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의 행정구역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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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때 부평 전체와 인천부의 외곽이 부천군에 병합되었다. 부천군에 흡수된 기존 인천부 지역은 소래면, 영종면, 용유면, 덕적면을 제외하고 1936년, 1940년에 차례대로 인천부에 재편입되었다. 하지만 영종면, 용유면은 1989년에, 덕적면은 1995년에야 옹진군 편입을 통해 인천에 재편입될 수 있었고, 구 소래면 지역은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시흥시 관할로 남아있다. ** 1945년 10월 10일부터 10월 27일까지 단 17일간 있었던 행정구역이다. *** 전국의 부(府)가 시(市)로 일괄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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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틀:국기| ]][[틀:국기| ]] 경기도의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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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부 仁川府 Jinsen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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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청 소재지
| 인천부 중정(仲町)1정목 9 (현재 인천광역시 중구 관동1가 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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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행정구역
| 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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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위 행정구역
| 69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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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 약 271.67km²(19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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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 213,833명(194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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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속기간
| 1910년 10월 1일 ~ 1945년 10월 9일[2] 10월 10일 제물포시로 개칭 후 동년 10월 28일 인천부로 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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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부청 해방 이후에도 해당 건물은 1985년까지 인천시청으로 쓰였으며 현재는 중구청으로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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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항 일제는 갑문공사와 간척으로 인천항을 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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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도 유원지 1920년대부터 개발된 월미도 유원지는 당시 조선의 대표적인 관광지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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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川府 (진센후)
일제강점기 당시 인천지역에 위치했던 부. 현재의 인천광역시로 설치 당시에는 개항장 일대만을 관할하였으며 도시개발과 1940년대의 확장으로 해방 직전에는 조선 제4의 도시가 되었다.
1896년 23부제의 폐지 이후 인천부가 설치되었다. 당시에는 부평 일대를 포함하지 않고, 현
시흥시 북부와 덕적군도,
남양군 안
월경지(현
남양읍 일부, 1906년에
남양군에 편입)를 포함하는 행정구역이였으나 경술국치 이후 1914년 일본은 원인천을 떼어내어 부평 지역과 합쳐 부천군으로 분리시켰다.
1930년대 말에는
경인일체화 계획으로 부평지역을
경성부에 포함시킬 계획도 있었으나 인천부 확장으로 방향을 돌려 1936년과 1940년 두 차례의 시역확장을 통해 부평지역 일부를 편입하였다.
일제는
인천항을 개발하기 위해 1911년부터 갑문을 건설하여 경성의 외항으로 역할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인천은 경성의 외항으로서 발전을 거듭하였으며 1917년에는 성냥회사가 들어서면서 주요산업이 되었다.
일제는 한반도를 대륙진출의 병참기지로 삼기 위해 1930년대부터 공업화를 진행하였는데 인천에 주요 군수시설들을 설치하면서
1940년대에는 군수산업이 도시의 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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