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 카터/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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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기 이력
2. 1976년~1980년 대통령 선거
4. 퇴임 후
4.1. 더 존경 받는 전직 대통령
4.2. 시한부 흑색종 선고와 완치
4.2.1. 재발과 치료 중단


1. 초기 이력[편집]


파일:external/www.achievement.org/car0-025.jpg
조지아 주 플레인스(Plains) 시 출생. 증조부가 남북전쟁 당시 남군 장교 출신이었다. 원래 1941년에 조지아 사우스웨스턴 주립대학교에 입학했다가 1942년 조지아 공대에 편입했지만 중퇴하고 1943년 해군사관학교에 다시 신입생으로 입학한다.[1] 1946년 미국해군사관학교를 전체 820명 중 59등으로 졸업[2]한 뒤 발라오급 잠수함USS Pomfret 함에서 근무하게 된다.[3][4] 능력을 인정받아 최신의 원자력잠수함에 근무하기 위해 대학에서 6개월 간 원자력발전공학 단기과정도 이수했다. 하지만 1953년 아버지의 부음 소식을 듣게 된 카터는 해군에서 촉망받는 인재였음에도 가업을 잇기 위해 전역을 선택하여 땅콩 농장과 함께 각종 농기구를 취급하는 카터 상회를 운영했다. 이 땅콩 농장주 경력은 유명해서 이후에도 카터에겐 '땅콩 장수'라는 별명이 붙어 다닌다. 해군에선 그가 전역을 선택한다니 많이 아쉬워했다고 한다.

이후 조지아 주 상원[5] 선거에 나서서 낙선했지만, 당선한 후보의 부정선거가 드러나 그가 당선되었고 이후 조지아 주 주지사까지 역임했다. 주지사 선거 당시 카터는 흑인 인권 문제에 모호한 제스처를 취하면서 상당수 인종분리주의자들이 카터를 지지했지만 당선되자마자 취임 연설에서 "인종차별의 시대는 끝났다(the time of racial discrimination is over)"고 선언하고 흑인 등용법을 제정하는 등 인종차별 폐지와 도덕주의 정책을 적극 추진한다. 인종차별이 심한 조지아 주에서 태어나서 인종차별을 가장 싫어한 사람 중의 한 명. 그 본인은 백인이지만 어렸을 때 흑인들이랑 같이 놀다보니 저절로 편견이 없어졌다.

오해가 있는데 조지아 주는 남북전쟁 이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반(反) 북부 정서로 인해 미국 민주당의 텃밭이던 조지아는 이후 공화당의 보수 전략에 따라 "빨간 주"로 넘어갔지만, 주지사는 2003년까지 민주당에서 나왔다. 1868년~1872년의 4년을 빼고는 무려 #[6] 150년간 민주당 독주. 여하간 카터는 76대 조지아 주지사(1971년~1975년). 12년 뒤 클린턴 역시 남부 출신 주지사인지라 주목을 받았는데 오바마가 기록을 깰 때까지는 "당분간 민주당 출신 대통령은 (보수 성향이 강한 남부의 표를 끌어올 수 있는) 남부 출신 주지사들만 가능한 직종은 아닐까" 하는 푸념도 나왔다고 한다. 한국으로 치면 "민주당 출신 대통령은 경상도 출신 후보만 가능한 직종은 아닐까" 정도로 볼 수 있다. "남부전략" 이후 공화당의 우세가 강했던 시절의 반영.

해군 복무 시절이 워낙 짧게 끝나서 잘 인식되지 않는 사실이지만, 카터는 1950년대 전후 미 해군에서 차세대 브레인으로 촉망받았던 인물이다. 카터가 복무하던 시기인 194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 초반은, 하이먼 리코버 제독이라는 매드 사이언티스트원자력 잠수함을 처음 만들어내던 시절이었다. 이 당시부터 로널드 레이건 시절까지 이 원자로 깎던 노친네는 요원들을 막무가내로 갈궈대고 시험에 들게 하며 머리 깨나 한다는 인재들에게 엄청난 좌절과 환희를 안겨줬다.[7] 카터는 이런 리코버의 시험을 통과하고 초창기 원자력 잠수함 개발팀에 들어갔던 초엘리트였다. 리코버가 허구한 날 욕먹던 시절에는 별로 감이 안 잡혔을지 모르나 훗날 1980년대부터 리코버의 제자들이 해군참모총장을 독점하는 시대가 온 것을 보면 카터 또한 미 원자력 해군의 역사에 크게 기여했을 수재에 해당된다. 아버지가 남긴 가업을 잇기 위해 창창한 미래를 포기했던 효자는 훗날 해군 제독을 지휘할 수 있는 미국 대통령의 지위에 올랐다.

한편으로는 리코버와의 일화가 있다.

리코버: 자네 해사 몇등으로 나왔나?

카터: 59등입니다.(820명 중)

리코버: 최선을 다 했나?

카터: 최선을 다... 하지는 않았고 좀 설렁설렁 한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

리코버: WHY NOT THE BEST?(왜 최선을 다 하지 않았나?)

카터: ...!


이 WHY NOT THE BEST는 카터가 자주 입에 담는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고 대통령 취임 후 낸 자서전 제목으로도 쓰였다.


2. 1976년~1980년 대통령 선거[편집]


파일: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 주별 결과.svg

전국적으로 거의 무명이던 카터는[8] 197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서 돌풍을 일으켜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된다. 도덕주의 정책과 인권 외교를 공약으로 해 당시 현직 대통령이자 공화당 대통령 후보 제럴드 포드를 이기고 대통령에 올랐다. 케네디, 닉슨 등 쟁쟁한 인물들이 박빙의 대결을 펼쳤던 1960~1990년대의 대통령 선거 중에서 가장 박빙이었다.[9] (297:241, 50.1% 대 48%.) 남부의 분열 이후 약체화가 된 민주당은 8년마다 돌아오는 정권교체의 기회에서도 쉽게 이기지 못한 것이다. 민주당 내부에서도 카터에 대한 반발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남부 출신인 카터가 보수적인 정책을 펼쳐서 민주당을 보수화시킬까 우려해서였다.[10][11]

당시 카터는 서부 전역을 포드에게 내주었지만 1960년대 이래 흔들렸던 남부의 옛 민주당 텃밭을 온전히 되찾으면서도 북부(미네소타[12], 위스콘신)와 동부에서도 승기를 거두면서 대선에 승리했다. 그로버 클리블랜드존 F. 케네디가 승리했던 전략을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한 예로, 미국 지도가 동서로 딱 갈라지는 결과를 보인다. 민주당에겐 불행히도 이때 딱 한 번만 성공했다.[13] 그는 조지아 주의 모든 카운티에서 이겼다고 한다.[14]

한편, 1976년 대선에서 두 후보의 득표율 차이가 5%도 안될 정도로 박빙이였던 주가 무려 20개나 되었는데, 이 주들은 전부 1980년에 레이건에게 돌아가게 된다.

파일: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 주별 결과.svg

1980년 대선의 민주당 경선에서 카터는 당내 진보파를 대표하는 테드 케네디의 도전에 직면한다. 재임 중 카터는 민주당이 상하원을 압도적으로 장악하고 있었음[15]에도 불구하고 리버럴 성향 민주당원들에게는 보수적인 정책으로, 남부의 인종주의 민주당원들에게는 인종적으로 온건하다는 이유로 거의 지지를 받지 못해 자당 상하원들 다수와 불화를 겪고 있었다.

이로 인해 미국 최대의 노조연합인 AFL-CIO는 물론, 1972년 대선 후보였던 조지 맥거번, 1968년 대선 부통령 후보였던 에드먼드 머스키, 배우 겸 사회운동가인 마틴 쉰, 헨리 폰다-제인 폰다 부녀, 위스콘신 주지사 패트릭 루시[16] 등 수많은 당내외 진보파 인물들의 지지를 받는다. 이로 인해 경선 시작 전 여론조사에서는 케네디가 카터를 압도적으로 이기고 있었을 정도.

하지만 연이은 말실수와, 언론 대응 등에서의 실책으로 인해 케네디는 결국 51.1% 대 37.6%로 카터에게 패배한다.

그렇게 출마한 본선에서 카터는 텍사스플로리다를 뺀 남부의 지지를 상당부분 이끌어냈지만, 무소속 후보인 존 B. 앤더슨의 독자 출마로 조지아를 제외한 남부 전역에서 패하고 북부에서 표가 크게 나뉘면서 결국 로널드 레이건에게 대권을 넘기고 재선에 실패했다.[17] 앤더슨은 공화당 출신이었고, 홀로 고작 6.6%만을 득표했지만 그 득표 대부분이 동부에 집중해 카터의 전략에 큰 악영향을 미친 것이다. 후술된 이란 대사관 인질 사건도 한 몫 한다.


3. 지미 카터 행정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지미 카터 행정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지미 카터가 당선되면서 구성된 행정부다.

4. 퇴임 후[편집]



4.1. 더 존경 받는 전직 대통령[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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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 후인 1981년 10월에 백악관을 방문한 카터가 전임자 제럴드 포드, 후임자이자 당시 현직 로널드 레이건, 전전임자 리처드 닉슨과 당시 부통령이었던 조지 H. W. 부시와 만나서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다. 4명의 전현직 대통령들이 백악관에 모인 이유는 사망한 안와르 사다트의 장례식에 참석하고자 이집트로 떠나기 위함이다. 사진에 등장하는 대통령들 중 카터는 유일하게 민주당 소속이자 생존한 대통령이다. 레이건은 대통령에 취임한 첫 해이기도 하고 같은 해 3월에 존 힝클리 주니어에 의해 암살을 당할 뻔한 적이 있어서 사다트의 장례식에 참석할 경우 다시 위험을 겪을 수 있다는 우려에 장례식에 참석하지는 않았다. 대신 사다트와 같은 기간에 대통령을 역임한 전직 대통령 3명에게 에어 포스 원을 빌려주어 사다트의 장례식에 참석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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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집짓기에 참여한 카터.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카터.
대통령에서 퇴임한 뒤 전직 대통령 신분으로 많은 활동에 참여하였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Habitat for humanity 운동이다. 사랑의 집짓기라고도 부르는 집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집을 지어주는 봉사활동에 참여해 봉사활동에 앞장섰으며, 이것과 별도로 자연재해에 집을 잃은 이재민들을 위한 단기간 집짓기 봉사 프로젝트인 지미 카터 프로젝트를 만들어 동남아시아 쓰나미 사태나 카트리나 사태, 2010년 아이티 지진 등 굵직한 사건 때마다 봉사단을 조직해 전 세계를 돌았으며 2001년 대한민국 아산시 도고면에서 열린 지미 카터 프로젝트에도 직접 참여하였다. 지미 카터는 해비타트 운동을 세계로 알린 역할로 Habitat for humanity 본부에서 '수석 자원봉사자' 라는 명예직을 주었고, 지미 카터가 중심이 되어 참여하는 건축봉사 활동을 지미 카터 프로젝트로 독립시켜주었다. 이 해비타트 수석 봉사자 명예직은 건강상의 이유로 2009년에 반납했다고. 여담으로 2002년 수능 외국어 영역에 그의 해비타트 운동이 문법 관련 지문으로 나온 적이 있다. 그 지문은 대부분의 문제집에서 과거와 현재 완료의 시제를 비교하면서 예제로도 많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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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외교적으로도 전 대통령의 위치를 살려 김일성 사망 직전(사망 14일 전)인 1994년 6월 24일에는 북한을 전격 방문하여 김일성을 만나고, 북핵문제 해결과 북미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도 했다. 당시 북한의 경제난 등으로 갈등이 고조되고 있었으나[18] 북한과 미국 모두 실상은 사태의 원만한 해결을 바라던 참이라서 카터의 방문을 계기로 관계는 호전되었다. 하지만 그 직후 1달도 채 지나지 않아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되었다. 이런 업적에 힘입어 2002년, 인권과 중재 역할의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19]

덕분에 대통령으로 있을 때보다 전 대통령으로서의 활동이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물론 이는 대통령 시절이 그만큼 평가가 낮다는 것을 애둘러 비판하기 위해 언급되는 경우도 많다. "가장 훌륭한 전 대통령"이라는 말도 있고, 여기서 더 나아가 "처음부터 전 대통령이었다면 더 좋았다." 라는 비아냥도 나온다. 일단 지미 카터 프로젝트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선한 이미지를 쌓았고 정치적 이미지도 옅다보니 미국 안보상 중요한 문제에 비공식 특사로도 몇차례 가게 되었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에는 연이은 말 실수 등으로 구설에 오르며 여러 번 비난받으면서 위대한 전직 대통령이라는 그동안의 평도 많이 깎아먹고 있다. 특히, 오바마 대통령 시절 지나치게 북한을 옹호하는 발언과 다소 극단적인 종교적 발언을 여러 차례하면서 미국 내에서 비판적인 여론이 높아졌고 이후 대외 활동이 잠잠해졌다.

2011년 4월에는 마르티 아티사리핀란드 대통령, 그로 부룬드란트 전 노르웨이 총리, 메리 로빈슨 전 아일랜드 대통령을 비롯한 세계의 여러 전직 지도자들과 같이 방북했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북한의 열악한 인권 상황은 북한의 내부 사정이니 외부 세력이 개입하면 안 되며, 북의 기아와 핵개발의 책임은 전적으로 미국과 남한에 있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가 북한 대변인 노릇하러 갔냐는 비아냥에 시달렸고, 지미 카터가 자신이 북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미국 국무부에서의 브리핑을 요청하자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hell no"라고 싸늘하게 대답했다.

2013년 4월 존 스튜어트와 인터뷰를 했었는데 미 행정부(적어도 카터 행정부 및 본인)의 전통적 대북 협상 접근법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언급을 했다. 당시 북한이 정전협정을 파기한다며 협박을 하던 중이었는데 카터 왈 남한과 북한간 정전협정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미국과 북한, 더 나아가 미국과 중공군간의 정전협정만이 존재한다는 언급을 지나가듯이 했다. 이는 바꿔 말하면 남한은 최소한 정전협정과 관련해선 아예 협상 대상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뜻. 너무 확대해석하는 것도 지양해야 겠지만 이런 협상 주도자에 대한 인식 차이는 평화 또는 통일을 향한 미국식 다자회담과 한국식 양자 또는 다자회담 주장의 의견 차이를 보여줄 수 있는 단적인 예시이기도 하다. #

2014년 12월, 통합진보당 이석기 전 의원의 유죄판결에 대해 우려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한국 대법원에 발송했다.#

카터는 퇴임 후에 종교, 외교와 관련해서 논란이 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또 일부 해외 언론들은 미국 언론이 카터의 퇴임 후 활동을 지나치게 미화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2010년에는 스스로를 다른 전직 대통령들보다 우월(superior)하다고 주장했다가 미국 내에서도 큰 비난을 초래하기도 했다.

러시아의 대선 개입 덕분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됐다면서 정통성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2019년 11월 11일 자택에서 넘어져서 눈 주변에 크게 멍이 들었는데도 멀쩡한 상태로 집짓기 행사에 참석했다. 그런데 미국 뿐만 아니라 이 뉴스를 접한 세계인들의 반응은 "저 양반이 아직도 살아 있었다고??" 이런 반응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게, 이 사람은 2022년 10월 1일 기준으로 98세를 맞이했고, 2023년 10월 1일 기준 99세를 맞이했다. 장수로 유명한 엘리자베스 2세보다도 두 살 더 많고 사망 당시 나이보다 세살이나 많다.[20] 다만 저 낙상 여파로 뇌압이 높아져서 병원에 입원했다고 한다.

둘째 아들 칩 카터가 가수 윌리 넬슨과 백악관 지붕에서 마리화나를 피운 사실을 털어놨다.#

본인과 비슷한 또래의 과거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들인 조지 H. W. 부시프랑스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등이 말년에 성추행 논란을 일으킨 것에 비해 성적으로 아무런 스캔들이 없는 것도 귀감이 되는 부분이다. 애초에 이 사람은 TED 나와서 여성학대 문제에 대한 강연도 했다.#[21]
파일:카터 먼데일.jpg
카터의 러닝메이트이자 부통령이었던 월터 먼데일도 1928년생으로 퇴임 후 세상을 떠난 2021년 4월까지 40년간 생존해 역대 부통령 중 퇴임 후 가장 오래 살아있던 부통령이었다.[22]

거기다 영부인 로절린 카터 여사는 1927년생으로 역대 영부인 중 두번째로 장수했다.[23]

2020년에는 28년만에 대통령 선거에서 고향 조지아 주에서 민주당이 승리하는 기쁨을 맛봤다.

2021년 1월 20일에 행할 예정인 조 바이든의 대통령 취임식에는 불참을 결정했다. 불참 이유를 명확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코로나19의 유행에 따른 방역 지침을 지키기 위해서로 보인다.# 그 대신, 바이든의 대통령 취임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2021년 미국 국회의사당 점거 폭동 사태 이후 "국가적 비극이며 이건 미국의 모습이 아니다"며, 평화적인 상황 해결과 정권 교체를 촉구하는 발언을 했다.# 2022년 1월 6일, 의사당 폭동 사태 1주년을 맞아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해서 우려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

4.2. 시한부 흑색종 선고와 완치[편집]


2015년 간 종양이 발견되어 수술을 받아서 좋은 결과가 나온... 줄 알았는데 암이 다른 장기로 전이된 것이 발견되어 수술을 받을 예정이라 한다. 암은 흑색종으로 진단되었으며 간에서 종양이 2.5cm 절제되었다. 허나 암이 뇌에 전이된 것이 발견되었고, 2015년 8월 20일(현지시간) 오후에 첫 방사능 치료를 했다.

8월 말, 그는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회견을 통해 밝혔다. 그는 매주 자신이 강연하는 교회 주일학교 성경교실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 대신 성경교실을 이끌려고 기다리는데 그들에게 좋은 기회가 될 거예요."라며 의연한 모습을 보여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SBS 보도,죽음 앞둔 '평화전도사'뭉클한 품위

그런데 감동이 가시기도 전인 2015년 12월 6일 암을 치료했다는 소식이 나왔다. 카터는 본인이 다니는 교회에 나와서, 면역관문수용체[24] 기술을 이용한 새로운 약물 치료법으로 4기 흑색종(뇌에 전이된 부분 포함)이 완치되었다고 발표했다.#영문 그리고 그 다음날인 12월 7일 손자인 '제임스 카터'가 카터 전 대통령의 자선 재단 '카터 센터'에서 공식적으로 흑색종이 완치되었음을 발표했다. 면역 요법제(Immunotherapeutic Drugs)인 키트루다[25]를 사용해 흑색종을 치료했다고 하는데 가장 최근에 받은 MRA[26] 검사에서 뇌에 전이되었던 흑색종이 사라졌다고 한다. #영문 #BBC 보도

암 중에서도 무섭기로 소문난 뇌암에다 당시 카터가 91세의 고령임을 고려하면 기적에 가까운 일로[27], 현장에 있던 사람들 역시 박수 갈채를 보냈고 네이버 검색어 핫토픽 키워드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다만, 종종 뇌부위에 암이 돌아와서 아직은 계속 치료중이라고 하는데, 만약 암의 재발을 잘 막아낸다면, 장수의 길이 활짝 열릴 듯. 하술된 독재자 킬러 밈과 엮어서 91년 동안 자신의 몸을 지배한 뇌까지 영향을 받았다는 농담이 나오기도 했다.

레딧 뉴스 서브 쪽 댓글#레딧 영어 댓글을 보면 불사신 영감님, 대통령 재선 선거 때 낙선했으니 미국 법률상 대통령 후보 출마가 가능하니 이번에 2016년 대통령 선거 후보로 나와 재선하자는 댓글이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 카터는 1980년에 레이건에게 패배해 재선에 실패했으므로, '이론상'으로는 대통령 선거 출마가 가능하며, 이런 경우에는 상대 편 쪽에서는 아버지 부시도 나올 수 있다.[28] [29]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가 암을 이겨낸 지 불과 2주 만에 그의 손자인 제레미 카터가 사망했다는 비보를 듣게 되었다. 그나마 수면 중 심장마비로 고통없이 사망했으며 심장병에 걸린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2022년 10월 1일, 98번째 생일을 맞이했으며 고향인 조지아주 플레인스의 땅콩 축제에 참가했다.[30]

4.2.1. 재발과 치료 중단[편집]


2023년 2월 18일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자택에서 호스피스 간병에 들어갔다는 지미 카터 센터의 성명이 발표되었다. 피부암의 일종인 흑색종 진단을 받고[31] 그동안 자택에서 투병 중이며 현재는 암세포가 뇌와 간 등으로 전이되어 더 이상의 연명치료를 포기하고[32] 남은 시간은 가족들과 함께 보낼 것이라고 한다. 호스피스 케어는 보통 만성질환이나 불치병으로 투병하는 시한부 환자들이 사망하기 전에 거치는 과정이기에 이제 그의 삶도 오래 남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1#2 민주당의 동지이자 정치적 후배인 조 바이든 역시 이 소식을 접했다고 한다.

그런데 호스피스 간병을 시작한 지 1년이 넘은 2024년 4월 현재도 사망하지 않고 살아있다. 보통 호스피스 환자들의 경우 연명치료 중단 이후 두 달을 못 넘기고 죽는 경우가 대다수인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특이한 케이스이다. 심지어 7월 7일에는 아내 로잘린 카터 여사와[33] 결혼 77주년(!)을 축하했다. 그리고 2023년 9월 16일 부로 미국 대통령, 부통령을 통틀어 최장수 인물에 이름을 올렸다.[34] 이후 9월 30일 99세 생일을 하루 앞당겨 축하했다.[35] 그리고 결국 10월 1일까지도 버텨서 99번째 생일을 맞이하였다.[36]

그의 손자인 조시 카터(39)는 8월 19일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할아버지가 '마지막 장'에 들어섰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카터는 2015년 당시에도 뇌암이 4기까지 진행되었으나 끝내 완치했었고 8년이 지난 현재는 그보다 더 나이가 든 만큼[37] 카터가 곧 사망할 것이라고 속단하기는 이르다. 이제는 100세를 넘어 2024년 미국 대통령 선거일까지 생존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2023년 11월 19일에 아내 로잘린 카터 여사와 사별했다. 안 그래도 호스피스 케어를 받고 있는데, 2018년에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그 슬픔으로 건강이 크게 악화돼 동년에 사망한 조지 H. W. 부시의 전례가 있듯이, 무려 77년[38]을 함께 한 반려자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카터가 세상을 떠날 날도 그리 머지 않을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암도 이겨내고 호스피스 치료도 엄청나게 긴 시간을 버티고 있으니 또 모르는 이야기이긴 하다.



현지 시간으로 11월 28일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한 교회에서 거행된 카터 여사의 장례식에 참석했는데, 몰라보게 늙은 모습을 보여주며 인생무상을 절감케 했다. # 장례식에는 조 바이든 대통령 부부와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부부, 미셸 오바마, 로라 부시, 멜라니아 트럼프 등 여러 전, 현직 대통령 가족들이 참석해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1] 제2차 세계대전 중이라 당연히 군에 입대한 것으로 보인다.[2] 입학은 1943년에 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때문에 교육기간이 단축되었다. 참고로 동갑내기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1942년 해군으로 입대했다.[3] 때문에 미국 대통령의 이름은 웬만하면 항공모함에 붙지만 잠수함에 근무했다는 인연으로 세계 최강의 원자력 잠수함 시울프급의 3번함이 그의 이름을 따서 '지미 카터'로 이름지었다.[4] 카터는 미국 해군사관학교와의 인연으로 2004년 펫코 파크 개장 첫 공식경기 때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부터 초청을 받아 시구를 던지기도 했다.[5] 미국 상원의회가 아니라 조지아 주의 상원이다.[6] 주지사 명단. 1847년부터 파랑의 압박에 주의하라.[7] 심지어 2차대전 이후 미 해군 최고의 명장에 꼽히는 엘모 줌왈트 제독도 깨갱했을 정도.[8] 얼마나 무명이었는지 대통령 경선 당시 갤럽에서 민주당 후보 32명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는데, 명단에 카터의 이름은 없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아웃 오브 안중이었던 셈. 그럴 법도 한 게 경력이란 게 고작 주의원 4년, 주지사 4년이 전부였으니... 게다가 39대 대통령 선거 출마자 중 카터라는 난생 처음 보는 인물이 나오자 대중들도 "지미가 누구야?" 혹은 "카터가 누구야?"라고 할 정도로 카터는 속된 말로 듣보잡 취급을 받았다. 이 정도면 도널드 트럼프에도 안 밀릴 갑툭튀다. 그 트럼프도 이미 몇십년간 성공한 사업가이자 셀럽으로 최고 수준의 지명도를 가지고 있었다.[9] 사실 이 시기에는 스윕 결과도 많았다. 린든 존슨의 1964년 486:52, 닉슨의 1972년 17:521, 레이건의 1980년 49:489, 1984년 13:525 등.[10] 실제로 카터는 이미지와는 달리 민주당 내 리버럴들이 만족할만큼 진보적인 대통령은 아니었다. 물론 에너지 분야와 인권 문제에서 많은 노력을 한 것도 사실이지만 다른 많은 부분에서 민주당 내 리버럴들의 기대에 못미쳤고 카터는 민주당이 우세한 의회와 임기내내 으르렁거려야 했다. [11] 대표적인 예시가 포괄적 의료보험 논쟁. 의료보험 확대는 민주당의 오랜 숙원이었고 카터의 대선공약이기도 했지만 막상 집권 후 카터는 인플레이션을 우려해 당초 계획보다 훨씬 후퇴된 안만 실행하려했고 이에 반발한 에드워드 케네디를 필두로 한 리버럴 의원들과 격렬히 대립하다가 아예 좌초되어버렸다. 이후 민주당은 여러차례 의료보험 확대를 시도하였으나 번번히 실패하다가 결국 오바마 정권 들어서야 오바마케어라는 형태로 실현된다. 이 사건은 일반적으로 카터가 의료보험 통과를 막은 것으로 인식되나 카터는 2010년 인터뷰에서 이를 반박하고 자신의 안이 통과되었으면 미국민들이 30년 먼저 포괄적 의료보험 제도를 누렸을거라며 책임을 에드워드 케네디에게로 돌렸다.[12] 부통령 후보인 월터 먼데일의 고향이다.[13] 그리고 현재 각 주들의 정치 상황이 유지된다면 앞으로 다시 나올 일은 희박하다. 사실 이 당시 남부가 카터 편을 든 것은 공화당의 남부 전략과 민주당의 진보화로 양당의 텃밭이 바뀌어가는 와중에 워터게이트의 충격+남부 출신인 카터+포드의 공산권에 대한 미적지근한 태도 등등이 겹쳐서 일어난 일종의 회광반조(?)라고 할 수 있다.[14] 그리고 민주당이 이후 대선 때 조지아 주에서 다시 승리를 거둔 건 남부 아칸소 주 주지사인 클린턴이 승리한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뿐이다. 특히 2020년에는 개표 초중반까지는 도널드 트럼프 우세였다가 막판에 조 바이든이 역전하였다.[15] 심지어 하원의 경우 카터 임기 초반기인 1977~1979년간은 아예 민주당이 개헌선을 차지하고 있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의 후유증.[16] 지미 카터가 경선에서 승리하자 경선에 불복하여 탈당 후 공화당 탈당파인 존 B. 앤더슨의 부통령으로써 대선에 출마하게 된다.[17] 20세기 미국 대통령들중 유일하게 4년만에 정권교체 당하였다. 엄밀히는 윌리엄 태프트, 허버트 후버, 조지 H. W. 부시도 재선 실패 단임 대통령이었지만, 공화당이 12년 이상 집권한 후의 재선 실패였다. 19세기에는 흔한 편이었고, 21세기에는 도널드 트럼프가 있다.[18] 당시 김영삼 한국 대통령은 북한 체제의 동요를 전쟁 가능성으로 보고 강경대응하려 했지만, 당시 영국 유학중이던 김대중은 유화적 대응 및 비밀 회담을 제의했다.[19] 쿠바의 공산혁명가였던 피델 카스트로도 김일성과 비슷하게 지미 카터를 만난 지 얼마 안되어 사망했기 때문에 지미 카터에게는 '독재자의 사신' 타이틀을 붙여 언급되기도 한다.[20] 대한민국 연예계에서 노익장의 전설로 알려진 인물이자 2022년 6월 95세로 타계하기 전까지도 현역으로 활동했던 송해보다도 3살이 더 많고, 사망 당시 나이보다는 무려 4살이나 많다!!! 하지만 필립 공의 사망 당시 나이보다는 1살 적다.[21] 그런데 영국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왕대비를 알현했을 때 그들에게 입술 키스를 하는 결례를 범했다는 얘기가 있다.[22] 최장수 부통령은 존 낸스 가너.[23] 역대 최장수 영부인은 해리 S. 트루먼의 부인 베스 트루먼이다(향년 97세).[24] 2018년 노벨생리학·의학상의 주제였다.[25] 상표명 Keytruda, Pembrolizumab. PD-1 저해제[26] Magnetic Resonance Angiography. MRI를 통해 뇌 혈관만 보는 검사다.[27] 당장 카터보다 더 젊은 사람들도 사망할 확률이 높은 암이다.[28] 카터와 아버지 부시 둘다 1924년 동갑내기이며, 둘다 재선에 실패했다.[29] 그러나 아버지 부시는 2018년에 사망했다.[30] 다만 이 사진에는 휠체어를 탄 모습으로 등장했는데, 나이가 나이인 만큼 거동은 어려운 모양이다.[31] 재발한 것으로 보인다.[32] 2015년 본인을 완치시킨 신약이 듣지 않은 것인지, 본인이 질병을 달고 사는 삶에 지친것인 지는 불명. 1924년생이므로 올해 100세로 매우 고령이고, 완치가 가능하다 해도 고통스런 투병 생활을 또 거쳐야 하는데다 이를 버텨낼 체력이나 기력 문제도 있기 때문이다.[33] 지미 카터가 워낙 장수하고, 비교적 장수하는 사람이 많은 여자라서 묻혀서 그렇지 로잘린 여사도 96세로 장수하였다.[34] 기존에는 존 낸스 가너가 최장수 기록을 지니고 있었다.[35] 애틀랜타 지미 카터 도서관에서 열리는 행사인데 예산 처리 지연에 따른 '미국 연방정부 셧다운' 가능성이 있어서 하루 앞당겨 진행되었다.[36] 심지어 세는 나이로는 100세이다.[37] 은 고령일수록 발병 및 전이 속도가 느린 경향이 있다.[38] 결혼생활만 따지면 77년이지만, 둘은 같은 마을에서 자랐고, 지미 카터는 로잘린이 생후 며칠 된 아기였을 때 처음 만났으니 실질적으로 거의 인생 전체를 함께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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