기존의 국가연립 내각의 이름을 전시내각으로 바꾼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1940년 4월부터 시작된 노르웨이 침공 국면에서 나치 독일에 밀리며 덴마크와 노르웨이가 연달아 독일의 손에 넘어갔고 이에 충격을 받은 의회는 5월 청문회를 열고 체임벌린 총리를 강력하게 질책했고, 노동당에서는 내각불신임결의안을 제출했다. 체임벌린 총리가 표결을 통해 겨우 승리하긴 했지만 소속당인 보수당 내에서도 상당한 수의 반란표가 나오면서 사실상 전시내각을 이끌만한 지도력을 상실했다.

1940년 5월 9일, 체임벌린 총리는 정식으로 노동당에 대연정 구성을 제안했고 노동당이 이를 수락했지만 조건으로 체임벌린 총리가 사퇴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다음날 독일이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를 전격 침공하면서 체임벌린 총리가 이를 수락해 대신 윈스턴 처칠이 총리직에 올랐고 대연정을 수립하는데 성공했다.

2.2. 전시내각 (1940. 5. 10 ~ 1945. 5. 23.)[편집]


처칠은 노동당 당수인 클레멘트 애틀리를 부총리 겸 해군경으로, 자신의 정적이라 할 수 있는 할리팩스 자작 에드워드 우드를 외무장관으로, 자신에게 총리직을 내준 네빌 체임벌린을 추밀원 의장으로 임명했는데 이때문에 정권 초반 위기를 맞이한다.

웃기게도 분열의 원인은 제1야당 대표인 애틀리가 아니라 같은 당의 외무장관 할리팩스 자작과의 갈등이었다.[2] 철저한 항전을 주장한 윈스턴 처칠과 나치 독일과의 평화협상을 주장하는 할리팩스 자작 간의 갈등은 네덜란드, 벨기에 정부가 연달아 무너지고 프랑스까지 삽시간에 항복 위기에 몰리면서 영국 원정군됭케르크에 고립되자 절정에 치달았다.

됭케르크에서 수많은 영국 장병들이 몰살당할 위기에 빠지자 목소리가 커진 할리팩스는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를 통해 독일과 접촉해 평화 교섭을 추진하겠다고 처칠을 압박했고, 처칠 역시 정치적 위기에 봉착했지만 끝내 됭케르크 철수작전를 성공시키면서 33만명의 영국군을 구출해내면서 여론을 반전시켰다. 본래 할리팩스 자작쪽에 힘을 실어주던 체임벌린 역시 이 시기를 기점으로 처칠쪽에 힘을 실어주기로 마음을 굳힌다.

처칠은 1940년 6월 4일, 하원에서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라는 명연설을 남기면서 항전 기조를 이어가겠다고 선언했고 화평파는 내각에서 목소리를 잃었다.

할리팩스 자작은 6월 이후에도 외무장관 자리를 지키긴 했지만 이미 체임벌린을 비롯한 보수당 주류의 신임을 잃은지라 이 이후로는 큰 영향을 끼치진 못했고 9월에는 건강이 악화된 체임벌린이 당수직에서 물러나고 아예 처칠이 후임 당대표가 되면서 입지를 완전히 상실했다.

결국 12월 처칠에 의해 주미대사로 반쯤 쫓겨났고, 그 자리는 전쟁장관을 지내던 앤서니 이든에게 넘어갔다. 이후에는 단일 대오를 유지하며 미국의 참전을 계속해 요구하는 동시에 서부전선에서 외롭게 영국 본토 항공전 등을 수행했고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미국이 참전한 뒤에는 연합군의 일원으로 북아프리카 전역, 노르망디 상륙작전 등 역사적 전투에서 승전을 함께했다. 동시에 독소전쟁에서 소련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전쟁 국면이 역전되었다.[3]

전란의 시기, 처칠의 뚝심은 영국인들의 자긍심이 되었고 결국 아돌프 히틀러의 자결과 나치 독일의 항복으로 1945년 5월 8일, 승리의 날이 찾아오면서 영국은 다시 한번 승전국이 되었다.

처칠은 아시아 전선의 전쟁이 마무리될때까지 전시내각 임기를 1년 연장하자고 주장했고, 부총리였던 애틀리도 처음에는 이에 동의했으나 당시 노동당 내 반발여론을 인지하고 연장을 거부해 1945년 5월 23일, 전시내각에서 탈퇴하고 자유당도 연이어 탈퇴했다.

전시내각이 붕괴되면서 처칠은 조지 6세에게 사임계를 제출했지만 조지 6세가 차기 총선까지 과도 내각을 유지할 것을 요구하면서 총선을 통한 차기 정부 구성까지 정권을 유지하게 됐다.

2.3. 과도내각 (1945. 5. 23. ~ 1945. 7. 26.)[편집]


처칠은 1945년 6월 15일 의회 해산 및 7월 5일 투표를 선언했다.[4] 아직 태평양 전쟁이 진행중인 점을 고려해 거국내각의 형태를 유지하긴 했지만 내각에 남은 국민노동당, 자유국민당 의원수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보수당 내각에 가까웠다.

전반적으로 전시내각 당시의 정책을 계승했는데 1945년 6월 7일, 얄타 회담 결과를 공개하라는 의회의 요구를 비밀 회담은 없었다며 거부한 정도만 논란이 되었다. 전시 배급제휘발유 배급제가 6월 1일에 폐지된 정도를 제외하고는 유지했고 전시내각 당시 노동당과 합의했던 아동 수당법을 원안대로 통과시키고 총선 공약으로 NHS 창설, 5세 미만 아동을 대상으로 무료 우유 급식, 서민을 위한 주택지원 확대를 공약하는 등 보통 생각하는 처칠의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5]

처칠은 과도내각을 이끌면서도 아시아 전선에 영국군이 적극 개입하길 원했지만, 미국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오히려 영국의 적극적인 개입을 거부하면서 그 영향력엔 제한이 있었다. 아무래도 트루먼 입장에서는 이미 일본의 패망이 이오지마 전투를 기점으로 사실상 임박한 시점에서 처칠의 야욕이 미국 입장에서 그닥 도움이 안될뿐더러 영국의 아시아 식민지를 회복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선을 앞두고 지지율 81%를 달리고 있는 처칠의 승리 가능성이 적지 않아보였고[6] 미국 입장에서도 아시아 전선에서의 영국의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할수는 없기 때문에 포츠담 회담에도 처칠이 영국 대표 자격으로 참석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7월 26일 총선 개표 결과, 보수당이 무려 190석을 잃은채로 197석 획득에 그친 참패를 당하면서 정권이 교체되었고, 단독 과반을 획득한 노동당의 클레멘트 애틀리가 다음날 바로 총리직에 올랐다. 이때문에 윈스턴 처칠은 회담 중 강제로 귀국해야하는 굴욕을 당해야했다. 처칠을 대신해 애틀리가 다음날부터 포츠담 회담에 참석했다.

이렇게 윈스턴 처칠의 1차 집권이 마무리되었다.

2.4. 구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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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위
명단
당적
취임
퇴임

총리
윈스턴 처칠

1940. 5. 10.
1945. 5. 23.
부총리
클레멘트 애틀리

1942. 2. 19.
1945. 5. 23.
방위장관
윈스턴 처칠

1940. 5. 10.
1945. 5. 23.
법무장관
존 시몬

자유국민당

1940. 5. 12.
1945. 5. 23.
추밀원의장
네빌 체임벌린

1940. 5. 10.
1940. 9. 29.
존 앤더슨

1940. 10. 3.
1943. 9. 24.
클레멘트 애틀리

1943. 9. 24.
1945. 5. 23.
국새관
클레멘트 애틀리

1940. 5. 11.
1942. 2. 15.
스탠포드 크립스
1942. 2. 19.
1942. 11. 22.
로버트 개스코인세실

1942. 11. 22.
1943. 9. 24.
맥스 에이트켄
1943. 9. 24.
1945. 5. 23.
무임소장관
아서 그린우드

1940. 5. 11.
1942. 11. 22.
외무장관
에드워드 우드

1940. 5. 10.
1940. 12. 22.
앤서니 이든
1940. 12. 22.
1945. 5. 23.
재무장관
킹슬리 우드

1940. 5. 12.
1943. 9. 21.
존 앤더슨

1943. 9. 24.
1945. 5. 23.
내무장관
존 앤더슨

1940. 5. 12.
1940. 10. 3.
허버트 모리슨

1940. 10. 2.
1945. 5. 23.
노동장관
어니스트 베빈

1940. 5. 13.
1945. 5. 23.
전쟁장관
앤서니 이든

1940. 5. 11.
1940. 12. 22.
데이비드 마게슨
1940. 12. 22.
1942. 2. 22.
제임스 그리그

1942. 2. 22.
1945. 5. 23.
공군장관
아치볼드 싱클레어

1940. 5. 11.
1945. 5. 23.
해군장관
A. V. 알렉산더

1940. 5. 11.
1945. 5. 23.
서민원 원내대표
윈스턴 처칠

1940. 5. 10.
1942. 12. 19.
스탠포드 크립스

1942. 2. 19.
1942. 11. 22.
앤서니 이든

1942. 12. 22.
1945. 5. 23.
귀족원 원내대표
토마스 인스킵

1940. 5. 10.
1940. 10. 3.
에드워드 우드
1940. 10. 3.
1940. 12. 22.
조지 로이드
1940. 12. 22.
1941. 2. 4.
월터 기네스
1941. 2. 8.
1942. 2. 21.
로버트 개스코인세실
1942. 2. 21.
1945. 5. 23.
항공기제조장관
맥스 에이트켄

1940. 8. 2.
1941. 4. 30.
존 무어브라바존
1941. 5. 1.
1942. 2. 22.
존 르웰린
1942. 2. 22.
1942. 11. 22.
스탠포드 크립스

1942. 11. 22.
1945. 5. 23.
국무장관
맥스 에이트켄

1941. 5. 1.
1941. 6. 29.


3. 제3차 윈스턴 처칠 내각 (2차 집권)[편집]


실각 이후에도 보수당 당수직을 유지하고 있던 처칠은 와신상담 끝에 1951년 총선에서 321석을 획득하면서 6년만에 정권교체에 성공해 다시 총리직에 올랐다. 국민정부 형태의 연정 집권을 제외하고 보수당 단독 집권으로는 1929년 이후 무려 22년만에 출범한 내각이었다.

과반 기준을 간신히 넘긴 상태로 집권하긴 했지만 전시수상 처칠의 입지를 바탕으로 앤서니 이든 외무장관, 랍 버틀러 외무장관, 데이비드 맥스웰 파이프 내무장관[7], 해럴드 맥밀런 방위장관 등 기라성같은 보수당 인재들이 내각에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정적으로 운영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처칠의 건강이었다. 1951년 12월 조지 6세와 접견할때부터 왕의 걱정을 살 정도로 처칠의 건강은 1차 집권 시기 대비 많이 악화되어있는 상태였다고 한다. 곧 조지 6세가 사망하고 엘리자베스 2세가 즉위하면서 건강 문제가 일시적으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1953년에는 아예 뇌졸중을 겪으면서 일시적으로 직무불능 상태에 빠졌다. 문제는 같은 시기 정치적 후계자로 평가받던 이든 역시 같은 해 담석제거수술을 받던 도중 담관이 손상되면서 건강이 정상적인 상황아니었던것.

그래도 같은 해 연말 처칠과 이든 모두 건강을 어느정도 회복하면서 권력 공백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이 기간 처칠과 이든이 모두 권력 유지를 위해 자신의 건강 문제를 철저히 숨기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받아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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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5년 5월 23일까지는 처칠 전시내각, 1945년 5월 23일부터 7월 26일까지는 처칠 과도내각으로 간주된다.[2] 오히려 애틀리는 파시즘을 극도로 혐오했기 때문에 나치와의 협상을 주장하는 노동당 소속 장관들을 말 그대로 찍어눌러버렸다고 한다.[3] 다만 갈리폴리 전투, 노르웨이 침공 등의 사례에서 보듯이 처칠의 전쟁 구상이 썩 훌륭한 편은 아닌지라 마켓 가든 작전 등 실패한 작전도 적잖게 존재했다.[4] 다만 군인 등 부재자 투표 문제로 개표는 7월 26일에 진행하기로 했다.[5] 다만 노동당의 공약에 비해 상당히 모호한 표현을 사용했고, 처칠 본인이 유세 과정에서 여러번 공약을 뒤집을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면서 논란을 만들었다.[6] 하지만 이 시점에서 처칠의 높은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보수당 지지율은 노동당 지지율에 뒤쳐져 있었다.[7] 뉘른베르크 재판 당시 영국측의 수석 검사로 활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