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고종, 군밤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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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국
大淸國(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 | Great Qing

파일:청나라 국기.svg
파일:청나라 국새 인영.svg
국기
국새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41px-Republic_of_China_%28orthographic_projection%2C_historical%29.svg.png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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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 1636년
남명 정복 1662년
삼번의 난 1673년 ~ 1681년
동녕 왕국 정복 1683년
네르친스크 조약 체결 1689년
외몽골 복속 1691년
준가르 정벌 1758년
백련교도의 난 1796년 ~ 1804년
제1차 아편전쟁 1840년
태평천국의 난 1850년 ~ 1864년
염군의 난 1851년 ~ 1868년
제2차 아편전쟁 1856년 ~ 1860년
공친왕의 난 1877년
자의원·자정원 개회 1889년
백가쟁명·백문재개 1889년
공화정부 출범 1895년
과거제 혁파 1902년
난징 아주대회 개최 1908년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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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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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약 4억명 (1897년 기준)
민족
만주족, 한족, 몽골족, 회족, 티베트족 등 다수
언어
만주어, 근고한어, 몽골어, 위구르어, 티베트어 등 다수
문자
만주 문자, 한자, 몽골 문자, 아랍 문자, 티베트 문자
종교
유교, 불교, 도교, 이슬람교, 만주 샤머니즘
군대
녹영군, 팔기군 → 정무군(定武軍)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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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입헌군주제, 동군연합, 연방국가, 다당제, 양원제
국가원수
광서제 아이신기오로 자이티얀
정부수반
총통 장지동
역대 총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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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예허나라 힝전[1] ,(1898년 ~ 1900년),
2대 장지동 ,(1900년 ~ 현재),

주요 정당
국민당, 흠정당, 청공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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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연호
동치(同治)(1862년 ~ 1874년)
광서(光緖)(1875년 ~ 현재)
시간대
UTC+5:30 ~ UTC+8:30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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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국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조선1868년 조청수호조규 체결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1868년 청일수호조규 체결

1. 개요
2. 정치
2.1. 행정부
2.1.1. 역대 총통
2.2. 입법부
2.2.1. 정당
2.3. 외교
3. 문화
3.1. 언론
3.2. 교육
4. 경제
4.1. 산업
5. 군사
5.1. 육군
5.2. 해군
6. 인물
7. 개변된 역사



1. 개요[편집]


문피아, 네이버 시리즈, 카카오 페이지, 조아라, 리디에서 연재되고 있는 대체역사소설 고종, 군밤의 왕에 등장하는 청나라를 소개하는 문서.

2. 정치[편집]



2.1. 행정부[편집]


전제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을 추구하고 있으며 현재 공화정부가 행정부 기능을 하고 있다. 공화정부의 수반은 총통이며 총통부는 중난하이에 있다. 서태후는 영대, 장지동은 자동차로 드나들기가 편리한 자광각을 집무실로 사용했다.

2.1.1. 역대 총통[편집]


파일:청나라 국기.svg
대청 총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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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함

이름
임기
정당
비고
취임
퇴임
임시 총통
1
예허나라 힝전
1898년
1900년
국민당
한양 선언
총통
1
장지동
1900년
현재
국민당





2.2. 입법부[편집]


자의원(하원), 자정원(상원)으로 나뉘는 양원제이다. 각 성에는 자치 의회인 자의국이 있다.

2.2.1. 정당[편집]


파일:청나라 국기.svg
청국의 정당
자의원 개원 · 원세개 축출
청공 창당 · 장작림 정계진출
국공합작 · 송교인 독립
장작림 사망 · 오당십육파 시대
양당제 확립
흠정당
??당
대공당
??당
국민당
대공당
국민당
국민당

청공
  • 흠정당
광서제가 의회를 꾸리자 이홍장이 직례와 자신의 고향 안휘성, 그리고 북양군을 지지 기반으로 삼아 창당한 정당이다. 특정한 사상 없이 황제의 정사를 돕는 것을 주된 정강으로 삼았다. 이홍장이 세상을 떠난 이후 장작림 한 사람의 인기에 의존하다가 그가 병사한 후 곧바로 무너졌다.

  • 국민당
광서제가 의회를 꾸리자 서태후가 강남의 지지를 바탕으로 창당한 정당이다. 뜻 있는 젊은 강남의 향신들이 대거 참여하여 흠정당에 비해 평균 연령이 낮다. 덕명이 추진한 급진적인 토지개혁 탓에 목이 달아난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서 화북 지역의 지주들이 강한 반감을 품고 있다. 중민(重民)·교민(敎民)·부민(富民)의 삼민주의를 기반으로 내세우고 있으며, 국공합작으로 인한 내부갈등 끝에 송교인이 자기 계파를 데리고 분당했다. 오당십육파 시기를 거치며 모택동 주석 중심 하에 군소정당을 합당하였다.

  • 청공(淸共)
1898년 발족한 공산당. 장작림을 견제하기 위해 배반과 헙력이 반복된 파란만장한 국공합작 연정을 반복했다.

  • 대공당(大公黨)
손덕명의 국공합작에 불만을 품은 송교인이 연안 도회의 신흥 공업지역을 근간으로 세운 정당. 오당십육파 시기 이후 국민당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부상했다.

2.3. 외교[편집]



2.3.1. 아시아[편집]


  • 청-조선 관계
귀남 즉위 초기에는 조선은 번국이며 청이 양무운동에 집중하는 동안 열강의 시선이나 끌어주면 그만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조선이 탐욕스러운 프랑스와 청보다도 더 유리한 조약을 체결한데 이어 조청수호조규를 통해 명목상으로나마 자주국 지위까지 확보하자 공친왕 등 견식 있는 일부 조정의 대신들이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조선을 다시 보게 됐고, 광둥성과 광시성에서 경상도까지 이어지는 철도를 놓는 대사업을 함께 추진하게 되면서 두 나라 사이가 보다 가까워졌다.
광서제가 즉위한 이후로는 개혁을 꿈꾸는 강남 향신들 사이에서 언제나 조선을 본받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나올 정도로 조선에 대한 여론이 우호적이다. 청과 열강 사이에서 갈등이 생겼을 때 조선이 언제나 의리를 지켰기 때문에 조선을 경계하는 이홍장조차 조선을 열강보다야 믿을 수 있는 나라라고 생각한다.
그 이후로는 두 나라가 좌우 막론하고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 고종대왕 탄신 일백 주년 행사에 모택동과 장개석이 경쟁하듯 축전을 보냈고, 조선은 청이 세계에서 목소리 내게 해 주는 밑바탕인 아주연합이 제대로 돌아가게끔 하는 가장 중요한 톱니바퀴이기 때문에 북경 정계에서는 내정이든 외교든 그 첫머리는 조선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라는 격언이 존재할 정도이다.

  • 청-일본 관계

2.3.2. 유럽[편집]


  • 청-러시아 관계

  • 청-영국 관계

2.3.3. 아메리카[편집]



3. 문화[편집]



3.1. 언론[편집]


  • 자림서보
상하이 조계지와 항만의 사무 관련 내용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신문. 실제로 존재했던 신문이다.

  • 만주의 소리
동삼성의 지방신문. 만주 글로 된 신문이다.

3.2. 교육[편집]


  • 북양학당
원 역사 북양수사학당. 작중에서는 이홍장의 군벌화가 훨씬 빨리 이루어지면서 북양군 명칭이 일찍 등장하였기에 '수사'가 빠졌다. 현재 교장은 원 역사에서 베이징 대학 초대 교장을 역임했던 엄복이다.

  • 봉천대학교
공친왕이 설립한 공립 대학교. 에른스트 오페르트의 동생 구스타프가 석좌교수로 있다.

4. 경제[편집]


1902년 기준으로 중원이 워낙 광대하여 대략적으로 추산한 정도지만, 총 소출이 영국 본토를 조금 상회하고 독일 제국과 비등한 수준이다.

2013년 기준으로 국내총생산이 천하제일을 탈환한지 오래다.

4.1. 산업[편집]


  • 농업
1912년 기준으로 정세도 평온하고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괜찮은 품질의 강철 농기구가 있어 동삼성 제외한 중원의 곳간만 헐어도 유럽 전체 인구 한 해는 족히 먹일 수 있다.

5. 군사[편집]


원 역사대로 태평천국의 난을 거치면서 회군과 상군이 팔기군과 녹영군을 밀어내고 사실상 청의 정규군 지위를 차지했다. 공친왕의 난 이후 서태후를 압박하여 정권을 장악한 이홍장이 회군을 기반으로 하여 신건육군, 즉 북양군(정식명칭은 정무군)을 육성하였고 이들이 청의 중앙군으로 자리잡았다. 그런데 광서제의 토지개혁에 반발하여 봉기한 차히르성의 몽골 왕공들을 제압하고 적잖은 군공을 세운 것으로 계기로 스스로의 힘에 취해 강남에 있는 조선의 자산을 압류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광서제를 자금성에 유폐하는 대형 사고를 치고 만다. 하지만 일찍이 징병제를 실시한 조선군의 동원력을 우습게 본 결과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60만 대군과 맞닥뜨리게 되었고 시의적절한 광서제의 성단으로 결국 그 권세를 잃었다.

이후 서둘러 귀국한 이홍장이 저의 회군이 범한 잘못은 스스로 고치겠다며 직접 북양삼걸 등 문제 일으킨 자들을 산산히 쪼갠 다음 남양군과 마찬가지로 병력을 흩어, 각 성에 하나씩 신군으로 이루어진 진을 두고, 각 진은 스스로 병력을 초모하고 군자를 모아 운영하되 오직 그 군령만은 하나로 모았다. 그리고 정무군의 빈자리를 능력 있는 다른 성 젊은이들로 채워넣어 사사로운 연분으로 파벌 생기는 일을 막았다. 그리하여 정예한 군사가 경조와 각 성에 구비되고 중원의 방비가 함풍 연간의 국난, 즉 제2차 아편전쟁 때와 비하면 천양지차가 되었다. 이에 따라 당당히 아편 팔던 이화양행이 자성한다면서 상해 일대에 아편 중독자를 위한 의원을 세우고, 아편 판매는 최대한 신중히 하겠노라 선언했다.

5.1. 육군[편집]





5.2. 해군[편집]


북양, 남양, 복건, 광동 4개의 함대로 두고 있다. 이 4개의 함대 중에서 이홍장의 북양수사가 가장 강력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 다음이 동철 최대 주주 자리를 내려놓은 대가로 적지 않은 군함과 함포를 얻은 서태후의 후원에 힘입어 전력을 확충한 남양수사이다. 공화정부가 출범한 이후 남·북양 및 여타 성의 함대 대부분을 합하여 '대양수사'를 꾸리고 살진빙을 초대 대양제독으로 임명했다. 그런데 살진빙이 저의 세력 그러모으기 위해 새로 거함을 들여올 힘도 뜻도 없어 전력 확충이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 태안(泰安)
북양수사가 보유한 초계함. 복건선정국에서 건조된 19번째 군함으로 배수량은 1258톤이다. 이홍장이 공친왕의 난에 앞서 조선을 방문했을 때 사용했다.

전노급 전함. 북양수사가 보유했던 최대의 전함이었지만, 도입한지 이십 년 만에 흐름에 뒤쳐진 골동품으로 전락했다.

  • 강원(疆遠)
대양수사가 보유한 최신형 순양함. 원 역사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 위원(威遠)
대양수사가 보유한 최신형 순양함. 원 역사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 제우(制宇)
전노급 전함. 대양수사가 보유한 영국 기준으로 '전함'인 단 두 대뿐인 거함 중 하나이다. 가공의 전함으로 원 역사의 후지급 전함과 동급함이다.

6. 인물[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종, 군밤의 왕/등장인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개변된 역사[편집]


  • 조청 철도사업
월남 문제가 끝난 뒤 서태후의 자기 정치로 조선 내에서 반청 분위기가 고조됨에 따라 어떻게든 유혈 사태를 피하고 싶었던 귀남이 조청 양국의 우호협력관계를 증진하고자 '선의'로 동삼성 철도 공동부설을 제안하였다. 그런데 이런 월척을 내버려둘 수 없었던 이홍장이 판에 뛰어들면서 단순히 만주에 공동으로 철선과 전신을 깔자는 정도였던 제의가 양광(兩廣)[1]에서 경상도까지 철도를 놓는 넉넉잡아 50년간 추진할 일대 대사업으로 확장됐다.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공상의 영역에 속한다고 여기던 시절이니 당초 '만주 철도사업' 입찰에 뛰어들었던 영프독 삼국의 철도회사들이 난색을 표했으나, 사업의 타당성은 떨어져도 장기적으로 수익성이 천장을 뚫고 치솟을 것이 너무나 명백하므로 결국 청과 조선 양국에 제철소 건설, 기술학교 설립, 설비 국산화 지원 등 대규모 기술이전을 감수하고 공사에 착수했다. 참고로 조선측 제철소는 해주 인근에 짓게 된다. 해주 인근 재령군과 은율군 일대의 철광을 이용하려는 듯. 작중에서 장지동이 30년 정도면 양광에서 경상도까지 노선이 완성될 거라고 말하는 걸 보면 순탄하게 진행하고 있는 듯하다.

  • 서태후의 동아철도회사 지분 확보
서태후가 양이들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다는 장지동의 말에 낚여 원명원 증건 예산을 빼돌리고 비장해 두던 자신의 재보들까지 적잖이 헐어내어 청의 양광에서 조선 경상도에 이르는 철도 사업을 책임질 '동아철도회사' 일명 '동철'의 최대주주가 됐다. 아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초거대 공사에 경악했던 서양 투자자들은 뒤이어 서양식 주식 제도를 이해하고 절반 이상 투자하면 동철 공사를 장악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서태후가 진짜로 과반액을 투자하자 그 재력에 경악하게 되었다. 이후 정권을 장악한 이홍장이 북양군을 육성하기 위해 황실 지분 일부를 처분해 서태후가 여전히 최대주주는 맞지만 과반선이 붕괴했다.

심복 장문상에게 공격 당해 중태에 빠진 것은 원 역사와 같지만 본작에서는 서양 의사들의 발빠른 응급처치 덕분에 마신이가 죽지 않았고 다리를 저는 정도의 후유증을 가진 채로 끝나게 되었다. 참고로 이러한 것 때문에 청나라에서 조선으로 양의학 유학을 오는 사람도 몇 있다고 한다.

새로운 왕이 즉위함과 동시에 빠르게 문명국으로 발전하는 조선을 보고 자극을 받은 공친왕이 반란을 일으켜 북경을 점령했지만, 기관총 등 선진 무기로 무장한 관군의 격렬한 저항 때문에 가장 중요한 동치제의 신병을 확보하지 못해 거사가 사실상 무위로 돌아갔다. 그때 귀남이 무탈하게 동삼성을 지키고 일굴 이가 있으면 좋겠다며 이 기회에 딴집 살림 차려 나가는 것이 어떻냐고 제안하였고, 이홍장이 서태후를 견제하고자 이를 받아들여 얄팍한 수[2]로 모든 잘못을 이홍조를 비롯한 청류파에게 뒤집어씌워 숙청하고 공친왕을 신설한 동삼성총독에 제수했다. 비록 당초의 바람대로 주공은 되지 못하였으나 공친왕은 이에 실망하지 않고 청국이 끝내 고꾸라져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을 때 만인들이 살아갈 터전을 미리 닦는 대업이라며 동삼성 개발에 열중하고 있다. 추워서 농사가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서양 농법을 도입하고 묵묵히 땅 가는 조선인과 한인을 받아들여 소출이 날로 증가하고 있으며 뜻있는 만인 젊은이들이 넘어오고 있다. 만주에 많은 철광과 석탄을 이용해 역사대로 만주에서 중공업을 발전시킬 계획도 있으며, 생각 외로 잘 돌아가서 아예 독립해버릴까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든다고. 이에 더하여 만주어를 정비하여 동서고금의 명저들을 만주어로 옮기고 동삼성에 만주어를 보급하고 있다.

  • 서태후의 조선파천
이홍장이 실권을 잡고 난 후 한인과 만주인을 가리지 않고 능력주의 채용 정책을 펴서 만주인 사이에 불만이 높아진 걸 본 서태후가 이들을 이끌며 서양 나라 사이의 다툼을 이용해 정권을 되찾기 위해 러시아 교회로 어린 광서제를 데리고 피신한다. 이를 옆에서 본 조선, 주로 김옥균이 중재에 나서 친러시아파 만주인으로 구성된 새 정권을 세우고, 영국을 달래기 위해 이홍장에게서는 실권을 빼앗되 군권은 남겨두고, 서태후는 조선으로 잠시 피해 있게 된다.

원 역사와 거의 동일한 조건으로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청국 내부의 정치변동(그리고 이것을 자신의 치적으로 포장하려는 이그나티예프)과 맞물리면서 러시아의 인식 상으로 훨씬 자신에게 호의적인 조건으로 체결되게 되었다.

조선의 개입, 흑기군의 활약, 군부를 불신하는 프랑스 내각의 변심 등 여러가지 요소가 겹쳐 청불 양국이 정면으로 충돌하지 않았다.

서태후가 실각하여 조선으로 떠나게 되자 이홍장이 이화원 재건에 들어갈 돈을 북양군 육성에 투입했다.

  • 강남 만인소 운동
강남 향신들 사이에서 근대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조선처럼 의회를 설치하여 천하의 공의를 모으고 부세의 쓰임을 놓고 가부를 결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형성되고 있었는데 강유위가 '천하의 흥망에 필부도 책임이 있다.'는 '조선변정고'의 마지막 문장이 문제가 되어 투옥당했다. 이에 역시 만인 조정을 믿을 수 없다는 반감이 확산되었으나 졸지에 흥한 운동의 구심점이 된 유영복이 무력 투쟁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고수하여 강남 관광중이었던[3] 김병국의 조언을 받아 강유위 신원, 의회 설치를 주장하는 만인소 운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병국은 양가 일대의 서생이 결코 일만 명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다. 소주만인소, 항주만인소, 소흥만인소, 통주만인소를 시작으로 강소성과 절강성을 넘어 안휘, 호북, 강서에서도 소가 올라오니 만인소가 아니라 수백만인소에 가까웠고 이러한 향신들의 열정이 광서제를 각성시켰다.

  • 의회 설치
이론 무장을 마친 광서제가 이홍장의 주장을 친히 논파하고 원 역사에서 흠정 헌법 대강 선포와 동시에 이루어진 자의원(하원), 자정원(상원) 설치를 앞당겼다.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앙리 뒤낭이 국제 모금 활동을 벌여 청에 적잖은 지원금을 전달하였다.

  • 자의국 설치
각 성에 지방 의회라고 할 수 있는 자의국을 설치하였다.

  • 남양군 강화
서태후가 가지고 있던 동철의 지분 절반을 독일에 넘기고 함선과 무기를 받아와 장지동이 이끄는 남양해군에게 넘겨주면서 북경 정계에 복귀하였고 그로 인해 북양군의 무력 독점이 깨어졌다.

  • 백가쟁명 백문제개
의회 설치를 계기로 한족과 만족의 갈등이 본격화될 것이라 내다본 프랑스-러시아 동맹이 중국 진출의 야욕을 드러내자 청이 계속 유지되어야 중공의 발흥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귀남이 시무책을 올렸고 광서제가 이를 받아들여 백가쟁명 하듯 만백성이 하등의 꺼림 없이 나라에 도움 될 방도를 진언케 하겠다고 포고하였고 거기에 더불어 청이 한 나라에만 마음을 주면 다툼이 일어나니 백문제개, 즉 시장 전면 개방을 선포했다. 식민지 경쟁의 후발대라고 할 수 있는 독일과 미국은 당연히 이를 쌍수를 들고 환영했고 영국은 시장을 독점하고 있던 터라 영 마뜩찮았지만 유럽 대륙 전체와 맞서지 않기 위해서는 독일에게 조금은 양보할 필요가 있어 부득이하게 이 문호개방 정책을 찬동했다.

  • 공자개제고 조기 출간
요순의 성세란 실제 있던 것이 아니라 만세사표 공자가 탁고하여 당대와 후대에 널리 가르침을 펴기 위해 만들어낸 이상이라 주장한 강유위의 저서 공자개제고가 동아시아 유학 만방대회를 맞아 원 역사보다 8년 일찍 출간되었다.

  • 광서제의 국혼
서태후의 조카딸 예허나라 정분(효정경황후)이 아니라 원 역사에서 광서제의 총애를 받았던 후궁 각순황귀비 타타라씨가 황후가 되었다.

  • 국민당과 흠정당
조선에서 지내며 천자만을 쥐고 있으려는 것보다 백성의 지지를 받는 것이 권세 잡기에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서태후가 의회 설치를 지지하고 유영복과 강유위 등 혈기 넘치는 서생들을 영입하여 국민당을 차렸다. 놀랍게도 서태후가 직접 정한 이름이다. 그리고 이홍장이 국민당에 대항하여 흠정당을 꾸렸다.

원세개가 자의원 집회일에 의화단을 동원하여 국민당 의원들을 습격할 생각이었으나 때마침 북경에 체류하고 있었던 전봉준이 김가진의 부탁을 받고 이들이 "땅을 달라! 일을 달라!"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요구를 하도록 유도하여 북양군의 뜻과 달리 오히려 서태후가 주도하는 개혁 여론에 힘이 실렸다. 그리고 저들도 모르는 사이 저들 비호해주던 북양대신의 등을 찔러서 후원자가 사라진 의화단은 조선의 소개로 먹고 살 길을 찾아 트란스발 공화국으로 향했다. 반영감정으로 똘똘 뭉친 의화단은 역시나 영국이라면 치를 떠는 아프리카너들과 죽이 맞아 트란스발 공화국에 쉬이 정착하였고 비슷한 처지의 흑인들에게 권법을 전파하였다.

상술한 의화단 운동으로 유민들이 대거 해외로 나가 금단도의 난으로 차하르부의 몽골인들이 대거 학살당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로인해 몽골인들의 민족의식도 원 역사에 비해 약한 편이다.

조선과 청의 학자들이 성현의 발자취를 찾는다고 중국 곳곳을 쑤시고 다니는 중에, 원 역사보다 6년 정도 일찍 왕의영이 용골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때마침 기자의 흔적을 찾느라 눈이 벌개진 조선 학자들[4]이 그것을 보고 혹시 고대 갑골문이 아니냐고 추측하여, 역사보다 빠르게 갑골문의 출처를 추적하고 은허를 발굴하게 되었다. 원 역사에서 왕의영은 1900년 의화단 운동의 여파로 서양 군대가 중국에 쳐들어오자 절망에 빠져 자살했고 중화민국 시기가 되어서야 은허 발굴이 시작되지만, 작중에서는 의화단 사건이 훨씬 빠르게, 소규모로 터져 유야무야된 데다 원 역사보다 훨씬 빠르게 은허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결국 직접 은허를 발견하는 영예를 누렸다. 한편 돈황에서 막고굴도 발굴되었는데 중원 사람들이 관심이 없어 중원에선 묻혔다. 그 발굴에 형 에른스트 오페르트에게 떠밀려 참가한 동양학자 구스타프 오페르트에게 김옥균은 출토한 유물을 조선이 사들이겠다고 했지만 구스타프는 공친왕의 선양에 새로 지을 대학교의 동양학 석좌교수 자리와 위약금 지불이라는 조건을 받아들여 막고굴의 유물들은 불교를 숭앙하는 만주에 남게 되었다.

자의원에서 국민당 영수 노릇을 하던 서태후가 독살을 당할 뻔한 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이홍장은 자신 밑에 있던 원세개가 수를 썼든 서태후에 불만을 품던 국민당의 청년들이 일을 내든 어느 쪽이든 간에, 그래도 서태후가 만인이니 자의원에서 나온 정책에 불만을 품었더라도 크게 반발하지 않았던 몽고와 토번의 왕공들이 경각심을 가져 대청이 흔들리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하지만 몇 년간 서태후를 보필한 김옥균이 보기에는 서태후의 자작극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고 실제로 서태후가 국민당 내에서 자신에게 불편한 기색을 보이자 이를 걸러내고자 만든 자작극이었다.

서태후의 독살 미수 자작극이 조선에 의해 광서제에게 들켜 약점을 잡히게 되어 서태후가 이끄는 국민당도 황제의 뜻을 따르게 되고 이홍장 또한 하직한다. 이홍장의 후계로 원세개가 북양대신 자리에 올랐으며 무근전에서 손덕명, 양계초, 담사동 등이 변법하여 자의원에서 통과시키고 있고 이에 불만을 느낀 세력들은 원세개가 총칼로 다스리고 있다. 서양 언론에서는 이를 친위 쿠데타로 해석했다.

  • 남양군 해체 및 성 방위군(?) 창설
광서제의 개혁에 반발하는 몽골, 티베트의 왕공들이 남양대신 장지동에 접근하자, 이를 우려한 중앙 조정은 남양군을 해체하여 북양대신 원세개의 신군으로 흡수하되 운영을 각 성의 자의국에서 맡게 하였다. 위험한 조치지만 강남의 반발을 최소화하려면 어쩔 수 없었고, 난이 일어나도 강력한 구 북양군이 능히 제압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위험을 감수하기로 한다.

  • 차하르 반란 진압
청 조정의 변법에 불만을 품은 몽골(차하르)의 왕공족들이 젭춘담바 후툭투 8세의 만류도 뿌리치고 옛 조상들처럼 말에 올라 반란을 일으킨다. 당연하지만 산업혁명의 시대에 먹힐 리가 없어서 기관총 등의 근대적 신무기로 무장한 원세개의 신군에게 순식간에 진압당했다.

북양군 파벌의 남양 병공창 장악을 두고 병공창에 투자지분이 있던 조선과 마찰이 발생하자, 조선의 요구를 수용하면 북양군 파벌이 권력을 잃고 조선이나 일본의 군부처럼 내각의 명령에 복종하는 평범한 군대가 될 것을 우려한 원세개와 휘하 제장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온건파 광서제를 자금성에 사실상 유폐시킨 뒤 병기창 접수를 강행한다. 이에 반발한 조선이 군을 출동시켜 압록강을 넘으면서 조청전쟁이 발발한다.
원세개는 처음엔 '조선군 병력 3만이 압록강을 건넜다'라는 보고를 받고는 이 정도면 쉽게 대응할 수 있다며 자신감을 보였고, 이후의 보고들도 같은 '조선군 병력은 3만'이라는 내용이라서 더욱 안심하였지만, 저 보고가 제각각 다른 부대들을 지칭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경악한다. 한편, 조선군은 총병력 30만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북경으로 향했으며 선두에 최익현과 황현 등 도끼를 든 유생들을 앞세워 천자께 지부상소를 하러 가는 중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결국 원세개와 최익현의 협상이 결렬되자 산해관에서 무력충돌이 있었고, 때맞춰 광서제가 직접 산해관에 행차해서 원세개를 파면하고 천조질서를 폐기했으며 황명은 정부의 뜻을 따르겠다며 임시 공화정을 선포했다. 그리고는 이번에 조선이 쓴 노잣돈과 사상자들에 대한 위로금을 지급하겠다고 한 뒤 조선군 일부를 데리고 북경으로 향했다.

  • 천조질서 붕괴 및 연방제 도입
광서제가 스스로 천조를 내려놓으면서 형식적으로나마 유지되었던 동아시아의 천조질서가 막을 내렸다. 그리고 앞으로의 중국을 의논하는 자리에서 손덕명이 미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의 예를 들며 연방제를 천조의 대안으로 내놓았다. 분구필합 합구필분[5]이라지만 나뉘어질 때도 합쳐질 때도 백성들의 고생이 크니 아예 금간 채로 묶어놓겠다는 이론이다.

  • 변발 폐지령
광서 19년, 보국회가 막 변법을 추진하던 시절에 변발 폐지령이 내려졌다.

  • 과거제 혁파
1902년, 자의원에서 만장일치로 과거제를 혁파했다.

  • 베네수엘라 채무불이행 사태 개입
베네수엘라가 서양 각국에 대한 채무불이행을 선언하고 중국 노동자들의 임금을 체불하자 함대를 보내 서양 나라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교섭을 해보려는 시도를 했다. 결국 미국의 개입으로 청국은 교섭에서는 배제되었지만 오랜만에 국제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 난징 아주대회 개회
청나라 난징에서 제3회 아주대회가 열렸다.

  • 만국연합(유엔) 평화유지이사회 이사국 지위 획득
대전쟁 종전 이후 유럽, 소련, 신대륙을 제외한 '나머지 세계'에 분배된 이사국 자리 중 하나를 차지하였다. 원 역사 안보리 상임이사국과 달리 임기제이지만, 사실상 동아시아 대표국으로 계속 이사국으로 선출될 것으로 보인다.

삼민주의가 민족주의·민권주의·민생주의가 아니라 중민(重民)·교민(敎民)·부민(富民)이 되었다.
[1] 광둥성과 광시성.[2] 자신과 이홍조의 이름이 비슷하다고 우기며 장문상의 자백을 왜곡했다. 발음으로는 전혀 다르겠지만 권력자가 우기면 할 말이 없는 법이다.[3] 류큐 항목 참조.[4] 조선에서 평양의 기자묘를 발굴해보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가면서 기자의 존재성 자체가 의심받고 있었던 시기였다.[5] 分久必合 合久必分. 삼국지연의의 첫 구절로 천하가 분열된 지 오래면 반드시 통일되고, 통일된 지 오래면 반드시 분열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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